계속 변하는 현대철학 용어사전

'포획/정치학/보편사'(from 들뢰즈 사전들)

Nomadia 2019. 7. 5. 13:44

 

포획(capture)

A. 포획은 둘 또는 여럿의 이질적인 계열들로 구성된 항들을 수렴하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이질적인 요소들은 이 요소들을 동일화하지는 않으면서 이를 변환시키는 생성의 블록속에서 함께 취해지는데, 배치는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에 근방역’(zone de voisinage)을 창조한다. [따라서] 포획은 배치의 작용 방식을 규정한다.

 

포획은 (생물학적, 사회적, 지성적) 개별자들이 변이하는 관계들 사이로 들어가 변환되는 그 양태들을 규정한다. 이에 대한 주된 예는 들뢰즈가 프루스트(소돔과 고모라초반부)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말벌과 난초를 연결하는 공생(symbiose)[1]이 있으며, 들뢰즈는 이로부터 생명론의(vitaliste) 창조성에 관한 복잡한 이론을 도출한다. 난초 모양으로 포획된동물 계열(말벌)은 식물 계열에 대하여 재생산 기관의 기능을 보증한다. 우리는 이로부터 세 가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1][역주]마누엘 데란다는 들뢰즈 가타리에게 공생의 주제는 리좀과 연결된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생성/되기의 수단으로서 공생에 큰 비중을 둔다. 공진화는 말벌과 그것이 수분하는 양란의 비평행적 진화에서처럼 잘 알려진 예이다. Deleuze and Guattrai, A Thousand Plateau, p.10. 그러나 좀더 일반적으로 볼 때, ‘리좀으로서의 이질적인 배치에 대한 정의 자체가 공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들뢰즈/가타리가 리좀에 대해 들고 있는 예가 구근이나 덩이줄기 식물, 즉 수목형 뿌리 구조가 없는 식물들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즉각 뿌리나 유근을 가진 식물들은 전적으로 다른 측면에서 리좀 형태적일 수 있다고 덧붙인다. Ibid., p. 6. 이 다른 측면은 이른바 리좀적rhizosphere라 불린 것의 형성을 통해 예시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곧 상이한 종들의 식물 뿌리들과 그것들과 공생적 짝을 이루며 그것들을 지하 양분들의 흐름에 접면시키는 다양한 미생물들로 구성된 지하 먹이그물이다.” 마누엘 데 란다 지음, 이정우, 김영범 옮김,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 그린비, 2010, 208쪽 각주.

 

1. 계사(copule)는 주체의 동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술어 논리(‘이다’)로부터 이질적 연결과 다수적 생성의 논리(‘그리고’)로 넘어간다(D [1977] 1996[2], 16).

[2]Gilles Deleuze (avec Claire Parnet), Dialogues, Flammarion, 1977; 1996.

 

2. 이것은 생물학을 갱신하는 관계 이론을 문제 삼는 것인데, 예술의 이론(유사성)과 해석 이론(예술에 대한 비판)에서도 이와 같다. 즉 동물의 모방에 대한 분석(윅스킬Uexkül, 메를로-퐁티)이 들뢰즈에게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mimesis)와 연관된다. [따라서] 살아 있는 형태들의 발생과 작품의 생산이 동일한 평면 위에 놓인다.

(...)

1.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글을 쓰면서 포획이라는 개념을 실천적인 것으로 만든다. 둘이 함께 글을 쓰면서 그것은 더 이상 사유의 문제가 아니라 다수화의 문제가 된다. 사유하는 새로운 방법은 사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낳는다. 사유의 창조는 더 이상 노에시스적 주체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실천이자 비인격적 배치가 된다. 이 실천은 사회적, 정치적, 생명적 차원들을 조정하고, 사유를 담론적이지 않은 기호들의 체제와 연결시킨다. ‘포획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우리는 의미의 논리로부터 다수성이 이론으로 넘어 간다.

 

2. 포획은 유사성도 모방도 아닌 생성에 대한 이론적 모델을 세운다. 이는 이원론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식”, 사이에-있음, 사이로 지나감, 간주곡”(MP 1980, 339)를 지시한다. 생성은 항상 사이혹은 가운데에서 일어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때의 생성이 여전히 같은 것의 논리에 기입될 다르게-되기가 아니라 사이-되기라는 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동일성으로부터 다른 동일성으로 이행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성 중에 있음의 문제이다. “생성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생산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방하거나 우리 자신으로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양자택일이다. 실재적인 것은 생성 자체, 생성의 블록이다”(MP 1980, 291). 그러므로 포획이란 항들 외부에 있는 관계가 항들을 생산하는 환경에 의한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개념이다.

