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주름+다이아그램'(from 들뢰즈 사전들)
미셸 푸코와 들뢰즈는 어떤 강도 높은 철학적 우정을 즐겼으며, 푸코에 관한 들뢰즈 글의 대다수는 ‘상찬 에세이’(laudatory essay)의 전통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논평은 전후 프랑스에서 지적 활동의 특정 경향으로 자리잡은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류의 글은 비판적인 작업은 아니었고, 그 보다는 정서적인 감응의 제스처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푸코에 대한 그의 저작에 대해 말할 때, 들뢰즈는 어떤 사상가에 대한 커다란 충실성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의 저작에서 모순이나 사각지대를 굳이 찾을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타당하지만, 다른 편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작가의 작품을 ‘우정’의 정신 안에서 접근한다는 것은 인격적인 우정과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저작의 총괄적 특성을 따라 가고자 하는 의지이고, 그 사상가와 여행을 함께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가끔 그것은 그 저작을 추종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의 인격체로서, 표면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극복하거나 해결하는 그 지점에서, 그 저작이 다소 ‘미친’ 것이 되는 그 측면을 추종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정이란 이런저런 사람들처럼 동일한 생각이나 의견을 필연적으로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 우리가 그들과 더불어 지각의 양태들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그것이 누군가에 대해 무언가를 지각하는 문제이며, 그의 사유하기의 방식이 거의 그의 사유 이전에 의미화의 수준에서 정식화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들뢰즈는 푸코의 몸짓에서 ‘금속성의’, ‘공격적인’, 그리고 ‘건조한’ 어떤 것을 기억해내고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들뢰즈는 푸코를 주체라기보다 어떤 개체, 특이성으로 지각한다. 그것은 마치 들뢰즈가 푸코를 하나의 철학적 명제들의 조합들인 것 만큼 그 신체적 물질성의 수준에서 그 사유에 응답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들리즈는 푸코를 탁월한 ‘정념’의 작가로 바라보며, 특히 푸코가 사랑과 정념 사이에 어떤 구별을 취할 때 감동받았다. 사랑은 개체들 간의 관계이지만, 정념은 개체들이 강도의 비인격적 장으로 해소되어 가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들뢰즈는 푸코에 관한 그 자신의 책을 어떤 ‘이중화’(doubling)의 행위로 간주하는데, 이는 그와 푸코 사이에 소수적 차이들을 야기하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방식이다. 들뢰즈와 푸코는 둘 다 ‘표면들’의 예술에 관한 유사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어떤 것을 해석하기 보다 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것이 들뢰즈가 푸코의 작업에서 찾아낸 것이다.
들뢰즈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합리적 체계와 반대되는 어떤 동적 논리학을 푸코로부터 이끌어낸다. 『푸코』에서 들뢰즈가 주로 말하고자 하는 것 중 하나는 푸코 저작의 진행과정을 둘러싼 오해들 중 몇몇을 해소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들뢰즈는 푸코의 후기 저작이 이미 비판된 ‘주체’에 대한 어떤 회귀를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대신에 그는 이 후기 저작을 이전에 푸코가 수행했던 지식 권력에 대한 분석에 주체화의 차원을 부가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푸코가 그의 마지막 저작에서 말하는 주체는 퇴행이나 회피처가 아니라, 바깥으로 주름을 접음으로써 생산되는 어떤 것이다. 들뢰즈는 또한 푸코의 ‘인간의 죽음’이라는 정식이 정치적 행동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을 거부한다. ‘인간’의 형상은 단순히 인간에 대한 역사적으로 선명한 어떤 형상이다. 인간적인 역능은 역사 속의 여러 다른 시점에서 이런저런 다른 힘들에 직면하며 이런 방식으로 그것은 어떤 구성적인 인간의 형상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중적인 의미로, 들뢰즈는 푸코의 연구에서 ‘생명’(vital)에 관한 논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 그는 푸코가 절대적인 필연성이라고 생각했던 바에 집중하면서, 푸코의 저작이 표현하는 삶에 대한 어떤 행위의 방식에도 주목하는 것이다. 푸코는 죽음과 감금과 고문이라는 주제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그가 삶이 그러한 감금상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푸코가 그들 각자의 문제접근방식에서 실재 길항하는 지점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하지는 않아야 한다. 푸코는 그의 입장에서 들뢰즈가 사용한 ‘욕망’이라는 개념이 문제적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푸코 자신에게 욕망이란 언제나 ‘결핍’이나 억압과 관련된 몇몇 생각들을 도출하기 때문이다. 그는 ‘쾌락’이라는 말을 더 선호했는데, 이는 들르즈에게는 문제적인 개념이다. 왜냐하면 들뢰즈에게 쾌락은 욕망의 내재성을 차단하는 어떤 초월적 범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코의 저작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는데 기반이 되는 이러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실재적으로 ‘횡단적’으로 서로를 구성했다. 이것은 들뢰즈가 그 자신과 푸코 사이에 어떤 대응관계를 놓으려고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들뢰즈는 푸코가 그의 저작에서 분투하고 있었던 바를 도출하길 희망한 것이고, 또한 들뢰즈가 ‘악명높은 인간’[범죄적 인간]과 같은 푸코의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소수적 개념들에 종종 집중한 것도 이러한 정신 안에서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이 개념이 특히 그것의 긴급함에 대한 응답이나 공명임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푸코는 그러한 개념을 가지고 그 자신의 힘[권력]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어려운 문제들을 사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 John Marks, ‘FOUCAULT, MICHEL (1926-84)’,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108-109.
