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중간에서 만나기>(카렌 바라드)_6장
원문서지: Karen Barad, Meeting the Universe Halfwa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7, 223-246.
번역: 박준영(노마씨, 수유너머 104)
_ ‘< >’ 안의 숫자는 원문의 페이지 숫자임
_ '[ ]'의 숫자는 주석의 숫자임.
_ 주석은 번역하지 않음.
<223>
6장 시공간 재(배)치-자연문화적 힘들과 변화하는 권력의 위상학
뉴욕에서 런던까지 대서양 횡단 비행 동안, 3만 5천 피트 순항고도에서 보잉 747기 3A 좌석 승객 맞은편 트레이에 걸터 앉아, 인텔 기반 노트북 컴퓨터와 시드니 메를린치 중개업자 사무실의 20층 야외 사무실 사이를 연결하는 소통은 스위스 은행 계좌로부터 저장(Zhejiang) 직물 공장을 포함하는 벤처 기업으로 투자 자본 이전을 시작한다. 이 사건은 지리적 분석을 거부하는 규모의 모호성을 산출한다. 근접성과 위치는 공간성의 무력한 측정기준이 된다. 거리는 경계와 연결성에 관한 질문을 억압하던 그것의 객관성 – 그것의 유효성 - 을 잃는다. 기하학은 스크린 위의 그토록 많은 픽셀로 재현되는 0과 1의 특수한 패턴의 이동으로 변화하는 위상들에 길을 내어 준다. 이것은 저장시의 공장와 그 주변 공동체의 물질적 조건에서 자본의 흐름과 결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낸다. 마우스의 클릭과 함께, 공간, 시간 그리고 물질은 이 사이보그 인간과 기계, 자연과 문화, 그리고 경제학과 담론적 실천들 간의 경계들을 넘어서고 개정하는 ‘횡단-행위’ 안에서 상호 재배치된다.[1]
사회적 위치, 입장성, 관점, 맥락성, 상호교차성 그리고 국지적 지식과 같은 어떤 것으로부터 나오는 전망은 좋은 이유에서 모두 여러 페미니즘적 도구상자와 이어지는 개념들이다. 그럼에도 이 효과적이고 유용한 도구들은 공간과 유클리드 기하학의 상상력의 저장고(container) 모델에 의존한다.[2] 운동하는 물질을 위한 저장고 또는 환경으로서 공간의 관점은 서구 인식론의 많은 것에 널리 영향을 미친다. 지리학자 에드워드 소자(Edward Soja)가 논한 바에 따르면, “공간에 관한 이 본질적으로 물리적인 관점은 그것이 철학적이든, 이론적이든 또는 경험적이든, 천체의 운동이나 <224>인간 사회의 역사와 풍경에 적용되든 아니든 공간 분석의 모든 형식들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또한 근본성과 물리적 구성, 객관성의 아우라, 불가피성과 구체성이라는 모호한 의미와 공간적으로 모든 것들에 영향을 끼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Soja 1989, 79).
문화 지리학자들은 사건들이 중립적 배경에 대항해서 펼치는 이러한 공간적 관점과 경합해 왔다. 어떤 패러다임 전환이 공간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간과 사회가 상호적으로 구성되며 공간은 변화의 어떤 작인(agent)라는, 즉 공간이 사건들의 펼침에서 능동적 역할을 한다는 앙리 르페브르의 주장과 더불어 발생했다. 데이비드 하비의 지리역사적 유물론을 기반으로 하여, 도나 해러웨이는 계급만이 아니라 인종화와 젠더화된 성애와 같은 여타 물질-사회적 실천들도 “형성-중-신체와 우발적 시공간”(Haraway 1997, 294)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논한다. 사례를 통해 해러웨이는 공간화의 저장고 모델이 분자 생물학의 실천들에서 유전자 지도에 대한 집착에서 작동하는 역할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관찰을 제시한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공간화는 잡다한 존재자들의 집합에 의해 구속된 권력으로 엮여진 과정인 바, 그 망상조직이 시간과 공간 같은 ‘절대적’ 차원들 안에 비열대적으로(nontropically) 경계지워진 신체들(땅, 사람들, 자원들 그리고 유전자들)을 자연스럽게 위치지우는 일련의 지도들로서 맹목적으로 숭배될 수 있다. 이 지도들은 그것들이 저장고 안의 비열대적, 실제적, 문자적 사물들 속으로 과정을 가져가는 특수한 종류의 실수를 가능하게 하는 한 물신이다(1997, 136).
복잡한 실천들을 구체화하고 그것들을 저장고 안의 사물들로 만드는 공간화 모델에 대한 해러웨이의 비판은 내가 여기서 탐구하고자 관심을 두는 재배치하는 공간, 시간 그리고 물질 안에 어떤 종류의 전환에 있어서 공간, 시간 그리고 신체들의 역동적이고 우발적인 물질화를 포함하여 몇몇 핵심 요소들을 포획한다. 이 요소들은 물질-사회적 요인들(계급을 비롯하여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 종교 그리고 민족성)의 설립은 물론이고 물질화 과정에서 기술과학적이고 자연적인 요인들(여기서 ‘자연’과 ‘사회’의 구성은 문제가 되고 주제가 되는 것의 부분이다), 생산관계들의 반복적 (재)물질화 그리고 세계의 물질적 관계들을 재배치하기 위한 행위적 가능성들과 책임성들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 그리고 연관된 이념들에 관한 체계적 전개와 더 진전된 연구를 제공할 것이다. 나는 행위적 실재론이 어떻게 권력에 관한 신유물론적 이해에, 그리고 신체들, 정체성들, 그리고 주체성들의 생산에 가해지는 그것의 효과에 관한 이해에 기여할 수 있는지 숙고한다. 내 분석의 핵심은 행위적 실재론의 물질에 관한 이해가 동적이고 관계들의 변화하는 얽힘이라는 것이지, 사물들의 속성이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생산관계의 물질화에 관한 정치학자인 릴라 페르난데스(Leela .Fernandes)의 민족지학 연구와 관련하여 이러한 생각들을 발전시키고 탐색한다. 이 연구 영역에 따르면 정치경제학과 문화적 정체성 구성에 관한 질문 둘 모두가 생산현장에서 발휘된다.
우리가 위치의 정치를 가능성의 정치로 대체한다는 루스 윌슨 길모어(Ruth Wilson Gilmore)의 제안을 따르면서, 나는 이 장에서 공간에 관한 저장고 모델, 시간의 공간화 그리고 공간, 시간 그리고 위치와 같은 관념의 기초적인 특성을 떼어 놓고, 미결정성과 결정성의 역동적인 간-행이 그와 같은 미결정적인 것들, 우발적인 것들, 그리고 모호한 것들이 인과성과 공존하는 세계의 생성의 가능성들과 불가능성들을 재배치하는 행위소의 공간을 열어 놓는다는 대안적 틀을 사용하여 공간, 시간 그리고 물질에 대한 생각을 재개념화함으로써 탈구시키고자 한다.[3] 이러한 재개념화는 몇몇 고정된 개념에 대한 통상적인 고정장치에 대한 요구 없이 비판적 실천에 관건적인 규범적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4] 결정적으로 이러한 사유들은 최근의 동역학적 개념(권력의 역학도 포함하여)을 재사유하는 중요한 과제를 뚜렷하게 한다.
행위적 실재론은 전통적인 실재론 대 구성주의, 행위소 대 구조, 관념론 대 유물론 그리고 후기 구조주의 대 맑시즘 논쟁에서 유통되는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틀이다,[5] 모든 신체들의 물질화에 있어 그러한 것들의 결정적 역할을 포함하여 그것의 행위소 재형성과 생산적이고, 강제적이며 배제적인 자연문화적 실천의 본성에서, 행위적 실재론은 예외적으로 인간/사회 영역에 집중하는 수행성 이론 너머로 나아간다. 행위적 실재론은 신체의 물질화에서 작동 중인 힘들이 사회적이지만은 않으며, 생산된 신체들이 모두 인간은 아니라는 사실을 고려한다. 그것은 물질적 강제와 조건들을 구체화하고, 행위소의 물질적 차원들을 후기구조주의적 분석들로 구체화하는 방법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런 저런 중요한 방식에서, 행위적 실재론은 물질성을 유일하게 담론적 실천들의 효과 또는 결과로 파악하는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 이론들로부터 분기한다. 이 후자의 접근법들은 그 본질에 있어서 어떤 행위적이고 생산적인 요인들로서의 물질성에 관한 사유를 결여하며, 이에 따라 물질과 수동성 간의 방정식을 재구성하는 것은 이런 몇몇 접근법들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게다가 그것들은 많은 억압적인 질문들을 이론화하지 않은 채(이론 아래에) 남겨 둔다. 즉 담론들이 물질적 결과들을 가진다는 주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담론이 그것의 효과들로 작동할 수 있다는 식의 담론과 물질성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물질이 담론을 강제한다고 말해질 수 있을 만한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물질적 재배치들은 담론적 결과들을 가지는가? 담론들의 물질적 결과들과 <226>서로 간에 배제하는 것으로 보이는 물질의 담론적 결과와 관련하여 질문 제기하는 우리의 현재 물질적이고 담론적인 조건들은 어떠한가? 이것은 그와 같은 이론들이 결정적인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통찰들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판가들은 그것들이 실행가능한 비판 사회학 이론들, 즉 “경제적 힘들 – 식민화, 생산 중심의 이전 또는 새로운 기술의 발전을 통한 새로운 시장의 구성과 같은 –과 주체성의 재형성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의 리트머스 검사들 중 하나에 직면하여 부적합한 것으로 판명된다는 것에 주목했다(Hennessy 1993 , 25). 그리고 이는 물질이 되는 물질적 힘들의 짧은 목록에 불과하다.
