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k Hui, Art and Cosmotechnic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21, Preface_Introduction
*원문서지: Yuk Hui, Art and Cosmotechnic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21.
'< >'은 원문 쪽수, '[ ]'은 주석 번호. 주석은 여기에 반영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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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
이 최신 연구는 나의 최근의 책인 『재귀성과 우발성』의 후속편으로 읽힐 수 있다. 그 책에서 나는 재귀성 개념을 소개하면서 그것을 확장했으며, 서양철학에서 재귀적 사유의 역사를 구성했다. 이 책은 미학을 주제로 취하는데, 이때 그것을 인지의 하위 능력으로 취급하는 대신, 논리의 영역으로 이전시킨다. 이로써 나는 이 책에서 탐구하는 비극 논리(tragist logic)와 사이버네틱 논리(cybernetic logic)의 재귀성에 대한 병치 안에서, 도교 사상(Daoist thinking)에서의 재귀성을 개괄하는데 집중한다. 이러한 해석은 위진(Wei-Jin) 시대의 왕필(Wang Bi, 226–249)의 사상 뿐 아니라 신유학 철학자인 모종삼(Mou Zongsan, 1909–1995)으로부터도 광범위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나는 예술사가도 아니고 예술 비평가도 아니며, 이 연구는 그러한 영역에 속하려고 의도하지도 않는다. 『예술과 코스모테크닉스』는 우선 하이데거가 다음과 같이 물음으로써 서양철학의 종말이라고 불렀던 것 이후 아직-미확인된 어떤 것에 대한 응답이다. 즉 철학의 종말 이후 그리고 포스트-유럽 철학에서 예술의 위치는 무엇인가? 두 번째로 이 책은 예술의 질문과 그 경험의 다양한 양태들을 재개방함으로써, 아직 오지 않은 예술과 그러한 철학을 표명하면서, 미적 사유가 우리의 탐구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 묻기를 희망한다.
이 연구는 산수화(shanshui, 문자 그대로 산과 물)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하는데, 이것은 나의 어린시절부터 줄곧 내 안에 살아 있었던 어떤 미학적인 것이다. 2015년에 항저우에 있는 중국예술학교에서 강의하기 위해 가오 시밍(Gao Shiming) 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초대되었을 때, 유럽에서 공부하고 가르치기 위해 떠난 이후 내가 미뤄 놓았던 이러한 미학적인 것들을 재발견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가오 시밍과 한 많은 토론으로부터 혜택을 받았으며, 그는 언제나 중국과 서양 고전들 양자에 대한 지식은 물론 현대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창조적이고 도발적인 방법으로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 이후로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와 더불어 매 해 봄에 항저우에서 가르쳤다. 나는 그와 서호(West Lake)를 따라 걸으며 수많은 토론을 했었다. 중국예술학교와 항저우 서호는 이 연구에 도움을 준 영감의 원천이었다. <xx>나는 호숫가의 흔들리는 버드나무들 아래에 앉아 있던 늦봄의 밤을 기억한다. 나는 그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벌레들의 소리를 들으며 물의 반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일상은 불행하게도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판데믹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그리고 베르나르와의 토론도 결국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었다. 그가 없는 항저우는 더 이상 같은 장소가 아닐 것이다. 내가 존슨 창(Johnson Chang)을 만날 기회를 가졌던 곳도 역시 항저우였다. 그리고 나는 중국 문화와 미학에 대한 그의 풍부한 지식, 거의 모든 것에 대한 그의 호기심와 열정, 그리고 그의 관대함으로부터 커다란 은혜를 입었다. 이 연구는 그에게 바쳐진다.
베를린 샬로텐부르그의 베르그루엔 미술관에서 열린 현대 회화전은 엄청난 영감을 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수 주를 보냈다. 바우하우스 대학에서 가르치는 헤닝 슈미트겐(Henning Schmidgen) 교수의 따뜻한 환대로 나는 클레와 칸딘스키의 기록들을 깊이 생각하였고, 마찬가지로 이 원고를 함께 생각했다. 나는 또한 여러 가지 원고들을 읽고 조언을 해 주었던 친구들과 동료들, 배리 슈바프스키(Barry Schwabsky), 마르티언 뷰이스(Martijn Buijs), 피에터 레멘스(Pieter Lemmens), 안더스 듕커(Anders Dunker), 쥬드 켈러(Jude A. Keeler) 그리고 코헤이 이세(Kohei Ise), 또한 2016년과 2020년 기간동안 내 세미나에 참여했던 루네부르그와 바이마르, 항저우 그리고 홍콩의 나의 학생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표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나는 브라이언 쿠안 우드와 콜린 베케트의 훌륭한 편집작업과 비판적 코멘트 그리고 매우 귀중한 제안들에 대해서도 감사드리고 싶다.
육후이, 2001년 봄, 홍콩
서문: 감각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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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극적 우주질서의 역사 심리학
2016년 12월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프랑수아 줄리앙(François Jullien)과 함께한 공개토론회에서, 미국 시인이자 예술비평가인 배리 슈바프스키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그리스적 의미에서 비극이 중국에는 존재했는가? 만약 아니라면, 중국에서는 왜 그와 같은 생각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줄리앙 선생은 즉시 대답하길, “중국은 비극을 회피하는 사유[pensée] 형식을 발명했지요.” 비극을 회피한다? 그보다 오히려 중국은 비극적 사유가 번성할 토양을 제공하지 않지 않았나? 말하자면 중국의 역사 심리학은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의 그리스와 같은 방식으로 비극적 사유를 결코 개발하지 않았다. 중국학자인 자크 게르네(Jacques Gernet)와의 대화에서, 그리스 연구자인 장 피에르 베르낭은 그러한 것이 그리스 문화에 있는 대립자들 – 신 대 인간, 비가시성 대 가시성, 영원 대 가멸성(mortal), 항구적인 것 대 변화하는 것, 역능 대 무능, 순수한 것 대 혼합된 것, 확실성과 불확실성 - 에 해당하는 것이 중국에는 아마도 부재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는 어째서 그리스인들이 비극을 발명한 반면, 중국인들이 그러지 않았는지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일 것이다.
줄리앙이 언급했던 바는 오직 우리가 비극을 통속적 의미, 즉 슬픈 결말을 가진 이야기로 이해할 때에만 타당하다. 하지만 줄리앙은 그리스학자이면서 중국학자로서, 그와 같은 일상적 의미로 비극을 이해한다고 추정할 수 없다. 비극 예술은 서구 예술에서 특별한 입장을 가진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언급에서, 비극이란 ‘시 예술의 정점’이며 ‘가장 높은 시적 성취’이다. 정확히 말해 중국은 비극을 회피하기 위한 사유의 방법을 발명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에서 비극의 탄생이 특정한 역사적 심리학으로부터 출현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이 특수성은 고대 그리스의 대극 요소가 중국에는 부재한다는 베르낭의 주장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4>그리스의 비극적 역사 심리학이란 무엇인가? 오랫동안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에는 있고, 다른 문화권에서는 부재하는 비극의 특수성에 대한 질문을 던져 왔다. 예컨대 죠지 슈타이너(George Steiner)는 『비극의 죽음』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동양 예술은 폭력, 비애 그리고 자연의 공격 또는 인위적인 재난을 안다. 일본 연극은 잔인함과 의례적인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우리가 비극 드라마라고 부르는 바, 인물의 고통과 영웅주의에 관한 그 재현은 서구적 전통과는 구분된다.
슈타이너가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즉 예컨대 중국에서 비극 드라마로 알려진 장르는 원나라의 치세 기간(1279–1368) 동안 등장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몽골족의 지배 기간에 마르코 폴로는 파스타를 중국으로부터 유럽으로 전파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의 비극 드라마는 그리스 비극과 관련된 영웅주의를 결여하며, 하늘로부터 부여되는 정의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을 뿐인 부정의 – 부패, 배신 등등 - 에서 기인하는 분노와 우울함에 의해 주로 추동된다.
예를 들어 중국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비극, 『두아원』(竇娥冤)에서 과부 두아는 그녀에게 닥친 부당함에 대항하여 그 어떤 영웅적인 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매매혼을 당했다. 그녀의 어린 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그녀를 탐내던 불량배의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기소당한다. 사실은 그 불량배 자신이 두아의 양엄마를 독살하려고 했으나, 그의 아버지가 실수로 그것을 마셨던 것이다. 두아가 참수당하기 전, 그녀는 죽음 이후 그녀가 결백하다는 것을 세 가지 사건을 통해 증명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녀의 피가 그녀의 옷을 적실 것이지만 바닥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6월에 이상하게도 눈이 와서 그녀의 원한을 표현할 것이며, 그녀의 고향 추저우(Chuzhou)가 3년간 가뭄에 시달릴 것이라는 것이다. 하늘이 그 부당함을 목격하였으며 두아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딱 3년 뒤, 두아의 혼령이 원한을 토로하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5>(그는 이제 정부 관료가 되었다) 앞에 나타났을 때, 재판이 다시 열렸으며, 정의는 회복된다. 이 이야기에서는 그 어떤 영웅적인 하마르티아(hamartia, ἁμαρτία), 즉 영웅을 파탄으로 이끌고 가는 비극적 흠결 또는 죄가 없다. 중국 문학의 이러한 비-영웅적 비극 작품은 그리스와 비교할 때 사실상 인간과 우주 사이의 어떤 근본적으로 상이한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차이는 중국에는 고대 그리스의 대극 요소(polar oppositions)가 부재한다는 베르낭의 주장에 의해 적절하게 규정되는가? 또는 여기에 보다 근원적인 구별이 작품 상에 존재하는가? 이항 대립은 중국 사유에 근본적인데, 유(有, being/having)와 무 (無, nothing)에 관한 도교 사상의 담론이 그러하다. 오히려 여기에 특별히 그와 같은 대극 요소들의 작동에서 무언가 재표명될 필요가 있는 미묘한 것이 있는 것일까? 이 핵심적인 질문은 2장에서 현(xuan, 玄)의 논리를 통해 제기될 것이다. 우선 우리는 그리스 비극의 역사적이고 우주론적인 특수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비극에 관한 근대적 독법에 반하여 – 특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관한 프로이트의 재고 – 베르낭과 피에르 비달-나퀴에(Pierre Vidal-Naquet)는 그들의 책인 『신화와 비극』에서 그리스 비극 시대의 특수성을 보편화하려는 시도를 비판한다.
프로이트적 해석에서 비극에 관한 이 역사적 측면은 완전히 이해될 수 없이 남는다. 만약 비극이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는 꿈의 유형으로부터 그것의 재료를 이끌어 낸다면, 만약 비극의 영향력이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수행하는 어떤 정서적 콤플렉스에 대한 반응에 의존한다면, 어째서 비극이 5세기와 6세기 경 그리스 세계에서 탄생했던 것일까? 왜 다른 문명들은 비극에 대한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일까? 그리고 왜 비극의 영향력이 그토록 빠르게 그리스 자체에서 소멸되었으며, 비극이 그것의 극적인 우주를 구축했던 모순들을 떠난 철학적 사유 유형이 이성적으로 그것들을 고려함으로써 그 자리를 대체했던 것일까?
<6>베르낭의 고대 그리스에 관한 연구는 그의 스승인 이그나스 메이에르송(Ignace Meyerson, 1888–1983)의 역사 심리학 이론에 영향을 입었다. 메이에르송은 그 자체로 심리적인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어떤 보편적이고, 영원하며, 심리적인 의지의 기능도 없다고 논했다. 비극은 심리적 기능들에 의해 외화된 영혼의 객체화된 형식으로 비춰질 수 있다. 심리학이 역사적인 한에서, 그것의 객체화된 형식(비극)도 또한 역사적이다. 이것은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의 1773년 에세이 『셰익스피어』를 반향하는데, 여기서 그는 프랑스의 피에르 꼬르네이으(Pierre Corneille)나 쟝 라신느(Jean Racine) 또는 영국의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이 그리스 비극들과 비교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것들의] 세계관, 태도, 심지어 음악, 표현 그리고 환영의 정도들”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
그리스 비극의 역사적이고 우주론적인 특수성 둘 모두를 내세워 보자. 비극 시대는 고대 그리스 기원전 6세기와 5세기를 지칭하는데, 그렇다면 이 시간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니체는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자들이 “점증하는 세속화의 막대한 위험과 유혹[ungeheuren Gefahren und Verführungen der Verweltlichung]”, 즉 허무주의를 보았다고 말했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 시대에서 철학』에서 니체가 소묘한 탈레스로부터 아낙사고라스까지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모두 감각적 세계와 이성적 세계 간의 증가하는 양립불가능성에 직면해야 했으며, 이것은 비극 시대를 규정지었다. 과학 또는 일반적으로 합리성은, 아폴론적 합리성이 디오니소스적 충동에 대해 그러한 것처럼, 또는 조형 예술이 음악에 대해 그러한 것처럼 신화와 정념의 세계와 긴장을 형성하고 있다. 합리성은 에피스테메(epistēmē, 인식소)에 따라 감각적 세계를 설명하길 원하지만, 그와 같은 세계는 객관적으로 충분히 파악될 수 없다. <7>그러므로 철학의 임무는 이러한 갈등을 화해시키거나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니체에 따르면 그와 같은 시도를 세계의 기초 구성요소로서 물을 이론화하면서 구현한 첫 번째 철학자가 탈레스다.
이러한 명제에 대해 우리가 심각한 관찰을 할 필요가 정말 있는가?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것이 모든 사물들의 제일 기원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 주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은 이미지나, 우화를 피하고 언어적으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기에는 “모든 것은 하나다”라는 오로지 맹아적으로 사유인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여전히 종교와 미신과 더불어 탈레스에게 남겨져 있다. 두 번째는 그와 같은 동행으로부터 그를 빼내어 그를 자연과학자로 드러내지만 세 번째는 그를 첫 번째 철학자로 만든다.