주름과 주름작용은 들뢰즈의 방대하고 다양한 저작들 가운데 가장 생생하고 반향이 큰 개념으로 간주된다. 평범한 단음절어 ‘주름’(pli)은 직물의 엮임과 생명의 시원 둘 모두를 가리키며, ‘존재’에 관한 질문과 ‘사건’의 본성에 대한 많은 철학자들의 성찰들이 남긴 어떤 조명과 밀도를 함축하고 있다. 1968년 5월의 ‘사건들’과 같이 1988년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의 출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 되었고, 그 이후 그 저서는 라이프니츠에 대한 일반적인 참조목록에 속하게 되었다. 그 책의 배경이 되는 의도는 뒷페이지의 간결한 미주에 언급되어 있는데, 그것은 반종교개혁으로부터 신바로크에 이르는 바로크 시대에 거의 무한한 개념적 힘을 함축한 어떤 형상 그리고 형태로 주름이라는 개념이 취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철학은 ‘바로크’라는 표지를 붙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의 단편들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접히고, 펼쳐지고, 되접히기” 때문이다(Deleuze, Le Pli, 뒷표지). 영혼은 하나의 모나드로 파악되는데, 이것은 문도 창문도 없는 어떤 방 안의 유폐된 공간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캄캄한 배경으로부터 도드라진 그것의 ‘명석한 지각들’로 그려진다(Le Pli, 뒷표지). 들뢰즈는 영혼에 관한 데카르트적 개념에 대한 이 독일 철학자의 응답이 바로크 교회의 내부와 유비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교회의 내벽들은 검은색 대리석 평판으로 세워졌다. “빛은 관람자 내부의 지각불가능한 열림을 통해서만 도달한다.” 따라서 “영혼이란 어둡고 모호한 주름들로 충만하다”(ibid.). 들뢰즈가 교회에서 발견한 영혼을 응용하면, 주름은 말라르메, 프루스트와 불레즈에서 한타이에 이르기까지 현대에 가까운 작품의 창조자들을 포함해서, 시, 문학, 회화 그리고 음악에 이르기까지 신바로크 세계에 거주하고 있다. 더 나아가 신체와 영혼에 관한 영원한 질문, 즉 플라톤에서부터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의 중심 주제는 주름과 그것의 지속적인 주름화 과정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상세한 형상을 가진다.
이 가설은 과감할 뿐만 아니라 철학과 미학 학생들에게 단번에 거부될 만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존재론과 인식론의 기초에 존재해 왔던 신체와 영혼 간의 데카르트적 균열에 대해 재사유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선택은 라이프니츠의 평생에 걸친 비판적 평가에 관한 기획을 부수적인 것으로도 유일한 것으로도 보지 않는 것이다. 주름은 어떤 개인적인 스타일과 특유한 언어에 속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들뢰즈의 저작들에서 상이한 경로들을 따라 발전해 간다. 그것은 경험론과 주체성에 관한 그의 초기저작에서부터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와 그의 문학에 관한 마지막 논문집인 『비평과 진단』(1993)에 걸쳐 있다. 이 개념은 심지어 그가 죽기 2년 전까지도 그의 저작에 나타난다. 나의 이 짧은 글의 목적은 주름과 주름작용이라는 개념이 그의 저작 어디에서 어떻게 출현하는지, 그리고 라이프니츠에 관한 그의 연구와 일반적인 미학 연구 둘의 관계에 관해 평가하기 위한 것이다. 주름이란 개념이 철학에서 어떤 중차대하고 지도적인 역할을 가지며, 여기서 시인은 철학자의 이중체라는 것이 발견된다는 점을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주름에 관한 가장 간결하고 유명한 정식은, 들뢰즈가 푸코의 섹슈얼리티의 역사에 관한 세 권의 연구서를 음미한 『푸코』 마지막 장인 ‘주름작용 또는 사유의 안쪽(주체화)’에서 발견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푸코는 섹슈얼리티를 주체성(subjectivity)과 주체화(subjectivation)의 반영으로 간주한다. 