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k Hui, “Why Cybernetics Now?”, Cybernetics for the 21st Century Vol. 1, Hanart Press, 2024, 11-21.
서지사항: Yuk Hui, “Why Cybernetics Now?”, Cybernetics for the 21st Century Vol. 1, Hanart Press, 2024,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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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왜 지금 사이버네틱스인가?
육후이(Yuk Hui)
번역: 박준영(nomadia, 수유너머 파랑)
『21세기를 위한 사이버네틱스』라는 제목은 ‘왜 사이버네틱스인가, 그리고 왜 지금인가?’라는 즉각적인 질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캐서린 헤일즈(Katherine Hayles)가 지적했듯이 1970년대에 이르러 사이버네틱스라는 용어는 공적 담론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사이버네틱스’라는 용어는 1940년대에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가 아르투로 로젠블루스(Arturo Rosenblueth) 및 그의 연구 그룹과 협력한 결과 고안되었다. 우리는 이 용어가 그리스어인 kubernetes에서 유래했으며, 1834년 앙드레 마리 암페르(André-Marie Ampère)가 사이버네틱스를 미래의 거버넌스 예술(art of governance)로 명명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용어는 장기간의 공동연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로젠블루스에게 헌정된 위너의 저서 『사이버네틱스-동물과 기계의 제어와 커뮤니케이션』(Cybernetics: Or Control and Communication in the Animal and the Machine, 1948)을 통해 더욱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사이버네틱스는 움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와 프란체스코 바렐라(Francesco Varela)의 자가생성(autopoiesis)이나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사회 시스템 등 주어진 현상에 대한 체계적이고 진화적인 분석을 제공할 수 있는 일반화된 과학으로 성장했다. 메이시 회의(Macy Conferences, 1946-1953) 시기부터 탈-메이시 회의에 이르는 이러한 발전은 1차 사이버네틱스에서 2차 사이버네틱스로의 전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서 피드백(feedback)에서 재귀(recursion)로의 용어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사이버네틱스의 사이버네틱스,[1] 사회의 사회, 관찰의 관찰 등 다양한 어휘로 표현된다. 또한 우리는 생명체의 복잡한 현상을 다루기 위한 노력도 [사이버네틱스 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조적 결연’(structural coupling), ‘가동적 폐쇄’(operational closure)와 같은 신조어가 이런 경우 요구된다. 이 글은 사이버네틱스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역사적 회고는 헤일즈의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나』(How We Became Posthuman, 1999), 마티유 트리클로(Mathieu Triclot)의 『사이버네틱의 순간』(Le moment cybernétique, 2008), 클라우스 피아스(Claus Pias)가 편집한 『메이시 회의 논문집』(Macy Conference Proceedings, 2016)[2]이 있는데, 이것들은 사이버네틱스의 다양한 물결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텍스트가 되어왔다. 본 책은 저러한 역사적 이해가 아니라, 사이버네틱스와 우리 시대와의 관련성에 대해 성찰하고자 하는 어떤 초대장의 역할을 한다.
