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행(pedesis)
║방행(Pedesis)[1]
4부: 신유물론의 미래
이 논문의 네 번째 부분이자 결론부에서, 우리는 수행적 유물론의 역사적이고 현대적인 사상가들로부터 도출한 세 가지 일반 테제 또는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수행적 신유물론의 앞으로의 전개를 위해 중심에 놓일 것이다. 그것은 방행적 운동(pedesis), 전진적 과정(ongoing process), 그리고 관계다. ‘모든 것이 물질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것은 ‘존재하는 그것인 바 그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2] 우리에게는 ‘물질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3]는 명제가 있지만, 구유물론과는 다르게 이것은 환원주의적 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모든 것이 환원가능한 어떤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물질이란 근본적으로 불확정적인 수행 또는 운동-중-진행[전진](process-in-motion)이다. 우리는 이 테제를 수행적 유물론에 관한 세 가지 뒤얽힌 테제들의 형식으로 놓을 수 있다.
(1) 물질의 활동 자체는 방행적(pedetic)이거나 불확정성(indeterminacy, 비결정적)으로 특성화된다. 그렇지 않으면 신유물론은 형상과 같은 다른 어떤 것, 즉 결정론적이거나 개연적인 자연법칙, 힘 또는 신에 대한 물질의 활동성이라는 속성화로 되떨어질 것이다.
(2) 물질은 전진적인 반복 과정(ongoing iterative process)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신유물론은 실체-기반 존재론으로 되돌아 가거나, 물질을 합리주의 또는 형식주의와 같은 어떤 것으로 축소할 위험을 안게 된다.
(3) 물질은 완연히 관계적이고 내재적으로 자기-원인적이다. 물질은 단순히 신, 자연 또는 인간의 수동적 효과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은 단순히 능동적 행위자인 것도 아니다. 물질적 관계들은 언제나 비대칭적이다(능동과 수용 둘 다 동시에). 그것은 ‘평평(flat)’하지 않다.
우리는 이 세 가지 테제들로서 수행적 유물론의 핵심적 통찰을 개괄한다고 믿는다. 결론을 맺기 위해 각각의 테제들을 차례로 간략하게 전개해 보자.
방행
수행적 신유물론의 첫 번째 기준은 물질이 방행적(方行的)이라는 것이다. 방행(pedesis는 어근 ped-의 원형인 PIE로부터 오는 것으로, ‘발 foot‘이란 의미를 지닌다)이란 반-자동적 자기-이동(semi-autonomous self-transport)의 운동이다. 걷고, 뛰고, 도약하고, 춤추기 위해 발은 다소 예측불가능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운동에 관한 결정론적, 개연적 또는 우연적 이론들과 반대로, 방행이란 바로 반복적으로 그 즉각적 과거와 연결되지만 그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방행이라는 것은 불규칙하고 부분적으로 예측불가능한 운동이지만, 그것이 제멋대로(random, 우연적)이거나 개연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4] 방행적 운동으로서 물질은 준안정적 구성을 생성할 뿐 아니라, 관건적으로 이러한 구성들이 또한 이어지는 구성들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생성한다. 반대로 우연성(randomness)과 개연성이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예측불가능(unpredictable)하지만, 생성적이지는 않다. 우리가 논의했던 바대로, 우연성은 개연성과 유사하게 선결되고 고정된 개개 영역에 반해 정의내려진다. 그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무한한 수의 우연적으로 움직이는 개별체들(데모크리토스의 원자처럼)은 무한한 결과들 또는 심지어 가능성들의 유한한 영역 안에서 세계들을 실현할 수 있다. 반복들을 가로질러, 그러한 우연적 결과들의 특정 조합들은 대략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고, 마치 반복적으로 구르는 두 개의 육 면의 주사위가 둘들보다 더 많은 일곱들을 생산하는 것처럼, 다른 것들보다 더 높은 또는 낮은 개연성을 반영한다. 하지만 주사위나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들처럼 우연적으로 움직이는 개별체들의 내적 특성들이 상호작용을 가로질러 변하지 않기 때문에,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들의 완전한 영역도 또한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 영역은 간단히 말해서 어떤 절대적, 불변의 한계로 남는다. 왜냐하면 우연적 물질은 수행적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순수하게 우연적인 운동에 관한 바로 그 생각이 전제하는 것은 그것이 사전의 어떤 다른 것과 관계하거나 그것에 의해 촉발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 자체로 아무 것도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 첫 번째 사물/사태임을 전제하는 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내적으로 모순적인 가정에 속하는 판본이다. 즉 무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이 있는 것이다.