탈레스는 종교적 세계와 과학적 세계 둘 모두에 대해 말했지만, 그 각각의 유혹 너머로 나아갔다. 만약 그가 “물은 흙으로 돌아간다”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단순히 어떤 과학적 가설일 것이지만, “모든 것은 하나다”라는 것은 오로지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사유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기원이나 시초(archē)에 관한 질문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과학적 원리를 훨씬 상회하며, 이는 탈레스를 서구와 비극 시대의 첫 번째 철학자로 만든다. 만약 탈레스가 이러한 명칭을 받을만 하다면, 그것은 그가 세계를 어떤 물로 구성된 하나의 통일체로 이론화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마치 헤겔이 이후 역사적 과정의 필연성을 성찰했던 것처럼, 불가피한 갈등들이 속한 관점들에서 문화에 관한 재형성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8>달리 말해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갈등 형식 안에서 위기로서 발원한 것이며, 이것이 비극적 사유의 조건이다. 이러한 갈등은 아낙시만드로스,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여타 철학자들에 편재한다고 니체는 분석했으며, 이와 유사하게 도래하는 필연성으로서 비-존재에 관한 파르메니데스의 논리적 문제에 대한 의심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리스의 비극 시대 동안, 호메로스의 아폴론적 서사시의 고결한 단순성 – 니체가 ‘아름다운 환영’이라고 불렀던 것 – 은 허무주의에 대한 처방 역할을 그만둔다. 이에 반해 철학의 탄생은 역사적 진보로부터 유래하는 근본적으로 급진적인 대립들과 모순들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그 극적 형식에서 비극은 운명의 필연성과 인간적 자유의 우연성 사이에 있는 모순을 표현한다. 이 모순은 신들과 인간들, 국가와 가족 간의 대립으로 투사되거나 보다 일반적으로 두 종류의 디케(dikē, Δίκη, 질서[정의]), 즉 『안티고네』에서 발견된 바, 죽음의 디케와 천사의 디케와 같은 것으로 투사된다. 소포클레스의 탁월한 작품에서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해결한 뛰어난 지성을 가진 인간이지만, 그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동침하는 죄악을 저지르는 것을 피하진 못했다. 그러나 아폴로의 예언자 티레시아스가 말한 것처럼, 신들은 오이디푸스가 깨닫지 못했던 바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는 국가의 법(적을 국토에 매장하지 않는다)과 가족의 의무(그녀의 오빠를 매장하는 것) 사이의 갈등을 마주해야 했다. 국가수장이자, 안테고네의 삼촌이면서 그녀 약혼자에게는 아버지였던 크레온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베르낭에 따르면 이 갈등은 동시에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심리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비극은 예술 형식 뿐 아니라 하나의 사회 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비극적 전환점은 사회적 경험의 심장부에서 어떤 간극이 전개될 때 발생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사법적이고 정치적인 사유 사이의 대립이 충분히 광범위해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신화적이고 영웅적인 전통들이 상당히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치에 있어서 갈등이 여전히 고통스러운 것이고 충돌이 계속 발생한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9>비극적 영웅은 에토스(ethos)와 다이몬(daimon) - 결정적인 갈림길에 있는 어떤 종교적 권능 – 양자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에 놓여 있다. 니체와 같은 사람들은 비극의 몰락이 고대의 소크라테스적 낙관주의의 과학적 ‘문제해결주의’(solutionism)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해 왔다. 즉 우리는 기예(mechanical art) 의 백과전서적인 낙관주의 안에서, 그리고 오늘날 생명공학과 공간 테크놀로지론의 트랜스휴먼적인 낙관주의 안에서 이것의 반향을 발견한다. 과학적 합리성의 승전보는 비극 시대에 종말을 고했는데, 왜냐하면 비극은 더 이상 아테네 철학의 심리학과 전반적으로 양립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의 비판은 철학에 대한 그의 불만으로부터 부분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건전한 문화 안에서 그 전반적인 전망을 성취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철학을 “유용하고, 회복시키며 또는 예방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건강한 문화다. 대조적으로 병든 문화, 이를테면 니체 자신의 시대에서, 철학은 질환을 더 악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니체에게 흥미로왔던 것은 그가 배제되었던 바, 철학이라고 불리는 분과가 아니라 교육을 통한 문화의 재형성이다. 니체에게, 고대 그리스는 “우리가 문화적 건강성이라고 칭할 만한 것을 위한 가장 탁월한 권위”를 대표했으며, “진정으로 건강한 그들의 문화를 가진 그리스인들은 단순히 다른 이들보다 더 그것에 참여함으로써 그리고 보다 충분하게 그것에 참여함으로써 단번에 철학을 정당화했다.”
§2 비극 예술의 재귀 논리
이런 의미에서 비극과 비극적 드라마는, 횔덜린이 그의 미완의 비극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에서 했던 것처럼, 신화와 과학, 신앙과 합리성을 조화시킴으로써 ‘문화적 재형성’을 시도하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니체 또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바이로이트 축제와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을 통한 그리스 연극의 재생에서 이러한 시도를 발견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비극을 <10>감각의 교육(Ausbildung des Empfindungsvermögens)이라고 한 프리드리히 쉴러를 따를 수 있다. 비극 드라마의 작동 양상은 플롯을 통해 감정을 조장하는 것을 중심에 놓는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카타르시스라고 부른 것을 생산한다. 카타르시스는 종종 ‘정화’ 또는 ‘하제’(purging)로 번역되는데, 의학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때로는 ‘지성의 정화’로도 번역된다. 길고 느리게 진행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비교해서, 압축적이고 드라마틱한 비극 공연은 보다 신속하고 효과적인 정화 효과를 가져온다. 몇몇 저자들은 카타르시스가 미학적 개념에 더 가깝다고 강조했다. 플롯의 구성에는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연민과 공포가 있는데, 이것은 그와 같은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동반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가 오직 일반적으로 어떤 풍부하게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비극의 형식적인 구성요소라는 점에서 논했다. 폴리스를 위협하고 위험에 빠트리는 것이라는 비극적 정서에 대한 플라톤의 부정적인 언급과는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에 긍정적인 의미부여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에 관한 저작은 주로 비극의 요소들에 관한 분석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페테르 손디(Péter Szondi)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비극의 시학이 있어온 것이다. 오직 셸링 이후에야 비극의 철학이 있게 되었다.” 달리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비극이 아직 감각의 교육으로 대우 받을 만한 철학적 높이를 획득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치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핵심적 대상은 정서인데, 반면 셸링의 비극에 관한 이해는 비극의 요소를 정서로부터 논리로 승격했다. 이것은 장차 비극적 논리(tragist logic)로 불리워진다. 어째서 셸링의 시대(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비극의 철학이 가능해졌는가?
확실히 여기에는 많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예술에 있어서 그리스 고전으로의 회귀가 요한 요아킴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의 1754년 논문인 「그리스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 모방에 대한 사유」(Thoughts on the Imitation of the Painting and Sculpture of the Greeks) 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이 있다. 여기서 그는 “우리가 탁월해질 유일한 방법, 그리고 실제 –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 위대해질 수 있는 방법은 고대인들을 모방함으로써이다”라고 주장했다. <11>프랑스에서도 신구논쟁(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이 있었다. 여기에는 영국의 셰익스피어는 말할 필요도 없고. 피에르 브루모이(Pierre Brumoy)의 『그리스 연극』, 코르네이유, 라신느, 볼테르 그리고 몰리에르도 속한다. 또한 레싱으로부터 헤겔에 이르는 주류 독일 지성도 포함된다.
여기서는 이러한 역사적인 선례들을 풍부하게 탐색하는 대신, 고대 그리스 비극에 관한 베르낭의 역사 심리학과 더불어 어떤 보다 도발적인 가설들로 나아가서, 18세기 독일에서의 비극 재생에서 우리가 비극의 인식론이라 간주할 수 있는 것을 제안한다. 셸링의 연구에서 예화된 것처럼, 이러한 재생은 일반적으로 감각적인 것의 조직화와 그것의 지배적 인식론(심리학 대신에) 사이의 관계와 연관된다. 인식론과 그것을 이끄는 논리에 대한 이 강한 강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없었으며, 이로써 손디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게 우리를 돕는다.
셸링의 『예술철학』(Philosophy of Art, 1805)의 첫 번째 문장은 “예술에 관한 방법론적 연구 또는 과학은 우선 예술의 역사적 구성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인과 논리는, ‘제일 원동자’ 안에서 제일 원인을 추적하려는 궁극적인 시도에서 표현된 바대로 선형적이다. 비극 플롯구성에 대한 이해가 원인에서 결과로 또는 결과에서 그 원인의 폭로로 달려 간다는 것에 제한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선형적 의미 안에 있는 것이다. 만약 사실상 비극의 철학이 셸링과 더불어 가능해졌다면, 그것은 셸링이 유기적이고, 창발적이며 비-선형적 논리에 기반된 반-기계론적 자연철학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셸링에게 있어서 예술은 “통일되고, 유기적이며 그 모든 부분에서 자연으로서의 전체에 필수적인 것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사상의 유기성(organicity)은 비극 드라마에서 셸링이 운명의 필연성과 인간 행위의 우연성 간의 불가피한 대립과 겉보기에 <12>해결불가능한 모순에 대한 어떤 가능한 해결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철학적으로 교조주의와 비판이라고 불리워지는 것 안에서 이러한 대립을 발견할 수 있다. 교조주의는 지식의 조건들에 대한 질문 없이 그것의 조건들을 받아들이지만, 비판은 무조건적인 확실성, 다시 말해 절대성(the Absolute)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널리 알려진 셸링의 『교조주의와 비판에 관한 철학 서한』(Philosophical Letters on Dogmatism and Criticism, 1796)의 열 번째(이자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그리스 비극을 가능한 결의(resolution)를 드러내기 위한 예시로 취한다. 그리스 비극, 또는 일반적으로 그리스의 비극적 사유에서 오이디푸스 운명의 불가피성, 그리고 그의 의지와 지성 간의 대립, 『안티고네』에서 가족에 대한 의무와 국가에 대한 의무 간의 대립은 처음에 화해불가능한 것으로 비춰진다. 셸링은 다음과 같이 논한다.
따라서 비극의 핵심은 한편으로 주체에 있어서 자유와 다른 한편으로 필연성 간의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갈등, 둘 중 하나가 굴복하는 방식으로는 끝나지 않으며, 오히려 둘 모두가 동시에 이기고 극복되는 것으로 완전한 무차별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방식으로 끝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 6장에서 비극에 대한 분석을 수행할 때, 모순은 그의 논점이 아니고 사실상 카타르시스의 작용은 자세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과 공포에 있어서 ‘비극적 쾌락’이 삶과 행위의 모방에 의해 생산된다는 것에 집중한다. 이 분석은 여전히 심리적이며, 아직은 철학적이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셸링은 어떤 일반 형식 또는 본질을 비극을 조건 짓는 화해불가능한 양극성으로부터 도출한다. 그의 유기적 사유는 어떤 세 번째 것의 생산을 통해 불가피한 대립을 화해시킬 수 있다. 이 세 번째 구성은 간단하게 제거하지 않고 모순들을 포함하기 위해 비-기계적이고 비-선형적이며, ‘유연성’(flexibility)이나 ‘가소성’(plasticity)을 가진다. 셸링이 발견한 예를 들자면, 조형 예술에서 <13>유한한 것 안으로 무한한 것이 기입되는 것, 그리고 구술 예술(verbal art)에서 무한한 것 안에 있는 무한한 것의 구성이 있겠다.
예를 들어 회화에서 프레임의 제한은 어떤 해결도 없는 그와 같은 모순을 보존하므로 캔버스 위에 긴장을 만들어냄으로써 무한한 것을 새겨넣을 수 있다. 셸링은 그 복잡성의 수준에 의해 규정되는 여러 잠재력 – 기계적, 화학적 그리고 생물학적 잠재력 - 을 테크놀로지한다. 여기서 잠재력은 무차별한 – 주체와 객체와 같은 두 가지 대립적인 극 간의 차이의 제거(또는 통합) - 절대자(예컨대 신)에 의해 결정된다. 셸링에 의하면, 세 번째 것, 즉 모순을 제거함이 없이 모순들을 포용하는 생물학적 잠재력은 유기체로서, 그것은 그의 초기 『자연철학』의 세 논문들에서 뿐만 아니라 『예술철학』에서도 가장 높은 잠재력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자연의 본질은 세 번째 잠재력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데, 이것은 실제적 존재 또는 물질적 존재, 그리고 이념적이거나 빛나는 것 둘 모두를 동등하게 긍정한다. 물질의 본질=존재, 빛의 본질=현실성. 그래서 세 번째 잠재력에서, 현실성과 존재는 결합되어야 하며, 무차별하다.
자연 안에서 유기적인 것 – 이는 예술 안에서 미적인 것과 유비적이다 – 은 우발성(자유)과 필연성(법칙)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하나의 모델을 제공한다. 즉 셸링의 유기체론 철학에서는 우발성과 필연성 간의 화해불가능한 갈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재귀적 형식에서 유기체는 이러한 모순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셸링은 또한 그 보편적인 타당성을 위해 예술을 우선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가 쓴 바에 따르면, “철학으로서의 철학은 결코 보편적으로 타당하게[allgemeingültig] 될 수 없다. 객관적 타당성이 주어지는 하나의 장은 예술이다.” <14>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환영과 조작에 취약한) 주체적인 경험일 뿐 아니라 “소수의 사람” 대신에 “전체 인간에 해당되는”, 즉 하나이나 전체(hen kai pan, εν και παν)로서의 객관적인 유기적 논리를 수행한다. 여기서 비극적 영웅은 긍정으로써, 따라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 운명을 극복함으로써 자유와 운명 사이의 모순을 넘어서는 사람이다. “그가 여전히 자유로운 한, 그는 운명의 힘에 대항하면서 버틴다.” 이런 의미에서 셸링의 비극 예술에 대한 노고는 심리적 효과와 관련되기 보다. 그 부정성(또는 부정적 타자)를 긍정함으로써 그것의 자율성을 획득하는 논리적 형식과 연관되는 면이 더 많다. 비극에 대한 이러한 독해는 니체의 진정한 철학자로서의 비극적 영웅을 이미 예견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 미와 숭고와 관련하여 이미 사유의 유기적 방법(또는 보다 정확하게는 가동적 논리operational logic)을 제안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유기적 형식은 칸트가 반성적 판단이라고 부른 것에 기반한다. 반성적 판단은 선험적 규범들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규정적 판단과 구별되는데, 이는 특수성 도달하기 위해 보편성에서 출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자신의 규범들에 도달하기 위해 특수성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반성성(reflectivity)은 미적이고 목적론적인 판단에 핵심적이다. 미는 결코 실제적으로 그 자체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목적론적 판단에 기반이 되는 것과 같은데, 왜냐하면 자연이 목적들은 객관적으로 알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이전 책, 『재귀성과 우발성』에서, 나는 이러한 유기적 사유가 일차적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기 위해 그 자신에게로 반성적으로 돌아가는 순환 논리에 의해, 그리고 두 번째로 해체와 변형으로 그와 같은 순환성을 개방하는 어떤 우발성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시도했다. 필연성과 우발성이 같은 동전이 두 면으로 출현하는 것은 이러한 반성성을 통해서이며, 이는 순환성(circularity)으로서 보다 명쾌하게 드러난다.