들뢰즈는 그러한 관점을 주체성의 어떤 매트릭스 안에 섹슈얼리티를 포괄함으로써 확장한다. 모든 인간은 결국 세계 내에서 삶이 과정을 지속적인 과정에 대해 사유한다. 그리고 지각과 감응과 인지의 항구적인 주고받음을 통해 의식과 행위주체를 소집함으로써 사유한다. 주체성은 신체의 바깥과 안에서,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지각된 사물/사태들의 계속되는 교섭작용이 된다. 들뢰즈는 원칙적으로 푸코의 『섹슈얼리티의 역사』 1(1978)과 『섹슈얼리티의 역사: 쾌락의 활용』(1985)으로부터 ‘다이어그램’을 구성하는데, 이는 초기저작들의 기초가 되며, 그것은 어떤 분류학 그리고 어떤 투사(project)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지식의 고고학』(1972)에서 푸코는 ‘자기’(self)와 ‘나’(I)가 언제나 상호 간에 ‘겹치기’(이중화)되는 방식으로 정의된다고 주장했다. 이때 겹치기(이중화)는 단일한 혹은 명령하는 ‘타자’ 또는 도플갱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가능한 몇몇 힘들에 관한 어떤 것이다. “타자의 이중체로서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나’이다”(FCLT: 98). 그리고 나는 나 자신 안에서 타자를 발견할 때, 그것은 “정확히 발생학적으로 다른 신체조직의 함입과 같은 것이거나, 옷의 안감의 작용과 같은 것이다. 즉 비틀고, 접어 올리고, 정지하는 것”(FCLT: 98). 푸코에게 역사는 “되기[생성]의 이중화(겹치기)”였다. 이에 따르면 푸코에게 지나간 것이나 문서고에 있는 것들 또한 지나간 것을 의미했다. 고속도로 위에서 마치 빠르게 달리는 차가 겹쳐 보이거나 ‘이중화되는’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다이어그램 안으로 접히거나 반영되는 것이었다. 역사는 과거의 총합처럼 비쳤지만 그것은 형상화의 형태를 위해 배열할 수 있다. 이때 형상화는 민중들이 현재와 미래에서 살고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할 것이다. 망각하든지 기억하든, 역사는 형식적인 겹침들 또는 타자들 중의 하나로서 주체화의 과정에 생기를 부여한다.
여기에서 들뢰즈는 주름과 주름작용의 랩소디를 시작한다. 이중화 작용(겹치기)이 어떤 내적인 것과 외부적인 표면 – 프랑스어로 ‘doub/ure’라고 할 수 있다 – 을 생산할 때, 한 조각의 옷감 안으로 한 번에 줄지어진 바늘땀, 영화제작 과정에서의 대역, 그리고 심지어 어떤 ‘복제’(이중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르토가 그의 연극을 위해 글을 쓸 때, 존재와의 어떤 새로운 관계가 태어난다고 한 것과 같다. 안쪽에 있는 것과 바깥쪽에 있는 것 - 과거(기억)와 현재(주체성) - 은 단일한 표면의 두 면이다. 그 혹은 그녀의 신체와 어떤 사람의 관계는 어떤 ‘문서고’이면서 ‘다이어그램’이 되는데, 이는 주체화와 과거에 기반해서 작성된 정신적 지도의 총체이며, 주위세계의 요소들과 사건들로부터 이끌어 내어진 것이다. 들뢰즈는 네 개의 주름이 “지옥의 네 강들처럼”(FCLT: 104) 주체의 그 자신과의 관계를 촉발한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신체의 주름으로서, 물체적인 주름들 안에 접혀 있거나, 둘러싸여 있다. 두 번째는 “힘 관계의 주름” 또는 사회적 갈등이다. 세 번째는 “우리의 존재와 진실성의 관계를 구축하는 한에서 지식의 주름 또는 진실의 주름”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FCLT: 104). 네 번째는 “외부 자체, 궁극적인 것”의 주름, 삶과 죽음의 한계에 관한 주름이다(FCLT: 104). 이 주름들 각각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주체성의 원인들(질료인, 작용인, 형상인 그리고 목적인)을 지칭하며, 그 자신의 다양한 리듬들을 가진다. 들뢰즈는 우리가 우리 시대에 주체성이 어떻게 고도로 내면화되고 개별화되며, 고립되었는지에 대해 반성하기 전에 네 개의 주름들의 본성에 대해 탐구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주체성을 위한 투쟁은 차이, 변이 그리고 변신으로 접근하기 위한 권리를 획득하려는 전투이다.
