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변하는 현대철학 용어사전

'삶, 생명/(미)분화/강도'(from 들뢰즈 사전들)

Nomadia 2019. 7. 3. 14:39

 

우리는 존재의 이원론 안에서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고 또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우리는 언제나 신체의 건강과 진화에 관한 창조적 관점들을 탐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러한 과학적이지 않으며 신비주의적이거나 종교적인 편견들을 전환하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록 그가 가끔 생기론자처럼 글을 쓰고 있다 할지라도, 그의 /생명에 대한 이해는 반직관주의적이다. 왜냐하면 베르그송에 의해 잠재적 총체성(virtual totality) 개념(수축과 이완)을 구체화하고, 여기에 니체의 ’(역능) 뿐만 아니라 강도의 개념을 부가함으로써, 들뢰즈는 베르그송에게 제기되던 신비주의의 안개를 확실히 걷어내 버렸다.

 

그의 저작을 통틀어, 들뢰즈는 유기체적인 것과 비유기체적인 것 간의 대립(이 대립에 따르면 그가 생기론자라면, 그는 분명 유물론자는 아닐 것이다)을 문제화함으로써 물질과 시간 사이의 관계를 음미하게 된다. 사실상 그는 삶/생명 개념을 그의 수동적 종합이라는 생각에 기반하여 발전시키면서, 이 개념을 어떤 해결불가능한 기원과 권력의 대상으로 삼는 저항이라는 관념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한다. 이에 따르면 삶/생명이란 외부의 힘과 교전하는 장소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들뢰즈는 니체를 경유하여 /생명을 지식과 재현에 의해 확실히 일그러진 어떤 것으로 특성화하게 된다. 또한 그는 가타리와 더불어 강도의 역할 뿐 아니라 비인격적인 것과 연속되는 것에 관한 블랑쇼적인 개념을 강조한다. 따라서 삶/생명은 개별자들에 의해 소유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1.a. 베르그송에서, ‘생명의 도약은 어떤 창조적인 전개와 기계적이거나 목적론적인 이론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진화를 함축하고 있으며, 다양성과 복잡성을 지향한다.

 

생명의 역할은 몇몇 비결정성을 물질 안으로 삽입해 넣는 것이다. 비결정성, 다시 말해 예상불가능성은 형상들(forms)로서, 그 진화의 과정 안에서 창조되는 것이다. [...] 생명의 충동이 가진 주요한 에너지는 이러한 종류의 창조적인 기제들 안에서 소진되어 왔다 [...] [Bergson, 1911, p. 126]

 

b. 들뢰즈의 베르그송 독해에서, 잠재적인 것의 현행화, 또는 지속의 물질 안으로의 인입, 분화(differenciation, 차이화)

 

모든 것은 마치 생명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계열들 속에서 분화의 운동 그 자체와 뒤섞여 있는 것처럼 일어난다. [...] 정확히 말해 지속은 이 운동 속에서 나타날 때 생명이라고 불린다. 분화가 왜 현행화인가? 그것은 분화가 어떤 통일성, 즉 잠재적, 원초적 총체성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총체성은 분화의 선들을 따라 해소된다[B 94-5].

 

c. 들뢰즈의 시간에 대한 설명 그리고 베르그송 독해, 물질에 대한 독해, 이것은 시간 안에서 형상으로 응축되거나, 첫번째 수동적 종합으로 수렴된다(인간의 경우, 이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종합에 의해 함축되어진다). 물질은 즉각적으로 신체를 어떤 문제로서의 그것의 장소(milieu)에 관련시키는데, 이때 형상은 그 문제에 대한 응답이다.

 

생명의 각 계열은 물질의 어떤 유형과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것은 외부 환경일 뿐만 아니라 그것과 관련해서 생명체는 하나의 신체로, 하나의 형식으로 꾸며내진다. 생명체가 물질과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문제 제기로, 문제 해결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컨대 눈의 성립은 무엇보다도 빛에 관련해서 제기된 문제의 해결이다[B 103].

 

시간의 첫 번째 종합에는 살아 있는 현재(삶의 긴급성) 안에서 나타나는 바 그대로의 첫 번째 물음-문제 복합체가 상응한다. 이 살아 있는 현재는, 그리고 이와 더불어 모든 유기체적이고 심리적인 삶은 습관에 의존한다[DR 99, 78].