<15>칸트의 『판단력 비판』(1790)은 쉴러(Schiller)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들』(1794), 슐레겔(Schlegel)의 단편들(1798-1800) 그리고 셸링의 초기 자연철학(1795-1799) 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철학』(1805)에도 영양분이 되었다. 쉴러에 따르면, 유기적인 것은 필연성과 우발성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핵심인데, 이는 예술에서, 그리고 정치학에서, 법률 그리고 개인의 자유로서 형상적 충동(합리성)과 물질적 충동(정서)으로 드러난다. 쉴러는 유기적 모델을 놀이 충동(Spieltrieb)으로 부른다. 이것은 형상적이고 물질적인 충동을 일치시킬 수 있다. 쉴러의 미적 교육은 여기 그것이 보존하면서 대립을 극복하는 것에 놓여 있으며 이것은 헤겔이 승화(Aufhebung)라고 부르는 것을 예고한다.
예술은 일차적으로 감수성의 교육(education of sensibility)이기 때문에, 미적 교육에서 핵심적이다. 어떤 역사 심리학으로서 그리스 비극은 오로지 6세기와 5세기 그리스에서 출현한 반면, 그리스 비극의 재생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비극의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기도 하는 특수한 인식론에 달려 있다. 이것은 더 이상 그리스적인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것(das Tragisch)으로서 그레코-로망적인 것이 된다. 그리스 비극의 부흥은 셸링과 헤겔 시대에 철학적 정점을 찍었는데, 비극은 하나의 장르에 종속되지 않고 그 자체의 논리에 귀속되었다.
소크라테스적 합리성으로 인해 갈등을 극복하는 감수성의 교육으로서의 비극적 드라마의 역할과 신화와 과학 갈등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사라졌다는 니체의 언급이 옳다면, 환상의 근원으로서의 비극에 대한 플라톤적 비판은 이러한 사유의 경향에 있어서 계속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도입하여 예술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극에 대한 그의 이해는 동일한 경향의 변주를 따른다(어떤 의미에서 약리학적인, 다시 말해 선과 악). 비극적 사유가 비극적 숭고함을 설명하는 사유의 유기적 형식을 따라 형성되는 것은 셸링에서만 가능하다.
<15>불행과의 투쟁, 육체적 승리를 거두지도 않고 도덕적으로 승복하지도 않는 투쟁에 참여하는 용기있는 사람은 모든 고통을 초월하는 무한의 유일한 상징이다. 모든 곳에서 모든 사물이 그의 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고통의 최대치 안에서만 고통이 없는 원리가 드러날 수 있다.
비극적 영웅은 운명(필연)과 자유(우연) 사이의 대립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고통을 초월”하여 “고통이 없는” 세 번째 것, 즉 어떤 무관심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대립을 초월한다. 나는 『재귀성과 우발성』에서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 철학의 조건으로 유기적인 것, 즉 모든 철학이 유기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부과한다고 제안했다. 이 유기적 형식은 비극적 예술의 논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유기적 형식은 선형적 인과율과 이원성에 기초하기 때문에 필연과 자유가 대립하고 개인의 자유와 미적 감성이 법과 이성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17세기와 18세기를 지배했던 기계론적 사고와도 결별한다. 기계적(또는 선형적) 사고는 형식적 논리가 심리와 감정의 차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비극의 미묘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비극의 효과에만 초점을 맞춰 비극을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플라톤이 틀렸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옳았다는 것이 아니라, 비극은 모든 테크네(technē)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약리적이라는 것이다. 유기적 사고는 대립이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필연적임을 인정함으로써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을 포기하고, 셸링이 1809년 『인간 자유에 관한 논고』에서 악이 자유의 체계에 편재하고 필요함을 보여 주었듯이 선과 악을 모두 포괄하려는 시도를 더 하려고 한다. 비극적 사고는 유기적 사고의 예시이며, 이는 예술로 구체화되어 셸링에게 있어 철학과 친밀성을 유지하게 된다. 따라서 쉴러와 셸링에게 예술은 프랑스 혁명 이후 폭정에서 구체화된 초기 유럽 근대성의 지배적인 <17>기계론적 합리성에 대한 저항이 된다.
헤겔에서 절대자란 처음부터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자기 인식에 모순이라는 필연성에 의해 추동되고 마지막에 실현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셸링과 헤겔의 이러한 차이는 직관 대 이성, 감정 대 논리, 예술 대 과학, 자연 대 문화 등 서로 다른 우선순위에서 드러난다. 칸트, 낭만주의자, 피히테, 셸링 등이 공유한 유기체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에 비해 헤겔은 모든 즉각적인 현상의 기저에 있는 실재(Wirklichkeit)를 드러내기 위해 다소 정교하고 독특한 이성적(vernünftig) 형식을 발전시켰는데, 이를 변증법이라고 불렀다.
헤겔의 변증법은 그리스 비극에서 어떻게 전개되는가? 소위 초기 신학 저술에 기록된 대로 1798년에서 1800년 사이의 젊은 헤겔에게 그리스 비극은 유대교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헤겔에게 유대교가 신에게 종속되는 것은 “이질적인 것에 대한 종속”이며, “노아는 자연과 자신을 더 강력한 것에 복종시켰다는 점에서 [자연의] 적대적인 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 대조적으로 다신교인 그리스 종교는 지상의 삶을 신성과 성스러움으로 충만한 것으로 본다. 헤겔의 해석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비극적 영웅처럼 자신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인류의 죄를 화해시켰기 때문에 기독교의 오이디푸스다. 그리스도의 화해(Versöhnung)는 하나님과 인류의 아들(Sohn) 둘 모두가 되는 것이었다.
헤겔의 현상학(1807)에서 그리스 비극은 집단과 개인, 남성과 여성, 신과 인간, 완전한 지식과 부분적 지식 등의 모순에서 윤리의식이 발생하는 정신의 역사적 단계로 이해된다. 헤겔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인 『안티고네』는 이러한 윤리의식이 어떻게 모순에서 발생하고 희생을 통해 극복되는지를 보여준다. 헤겔이 비록 비극을 그리스 예술-종교(§727-744)의 가장 높은 형태로 보았다 해도, 결국 비극은 <18> 과도한 것이 되었다. 여기서 종교는 젊은 헤겔이 매우 비판적이었던 긍정적이고 객관적인 기독교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과 성스러움에 접근할 수 있는 의식(consciousness), 즉 기독교 공동체와 동일시된다.
그리스 비극에서 관객과 운명의 동일성은 합창이 끝나는 순간 영웅의 가면을 통해 매개된다. “관객 앞에 나타난 영웅은 가면과 배우, 극중 인물과 실제 자아로 분리된다.” 연극적 삶과 실제 삶 사이의 불일치에서 어떤 위선이 드러나며, 이는 웃음으로 덮어져야 한다. 이런 식으로 희극은 비극 예술의 철학적 성격의 종말을 표시한다. 『권리 철학 개요』에서 영웅은 국가 건국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며, 후자가 실현된 후에는 “더 이상 영웅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비극적 예술이 그 중요성을 잃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영웅은 그리스 비극의 변증법적 논리를 구체화한다. 그리스 비극적 영웅은 “자연에 대한 이데아의 더 높은 권리”를 상징한다.
헤겔에게 이성의 자기 인식이라는 역사적 진보에서 3막극의 마지막 무대로 성취된 것은 즉각적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다른 3막극의 주요 단계가 된다. 역사는 3막극 연극의 되돌아옴[재귀]이다. 『미학 강의』에서 우리는 이념의 이러한 전개를 다시 볼 수 있지만, 예술은 정신의 필요한 움직임을 위해 하위화되어야 하는 과정의 첫 단계로 간주된다. 예술의 종말에 대한 헤겔의 유명한 논문에서 예술은 그리스 황금기 이후 계시 종교와 계몽주의 철학에 의해 극복되면서 더 이상 최고의 정신적 삶의 형태가 아니게 된다. 그리스의 정신세계는 더 이상 <19> 존재하지 않지만, 비극적 드라마는 과거를 기억하거나 회상하는 외재화된 수단으로서, 보다 문자 그대로 보면, 그러한 과거를 내면화(Er-innerung)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헤겔에게 예술은 절대자를 향해 가는 이성의 디딤돌이다.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서 그리스 비극의 윤리적 의식의 유기적 사유 양식에서 비롯되고 그것을 대표하는 반성적 논리는 역사적 진보에 대한 그의 변증법적 이해를 통해 지속된다. 이는 또한 헤겔의 역사 목적론을 정의하는 그러한 비극적 논리의 추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를 “이성의 간교함”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절대자, 역사에서 변증법의 종말을 알리는 절대자는 비극의 종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끝에는 더 이상 모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끝[목적]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철학하기(philosophizing)의 유기적 조건이 셸링 이후 비극적 사유의 출현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재귀성과 우발성』에서 18세기 말 칸트가 [철학에] 유기적 조건을 부과한 이래 철학하기의 새로운 조건을 확인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유기적 조건은 증기 기관의 작동이나 잉여 가치의 생산 등 메커니즘에 기반한 19세기 산업주의에 대항하는 철학의 조건이었다. 20세기에는 이러한 철학의 조건이 유기체 철학, 기관론(organicism) 철학, 그리고 리좀 철학 같은 과정 철학에서 다시 등장한다. 그러나 철학은 첫째, 사이버네틱스가 철학의 기반이자 동기인 유기체/기계 대립에 종지부를 찍고, 둘째, 사이버네틱스적 사고에 기반한 테크놀로지적 특이점 실현이라는 종말의 임박이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과정을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그 자체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한 목적이 아무리 환상적일지라도, 어떤 정치적 담론이 유물론에 의해 지지될 때, 테크놀로지 자체에 열려 있는 많은 길을 닫아 버린다.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공리주의적, <20>인류학적 의미를 넘어 테크놀로지의 개방성을 유지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철학의 조건이 필요하고 존재한다면, 예술의 문제, 특히 방금 논의한 비극적 예술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3 예술적 경험의 다양성
위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다른 미학적 고려 사항에도 그러한 생각을 열어 두어야 한다. 이는 비극적 사고가 종말을 고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지배적인 인식론의 한계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우선, 우리는 예술에 대한 경험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다양한 출처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미적 사고의 형태도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미학은 감각적인 것에 대한 학문이지만, 18세기 이후 유럽의 미학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학문’이 되었고, 이후 중국어로 메이슈(美學)로, 일본어로 비가쿠(びがく, 같은 한자, 美學)로 번역되어 예술을 아름다운 것에 종속시켰다. 그러나 프랑수아 줄리앙(François Jullien)이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한 생각』에서 주장했듯이, 아름다운 것은 적어도 서양에서와 같은 방식으로는 중국 미적 사고의 핵심이 아니었다. 이 “이상한” 경로를 따라 “아름다움”에 관한 문헌을 간략하게 살펴 보자.
고대 그리스에서 아름다운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학자들은 종종 “훌륭한, 적절한, 고귀한, 아름다운”으로 번역되는 칼론(kalon)이라는 용어를 언급한다. 플라톤의 『대 히피아스』는 아름다운 여인, 금, 부유하고 존경받는 것 등 히피아스가 제안한 모든 특정한 것들을 넘어서는 칼론의 정의에 대한 대화편이다. 소크라테스는 칼론을 적절하고 유용하며 호의적이고 보고 듣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과 연관시겼던 히피아스의 논의를 반박했지만 <21>아름다운 것은 어렵다, 즉“χαλεπὰ τὰ καλά”라고 말하면서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일관된 정의를 제시하지 못했다.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인 『파이돈』과 『향연』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아가톤(Agathon)을 언급하는 디오티마를 이야기하면서 아름다움이 에로스(eros)와 관련이 있다고 읽었다. 즉 “사랑은 아름다움의 대상인 위대한 신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이것 또는 저것의 특정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모든 아름다운 것이 참여하는 아름다움의 형태, 즉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에 의해 아름답다”는 것을 의미한다. 줄리앙은 플라톤이 형상(eidos)로서의 “아름다움”을 파악하고자 했으며, 우리가 형이상학적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태도는 중국 사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칼론은 도달해야 할 대상(hou heneka tinos)을 의미한다. 칼론은 바람직한 것이자 선한 것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원동자(mover)를 칼론으로 묘사하는데, 그 이유는 원동자가 “욕망이나 사고의 대상(to orekton kai to noêton)으로서” 다른 사물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원동자는 바람직하고 선한 탁월함을 추구한다.
이에 비해 중국 철학자 리쩌허우(李澤厚, 1930-)의 분석은 다른 형태의 미적 사고와 갈등에 대처하는 다른 방식을 정교하게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흔히 ‘아름답다’로 번역되는 중국어 미(美)는 양 양(羊)과 클 대(大)에서 유래한 것으로, 문자 그대로 ‘양이 크면 아름답다(羊大則美)’는 뜻이다. 이는 고대 의례 및 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리쩌허우가 다른 곳에서 추구한 원시 종교와 섭식의 인류학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미적 사고의 차이에 대해 문헌학만으로 완전한 철학적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25>설령 그러한 차이를 명확히 밝힐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고 자체의 개별화를 촉진하지 않은 채 절대적 차이를 주장한다면, 그 역사적 분석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통찰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접근의 한계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리쩌허우는 중국 예술이 리(li, 禮, 의례, 의식)와 예(yue, 樂, 음악)를 강조하는 비디오니시스적 문화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렌(ren, 仁, 자애)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리는 의(儀)라고도 할 수 있는 의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리는 주로 몸짓과 기술적인 수단을 통해 우주(하늘)와 사회적/도덕적(인간) 사이의 통일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리는 규범적 역할에서 파(fa, 法, 법)와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법은 불법 행위 이후의 처벌로 이해되는 반면, 리는 예방적인 일상적 관습이다. 예는 음악과 춤을 포함하며 교육 목적으로 리와 결합된다.