 

3. 포획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성의 블록이라고 이름 붙인 관계에 의하여 항들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실재적인 것은 생성 그 자체, 생성의 블록이다. (...) 생성은 자기 자신과 구분되는 주체를 따로 갖지 않ㅇ르 뿐 아니라 (...) 항을 갖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생성의 항은 이 생성과 공존하고 함께 블록을 만드는 다른 생성 속에서 그 생성의 주체로 취해짐으로써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 말벌과 난초를 취하는 생성의 블록이 있다. (...) ”(MP 1980, 291).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수적 배치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근방역을 생산하고, 두 항에 공현존하는 힘들의 주조를 생산하며, 힘들의 상호작용을 새로운 구성으로서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정의된 포획은 이질적인 것들을 연결하는 어떠어떠한 구성 양태가 된다. 포획은 제1탈영토화의 정리로서 여기에서 항들 각각은 유사성 없는 이중의 생성 과정에 의해 다른 항 위에서 재영토화한다’(MP 1980, 214).

 

(...)

5. 포획은 인류의 역사를 배치하는 실재적인 과정들을 설명하고, 동시에 이 과정들을 기술하는 사유의 양태들을 설명한다. 국가의 형성이라는 정치적 문제 또는 사회들을 변형시킨 경제적, 사회적, 기술적 배치들에 관한 문제이든 간에, 포획은 인문학에 대하여 결정적인 개념이 된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의 기획이 가지고 있는 엄격함과 독창성을 가능하는 기준이다. 동물 생태학으로부터 빌려온 하나의 예가 정치철학만큼이나 예술철학을 갱신한다. 생기론이 들뢰즈의 철학을 조직한다고 해도, 생기론 역시 특수한 목적과 문제에 따라 정치적이고 예술적인 영역에서 스스로 규정된다.

- Arnaud Villani, Robert Sasso ed. Le Vocabulaire de Gilles Deleuze, Vrin, 2003, 48-54. (신지영 옮김, 들뢰즈 개념어 사전, 갈무리, 2012, 433-41 참조, 번역 수정/내용 편집보충)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해 사용되는 포획이라는 개념은 합리성의 두 가지 문제를 다룬다. 첫째 정치적 삶이라는 보편사 안에서 국가, 전쟁기계 그리고 자본주의 간의 연결을 파악하는 방법, 둘째 존재자와 그것들의 영토성의 상호작용, 이를테면 되기의 사유를 근거짓는 것과 같은 것에 관한 비표상적 사유를 구성하는 방법. 첫 번째 경우에, 포획은 그것에 의해 국가(또는 원국가Urstaat)가 전쟁 기계를 결속하거나 점령하는 작동방식이며, 이에 따라 국가를 강화하고, 그것의 주권을 확장하기 위해 작동하도록 만들 수 있다. 포획의 장치(apparatus)는 국가 사회체들에 특성화된 기계적 과정을 구성한다. 그것들은 우선적으로 기호들의 어떤 재료들로 파악될 수 있다. 여기에 애꾸눈 황제는 기호들을 묶고 고정하며, 외팔 성직자나 판사에 의해 보충되는데, 이들은 이러한 기호들을 거래, 계약 그리고 법률안에 코드화한다. 포획은 기호의 통제를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포획은 국가의 또 다른 범주적 차원, 즉 도구들의 통제를 수반한다. 포획 개념과 관련된 존재론적이고 방법론적인 주제는 포획과 포획됨 사이에 어떤 유형의 관계를 다루어야 한다. 이를테면 장치들의 특권적 상호관계로서의 전쟁기계의 경우가 그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보편사 개념은 엄격한 인과성이나 연대기적인 장면에 따르는 어떤 설명도 따르지 않는다. 그보다 그것은 파국 이론과 복잡성의 과학으로부터 개념을 이끌어내는데, 이것은 국가란 언제나 거기 존재한다는 헤겔적인 관습을 뒤엎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국가를 어떤 관념이나 개념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잠재적 효과를 부여받은 어떤 문턱으로 여기는데, 심지어 제도들의 복잡성으로서, 그리고 통제 체제로서의 국가가 아직 현행적이지 않을 때조차 그러하다. 포획의 논리는 포획되는 것이 즉각적으로 포획의 행위에 의해 생성되고 전제되는 것처럼 전용되고 생산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포획의 구성적 특성이라는 테제를 강화하기 위해 칼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있어서 핵심 개념들 중 많은 것으로 되돌아 간다. 이를테면 그들은 잉여가치가 노동의 적합성을 야기한다고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비록 그것이 노동으로부터의 어떤 구성적인 탈주를 블록화하거나 다양화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하더라도 말이다.) 포획은 따라서 외부의 투입작용이면서 결정이고 장치들의 외부로서의외부이다. 포획이 본원적 축적이라는 맑스적 개념과 상응하게 된다는 것, 자본의 기능을 준비하는 국가에 의해 부과되는 원초적인 폭력의 한 종류라는 해석은 이런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문제의 사법적 측면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데, 이를테면 국가적 포획은 법적 폭력의 영역에서 정의되는 바, 그것이 항상 포획의 어떤 권리에 관한 긍정과 더불어 포획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기계의 노예화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포획 장치는 국가가 가지는 최초의 제국적 특성과 포화된 전지구적 또는 공리적 자본주의 둘 모두에 적합하고, 더 나아가 부르주아 민족국가와 그것의 훈육적 주체화의 형식에 의해 재현되는 매개적 단계에 상응한다.

