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도 아니고 서평도 아닌 것이

해석과 사건_리쾨르와 들뢰즈 철학 비교 연구_A. 예비적 고찰_part 1

Nomadia 2022. 6. 27. 03:13

[2회차 원고]

 

*서언과 목차와 초록은 1회차 원고에서 볼 수 있다.

*아래에 현재까지 포스팅된 이 원고의 다른 부분들을 볼 수 있도록 링크를 만들어 놓았다. 

 

1회차 원고: 해석과 사건_리쾨르와 들뢰즈 철학 비교 연구_서론


A. 예비적 고찰

I. ‘해석사건의 통시적 맥락[6]

1. 카오스, 뮈토스, 로고스[7]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을 특징짓는 말은 자연철학’(philosophie naturelle)이다. 여기서 자연(natur)이란 생성’(gensis, génération)이라는 공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자연은 신성하다.’ [8]그래서 자연철학의 생성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표상’[9]으로 상정되기보다, 어떤 비시간적인 특성과 더불어, 원질(원리, archē)의 기원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비시간성이란 시간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차원이 아니라, 그러한 원질이 탄생하는(phyomai) ‘분위기또는 오케아노스 강 저편의 세상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인다. 기원신화적인 관점에서 탄생, 즉 자연이란 그와 같은 표상 이전의 어떤 혼돈(Chaos)[10]이며, 그것이 겨우 표상되었을 때에는 크로노스라는 의인화된 이미지로 드러날 뿐이다. 그리고 자연의 생성이란 기원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의 운동을 하기에 이르는데, 이때에야 시기구분이 등장하게 된다.[11] 비시간적인 자연은 순수한 질료(matiére, hylē)로서의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이 힘이 바로 자연의 생성을 가능하게 한다. 신조차 극복불가능한 이 힘을 헬라인들은 모이라(moira)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모이라라는 이름은 이라는 그 뜻 그대로 어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미지를 수반한다. 그렇다면 자연의 힘으로 귀속되는 이 이름은 처음부터 헬라인들의 폴리스 즉 정체(政體)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베르낭(Jean-Pierre Vernant)이 올바르게 지적한 대로 아테네인들은 원질(archē)이 가지는 제왕적인 지위를 그들의 왕(basilēus)의 권한으로부터 연역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왕정의 원리(archē)가 어디서 유래하는지에 대해서는 혼란스러운 기원신화 외에 다른 설명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혼란에 코스모스(cosmos)를 가져다 주었고, 헬라인들의 관념은 이제 하나의 질서지워진 몫으로서의 모이라와 대립하여 과거의 혼란스러웠고, 고통스러웠던 왕정에서의 노예적인 처지로서의 휘브리스(hybris)를 회상할 수 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주정 내에서는 아킬레우스의 지도와 종용에 의한 강제전투가 아니라, 시민군들의 자발적 무장에 의한 영광스러운 의무로서 병역이 인정되는 것이다. “왕의 제의와 군주권의 신화와 연관된 오래된 우주발생론 대신에 새로운 사고방식은 우주를 구성하는 이런저런 요소들 사이에 세계 질서의 기초를 대칭(symétrie), 평형(équilibre) 그리고 동등성(égalité)이라는 관계들 위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Vernant 2000, 7)

 

결국 신화적 사유에서 사건이라는 이미지는 생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원질이전의 카오스로부터 형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카오스는 언급한대로 질료적인 힘이라는 형상(形狀, morphē)을 반드시 내포한다. 왜냐하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로부터 비롯되는 헬라스적 사유에서 어떤 것도 무로부터 생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ex nihilo nihil fit). 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그것이 신화적이었든 정치적이었든 자신들의 나고 죽음, 자연과 우주의 나고 죽음이 모두 생성의 과정 속에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생성의 법칙은 신이나 인간이나 거역할 수 없는 것이며, 저 깊은 카오스로부터 기원하는 그 질료적인 힘에 의해 인간과 심지어 신까지 압도했다. ‘시기구분이 나올 때 쯤, 이제 이 생성의 과정은 어떤 기준을 가지게 된 것이고, 비록 호메로스에 비해 헤시오도스가 뛰어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헬라스적 사유에 철학적 풍미를 가미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Hack 2011, 45). 왜냐하면 우선 고대적 사유에서 철학적 맥락이 개입하는 지점은 이런 기준‘criteria’(측정)로서 로고스(logos)가 작동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기원적인 것이 아무리 혼돈에 휩싸여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이 삶의 덧없음(aei metaballontōn)과 우주에 기준을 마련함으로써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든다(박종현 1985, 24-25). 여기서 비로소 해석이 등장한다. 미리 말하자면, 이 과정은 바로 사건-이미지에서 이미지-해석으로 가는 과정이며, 여기서 이미지생성에서 존재로 변모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원초적 형태는 아직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것의 상징성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기껏해야 이것은 이미지’, 즉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는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각 없는 이미지라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사유의 혁명을 담지하고 있고, 그것을 세계와 사유 안에 이미장착시켰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각하고 있지 못하면 못할수록 그 예기치 못한 힘이 사유와 세계에 느닷없이 밀어닥치는 가장 막대한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카오스적 사태에서 재난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로고스적 사태에서는 축복이었다.

 

2. 고대 자연철학에서 해석과 사건의 원초적 과정[12]

이제 앞서 말한 자연에 덧붙여 철학이 어떤 방식으로 해석사건을 자연철학적으로 사유했는지를 살펴볼 차례다. 나는 이 사유의 이미지를 살펴보기 위해 세 사람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아낙시만드로스의 자연철학을 탐구할 것이다. 이 탐구 과정을 완수하기 위해 나는 나름의 해석을 진행할 것이지만, 이 방면에서 철학사에 의미심장한 영향을 끼친 세 사람의 철학자(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하이데거)의 사유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한다.

 

1)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은 카오스로부터 나오는 생성, 즉 사건을 존재의 부동성 안으로 수렴시키는 것, 해석해 감을 보여준다.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oulon mounogenes)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ēde teleston)이라는./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부 함께/ 하나로 연속적인 것으로 있기에.[13](...) 왜냐하면 있지 않다라는 것은/ 말할 수도 없고 사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DK28B).[14]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생성이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나오고,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존재만이 진리라는 것이다. 또한 전제는 생성을 감각으로 놓는다는 점이다. , ‘생성=감각의 사유불가능성을 통해 존재의 확고부동함을 도출하는 이 과정은 그것이 표상되어 해석될 수 있는가, 아닌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것이고, 로고스를 덧붙일 수 없음을 말한다.[15] 이렇게 덧붙여질 수 있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인간적임을 포기하는 것이며, 삶과 우주는 영원히 혼돈 속에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정치적으로, 폴리스적 동물인 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덧붙여진 로고스를 통한 존재의 구제는 사실상 생성하는 이 사회와 문명의 구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실재로 파르메니데스가 현상을 시야에서 완전히 배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존재의 터 위에 세움으로써 보존하고자 한 것은 아니가? 명시적으로도 파르메니데스는 현상에 대한 지식을 경멸하지 않는다. 그는 여신이 가리켜 보이는 두 길 중, 진리의 길, 존재의 길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뿐이지 않은가?