따라서 우리는 고대 왕들이 의식과 음악의 제도에서 식욕과 귀와 눈의 욕구를 얼마나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는지를 추구하지 않고,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조절하고 인간성의 정상적인 과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했다 ... 그들은 이름에 따라 크고 작은 음에 법을 부여하고 시작과 끝의 순서를 조화시켜 일을하는 것을 나타냈다. 따라서 그들은 가까운 친척과 먼 친척, 고귀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 노인과 젊은 사람,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기본 원칙을 모두 음악에 분명하게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23>리와 예는 함께 감각의 교육을 형성하는데, 리쩌허우에 따르면 중용(zhong, 中)과 조화(he, 和)라고 하는 과하지 않은 만족감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송대 신유학자들 사이에서 큰 영향을 끼친 고전인 『도덕경』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은밀한 것보다 더 눈에 보이는 것은 없고, 미세한 것보다 더 명백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혼자 있을 때 스스로를 경계한다. 쾌락, 분노, 슬픔, 기쁨의 동요가 없는 동안 마음은 평형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감정이 자극을 받고 적절한 정도로 작용할 때 조화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보장된다. 이 평형은 세상의 모든 인간 행위가 성장하는 큰 뿌리이며, 이 조화는 모두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인 길이다. 평형과 조화의 상태가 완벽하게 존재하면 천지에 행복한 질서가 널리 퍼지고 만물이 영양을 공급받고 번성할 것이다.
열역학에서 평형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중(zhong)을 ‘평형’으로 번역하기로 한 제임스 레지(James Legge)의 결정(제가 존경하는 그의 훌륭하고 헌신적인 중국 고전 번역을 고려할 때)에 한 가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중은 잠재력이 가득하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평형이 아니라 준안정성(metastability)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감정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未發)를 중(中)이라고 힌다. 감정이 자극되거나 촉발되면(已發) 반응하고 행동해야 하며, 이러한 반응이 적절한 정도에 이르렀을 때 ‘조화’가 이루어진다. 부족함이나 과잉이 아니라 적절한 정도의 강도가 있는 것이다. 리쩌허우가 <24>중국 문화란 디오니소스적 문화가 아니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과 같은 카타르시스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처음부터 중국 미학은 과도한 슬픔, 분노, 우울, 쾌락 및 이성과 상충되는 모든 욕망을 배제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종교적 카타르시스는 없었다. 고대 중국은 개인과 집단을 조화롭게 하는 감정을 추구했으며,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나거나 파괴할 수 있는 감정(즐거움)과 예술(음악)을 배제했다.
중국 예술은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카타르시스를 향한 비극적인 여정 대신 단순함과 평온함을 추구하는 단조로움(ping dan, 平淡, 말 그대로 평평하고 무미건조한)을 추구했다. 단조로움은 ‘아직 분발되지 않은 것’과 ‘이미 분발된 것’에 대한 명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특정 감정을 과장하는 동시에 감정과 경향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감각의 교육으로서 미학은 사회적, 정치적 삶, 공동체 구성원 간 또는 인간과 비인간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동시에 우주에서 인간을 입장짓는 명확한 방식으로 정의된다.
리쩌허우는 평균과 조화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고대 중국부터 명나라 중기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이후 중국의 미적 전통이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쇠퇴의 원인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에로틱 소설의 확산과 같이 사회 및 문학계에서 욕망에 대한 강조가 나타났으며, 이는 유교 및 도교의 자기 수양 원칙과 즉시 충돌했다. 둘째, 개성(또는 개인의 마음)에 대한 강조는 고대의 마음(천지의 중심)에 대한 교리를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셋째, 이 쇠퇴기의 예술가들은 <25>내용보다 형식에 더 중점을 두어 글/그림(wen, 文)과 도(dao)를 분리했다.
명나라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과 청나라로의 전환을 면밀히 분석하는 데는 역사학자가 더 적합하기 때문에 여기서 리쩌허우의 주장을 분석하는 것은 내 논의의 범위를 벗어난다. 첫째, 리쩌허우는 동양 예술에서 비극주의적 사고를 분별했지만, 이 미학적 사고를 감정에 대한 막연한 담론에서 체계적인 논리로 끌어올리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이 책에서 우리의 과제가 될 것이다. 둘째, 리쩌허우는 중국의 미적 전통의 쇠퇴와 관련하여 도(道)와 기(器)/문(文)의 분리를 강조했다(세 번째 논점). 이것은 나의 책 『중국에서 기술에 관한 물음』의 논제인데, 여기서 나는 도(道)와 기(氣)의 분리가 청나라 시대, 특히 아편전쟁 패배 이후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이 작업을 통해 나는 역사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사변적인 중국 미학적 사고에 대한 다소 색다른 해석을 전개할 것이다. 나의 해석은 변환적(transductive)이도록 애씀으로써 전통적 사상을 현대적 상황에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것은 미적 사고를 논리, 인식론, 에피스테메의 세 가지 측면에 따라 분석함으로써 내가 코스모테크닉스(cosmotechnics)라고 부르는 것을 구체화하려는 시도이다. 여기서 논리는 이항 논리와 비이항 논리의 측면에서 추론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인식론은 과학에서 연역, 귀납, 실험 등을 통해 아는 방법과 같은 의미의 앎의 방식이다. 에피스테메의 경우, 나는 지식이 생산되는 합리적인 조건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정의를 내리는데, 이는 보다 정확하게는 한 시대와 지역(우주)에 대한 집단적인 미적 경험을 의미한다. 다음 장에서 이 세 가지 용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 책은 현대와 전통의 양립 불가능성에 대한 리쩌허우의 재고에 공감하지만, 미적 사고 자체의 개체화(individuation)를 모색하는 데 있어서는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이 개체화를 환경과의 양립 불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준안정성에 도달하기 위해 <26> 끊임없이 변화하는 미분화(differentiation) 과정으로 이해한 것과 큰 차이가 있다. 결정화(crystallization)의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염화나트륨(소금)과 같은 용액이 과포화 상태가 되면 나트륨과 염화물 이온은 서로 양립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긴장을 해결하려면 결정 형성이라는 구조 조정이 필요하며, 결정은 열을 전파하여 주변 환경을 재구성한다. 결정이 형성되면 개체화 과정은 준안정 상태에 도달한다.
사유하기의 측면에서 개체화는 개인의 개성이나 개인의 진정성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유하기는 항상 타자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이 타자화는 그리스어 어원 이디오스(ídios)에서 유래한 바보와 괴물의 두 극 사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과정으로, 바보란 개인적이고 자신과 관련된 것을 의미하지만 괴물은 우연과 오류를 통한 변이 과정에 취약하다. 이 두 극 사이에서 사유는 스스로 길을 선택하고 개체화하여 특이점과 다양성을 달성해야 한다.
예술의 다양성과 현대성과의 관계에 대한 나의 강조는 이러한 다양성을 전근대, 근대, 포스트모던, (종말론적) 절대자라는 동질적인 시간대에 따라 다양한 사고를 조직하는 단일 시간적 축에 동화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반헤겔주의적인 측면이 강하다. 역사적 진보와 시대구분을 바라보는 방식은 헤겔의 베를린이든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뉴욕이든 지역적 관점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진보라는 개념은 서구 사상에서 핵심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재고해야 하지만 완전히 거부해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이전 글에서 기술생태다양성의 관점에서 자세히 설명한 다양성의 문제를 다시 열기 위해 이 개념을 재전유하는 것이다. 재전유의 태도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지만, 이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 반드시 동질적일 필요는 없으며, 이 책에서 드러내려고 노력한 것처럼 우회로를 통해 도달할 수도 있다.
서구 세계에서 그리스 비극의 특수성으로 돌아가 보자. 베르낭은 그리스 비극이 기원전 5, 6세기의 심리 상황에서 나왔다고 주장했지만, 그리스 비극은 서양에서 여러 예술 장르 중 하나의 특정 장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역사가, 시인, 철학자들의 주제였던 그리스 비극 사상은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자면 “시적 예술의 정점”으로서 서양 미학 사상의 핵심 <27>에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서양의 모든 미학적 사상이 비극적 논리로 환원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비극 사상이 감성 교육의 중심이 된다는 뜻이다. 비극을 다른 시대의 인식론에 따라 재구성하고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예술 철학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셸링과 헤겔부터 니체와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주요 현대 철학자들이 비극의 사상가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비극의 특수성을 서양에 위치 지운다면, 다른 문화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비서구적인 미적 경험과 사고는 어떻게 현재의 기술적(technological) 상황을 반영할 수 있는가? 물론 토착 또는 전통 지식과 현대 과학 기술을 서로 무관한 두 영역으로 분리할 수도 있지만, 이는 자연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유하기의 개체화를 촉진하지 않고 분류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예술가, 역사가, 철학자들에게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의 말을 빌리자면 예술 경험의 다양성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초대하는 의미도 있다. 예술 경험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오늘날 명백해진 다양한 미적 경험을 식별하는 것이 아니라, 셸링과 헤겔이 당대에 그랬던 것처럼 다양한 형태의 미적 사고에 침투하여 그것이 우리의 현대적 상황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물론 이 질문은 예술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것으로서의 사유하기에도 적용된다. 현대화, 즉 기술 세계화 과정은 이러한 차이를 지워버린 것처럼 보인다. 렘 쿨하스(Rem Koolhaas)의 총체 도시(generic city)에서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미학은 문화적 뿌리가 없는 포스트모던적 환대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뿌리 없음(rootlessness)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가 『포스트모던의 조건』(The Postmodern Condition, 1979)에서 설명한 기술 발전의 징후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서 포스트모던은 근대의 연속일 뿐이며, 그 희망은 근대의 변증법, 즉 근대성 자체의 내적 모순에 놓여 있게 된다.
오늘날 비유럽적 관점에서 근대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가능성 중 하나는 <28> 포스트모던 이후의 프로그램을 재구성하기 위해 미학적, 기술적 경험의 다양성을 성찰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예술은 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예술의 관점에서 기술을 바라보면 특별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인들에게 예술과 기술은 같은 단어인 테크네(technē)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기술 발전은 예술과 분리되어 예술은 감성적이거나 때로는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반면, 기술은 이성의 물질적 형식으로 존재해 왔다. 고대 동굴 벽화부터 현대의 인공지능 그림에 이르기까지 예술은 자신을 확장하고 표현하기 위해 기술에 의존한다. 동시에 예술은 기술을 더 넓은 현실로 되돌릴 수 있다. 알코올 중독의 긍정적 피드백 고리처럼, 이러한 순환은 교통사고든 치명적인 질병에서든 그 주체가 ‘바닥을 쳤을 때’에만 새롭고 더 넓은 현실에 의해 끊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 현대인은 임박한 종의 멸종이나 지구의 황폐화와 같은 종말에 직면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알코올 중독자다.
이것이 니체가 1872년 『비극의 탄생』에서 “과학은 예술가의 광학으로 보아야 하지만, 예술은 삶의 광학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이다. 과학적, 기술적 사고의 긍정적 피드백 고리 바깥에는 예술이 있다. 예술적 사고의 고리 바깥에는 삶이 있다. 이러한 ‘외부성’(outsideness), 즉 비소진성(inexhaustibility)은 시간이 일상이나 전통으로 안정화되면 스스로를 숨기는 경향이 있다.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작동 너머의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숨겨진 것을 드러내기 위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파울 클레의 말을 따르자면, 예술은 감각을 증강시켜야 한다. 또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처럼 해야 한다.
나 자신과 청교도적 양심의 불안 없이 살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나는 감각의 더 큰 영성화와 증강(spiritualization and augmentation of the senses)을 기원한다. 그렇다, 우리는 감각의 미묘함, 충만함, 힘에 대해 감사해야 하며, 대신에 우리가 가진 최고의 정신을 감각에 부여해야 한다.
<29>니체 자신과 마찬가지로 짜라투스트라는 비극적인 것의 가장 위대한 화신이다. 만약 짜라투스트라가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다른 현실, 즉 인간이 웃고 극복할 수 있는 한계를 표시하는 비인간적인 현실에 자신을 위치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을 초월한 것, 선과 악 사이의 필연적인 대립에 의해 시작된 긍정이다. 위버멘쉬(Übermensch)에 대한 이러한 긍정은 고집이나 아집이라는 단순하고 순진한 의지가 아니라 감각의 증강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감각의 증강은 무형의 사물이나 아음속 주파수를 보거나 들을 수 있는 오늘날의 ‘인간 증강’이 아니라 오감의 한계를 뛰어넘는 감성의 발달을 의미한다. 니체 철학에서 이 새로운 감성은 환희(Rausch, ‘취함’ 또는 ‘엑스터시’로 표현되기도 함)를 의미한다. 환희 안에서 인간은 일상적 감각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니체가 예술을 생리적이라고 생각한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였다.
이 서문의 시작 부분과 배리 슈왑스키가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리스적 의미의 비극이 고대 중국에 존재했는가? 어쩌면 중국인들은 줄리앙의 주장처럼 비극을 피하기 위해 사유하기의 형태를 발명하지 않고 또 다른 미학적, 철학적 사고를 발전시켰을지도 모른다. 일부 일본 사상가들, 특히 요시노리 오니시(小西義則)는 일본 미학에서 “사물에 대한 공감 또는 우울”(mono no aware, 物の哀れ)과 심오한 우아함과 미묘함(yūgen, 幽玄) 모두를 강한 우주적, 도덕적 억양을 담아 정교하게 설명한 바 있다.