<12>마르틴 하이데거는 1966년 《슈피겔》(Der Spiegel)과의 인터뷰(10년 후 출간)에서 철학의 종말 이후 무엇이 도래했느냐는 질문에 사이버네틱스라고 답했다.[3] 다시 말해, 하이데거는 사이버네틱스가 서양 철학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주장은 극적이지만 철학의 역사와 미래뿐만 아니라 사이버네틱스의 미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이버네틱스를 말할 때 우리는 위너 자신처럼 그 기원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에게서 찾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으로까지 더 거슬러 올라가 사이버네틱스의 도래를 예견했다. 사이버네틱스와 철학의 양립가능성은 사이버네틱스가 처음부터 철학적 프로젝트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하이데거에게 사이버네틱스의 승리는 철학의 종말을 의미하는 바, 여기서 종말은 또한 완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철학의 종말을 고려하여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의 마지막이자 최신의 단계인 사이버네틱스를 극복할 수 있는 사유를 촉구한 것이다.[4]
이러한 가설 안에서 사이버네틱스는 방법의 승리로 간주된다. 즉, 데카르트(René Descartes) 시대의 기계론이 그랬던 것처럼 과학적 방법으로서 사이버네틱스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사이버네틱스는 철학적 성찰을 불필요하게 만든 과학적 방법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시몽동(Gilbert Simondon)이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비교하면서 전자를 반성성(reflectivity)에 기반한 새로운 인식론으로 간주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5] 사이버네틱스는 서양 철학의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실현 또는 완성이다. 하이데거의 주장은 이 책에 수록된 「기계와 생태학」(Machine and Ecology)이라는 제목의 내 글뿐만 아니라 내가 『재귀성과 우발성』(Recursivity and Contingency, 2019)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처럼 여전히 사유되고 분석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6]
놀랍게도 최근 사이버네틱스 학과를 설립한 호주 국립대학교를 제외하고는 대학 커리큘럼에서 사이버네틱스라는 용어가 서서히 <13>사라진 반면, 역설적으로 철학과에는 계속 존속하고 있기 때문에 철학은 종언을 고하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공학 분야에서조차 사이버네틱스가 사라졌다는 것은 사이버네틱스가, 마치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한 신경 쓰지 않는 공기처럼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이데거의 주장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20세기 정치, 디자인, 공학, 예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이버네틱스가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 논문집은 인식론적 재구성(epistemological reconstruction)을 위해 애쓴 결과이다. 일부 기고자들은 사이버네틱스의 역사와 철학사 및 기술사에서의 사이버네틱스의 중요성을 재구성하고, 폴란드, 칠레, 소련, 중국, 일본, 미국, 영국에서 사이버네틱스의 수용과 지역화(localization)에 대해 논한다. 칠레의 사이버신 프로젝트(Cybersyn project)부터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학 커뮤니티는 특정한 사회-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이버네틱스를 지역화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이러한 고려들은 세계의 각기 다른 지역에서 사이버네틱스가 등장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제공하고 오늘날 우리 대부분에게 알려지지 않은 과학자와 사상가들의 이름과 더불어 일부 신조어들을 전해준다. 예를 들어, 암페르의 영향을 받은 폴란드의 한 사상가는 ‘사이버네틱스’라는 용어를 거버넌스 예술로 발전시켰으며, 중국의 한 자녀 정책은 암묵적으로 사이버네틱스의 적용이다.
21세기를 위한 사이버네틱스를 찾고자 한다면 다른 대륙에서 일어난 사고와 상상력의 다양성과 사이버네틱스 프로젝트의 단점을 모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이버네틱스는 일부 미국 과학자들의 발명과 노고, 또는 피에르 드 라틸(Pierre de Latil)의 『기계에 의한 사고-사이버네틱스 연구』(Thinking by Machine: A Study of Cybernetics, 1953), 레이몽 뤼에(Raymond Ruyer)의 『사이버네틱스와 정보의 기원』(La cybernétique et l’origine de l'information, 1954), 시몽동의 『기술적 객체의 존재 양식에 관하여』(On the Mode of Existence of Technical Objects, 1958)처럼 최근에 재발견된 몇몇 프랑스 사상가들의 사이버네틱스를 대륙 철학에 연결시킨 역사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슬라바 게로비치(Slava Gerovitch)의 초기 저작인 『뉴 스피치에서 사이버 스피치로-소련 사이버네틱스의 역사(From Newspeak to Cyberspeak: A History of Soviet Cybernetics, 2004)와 앤드류 피커링(Andrew Pickering)의 『사이버네틱 뇌-또 다른 미래에 대한 스케치』(The Cybernetic Brain: Sketches of Another Future, 2010)는 이러한 제한된 역사를 넘어 사이버네틱스를 이해하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사이버네틱스의 풍부한 내용은 아직 다 탐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이버네틱스를 여러 지역에 따라 분류하고 싶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사이버네틱스에 국적을 부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의 정신역(noosphere)이 기여한 바에 대한 감사에서 시작된 스탠포드 비어(Stanford Beer)의 강연 ‘힘의 재귀성’(Recursion of Power)에서 주장한 것처럼, 사이버네틱스는 보편적인 과학을 지향하므로 특정 국가<14>에 고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7] 동시에 보편적 과학으로서 ‘장소화’(placed)되어야 하고, 따라서 ‘지역화’를 따라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헤겔이 말한 바, ‘추상적 보편’으로 남을 것이다.