 

그대는 모든 것들을 배워야(pythesthai) 한다./ 설득력 있는(eupeitheos) 진리의 흔들리지 않는 심장과, 가사자들의 의견들(doxai)을. 그 속에는 참된 확신(pistis)이 없다./ 그렇지만 그대는 이것들도 배우게(mathēseai)될 것이다. ... 라고 여겨지는 것들(ta dokounta)이 어떻게,/ 내내 전부 있는 것들로서(per onta)[16] 받아들여질 만하게(dokimōs) 있어야 했던가를(DK28B1).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서 ‘~인 듯한지식, doxa는 혐오할만한 대중의 지식에 불과했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는 이러한 지식마저 지식의 대상으로 여긴다. 우선 파르메니데스에게 doxa는 신적인 것과 구분되는 가사자들의 의견이며, 여기에는 참된 확신이 없다.[17] 이러한 의견들을 지식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는 구절은 마지막 구절이라 생각된다. “...라고 여겨지는 것들[가상]이 어떻게 내내 전부 있는 것들[존재]로 받아들여질 만하게 있어야 했던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매우 심대한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 이를테면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하는 어떻게란 가상이 존재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는 경로를 일컫는 것인가? 우선 분명한 것은 가사자들의 ‘dokein’이 아닌 지식은 있는 것들’[존재]에 관한 지식이다. 반대로 다른 것은 비존재의 지식이다.

 

그러나 나는 파르메니데스가 감각적인 것을 전적으로’ ‘비존재로 몰아넣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가 비존재를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라고 한 입론에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논변을 따라 나는 세 가지 대상을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사유되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것(존재-초재적) 감각되며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것(존재-내재적) 사유되지도 감각되지도 않으며 이름 붙여질 수도 없는 것(비존재). 여기서 감각되며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것은 내재적이지만 매우 부정적인 함축을 띄게 된다. 왜냐하면 아에티오스의 단편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는 감각불신론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 엠페도클레스,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감각들은 거짓되다”(DK28A49) 어쨌든 나의 이러한 구분에 일정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심플리키오스와 플루타르코스의 다음 두 단편이다. “그리고 실로 이 책들에서 그들은 자연을 넘어선 것들(ta hyper physin)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자연에 속한 것들(ta physika)에 관해서도 논의하였으며, 아마도 이 때문에 그들은 자연에 관하여라는 표제를 붙이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DK28A14).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는 두 부류(physis) 가운데 어느 쪽도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각에게 응분의 것을 부여하면서 하나이자 있는 것의 종류(idea)에는 사유되는 것(to noēton)을 놓고 (영원하고 불멸한 것이라는 이유에서 있는 것이라 불렀고, 자신과 동일하며 차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라고 불렀는데), 질서 없이 움직이는 종류에는 감각되는 것(to aisthēton)을 놓는다”(DK28A34). 두 단편 모두 플라톤주의의 틀이 완연하지만 특히 플루타르코스의 단편은 더 그러하다. to noētonto aisthēton의 구분은 플라톤 철학의 기본 개념 중 하나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파르메니데스 단편에서 존재와 생성은 모두 다루어지는 대신 전자에 사유가능성의 가치를 부여하고 후자에 사유불가능성의 근거를 부여함으로써, 학문적 대상으로서 존재를 승격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의 기반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성사실이나 효과가 존재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DK28B2에 더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18] 여기서 파르메니데스는 있다 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 없다라는 길과 있지 않다 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밖에 없다라는 길을 나누면서 전자가 배움과 사유를 위한 길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는 진리의 길이며 다른 하나의 진리가 아닌 길로 분명히 갈라지는 것이다(Kenny 2004, 41 참조).[19] 이렇게 분명한 기준을 정할 수 있는 것은 있지 않은 것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지식과 대상의 일치를 사유하는 새로운 전환점이 파르메니데스의 철학 안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존재하는 것은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알 수도 없다.[20] 이와 같은 관점은 단편 3에서 재확인된다. , “왜냐하면 같은 것이 사유함을 위해 또 있음을 위해 있기 때문에”(DK28B3).[21]

 

이때 사유의 주체는 바로 다름 아닌 누스(noos). 누스는 존재를 존재로 바라보게 하는 사유작용의 주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관한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은 다소 희한한 방식으로 진술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있는 것을 있는 것에 붙어 있음으로부터 떼어 내지 않을 테니까,
그것이 전적으로 질서에 따라(kata kosmon)[22] 모든 곳에 퍼져 있는 상태에서도 그럴 수 없을 것이고
그러그러하게 함께 결합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그럴 수 없을 것이기에(DK28B4).[23]

 

이 수수께끼 같은 구절을 해석하면, 인간은 항상 누스를 통해 사물이나 사태를 인식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존재자(‘있는 것’)를 존재자체의 상태(‘있는 것에 붙어 있음’)로 파악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존재자는 질서잡혀(nach der ordnung; in order) 있는 경우도 있으며, 이러저러하게 결합되어 있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이는 겉보기에 파르메니데스가 doxa의 길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doxa와 참된 지식을 연결할 만한 어떤 것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단편 6에 이르면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와 사유의 일치에 대해 앞서와는 다른 방향을 취한다. 단편 2에서의 방향이 존재에서 사유로 가는 방향이라면 여기서는 그 반대의 방향을 지시한다. “말해지고 사유되기 위한 것은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있을 수 있지만, / 아무 것도 아닌 것(mēden)은 그렇지 않으니까.”(DK28B6)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사유는 차단되어야 한다. “즉 있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 결코 강제되지 않도록 하라. / 오히려 그대는 탐구의 이 길로부터 사유를 차단하라”(DK28B7). 이 정도에 이르면 우리는 어째서 파르메니데스가 억견의 길조차 알아야 한다고 서두에 밝혔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한 발만 재겨 디디면, 존재에 대한 인식과 존재자에 대한 잡다한(결합된) 인식이 날카롭게 구분될 것만 같다. 따라서 이런 논변은 필연적으로 감각지각에 대한 신뢰를 저버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오로지 논변만이 사유의 진정한 방법이고 감각은 잡소리에 불과하다. 이러한 잡소리는 그 다음 단편에 이르러 생성자체를 기각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그래서 다음의 단편이야 말로 파르메니데스 사상이 농축되어 있는 것이라 하겠다.

 

길에 관한 이야기(mythos)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다, 있다라는. 이 길에 아주 많은 표지들(sēmata)
있다.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oulon mounogenes)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ēde teleston)이라는.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부 함께
하나로 연속적인 것으로 있기에. 그것의 어떤 생겨남을 도대체 그대가 찾아낼 것인가?
어떻게, 무엇으로부터 그것이 자라난 것인가? 나는 그대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라고
말하는 것도 사유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있지 않다라는 것은
말할 수도 없고 사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필요가 먼저보다는 오히려 나중에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해서 자라나도록 강제했겠는가?
따라서 전적으로 있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없거나 해야 한다(DK28B8).[24]

 

우선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의 길에 많은 표지들’(σματα) 즉 그러한 존재를 드러내는 신호(sign)가 많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한 신호는 단편의 내용으로 보아서 존재는 온전한 하나이며 완결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생성도 소멸도 없고, 과거와 미래에도 걸쳐 있지 않다. 여기서 파르메니데스는 어떤 초월론적인 의미에서 σματα를 사용하는 것일까? 이 어휘의 본래 의미에는 성좌라는 의미 뿐 아니라, 어떤 초재적 존재로부터의 전언이라는 함축이 담겨 있다.[25]

 