동시에 행위적 실재론의 물질성에 관한 재개념화는 엄격하게 경제적인 것으로서 물질성의 전통적인 맑스주의 개념들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순수하게 사회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몇몇 포스트-맑스주의적 개념화로부터 나온다. 행위적 실재론은 이러한 진부한 자연문화적 구분들을 가로지르는 실천에 관한 어떤 새로운 유물론적 이해를 진전시킨다.
릴라 페르난데스의 연구작업은 또한 이런 방면에서 중요한 개입을 만들면서, 구조적 힘과 담론적 힘 간 관계의 이론화에서 사회적 실재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진전시킨다. 로즈마리 헤네시(Rosemary Hennessy)와 루스 윌슨 길모어(Ruth Wilson Gilmore)와 같은 다른 페미니스트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페르난데스에게도 구조적 관계는 구조주의적 의미에서 구조에 대한 것이 아니며, 후기구조주의는 단호히 말해 맑스주의의 해독제가 아니고 오히려 구조적 분석의 교조적 형식들의 교정 작업에 유용하게 부합된다.[6] 이러한 이론가들이 강조하는 바에 따르면, 계급을 완연한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그리고 담론적 차원들의 어떤 역동적인 변항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라지지 않으며, 사실상 경제적 자본을 그것의 물질성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분석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이와 흡사하게 문화적 경제체들의 물질적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장에서 나는 페르난데스의 권력의 구조적-담론적 관계 개념과 권력의 물질-담론적 관계에 관한 행위적 실재론의 이해를 그 각각이 서로를 통과하게 함으로써 회절적으로 독해한다.[7] 이것은 그것들의 물질성 안에서 그리고 담론에 대한 그 관계 안에서 구조적 관계들의 본성에 관한 보다 심오한 이해와 권력 관계의 역학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가장 중요한 페미니즘의 도구들 중 몇몇을 재정비할 필요성을 제안할 것이다.[8]
노동자를 생산하기/구조를 생산하기-신체적 생산의 물질-담론적 장치로서의 작업장
정치 경제학과 문화 정체성에 관한 주제들은 분리불가능하다. 릴라 페르난데스의 캘커타 황마 공장(Calcutta jute mill)에서에서 권력의 구조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작용에 대한 분석은 이 주장에 대한 강력한 경험적 지지대를 제공한다. 『노동자를 생산하기』(Producing Workers, 1997)에서 <227>페르난데스는 후기구조주의와 맑스주의 학파로부터 분석 도구들을 취하는데, 육중한 기계류의 전동장치들을 연결하고 움직이는 것에 노동계급이 생산되는 다양한 기술들에 관한 이해가 포함된다고 본다. “젠더, 종교 그리고 민족성과 같은 다른 사회적 정체성의 형식들이 계급 정체성과 분기하거나 교차하는 상징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 힘들인 반면 계급 구조는 일률적이고, 객관적인 ‘순수성’”이라는 노동에 대한 연구의 완고한 가설을 해체하면서, 페르난데스는 작업장의 역학에 관한 연구를 통해 정체성 범주의 다양한 연결점들과 세부적인 간-(재)작용들(intra-(re)workings)을 드러낸다. 이때 그러한 것들은 노동자들의 매일매일의 일상적 삶의 과정에서 물질화된다.
페르난데스의 연구를 이끌어 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1980년대 인도 황마산업에서의 경제 위기가 어째서 황마 노동력으로부터 여성의 차별적 해고를 초래했는가? 페르난데스의 주제는 성적이지 않다. 그것은 새로운 기술들의 최전선에 있지 않다. 재봉틀, 직기 그리고 다른 섬유기계가 공장 현장에 늘어서 있다. DNA-염기서열 모세관 전기이동 분광계, 사진 평판 시스템 또는 새로운 생물, 정보 그리고 나노 기술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페르난데스의 관심은 노동자들의 삶에서 노동조합 정치와 종교적 실천의 역할을 포함하여 공장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있다. 그녀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생산, 분배형태들, 그리고 서비스 경제, 비물질 노동, 아웃소싱, 도급계약, 공급망 경제, 유연 축적, 세력 확장, 탈영토화, 다중의 리좀적 저항 그리고 세계화의 정치학을 상징하는 어떤 탐구 장소를 고르지는 않았다. 반대로 이것이 자본주의 생산의 가장 최근 단계의 노동활동들에서 분리된 어떤 예외적 장소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페르난데스는 예외주의의 사례를 내세우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그녀의 연구는 예외주의(미국 예외주의를 포함하여) 또는 근대성과 전통 간의 당연시되는 이분법을 취하지 않는다. 페르난데스의 연구는 똑같은 오래된 논거나 방법들로의 회귀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판매가능한 상품의 생산이라기 보다 작업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 작업장의 물질적 조건들은 계급 관계와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에서 여타 문화적 정체성의 형식들을 수행적으로 생산한다. 페르난데스의 관심은 생산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는지 그리고 누구를 위해 생산되는지를 이해하려는 의도를 가진다. 어떻게 해서 다툼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가? 그것이 발생하는 국지적 형태는 무엇인가? 어떤 차별이 상이한 다툼의 발생에 기여하는 생산에서 다툼들을 일으키는 차별인가?
페르난데스는 <228>공장의 일상에서 공간, 시간 그리고 운동에 있어서 진행중인 사안들에 세밀한 관심을 둠으로써 차별의 구조적 관계의 (재)생산에 관심을 가진다. 예를 들어 페르난데스는 젠더와 계급 관계가 (재)생산되는 방식에 관한 단서들을 찾기 위해 작업장의 젠더화되고 계급화된 공간화를 검토한다.
계급의 ‘구조적’ 차원은 신규채용과 노동의 특정한 분할을 통해 노동자들이 작업장에 배치되는 방식들로 사유 가능하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배치는 젠더와 공동체의 정치학에 달려 있는데, 왜냐하면 그와 같은 정체성들은 노동자들의 배치와 관련되는 결정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젠더와 공동체는 계급 ‘구조’에 필수불가결하다. 동시에 공간의 젠더화는 노동자들과 관리자들 간 그리고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들 간 특정한 종류의 계급 위계를 나타낸다.(Fernandes 1997, 59)[9]
페르난데스는 이러한 공간의 젠더화에 관한 검토를 “젠더와 공동체가 계급 ‘구조’에 필수적이다”(59)라는 논증을 하기 위해 활용한다. 즉 계급 자체는 “작업장 정치학의 국지적 수준에서 역동적이고 경합적인 정치적 과정들의 생산물”(58)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주장이 단순히 이데올로기적/문화적/담론적인 것의 영역으로 계급을 격하시키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계급의 본질에 관한 잠재적 오해는 적어도 페르난데스가 의문스러워한 세 가지 가정들에 놓여 있다. (1) 경제적 범주들만이 물질적이며, 사회적 범주들은 그렇지 않다. (2) 계급은 예외적인 정체성 범주다. 그리고 (3) 계급, 젠더, 민족성, 사회적 지위(cast) 그리고 종교성과 같은 정체성 범주는 제각기 결정되는 개인의 속성들이며, 사회 동역학에 관한 이해는 이러한 사회적 요인들이 서로간에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아는 문제다. 페르난데스에게, 계급은 경제적 자본이면서 동시에 ‘경제’는 단순히 계급에 대한 것이 아니다(즉, 노동계급은 담론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계급, 젠더 그리고 공동체에 의해 생산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역동적이고 국지적인 생산물로서의 계급 구조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전 세계 모든 노동자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된다는 전통적 계급 계념으로부터의 그녀의 전환은 “젠더가 어떤 구조적 힘을 재현하며 담론적 또는 기호적 범주에 제한되지 않는다”(11-12)는 그녀의 주장과 함께 간다. 자본주의 기계의 전동장치들 – 전지구적 정치 경제학의 상이한 국지적이고 경합적인 형식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 – 은 물질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담론적으로 생산된다. 페르난데스는 분석적으로 동일하고 상호교환가능한 부분들로서 정체성의 획일적 개념을 거부하며, 정체성이 어떤 단일한 배치에서 장치와 같은 닫힌 단계 안에서 작동한다는 생각을 회피한다. <229>페르난데스가 기술한 바, 그 동역학은 아마도 그 장치의 작동이 말 그대로 서로 간에 이루어지며, 그럼에도 힘들의 불평등한 분배가 장치들 중에 상이한 잠재력과 수행능력을 초래하는 상이한 장치 회집체와 더 가까우며, 또한 그것을 위한 작동가능한 조건이기도 하다.