 

포획 개념은 또한 어떤 상이한 변화에 일치할 수 있는데, 그것은 내재성의 철학에서 지성의 생태학적 모델들의 특권화와 연결된다. 여기서 강조점은 더 이상 통제에 따라 외부의 착취와 전유에 대해 이루어지지 않으며, 이질적인 계열들 간의 수렴과 배치의 과정, 생성의 블록의 출현, 이를테면 말벌과 서양란과 같은 것 위에 놓여진다. 우리가 여기서 어떤 이중 포획 또는 내적-포획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이것은 어떤 상이한 실체들이 서로 간에 생성의 결합으로 진입하는 변형과정으로서의 어떤 만남을 의미한다. 카프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와 같은 과정이 관계이론의 갱신과 연결되고, 특별히 미메시스의 상태에 대한 재사유와도 관련된다고 말한다. 이는 어떤 공생의 유형으로 재구성된다. 이에 따라 포획이라는 개념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두 가지 대립되지만 서로 뒤얽혀 있는 행위들과 만난다. 둘 모두 관계를 설명하는 지배적인 질료형상적 양태를 대체하는 도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첫번째는 기호의 정치적 통제로 이해되는 것으로, 생성의 공현존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전쟁 기계에 의해 표명되는데, 역사적 연속체로서 어떤 어트랙터(끌개)로부터 국가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때 어트랙터는 제도적이고 시간적인 실재성에 있어서 비국가적 행위자에 대한 잠재적인 침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어떤 공현존과 생성들의 절합으로서, 이질적인 실체들의 배치와 영토들의 구성과 관련된다. 두 가지 모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들의 결합의 긍정이며 관계성(또는 상호행위)의 변형적 성격이다. 이와 같은 것으로서의 포획은 통제로 이해되든 배치로 이해되든 간에, 항상 존재론적으로 구성적인 작동을 하며 결코 일방향적인 인과성의 모델들로 환원될 수 없다.

- Alberto Toscan, ‘CAPTURE’,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39-40


 

포획+정치학

들뢰즈와 가타리는 국가가 잉여가치의 축적이나 사유재산의 출현과 같은 사전 조건들의 결과로 발생하는 장치라는 견해를 거부한다. 대신에 그들은 국가들이 항상 존재했으며 본질적으로 늘 포획의 메카니즘이라고 논증한다. 국가의 최초의 형태들은 농업 공동체들의 포획을 포함하는 바, 그것은 내적 환경의 구성이면서 주권적 권력의 실행이다. 통치자는 유일하고 초월적인 공적 재산 소유자이며, 잉여나 스톡의 주인이고, 광대한 범위의 노동(잉여노동)에 대한 조직가이면서 공적 기능과 관료제의 원천이기도 하다’(D&G 1987: 428). 역사적으로 포획의 가장 중요한 메카니즘은 토지와 그것의 생산물들에 대해, 노동과 화폐에 대해 실행된 것들에 있다. 이것은 맑스가 말한 자본 축적의 근대적 원천으로서의 신성한 삼위일체’, 즉 지대, 이윤 그리고 세금에 상응하지만 다른 형식으로 오랫동안 존속해 온 것이기도 하다. 모든 경우들에서, 우리는 동일한 두 가지 핵심 요소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어떤 비교의 일반공간을 수립하는 것과 전유의 중심을 수립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것들은 국가의 상이한 형식들 안에서 표현되는 추상기계를 정의할 뿐만 아니라 얼굴성(faciality)에 의한 신체적 재현의 포획과 같은 포획의 비국가적 메카니즘 또는 공적 의견의 따른 정치적 이성의 포획도 정의한다.