그렇다면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를 분명 생성과는 다른 평면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된다. 이런 식으로 추론될 때 비로소 존재는 하나이며, ‘연속성을 띄는 것으로 정당화될 것이다.[26] 왜냐하면 현상세계에 있어서 모든 것은 불연속적이며, 그것이 감각적인 대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적이든 공간적이든 이것은 지금 전부 함께’(all at once, a continuous one) 있는 바로 그것이고, 그렇다면 거기에 어떤 생성도 들어설 여지는 없다. 이런 존재론적인 전제 하에서만 파르메니데스의 생성의 부정이 이해되며, 나아가 하나의 절대적인 양도논법, 전적으로 있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없거나라는 진술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전적으로 없는 것은 진술될 수도 생각될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파르메니데스의 이 양도논법의 역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바로 그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언설되고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이때 문제는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유된다는 그 사실에 놓여져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 당대에 이런 식의 인식론적인 반론은 완비되지 못했다.[27] 이와 다른 측면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사유는 이른바 헬라스의 상식이라 할 만한 것으로부터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헬라스인들에게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는 완전히 부당한 것이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파르메니데스의 사유가 터잡고 있는 것도 (전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이러한 상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파르메니데스가 표지의 원천으로 내세우는 지점은 존재, 즉 초재적 평면이며, 이는 파르메니데스의 해석이 이로부터 비롯된다는 것도 알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완연한 생성의 측면은 말해질 수도 없기 때문이며, 그것이 말해질 수 없다는 것은 로고스의 장에 들어설 수 없는 환영(phantasma)이 거기에 있다는 것인 반면, 존재는 부동하는 실체로서(“[그것은] 커다란 속박들의 한계들 안에서 부동(不動)이며/ 시작이 없으며 그침이 없는 것으로 있다.”-DK28B26) 비로소 그것에 대한 닦달이 가능한 대상’(gegenstand)으로 정립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겨났다면 그것은 있지 않고, 언젠가 있게 될 것이라면 역시 있지 않기에. 이런 식으로 생성은 꺼져 없어졌고 소멸은 들리지 않는다”(ibid., 8, 20). 그리고서 파르메니데스는 이 단편에서 연속성에 대한 논증을 이어 간다. 존재는 우선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ibid). 존재는 균일하다. 그러므로 전체는 존재로 꽉 차 있다”(ibid.). 그는 이러한 존재의 특성들이 참된 확신에 따라 필연적인 것이 된다고 언급한다(ibid. 28~30).

 

왜냐하면 생성과 소멸이
아주 멀리 쫓겨나 떠돌아다니게 되었는데, 참된 확신이 그것들을 밀쳐냈기 때문이다.
같은 것 안에 같은 것으로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 자체만으로 놓여 있고
또 그렇게 확고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강한 아낭케(필연)
그것을 빙 둘러 에워싸고 있는 한계의 속박들 안에 [그것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ibid. 26~31).

 

파르메니데스가 진술하고 있는 이러한 참된 확신’(πστις ληθς)은 고대적 우주론의 사유 이미지가 어떻게 존재론과 만나게 되는가를 분명히 드러낸다. 이 진술들 속에는 콘퍼드(F. M. Conford)가 주장한 바, 그 뮈토스적 요소와 로고스적 요소의 뒤얽힘 같은 것이 분명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28]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한계아낭케라 할 수 있다.[29] 이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적 존재는 필연적 한계 안의 연속성이라는 특유한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이 특성은 일견 매우 모순되는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30] 그것이 한계를 가진다면 연속성은 어떤 측면에서 불연속성을 내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파르메니데스는 그러므로 있는 것이 미완결이라는 것은 옳지 않다”(ibid. 31)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결핍된 것이 아니며, 만일 결핍된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것이 결핍된 것일 테니까”(ibid. 32). 따라서 한계는 필연적으로 결핍’(미완결)을 피하기 위한 논리적 결론인 셈이다.[31] 게다가 다음의 단편에 따르면 그 이유는 결정적으로 우리 인식의 한계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있는 것 없이 ([사유가] 표현된 한에서는 그것에 의존하는데)
그대는 사유함을 찾지 못할 것이기에. 왜냐하면 있는 것 밖에 다른 아무 것도
있거나 있게 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모이라(운명)가 바로 이것을 온전하고
부동의 것이게끔 속박하였기에 그러하다. 이것에 대해 모든 이름들이 붙여져 왔다.
가사자들이 참되다고 확신하고서 놓은 모든 이름들이

 

즉 이름(logos) 붙여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존재라면 사유(logos)될 수 없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유될 수 있으며, 이름 붙여질 수 있는 모든 것으로서의 존재는 바로 사유-총체로서의 로고스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생성은 존재라는 총체성 안으로 수렴되는데, 앞서 말한바, 환영에 해당되는 비존재는 여기서 배제된다.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제논의 논법을 생각해 보라. 그도 마찬가지로 귀류법이라는 배제의 논법을 통해 이 생성의 환영을 제거함으로써, 존재의 확고부동함을 논증해 내지 않는가? 여기서 파르메니데스의 우주에 남겨진 존재는 영원한 실체이며, 생성은 그것의 해석을 감당하는 표지를 공유하지 못하는 무능력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생성은 존재의 총체성 안에서 그 표지를 할당받고, ‘한정됨으로써 수렴되며, 나머지(‘잔여’)는 배제되어야 한다.

 

파르메니데스와는 달리 헤라클레이토스는 생성 자체를 존재로 파악하는 사유를 펼친다. 앤서니 케니는 그의 철학사, 파르메니데스의 형이상학 편을 마무리 하면서 헤라클레이토스와의 대립지점을 명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바, 파르메니데스가 운동을 부정하고 고정된 것을 진리로 파악했다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반대로 변화를 중심에 놓고, 고정된 것을 오류로 파악했다는 것이다(케니 2008, 333-34).

 

그런데 이러한 구분은 두 철학자의 심오한 본질이 초재성과 내재성의 상호확대 과정이라는 철학사적 맥락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파르메니데스의 경우 존재는 부동의 것으로서 비존재와 날카롭게 대립한다. 이때 존재는 초재적 특성을 띄게 되며, 현상에 대한 어떤 구제책도 되지 못한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변화는 명백하게 내재적 특성을 띈다. 나아가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의 내재적인 특성들을 감각적인 것으로 명명하고 그것을 진리의 길에서 기각함으로써 헤라클레이토스가 감각을 일차적으로 긍정한 측면에서 더 나아간다. 즉 헤라클레이토스의 내재적 우주에서는 반드시 감각이 본성을 파악하기 위한 첫관문이었다면, 파르메니데스의 초재적 우주에서는 지성(logos)만이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이것은 현상의 평면에 있는 모든 것을 존재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상정하기 시작할 때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결론이라고 하겠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현상 저편을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완전히 다른 세계를 구성할 수 없었다. 그는 변화라는 우주의 질서가 너무나 흔한 것이었기 때문에 반박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고대적인 유물론의 시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로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론의 분야에서 헤라클레이토스를 앞서 원자론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이들 고대 유물론자들은 변화보다, 변하지 않고, 분할 불가능한 존재라는 표현에 더 이끌린 것이다.[33] 사변적으로 그것이 더 굳건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다.[34]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관이 파르메니데스에 비해 허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논변에 기대기보다 직관에 호소하며, 무엇보다 파르메니데스에게는 있었던 걸출한 다음 세대 제자인 제논과 같은 후계자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초재적인 존재론과 내재적인 존재론은 상호확대 과정 속에서 서로에게 적대적으로, 또는 상호적으로 발전해 나가게 되며 학문사 전체에 있어서 전자의 존재론이 우위를 점한채로 진행된다. 그러나 사정이 이러하다고 해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중요성이 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서의 우위나 열세가 곧 그 사상의 그러한 점을 입증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중요성은 오히려 다른 쪽에 있다. 그가 파르메니데스에 비해 로고스(Logos)의 용법을 자연주의적으로 연장했다는 면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35] 프리도 릭켄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는 한편으로 우리의 오관이 매개하는 경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진리 해명의 유일한 수단인 로고스를 통한 인식, 이 양자 사이의 구별을 헤라클레이토스보다 더 강조한다.”[36] 즉 파르메니데스는 로고스를 존재의 인식에 할당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방면에서 로고스를 덜 강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이렇게 인식의 측면에서도 사용하지만, 존재, 생성자체에도 적용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생성을 상징하는 것은 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 이 곧 로고스자체다. 이 세계(kosmos), 모두에게 동일한데, 어떤 신이나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있어왔고 있고 있을 것이며, 영원히 살아 있는 불(pyr aeizōon)로서 적절한 만큼 타고 적절한 만큼 꺼진다.”(DK22B30) 세계가 불이며 이것이 적절성을 유지하는 것은 그것이 로고스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릭켄도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서 서술된다. 그것은 반대자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그 관계 상황이며, 또 그 반대자들의 분리와 교체를 지배하는 법칙이며, 모든 생성과 변화를 규정하는 역동적 질서의 위대성이다. 모든 인간은 이 로고스에 참여한다”(Ricken 2000, 63)