사회 정치적 함의라는 측면에서 사이버네틱스는 ‘인간의 비인간적 사용’을 제거함으로써 ‘인간의 인간적 사용’을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기계가 비인간적이라고 여겨지는 작업을 대신할 수 있고 인간은 인간적 사용을 위해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마티유 트리클로(Matthieu Triclot)의 분석처럼 초기의 사이버네틱 사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오늘날의 사이버네틱적 사고는 더 이상 고전적 메커니즘의 하향식 접근 방식을 취하지 않고 우발성과 불규칙성을 환영하는 유연성을 제공하는 새로운 종류의 기술관리체계(technocracy)를 도입했다. 이런 의미에서 사이버네틱스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물론 무정부-신자유주의 경영의 실현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모호한 측면도 있다. 이는 인식론적으로 사이버네틱스가 기계론과 생기론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고 피드백에 기반한 유기체적 가동 이론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2차 사이버네틱스는 생물학 및 신경과학의 복잡한 조직은 물론 비즈니스 관리 분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스 요나스에 따르면 사이버네틱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만연한 이원론적 논리를 극복하고 통일된 논리를 제시했으며, 고타드 귄터(Gotthard Günther)에 따르면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의 2가 체계를 극복하고 3가 또는 다가 논리를 지향한다.[8]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위너는 사이버네틱스를 다른 모든 학문을 통합할 수 있는 보편적인 학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피드백과 정보에 기반한 사이버네틱 사고는 실제로 생명체와 생명 현상의 역동성을 이해하기 위한 일반화된 모델, 더 정확하게는 피드백과 항상성에 기반한 개체화 이론을 제공한다. 사이버네틱스는 고전 역학과 기계론보다는 열역학과 생물학에 더 가깝다. 2차 사이버네틱스의 승리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열역학적 <15>이데올로기, 즉 자유 시장 경제, 신자유주의 및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의 부상과도 공명 할 수 있다. 따라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사이버네틱스에서 자신의 시장 메커니즘에 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을 발견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9]
오늘날 공학 커리큘럼에서 잊혀진 용어인 사이버네틱스는 우리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교육의 맥락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이 회고적 운동은 학과들의 분리, 학제 간 방법론의 피상성, 아트-테크(art-tech) 열정의 공허함 등 현재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 읽을 수 있다. 사이버네틱스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 그리고 거의 알지 못했던 것 - 이상을 보여줄 수 있으며, 새로운 횡단학제적 접근의 가능성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해준다.
21세기는 사이버네틱스의 세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이버네틱스와 인공 지능, 인공 지능과 머신 러닝을 구분하려고 노력해 왔다. 사이버네틱스와 오늘날의 AI는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하지만, 사이버네틱스가 현대 자동화의 인식론적 토대를 마련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술의 적용은 디지털 장치를 통한 정적 제어와 관련이 있으며, 사이버네틱스와 군사 연구의 밀접한 관계는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관찰은 모두 진실이며 중요한 것이다. 티쿤(Tiqqun)의 『사이버네틱 가설』(The Cybernetic Hypothesis, 2020)이 경고하듯이 사이버네틱스를 정치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그런 식의 적용은 경찰 국가와 감시 사회를 양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경향에 맞서고 저항해야 한다. 그럼에도 감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지나 하이데거의 판단을 넘어서는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철학적으로 보다 적절한 이해 또한 절실히 요구된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사이버네틱스는 기술도 인공물(artefact)도 아닌 일반화된 과학적 방법 또는 완결된 형이상학에 가깝다.