인간 주체는 유일하게 주름의 “조건 하에”(이 공식은 앞으로 드러날 텐데, 어떤 관건적인 것이다), 지식과 권력과 감응(정동)의 필터를 통과해서 이해될 수 있다. 푸코를 사로잡은 것으로 알려진 그 주름이라는 하나의 형상은 진술된 또는 말해진 사물/사태와 가시적인 또는 보여진 사물/사태 간에 주름을 만드는 어떤 그것으로 보인다. ‘가시적인’ 형식과 ‘담론적인’ 형식 사이에 열린 구별은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가 이해한 지향성, 즉 현상학과 주체성의 동맹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기 위해 더 앞으로 나아간다. 말해진 사물/사태들은 어떤 기원적이거나 개별적인 주체를 지칭하지 않고, “언어적 존재” 그리고 “조명하는 존재”로서의 가시적인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때 조명하는 존재는 “형상들, 속성들, 전망들”을 비추는 것으로서, 어떠한 지향적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롭다(FCLT: 109). 라이프니츠에 관한 저작을 예기하면서, 들뢰즈는 푸코가 지향성을 봄(seeing)과 말함(speaking)이라는 “두 모나드들” 사이의 간격 안에서 붕괴시킨 점을 주목한다(FCLT: 109). 따라서 현상학은 인식론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은 곧 아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에 대해 보지 못하며,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FCLT: 109). 어떤 것도 지식을 앞서가거나 선행하지 못한다. 비록 지식이나 앎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이중적”이라 할지라도 그러하다(FCLT: 109). 따라서 말하는 것으로 그리고 보는 것으로, 언어로 그리고 빛으로, 주름진 것은 말하는 자와 보는 자라는 주체들을 지향하는 것으로부터 독립적이다.
이러한 단계에서 주름은 바로 존재론의 직물구조(fabric, 직조물)가 된다. 이것은 들뢰즈가 확고한 철학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겹치거나 펼쳐지는 것으로서 주름은 말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부터 분리하며, 고립의 상태에서 다른 것들로부터 각각의 등록사항을 유지한다. 그 간극은 영화의 이미지 트랙과 음향의 밀접한 상태의 차이 안에서 하나의 유비물을 발견한다. 이와 같은 분할로부터, 지식은 조각들 또는 ‘트랙들’(자취들)로 분할되며, 따라서 어떤 지향적 형상 안에서도 결코 만회될 수 없다(FCLT: 111). 커뮤니케이션의 분할된 본성은 가시성과 구술성 사이의 접기 또는 주름을 그것의 공통 은유로 삼는다. 결과적으로 차이와 유사성에 대한 연구들에 있어서 푸코가 16세기 말에서 시작하며, 그 시기는 바로 쓰기가 그것의 가시적인 유사성의 힘을 그것의 문자화된 형태로부터 도피시키는 때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지점에서 활자문화가 표준화되고 도식적인 추론이 수사적 메뉴얼에 속한 기억을 대체할 때, 또는 단어들이 더 이상 그것들이 육화하거나 닮은 것처럼 보이는 사물들에 유비되지 않을 때, 기호는 그 지시체들을 대리하기 시작하며, 그것들이 재현하는 것과 관련하여 자동적인 ‘이중체들’이 되는 것이다.
주름이 어떻게 주체화의 형상인지 증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역사를 철학의 무대로 불러들인다. 그는 단순명료하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인가? 1968년 5월의 사건들은 하나의 예행연습으로서, 이러한 질문들을 가시성과 언어와 힘의 한계에 관해 탐구하게 했다. 그러한 질문들은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들로 밀어붙였고, 이런 이유로 억압적인 정치적 조건들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의 양태들을 야기했으며, 새로운 주체성들에게 활력을 부여하는 사유의 탄생을 추동했다. 역사적인 구체화 안에서, 존재는 앎의 축을 따라 작성된 것이다. 존재는 가시적이고 발화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은 힘의 사용에 따라 시간 안에서 주어진 순간에, 힘과 특이성의 관계에 의해 스스로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성에 의해, 어떤 ‘과정’이나 ‘장소’ 즉 “자기성의 주름을 통과하는 그러한 장소를 보여준다”(FCLT: 116). 역사는 사유에 의해 곧장 이중화되거나 ‘접혀 올라가’ 버린다. 격자 또는 새로운 다이어그램은 힘, 지식 그리고 주체성(프랑스어로 savoir, pouvoir, soi)의 변이들을 앞서 수립함으로써 그러한 대립을 명확하게 만든다. 여기서 주체성은 하나의 주름으로 파악된다. 들뢰즈는 더 나아가 푸코가 제도 또는 주체화들의 역사를 나눈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조건들과 과정들을 주름작용 안에서 그리고 존재론적이고 사회적 장 둘 모두 안에서 작동하는 주름작용 안에서 나눈 것이라고 본다.