페르난데스는 “가능한한 세밀하게 시간, 공간 그리고 운동을 분할하는”(Foucault 1977, 137) 권력의 규율 체제의 중요한 생산적 효과들에 관한 푸코의 분석을 채택하여 확장한다. 그녀는 “구조”란 “운동, 공간 그리고 위치를 통과하는 권력의 코드화로”(Fernandes 1997, 175) 이해되어야 한다고 논증하며, “시간, 규율 운동, 공간 분할을 통제하는 코드화 체계가 노동자들의 신체를 젠더, 신분 그리고 민족성의 의미화를 통해 코드화한다”고 논한다. 만약 푸코가 주장한 대로, “규율이 어떤 분석적 공간을 조직화한다”(1979, 143)면, 그와 같은 권력의 기술은 결과적으로 계급, 젠더 그리고 공동체 간의 특정한 분석적이고 물질적인 경계들을 생산하는 임무 안에 도입된다(Fernandes 1997, 59). 나는 페르난데스를 권력의 규율 체제들이 개별적인 주체의 생산을 통해 작동하는 반면, 이 작동의 양상은 그것의 물질화하는 주체성들 안에 있는 바로 그 신체들을 만드는 계급들, 젠더들 그리고 공동체들 간의 물질적 경계들을 재배치하면서 새로운 구조적 권력 관계들을 탈안정화하고, 재배치하며 안정화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읽는다. 푸코의 미시정치학을 구조적 관계들의 중요성 – 사실상 바로 그것의 실존 – 의 거부로 해석하는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페르난데스는 푸코의 공식을 구조적 관계들의 본질과 동역학을 재사유하는 기회로 삼는다. 페르난데스에 따르면, “구조는 일련의 초월적, 객관적 결정요소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행위자들이 [...] 그들의 위치와 활동들을 부여하는 재현과 의미화의 양태들에 의해 형성된다”(Fernandes 1997, 137). 다시 말해 구조는 관계의 외재적 집합이 아니고, “그것들이 작동하는 영역 안에 내재하는 힘의 관계들”(Foucault 1978)이다. 게다가 구조는 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푸코가 논한 바로 그 주체구성의 실천을 통해 스스로 생산된다.
페르난데스의 주장은 어떻게 이해되어야만 하는가? 구조적 관계들이 생산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이러한 생산이 초래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관계들이 ‘형성하는’ 과정의 본성을 무엇인가? 권력 관계들의 물질적이고 담론적인 차원들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권력의 동역학의 본질을 이해할 것인가? 물질성에 대해서는? 이러한 것들은 내가 권력의 구조-담론적 관계들과 관련된 페르난데스의 강력한 통찰과 행위적 실재론 각각을 통해 회절적으로 독해하는 중에 탐색하고자 하는 몇몇 질문들이다.
<230>나는 특히 이 논의과 관련되는 행위적 실재론에 대한 몇몇 핵심 논점을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비근한 예를 논하는 것으로 나아갈 것이다. 나는 작업장 동역학이 “신체적 생산의 물질-담론적 장치들”의 간-행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고, 즉 그것이 특정 의미화, 신체, 그리고 경계들을 통해 권력의 도구들의 역동적인 간-작용들(intra-workings)이 생산된다고 제안한다.[11] 중요하게도 장치들은 바깥으로부터 신체들에 작동하는 외적 힘들이 아니다. 오히려 장치들은 권력이 그것을 통해 생산적 효과들을 작동시키고, 또한 생산되는 신체로부터 분리불가능한 물질-담론적 실천들이다. 장치는 현상들, 물질적 배치/재배치로서, 반복적인 간-행의 동역학을 통해 생산되고 재작동된다. 이 동역학은 경합적이고 반복적으로 재구성하는 장치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창조하면서 인과성의 본성과 배제의 역할에 관한 재사유를 이끌어낸다. 즉 행위적 실재론은 단순히 어떤 상이한 동역학들(하나의 법칙의 집합을 다른 것을 위해 대체하는)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역학에 관한 전면적으로 상이한 이해를 도입한다. 문제는 인과관계의 형식이 변화된다는 것만이 아니라, 인과성, 행위소, 공간, 시간 그리고 물질의 바로 그 개념이 전전으로 개정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행위소는 – 주체적 지향성과 개별적 행위의 잠재력의 형식으로서 구조에 반하는 것으로 사유된다기 보다 – 시공간물질 관계의 배치들을 변화시킬 가능성들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이어서 이 중요한 전환의 함축을 논할 것이다. 자연문화적 실천들에 관한 이러한 사유를 활용하는 것은 “그것들이 작동하는 영역에 내재하는 힘 관계들의 다양성”(Foucault 1978, 93)의 변화양상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여기서 힘은 단순히 사회적인 것이 아니며, 생산된 신체들은 단순히 인간도 아니다. 즉 권력은 그것의 전반적인 물질화하는 잠재력과 관련하여 재사유된다.
장치의 정치경제학, 또는 장치들이 작동하는 방법을 향해
기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기계가 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기계의 작동과 생산에서 인간이 하는 역할을 무엇인가? 다른 기계들과 인간의 생산에서 그리고 인간-기계 경계들과 관계들의 재배치에서 기계들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이런 노동 중단의 형태는 기계적 행위소의 형태로 간주될 수 있는가?
「매개하는 기계들」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과학사가 노톤 와이즈(Norton Wise)는 기계가 <231>지식의 생산에서 사회적 가치들을 매개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그는 증기 기관이 “정치경제학 안에서 ‘노동가치’를 실증함과 동시에 공학적 기계 안에서 ‘일’을 예화하며, 이에 따라 그것들의 일반적 지시물의 영역 안에서 두 개념을 확정한다”고 논한다. 그는 이 ‘부분적 확정’이 “동역한의 재형성과 진전된 전개를 위한 어떤 유효한 발견법을 제공하면서, 정치경제학적 개념들의 네트워크와 자연 철학안의 유사한 네트워크 간의 어떤 구조적 유비를 그것과 함께 실어 나른다” (Wise 1988, 77)고 주장한다. 예시를 통해 와이즈는 1845년, 즉 그의 동역학에 관한 노동-중심적 관점의 발전(1845-62) 전에, 윌리암 톰슨(William Thomson; 캘빈 경)이 “자연 행위소 – 전기, 자기, 열 등등 – 에 관한 생각을 일을 생산하는 능력의 표현으로 간주하고 자연 체계들을 엔진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기”(Wise 1988, 80) 시작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시작한다.
자연철학, 정치경제학과 연결되는 장치의 생산적 역할과 행위소의 인간과 비인간 형태들은 이 장의 중심 주제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내가 제안하는 분석은 기계 또는 장치들이 ‘매개’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자연과학에 대한 사회적 요인들의 영향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기계 모델은 확실히 자연과 문화 간에 기본적인 차이에 의거한 불균형한 장치일 것이다. 중첩되는 확정적 영역들 안에 서로 간에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 개별실체들 또는 실천의 영역들이 있다는 생각은 인과성, 동역학, 공간과 시간에 관한 뉴턴적 개념들과 경계지워지고 제한된 개별실체들과 실천들을 따로 규정하는 선재하는 존재에 대한 뉴턴적 믿음에 기반한다. 이러한 분석적 기계 장치에서 빠진 것은 단순히 자연과학과 정치경제학 사이의 영향에 관한 대칭적 고려만이 아니라, 뉴턴적 방식이 아닌 분석 모델이다.