 

로고스가 불이고 그것이 곧 영원한 법칙이며, 질서며, 인간이 거기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의미에서의 로고스는 앞서 파르메니데스가 강조한 로고스의 그 인식적인 측면이 아니라 바로 존재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그 자체로 인간이자 자연이며, 이 둘 모두가 속해있는 존재론적인 평면(ontological plane)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상과 존재를 예리하게 구분하고, 로고스를 존재의 편에 세우면서, 동시에 인간의 특유한 능력으로 조명하는 파르메니데스와는 달리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어떤 동시적인 현존, 인간과 자연의 그 구분불가능한 법칙적인 필연성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이 고대 자연주의의 연장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스토아학파에 근근이 이어지고 이후 그 명맥이 오랫동안 끊어지게 된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헤라클레이토스가 이 로고스에 대한 자신만의 용법을 통해 해석사건을 보는 입장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로고스가 언제나 그러한 것으로 있지만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한다(DK22B1).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에게는 본성에 따라(kata physin) 구분하고 그것이 어떠한지를 보이면서 상술하는 그러한 말들과 일들이 있는바, 이것은 바로 그 자신이 로고스를 로고스에 따라(‘본성에 따라’) 해석하고(‘구분하고 ... 보이면서 ... 상술하는’) 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대중들은 마치 그들이 자면서 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이 미망에 빠져 있다. 즉 그는 로고스를 대중들의 경험으로부터 유리되고 은폐된 어떤 것으로 보고 있다. 철학자가 그것을 본성에 따라설명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을 마치 자면서 하는 것들을 잊듯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로고스가 어떤 초재적인 실존을 가지는 존재가 아님을 암시한다. 이것은 존재로서의 로고스로부터 오는 어떤 전언의 표지(ἕρμα, herma)[37]를 가지는 것이며,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은 바로 그 해석자(hermeneus)임을 자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서는 섹스투스의 그 다음 직접인용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는 공통의 것(xynōi)”임에도 사람들은 마치 자신만의 생각(phronēsis)을 지니고 있는 듯이 살아간다고 한다(DK22B2). 이것은 로고스가 보편적으로 경험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스스로의 아집에 빠져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란 대중적 앎이며, ‘본성에 따른앎이 아닐 것이다.[38] 이런 앎은 로고스에 의한 로고스의 지식, 즉 해석의 지식이 아니라 그저 견해(억견, doxa)[39]‘~인 듯한지식일 뿐이다.[40]

 

또 하나 특유한 점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당대의 현자들과 선배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그는 피타고라스, 크세노파네스, 호메로스를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원조”, “두들겨 맞을(rhapizesthai)한 인물로 묘사한다(DK22B40; DK22B81; DK22B42). 그 이유는 이들 현자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자신의 로고스를 통해 자연의 로고스를 사색하지 않고, 헛된 지식에만 기대어, 즉 과거의 권위에만 기대어 그것을 자랑하는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많이알고 있느냐 보다, ‘어떻게사유하는가가 더 관건이었던 셈이다. 어떻게는 분명 로고스가 가진 그 표식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1]

 

그렇다면 이러한 로고스를 사유하는 것은 어떤 경로를 통해 가능한가?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어떤 정교한 인식론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하지만 그가 감각을 일차적으로 신뢰하고 오류가 판단과 같은 영혼의 작용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는 보고 듣고 배울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을중시하면서(DK22B55), 감각 기관의 일차적 기능과 영혼의 저급함으로 인한 무지를 비판한다. 그가, “눈은 귀보다 더 정확한 증인(martyres)이다”(DK22B101a)라고 한 것이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혼(barbaros psychē)[42]을 가진 한에서(DK22B107)” 감각기관은 사람들을 미망에 빠트린다고 한 것은 그가 감각기관으로부터 오는 전언을 일차적인 해석의 자료로 삼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43]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감각적으로 인지되고 영혼에 의해 제대로 사유되는 진리의 대상은 로고스이며 이는 당대의 현자들이 묘사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적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적인 로고스를 불신(apistis)한다면 이것은 알려지지 않고 은폐된 채로 지나간다(DK22B86). 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신과는 달라서 예지(gnōmē)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DK22B79).[44] 인간적인 영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kosmos, 조화로운 전체라고 할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진정한 지식이 어떤 공통된 것’(xynōi)이며, 모든 것을 지배하고(kratei),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언급한다(DK22B114). 헤라클레이토스가 지식에 대해 가지는 관념은 이를 통해 볼 때, 어떤 개별적인 사항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대상에 가깝다고 보인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러한 지식을 호흡을 통해 빨아들인다는 언급을 했다고 전해준다(DK22A16).

 

그런데 사실 이러한 지적인 영혼의 능력은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다(DK22B113). 즉 로고스를 알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아는 것(ginōskein heōutous)과 사려하는 것(sōphronein)이 모든 인간들에게 부여되어 있다”(DK22B116).[45]

 

하지만 이러한 공통된 본성을 활용하는 것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사려하는 것(sōphronein)은 가장 큰 덕(aretē)”이지만 참을 말하는 것과 본성에 귀기울여가며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지혜(sophiē)는 이와 다른 사항이기 때문이다(DK22B112).[46]

 

이런 공통된 본성이 보편적인 대상(kosmos)에 적용될 때 우리는 참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는 나 자신본성을 든다.[47] 이것들이 로고스가 현상하는 어떤 것이라고 본다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자기자신을 살피면서 또 자연을 살피면서 로고스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이는 바로 해석의 철학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빠트리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해석이 로고스를 통해’, 로고스에 대해이루어진다면, 로고스는 여기서 구별되지만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가 가지는 자연주의적 용법[48]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우리는 이 로고스가 어떤 전언이며, ‘표식으로서 기능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전언의 형식으로 전해지는 해석의 대상으로서의 로고스는 또한 사건이다. 로고스의 일반적 의미에서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사건의미를 추출한다면, 그것은 “thing, spoken of, things, matter”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 사건이나 사태를 의미한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이러한 사건이나 사태가 존재라는 단일한 평면 안으로 흡수된다면, 헤라클레이토스에게는 로서의 로고스 즉 시시각각 타오르며, 생성하는 사건의 계열로서의 그것(thing)인 바, 질료적(matter)인 세계 자체가 있다. 앞서 본 것처럼 이 세계 자체는 은폐된 채이며, 다만 로고스를 보는 철학자들에게 전해지는 표식에 의해 해석될 수 있을 뿐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해석은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을 건너뛴 결과라고 보여진다. 그것은 앞서 최초의 장에서 제기한 카오스의 문제다. 이 두 사람의 철학자가 비록 존재와 로고스를 통해 해석과 사건의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할지라도, 이러한 해석과 사건의 보다 근본적인 사태에 해당되는 카오스, 즉 신화적인 것에서 연원하는 세계의 최초상태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과연 이들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하고, 사유를 혼란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대중으로부터 유리되면서까지 추구한 철학적 사유의 근본적인 구도는 다시 이들 이전의 철학적 태도로부터 탐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신화적 이미지들로부터의 사유의 변형은 일종의 목숨을 건 도약처럼 보이는데, 나는 그러한 도약을 위해 아낙시만드로스라는 최초의 잠언가를 우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석>

*본문에는 '[ ]'로 표시되었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 )'로 표시한다. 