 

2.a. 들뢰즈의 니체와 푸코에 대한 두 독해에서, 권력에 대한, 이성과 죽음과 지배하려는 힘들과 예속 등등에 대한 하나의 비유기체적 저항의 역능을 사유 또는 비판으로 표현한다.

 

권력이 삶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을 때 삶은 권력에 대한 저항이 된다. [...] 저항은 삶의 역능, 생명의 힘이 된다. 이것은 종이나 환경 또는 특정한 다이어그램의 한계 안에 제한되지 않는다. 이 힘은 삶의 어떤 이념 바깥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아닌가? []?[F 77, 92-3]

 

b. 들뢰즈의 블랑쇼와 비샤 독해에 따르면, 어떤 힘 또는 선(line)은 어떤 절대적 한계로서 죽음을 대하기보다 지속적으로 죽음에 맞선다. [N, DR, AO, F, NG]

 

c. 들뢰즈의 내재성에 관한 설명에서 비인격적이고 주체의 이미 질적으로 특유한 본성, 즉 핵세이티(haecceity, 이것임).

 

d. 들뢰즈의 예술 분석에서, 탈지층화, 비구조화, 그리고 유기체적 형상(또는 유기체주의)과 구분되는 힘의 활력적 부여에서 이 개념이 나타난다.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가 비유기체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만, 이는 고딕 건축 양식에서의 생명적 선 또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3. 들뢰즈와 가타리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에서, 비인격적인 것 그리고 욕망하는 기계들의 멈추지 않는 역능, 기관없는 신체와 결합됨으로써, 이것은 강도의 여러 수준들에 등장한다(강도 0은 죽음이다). 이것은 역능을 끌어당기거나 추방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B, AO, TP]

-E.B.Y

- Eugene B. Young, Gary Genosko, Janell Watson, The Deleuze & Guattari Dictionary, Bloomsbury, 2013, 179-82 참조.

 


(본문주석 문헌들)

Bergson, Henri. Creative Evolution. Translated by Arthur Mitchell. Henry Holt and Company: New York. 1911.

Deleuze, Gilles. Bergsonism. Translated by Hugh Tomlinson and Barbara Habberjam. Zone Books: New York. 1990.[김재인 옮김, 베르그송주의, 문학과 지성사, 1996.]

Deleuze, Gilles. Difference and Repetition. Translated by Paul Patton.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4;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New York & London. 2004.

Deleuze, Gilles. Foucault. Translated by Seán Hand.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1988;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New York & London. 2006.


 

들뢰즈는 미분화’(微分化, differentiation)분화’(分化, differenciation) 개념을 베르그송주의((D 1988a: 96-8)차이와 반복(D 1994: 208-14)에서 최초로 밝혔다. 이 두 개념의 구분은 그의 차이의 존재론에서 중요한 구성요소를 형성한다. 처음에 들뢰즈는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서의 전체성에 관한 그의 이해를 드러내기 위해 수학 개념인 미분을 가져왔다. 전체성(the Whole) 개념 대신에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과 연결을 생산하는 열린 전체들(open wholes)에 관한 사유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미분화된 것은 강도들과 이질적인 질들이며, 이는 잠재적 실재를 이루는 것이지 현실적인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미분화는 들뢰즈적인 방향에서 오직 잠재적 영역에서만 발생하는 어떤 것이 된다. 이것은 계속해서 나누어지고 결합하며, 미분화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어떤 발산의 지대와 연결될 수 있으며, 그 자체 근본적으로 창조적인 움직임, 또는 흐름이 되는 바, 그것의 모든 일시적인 지속성 안에서 어떤 전체를 조건지우는 것이다.

 

이에 반해 분화된다는 것은 잠재적인 미분화의 이질적인 계열들이다. 베르그송주의에서 들뢰즈는 분화란 잠재성의 현행화라고 지적한다. 현행화는 개념적일수도 있으며 또는 물질적일 수도 있다. 이것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분화된 유기체로서 을 묘사할 때 드러난다(D 1994:211). 이것이 드러내는 문제의식은 들뢰즈가 재현의 철학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차이가 재현의 체계로 전환하지 않고 분화되는가? 다시 말해 만약 분화가 잠재성의 현행화 과정이라면, 어떻게 유사성과 동일성이라는 재현의 덫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 왜 분화는 그것이 분화하는 잠재성과 유사하거나 그것이 또 다른 판본이 되지 않는가?