중국의 미적 사고는 리쩌허우가 말했듯이 비극적이거나 디오니소스적이지 않으며, 단순화를 위해 도교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도교의 궁극적인 표현은 중국 산수화(shanshui)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산수화는 영어로 ‘풍경화’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지만, 15세기 유럽에서 등장한 풍경의 개념과는 다른 것으로 인식된다. 산수화는 인간 세계와 우주 사이의 관계를 예술적이고 철학적으로 해석한 그림이다. 도교 예술과 비극주의 예술을 대조할 때, 오늘날 중국 사상에는 유교, 도교, 불교가 포함된다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에 도교 사상이 중국 사상과 동일하다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쉬푸관(徐復觀, 1904-1982)이 『중국 예술의 정신』(Spirit of Chinese Art)에서 주장한 것처럼 도가 사상은 중국 <30> 미학의 중심이다:
노자와 장자는 예술을 사색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따르면 도의 본질이 중국 예술의 정신이라고 말할 때 두 가지 점을 명확히 해야한다. 개념적으로 우리는 그들이 예술적 정신을 정의하기 위해 도라고 부르는 것을 사용할 수 있지만 예술적 정신을 사용하여 도를 정의 할 수는 없다. 도에는 사변적인 차원도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말하면 예술보다 더 광범위하다. 그들의 도에는 삶이 주제이지 예술은 아니다 [...] 도의 본질이 예술의 정신이라고 말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예술의 가장 높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예술 정신을 구현하지만 예술 정신의 자기의식은 수준이 다르다. 즉 예술가가 되어 예술 작품을 만들지 않고도 예술을 감상하고 즐길 수 있다. 왜냐하면 표출(表出, expression)과 표현(表現, presentation)은 두 가지 다른 수준이기 때문이다.
쉬푸관이 도가 사상을 중국 예술의 중심 철학으로 간주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주장은 많은 미술사학자들과 회화 이론가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양 예술에서 비극이 차지하는 역할과 비교하면 산수화는 장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중국 예술의 핵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산수화는 문자 그대로 ‘산과 물’이라는 뜻으로, 위진 시대에 등장했다(220–420). <31>정신적 체험의 가장 높은 표현으로 여겨지는 산수화는 여러 시대에 걸쳐 양식과 재료에 중점을 두어 발전했으며, 원나라 시대에 이르러 성숙하고 대중화되었다.
이 책에서 나의 동기는 유비적이다. 즉 만약 비극에서 철학적 사고와 미학적 사고 둘 모두에 기초적인 논리를 찾을 수 있다면 산수화에도 어떤 논리가 있는 것인가? 서구의 미술사는 역사가들이 비극적 드라마의 극장을 재구성할 수 있는 파열과 불연속성이 특징이다. 중국 미술사에서는 불연속성에 초점을 맞춘 담론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대신 계승과 보존(傳承)에 중점을 두는 것을 볼 수 있다. 첸추안시의 『중국 산수화의 역사』(History of Chinese Landscape Paintings)나 시쇼우치엔의 『변형의 양식-중국 회화사 연구』와 같은 산수화의 역사를 보면 청록산수(青綠山水)에서 수묵산수(水墨山水)로, 북방의 바위산과 폭포에서 남방의 강변을 따라 나 있는 흙산으로 변화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파열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는 근본적으로 모든 변화가 세대적으로 또는 횡단-세대적으로(trans-generationally) 유전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대 중국의 시간 개념과 역사 개념은 그리스에서 발견되는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의 변증법과는 구별된다. 흔히 중국인은 순환적인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인은 선형적인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리스 고전을 살펴 보면 이는 정당화될 수 없다. 문제는 파열의 엔텔레키<32>(entelechy, 그리스어 엔텔레케이아에서 유래)인데, 살아있는 시간과 시간 개념이 파열과 관련하여 역사가 기록되는 방식과 어떻게 일치하는가이다. ‘혁명’의 현대 중국어 번역어는 게밍(ge ming, 革命)으로, 『역경』의 주석서인 두안주안(杜安注安)에서 이미 사용된 용어이다. 게(ge)는 물과 불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변화가 필연적이다. 제임스 레지는 게 밍을 ‘혁명’이 아니라 ‘약속의 변경’으로 번역했다.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하늘과 땅은 변화를 겪고 사계절은 그 기능을 완성한다. 탕은 왕위계승(하왕조의 왕위)을 변경했고, 우(상왕조의 왕)는 하늘(의 뜻)에 따라, 그리고 백성들(의 소망)에 따라 왕위계승을 변경했다. 참으로 변화의 시기에 일어나는 일은 위대하다.
변화는 궁극적인 도덕적 존재이자 선의 지표인 하늘의 뜻을 따른다. 오늘날 ‘혁명’으로 번역되는 게 밍은 카이로스와 같은 파열을 의미하지 않았다. 우리는 중국에서의 비극의 부재가 카이로스의 역사와 양립할 수 있는 비극적 논리를 우리에게 주지 않으며, 따라서 중국인이 보다 넓은 현실을 인식하고 도달하는 방식은 그리스인과 구별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보여 주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그러한 ‘동양의 지혜’는 도덕과 우주의 관계에 대한 체계적인 해석이다.
산수화의 논리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는 산수화가 최근 렘 쿨하스의 『시골』과 같은 기획에서 다시 등장한 로마의 오티움(otium) 개념과 유사한 은둔자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도피를 의미한다는 일반적인 관점을 거부해야 힌다. 또한 요아킴 리터(Joachim Ritter)가 주장한 것처럼 서양의 풍경화가 프톨레마이오스를 대체하는 코페르니쿠스 세계관에 대한 보상으로 등장했다는 관념을 거부해야 한다. <33>오티움이나 산수화를 다시 찾는 것은 '자연'으로의 도피가 아니다. 기원전 3세기까지만 해도 오티움은 군인들이 군대 밖, 예를 들어 고향에서 규칙적인 군대 생활에서 벗어나 보내는 시간을 묘사했다. 이 개념은 기원전 2세기와 1세기에 발전하여 도시 생활(negare)을 부정(negotium)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키케로와 세네카 같은 로마 스토아 학자들이 정교하게 발전시킨 이 개념은 제논, 크리시포스, 클레안테스 같은 그리스 스토아 학자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자연에 따라 산다는 것을 모토로 삼았으며, 세네카의 말처럼 도시 생활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자연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자연에 경탄하고 자연을 숭배한다면 나는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이다. 자연은 나에게 행동과 사색을 위한 자유, 이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나는 두 가지를 모두 하고 있다. 사색은 행동을 포함한다.
오티움, 즉 ‘여가’(leisure)는 도피나 보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자 더 나은 삶을 위한 실천을 의미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세네카가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68번째 편지에서 숨어 지내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여가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숨어 있으라고 제안한 것을 해석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계획을 지지합니다. 여가를 즐기면서 자신을 숨길 뿐만 아니라 당신이 여가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도 숨기십시오 [...] ‘철학과 조용함’이라는 팻말을 붙이지 마세요. 계획에 다른 이름을 붙이세요. 건강악화 또는 허약함이나 게으름이라고 부르세요. 여가를 자랑하는 것은 야심의 한가한 형태일 뿐입니다.
<34>세네카가 여기서 제안하는 것은 바로 여유롭지 않기 위해 여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선문답 같은 문구는 우리를 역설에 빠뜨린다. 여유를 내세우는 것은 자기 패배, 즉 “야심의 한가한 형태”에 불과하다. 보상은 경제적이며 근본적으로 소비의 논리이기 때문에 오티움은 보상에 관한 것이 아니다. 세네카의 편지를 더 자세히 읽어보면 오티움은 단순히 에피쿠로스적 쾌락이 아니라 개인적인 발전을 위한 것임이 더욱 분명해진다:
당신은 “세네카, 당신은 저에게 여가를 권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에피쿠로스 준칙에 맞춰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까?”라고 말하지요.
나는 실제로 여가를 추천하고 있지만, 당신이 남긴 것보다 더 위대하고 공정한 행동을 할 수 있을 여가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또는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공부 없는 여가는 죽음이에요. 그것은 산 채로 매장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산수화에 대한 동경은 시링위엔(Xie Lingyuen, 385-433), 바오자오(Bao Zhao, 407-466), 타오위안밍(Tao Yuanming, 365-427) 등의 시인이 3~4세기에 중국에서 유행시킨 산수시와 전원(tianyuan, 田園, 들판)시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세네카에게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 반드시 공동체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하이데거가 나중에 『존재와 시간』에서 ‘그들’(das Man[세인])이라고 부른 상태처럼, 자신을 잃어버리면 공동체적 삶은 독이 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후반부에서 세네카를 참조하면서, 인간과 불멸의 신을 구분하는 돌봄(care)의 개념인 큐라(cura)를 언급한다. 큐라는 ‘염려하는 노력’과 함께 ‘조심성’(Sorgfalt), ‘헌신’(Hingabe)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중과의 거리가 고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진정성(Eigenlichkeit)이 고립을 의미하지도 않는다는 점도 이해해야 한다. 오히려 세네카가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건강한 공동체적 삶의 실현이 될 수 있다.
<35>오늘 나는 귀찮은 사람들을 모두 불러가 버린 권투 경기 덕분에 한가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아무도 여기 침입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도 내 생각의 기차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확신이 있다는 점에서 더 대담하게 나아갈 것입니다. 문은 끊임없이 삐걱 거리던 소리를 멈췄고, 내 커튼은 옆으로 당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사람이 스스로 일을 작파하고 길을 만들 때 해야하는 것처럼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저는 이전의 사상가들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그렇다 해도 나는 새로운 논점을 발견하고, 사물을 바꾸고, 오래된 견해를 버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추종하지 않고도 그들과 합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논리는 공동체 생활에 헌신함으로써 자기를 잃어버려서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공동체에 유익하기보다는 해로울 수 있으므로, 알키비아데스가 폴리스(polis)를 다스리는 기술에 대해 물었을 때 소크라테스가 답한 것처럼 자신의 삶을 잘 돌보는 것이 공동체의 안녕에 기여한다는 원칙과 통한다.
자신을 나쁘게 만드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더 나아지면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치므로, 자신을 잘 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을 준비한다는 사실 자체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티움이 실제로 도피가 아니라 개인의 선에서 공동선이 뒤따를 것이라는 전제하에 영적인 것과 집단 간의 원초적 조화에 초점을 맞춘 ‘유기적’ 삶의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애석하지만 전원이나 산수화로 돌아가는 것은 보상의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중국의 산수시와 전원시에 관한 문헌에서 이러한 귀향은 세속 세계와 실패한 정치 경력에 지친 시인들이 세속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산수화와 전원시는 종종 은둔자의 삶으로의 도피로 간주된다 <36>. 많은 중국 고등학생들이 타오위안밍(Tao Yuanming)의 시 ‘귀원전거일(歸園田居 一)’을 공부하는데, 이 시는 이러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내가 어렸을 때 나는 무리와 어울리지 않았으니
나의 유일한 사랑은 산과 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세상의 먼지 그물망에 빠져들었네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자유롭지 못했구나
철새는 오래된 나무를 갈망하고
수조 속 물고기는 고향 연못을 그리워하네.
남쪽 끝 자락의 땅을 일구었다네.
그리고 여전히 소박한 나는 들판과 정원으로 돌아갔다네.
내 초가집에는 여덟이나 아홉 개의 방이 있지.
처마 옆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복숭아나무와 매화나무가 마루 앞에서 자란다네.
아득히 먼 사람들의 마을이 흐릿하게 보이고
오두막집 지붕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네.
깊은 골짜기 어딘가에서 개 한 마리가 짖고
뽕나무 꼭대기에서 수탉이 울어대네.
대문과 마당에는 세상의 먼지와 소음이 없고
빈 방에는 여유와 깊은 고요가 있네.
나는 오랫동안 새장의 창살에 갇혀 살았지
이제 나는 다시 자연과 자유로 돌아섰네.
그러나 산수화와 전원시는 매우 다른 장르일 뿐만 아니라 산수화의 근본적인 질문이 허무주의적 무(無)가 아니라 감각의 교육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산수에 대한 이러한 고정 관념은 거부되어야 한다. 사는 법을 아는 현명한 사람은 도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도피하는 사람은 세네카가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타자와의 연약한 관계에 자신의 존재를 의존한다:
<37>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도망치는 사람,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그리고 자신보다 더 번영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유배를 떠난 사람, 게으르고 나태한 동물처럼 두려움 때문에 땅으로 간 사람, 그런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부끄럽게도!) 배를 위해, 잠을 위해, 정욕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도피한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안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의 현대 사회에서처럼 사회적이면서 정치적인 소외가 심해지기에 그 또는 그녀가 삶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아지고 있다. 이것은 또한 철학자의 풍요로운 자기에 대한 사랑이 결핍과 부정에 기반하여 실존하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어부와 나무꾼(漁樵)의 모습을 통해 산수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일부 현대 작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이 두 인물이 산수화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으며, 그 누구보다도 인류 문명의 근본을 이해하는 진정한 철학자라고 주장한다. 잘못된 해석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독해는 현대 도시 생활에는 어부와 나무꾼이 경험했던 물과 산을 담을 수 없으므로 산수의 정신은 현대인이 접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신비주의(hermeticism)에 쉽게 빠질 수 있다.
나의 과제는 이런저런 형태의 신비주의를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코스모테크닉스로서의 산수화를 정교하게 설명하고 오늘날 산수화 정신의 의미를 성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은 근본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하여 그 한계를 마주하는 것이다. 이는 사유하기의 바로 그 가능성을 위해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훈련이다.
<38>
§4. 도교와 비극적 코스모테크닉스
내 프로젝트는 산수화의 역사와 그 문화와 철학에 관한 많은 훌륭한 작품과 어느 정도 다른가? 미술사적 훈련 없이는 제임스 케이힐과 다른 역사가들이 마원(Ma Yuan), 시타오(Shitao) 등의 그림에 대해 그들의 문체적 변형을 철저하게 탐구한 것과 같은 종류의 모범적인 공상(앙리 베르그송의 의미에서)을 만들어낼 수 없다. 북송 회화와 ‘르네상스’ 명나라 회화 및 ‘바로크’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비교하지 않겠다. 또한 쉬베이홍(Xu Beihong, 1895~1953), 린펑먼(Lin Fengmian, 1900~1991), 우관중(Wu Guanzhong, 1919~2010)과 같은 현대 화가들이 산수화와 서양화를 어떻게 혼합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나의 목표가 아니다.