거기에는 사유의 성격에 대한 드라마적인 성찰이 개방된다. 이것은 들뢰즈만큼이나 푸코에게도 속한 것이다. 역사적인 구성체들은 ‘겹쳐져’ 있으며 따라서 지식, 힘 그리고 주체성의 인식론적 특성들과 같은 것으로 정의된다. 지식에 관해 사유는 보는 것 그리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사유하는 것은 가시성과 담론의 작은 틈 안에 자리잡는다. 사유할 때, 우리는 번쩍이는 섬광을 야기하며, “단어들 가운데 명멸하는 것을 만들어내고, 가시적인 것들 안에서 어떤 외침들을 듣게 된다.”(FCLT: 116) 사유는 보기와 말하기가 그들 자신의 한계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힘과 관련해서, 사유는 “특이성들을 방출하는 것”과 같으며, 테이블 위에 한 패의 주사위를 던지는 도박꾼의 행위에 가까운 것이거나 또는 힘의 관계들에 개입하는 어떤 사람이거나, 심지어 새로운 돌연변이들과 특이성들을 준비하기 위해 갈등을 유발하는 자와 같다. 주체화와 관련해서, 사유는 “주름작용, 외부를 그것과 공외연적인 내부와 겹치는 것”을 의미한다(FCLT: 118). 이때 내부와 외부 공간들이 서로 간에 접촉하는 것에 따라 위상학이 창조된다.
역사는 어떤 문서고 또는 지층의 계열들로 취해지며, 이는 전략들, 즉 그것의 힘과 미덕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충만한 사유, 다이어그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논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들뢰즈는 간접적으로 “어떤 새로운 지도제작자”를 설명한다(FCLT: 23-44). 이것은 『주름』의 수많은 공간적 역학을 예기하는 초반부 장에서 전개된다. 우리가 사유할 때, 우리는 모든 종류의 문턱들과 지층 그리고 갈라진 틈을 횡단하게 되는데, 이것은 들뢰즈가 말하길, 멜빌이 ‘중심 공간’이라고 부르는 곳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포를 느끼는데, 여기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며, “인간의 영혼이 거대하고 공포스러운 공허를 드러내는” 그런 공간이기 때문이다(FCLT: 121).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움직이는 선으로 형상화된다. 그것은 실재로 ‘멜빌의 선’(FCLT: 122)이며, 이 선은 두 개의 자유로운 끝점을 가진다. 이는 앙리 미쇼가 말한 “천 개의 일탈들”의 선과도 닮았다. 미쇼의 선은 점증하는 분자적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고, “발광하는 마부의 채찍질”(FCLT: 122)이며, 궁극적으로 그것이 바로 중심 공간인데, 거기에는 자기성(주름)이 내부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더 이상 공허로 인한 공포가 없다. “여기에 우리가 우리 속도의 주인이 되는, 우리 분자들과 특이성들을 거의 지배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이것은 주체화의 지대이며, 안과 바깥에서 그 주체성이 탑재되는 그 지점이다”(FCLT: 123). 이 문장들에 담긴 눈부신 전망은 들뢰즈가 형상의 역사 또는 문서저장소가 힘들의 생성에 따라 ‘겹치는’(접히는) 그 방식에 대해 언급한 지점으로 휘어져 들어간다. 여기서는 몇몇 다이어그램들 또는 사유의 주름잡힌 표면들이 서로 간에 겹겹이 쌓여 있다. 그는 이것을 멜빌이 끝도 시작도 없는 대양의 선이라고 묘사한 바 있는 “외부의 선”의 비틀림이라고 부른다. 이 대양의 선은 다이어그램을 요동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선의 형상은 “1968의 그 선, ‘천 개의 일탈로 이루어진’ 그 선”(FCLT: 44)이었다.