우연적 또는 개연적 운동과는 달리, 방행적 운동은 총체적으로 관계적이며 따라서 수행적이고 생성적이다. 전자의 두 가지가, 각 개별체가 그것의 상호작용에 따라 본질적으로 불변한 채 남는 한에서, 예측불가능한 반면, 방행적 운동의 예측불가능성은 정확히 그와 같은 관계적 변화에 기반하는 것이다. 그것에 예측불가능의 특성이 부여되는 것은 바로 간-행 또는 물질 스스로의 상호 영향력이다. 그것의 전진적인 가정을 통해, 물질의 방행적 운동은 상대적으로 고정된 패턴들, 일치들, 그리고 관계들 안으로, 평형성과 견고함의 외관을 주는 동안, 오직 다시 소용돌이치게 되면서만 그리고 새로운 결합 관계들로 들어서기 위해서만, 결합하고 평형을 찾아 간다. 이것이 바로 비결정성[불확정성]이 점진적으로 결정되어 가는 방식이다.[5] 달리 말해, 방행이란 우연도 결정도 개연적인 것도 아니고, 다만 발생적으로 비결정적[불확정적](generatively indeterminate)이다.[119] 따라서 물질은, 오직 그것의 운동이 방행적이거나 관계적으로 즉흥적일 경우에만, 능동적이면서 수용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의 존재와 운동성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설명될 수밖에 없다.
전진적인 반복 과정
두 번째 기준은 만약에 그리고 오직(if and only if) 물질이 반복적, 전진적, 비결정적 과정으로 이해될 때에만, 물질이 수행적이라는 것이다. [6]만약 물질이 그 작동하는 바 또는 움직이는 방식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리고 만약 그 운동들이 – 가장 작은 것에서 가장 큰 시공간적 규모에 이르기까지 – 결코 궁극적으로 또는 충분히 완성되지 않으면, 물질의 본질적 특성은 그것의 끝나지 않는 방행적 재발명일 뿐이다.
그렇다면 확실히 수행적, 방행적 물질의 근본적 특성은 구유물론의 불변하고, 영원한 자연 법칙에 의해 고정되거나 파악될 수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물질이 불변하는 – 따라서 비-수행적인 – 생명력에 의해 가동될 수 있는 것도 분명 아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힘[생명력]은 아마도 창조적일테고, 그 창조성은 언제나 무엇이 그것을 본질적으로 정의하는냐에 따라, 즉 삶/생명, 행위주체, 생명성 [등]에 따라 앞서 제한될 것이다. 수행적 물질의 방행적 운동은, 반대로 결코 양단으로 편향된 것의 의미를 항구적으로 고정하거나 표준화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그것들 자체의 한계들과 경계들을 (재)절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계나 한계도 절대적이지 않은 반면, 이것이 메이야수의 초카오스와 같은 급진적인 우발성이나 무차별성의 세계로 이끌지는 않는다. 부유하는 우주-암석들에는 날개나 다리가 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관계적으로 묶여진 어떤 특유한 행성의 생명역(biosphere)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 그러나 방행적 반복이 충분히 주어지면, 그 바위들은 그와 같은 생명역을 창조하지 않을 수 없고, 사실 그와 같이 날개가 돋고 다리가 난 생명체들이 언젠가는 생겨날 것이다.
그와 같은 변형적 생성은, 오직 모든 ‘개별적’ 반복이 다소간 새롭고 특이하며, 아무 것도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완전하게 결정되거나 분리될 수 없다는 그러한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심지어 가장 미세한 ‘단일’ 전자(electron)의 언제나-부분적으로-특이하고-예측불가능한 수행들도 우주의 ‘전반적인’ 개방-전체성을 재배치하여 새롭게 하는 데 기여한다. 요컨대 수행적 물질은 언제나 근원적으로 뒤얽혀진 상태로 남겨지며, 그러므로 또한 언제나 부분적으로 미결정적이고 즉흥적이다.