 

들뢰즈에 따르면 분화의 현행화된 차이들은 미분화의 흐름을 구성하는 차이들에 대해 어떤 특권적인 관점을 즐기지도 않으며, 이질적인 질들을 통일하는 어떤 과정도 아니다. 그보다 이것은 흐름을 그 경로에서 완전히 멈춤이 없이 질들과 강도들을 명료하게 긍정하는 것이다. 분화가 생산하는 현행화는 미분화와 비슷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분화는 그것과 비슷한 미분화가 그 자체로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강도적 체계 너머의 어떤 고정된 주체라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화의 과정이 동일성과 유사성 이상의 다양성에 대한 어떤 질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들뢰즈는 분화과정을 서로 간에 관계 안으로 차이들을 들여오는 어떤 역학적 운동으로 생각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들뢰즈는 현행화를 창조성과 관련하여 사고하는데, 이에 따라 그 과정은 단순히 첫번째 순간에 가능했던 것으로 변화를 기입하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게 된다. 진정으로 창조적이 되기 위해, 분화는 잠재성과 닮은 어떤 것 대신에 새로운 무언가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그는 잠재적인 것이 그 자체로 분화하는 바를 개괄한다. 이러한 과정 없이는 잠재적인 것은 현행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현행화를 발생시킬 수 있는 어떤 분화의 선도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D 1988a: 97).

- Adrian Parr, ‘DIFFERENTIATION/DIFFERENCIATION’,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75-76


 

분화(differenciation): 1.a. 잠재적인 것의 현행화(잠재적인 것의 미분화에 대한 응답). 감각이나 질적인 인상들의 차이 수준으로의 연장. 강도들 또는 차이들이 종 또는 질 안에서 연장성의 장을 통과해 확장되고 분리되는 것(정도의 차이와는 구분됨. 이것은 차이를 삭제하는 것임). 어떤 잠재적 문제에 대한 물리적(유기적) 또는 심리적(표현적) (solution). 특정한 기능을 제공하는 유기체의 부분들의 전개와 더불어 이루어짐.

 

b. 잠재적인 것을 서로 간에 연결시키는, 또는 사로 간에 시공간적 계열을 함축함으로써, 강도들을 발생시키는 카오스의 역능.[B, DR]

E.B.Y

 

미분화(differentiation): 이 개념은 베르그송주의에서는 부재하지만(독자들은 프랑스어인 ‘différenciation’‘differentiation’으로 번역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미분화와 분화 사이에 중요한 구별을 한다. 이 개념은 결정성의 조건들을 수립하는 어떤 유사-수학적 작용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것은 공존하는 차이들을 고려한다. 반면 이것의 대항 개념은 현실적 또는 연장적차이들이다. 들뢰즈가 언급한 것처럼, 만약 미분화가 문제를 결정한다면, 분화는 를 표현한다. 따라서 미분화가 없으면 분화도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잠재적 다양체 또는 차이의 수준에서 고려되는 한 이념적인 것의 상태이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 또는 수적 다양성과 구별된다. 현실성과 독립된 잠재적인 것의 자기-분화 또는 변주. 이념들을 규정하는 과정. 그와 같은 이념들은 그것을 구현하는 현행화들과 유사하지 않다.

-E.B.Y

- Eugene B. Young, Gary Genosko, Janell Watson, The Deleuze & Guattari Dictionary, Bloomsbury, 2013, 94-96.


 

강도는 들뢰즈의 철학적 기획에서 핵심 개념이다. 이 개념은 그 자체로 들뢰즈 존재론의 강도적인 잠재성을 표명하는 것이다. 그의 윤리학과 정치학에서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욕망, 그의 미학 이론에서의 감응, 초월론적 경험론을 위해 그의 방법론적 결정을 동기화하는 것, 그리고 차이([]분화)의 이론을 보증하기 위한 것으로 이 개념이 요구된다.

 

들뢰즈의 생성의 존재론은 우리가 사물/사태와 그것들의 질들을 배제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가 범하는 오류를 탄핵한다. 왜냐하면 연장성과 연장된 양을 특권화함으로써 우리는 연장된 것의 강도적 발생을 간과하기 때문이다(초월적 가상). 들뢰즈의 역능[]의 존재론에서, 역능은 힘들 간의 관계를 지칭한다. 역능은 힘들이 부여하는 결과들을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힘들의 장의 결과들은 연장적이고 질적이다. 초월론적 경험론은 그러므로 연장적 존재자를 구성하는 강도들이 감각되어질 것을 요구한다. 유명한 들뢰즈의 감각되어야 할 것’(sentiendum)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감각하기는 우리의 평범한 감각의수행으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강도는 상기되고, 상상되며, 사유되며 말해질 수 있다. 강도들안 실체들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으로서 아직 실재 사건이 아니며, 이 사건의 실존 양태는 그들 스스로를 일들의 상태(states of affair)에서 현행화하는 것이다.