 

6) 앞서 언급했듯이 이 장의 내용들은 순전히 압축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압축적 내용들은 전체 철학사에 대한 일종의 예화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대철학 외에 근현대 철학의 예화들도 논문에서 이후 전개될 것이지만, 철학사의 면면 모두를 이 한정된 지면에 가져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후속작업들이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7) 전통적으로 철학사에서는 신화적 사고(뮈토스)와 철학적 사유(로고스)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다(콘퍼드와 버넷). 하지만 이 관점들은 두 가지 점에서 누락을 포함한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로 이러한 양자택일은 당대 헬라인들의 사회, 정치적 격변을 무시한다. 사실 사회, 정치적 요인을 주요변수로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지만, 이론적 설명의 부적합성이 드러나는 곳에서 이에 대한 고려는 어떤 경우 결정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째로 이 대립적인 관점들은 뮈토스와 로고스 외에 카오스에 대한 탐색을 소홀히 하고 있다. 사실상 카오스라는 주제야말로 뮈토스와 로고스의 대립적이면서고 연속적인 측면을 공평무사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전망이 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베르낭의 견해를 따른다. Jean Pierre Vernant, Les origines de la pensée grecque, PUF, 2000, chap. 7 참조.

8) McClure는 헬라인들의 자연을 몇 가지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헬라인들은 자연을 생명, , 영혼, 신성함, 가치기준으로 바라보았으며, 이 중 신성함이 가장 중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여기서 McClure는 헬라인들에게 힘과 운동의 구분은 없었으며, 그것은 동일한 생명의 요소라고 말한다. M. T. McClure, ‘The Greek Conception of Nature’, The Philosophical Review, Duke University Press, Vol. 43, No. 2 (Mar., 1934), pp. 109-124

9) ‘Vorstellung’ 즉 대상(gegenstand)앞에 세워 닦달함이라는 하이데거적 의미를 가져오자면, 표상은 생성을 그 자체로 직관하거나 살피는 것이 아니라, 우선 그것을 고정시킴으로써 닦달하기 용이하게 만드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는 고대적인 생성과는 차이가 난다.

10)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는 이 주제에 대한 신화적 사유의 표현이다. 나는 뒤에서 이 카오스라는 주제가 어떻게 복권되는지를 다소나마 살펴볼 것이다. 어쨌든 고대 헬라스 세계의 소위 신화적 사유시기를 지나 철학적 사유가 시작되면서 이 카오스에 대한 사유가 배제되거나 약화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조대호의 논문이 유익하다. 조대호, 카오스와 헤시오도스의 우주론, 한국철학회 철학71, 2002, pp. 51-74.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르케와 카오스를 명시적으로 대조하는 부분은 그의 형이상학1091a30-1091b10을 참조하라. 이 논문에서 인용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Metaphysica,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조대호 역, 형이상학,나남, 2012의 번역을 따른다.

11) 역사적 저술에서 시기구분이 최초로 표명된 것은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이다. 헤시오도스의 시기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그 이전의 호메로스적 역사서술과는 달리 상당한 합리성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들의 의인화, 즉 인격적 측면이 더 강조되는 것도 헤시오도스에 이르러서이다. 이에 대해서는 로이 케네스 해크Roy Kenneth Hack 지음, 이신철 옮김, 그리스 철학과 신, 도서출판 b, 2011(원전 서지: God In Greek Philosophy To The Time Of Socrates, Kessinger Publishing, LLC (June., 2008)), 3장 참조.

12) 여기서 사용되는 번역문은 김인곤 외 옮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아카넷, 2005의 것을 따랐으며, 필요할 경우, DK 판본(Hermann Diels, Walter Kranz,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Weidmann, 1903;1992)KRS 판본(G. S. Kirk, J. E. Raven, M. Schofield, The Presocratic Philosopher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7;1983)을 참고하여 수정하였다. 인용문 뒤의 부호는 Diels-Krantz 판본의 고유 번호이다.

13) “파르메니데스는 여기서 혹 시간적 또는 공간적 연속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가? 그는 분명 존재하는 것이, 그것이 점유하고 있는 어떤 차원에서도 연속된다고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그는 이미 존재가 시간 안에 실존한다는 것을 거부하였다. (...) 이러한 애매성은 이어지는 단편들에서도 나타난다”(KRS, 251). KRS는 여기서 파르메니데스가 시간적 또는 공간적 연속성’(spatial or temporal continuity)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지 묻는다.

14) 앤서니 케니는 파르메니데스의 단편 DK28B8을 해석하면서, ‘존재비시간성과 연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존재는 시간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존재가 어떤 시작도 끝도 가지지 않는다는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다. 존재는 영원할 뿐 아니라, 변화에도 속하지 않고(‘견고하며, 움직이지 않는다’), 또는 심지어 시간의 흐름에도 속하지 않는다(그것은 언제나 현재이며, 어떤 과거나 미래도 가지지 않는다). 과연 무엇이 현재와 미래로부터 과거를 구분할 수 있는가? 만약 어떤 존재도 없다면, 시간은 실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약 그것이 존재(being)의 한 종류라면, 그것은 존재의 일부일 것이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모두 하나의 존재(Being)이다” Anthony Kenny, A New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vol. I,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p. 203.

15) “그들이 nous를 강조했다 해서, 삶을 포기하거나 육신을 저주할 것을 권유한 것은 아니다. 단순한 동물로 머물 뿐 거기에 logosnous처럼 덧보태어진 것(epiktēsis)이 없다면,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특유의 것이 없다. 그 덧보태어진 것들(ta epiktēta)이 바로 인간 특유의 것들이요, 또한 그러한 것들을 덧보태어 가진 그 만큼만 인간으로서 산다는 것을 헬라스인들은 말하고자 했다” W. K. C. 거스리Guthrie 지음, 박종현 옮김,희랍 철학 입문-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서광사, 2000, p. 49.

16)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를 말할 때 쓰는 단어는 ‘to on’이다. 이는 eimi 동사의 부정사 einai의 현재 분사형(on) 앞에 정관사 to를 붙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 전체라는 의미다. 영어로는 대문자로 Being이라 한다. 그러므로 파르메니데스는 어떤 전체로서의 형상을 to on이라고 한 것이며, 생성은 전체를 비껴가는 어떤 것, 그것에 걸리지 않는 어떤 것으로 본 것이라 생각된다.

17) 이 부분에서 파르메니데스도 이전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는 doxa에 대립되는 참된 지식으로 episteme를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pistēmē는 소크라테스에 이르러서야 철학사에 모습을 드러낸다.

18) “탐구의 어떤 길들만이 사유를 위해(noēsai) 있는지./ 그 중 하나는 있다(estin)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 없다 라는 길로서,/ 페이토(설득)의 길이며(왜냐하면 진리를 따르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있지 않다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밖에 없다라는 길로서/ 그 길은 전혀 배움이 없는 길이라고 나는 그대에게 지적하는 바이다.”(απερ δομοναι διζσις εσι νοσαι· / ἡ μν πως στιν τε καὶ ὡς οκ στι μεναι, / Πειθος στι κλευθος - Ἀληθείῃ γρ πηδεῖ - , / ἡ δ' ὡς οκ στιν τε καὶ ὡς χρεν στι μεναι, / τν δτοι φρζω παναπευθα μμεν ταρπν)

19) 한편, 조지 톰슨은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사적 의의를 생산관계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파르메니데스의 뒤에 오는 그들의 계승자들의 저작 속에서 우리는 자유민과 노예 사이의 근본적인 적대감에 의해 규정을 받아가면서 시민들간의 계급투쟁이 확대, 전개되는 자취를 볼 수 있다.” G. D. Thomson, 고대사회와 최초의 철학자들, 고려원, 1992, p. 16.