뉴턴의 시계태엽장치로부터 톰슨의 동력장치로의 이동은, 기계의 본성과 기계적 행위소,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서 20세기 동안 일어난 불연속적인 변화에 비추어볼 때, 단지 사소한 변화다.[12] 이러한 변화들을 신중하게 취하는 것은 모든 기계들, 심지어 시계태엽장치, 증기 기관 그리고 뉴턴주의자가 생각하는 기계장치에 대한 어떤 재평가를 도출한다. 또한 이는 이러한 변화들의 생산에 기여했던(그리고 계속 기여하는) 자연 철학의 인식론적인 경제학 안에서의 그리고 정치경제학의 자연철학 안에서의 전환이 차이 나는 체계들 간의 어떤 매개적인 협상보다 정치적 실천과 과학적 실천의 물질적 얽힘과 더 관련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여기서 이러한 얽힘들의 역사적 분석을 내놓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나의 목표는 행위적 실재론(우리의 가장 훌륭한 과학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이론들에서 나온 통찰들을 신중하게 채택하는 자연문화적 실천들에 관한 <232>사유)자연문화적 실천들에 관한 사유)을 특정한 얽힘이 주체와 객체의 생산의 물질이 되는 방식에 대한 생각에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3장에서 나는 장치가 행위한다는 보어의 인식론적 연구작업에 관한 분석의 상세한 설명을 제시했다. 보어는 고전 물리학이 장치가 해 내는 기여를 심각하게 평가절하하고 누락한다고 논한다. 장치들은 객체의 세계에 우리의 주의를 확장하고 집중시키는 렌즈 체계로서 기여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은 구성작업을 돕는 노동자들이며, 탐구되고 있는 현상의 중요한 부분이다. 더 나아가 장치들은 단순히 이미 자리를 잡은 차이들을 탐색하지 않으며, 차이의 생성과 재배치에 기여한다. 현상들의 생산에서 장치의 역할을 올바로 사유하지 않는 실책은 탐구의 객관성을 심각하게 위태롭게 한다. 장치를 고려한다는 것은 차이화의 특수한 실천과 그것들이 생산하는 신체들 위의 흔적들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4장에서 설명했듯이, 장치에 관한 보어의 사유는 중요한 측면에서 제한된다. 보어는 과학적 실천의 중요한 사회적 차원들에 참여하지 않고, 이러한 실천에서 주체의 역할과 주체의 생산에 있어서 장치의 역할에 관한 일관된 설명을 제공하는데 실패한다. 이 장에서 나는 보어의 생각이 분석되지 않은 채 남겨 놓은 장치의 특정 면모들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 사회 이론가와 정치 이론가들의 통찰들에 도움을 청할 것이다. 나는 또한 이러한 접근법들의 몇몇 한계들을 논하고 보어의 통찰에 생산적인 교정에 사용하고, 이 생각들의 탐구에 영감을 주기 위해 사용할 가능성들을 고려할 것이다. 예컨대 나는 푸코와 버틀러가 사회적 힘들을 통해 구성되는 인간 신체의 물질화에 주의를 기울이는 반면, 그들이 비인간 존재/신체의 물질성을 당연시하고 자연적 힘들의 생산적 활동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논한다. 이런 불균형한 설명 방식은 그들 각각의 연구작업의 요소들, 즉 물질적인 것과 담론적인 것,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공간과 시간의 해석에서 비대칭적으로 번역된다.[13] 이 이론가들은 또한 물질이 물질화 과정에서 행위적 요인들이라는 중요한 사항을 검토하지 않은 채 남겨둔다. 나의 접근법은 주체와 객체, 인간과 비인간 신체의 물질화 그리고 물질적 관계들의 얽힘의 생산에 참여하는 자연문화적 실천들과 행위소들에 관한 해명을 산출하기 위한 일환으로 이 자연이론가들과 사회이론가들로부터 나온 중요한 통찰들을 서로 간에 회절적으로 읽는 것이다(여기에는 <233>바깥으로부터의 분리된 작동 요인들과 영역들을 전제하지 보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자연적, 문화적, 기술적 그리고 과학적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들이 포함된다).[14] 논의된 목표들 중 하나는 특수한 얽힘들의 본성에 관련되는 어떤 장치를 세우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 분석을 평가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존재론, 인식론 그리고 윤리학에 관한 이런 재사유에서 도출되는 의미심장한 변화들 중 몇몇을 진정으로 강조하고자 한다.
동역학은 변화에 관한 것이다. 페미니스트들과 여타 이론가들은 통상적으로 권력의 동역학 개념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주 권력이 의미하는 바과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우려하지만, 그들은 동역학 개념이 어떤 안정되고 문제될 것이 없는 개념으로 가정한다. 행위적 실재론은 권력과 동역학 두 개념 모두에 대한 재사유를 이끌어 낸다.
변화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것이 연속성 개념에 열중해 왔으며 그것에 붙잡혀 있는가? 탁월한 물리학자, 미적분의 발명가, 성서 예언들에 관한 저자, 천상과 지상의 통합자인 뉴턴에게, 연속성은 모든 것이거나, 또는 그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미적분을 선사했다. 그리고 미적분은 그의 결정론적 세계의 전망, 즉 인류의 발 아래에 미래과 과거에 관한 지식을 놓는 것에 목소리를 부여했다. 예견과 추론은 인간의 요청 아래에 놓였다. 하지만 그 대가는 어떤 순간, 어떤 한 순간 발생하는 것에 대한 어떤 허약한 관심이다. 각각의 물질 조각은 그것이 행성 크기이든 원자 크기이든 간에 시초에 특성화된 그것의 규정된 궤도를 따라 간다. 결과들은 그 원인을 시접하며 따르고 각각의 입자는 시계의 똑딱거림과 더불어 그것의 예정된 장소를 점한다. 세계는 순탄하게 펼쳐진다. 엄격한 결정론이 기름이 잘 쳐진 기계처럼 작동한다. 자연은 하나의 시계태엽장치, 일자가 t=0에서 시작하는 태엽장치 장난감이며 심지어 그는 흥미를 잃어버렸고, 포기했다(또는 아마도 때때로 기억하며 가끔 참견하며 조율한다). 우주는 사실상 말끔하게 정리된 사태이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간의 당연시되는 근원적인 괴리는 인간에서 완전한 인식가능성을 부여하면서 자연을 지배하게 하는 인간적 관리로 가는 입구였다. 미적분학은 인간이 그 자신의 유한성으로부터 탈출하는 피난처다. 인간의 보상, 즉 우주에 관한 신의 시각, 보편적 전망, 관점으로부터의 탈출은 모든 권리와 특권과 더불어 그것에 일치한다. 전망은 물질의 심장부, 무매개적인 시각, 끝이 없고, 책임 없는 지식으로 곧장 들어간다. 고유한 속성들을 가진 개체들이 앎을 위해, 취해지기 위해 거기 있다. 물질은 제각각이지만 시간은 연속적이다. 자연과 문화는 이러한 연속성에 의해 쪼개지며 객관성은 외적인 것으로 보호된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잘 안다. 그것은 우리의 뼈 속으로 새겨지며, 많은 방식으로 우리는 그것에 거주하고 그것은 또한 우리에 거주한다.
양자(quantum)는 말끔하게 다듬어진 사태를 혼란케 한다. 몇몇 장애, 근원적인 연속체 안의 작은 괴리 그리고 인과성은 전반적으로 다른 물질이 된다. <234> 엄격한 결정론은 진행을 멈추지만, 양자는 자유의지를 가진채 남겨지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활용가능한 전체 가능성들의 집합을 재생한다. 행위소와 인과성은 켜지고 꺼지는 사태들이 아니다. 시간에도 공간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 작은 괴리는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의 관계의 바로 그 본성을 진행중이 풀림 상태에서 ‘존재’의 완전히 상이한 수준에서 작동하는 활력으로 비튼다. 여기서 ‘존재’는 단순히 시공간에서 진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시공간물질되기의 반복적 생성이다(내가 4장에서 설명했듯이). 공간, 시간 그리고 물질은 세계의 그 진행중인 여러 절합 안에서 간-행적으로 생산된다. 시간은 모든 신체들과 공간이 물질이 거주하는 저장고로 선재하는 지점들의 집합이 아닌 것처럼 평평하게 공간화된 간격들의 연속이 아니다. 간-행은 그것을 통해 생성의-과정-안-물질이 반복적으로 그것의 진행중인 미분적인 물질화 속으로 펼쳐지는 임의적이지 않고, 결정론적이지 않은 인과적 수립이다. 그와 같은 동역학은 시간으로 불리워지는 외적 변수에 의해 표시되지 않으며, 공간으로 불리우는 어떤 저장고 안에 위치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반복적 간-행은 그것을 통해 시간성과 공간성이 생산되며 현상들의 물질화와 물질-담론적 경계들과 그 구성적 배제의 (재)형성 안에서 반복적으로 재배치되는 동역학이다.
양자 불연속성의 존재는 과거가 결코 뒤에 남겨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단 한 번만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리고 미래는 현재 순간의 펼쳐짐 안에 도래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와 달리 과거와 미래는 물질의 반복적 생성 안의 관련항으로 주름잡힌다. 생성은 시간 안의 펼쳐짐이 아니라, 물질되기의 주름화에 속하는 소진되지 않는 활력이다.
행위적 실재론에 따르면, 인과성은 엄격한 결정론의 문제도 아니고 자유의지의 문제도 아니다. 간-행은 언제나 특정한 배제를 수반하며, 배제는 열린 미래의 조건들을 제공하면서 결정론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 그러나 어떤 주어진 순간에 모든 것이 가능하지는 않다. 사실상 간-행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반복적으로 재배치한다. 가능성들은 계속 머무르지 않는다. 이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은 간-행이 강제하지만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강제’의 본질 또는 가능성의 동역학에 대해 부당하지 않다. 가능성들은 그 실현에 있어서 옹색하지 않다. 가능했을만한 다른 것들로 열린 새로운 가능성들이 현재 배제된다. 즉 가능성들은 재배체되거나 재배치한다.[15] 간-행에 대한 활력, 생명력이 존재하는데, 이는 <235>생기론의 새로운 형식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살아있음(aliveness)이라는 새로운 의미와 관련하여 있는 것이다.[15] 세계의 활기, 그것의 열띤 창조성은 결코 저장되거나 중지될 수 없다. 행위소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간행이라는 개념은 실재적인 것과 가능한 것의 전진적인 재배치 안에서 인과성과 행위소에 관한 전통적인 생각을 재공식화한다.