2장과 3장에서는 현(xuan)의 논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겠다. 현(xuan)의 논리적 공식화는 주로 위진 시대의 노자와 왕필(Wang Bi)의 노자 주석, 그리고 모종삼(牟宗三, 1909-1985)과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1879-1945)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에<39> 의존하고 있다. 이 독서는 라이프니츠부터 20세기까지 서양의 전통에 의도적으로 국한되었던 나의 이전 저서 『재귀성과 우발성』에서 이미 수행한 비선형 재귀 논리와 유기적 사고에 대한 조사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번 연구는 그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동양의 전통과 그 전통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으로 확장할 것이다. 비극주의적 사고와 도가적 사고는 모두 비선형적이지만 근본적인 차이점도 있으며, 이는 도가적 우주론과 비극적 우주론의 차이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위진 시대 이전의 유가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9~104년)는 유가를 한나라의 지배적이고 배타적인 정치 사상으로 확립하여 다른 학파의 사상을 잠식하고 약화시켰다. 한 왕조의 몰락은 유가 사상이 주요 정치 철학으로 자리 잡는 데 위기를 가져왔다. 위진 시대에는 도가 사상이 유교와 경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시에 이러한 일치로 인해 지식인들은 도가와 유가 사이의 대립을 화해시키려고 시도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2장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위진 시대는 중국에서 불교가 확산되기 시작하고 지식인들이 도교 어휘로 불교 사상을 수용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산수화와 산수시가 미학으로서뿐만 아니라 그리스 비극처럼 사회, 정치, 경제, 미적 삶을 관통하는 사상적 형태로 등장했다. 나는 산수화가 위진 시대에 이미 성숙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당나라 이전의 그림에서는 인물과 산, 나무가 서로 비례하지 않고, 예를 들어 인물이 산이나 나무와 같은 크기로 그려져 있다.[76] 오히려 나는 이 시기에 더 일반적으로 주자의 논리 또는 도가 사상이 핵심 미학 사상이 되어 예술 창작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하고 싶다. 쉬푸관(徐福冠)은 『중국 예술의 정신』에서 노자와 장자의 사상(또는 일반적으로 도가 사상)이 산수화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것처럼 산수화의 형성은 <40>도교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산수화는 중국 예술의 핵심이며, 특정 영역에 도달하면 무의식적으로 장자의 ‘정신’(spirit)에 비견될 수 있다. 심지어 중국 산수화는 장자의 정신의 예상치 못한 산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77]
쉬푸관의 말을 받아들여 도가 사상과 산수화에 내재된 논리를 공식화하여 오늘날까지도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그의 말을 자세히 설명해 보겠다. 노자와 장자가 예술에 대해 명시적으로 논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인생 철학, 더 중요한 것은 도가 고전에 존재하는 논리는 위진 시대의 현 이론가들에 의해 더욱 정교해졌으며, 중국의 감성 교육에 필수적인 요소로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쉬푸관의 동료이자 20세기 최고의 신유학자인 모종삼은 논리학의 문제를 강조하고(아직 명료성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중국 철학이 칸트적 의미의 지적 직관력을 기르는 데 초점을 맞춘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를 훨씬 더 발전시켰을지도 모른다. 이는 모종삼의 연구에서 가장 흥미롭고 체계적이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 중 하나이며, 더 연구할 가치가 있다. 이러한 지적 직관은 감각의 증강이기도 하다.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가 예술을 직관이라고 정의한 것을 상기해 보자. 크로체는 예술의 정의로서 직관에는 네 가지 부정이 통합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네 가지 부정은 다음과 같다: (1)직관은 물리적으로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재가 아니다 (2)직관은 이론적이지만 실용적이지 않다 (3)실용적이지 않은 한 직관은 도덕적 행위가 아니다 (4)직관은 개념적 지식을 생산하지 않는다.[78] 그러나 크로체가 보여주려고 노력한 것처럼 이러한 부정은 잘못된 <41>이원론적 구분이며 실제로 그의 예술 개념에 이미 통합되어 있다. 직관에 대한 크로체의 강조는 베르그송을 비롯한 동시대 예술가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책에서는 직관과 예술과의 관계를 보다 체계적으로 다룰 것이다.
또한 직관이라는 개념을 통해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의 대립이 무한한 것(보편적인 것)에 접근하는 수단으로서 개별적인 예술 작품(특수한 것)을 통해 극복된다. 크로체를 따라간다면 모종삼이 실재에 접근하는 수단으로서 지적 직관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조셉 니덤(Joseph Needham)을 따라 주요 접근 수단인 감응(gan ying, 感應)을 공명(resonance)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인간 이외의 존재와 우주 전체에 공명할 수 있는 잠재력은 모든 사람에게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바, 고전에 대한 연구와 성찰을 통해 사물의 질서에 침투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할 수 있다. 이러한 통찰력은 물리적 법칙에 대한 이해일 뿐만 아니라 우주와 도덕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질문』에서 나는 코스모테크닉스라는 개념을 전개하여 보편적이고 동질적인 기술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다양한 코스모테크닉스가 존재한다는 것을 재발견하고 명료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나는 코스모테크닉스를 기술 활동을 통해 도덕적 질서와 우주적 질서를 통합하는 것이라고 예비적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이 정의는 우리가 언급하는 도덕적 질서와 우주적 질서, 그리고 통일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등 좀 더 명확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내가 코스모테크놀로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코스모스’가 우주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역성을 의미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각 문화에는 고유한 우주론이 있으며, 이는 고유한 지리와 사람들의 상상력의 산물이다. 우주론은 천체 물리학처럼 우주에 대한 순수한 과학 이론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다른 인간, 비인간, 다른 자연 자원 및 환경 전체와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일상 생활에 내재되어 있다. 식민지화를 통한 천체 물리학의 보편화는 전통적 및 지역적 우주론과 그와 관련된 모든 신화에 격변을 일으켰다.
<42>그러나 과학적 진보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천체 물리학과 우주론 사이의 이러한 격절은 아직 성찰되지 않았다. 일차적인 관찰은 이러한 우주론이 현대 과학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단순히 거부할 수 없는 앎과 존재의 방식을 암시한다는 점이다. 물론 일부 미신적이고 환상적인 요소는 버려야 하지만, 우주론은 그런 쓸모없는 믿음보다 훨씬 더 풍부하다. 그것들을 계승하거나 대체하는 것으로 보는 대신, 그것들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법은 그러한 비호환성에 직면하여 사유를 개별화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유의 과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중국의 우주론, 유교와 도교, 그리고 사회와 정치 생활에서 우주가 어떻게 편재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려고 했다. 우주 질서와 도덕 질서의 특수성은 문화마다 다르며, 이들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 또는 ‘통일성’도 문화마다 다르다. 도덕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는 그리스인의 이해와 다르다. 중국 사상에서 도덕은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는다는 점에서 하늘과 땅의 은혜에 대한 감사이며, 그리스 비극에서 윤리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신과 인간 사이의 투쟁이다. 이 중요한 근본적인 차이는 우리에게 다른 코스모테크닉스를 제공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데 동의한다면, 일반적으로 도가들은 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고 말할 수 있다. 존재와 도 모두 미지의 범주에 속하는 것 같다. 미지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일관성의 평면(plane of consistency)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지만 영적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묘사한다. 또한 이것이 원래의 원근거(Urgrund)와 근거없음(Ungrund)의 역할을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신도 이 범주에 속하며, 우리가 종교에 대해 얼마나 비판적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인들은 신에 대한 헌신(Andacht)을 통해 윤리적, 정치적 삶의 일관성 있는 평면을 구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지만 구체적인 인물 중 하나로서, 그의 죽음과 고통을 통해 신과 신앙인들을 재결합시켜 기독교의 보편적 사랑에 기초한 새로운 일관성의 평면을 창조하는 또 다른 미지의 인물이다. <43> 존재에 대한 그리스 개념은 기독교 신도 아니고 중국의 도도 아니다. 그와 같은 탐색은 항상 지역적이고 역사적인 심리학과 인식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가르침 이후 존재에 대한 질문은 인간 현실과 분리된 이상 세계에 존재하는 이데아(eidos)에 대한 탐구로 생각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주의는 이 탐구를 이상적인 이데아에서 형태(morphe)로 옮겼는데, 이는 플라톤의 비극 비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박과 같은 맥락에서 작동하는 변화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는 서양 철학의 몰락, 즉 존재에 대한 망각의 시작을 의미하며, 이는 서양 기술의 역사로 전개된다.
프랑수아 줄리앙은 『위대한 이미지에는 형태가 없다, 또는 회화를 통한 비객체에 대하여』(The Great Image Has No Form, or On the Nonobject through Painting, François Jullien)에서 존재의 문제가 중국 사상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형상(form)의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즉, 중국 사상은 존재론적이지 않으며, 중국 철학을 통한 서양의 탈존재화를 제안한다. 매우 사변적인 방식으로 줄리앙은 『불가능한 누드』에서 중국 회화에서 누드가 주제로 등장하지 않는 것은 존재의 본질을 포착하는 형태(form)가 예술의 최고 표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줄리앙의 관찰은 모종삼과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79] 모종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을 중국 철학에 전사(傳寫)하려고 시도하는 중, 중국 사상에서는 형상인과 질료인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는 단지 『주역』의 첫 두 궤인 건(乾, 하늘)과 곤(坤, 땅)이 나타내는 효율적이고 최종적인 원인만 생각할 수 있다.
2장에서는 현의 논리를 체계적으로 공식화하려고 한다. 현은 비극주의가 아니라 도가적인 재귀적 사고이다. 이 두 재귀적 형태의 비교는 어느 정도 유사성을 보여줄 수 있으며, 니덤이 중국 사상과 셸링의 자연철학, 헤겔의 변증법을 유기체적 사고와 같은 <44> 범주에 넣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가혹한 것은 에로틱한 사랑처럼 사고도 대상과 가장 친밀감을 느끼는 지점에서 그 대상과 완전히 낯선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중국인은 형태/형상 대신 존재도 무도 아닌 도를 탐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맥락에서 교토학파의 창시자 니시다 기타로(Kitarō Nishida)는 서양의 철학적 탐구는 존재에 근거하고 동양의 철학적 탐구는 무에 근거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80] 도교의 무는 일본 불교의 무에서 벗어나고 서양 사상의 무와도 다르기 때문에 여기서 무는 모호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3장에서 니시다에 대해 다시 다루겠지만, 현재로서는 중국인들이 그리스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모순율’(논리학의 명가名家를 제외하고)을 발전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도가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서두에서 중국에 그리스 비극과 같은 것이 없다는 자크 제르네의 질문에 대해 베르낭이 중국에는 인간과 신,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영원한 것과 필멸하는 것, 영원한 것과 변화하는 것, 강력한 것과 무력한 것, 순수한 것과 혼합된 것,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 등의 대립이 없다고 답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노자의 도덕경을 살펴보면 81개 문단 전체가 대립되는 개념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도가에게 있어 가장 추상적인 것부터 가장 구체적인 것까지 대립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반대(또는 되돌아감)는 도의 역동[反者道之動]”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듯이 대립은 항상 존재한다. 즉 대립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모순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극성이 성립하지만 불연속성(모순을 의미) 대신 연속성을 보게 된다. 여기서는 이를 대립적 연속성(oppositional continuity)이라고 부르며, 이는 현의 논리의 핵심이다.
적어도 고대 그리스와 중국에서는 그들의 논리(및 우주론)에 대립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대립이 해결되는 방식은 서로 <45>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유의 개념과 대립과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 가능성인 자유가 달성되는 방식도 각기 다르다. 감각적[미학적] 사고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해결을 향한 열망이며, 이는 비극과 산수화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 비극에서 모순은 영웅의 의지를 통해 극복되어야 하며, 이러한 의지와 용기가 인간과 신 사이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극복은 숭고하기 때문에 폭력적이기도 하다. 셸링에서 보았듯이, 그리고 니체가 훗날 찌라투스트라의 웃음이라고 묘사했듯이, 그것은 필요에 따라 고통을 긍정함으로써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의 웃음은 비극적 영웅의 자기 극복이며, 자유와 운명 사이의 대립을 초월한다. 헤겔의 변증법이 유기적 공동체의 실현으로서 화해를 추구하는 것과 달리(예를 들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지나 국가와 윤리적 삶을 향해), 짜라투스트라는 한계로서의 모순을 화해 없이 초월한다.
도가적 사고에서 모순은 도의 표현일 뿐이므로 모순이 있다고 해서 화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도란 존재도 무도 아니며, 오히려 존재와 무의 관계를 상반되는 연속성과 통일성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산수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숭고함이 아니라 주체의 해체를 통한 땅으로의 회귀이며, 이는 대상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주체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묘사를 연상시킨다. 즉 “우리는 우리의 개성과 의지를 잊고 순수한 주체로서, 대상의 투명한 거울로서만 계속 존재한다.”[81]
주체와 예술 작품의 관계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담론은 칸트가 아름답고 숭고한 것에 대한 분석에서 “무관심” 또는 “관심 없는 쾌락”이라는 “유럽 불교적” 해석을 기반으로 한다. 젊은 니시다 역시 그의 첫 저서 『선(善)에 대한 탐구』(1911)를 출간하기 전에 칸트의 “무아(無我, 이타심)”를 일본 불교의 <46>무아(無我, 무욕)와 관련시켜 “일본 불교적” 읽기를 수행했다.[82] “무아”라는 일반적인 범주 아래 수렴된다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다양한 접근 방식을 주의 깊게 연구하지 않으면 쉽게 혼동될 수 있다. 2장과 3장에서 이를 기반으로 산수화의 접근 방식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서양 미술에서 숭고함은 주로 압도적이거나 충격을 주는 형태로, 예를 들어 터너(J.M.W. Turner)의 그림에서처럼 주체가 자신의 자유를 인식함으로써 충격을 초월하도록 밀어 붙인다. 칸트에 따르면 여기서 자연은 인지 능력이 파악하지 못하는 충격을 초월하여 인간의 자유를 인식하는 데 사용(gebraucht)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 주체는 더 이상 자연에 압도되지 않고 관조를 통해 충격을 초월하여 스스로 존경심(Achtung)을 느끼게 된다.
중국 회화에는 압도적인 자연이 아니라 오히려 단조로움이 있다. 헤겔이 묘사한 낭만주의 회화의 사랑과는 다른 이 단조로움은 주제를 더 넓은 현실로 재귀적으로 던져버림으로써 주체가 자신의 하찮음을 인식하고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도의 일부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해체력을 가지고 있다. 소멸은 사라지거나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찮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주체가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풍경을 더 이상 대상으로 보지 않는 순간을 의미한다.