20) 이 단편의 마지막 행은 지적할 수도 없을 것이기에로 끝을 맺는다. 이때 지적하다’(φρσαις)지시하다로 새길 수 있다.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은 지시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 로 이 있지 않는 것을 그대는 알게 될(γνοης) 수도 없을 것이고(왜냐하면 실행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 지적할 수도 없을 것이기에.”

21) τγρ ατνοεν στν τε καεναι. 버넷의 번역본에는 “For it is the same thing that can be thought and that can be.”라고 되어 있다. 우리의 해석과 보다 가까운 것은 버넷의 번역이라 할 수 있다.

22) kosmos, 즉 우주를 지칭하는 이 단어의 최초 언급자는 보통 피타고라스라고 알려져 있으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테오프라스토스의 말을 따르면서 그것을 헤시오도스가 최초로 언급했다고 전한다(DK28A44).

23) 중요한 구절이다. 각 텍스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Λεσσε δ' ὅμως πεντα νόῳ παρεντα βεϐαως· / ογρ ποτμξει τὸ ἐὸν τοῦ ἐόντος χεσθαι / οτε σκιδνμενον πντπντως κατκσμον / οτε συνιστμενον. Diels-Krantz 판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denn er wird das Seiende von seinem Zusammenhang mit dem Seienden nicht abtrennen weder als solches, das sich ueberall gaenzlich zerstreue nach der Ordnung, noch als solches, das sich also zusammenballe.” KRS 판은 다음과 같다. “for you will not cut off for yourself what is from holding to what is, neither scattering everywhere in everyway in order[i.e. cosmic order] nor drawing together.”(KRS, 262). Burnet 판에는 이 부분의 번역이 없다.

24) 이 단편의 일부는 앞에서도 잠시 다루어졌는데, 가장 중요한 단편이므로 각 텍스트의 원문을 옮겨 놓는다: Μνος δ' ἔτι μθος δοο / λεπεται ς στιν· τατδ' ἐπσματ' ἔασι / πολλμλ', ὡς γνητον ἐὸν καὶ ἀνλεθρν στιν, / ἐστι γρ ολομελς τε καὶ ἀτρεμς δ' ἀτλεστον· / οδποτ' ἦν οδ' ἔσται, ἐπενν στιν μοπν, / ἕν, συνεχς· τνα γρ γνναν διζσεαι ατο; / ππθεν αξηθν; οτ΄ κ μὴ ἐόντος ἐάσσω / φσθαι σ' οδνοεν· ογρ φατν οδνοητν / ἔστιν πως οκ στι. Τδ' ἄν μιν καχρος ρσεν / ὕστερον πρσθεν, τομηδενς ρξμενον, φν; / οτως πμπαν πελναι χρεν στιν οχί.; DK : Aber nur noch Eine Weg-Kunde / bleibt dann, dass IST ist. Auf diesem sind gar viele Merkzeichen: / weil ungeboren ist es auch unvergaenglich, / denn es ist ganz in seinem Bau und unerschuettlich sowie ohne Ziel / und es war nie und wird nie sein, weil es im Jetzt zusammen vorhanden ist als / Ganzes, Eines, Zusammenhaengendes (Kontinuierliches). Denn was fuer einen Ursprung willst Du fuer dieses ausfindig machen? / Wie, woher sein Heranwachsen? Auch nicht sein Heranwachsen aus dem Nichtseienden werde ich dir gestatten / Auszusprechen und zu denken. Denn unaussprechbar und undenkbar ist, / Dass NICHT IST ist. Welche Verpflichtung haette es denn auch antreiben sollen, / Spaeter oder frueher mit dem Nichts beginnend zu entstehen? / So muss es also entweder ganz und gar sein oder ueberhaupt nicht.; Burnet : One path only is left for us to / speak of, namely, that It is. In it are very many tokens that / what is, is uncreated and indestructible, alone, complete, / immovable and without end. Nor was it ever, nor will it be; for / now it is, all at once, a continuous one. For what kind of origin / for it. will you look for ? In what way and from what source / could it have drawn its increase ? I shall not let thee say nor / think that it came from what is not; for it can neither be / thought nor uttered that what is not is. And, if it came from / nothing, what need could have made it arise later rather than sooner? / Therefore must it either be altogether or be not at all.; KRS : There still remain just one account of a way, that it is. On this way there are very many signs, that being uncreated and imperishable it is, whole and of a single kind and unshaken and perfect. It never was nor will be, since it is now, all together, one, continuous. For what birth allow you to say nor to think from not being: for it is not to be said nor thought that it is not; and what need would have driven it later rather than earlier, beginning from the nothing, to grow? Thus it must either be completely or not at all.

25) Liddell and Scott's Greek-English Lexicon(Abridged), Simon Wallenberg Press, 2007, p. 683.

26) 파르메니데스가 이런 방식의 초재적 사유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도 하고 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감각되는 것들의 실체(ousia) 너머에 다른 어떤 것이 있다고 상정하지 않지만, 만일 어떤 인식 또는 사고가 있으려면 그런 부류의 것들(physeis)[이 있어야 함]을 최초로 통찰하였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저것들에 해당되는 말(logos)들을 이것들에다 옮겨놓았다”(DK28A25).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파르메니데스를 자연부정론자’(aphysikoi)로 불렀다고 전한다. 왜냐하면 그가 운동을 부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DK28A26).

27) 이 문제는 이후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과제로 남겨지며, ‘존재 동사의 용법이라는 문법적인 오류 차원에서 다뤄지게 된다.

28) “최초의 이성적 사유와 이에 앞서는 종교적 표상 사이에는 진정한 의미의 연속성(continuity)이 있다. 이 연속성은 민속 신앙에서의 신들과 원소들을 단지 비유적인 등치로 취급하는 피상적인 유추가 아니다. 철학은 종교로부터 어떤 위대한 개념들을 상속받았는데, 이를테면, ‘’(GOd), ‘영혼’(Soul), ‘운명’(Destiny), ‘법칙’(Law) 등이 그것들이다. 이 개념들은 이성적 사고의 운동을 둘러싸면서, 그것의 주요한 방향을 결정했다. 종교는 시적 상징으로 그리고 신화적 인물들을 통해 그 자신을 표현한다. 반면 철학은 건조한 추상의 언어를 선호하며 실체(substance), 원인(cause), 질료(matter) 등의 어휘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적인 차이는 동일한 의식이 연속해서 산출한 두 산물들 사이의 내적이며 실제적인 친근성(affinity)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철학에서 명료한 정의와 명확한 진술을 획득한 사고는 이미 비이성적인 신화적 직관 속에 내재된 것이었다.” F. M. Conford, From Religion to Philosophy, Harper & Row, New York, 1957, v.

29) 관련된 헬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Ατρ κνητον μεγλων ν περασι δεσμν στιν ναρχον παυστον (...) χοτως μπεδον αθι μνει· κρατεργρ νγκη περατος ν δεσμοσιν χει, τμιν μφς ἐέργει (...)

30) KRS에서도 한계의 모호함에 대해 논한다. “파르메니데스가 도입하고 있는 한계라는 관념은 모호하다. 쉽게 생각하자면 이것은 어떤 공간적 한계라고 이해할 만하다. (...) 아마도 한계 안에서라는 것은 결정성(determinacy)에 대해 말하는 다소 은유적인 방식이라 하겠다. 이 구절 다음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존재가 (어떤 시간 또는 어떤 측면에서도) 그것이 지금 현재 존재하는 바와 어떤 차이의 잠재성(potentiality)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KRS, 252).