「새로운 지도제작자」(이 글은 『비평』지에 1975년 처음 실린 논문으로서, 『푸코』 이전이다)를 마무리 하는 구절에서, 들뢰즈는 『푸코』의 끝 부분에서 발견되는 단어들을 미리 선보인다. 멜빌의 말과 연계된 그 선은 미쇼의 그것도 함축하는 것이다. 이것은 들뢰즈가 글쓰기에 관한 푸코의 최상의 정의라고 부르는 것을 상징화한다. 푸코의 글쓰기란 들뢰즈의 독해에 따르면 겹쳐쓰기[이중화]이다. “글쓰기는 투쟁하고, 글쓰기는 저항하며, 글쓰기는 생성한다. 또한 글쓰기는 지도제작이다”(FCLT: 44). 이 정의는 『주름』의 마지막 문장으로 쓰여진 것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우리의 주체성이 라이프니츠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주름을 접고, 주름을 펴며, 되접기” 때문이다(FLD: 137). 다이어그램의 측면에서는, 『푸코』에 나온 지층들이 『주름』의 그것 위에 중첩된다. 이때 주름은 글쓰기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동일한 최상의 의미에서 그러하다. 어떤 정립적인 움직임 안에서, 주름작용은 그 자신에 저항한다. 어떤 반정립적인 반대 움직임 안에서, 주름 펼치기는 생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되접기는 해결을 보증하는 종합적 개념이 되지는 않으면서, 새로운 지도들과 다이어그램의 궤적을 함축하게 된다.
들뢰즈가 존재로서의 글쓰기 그리고 주체화로서의 주름작용에 관한 푸코적인 원리 안에서 발견한 것은 라이프니츠에 관한 그의 독해에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푸코』에서 주름들의 계열로서 드러난 존재론의 배경이 없이는 『주름』에서의 풍부하고, 모호하며, 밀도 있는 몇몇 결론들은 극복 불가능한 암흑으로 보일 것이다. 이미 멜빌의 열린 선과 미쇼의 천개의 일탈의 선은 들뢰즈가 중심 공간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이끄는데, 이는 두 책의 마지막 문장들에서 보이는 초기의 공포 예감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것이다. 이 중심 공간과 그의 라이프니츠 연구에서 전개된 ‘주름들’의 공간을 비교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 공간은 모나드 자체로서, 어떠한 입구도 창문도 가지지 않으며, 빛은 안쪽과 “주체화의 이 지대”라고 불렸던 곳, 둘 모두를 지각 가능하도록 개방함으로써만 통과할 수 있다. 이러한 지각가능성을 담지하는 인간은 거의 “그들의 속도, 그들의 분자들 그리고 그들의 특이성들의 주인”이다(FCLT: 123).
- Tom Conley, ‘Fold and folding’, ed., Charles J. Stivale, Gilles Deleuze Key Concepts,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2005, 170-76.
들뢰즈는 미셸 푸코에 대해 논할 때, ‘다이어그램’ 개념을 그의 공적으로 취급한다. 그것은 프란스시 베이컨에 대한 분석에서도 사용된다. 이 개념은 추상기계와 같은 의미로도 쓰이며, 특이성들의 방출 또는 분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은 권력(pouvoir)의 구성적 힘이 가지는 관계를 설명하는 추상기계이며, 언표 체계에 해당하는 표현과 물리적 체계에 해당하는 내용에 있어서 탈영토화의 계수가 가장 큰 특이성들의 분배를 그려주는 것이다.
들뢰즈는 다이어그램이란 개념을 「비작가: 새로운 지도제작」(“Ecrivain non; un nouveau cartographe”, Critique, n. 343, 1975, 1207-1227)라는 논문에서 처음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다이어그램이 “객관화된 세계를 재현하기 위해 기능하는 것은 결코 아니고, 다만 실재의 새로운 형식을 조성한다”고 말한다(1223). 다이어그램 개념의 변화 역사는 실재에 대한 지속적인 정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개념을 통해 “카오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질서”(QP 1991, 189)를 생산할 수 있는 배치가 전진적으로 정의된다.
들뢰즈가 이 개념을 처음으로 빌려온 것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다. 그러나 이 개념은 푸코의 저서에서는 단 한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이것을 들뢰즈도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는 다이어그램이 판옵티콘을 분석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다루어진 ‘무형의 새로운 차원’을 가리키는 ‘가장 정확한 명칭’이라고 밝힌다(F 1986, 42). 『감시와 처벌』에 나오는 그 문구는 “[판옵티콘이란] 이상적인 형태로 귀착된 권력장치의 다이어그램”(푸코, 1972, 207)이라는 구절이다. 초기에 들뢰즈는 다이어그램과 권력을 동일시하는 푸코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 “권력의 내재성, 즉 다이어그램 자체의 내재성”(위 논문[art. 1975] 1217). 이렇게 되면 다이어그램은 “사회적 장과 공외연적인 추상기계”(ibid., 1219)로 정의된다. 이에 따라 다이어그램은 구체적인 사회 기계들을 조직하고 기술들을 선택한다(1221).