산수화를 카타르시스와 마음의 정화와 연관시키고 싶다면, 산수화의 주인공은 결코 영웅이 아니기 때문에 적어도 영웅적 미화를 통해 정화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문인보다 조화롭게 사는 법을 더 잘 아는 나무꾼과 어부를 발견하거나 산중에서 책을 읽고 장기를 두는 학자와 문인을 발견한다. 이것은 <47>인간과 다른 존재, 우주와의 관계가 그리스 비극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는 의미에서 또 다른 감성의 교육이다. 산수화에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탐구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도전이나 대립으로 제기되지도 않고, 플라톤적 사랑에서 불가능한 대상에 대한 욕망이라는 측면에서 에로스의 문제로 제기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을 초월하는 니체적 주체와 달리, 다른 존재와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 자기 해방이다.
산수화는 실용적인 정치와 사회 생활에서 억압된 감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송나라 문인 이후 지배적인 회화 형식이 되었다. 정치는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송나라 유가들이 공자와 안회의 즐거움(孔顏樂處)이라고 불렀던 즐거움에 기반을 둔 사회적, 미학적 삶을 허용해야 한다. 안회는 공자의 제자이자 스승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안회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밥 한 그릇, 술 한 잔, 뒷골목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은 그 암울함을 견디지 못했을 테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결코 즐거움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회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83] 즐거움의 의미를 아는 사람으로서 안회는 리(의식, 예의)에 따라 행동하고 인(자비, 仁)으로 행했다. 『논어』 제7장에서 공자는 안회를 다시 한 번 존중하는 말을 한다. “소박한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구부려 베개를 베는 것, 이런 것에도 즐거움이 있다.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부와 명예는 내게는 떠도는 구름에 불과하다.”[84]
공자와 안회의 즐거움은 특히 주돈이(Zhou Dunyi, 1017-1073)에서 정(程) 형제로 이어진 송나라 신유교에서 자기 수양의 중심 격언이었다. 이 즐거움의 개념은 자기 절제뿐만 아니라 인간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하늘과 땅의 공명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할 필요성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장자가 제2장 ‘제물론’(齊物論)에서 앎과 삶의 관계에 <48>대해 말한 내용을 반영한다. 즉 “세상에 가을 머리카락 끝보다 큰 것은 없고 태산은 작다. 죽은 아이보다 오래 산 사람은 없고 펭주도 어릴 때 죽었다. 천지는 나와 동시에 태어났고, 만물은 나와 하나다.”[85] 처음 두 문장은 모든 척도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장 크거나 가장 긴 것은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를 인식해야만 인간은 만 가지 사물들 사이에 살고 있으며, 그 자체가 만 가지 사물 전체의 일부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비극적 사유와 도가적 사고를 대비시켜 단순화할 위험이 있을 수 있지만, 다양성의 문제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가능성으로 성찰하기 위해서는 그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밤에는 모든 소가 잿빛이라는 말이나 모든 이론이 잿빛이라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예술과 철학 모두 위기를 급진적인 개방으로 바꾸기 위해 그 시대의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비판의 역할이기도 하다. 제가 여기서 사용하고자 하는 비판의 개념은 칸트의 비판, 즉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폭로(또는 한계 부과)에 더 가깝지만, 여기서 우리는 가능한 것을 넘어 불가능한 것, 즉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미지에 대한 급진적 개방으로 나아가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5. 재귀 기계들의 추월
예술과 기술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스인에게 테크네는 예술과 기술을 모두 의미하므로, 하이데거에게 예술과 기술의 그리스적 기원은 자기-은폐로부터 존재를 드러내어 인간 현존재(Dasein)가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49>경험한다는 것은 칸트의 경험 대상처럼 그것을 객체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객체화하지 않고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에 대한 그리스 개념인 알레테이아(aletheia)는 논리적 진리가 아니라 가장 신비한 것이 드러나는 통로이다. 칸트의 미에 대한 개념은 이러한 의미에 가깝고, 실제로 그의 『판단력 비판』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비판을 연결할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지만 주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관념을 정교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꼽힌다.
오늘날 ‘예술과 기술’에 대한 논의가 점점 더 보편화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돌이켜보면 1830년대 은판사진술을 처음 본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가 ‘회화는 죽었다’고 주장한 이후 현대 미술은 부분적으로 사진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상주의는 카메라가 포착할 수 없는 풍부한 붓터치 기법으로 캔버스에 생생한 경험을 담아냄으로써 사진과 경쟁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역사학자 오무라 세이가이(大村西崖, 1868-1927)는 사진의 기계적 도전을 고려하여 문인화, 즉 일본어로 분진가(bunjinga)의 부활을 제안했다. 그의 1921년 논문 「문인화의 부흥」(文人畫の 復興)은 중국의 저명한 화가 진형각(陳衡恪, 1876-1923)의 찬사를 받아 번역되어 그의 『중국 문인화 연구』에 수록되었다.[86]
문인화의 부흥은 부분적으로는 동서양의 가치관과 문화의 충돌로 인한 것이지만, 오무라와 진형각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회화와 사진을 구분함으로써 예술의 기계적 재현성 시대에 대응하고 저항했기 때문에 흔히 간과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인화는 모방적 사실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미 디테일과 생생한 경험을 포착하는 사진과는 다르다. 오늘날에는 사진이 제도화된 예술의 일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회화가 시각 예술의 주요 매체가 되었을 때처럼 사진이 예술 창작에 더 이상 도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부흥은 보다 심오한 이해와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제도화된 회화 <50> 민족주의와 문화적 본질주의에 빠르게 흡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여전히 다양한 문화적 맥락에서 예술과 기술의 만남과 대립을 증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예술과 기술’에서 ‘과’는 우리 시대에는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예술과 기술’이라고 하면 글로벌 예술과 디지털 기술을 의미하며, 여기서 ‘과’는 기술을 사용하는 예술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사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을 활용한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술이 기술을 도구화하거나 전유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산업적 생산물을 활용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더 정확하게는 준 하이데거적 언어로 ‘알려지지 않은 존재’에 대한 질문을 다시 제기하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하이데거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 혹은 존재에 대한 질문은 기술과 지역성에 대한 질문을 다시 열어보려는 시도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한다. 예술이라는 의미에서 예술이 기술생태다양성의 상상력을 제공함으로써 기술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고, 지역성이라는 의미에서 - 서양 철학은 존재에 관한 것이고 동양 철학은 무에 관한 것이라는 니시다를 잠정적으로 따른다면 - 기술을 통해 미지에 대한 질문을 다시 여는 것은 다양한 문화와 영역에서 다양한 사유 방식(미학적, 기술적, 도덕적, 철학적 등)의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프레임(Gestell)을 본질로 하는 현대 기술을 재-전유(re-appropriate)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날 기계의 현주소를 살펴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진 이후 미디어 기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지름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나는 『재귀성과 우발성』에서 기술에 대한 현재의 이해가 칼 마르크스가 맨체스터 공장의 기계를 관찰한 것처럼 18~19세기의 균질하고 반복적인 오토마타(automata)로서의 기계 이미지에 잘못 갇혀 있다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18세기 말에는 유기체라는 개념이 메커니즘이라는 개념에 대항하여 동원되었고, 가장 중요한 철학적 논의는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시작했다.
<51>칸트의 『판단력 비판』은 내가 철학하기(philosophizing)의 유기적 조건이라고 부르는 것을 설정한다. 이는 철학이 존재하고자 하는 한, 철학은 유기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적 기계론과 칸트적 유기체론 사이의 이러한 인식론적 파열은 철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으며, 이는 낭만주의와 포스트 칸트주의자들 사이에서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유기체적 사고방식은 20세기 초까지 이어져, 특히 19세기 산업주의와 기계화에 대한 비판에 반향을 일으킨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와 앙리 베르그송의 유기체 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유기체 철학은 20세기에 시스템 이론, 프로세스 철학,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이버네틱스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48년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동물과 기계의 제어와 커뮤니케이션』은 기계와 유기체 사이의 대립이 종식되었음을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뉴턴적 시간 대 베르그송적 시간’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장에서 위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의 자동화가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은 종류의 베르그송적 시간 속에 존재하며, 여기서 베르그송의 고려 사항에서 살아있는 유기체의 본질적인 기능적 양태가 이러한 유형의 자동화와 동일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음을 보여준다. (...) 사실, 기계론자-생명주의자 논쟁 전체는 잘못 제기된 질문의 고해성소(limbo)로 전락해 버렸다.[88]
니덤과 같은 많은 생물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생기론이 유기체론(organicism)과 다르다고 논증할 수 있지만, 이들은 기계와 유기체 사이에 동일한 대립이 있다고 지적한다. 사이버네틱스가 이 대립을 극복했다는 위너의 주장은 사이버네틱스 기계가 유기체의 행동에 동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이버네틱스의 논리는 기계 이론을 훨씬 뛰어넘어 확장될 수 있으며, 실제로 2차 사이버네틱스에서는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과 하인츠 폰 푀르스터(Heinz von Foerster)의 시스템 이론을 통해 거의 모든 지식 영역의 분석에 사용되었다. <52>위너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사이버네틱적 사유는 최근 수십 년 동안 기술 발전의 원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기계의 지위와 관련하여 두 가지 가능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첫째, 디지털 사이버네틱 기계는 18~19세기의 기계와는 매우 다르게 유기적으로 변하고 있다.[89] 둘째, 이러한 기계는 더 이상 개별적인 독립형 기계가 아니라 은행 시스템, 소셜 네트워크, 소셜 신용 시스템, 스마트 시티 등 거대한 시스템으로 통합되고 있다. 오늘날 기계 개념의 토대를 이해하고 무엇이 위태로운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탐구를 수행해야 한다. 기계의 새로운 위상은 첫째, 유기체와 기계, 주체와 객체, 동물과 환경 사이의 이원론적 대립 논리가 피드백, 구조적 결합 등 재귀적 연산에 의해 이미 극복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기계의 유기화는 기하급수적으로 강화된 연결성과 알고리즘을 통해 새로운 총체성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18세기 말 셸링과 실러는 자연 법칙과 국가 법칙으로 표현되는 기계론의 틀짓기(enframing of mechanism)를 극복하고자 했으며, 셸링에게는 비극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고 실러에게는 극의 동기가 되는 유기체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셸링의 비극 철학은 유기적인 것이 기계적인 것과의 단절로서 철학의 조건이 되었고, 비극적 예술은 기계적인 형태를 초월하는 ‘유기적 형태’(또는 원형식[Urform])를 대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셸링 이후 20세기까지 이 유기적 형태가 발생학, 철학, 심지어 중국학에서 승리했다면, 이 유기적 형태가 사이버네틱스에 의해 전유되었고, 더 중요한 것은 사이버네틱스에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이버네틱스가 기계와 유기체, 주체와 객체 사이의 구별을 극복할 수 있는 유기적 형태를 완비한다고 주장한다면, 비극의 철학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계와 유기체 사이의 대립은 오늘날 사이버네틱스에 직면하여 재고되거나 심지어 재창조되어야 한다. 반면 하이데거의 사이버네틱스 독해는 유기체를 자연에 대한 근대성의 기계적-기술적 승리로 간주한다는 점을 언급할 가치가 있다[90]. 그의 노력은 1장에서 자세히 살펴볼 유기체론의 틀짓기( enframing of organicism)를 뛰어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베르나르 스티글러는 우리 시대 기술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극적 사상가 중 한 명이다. 여기서 비극적이라는 의미는 재앙으로서의 우연성[우연적 사고]을 필요성으로 긍정함으로써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티글러의 작품에서 기술은 최고의 치료적 의미에 도달하며 고대 그리스인의 비극적 정신과 다시 연결된다. 이는 마치 철학의 유일한 기여인 것처럼 윤리에만 집중하는 오늘날의 기술 평론가들 사이에서 극히 드문 경우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올림푸스의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기술을 나눠주는 것을 잊어버린 동생 에피메테우스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했던 것은 비극적 해석을 통해서도 정당화될 수 있다. 무지와 건망증으로 인한 그의 동생의 우연적 사고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아이스킬로스에 의해 씌여진 프로메테우스는 올림푸스의 신들 대신 인간 편에 선 비극적 영웅으로, 절벽에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먹히는 하마르티아(hamartia)의 형벌은 기술의 상징인 불을 통한 그리스적 현존재(Dasein)의 해방이라는 그의 운명에 대한 긍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54>프로메테우: 참으로 내 친구들은 나를 보고 불쌍히 여겼소.
합창단: 당신의 죄가 당신이 말한 것보다 더 심했소?
프로메테우스: 그렇소. 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죽음을 예견하지 못하게 했소.
합창: 그들의 불행에 대해 어떤 치료법을 발견했소?
프로메테우스: 나는 그들의 마음에 맹목적인 희망을 심었소.
합창: 당신의 선물은 그들에게 큰 축복을 가져왔소.
프로메테우스: 나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했소. 그들에게 불을 주었지.
합창: 뭐라고? 하루살이 인간들이 이미 불의 뜨거운 빛을 소유하고 있단 말인가?
프로메테우스: 그들은 불을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많은 기술을 익힐 것이오.[91]
불은 프로메테우스의 것이든 다른 문화의 신화 속 인물이든 상관없이 최초의 기술이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중요하게도 반란의 상징이다.[92]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프로타고라스가 이야기하는 신화에 따르면 인간은 불을 통해 기술을 습득하기 전에는 자질이 없는 존재이며, 이러한 기술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현대 기술은 비판받아야 하지만 철학이 지속될 수 있는 필수적인 기본 요소로 긍정되어한다. 스티글러는 이러한 사고(accident)나 우발적 사건을 준원인(quasi-cause)이라고 부른다. <55>예를 들면, 병에 걸린 것은 니체가 철학자가 된 준원인이다. 자연의 법칙에 따르면 질병은 철학자가 되는 원인이 아니며, 정신질환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철학자가 되지 못하지만 니체에게는 질병이 그의 사유의 특이점을 나타내는 변혁적 힘이 되었다. 즉, 니체는 짜라투스트라처럼 자신의 병을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나는 왜 운명인가’를 물을 수 있는 준원인으로 긍정한다.[93] 그러나 이러한 니체적 태도는 현대 기술을 극복하기 위한 시작일 뿐,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는 아직까지 관심이 없다.
예술 경험의 다양성을 살펴볼 때, 이 책의 주요 주제인 산수화의 정신과 같은 다른 경험들이 현재의 기술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물어볼 수 있다. 『재귀성과 우발성』에서 나는 니덤이 현대 생물학적 사고의 한 분파(예컨대 유기체론 학파, 특히 화이트헤드, 루드비히 폰 버틀란피Ludwig von Bertalanffy, 조셉 우드거Joseph Woodger 등 이론생물학 분야의 생물학자)와 중국 사상에 기인하는 유기체론의 모호성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논의했다. 중국 사상과 서양 철학의 차이에 대응하여 니덤은 유기체론 학파의 대표자로서의 그의 실천과 나중에 중국학자로서의 그의 직업을 융합한다.