31)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따라 이 한계자체가 결핍을 불러 오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한계 없는(무한한) 연속성이라는 것이 더 사리에 맞아 보이는 것이다. 사실상 이렇게 생각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사유는 무한성’(실무한, infinite)에 대한 사유가 발달하기 시작하는 중세 이후의 사유이미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의 사유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고대 헬라스적 의미에 더 천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주목해야할 또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파르메니데스가 전체성무한성그리고 유한성이라는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개념의 단초를 여기서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의 유한성과 전체성을 짝짓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제자인 멜리소스는 무한성을 전체성과 짝짓는다. 이런 면에서 멜리소스는 한 단계 나아간 경우라고 하겠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멜리소스가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의 편을 든다. “개별적인 전체가 그렇듯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전체도, 밖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밖에 무언가가 빠져 있는 것은, 빠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전부(pan)가 아니다. 전체와 완전한 것은 전적으로 동일하거나 아니면 본성에 아주 가깝다. 끝을 갖고 있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다. 그런데 끝은 한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파르메니데스가 멜리소스보다 더 잘 말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후자는 무한한 것이 전체라고 말한 반면, 전자는 전체가 한계지워져 있다고, 중앙으로부터 모든 곳으로 똑같이 뻗어나와 있다고 말했으니까.”(DK28A27)

32) 이에 대해서는 콘포드의 단편으로 그가 테아이테토스에서 추출한 것을 참고할 수 있다. “그런 부동의 것은, 전체로서의 그것에 대한 이름이 있음’(to einai)이다”(김인곤 외 2005, 293)

33) 파르메니데스를 유물론자로 파악하는 관점이 코플스톤의 철학사에 나온다. 내가 보기에 코플스톤의 이 주장은 다소 과도한 측면이 있다. “진실은 다음과 같아 보인다. 비록 파르메니데스가 이성과 감각의 차이를 주장하지만, 그러나 그가 그것을 주장하는 것은 관념론적 체계를 수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원적 유물론을 수립하기 위해서인데, 일원적 유물론을 수립하려는 이유는 일원적 유물에서는 변화와 운동이 환상적인 것으로 추방되기 때문이다. 단지 이성만이 실재를 이해할 수 있으나 이성이 이해하는 실재는 물질적이다. 이것은 관념론이 아니라 유물론이다.” 이 언급의 바로 앞에 나오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비록 파르메니데스가 관념론의 기본적인 교의가 될 하나의 차이[이성과 감각의 차이]를 선언하지만, 그에 대해서 마치 그 자신이 관념론자인 것처럼 말하고 싶은 유혹은 물리쳐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알게 되듯이, 파르메니데스의 눈에는 일자가 감성적이고 물질적이라고 상정하는 데에는 매우 충분한 이유가 있다. 따라서 그를 19세기 유형의 객관적 관념론자로 바꾸는 것은 시대착오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변화를 부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일자가 관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사유방식을 따르라는 요구를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방식에 따라 우리가 도달하는 일자를 파르메니데스가 실재하는 사유 자체로 간주했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F. Copleston, 김보현 옮김,그리스-로마 철학사, 철학과 현실사, 1998, pp. 80-81. 코플스톤의 이 논변은 과장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관점 자체가 매우 신선하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겠다. 어쨌든 운동을 부정한다고 해서 관념론자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운동을 인정하는 것이 유물론자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오히려 사태나 사물의 본질과 속성 또는 일종의 관계성 등등이 이념적인 물질성’(ideal materiality)을 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급진적인(radical) 유물론이라 생각된다. 코플스톤이 스테이스 교수의 주장에 반대하여 파르메니데스를 유물론자로 파악하는 다른 논변이 또 있다. Ibid., pp. 83-84.

34) 들뢰즈는 이러한 철학사적 전변을 동일성이 다수화되고 파편화되는 반복의 역량으로 파악한다. “데모크리토스가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존재를 원자들로 파편화했고 다수화했던 것처럼, 반복은 동일성 자체를 파편화한다. 다시 말해 절대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개념 아래에서 사물들이 다수화될 때, 이런 다수화의 결과는 개념이 절대적으로 동일한 사물들로 나뉘어진다는 데 있다. 이 무한한 반복 요소의 위상은 자신의 외부에 놓인 개념이다. 이것은 물질을 통해 실현된다”(DDR, 348).

35) 로고스의 의미는 매우 다기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언급을 참조. “λέγω의 어근은 λέγ-로서 대체로 1. 모으다, 수집하다(최초의 예는 호메로스의 시가에서 나타나고 있다: “Τρωά󰐠 μέν λέξασθαί έϕέστιοι σσοικασιν”: 도시에 사는 모든 트로이 사람들을 모아서 , Homer, Iliad, 2, 125), 2. 세다, 셈하다, 3. 열거, 매거하다, 4. 이야기하다, 말하다 등의 네 가지 주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logos 개념은 이상과 같은 동사 lego의 의미에 상응하여 사용되었다. 따라서 명사로서의 로고스는 collection, counting, reckoning, calculation, account, consideration, reflection, ground, condition, enunciation, catalogue, word, narrative 등의 의미를 지니며 발전하였다.

1. collection: 수집이라는 의미는 주로 복합명사 또는 파생어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παλίλ­λογος(pali-logos: 다시 모음, 다시 거두어 들임, Homer, Iliad, 1, 126), σύλ­λογος(syl­logos: 결합, 회합, 집회, Herodotos, 8, 74와 여러 비극시인들의 작품들), συλ­λογέυς(syl­logeus: 수집가, Polyaen., 2, 34), σπερμο­λογός(spermo­logos: 이삭줍기, Plut., Demetr., 28) .

2. narrative, word, speech, fable, story, conversation, legend: 말해진 것, 허구적이든 실재적인 것이든 어떤 이야기, 어떤 것에 대한 설명, 상황이나 환경에 대한 해명, 소식, 연설, 주고받는 말, 대화 일반, 신탁의 대답, 소문, 보고, 격언적으로 말해진 어떤 것, 언급, 주목, 행위나 사실에 반대되는 단순한 말, 조약, 명령, 쓰여진 작품의 한 단락 등을 의미한다(Homeros, Iliad, 15, 393; Pind., Isthm., 5, 13; Hdt., II, 62; Platon, Prota., 127d; Pin., 단편 180).

3. thing, spoken of, things, matter: 어떠 어떠한 것, 사물이나 사건을 의미하는 경우에도 로고스가 쓰인다: Hdt,. I, 21: “모든 로고스[]를 분명히 먼저 알았기 때문에 ”(σαΦέως προππυσμένος παντα λόγον …), 같은 책, VIII, 65. : “그 로고스[] 외의 다른 것은 말하지 말라”(… μηδένι λλτόν λόγον τούτον επης).”

4. counting, reconing, calculation, account, mention 그리고 새 take account ofmention의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가치, 평가, 명성, 고려, 관심 그리고 생각 등의 관념이 생기게 된다(Hdt., I, 47; Hdt., III, 142; Hdt., I, 62~2).

5. correspondence, relation, proportion, measure: 대응, 비례, 비율, 관계, 적도, 기준(Hdt., VII, 36~3; Hdt., III, 99~2).

6. 14로부터 reflection, ground, condition, thought, cause, reasoning, consideration, true account of things, argument 등의 의미가 일상사와 철학에서 중요하게 사용된다(Soph., Ph., 730; Democritos의 단편 B. 76; Melissos의 단편 B. 8).