그런데 들뢰즈는 1986년에 이 개념에 대해 삼중의 의미를 부여하는데, 이는 푸코의 개념틀을 훨씬 상회한다. 이에 따르면 다이어그램은 “교육에 고유한 힘들의 관계들을 제시하는 것이고, 영향을 주는 권력들과 영향을 받는 권력들의 분배며, 공리화되지 않은 순수한 함수들과 형태지워지지 않은 순수한 질료들의 혼합이다”(F 1986, 79). 이렇게 해서 권력 개념은 힘의 문제 안에 새겨진다. “다이어그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권력을 구성하는 힘들의 관계를 제시한 것이다”(ibid., 44). “힘들의 모든 관계는 ‘권력의 관계’이다.” “모든 힘은 이미 관계이며, 다시 말해 권력이다.”(ibid., 77).
푸코에게 보낸 1977년의 텍스트(푸코는 이에 답하지 않았다)을 보면 다이어그램 개념을 이렇게 수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들뢰즈는 여기서 『감시와 처벌』에 등장하는 ‘권력장치들’이 추구하는 ‘두 가지 방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는 미시-정치들의 ‘확산된 다수성’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이어그램에 의해 권력의 ‘전략적’ 공식이라고 정의된 ‘일반적 기능’ 또는 ‘추상기계’에 관한 것이다(art., [1977] 1994, 59). 이러한 구분은 권력개념을 “총괄적인 개념의 축소판”으로 간주함으로써, 그것을 의심스럽게 만든다(ibid., 60).
들뢰즈는 그래서 푸코의 권력의 미시-정치라는 개념틀에 가타리와 함께 정립한 자신의 개념들인 ‘욕망의 배치’를 대립시킨다. 욕망이 우선이고 권력은 “욕망의 변용”(ibid., 61)이라는 것이다. 권력이 재영토화가 작동하는 곳에서만 발생하는 대신, 욕망은 탈영토화 운동을 이끈다. 그런데 욕망도 마찬가지로 “진정한 다이어그램”을 갖는다. 그러므로 각각 조성과 내재성에 관련되는 “[권력의] 다이어그램과 [욕망의] 평면이라는 대립된 두 가지 상태”가 있게 되는 것이다(ibid., 65). 들뢰즈가 보기에 “힘의 관계들이라는 최초의 개념틀”이 『격주간 문학』(Quinzaine littéraire)에서 진행된 푸코와의 대담에서 제시되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담은 권력의 미시-정치를 규정하는 핵심사항을 제시하기는 했다고 생각했다(art., [1977] 1994, 60).
이 남은 작업이 『푸코』에서 완성된다. 이렇게 해서 힘들의 “통합/적분”(intégration)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의 다이어그램 한 쪽에 ‘분배’라는 개념의 가치가 부여된다. 이렇게 해서 다이어그램에 대한 네 번째 정의가 생겨난다. 즉 다이어그램이란 ‘특이성들’, 다시 말해 “힘이 적용될 때마다 그것을 표시하는 특이점들”의 “방출이자 분배”이다(ibid., 80). 이에 따라 힘(force)에 대한 정의도 보다 명확해진다. 1977년 이래 힘을 ‘욕망의 변용’(affection du désir)으로 정의하려는 시도 안에서, 감응(affect, 정동) 개념이 중요해지는데, 이렇게 해서 힘이란 “다른 힘들을 감응시키고 (...) 다른 힘들에 의해 감응되는 권력”(pouvoir d’affecter d’autres forces [...] et d’être affectée par d’autres forces, [ibid., 78])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1977년에 예기된 욕망 개념은 1986년에는 어떤 역할도 담당하지 않는다. 이는 1986년 『감각의 논리』에서부터 새로운 개념이 이를 암묵적으로 대체하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들뢰즈에 따라 회화란 “감각들의 다이어그램”(FB 1981, 46)을 따르는 횡단(passage)을 의미한다고 본다면, 그것은 예술의 ‘문제’가 “힘들을 포착하는 것”(ibid., 39)이기 때문이다. 즉 신체적인 것을 역동적인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힘이 감각으로 이행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감각이 있기 위해서는, 힘이 신체, 다시 말해 파동의 장소에서 실행되어야 한다”(39).
이렇게 신체로 연결된 다이어그램은 더 이상 사회적인 장과 공외연적이지 않게 된다. 이러한 정의는 푸코로부터가 아니라 프란시스 베이컨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이로써 들뢰즈는 화가의 지시체란 비자발적인 표지의 회화적 실천과 관련된다는 점을 환기한다. “표지들이 활동하고, 우리는 일종의 다이어그램을 그리듯이 그 사물/사태를 고려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이어그램의 내부에서 모든 종류의 활동의 가능성들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ibid., 63, n.1). “미지의 힘”(ibid., 39)을 발명하기 위한 조건, 이러한 풍부한 가능성들은 다이어그램에 대한 들뢰즈의 새로운 정의를 이끌어내는데, 그것은 “식별불가능성 또는 객관적 미규정성의 절대적 지대”(zone absolu d’indiscernabilité ou d’indétermination objective)라는 것이다.