특히 행위소는 그 전통적인 인간주의적 궤도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행위소는 인간적 지향성이나 주체성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재의미화를 수반하지도, 어떤 반인간주의의 사회적 기하학 내부에서 여타 특수한 종류의 운동들을 따르지도 않는다. 행위소의 공간은 본질적으로 대부분의 후기구조주의 사유에서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더 폭넓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놀랍게도 자유주의 휴머니즘이 주장하는 것보다 더 넓다. 중요하게도 물질은 그것의 반복적 물질화 안에서 행위적 요인이다. 게다가 간-행의 본성 안에 고유한 것이다. 심지어 장치들이 우선적으로 강화될 때, 행위소는 사전 차단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행위소의 공간은 인간 행위를 위한 가능성들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행위소가 인간 뿐 아니라 비인간에게도 당연해져야 한다는 단순한 경우도 아니고, 행위소가 단순히 비인간과 인간 형식들 너머로 닥치는대로 분배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행위소는 간-행의 물질이다. 즉 그것은 어떤 수립행위이지, 누군가가 또는 무언가가 가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행위소는 그 간-행 안에서 하는 것/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실천 – 시공간물질 관계의 위상학적 다양체들의 반복적인 재배치 - 에서 간-행의 동역학을 통한 반복적 변화들의 수립행위다. 행위소는 변화의 변화하는 가능성에 대한 것으로서, 어떤 인과구조의 수립행위 안에서 그러한 실천들에 의해 표현되는 경계 절합과 배제를 포함하여, 신체적 생산의 물질-담론적 장치들의 재배치를 일으킨다. (간-)행을 위한 특정 가능성들은 모든 순간에 존재하며, 이러한 변화 가능성들은 세계의 생성 안에 책임있게 간-행하기 위해, 즉 물질이 되는 것 그리고 물질되기로부터 배제되는 것과 교전하고 개정하기 위해 어떤 윤리적 의무를 수반한다.
푸코와 버틀러가 강조하는 바에 따르면, 권력은 주체에 가해지는 외적 힘이 아니다. 오로지 그 안정화하고 침전되는 결과들 안에 권력인 바, 어떤 재반복되는 행위들만이 있다. 오로지 지금, 나의 행위적 실재론의 사유에서, “힘 관계의 움직이는 기본체제”(Foucault 1978, 92)는 사회적인 것에 제한되지 않는다.[17] 즉 신체의 물질화에서 작동중인 힘들은 사회적인 것만이 아니고, 물질화되는 신체들은 모두 인간인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규율의 생산적 본성과 자연문화적 실천들은 <236>간-행의 인과적 본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권력의 행위적 실재론의 개념에서 결정적인 것은 인과성을 간-행성으로 개정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인과 관계의 본성이다. 다시 말해 인과관계는 선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간-행적으로 생산된다. ‘원인’이라는 것과 ‘결과’라는 것은 신체위의 표식들의 특수한 생산을 통해 간-행적으로 구분된다.
양자 물리학의 기본적인 불연속성은 차이의 본성을 분쇄한다. 즉 연속성과 불연속성 간의 관계는 근원적인 외부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행위적 분리가능성에 속하며, 그 각각은 다른 것을 통해 시접되어 있다. ‘타자성’은 차이의 얽힌 관계이다. 공간, 시간 그리고 물질에 관한 질문은 긴밀하게 사실상 정의에 관한 질문과 얽혀있고, 연결된다.
장비를 바꾸기/동역학을 전환하기-권력관계의 위상학적 재(배)치를 위한 다양한 가능성들
"계급은 이런저런 기계의 부분이 아니며,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 [...] 관심사들의 갈등-스스로 움직이는 것, 열, 천둥소리이다. [...] 계급 자체는 어떤 사물이 아니고, 하나의 사건(happening)이다."
E. P. 톰슨 - 『이론의 빈곤과 여타 에세이들』
릴라 페르난데스의 책, 『노동자들을 생산하기』는 권력의 구조적 관계에 관한 상세한 연구로서, 그러한 관계들이 캘커타 황마 공장의 작업장에서 반복적으로 (재)생산되고 경합된다는 것을 그린다. 페르난데스는 계급의 구조적 차원들에 관한 물질적 표식으로서 작업장에 있는 노동자들의 공간적 위치를 활용한다.[18] 그녀는 권력의 단일한 결정론적 궤도를 잡으려고 시도하기 보다, 공장 전체에 걸쳐 위치잡기를 제한하고 노동자들의 움직임을 강제하는 물질적 구속기제들에 영리하게 초점을 맞춘다. 사실상 그와 같은 관념화된 궤도는 의미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양한 간-행들, 배제들 그리고 행위소들이 권력의 동역학 안에서 하는 중요한 역할을 놓치기 때문이다.
페르난데스의 저작을 읽을 때, 물질적 강제가 그렇지 않은 자유의 무제한적 공간에 있는 불변하는 장애들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그것들은 담론적 실천에서 완전히 독립적인 것 또는 그것으로 환원되는 것으로도, 그와 같은 실천들의 단순한 종착점으로도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나는 페르난데스의 분석을 작업장의 우발적 물질화라는 측면에서 구조적 관계들의 동역학으로 읽는다. 황마 공장에서는 공간의 정치학이 <237>권력의 항구적인 관계와의 간-행에서 적합하게 규율된 주체들로 노동자들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공간성이 그 자체로 젠더, 공동체 그리고 계급의 정치학을 통해 그리고 바로 그러한 주체들에 의해 권력 관계와의 매일매일의 교전을 통해 생산된다. 예컨대 페르난데스는 “노조와 남성 노동자들이 이러한 비대칭적인 젠더 관계의 재생산에 연루될 때, 그들은 사실상 계급의 국가적 헤게모니 구성을 유지하는 여기저기 흩어진 일련의 국지적인 실천들과 담론들의 배치를 생산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선재하는 젠더화된 이데올로기를 활용할 뿐만 아니라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특정 관념의 창조를 통해 적극적으로 젠더를 양산해 낸다.” 이것은 관리의 권력을 강화하고 노조들이 성공적으로 관리의 특정 계급-기반적인 실행들에 개입하는 시도를 침식하는 것으로 귀결된다(Fernandes 1 997, 74). 다시 말해 페르난데스는 자본주의의 공간성이 생산과정을 분할하는 관리법들의 행위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배제적 실행들을 통해서도 생산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공장이 아마도 가장 분명하게 자본의 어떤 전진적인 물질화 과정인 반면, 공장의 반복적인 물질화 또한 노동자들 자신의 배제적 실천들의 산출물이고, 그것은 어떤 선형적인 부가적 동역학을 거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배제 실행들은 자본주의 기술학의 부분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런 물질-담론적 장치들의 간-행은 관리법들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실천을 포함하며, 젠더, 공동체 그리고 계급의 위상학적 주름작용에 의해 특수하게 표시되는 공간 또는 구조를 생산한다. 다시 말해 그 공장의 공간성은 간-행의 동역학과 구조적 관계들의 재배치와 주름작용을 통해 생산된다. 구조는 현상들의 생산에 기여하는 장치들이지만, 마찬가지로 권력의 동역학에 총체적으로 함축된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즉 구조는 그 자체로 배제에 의해 표시되는 신체적 생산의 특수한 장치의 간-행을 통해 생산되는 물질-담론적 현상들이다.[19] 구조는 세계의 특수한 물질적 재배치들/(재)배치들이다.
그러므로 행위적 실재론의 틀을 사용하면서, 그 황마 공장은 그 자체로 노동자들, 관리, 기계들 그리고 여타 물질적인 것들과 이러한 장치들에 접혀 있는 존재자들 간의 반복적 간-행을 통해 물질화하는 현상들인 신체적 생산의 물질-담론적 장비들의 간-행하는 다양체로 이해될 수 있다. 중요하게도 물질성은 어떤 우발적이고 경합적이며, 강제되는 것으로 재사유되지만, 완연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맹목적인 긍정 또는 몇몇 정화된 경제학 개념이라기 보다, 물질-담론적 실행들이 그것을 통해 물질이 되는 반복적 간-행의 과정이다. 이것은 짐작컨대 <238>분리된 일련의 사회적 물질들(젠더와 공동체 정체성과 같은)이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인 반면, 경제적 실천들이 물질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생산의 바로 그 본성은 반복적 간-행성으로 재배치된다. 여기서 고려되는 사례의 경우, 이것은 생산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주체를 형성하고 구조를 개조하는 과정임을 의미한다.[20]
생산은 (그것이 종종 포디즘적인 일괄생산라인 이미지의 침투를 의미한다 할지라도) 몇몇 고정된 일련의 과정들의 반복으로 사유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생산과정의 본성은 인간, 비인간 그리고 행위소의 사이보그 형태들의 결과로 지속적으로 개정된다. 사실상 페르난데스가 논한 바에 따르면, 어떤 기계가 작동을 거부할 때, 그것은 일련의 사건들을 개시할 것이다. 즉 직공의 임금 손실, 직공과 뒤늦게 기계를 고치는 수리공 간의 다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관리의 개입, 갈등을 잘못 다루는 관리법에 저항하는 노조 전임자들, 관리법와 노동자 간의 관계 재구조화를 이끄는 노조 파업, 작업장에서 기계들과 노동자들의 재배치 또는 하루동안의 휴식이 그것이다.