[10] 우리는 아직까지 사이버네틱스가 시도한 가능성과 진정한 학제 간 연구를 위한 잠재적 적용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우리 당대에 그것의 현실화로 인해 야기될 곤경을 <16>탐색하지 못했다. 생태학적 사고(여기서는 사이버네틱스와 생태화의 유사성에 관한 에리히 횔 Erich Hörl의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11] 인공지능(1956년 다트머스 회의Dartmouth conference는 메이시 회의의 여파에 대한 대응이었다), 복잡계 이론(지구 시스템 과학과 역사동역학Cliodynamics 등 오늘날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이론)은 이런 의미에서 사이버네틱스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사이버네틱스의 역사로 돌아가는 것은 현대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여기서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사이버네틱스의 역사적 중요성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위한 사이버네틱스, 즉 20세기의 틀과 이념적 순진함을 뛰어넘는 기술과 기술적 상상력에 대한 호소이다. 여기서 순진함이란 사이버네틱스의 객관성에 대한 주장으로 이루어지며, 이런 의미에서 사이버네틱스는 여전히 과학이다. 우리는 뤼네부르크(Lüneburg)에 있는 니클라스 루만의 집 바깥 벽에 그려진, 루만이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사회 이론을 발명했다는 주장을 기억한다![12] 애석하지만,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사회 이론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루만을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의 혁신적이고 체계적인 접근 방식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순진함 외에도 헤일즈와 내가 기고문에서 제안했듯이 기계와 유기체 사이의 대립(1990년대 사이보그 개념으로도 표현됨)을 극복하려는 열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트랜스휴머니즘적 미래를 추구하는 순진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불멸과 초지능을 갈망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
1971년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은 알코올 중독자를 가두는 피드백 루프를 설명했다. “맥주 한 잔이면 죽지 않아, 이미 시작했으니 두 잔은 괜찮겠지, 벌써 두 잔인데 세 잔은 왜 안 돼?” <17>알코올 중독자는 운이 좋으면 치명적인 질병이나 교통사고에서 살아남는 등 ‘바닥을 치는 것’으로 이 긍정적 피드백 루프에서 벗어날 수 있다.[13] 우리 현대인은 니체가 『즐거운 학문』(The Gay Science, 1882)에서 묘사한 것처럼 무한에 대한 추구가 무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진보의 긍정적 피드백에서 벗어나지 못한 알코올 중독자와 같다.[14] 우리의 방향 전환 프로그램에는 사이버네틱적 사고를 계승하면서 그 중독성을 극복하려는 바, 베이트슨의 의미에서 새로운 재귀적 인식론이 필요하다.[15] 이 새로운 프로그램은 사이버네틱스에서 출발할 수 있으며, 사이버네틱스를 넘어섬으로써만 지속 가능한데, 이는 바렐라가, 한편으로는 위너, 다른 한편으로는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과 앨런 튜링(Alan Turing) 사이의 대립을 통해 자유의 개념을 되찾으려 했던 사이버네틱스의 역사 속에서도 시도된 적이 있다.[16]
역사적이며 지리적인 의미에서 인식론적 재구성에 초점을 맞춘 이 논문집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사이버네틱스에 속한 개념들의 역사에 집중한다. 브루넬라 안토마리니(Brunella Antomarini)의 「합리주의 번역-라이프니츠와 사이버네틱스」(Translating Rationalism: Leibniz and Cybernetics)는 라이프니츠가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개념에 미친 영향에 대해 회고하고, 왜 라이프니츠가 사이버네틱스의 수호 성인으로 불리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나의 「기계와 생태학」(Machine and Ecology)은 사이버네틱스를 철학사 내에서 『판단력 비판』(1790) 이후 칸트 철학의 유기체적 조건을 완성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재구성한다. 