다이어그램이 오로지 “질서나 리듬의 싹”인 것만은 아니다. “전체 힘들의 적용 지점 혹은 동요의 장소”(ibid., 96)로서 그것은 무엇보다 ‘카오스’ 혹은 ‘파국’(ibid., 67)이기도 하다. 이 개념은 푸코에게서 발견되는 다이어그램이라는 ‘전략적인’ 개념에 대한 전복을 성취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권력과 마찬가지로 이 힘들의 카오스는 결말을 구성하지는 못한다. 즉 “그 자신이 파국인 다이어그램은 스스로는 파국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ibid., 101). 그 결과 “다이어그램의 법칙”이 나오게 된다. “우리는 구상적인(figurative) 형태로부터 출발하며, 이때 다이어그램은 혼란을 위해 개입하지만, 하나의 형태에서 출발하여 전체적으로 이질적인 본성, 즉 형태(Figure)라고 불리워지는 그러한 본성으로 나아가야 한다”(ibid., 100).
『감각의 논리』에서 들뢰즈는 감각을 유연성(élasticité)과 같은 것, 즉 감응될 수 있는 힘(pouvoir)으로 정의한다. 그런데 “감각의 경로로서의 하강” 안에서 그 힘이 탐색될 수 있기 위해, 감각을 구성하는 “정념적 순간”(ibid., 31)은 전혀 수동적이지 않다. 만약 “능동적인 것, 그것이 몰락이라면”(ibid., 54), 유연성은 “생명의 힘”(ibid., 31)이다.
변용(affection) 개념은 1977년 노트에 이미 개괄적으로 나타났다. 이 개념이 심화되기 위해서는 푸코의 마지막 저작들에서 이루어진 어떤 이행을 살펴 보아야 한다. 만약 “권력의 모든 실행”이 “감응”(정동)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다른 것에) 감응을 주는 어떤 역능과 (다른 힘들에 의해) 감응되는 역능”(F 1986, 78) 각각의 힘(또는 관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감응될 수 있는 역능이 의존하는 “저항의 능력”(ibid.)이 ‘우선’인 것이다(ibid.). 그것은 “생명[삶]의 역능”이다(ibid., 98). 우리는 역능의 특이성들 곁에서 그러므로 항상 “저항의 특이성”을 발견하는 것이다(ibid., 95). 따라서 다이어그램은 단순히 연결된 점들을 포함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 또는 해방”의 점들과도 연결되는 것이다(bidi., 51).
이때 권력관계들이 “전적으로 다이어그램 안에 긴박되어 있다”면, 저항은 “필연적으로 다이어그램이 도출되는 외부와 직접적인 연관에 놓여 있다”(ibid., 95-96). 사실상 만약 “힘들의 관계적 앙상블의 결정으로서 다이어그램이 힘들을 전혀 포괄하지 못한다면”(ibid., 95), 그것은 힘이 다양하고 감응되고/받는 그러한 분배가 “이 힘의 다양한 존재”의 ‘지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만적’(sauvages) 특이성들의 실존은 “여전히 외부에 유예된 채, 그러한 관계들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놓여 있는 것이다”(ibid., 125)(1). “힘들의 비정형적 요소”(ibid., 51)로서의 외부는 형식화되지 않은 순수 기능들과 형상화되지 않은 순수 질료들의 혼합을 보증한다.
(1)한국어 번역본에 이 문장은 누락되어 있다.
저항의 지점들의 ‘시원’들 중 하나는 “힘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 또는 “자신에 의한 자신의 감응”(ibid., 108)이다. 이는 다양한 힘들의 주름작용(plissement)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2) 물론 일단 “힘의 관계들 속에 붙잡혀 있음” 즉 “다이어그램화된다는 것”(ibid., p. 110)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그리스적 다이어그램”을 제공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주름의 위상학”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주름의 위상학은 “내부와 외부를 접촉하게 하고”(ibid., 118), “주체화의 지대”를 구성하는 것이며, 또는 ‘푸코의 다이어그램’의 ‘핵심 지대’를 구성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것들의 분자와 특이성들을 상당부분 지배하게 된다”(ibid., 130).
(2)이 문장(관계사절)도 한국어 번역본에는 누락되어 있다.
- Yves Avrioux, ‘DIAGRAMME(Deleuze, 1975)’ Arnaud Villani, Robert Sasso ed. Le Vocabulaire de Gilles Deleuze, Vrin, 2003, 107-13 참조. (아르노 빌라니, 로베르 싸소 편집, 신지영 옮김, 『들뢰즈 개념어 사전』, 갈무리, 2012, 90-97, 참조, 번역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