페르난데스는 또한 작업장의 수많은 기계들이 노동자 군중의 물질적 조건을 생산하는 것도 살핀다. 노동자들은 관리에 의해 수립된 생산의 특수화된 수준들로 관리가능하도록 노동자들을 묶어 두기 위해 개별적인 노동자들을 생산하고 노동의 본성을 개별화하는 규율적 실천을 제도화하려는 관리법의 시도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뭉친다. 하지만 개별 노동자를 생산성에 맞추도록 자리잡게 하고, 그리고 개인들을 유용하도록 붙잡아 놓는 관리방법의 낮은 수준의 무수한 감시 기술의 전개(예컨대 방직 부분에 장착된 칠판과 측정기)에도 불구하고, 작업장의 방직 기계들의 밀집은 노동의 본성을 개별화하려는 시도를 해치며, 노동자들이 서로 이야기할 수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과 기계는 함께 생산 능력의 개별화와 싸운다.
기계들이 생산성 향상을 위해 여러 단계들에서 추가되기 때문에 작업장은 꽉 채워지게 된다. [...] 노동자들과 기계들의 공간적 집중은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하며, 노동자들이 잡담하고 어슬렁거리는 것에 대한 경영관리진의 수많은 불만을 야기했다. 그와 같은 [...] 매일매일의 저항행위들 [...]은 생산과정의 경합적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생산과정을 통한 시간과 운동의 통제가 어떤 정치적이고 갈등적인 영역을 표현한다는 것을 증명한다.(Fernandes 1997, 63)
<239>기계적 행위소는 생산관계의 전진적인 경합과 재배치의 부분이다. 논점은 관리방법와 노동자들이 기계와 그들의 관계에서 사이보그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인간이 인간과 비인간 간의 결정된 구별들이 있다는 생각을 문제시하는 행위소의 특수한 얽힘을 통해 차등적으로 출현하고 반복적으로 개정된다는 점이다. 노동자들, 기계들, 관리자들은 얽힌 현상들, 관계적 존재자들이며, 그들을 둘러싼 공기보다 더 많은 것을 공유한다. 그들은 서로간에 구성을 돕는다(예컨대 몇몇 경우에 기계들과 노동자들은 가사일에서 서로를 도우며, 다른 경우에는 거친 바깥 활동에서 서로를 돕는다).[21] 작업 현장의 얽힌, 우발적인 그리고 변화하는 물질적 조건들은 판매 가능한 상품들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하며, 자본의 흐름은 행위자들의 소용돌이치는 강에서 단지 하나의 흐름일 뿐이다. 이론적 관점에서 이러한 전환은 그렇지 않고 행위자들의 선행자가 인간이라고(또한 오로지 특정 인간들만이 그렇다고) 가정되면 놓치게 될 유해하고 부당한 노동 조건들을 개정하기 위해 특정 종류의 행위소와 가능성들을 가시적으로 만든다.
아마도 내가 앞서 환기했던 상이한 전동장치 회집체의 은유에 관한 탐구와 확장은 생산의 이 복작한 본성을 이해하려는 계획에 있어서 유용한 방법을 제공할 것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확장은 장비들이 그 자체로 현상들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집중하기 위해 설계된다. 어떤 상이한 장비 회집체(예를 들어 장비의 작동방식이 말 그대로 서로를 통해 이루어지며 힘들의 차등적인 분배가 초래되고, 능력을 발휘할 조건들인, 그리고 장비들 간 상이한 잠재력과 수행인 장비 회집체)를 상상해 보자. 이것은 그 자체로 다른 차등적인 장비 회집체들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방식으로 (재)배치/(재)회집되고 있다. 전동장치들은 다른 장비들과의 간-행을 통해 재공정되며 몇몇 장비들은 지속적인 재배치 과정의 부분으로서의 회집체 속으로 접혀들어가는 과정 안에 있다. 그 회집체들은 이러한 (재)배치의 과정에 의해 드러난다. 시간의 침전 흔적들은 어떤 개별적인 전동장치의 역사에 조응하지 않으며, 오히려 회집체와 그것의 변화하는 위상학의 계보에, 즉 회집체들의 경계를 개정하면서 포함과 배제의 과정에 완전히 묶여 있다.[22] 차등적인 장비 회집체들이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나는[미분적인] 구성이 각각의 간-행과 더불어 변화하는 지점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다고 더욱 멀리 상상해 보자.[23]
나는 생산에 관한 가장 흥미롭지 않은 은유를 내세울 때, 생산 과정의 공통적인 (그릇된) 개념화의 몇몇 결점들을 강조하고자 하면서 이 전반적으로 기계적인 유비를 수용했다. 예컨대 <240> 너무나 자주 논점은 예외적으로 생산, 분배 그리고 소비의 인간적 차원들에 놓인다. 이것은 인간과 비인간 간의 분리가능성과 안정된 분할을 가정하는 식으로 경제학의 형식적 분야 또는 이러한 실천들의 물질적 문화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편협하게 파악된다.[24] 더군다나 이러한 생산에 대한 기계적 은유에 관해 제기된 돌연변이 변수는 동역학의 본성에 대한 상이한 이해를 도출하는데, 이 동역학에는 생산 기술 그 자체의 생산의 본성에 관한 전진적인 개정이 있다는 것에 주목하자. 간-행의 동역학은 예외적으로 비선형적, 인과적 그리고 비결정론적이다. 주름운동(Enfolding)은 임의적이거나 무작위적이거나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생산의 본성 안에서 반복적인 행위적 변화의 문제[물질]이다. 주름운동은 시공간의 위상학을 시공간 다양체와 내부적이고 외부적인 것 사이에서 재작동되는 경계들로 바꾼다. 경계들과 배제들에 속한 경계들의 재구성은 어떤 행위적 과정이다. 생산 장치들은 스스로 생산되며 그리고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것으로, 이것이 생산 자체의 본성이다. 행위적 실재론은 구조가 행위소를 사전에 차단하고 이데올로기적 구성의 주체를 결정론적으로 생산하는 권력의 사회적 구성을 엄격하게 만드는 알튀세르적인 장치들이라는 생각을 해체한다. 알튀세르와는 대조적으로 구조는 진행 중인 물질-담론적 간-행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고 (재)배치되는 물질-담론적 현상들로 이해되어야 한다.[25]
이 기계는 분리된 장치들(gears)로부터 회집된 어떤 장비(device)가 아니다. 그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틀에 깔끔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어떤 위상학적 동물로서 간-행의 열린 동역학을 통해 변이한다. 연결성, 경계 구성 그리고 배제에 관한 질문은 (위상학적 관심들)은 (순수하게 기하학적인 개념들 안에 너무 자주 형상화되는) 위치성(positionality)과 국지성(location)에 대한 관심으로 보충되고 채워져야 한다.[26]
하나의 사례로 유색 페미니스트들(Feminists of color)에 의해 도입된 ‘교차성’(intersectionality) 개념을 고려해 보자. 이들은 사회적 국지성과 정체성 형성에 관한 유클리드식 기하학적 해석들에 반대하여 지겹도록 경보음을 울리는 ‘여성=젠더’라는 환원적 공식을 주장하는 패권적 담론들을 대체하기 위해 분투했다.[27] 잘 가공된 이론적 도구로서 교차성은 그와 같은 생각들과는 어긋난다. 예를 들어 페르난데스의 경우, 정체성 구성은 유클리드적 기하학 모델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공간, 시간 그리고 물질의 변화하는 위상학의 동역학으로 이해된다. 그녀의 사유에서 정체성이란 정체화의 유클리드적 격자에 관련된 국지성이나 위치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체성 형성은 어떤 우발적이고 경합적인 진행 중인 물질적 과정이다. ‘정체성들’은 서로를 통해 권력관계의 반복적 (재)배치작용과 함께 역동적 간-행 안에서 서로를 통해 상호적으로 구성되며 (재)배치된다. 페르난데스의 논문에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녀의 방법론적 접근법이 정체성과 권력 관계가 상호적으로 구성되고 반복적으로 갱신되는 동역학을 따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특히 그녀는 생산의 구조적 관계가 생산되는 방식에, 그리고 권력 관계의 위상학적 재배치작용의 동역학에 계속 주의를 기울인다.