 

다음은 들뢰즈의 글들에 간간히 등장하는 주의사항들인데, 이는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첫째로 잠재적 강도는 그것이 구성하는 연장된 것 외에 다른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연장된 것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잠재적 강도는 존재론적인 분리로 귀결되지 않는다. 두 번째, 강도를 파악하게 하는 요청들은 더 이상 순수이성 단독의 의무론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강도는 오히려 이러한 의무론의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그것이 모든 능력들을 장악하게 한다. 감각으로부터, 기억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사유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도와의 마주침은 감각의 임무이기도 한데, 이것은 사유 안에서 차이화되는 잠재성을 발생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모든 능력들의 상호작용에 있어서 첫 번째 필연성이다. 세 번째로 강도는 개별적인 예시를 위한 또는 거짓 지원자를 솎아내기 위한 이데아/패러다임이 아니다. 강도는 현행적인 케이스들을 발생시킬 수 있는 어떤 특이성이지, 그것과 닮은 것을 산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들뢰즈의 존재론은 차이의 개념 주위에 건설되는데, 이때 차이란 ‘xy와 다르다라는 형식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들뢰즈가 강도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연장된 양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때 연장된 양의 외적 관계(partes extra partes)는 그들의 본성에 있어서 어떤 상응하는 변화 없이 분리를 허용한다. 하지만 강도는 그 본성상의 변화 없이는 분리를 되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도들은 측정불가능하며 그것의 서로 간의 거리는 그것들 각각에 대해 어떤 그 자체의 진정한 차이를 형성하는 것이다. 강도량은 부가되는 것이 아니라, 평균화된다. 들뢰즈 존재론의 양측면(잠재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의 맥락 가운데 있으면서, 강도들은 잠재성의 현행화, 연장과 선형적이고 연속적인 시간, 연장된 신체들 그리고 그것들의 질들의 발생을 촉진시킨다. 잠재적인 것과 강도를 보증하는 현행적인 것 사이에 함축된 가역성의 관계는 부엔트로피적인(negentropic) 죽음의 운명을 겪지 않을 것이다.

 

들뢰즈 윤리학과 정치철학 그리고 미학에서의 강도의 역할은 마찬가지로 중추적이다. 들뢰즈의 윤리학은 두 축 주위를 회전한다. 첫번째는 우리가 잠재적 사건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스토아/니체적인 명법이다. 두 번째는 스피노자적인 충고로서, 기쁨의 삶을 살기 위해 그리고 역능을 확대하기 위해 좋은 만남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기쁨의 윤리 그리고 우리의 역능을 증가시키는 좋은 만남은 기분 좋음에 속할 만한 것이다. 이것은 만약 잠재성의 강도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심리학의 자기조력 형태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치 있는 사건이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채우는 사고들(accidents)의 역-현행화에 관해 자제력을 요구하는 것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강도적이고 잠재적인 사건으로의 우리의 참여를 의미한다. 이와 유사하에 들리즈의 정치철학은 만약 다중(the multiple)다수’(the many)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그저 그런 다중의 기념비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닥치는 혁명의 역현행화 안에서, 결코 오지 않은 그리고 아직은 결코 그저 지나쳐 버리지는 않는 혁명은 비시간적이고, 잠재적이며, 강도적인 사건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치 있는 운명에 대한 긍정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미학에서 들뢰즈는 형상을 감각으로 대체하는데, 이대 강도는 앞서 주어진 것으로 제시된다. 예술가가 목표로 하는 것은 사실상 감각이다. 감각은 직접적으로 그것이 재현하지 않는 역능들의 강도와 연관된다. 감각은 감응[촉발]이지, 주체적인 것도 객체적인 것도 아니다. 그보다 그것은 그 둘 모두를 의미한다. 우리는 감각 안에서 동시에 그것 때문에 발생하는 어떤 것이 된다.

- Corustantin V Boundas ‘INTENSITY’ Eugene B. Young, Gary Genosko, Janell Watson, The Deleuze & Guattari Dictionary, Bloomsbury, 2013, 17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