 

노동의 형식 안에서 인간 행위의 포획이라는 첫 번째 것을 고려해 보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엄격한 의미에서) 노동은 오직 잉여가치라고 불리워지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논증한다(D&G 1987: 490). 토착민이 노동에 동원된다는 널리 퍼진 식민지적 가정과 반대로, 그들은 소위 말하는 원초적 사회는 노동의 부재로 인해 근근히 연명하거나 결핍된 사회가 아니라 반대로 자유로운 행위고 매끈한 공간으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그 사회는 어떤 노동인자가 필요 없었고, 어떤 스톡을 구성할 필요도 없었다’(D&G 1987: 491). 이런 사회들에서, 생산적 행위는 자유로운 행동또는 연속된 변이들 속에서의 행동의 어떤 체제 아래에서 진행된다. 그와 같은 행위는 오직 노동이 되었을 때에만 표준적인 비교기준으로 부과되며, 생산되어지는 어떤 한정된 양의 형식으로 또는 일해야 할 어떤 시간의 형식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세금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 기부하거나 잉여노동을 해야 하는 의무는 그와 같은 비교의 표준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자유로운 행위는 노동으로 번화되는 효과를 가지는 것이다.

 

동일한 두 가지 요소들이 지대의 추출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서 현시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포획장치의 모델 바로 그것이라고 기술한다(D&G 1987: 441).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지대의 추출은 토지의 생산성과 동시적으로 착취되는 상이한 땅뙈기를 비교하거나, 생산성을 연속적으로 착취되는 동일한 몫과 비교하는 것을 전제한다. 생산성의 측정은 비교의 일반적 공간을 제공한다. 그것은 지구 표면의 몫들 사이의 질적으로 상이한 토지들의 측정이다. 이것은 수렵-채집 사회의 영토적 배치는 부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과 잉여노동은, 토지들의 비교와 토지의 전유가 영토의 포획장치인 것과 같이 현행화된 포획장치인 것이다’(D&G 1987: 442).

 

하나의 조건이 더 요구되는데 이것은 지대가 추출되기 위해서다. 즉 생산성의 차이는 지주와 연결되어야 한다(D&G 1987: 441). 다른 말로 해서, 법률적 측면에서, 지대의 추출은 상대적 탈영토화의 과정과 분리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떤 순회하는 영토 안에 배분되는 대신, 땅뙈기가 어떤 공통적인 양적 척도에 따라 사람들 사이에 분배되기 때문이다’(D&G 1987: 441). 대지의 몫의 변경은 소위 원시인들에 의해 전유가능한 것으로 그리고 착취 가능한 원천으로 유전된다. 그러므로 전유의 법률적 중심의 수립이 요청되는 것이다. 중심은 어떤 독점을 수립하는데, 이는 현재 토지가 되어 가는 것, 그리고 소유권이 주장되지 않은 토지의 몫에 대한 소유권을 할당할 권리를 그 자체에 부여하는 것에 대해 이루어진다.

 

이 중심은 법적 주권이며 독점은 의문스러운 영토들에 대한 주권의 주장이다. 이것이 바로 식민지에 대한 근본적인 사법적 문제가 드러나는 방식이다. 그래서 원주민들의 영토성은 토지 소유라는 획일적인 공간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이러한 식민지들에서 획득되는 것, 그리고 통치되는 것은 영국 보통법과 왕의 주권적 권리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사적 권리와 토지에 대한 관심을 창조하고 탈취하는 힘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왕의 땅이란 주권적 영토성의 한계 안에 대지를 뒤덮는 잠재적인 실재 재산의 획일적인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즉 이런 보통법적인 판결들 안에는, 주권의 법률적 부과란 들뢰즈와 가타리가 개념에 부여한 그 정확한 의미에서 포획장치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권의 부과는 토착민 영토의 즉각적인 탈영토화와 그들의 재영토화를 초래하는 바, 이는 주권의 형상으로 중심화된 왕의 토지라는 획일적인 공간으로 재영토화되는 것이다.