나는 하이데거의 세미나 「횔덜린 찬가 “아이스터”」(Hölderlin’s Hymn “The Ister”)를 다시 읽음으로써 사이버네틱스가 훨씬 더 넓은 맥락 - 이것은 베이트슨의 재귀적 <18>인식론의 정신이다 - 즉, 지역성 속에서 재정위화되어야 하며, 이러한 의미에서만 우리는 기계의 생태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마티유 트리클로의 「1차 사이버네틱스에서 존재론과 정보의 정치」(Ontology and the Politics of Information in the First Cybernetics)는 정보 존재론에 대한 논쟁으로 돌아가 - 로봇의 지배와 대량 실업에 대한 현대의 편집증에 비추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는 - ‘인간의 비인간적 사용’ 을 제거하려는 위너의 노력을 따라 그러한 존재론의 사회정치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캐서린 헤일즈의 「해독하는 사이버네틱스-항상성에서 자가생성 그리고 그 너머」(Detoxifying Cybernetics: From Homeostasis to Autopoiesis and Beyond)는 사이버네틱스의 1, 2차 물결 - 특히 기계-유기체를 실현하려는 노력 - 과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와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의 공동연구를 재조명함으로써 사이버네틱스를 해독할(detoxifying) 것을 제안한다. 헤일즈는 생명체와 그 환경을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살아있는 비인간 유기체, 컴퓨터 미디어로 구성된 인지적 집합체로 구성된 ‘테크노심바이오시스’(technosymbiosis)라는 새로운 틀을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도리언 세이건의 특별 기고문 「제임스 러브록, 가이아, 그리고 생물학적 존재의 기억」(James Lovelock, Gaia, and the Remembering of Biological Being)이 있다. 여기서 그는 제임스 러브록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러브록과 그의 어머니인 린 마굴리스와의 만남을 설명하고 있다. 세이건의 이야기는 개인적인 증언일 뿐만 아니라 가이아 이론의 과학적 철학적 토대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특별 기고문은 원래 러브록이 사망한 후 ‘철학과 기술 연구 네트워크’(Research Network for Philosophy and Technology)에서 의뢰한 것이다.
2부에서는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이버네틱스의 발전과 그 의미를 살펴본다. 앤드류 피커링(Andrew Pickering)은 영국의 사이버네틱스와 뇌와의 관계, 그리고 뇌를 넘어 예술과 사회로 확장된 그 궤적을 설명하며 사이버네틱스의 상상력을 나의 개념인 코스모테크닉스와 재연결한다. 슬라바 게로비치(Slava Gerovitch)는 소련의 과학자들이 어떻게 미국의 사이버네틱스를 거부하고 자국의 사회경제적, 정치적 제약에 따라 다른 모델을 개발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AI와 사이버네틱스의 보편성에 도전한다. 미하엘 크르지코프스키(Michał Krzykawski)는 사이버네틱스와 역사 유물론 사이의 대화로서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사이버네틱스 역사를 소개한다. 또한 1843년 암페르의 영향을 받아 『국가 통치의 기술로서 철학과 사이버네틱스의 관계』를 출간한 브로니스와프 트렌토프스키(Bronisław Trentowski)의 작업도 제시한다. 딜런 레비 킹(Dylan Levi King)은 핵 과학자 첸 쉬센(Qian Xuesen)<19>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 사이버네틱스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한 자녀 정책과 계획 경제에서 놀랄만한 사이버네틱적인 함의를 설명한다. 데이비드 마울렌 데 로스 레예스(David Maulén de los Reyes)는 칠레의 사이버신 프로젝트를 전후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사이버네틱스의 도입과 적용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제공한다. 레예스는 칠레의 사이버신을 넘어 범 라틴아메리카 사이버네틱스 운동(예컨대 멕시코, 콜롬비아, 우루과이)과 미국과 유럽의 지적 교류와의 관계에 대해 훨씬 더 폭넓은 시각을 제시한다. 다이스케 하라시마(Daisuke Harashima)는 일본에서 사이버네틱스, 특히 노미 오히(Nomi Ohi)와 토루 니시가키(Toru Nishigaki)의 연구로 유명해진 신사이버네틱스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발전한 2차 사이버네틱스의 수용에 대해 설명한다. 하라시마는 우리가 평화를 유지하고 생명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이버네틱스를 구상한다. 그는 (‘영혼soul의 사이버네틱스’와 구별되는) 마음(heart, 코코로kokoro)의 사이버네틱스를 소개하며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문화 간 이해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주제를 제시한다.
이 책은 ‘21세기를 위한 사이버네틱스’ 연구 프로젝트의 첫 번째 논문집이다. 이 책은 사이버네틱스의 지도를 확대하려고 시도했지만, 20세기에 등장한 사이버네틱스 사유의 전체 범위를 다루기에는 여전히 너무 제한적이다. 또한 사이버네틱스와 오늘날의 생명공학, 신경과학, 군사 기술, 우주 기술 간의 관계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는 미래를 충실히 상상할 수 없듯이, 이 역사-인식론적 프로젝트가 사이버네틱스의 역사와 그 영향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프로젝트의 두 번째 단계에서는 사이버네틱스의 미래를 다룰 예정이며, 이와 관련하여 『21세기를 위한 사이버네틱스 2』(Cybernetics for the 21st Century Vol. 2)를 구상하고 있다.