중국의 영원한 철학(philosophia perennis)은 유기적 유물론이었다. 이는 모든 시대의 철학자와 과학 사상가들의 선언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중국 사상에서 기계론적 세계관은 발전하지 못했고, 모든 현상이 위계적 질서에 따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유기체론적 관점은 중국 사상가들 사이에서 보편적인 것이었다.[94]
<56>니덤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 두 번째 권에서 라이프니츠부터 시작하여 자신과 동료들을 포함한 화이트헤드와 현대 유기체론자들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유기체론의 역사를 제기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니덤은 또한 라이프니츠의 유기체론이 신유학자인 주희의 철학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라이프니츠는 이를 중국의 프랑스 예수회로부터 배웠다. 『재귀성과 우발성』은 니덤이 구상한 유기체론의 역사를 정교화하고(아래 긴 인용문 참조), 그의 생각을 코스모테크닉스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 현대적으로 적용하는 데 전념했다.
여기서는 자연적 유기화(organisation)의 의미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통해 기계적인 뉴턴적 우주를 수정하려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움직임을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적으로 이러한 경향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는 의심 할 여지없이 화이트헤드이지만, 이러한 경향은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진술의 수용 가능성과 함께 자연 과학의 방법론과 세계관에 대한 모든 현대적 연구를 관통한다. 장 물리학(field physics)의 다양하고 놀라운 발전, 초기 전체성 학파(Ganzheit schools)의 모호함을 피하면서 기계론과 생기론 사이의 가망 없는 투쟁을 종식시킨 생물학적 공식화, 콜러의 게슈탈트 심리학. 그리고 철학적 수준에서는 로이드 모건과 S. 알렉산더의 창발적 진화론, 스무츠의 전체론(holism), 셀라스의 실재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엥겔스, 마르크스 및 그 후계자들의 변증법적 유물론(조직 수준 포함)이 등장한다. 이제 이 실을 거꾸로 추적하면 헤겔, 로체, 셸링, 헤르더를 거쳐 라이프니츠(화이트헤드가 끊임없이 인정했듯이)로 이어지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으로 라이프니츠가 예수회의 번역과 전파를 통해 그에게 전해진 신유학파 주희(또는 주희)의 교리를 연구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고 <57>유럽 사상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공헌을 할 수 있었던 그 독창성의 어떤 것이 중국적 영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살펴볼 가치가 있지 않는가?[95]
이러한 주장은 훨씬 더 많은 조건을 요구하기 때문에 중국 사상을 유기체론적 사고라고 부르는 것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 서양에서 유기체론적 사고는 기계론적 사고의 부정에 의해 조건화되는 반면, 중국 사상에서 기계론적 사고가 없으면 중국 사상을 ‘유기체론적’ 사고로 동화시키는 지나친 일반화를 피하기 위해 다른 배치가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고 니덤의 분석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대신 니덤의 분석이 옳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셸링과 쉴러를 읽을 때 즉시 비슷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즉 그것은 중국 사상과 사이버네틱스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기술이 점진적으로 구체화되고 발전함에 따라 하이데거가 주장한 것처럼 철학뿐만 아니라 사유 자체가 사이버네틱스로 완전히 대체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유기체라는 모호한 개념을 넘어 새로운 관점에서 중국 사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가?
여기서 사유한다는 것은 변형의 힘을 가진 새로운 독해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의 실제 상황을 성찰하고 그것을 넘어 급진적인 개방을 상상할 수있게 해준다. 이것이 철학이 종말 이후 사유의 과제이다. 이 사유의 과제는 주로 현대 기술의 재전유이다. 현대 기술이 없었다면 우리는 형이상학이라는 하나의 궤적만 따랐을 것이다. 우리의 탐구는 중국학자나 예술사학자의 작업과는 상당히 구별될 것이다. 이는 중국 사상에 대한 새로운 읽기와 그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이다. 3장에서는 유기체론의 한계와 기계 지능의 진화에 비추어 예술의 역할에 대해 질문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58>§6 유럽 이후, 예술과 철학
나는 포스트 유럽 철학이라는 공동의 프로젝트를 구상할 것을 제안하면서 『재귀성과 우발성』을 마무리했다. 사이버네틱스의 기계-유기주의(mechano-organicism)가 유럽 철학과 형이상학의 종말을 고했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따른다면, 모든 철학은 포스트 유럽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미국이 이미 포스트 유럽 철학을 구현하고 있다고 말하며 반대할 수도 있다. 한때 미국이 '진정한 유럽', '법과 자유의 피난처'로 여겨지며 낡고 보수적인 유럽을 앞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정학적 중심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이동하고 20세기에 제국주의 외교 정책을 펼치면서 미국은 칼 슈미트가 올바르게 말했듯이 구유럽의 연속체가 되었다. “서반구의 참신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의 전제와 토대는 이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모두 사라졌다.”[96]
슈미트의 한탄은 지구의 새로운 노모스(nomos)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슈미트에게 그러한 새로운 노모스는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도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원자폭탄과 사이버네틱스가 없었다면 미국은 서반구의 노모스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그러한 진보는 변증법적으로 부정되고 특히 COVID-19 대유행 기간 동안 자체 붕괴에 직면 해 있다. 새로운 노모스를 상상하고 싶다면 기술 문제의 근원으로가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우리에게 포스트 유럽 철학의 질문은 기술에 대한 그러한 탐구에 기반을두고 있다.
비유럽인들이 탈식민화의 필요성 때문에 포스트 유럽 철학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유럽 자체가 필연적인 프레임(Gestell)를 극복하기 위해 포스트 유럽 철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1장에서는 하이데거가 유럽 철학의 실현이자 종말로서 현대 기술을 <59> 독해하는 것을 면밀히 따라갈 것이다. 프레임(Gestell)는 유럽 철학의 궤적의 한계이며(그래서 종말이라고 불린다), 그것이 보편적이고 가변적이며 고유한 실재로 받아들여질 때 비유럽적 사유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제약이기도 하다(이런 경우 아시아적 또는 아프리카적 지혜라고 불린다).
이러한 극복은 부정이나 거부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현대 기술뿐만 아니라 사고 자체의 변혁을 의미한다. 이러한 재평가(또는 니체적 의미에서의 가치 재평가)는 기술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른 사고방식에 대한 급진적인 개방과 상호성으로서의 자기 발명을 요구한다. 나는 『재귀성과 우발성』에서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대응으로 기술생태다양성(technodiversity) 개념을 소개했는데, 왜냐하면 사유가 생존하고 실현되기 위해서는 물질적 지원, 즉 스티글러가 말하는 3차 기억, 즉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난 100년의 근대화 기간 동안 비유럽적 사고가 발전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현대 과학과 기술에 의해 유지되는 비유럽적 사고와 유럽적 사고 사이의 양립불가능성 때문이다. 유럽인의 사고는 기술을 통해 구체화되는 반면, 비유럽인의 사고는 점점 더 추상화되고 있다.
이러한 양립불가능성은 줄리앙이 중국과 서양 사이의 연구에서 공식화했던 것처럼 사고 체계 간의 절대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넘을 수 없는 경계로서의 분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립불가능성은 사고 자체의 개별화를 위한 조건이자 가능성으로도 볼 수 있다. 새로운 것이 출현할 필요는 있지만, 그러한 사고가 어떻게 온전히 힘을 발휘하여 문화 전반의 개혁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하이데거의 철학이 끝난 후 프랑스 이론, 포스트 구조주의, 그리고 최근에는 사변적 실재론이 등장했지만 모두 서양 철학에 대한 자기 비판을 바탕으로 작동한다. 하이데거처럼 이러한 전통에 속한 사상가들은 고대 그리스인들과 함께 사고하거나 그들과 대립하면서 서양 사고 자체에서 탈출구를 찾으려고 한다. 이러한 가능성은 그 자체로 양립불가능성이기 때문에 즉시 어떤 한계를 함축한다. 개체화는 내부와 외부의 긴장이 이분법적 논리(단순한 면역학적 반응)로 작용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서유럽 사상에 기초한 세계 문명의 시작”이라고 부르는 세계화 이후의 <60> 사고의 조건이다.
철학의 종말 이후, 우리는 통치 수단으로서의 종교의 부활과 사회적, 정치적 계층화에 대응하기 위해 철학적 사고와 미학적 사고에서 새로운 시작을 모색한다. 미학적 사고는 세계와 우주에 대한 가장 직관적인 접근을 제공하며, 이를 바탕으로 철학적 사고가 구체적인 개념적 질문으로 침투하고 이를 재구성함으로써 미학적 사고에 기여할 수 있다. 즉, 미적 사고와 철학적 사고는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를 매개로 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철학의 종말은 하이데거가 제안한 것처럼 구식이기 때문에 낡은 사고를 대체할 또 다른 보편적 사고를 발명해야 한다거나, 그러한 보편적 사고가 이미 사이버네틱스와 현대 기술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제는 지역성의 문제를 우회하는 보편적 사이버네틱 사고를 넘어서고, 기술적 특이점 또는 지능 폭발을 약속하는 디지털 기술에 대한 경쟁으로 정의되는 지정학을 넘어서는 것이다.[97]
새로운 보편적 언어와 사고를 열망하는 대신 지역성의 문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것은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또는 상대적인 것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므로 나는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미학 이론』에서 공격한 미적 명목주의(aesthetic nominalism)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아도르노는 미적 명목주의를 권위에 대한 저항과 부르주아 개인주의에 대한 찬양, 즉 예술의 정의로서의 장르를 포기하고 예술 작품 자체로 돌아가는 것과 연관시킨다.[98] 아도르노는 미적 명목주의가 보편적인 것을 묻어버리고 예술과 비예술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미적 명목주의는 보편적인 것을 극복하는 대신 단순히 그것을 무시한다. 이것이 크로체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이었다. 크로체<61>가 정말로 보편적인 것을 무시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가 보편적인 것에 적절한 이름을 부여하기를 거부한 것은 사실이다.[99]
같은 이유로 아도르노는 칸트 철학을 근본적으로 명목론적이라고 간주한다.[100] 칸트 철학은 보편적인 것에 대한 지속적이고 세심한 탐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거부해야 한다. 보편과 특수는 존재의 두 가지 차원이지만,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상호 배타적인 두 존재는 아니다. 실제로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은 서로 다른 크기와 다른 차원의 존재로 동시에 존재한다. 로고스, 도, 절대 무, 아름다움과 같이 보편적인 것이 우리가 강제하는 고유명사로 완전히 반영되지는 않더라도 서로를 표현할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보편적 상대주의자 또는 상대적 보편주의자라고 부르고 싶다. 이는 앞서 말한 바, 반대되는 것들의 연속성을 잘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기술에 관한 물음』 이후 내가 기술 문제와 관련하여 지역성을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철학을 지역적으로 생각하자고 제안했습던 것이다. 중국은 그러한 지역성의 한 예이며, 지역성 안에는 다른 많은 지역성도 있다. 이러한 지역성이 단순히 기술에 종속되지 않고 어떻게 기술의 발전과 상상력에 기여할 수 있을까?
관건적으로 정치적 정체성과 민족주의에 대한 질문으로는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사유의 문제다. 우리의 시급한 과제는 단순한 대립과 순진한 통합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론을 공식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이 이러한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의 예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하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시 파시즘이나 앞서 말한 단순한 면역학적<61> 반응에 빠지지 않고 지역성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101] 예술은 철학과 공학 사이의 실험적 사고 방식이다. 특히 우리 교육 시스템의 학문적 구분은 21세기의 도전에 더 이상 대응할 수 없는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미술 시장과 소위 현대미술 산업이라는 현재의 갇힌 틀을 넘어 탈영토화하는 것 역시 예술의 과제일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나는 그림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는 클레의 주장에 담긴 예술의 감각을 증강하고 감성을 교육하는 능력을 강조한다. 산수화는 비극적 예술과는 다른 감각과 감성을 요구한다. 예술의 다양한 경험에 대한 탐구는 무엇보다도 감각의 증강과 그 작동 방식을 연구하기 위한 제안이다. 이는 서양에서는 존재에 대한 탐구, 동양에서는 도(道) 또는 절대 무(無)에 대한 탐구의 기본이다. 여기에는 미학적, 철학적 직관의 배양이 포함되는데, 이는 인간 증강과 같은 기술을 통한 다른 유형의 감각 증강으로 인해 쇠퇴하고 있다.
감각 지각과 관련되는 미디어 기술의 오랜 역사는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길다. 하지만 18세기의 현미경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현재 가속기가 입자를 관찰하는 것처럼 두 가지 축척 또는 배율로 단순화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인공위성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것처럼 줌아웃한다. 이 장비를 사용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부터 가장 큰 것까지 모두 담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감각을 강화하는 것은 감각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지, 다른 존재 및 세계와의 관계를 보존하고 새롭게 할 수 있는 다른 감각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적 사고는 감각의 능력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반면, 철학적 사고는 다른 감각을 개발하고자 한다. 이 두 가지가 통합될 수 있는 것은 예술이다. 따라서 예술과 기술의 관계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예술의 다양한 경험에 대한 탐구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회함으로써 예술의 임무와 그 가능성을 종합적으로 생각하도록 초대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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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1장 ‘세계와 대지’는 하이데거의 1935/36년 에세이 「예술 작품의 기원」과 이후 그의 세잔과 클레의 작품과의 만남을 통한 철학의 종말 이후 예술의 역할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 2장 ‘산과 물’에서는 비극적 예술과 현대 예술의 현상학적 읽기와 밀접하면서도 구별되는 산수 철학을 공식화하려고 시도한다. 노자, 왕필, 모종삼에 대한 특별한 독해를 통해 비극주의적 철학 방식, 즉 현(xuan)의 논리를 보여 주려고 시도한다. 3장 ‘예술과 자동화’에서는 니시다의 바쇼(Basho) 연구를 통해 오늘날 자동화 기술이 사상사 및 미학적 사고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위치를 이해하고, 산수화에 대한 두 번째 시도를 수행한다. 예술의 다양한 경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현대 기술의 본질인 틀짓기를 재구성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는지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