- Paul Patton, ‘CAPTURE+POLITICS’,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41-42


 

자본주의+보편사

들뢰즈와 가타리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보편사 개념을 소생시킨다. 하지만 이들은 헤겔보다는 맑스로부터 이를 이끌어 냄으로써 이것은 일종의 역설적보편사가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이 보편사가 회고적이고, 특이하며, 비판적이라는 점이다. 이 역사는 분열자의 전망이 자본주의 하에서 오직 역사의 종말을 향해 갈 수 있다는 점에서 회고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는 역사의 목적을 재현하지 않지만, 우연한 환경의 어떤 우발적인 생산을 재현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체의 특이성을 확증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자본주의와 이전 사회체 간의 몇몇 숨겨진 유사성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서, 맑스가 요강에서 자본주의와 다른 사회체 간의 본질적 차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이전 사회가 감추었던 가치의 원천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자본주의는 보편사에 핵심을 제공하는 바, 자본주의와 더불어 사회는 마침내 자기-비판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근대성은 이러한 보편사의 전망 안에서 핵심적인 전환점을 표현한다. 왜냐하면 어떤 관건적인 발견이 여러 상이한 장들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루터, 아담 스미스 그리고 리카르도, 그리고 좀더 이후의 프로이트의 심리요법은 그런 장들을 만들었다. 핵심적 발견란 가치가 대상들 안에 이어지지 않고, 인간의 행위에 의해 그것들 안에 투사된다는 것으로서, 그 행위가 종교적 헌신이든, 물리적 노동이든 리비도적인 욕망이든 상관 없게 되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전망의 전복 안에서, 대상들은 단지 주체적 가치 부여 행위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세 가지 장들에서, 내적인 것의 발견, 즉 가치 부여 행위의 주체적 본성은 그 행위의 다른 외적 결정들에의 재종속에 의해 수반되어진다. 루터의 경우 주체적 신앙은 카톨릭 교회에 대한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인데,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권위로의 재종속이었다. 스미스와 리카르도에 있어서, 임금노동은 봉건적 의무로부터의 자유인데, 이는 사적 자본의 축적으로 재종속을 의미하였다. 프로이트에게 다질적(polymorphous) 리비도의 자유로운 형식적 욕망은 사적으로 된 핵가족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안에서 이성애의 재생산에 대한 재종속이었다. 이 마지막 외적 결정인자들로부터 인간 행위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세계사적 비판의 임무이다. 맑스는 임금노동을 사적 자본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정치경제학 비판을 제공한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허무주의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종교와 도덕에 대한 비판을 제공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비도를 사적인 핵가족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정신분석 비판을 시도한다.

 

만약 자본주의가 보편사를 만든다면,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이 다양한 차이들을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적 시장은 차이-엔진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맑스에 의하면, 핵심적인 인간의 보편성은 생산이다. 인간이라는 종적 존재는 자연이 제공하는 것을 단순히 소비하기 보다 그 자신의 삶의 도구들을 생산하는 그것의 지속적인 성장 능력과 관련하여 정의된다. 한편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핵심적인 보편성은 단순히 생산이 아니라(이것은 이들이 앙띠외디푸스에서 그 의미를 부여한 바, 매우 광범위한 의미에서조차 그러하다), 코드화와 재현으로부터 특별히 자유로운 차이의 생산이라는 것이다. 시장은 점진적으로 차이화된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를 노동의 분할을 따라 생산의 사회화를 확장시킴으로써 조성한다. 이는 심지어 자본의 차이-엔진이 보편사를 충분히 해방하는데 실패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능한 보편성을 만든다. 즉 역사적 의제 위에 보편성을 던져 놓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장이 그 차이의 생산에 있어서 보편사를 위한 잠재성을 개방하는 반면, 그것은 차이를 다양화하고 보편사 안에 계승된 자유를 풀어놓는 시장으로부터 자본의 제거이기도 하다.

- Eugene Holland, ‘CAPITALISM + UNIVERSAL HISTORY’,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3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