<주석>
[1] Heinz von Foester, ‘Cybernetics of Cybernetics’, in Communication and Control, ed. K. Krippendorff (New York: Gordon and Breach, 1979), 5–8.
[2] Cybernetics The Macy Conferences 1946–1953: The Complete Transactions, ed. Claus Pia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6).
[3] Martin Heidegger, ‘Nur noch ein Gott kann uns retten’, Der Spiegel, 30 May 1976, 193–219.
[4] Martin Heidegger, ‘The End of Philosophy and the Task of Thinking’, in On Time and Being, trans. Joan Stambaugh (New York: Harper & Row, 1972) 또한 Yuk Hui, ‘Philosophy after Automation’, Philosophy Today 65 no. 2 (2021): 217–33 도 참조.
[5] Gilbert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Paris : Aubier, 2012[1958]), 147.
[6] Yuk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London: Rowman and Littlefield International, 2019).
[7] Stafford Beer, ‘Recursion of Powers’, in Power, Autonomy, Utopia, ed. Robert Trappl (New York: Plenum Press, 1986).
[8] Hans Jonas, The Phenomenon of Life: Toward a Philosophical Biology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2001), 111; Charles Parsons, ‘Gotthard Günther’, in Gödel’s Collected Works, vol. 4, ed. Solomon Feferman and John W. Dawson (Oxford: Clarendon, 2003), 458.
[9] F. A. Hayek, Law, Legislation and Liberty: A New Statement of the Liberal Principles of Justice and Political Economy (London: Routledge, 1982), xviii.
[10] Yuk Hui, ‘ChatGPT, or the Eschatology of Machines,” E-flux 137, https:// www.e-flux.com/journal/137/544816/chatgpt-or-the-eschatology-of-machines/.
[11] Erich Hörl, ‘A Thousand Ecologies: The Process of Cyberneticization and General Ecology’, in The Whole Earth: California and the Disappearance of the Outside, ed. Diedrich Diederichsen and Anselm Franke (Berlin: Sternberg, 2013), 121–30.
[12] 벽에 적힌 글귀는 다음과 같다.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1927년생)은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이 저택에서 보냈다. 그는 사회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분석하면서,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 이론을 창안했다. 이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13] “The Cybernetics of “‘Self’: A Theory of Alcoholism”이라는 논문은 Gregory Bateson, Steps to an Ecology of Mind (Northvale: Jason Aronson, 1987)에 수록되어 있다.
[14] Friedrich Nietzsche, The Gay Science, ed. Bernard Williams, trans. Josefine Nauckhoff and Adrian Del Cargo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119, aphorism 124. “우리는 육지를 떠나 출항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 뒤의 육지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니 우리의 배여, 앞을 바라보라! 네 곁에는 대양이 있다. 대양이 항상 포효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 그것은 비단과 황금, 자비로운 꿈처럼 그곳에 펼쳐져 있다. 하지만 언젠가 이 대양이 무한하다는 것을, 그리고 무한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올 것이다. 오, 한때 자신을 자유롭다고 느끼다가 이제 새장의 벽에 몸을 부딪고 있는 새여! 마치 육지에 자유가 있었다는 듯 향수가 너를 사로잡는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로다! ‘육지’는 이제 없다!”[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1881년 봄~1882년 여름)』, 안성찬, 홍사현 옮김, 책세상, 2005, 199]
[15] 앤드류 피커링이 이 책에서 제안하고, 내가 지난 책에서 직접 했던 것처럼 예술을 통해 사유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Yuk Hui, Art and Cosmotechnic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21) 참조.
[16] Francisco Varela, ‘Steps to a cybernetics of autonomy’, in Power, Autonomy,
Utopia, ed. Robert Trappl (New York: Plenum Press, 1986), 11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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