7. general principle, reason, cosmic reason, rule, power of speech and thought: 일반적 원리, 이성, 우주 이성, 규칙, 언어와 사유의 힘”(E. Schwyzer, Greich. Grammatik, Handlbch. AW. II. 1(1934), p. 34, 김내균,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 교보문고, 1996, p. 135 재인용).

36) 프리도 릭켄(Friedo Ricken)지음, 김성진 옮김, 고대 그리스 철학, 서광사, 2000, p. 64.

37) 이 단어의 본래 어원은 물론 hermēs(ἑρμς). 이것은 경계석의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해석학과 관련해서 이 말은 직접적으로 말하다’(hermē)의 함축을 가지게 된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우리는 이 후자의 의미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다. herma는 말하기의 그 음성을 원초적인 의미로 가진다. 해석(hermeneuein)이 가지는 이런저런 의미의 역사적 추이에 관한 기초적인 설명은 Richard E. Palmer, Hermeneutics: interpretation theory in Schleiermacher, Dilthey, Heidegger, and Gadamer,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69, chap. 3 참조.

38) 이에 관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직접인용한 부분을 참고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은 그들이 어떠한 것과 마주치든 간에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지(phronēousi) 못하고, 배우고서도 알지(ginōskousin) 못하지만, 자신들이 (안다고) 여긴다(dokeousin).” 여기서 여긴다에 해당하는 앎은 이후 확실한 앎이 아닌 지식, ‘~인 듯한 것에 해당하는 dokein으로 발전한다.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참조. dokeinphronēsis와 대조되기도 하지만 다음의 단편은 이것이 dike와도 대립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가장 믿을 만하다고 여겨지는 자(dokimōtatos)가 알고 고수하는 것은 단지 그럴 듯하게 여겨지는 것들(dokeonta)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디케는 거짓들을 꾸미고 증언하는 자들을 따라가 붙잡을 것이다.”(DK22B28) 여기서 디케는 아직까지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dikaiosyne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dike가 처음으로 올바른 길정의의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 아이스퀼로스에게서라는 것을 감안한다면(Guthrie 2000, 18-21 참조), 헤라클레이토스의 이 언급에서 디케와 도케인은 확실한 길그럴 듯한 길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이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시작되는 doxanoein의 대조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39) 이암블리코스의 간접인용: “인간의 견해들(anthrōpina doxasmata)은 아이들의 장난거리이다”(DK22B70)

40)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든 사물들과 인간에게 합당한 공통’(common)이라는 이 진리를 인식하는데 실패한다. (...) 그들이 인지해야 하는 것은 로고스이며, 이것은 아마도 통합하는 형식이거나 사물들의 질서를 비례적으로 조절하는 방법, 즉 개별적이고 통일된 그것들의 구조화된 평면과 거의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로고스의 테크니컬한 의미는 척도’, ‘계산적 사유’(reckoning), 또는 비율’(proportion)일 것이다. 하지만 비록 로고스가 그런 방식으로 드러나고, 그와 일치되게 말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의 추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공통의 평면 또는 척도에 따르는 배치의 효과(effect of arrangement)는 겉으로 보기에 다양하고 전반적으로 구별된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실재로는, 인간도 그 한 부분으로 속하는 일관된 복합체(coherent complex) 안에서 통합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해는 그 자신의 생명활동에 속하는 적절한 법칙(adequate enactment)을 논리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다. (...) 로고스는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해 매번 세계의 현실적 원소(actual component of things)이며, 여러 방면에서 그것은 우주론적인 제일 요소인 불과 공외연적(co-extensive)이다.”(KRS, 188) KRS는 로고스를 어떤 배치로 파악하는 것을 다소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통적인 플라톤주의와는 멀고 우리의 지금의 논의와 더 가까워 보이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KRS는 또한 이 불이 밀레토스학파의 물이나 공기, 아페이론과 같은 잠재적으로 중립적인 존재(mediator)가 아니라 그 자체로 극단적인 존재(the extreme)라고 한다.(KRS, 200)

여기서는 또한 대중들에 견해에 대한 헤라클레에토스의 귀족적인 경멸이 엿보이는데, 이것은 종종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군중을 경멸하는 태도로 발전한다. 이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계급적 상황이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감으로 현상하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지성(nous)이나 생각(phrēn)을 그들이 갖고 있는가? 그들은 대중의 시인들을 믿고 군중을 선생으로 삼는다. ‘다수의 사람들은 나쁘고, 소수의 사람들이 좋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DK22B104).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의 상황이 플라톤의 경우와 같이 헬라스 민주주의의 쇠퇴기와 겹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에게 nousphronēsis는 몇몇 고귀한 귀족들에게만 가능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결정적으로 대중들은 그러한 것을 설명해도 모르며, 배우고서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로고스를 대하면서 이성적으로가 아니라 매우 감정적으로 대하기 일쑤다. ,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말(logos)에도 흥분하기 십상이다”(DK22B87).

41) 그런데 이러한 로고스적인, 로고스에 기댄 사유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진, 지혜로운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227, DK22B108) 이 말은 로고스 자체나 진리 자체가 일상과 멀리 떨어진 초재적인 위치에 있다고 새겨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헤라클레이토스의 여러 단편들과 충돌할 것이다. 이 말은 현자라면 마땅히 지혜를 구하기 위해 대중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그의 귀족주의적인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42) 이 단어에 대해 KRS는 특별히 주의를 요청한다. “여기서 barbarian souls는 정신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거나 제대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의해 잘못 이끌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KRS 188)

43) 그런데, 이와는 달리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생각(oiēsis)은 신성한 병(hiera noson)이고, 시각은 사람을 속인다는 말을 헤라클레이토스의 것으로 돌린다. 하지만 여기서 ‘oiēsis’는 기원전 4세기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는 말이므로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김인곤외, 20).

44) 하지만 이러한 예지를 습득할 수는 있다. “지혜로운 것은 하나인데, 모든 것들을 통해서 모든 것들을 조종하는(ekybernēse), 예지(gnōmēn)를 숙지하는 것이다”(DK22B41)

45) 이 언급 자체를 가지고 헤라클레이토스와 데카르트를 유비하는 것은 매우 무모한 추론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의 자기자신사려는 독립적인 기체로서의 Cogito와는 거리가 멀고, 로고스, 즉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의 인간을 상정하는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46) 이렇게 지혜를 탐구하는 사람들에 대해 헤라클레이토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philosophoi andres)이라고 지칭한다(DK22B35). 이것이 확실하다면 헤라클레이토스가 ‘philosophos’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이 된다. 하지만 이 말이 플라톤 이후의 의미라고 봐서는 안 된다. 다만 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정도로 새겨야 한다(김인곤 외, 234 24)

47) 두 개의 단편을 이와 관련하여 알아 둘 필요가 있겠다. “나는 나 자신을 탐구했다”(edizēsamēn emeōuton)(DK22B22). “본성(physis)은 스스로를 감추곤(krypthesthai)한다”(DK33B123). 여기서 나 자신본성으로 번역된 자연, physis는 당대의 사유 아래에서는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이 두 단편은 따라서 동일한 것에 대한, physis에 대한 해석의 필요성을 읊은 것이라고 해야 한다.

48) 나는 여기서 자연주의’(naturalism)이라는 말을 현대적인 의미의 물리주의로 보지 않는다. 물리주의는 곧 기계적 설명을 통해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객체의 특성으로 환원하지만,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자연주의는 그러한 환원을 애초부터 고려하지 않으며, 고려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앞서 McClure의 설명과 같이 이들 고대철학자들의 자연이란 신성함의 대상으로서 인간과 그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동일한 physis의 다른 양태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McClure, 113 참조.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가 이런 의미를 지닌다는 것에 대해서는 4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