페르난데스는 이러한 변화하는 동역학의 위상학적 본성에 관한 다양한 설명들을 제공한다. 예컨대 페르난데스는 정체성 범주가 아래와 같이 노조와 관리자 간의 대립으로 전화하고 살쾡이 파업(wildcat strike)으로 이어진 노동자-간(intra-worker) 논쟁을 통해 서로를 통해 생산되는 과정의 예로 그녀의 책을 시작한다.
갈등은 작업장에 있던 두 명의 노동자 간의 다툼에서 시작되었다. 직공은 수리공이 고쳐 좋은 그의 기계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수리공은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고, 직공은 일을 할 수 없었기에 화가 났다. 그의 일이 시간 비율 임금제 작업이었기 때문에, 작업이 미루어지는 것은 곧 직공에게 임금의 삭감을 초래했다. 수리공이 마침내 도착했을 때, 논쟁이 시작되었다. 수리공이 그의 망치로 직공에게 부상을 입혔고, 계속되는 싸움에서 수리공 또한 부상을 당했다. 이때 총지배인과 인사부장이 [...] 두 사람을 의무실로 데려갔다. 총지배인은 그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으며 두 사람에게 악수를 하게 했다.(Fernandes 1997, 1-2)
페르난데스는 직공과 수리공의 지위 정체성에서 어떤 차이가 그 갈등에 대한 노조의 응답과 그것이 공장 관리와 간행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그 사고는 파업과 같이 노동자가 저항하는 방식이 노동자 집단 간의 갈등과 사회적 위계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런 경우 직공의 사회적 지위의 신뢰도는 노조의 참여를 이끌어냈고 수리공의 희생을 초래했다. 하지만 일단 갈등이 노조-관리 대립을 포함하게 되면, 그것은 노조 참여자들과 일반 노동자들에게 다른 의미를 획득했다. 살쾡이 파업은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라는 위치와 노조의 동원력 사이를 연결하는데 달려 있다. 하지만 파업의 의미는 이러한 지위 관계에 제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갈등에 포함되지 않은 많은 노동자들에게 파업은 불공정한 권위적 체계, 즉 공장 내부에 있는 자본주의 체계에 대한 어떤 도전을 드러냈다. 요컨대 이 사건의 장면들을 통과하는 사회적 지위의 정치학과 계급 정치학 간의 지속적인 미끄러짐이 있었던 것이다(Fernandes 1997, 3-4).
<242>이러한 상황에서 “노조가 지위 정치학(caste politics)을 통해 구성되는 노동-계급 정치학을 생산했다. 따라서 계급적 관심들의 경계는 특별히 공장 안의 노동자들, 노조들 그리고 관리자들의 참여를 포함하는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 사회지위적 위계 여하에 달려 있게 되었다”라고 페르난데스는 쓴다(Fernandes 1997, 4). 그러나 사회지위적 위계는 그 자체로 생산된다. “공동체 정체성은 어떤 헤게모니와 저항의 갈등적 동역학, 즉 공동체가 동시적으로 생산하는 하나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며, 경합적인 상징적 지대 내부에서 계급과 젠더의 서사를 통해 가공된다”(89). 사회적 지위, 젠더 그리고 계급은 서로를 통해 물질화되며, 서로 속으로 접혀들어 간다. 이 주름운동의 본성은 변화하는 위상학으로 물질화한다. 이는 작업장의 공간성과 시간성에 반복적 변화들을 만드는 바, 그것의 물질성 안에서 작업장을 구성하는 물질되기의 미분적 패턴들에 속하는 생산의 구성적 요인들이다. 구조적 관계들은 반복적으로 개정되는 우발적 물질성이다.[23]
페르난데스의 분석에서 매력적인 것은 권력의 작동에 관한 비판적 사회 이론이 포스트모던, 포스트휴먼 그리고 새롭게 등장하는 것들로 방향을 트는 바로 그때, 페르난데스가 작업장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녀는 교조적인 맑스주의의 계속적인 관련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또는 단순히 이런 종류의 분석이 ‘오래된 것’으로 비춰지는 것 그리고 단지 ‘새로운 것’으로 보여지는 것만이 아닌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가 되는 것의 부분이 전근대, 근대, 그리고 포스트모던이라는 통상적인 분할 너머, 즉 시간성에 관한 진보적 의미 너머의 개정작업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29]
다른 한편 페르난데스의 연구는 중요한 점에서 제한적이기도 하다. 우선 첫째로 페르난데스의 계보학은 국지성과 보편성의 항들을 재가동하는 규모와 위상학적 재배치들에 관한 질문을 재사유하는 중에 요구되는 것에 비해 공장의 ‘경계들’ 너머에 있는 중요한 자연문화적 힘들을 소흘히 한다.[30] 페르난데스의 분석을 다음 단계로 밀어붙이는 것은 물론 노동활동와 인과 관계들 자체의 생산, 특히 그것들이 다른 생산양식들과 반복적으로 재배치되고 얽혀드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 더 진전된 탐구에 유용할 만한 몇몇 이론적 도구들을 고려함으로써 현재 문제가 되는 동역학의 더 복잡한 형태들 중 몇몇을 드러내려고 했지만, 나는 이러한 사례의 특수한 세부사항을 탐구하지는 않았으며, 훨씬 더 많은 작업이 여타 몇몇 관련된 얽힘들과 그것들이 누구를 위해 또 어떻게 물질이 되는지에 대한 파악에 있어서 요청된다.
요구되는 것은 계보학적 분석인데, 그것은 물질이 되는 신체적 생산의 다양한 장치들 뿐만 아니라, 동역학 자체의 변화하는 본성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중요하게도 <243>시공간물질 관계들의 재배치의 행위적 본질은 우리가 아는 것, 그 방법, 그리고 행동하는 것을 위해서뿐 아니라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위해서도 책임[응답가능성]과 의무[사유가능성]의 윤리에 대한 필요성을 명백히 한다.
위상학적 다양체들-공간성, 시간성 그리고 미래성
"우리가 이론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재현하는 방식은 물질화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와 관련하여 우리와 타자들이 해석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 데이비드 하비, 『포스트모던의 조건』
작업장은 어떤 중립적인 관찰 장비나 관리자들가 사회과학자들이 개별적인 노동자들의 사회적 위치를 특성화하는 것, 또는 정체성 형성의 궤도를 추적하는 것을 허용하는 유클리드적 참조틀이 아니다. 도리어 ‘위치’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장치들이 노동자들 간의 특유한 물질-담론적 경계들의 반복적 (재)생산에 접혀 있다. 위치 개념 자체가 시간을 관통해서 변화하는(단순히 시간과 더불어 그것의 가치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산된, 우발적인 그리고 경합적인 범주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도 개별적인 인간의 고정되고 획일적인 속성이 아니며, 특유한 물질-담론적 현상들(개체들이 아니라)을 지칭하는 어떤 능동적으로 경합하며 통일성을 파괴하는 – 그럼에도 객관적인 – 범주이다. 결론적으로 노동자들을 자본주의라고 불리워지는 최우선시되는 정적 구조의 체스판 위의 상이한, 그럼에도 획일적인 공간을 점유하는 졸들(pawns)로 간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공간성이 그 자체로 간-행과 주름운동의 동역학을 통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어떤 경합적이며 계속 변하는 위상공간이다. ‘계급’ 범주의 본질, 그것의 이해가능성과 물질성은 젠더와 ‘공동체’를 국지적으로 정의하는 바, 특정 물질-담론적 실천들이 함께하는 간-행을 포함하여 이러한 변화하는 동역학에 달려 있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어떤 단일한 단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 따라 구성된다”(Fernandes 1997, 10). 이와 흡사하게 젠더도 “어떤 ‘구조화하는’ 범주 유형을 재현하는데, 이 범주는 ‘아비투스’(habitus)로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삶 내부에서 경향들(patterns)을 생산하고 결정한다”(11). 젠더는 그 자체로 그것의 이해가능성이 부분적으로 물질화하는 구조적 관계들의 특수성(예컨대 통상적으로 ‘경제적’이라고 이름 붙여지는 것들이 여기 포함된다)에 의존하는 경합적인 범주이다. 특히 젠더는 계급과 공동체 그리고 여타 권력의 구조적 관게들을 통해 구성된다. 젠더, 계급 그리고 공동체는 서로 간에 주름잡혀 들어가며, 생산된다. 계급이 담론적으로 생산된다는 주장은 그것의 물질성의 거부가 아니다. <244>유사하게 젠더와 공동체도 계급인 만큼 (그리고 더 이상 담론적이만은 않은) 물질이다.
물질적 조건들은 물질화하는데, 그것은 그것들이 주체 형성의 능동적인 생성 요인인 바 특유한 담론들을 ‘지지’하거나 ‘떠받치’거나 또는 ‘매개’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체적 생산의 장치들 안으로 담론과 물질 둘 모두가 물질화와 현상들의 반복적 주름운동의 과정들을 통해 물질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과 담론적인 것은 간-행과 주름운동의 동역학 안에서 상호적으로 함축된다. 담론적이고 물질적인 강제와 배제는 유사하게 얽히며, 이에 따라 물질적 또는 담론적 요인들의 개별적 효과들을 결정하려고 하는 분석의 타당성을 제한한다(사실상 그것들은 그들의 객관적 지시체들을 잘못 지정하며 책임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생략한다). 게다가 행위적 실재론에 의해 제공되는 물질성의 개념화는 다시 한번 지식 실천의 투명성과 세계의 주어짐에 관련된 전통적인 경험론적 가정들을 재기입하지 않고, 그리고 세계의 매개에 관한 인식을 단순히 요청하고 그 사례에 머무는 분석적 폐착에 빠지지 않고 물질적 강제들과 조건들에 관해 사유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물질적 세계에 관한 경험이 ‘매개된다’고 주장하는 도처의 선언들은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관해 중요한 안내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 매개의 은유는 경험적인 것에 관한 보다 전반적인 사유 방식 안에 너무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다. 후기구조주의에 관한 가장 중요한 통찰들 중 몇몇을 구체화하면서, 페미니즘 과학학과 신체, 물질 그리고 자연에 관한 여타 비판적 재고, 즉 물질성에 관한 재고는 여기서 이론들의 구성과 검토에서 다시 한번 심각하게 경험 세계를 다루는 것을 가능하게 했지만, 이번에는 객관적 지시체가 현상이지, 세계의 ‘즉각적인 소여’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이해와 함께 한다.
이 장의 머리 인용문에서 나는 기하학적 분석이 우리가 기술했던 것처럼 복잡한 사건들에 관한 총체적인 해명을 위해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이 예에서 내적 규준은 무엇인가? 그것의 기하학을 결정하는 근접성, 위치, 거리 또는 규모의 의미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복잡한 ‘횡단-작용’(trans-action)의 동역학을 이해하는 것은 공간적이고 여타 물질-담론적인 경계들의 횡단(transgression[넘어섬]) 뿐 아니라 시공간물질 다양체 자체의 재(배)치도 포함하는 바, 위상학적 분석을 요청한다. 크기와 모양에 관한 질문(기하학적 관련성)은 경계, 연결성, 내재성 그리고 외재성(위상학적 관련성)에 관한 질문에 의해 보충되고, 그 측면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245>기하학적 사유에 기반하여 다차원적이고 다양하게 연결되며, 이질적이고, 지리정치학-경제학-사회-문화적인 ‘풍경’을 분석한다는 것은 충분치 않을 것이다. 비록 기하학에 의해 의미되는 바가 전제된 기하학적 용어들(예컨대 규모)의 상대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죽된 본성을 주장함으로써 포스트모던 감수성을 위해 재정비된다 해도 마찬가지다. 또한 위치성 또는 관련된 사회적 지평 내부에 스스로 위치를 점하려는 여타 노력들도 불충분하다. 위상학적 고려들로부터 고립된 기하학적 분석의 부적합성은 ‘구성’이라는 바로 그 본질에 있다. 공간성은 언제나 어떤 배제적인 과정이며 그러한 배제들은 행위적 의미화에 속한다.
예컨대 규모 개념에 간한 몇몇 불행한 기하학적 독해(이에 따르면 포함 관계 ‘지역⊂국가⊂전세계’는 어떤 비판적 평가 없이 유지된다고 가정된다)와는 대조적으로 지리학자 닐 스미스(Neil Smith)는 규모 생산의 예외적인 본성을 명백하게 탐색한다. 그는 “규모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지리학적 구조들에 의해 차례대로 생산하고 생산되는 사회적 활동을 통해 그리고 그 안에서 생산된다”(Smith 1992, 62). 이러한 통찰은 ‘규모’가 간-행적으로 생상되고, 경합되며 그리고 재생산되는 공간적 현상들의 속성을 지시한다는 사실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것은 다양한 물질-담론적 생산 장치들 안으로 접혀 들어간 생성의 결과로서 “특수한 사회적 과정들의 능동적 선행자”라고 이해될 수 있다(66). 스미스가 강조하는 바대로, “그것은 정확히 살아 있는, 규모의 능동적인 사회적 연결성이다”(66). 이 ‘연결성’은 선재하는 포함관계적인 규모들 간의 연결로서가 아니라 서로 간에 상이한 규모들의 행위적 주름운동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그래서 예컨대 개별적인 신체들, 가정들, 공동체들, 종교, 민족 그리고 지구는 크기에 관한 몇몇 물리적 개념에 일치하는 기하학적 포함관계로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통과하며 간-행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스미스의 ‘도약하는 규모들’(jumping scales)에 관한 생각은 시공간물질 다양체의 연결성을 재배치하는 행위적 주름운동과 관련하여 어떤 위상 역학(topological dynamics)의 요소로 정련될 수 있다.
경계 횡단(Boundary transgressions[경계 넘어섬])은 기하학적 사유가 충분치 않을 지점에 있는 또 다른 예이다. 경계 횡단은 (몇몇 권위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횡단된 경계들의 해소가 아니라 경계들의 계속되는 재배치와 같아야 한다. 예를 들어 정보 기술들은 무차별적인 편리함과 장애물들에 대한 무시와 더불어 마치 그것이 투명한 듯이, 국민-국가의 그것이든 또는 여러 다른 컴퓨터 플랫폼이든 간에 순수하게 모든 국경들을 횡단하면서 자주 지리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풍경의 중성미자(neutrino)로서 정보 제공된다. <246>이는 위대한 민주주의 제작자이자, 가동성(mobility)의 실현이며, 경계 없음을 아는 경지다. 그러나 정보기술은 어떤 평평한 시공간 다양체, 즉 어떤 공정한 경쟁의 장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몇몇 경우들에서 정보기술은 물질적 상품들의 분배에서 평평하지 않음을 악화시키며, 더 나아가 소위 기회의 확장을 어떤 가능성의 축소로 경험하는 사람들의 일상에 대해 구속을 가하는 강제력들을 견고하게 한다.[31] 이와 유사하게 페르난데스(Fernandes, 2001)는 횡단/국가주의는 국민-국가 개념을 퇴출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지역, 지방, 국가, 세계 사이의 관계는 기하학적 포함관계가 아니다. 지역, 지방, 국가 그리고 세계는 위상학적인 물질들이며, 서로를 통해 간-행적으로 생산된다. 이에 따라 정보적 흐름에서의 증가와 국가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상품들은 스스로 그리고 저절로 국민-국가의 쇠퇴를 형성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시공간물질 다양체를 반복적으로 재배치하는 간-행적인 위상역학을 사유하는 생산의 물질-담론적 장치들의 계보학들이다. 특히 그것들이 차이나는 규모에서 현상들의 연결성에 관한 분석을 포함한다는 것이 중요하다.[32] 루스 윌슨 길모어(Ruth Wilson Gilmore)가 지적하듯이, 부정의(injustice) 규모의 범위를 통해 운동하는 분석을 행하기 위해 ‘거리의 불화들’(frictions of distance)을 추적하는 것이 결정적인데, 이것은 하나의 장소 또는 사건과 다른 것들 간의 유사성을 지목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러한 장소들 또는 사건들이 서로를 통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함으로써 가능하다.[33]
시간, 공간 그리고 물질의 위상 역학은 행위적 물질/문제이며 그 자체로 아는 것과 존재하는 것에 관한 윤리학을 요청한다. 즉 간-행하는 것들은 권력의 기하학적 구조의 구성에 참여하는 것 이상의 잠재력을 가진다. 즉 그것들은 그 위상학과 동역학에서 변화를 위한 가능성들을 열어 놓으며, 그 자체로 다양체적 가능성들로의 개입은 존재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가능해질 것이 무엇인지 둘 모두를 쓸모있게 재배치하도록 하는 것이다. 가능성의 공간은 그 안에서 아는 자의 사회적 위치가 개괄될 수 있는 어떤 고정된 사건의 지평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어떤 동질적인, 고정된, 획일적인 선택지들의 저장고를 재현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시공간 다양체의 동역학은 다양체의 물질적 배치에 속한 소진불가능한 생동성, 즉 그 물질적 배치 안에 내재한 행위소의 전진적인 춤을 통해 반복적으로 개정된다. 정체성의 정치와 위치의 정치학은 쓸모있다 해도 동역학의 중요한 특성들을 구속하고 시시하게 만드는 권력의 기하학적 개념에 의해 제한되어 버렸다. 아마도 필요한 것은 가능성의 정치학(길모어), 다시 말해 권력의 배치 안으로 책임 있게 상상하고 개입하는 방법들, 즉 간-행적으로 재배치하는 시공간물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