더 나아가 어떤 고유하게 미결정적인 목적-없는-과정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물질적 실재 전체를 하나의 연속적 전체성으로 통일하는 기저에 흐르는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 또한 물질은 창조할 수도 또는 존재를 절대적으로 부재하는 어떤 것으로 가져갈 수도 없다. 따라서 수행적 물질은 연속적이지도 않고, 불연속적 실체도 아니며, 어떤 불연속적 과정도 아니다.[7]
만약 물질이 근원적으로 연속적 실체라면, 그것은 동질적인 총체성일 것이다. 물질은, 그 자체 바깥에서 변화나 운동의 가능성이 없는 일자 – 유한한 또는 무한한 통일성 – 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자 바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제논과 파르메니데스가 언젠가 논증했듯이, 모든 운동은 하나의 환영이다. 하지만 만약 물질이 모든 존재를 품고 있는 하나의 전체적 존재라면, 모든 존재를 함축한 그 존재는 그것에 의해 함축된 존재와는 달라야만 할 것이다. 물질적 존재는 따라서 괴델(Gödel) 등이 오래전에 발견했던 일자의 역설에 도달하게 된다.[122] 즉 일자는 그것이 포함하는 것 안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 없는 실체적 연속체는 그 자신을 그 자신의 총체성 안에 포함할 수 없는 총체성의 역설적 개념을 초래한다.
다른 한편, 만약 물질의 운동이 근원적으로 불연속적 실체 또는 과정이라면, 그것들은 근원적으로 시작과 끝을 가져야 하고, 역설적으로 거기에는 아무런 운동이 없을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근원적으로 ‘불연속적인 운동’이란 그러므로 전혀 어떤 운동이 아니다. 예컨대 점 A로부터 B로 근원적으로 불연속적인 도약들을 통해 움직이는 어떤 개별체의 경우, 각각의 도약 사이의 그 시공간적 거리는 비결정적 점들의 무한성에 의해 분할될 것이고, [또한] 그것들[점들] 자신이 비결정적 점들을 따라 분할될 것이며, 이는 무한정 이어진다. 게다가 만약 그것이 각각의 새로운 도약을 가로질러 바로 그 동일한 개별체로 남는다면, 그 개별체는 분명히 수행적으로 구성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 대신에, 우리는 어떤 급진적으로 이산적이고 추상적인 개별체가 A로부터 B까지의 그것의 경로를 따르는 그 장소성(location) 안에서 일련의 변화들을 겪는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장소 안에서 각각의 변화는 동일한 운동의 상이한 면들을 구성하지 않으며, 그것들 사이의 운동이 전혀 없지는 않은 근원적으로 상이한 점들을 구성한다. 근원적으로 불연속적인 운동이란 따라서, 운동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지만, 단지 불연속적, 형식적 또는 논리적 변화일 뿐이다.[8]
관계
세 번째 기준은 물질이 완연하게 관계적이고 내재적으로 자기-촉발적(self-caused, 자기-원인적)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이를테면 신, 자연 또는 인간적 구조들과 같은 다른 비-물질적 행위주체의 단지 수동적 객체로 전락한다. 이것은 신유물론의 철학적 실천을 위한 직접적 결과다. 생기적 신유물론과 부정적 신유물론은 둘 다 관계성 바깥에 (그것이 생명력이든, 물러난 본질이든, 또는 무로부터의 창조든지 간에) 어떤 것을 놓는다. 따라서 그들은 유물론을 물질 그 자체의 본성에 대한 엄격하게 존재론적인 유형의 탐구작업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만약 수행적이고 동력학적 물질 외에 아무 것도 없다면, 바로 그 존재론의 작업은 자체로 언제나 관찰하고, 배제하며 따라서 스스로를 새롭게 구성하는 특정 물질적 실천이어야 한다.
더 나아가 관계는 언제나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정치적 등등으로) 비대칭적이며, 평평하지 않다(not flat). 모든 관계들을 일반화된 주체적 힘들로 평탄화하는 생기론과 모든 관계들을 특정 객체의 물러난 본질들을 특권화함으로써 완전히 제거하는 OOO과는 대조적으로, 수행적 접근은 비대칭성에 주목하며, 따라서 특정 물질적 관계에 속한 독특성(specificity)에 착목한다.[9]
존재론은 단순히 물질의 ‘실재적인 것’을 언제나 뒤로 물리는 인간주의적 구성주의나 실패한 유물론이 아니다. 오히려 물질과 존재론적 실천들은 그 수행의 간단없는 운동 안에서 실재적으로 공-구축(co-constructed)되며 얽혀(entangled)드는 것이다.
따라서 신유물론의 첫 번째 탐구는 존재론적임에 틀림 없지만, 토대적이지는 않다. 즉 그것은 역사적으로 관계적이어야 한다.[10] 다시 말해 신유물론은 영원하고 늘 존재하는 (존재인 하에서의 존재, being qua being) 절대적인 것 또는 존재의 불변적 구조를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다. 그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어떤 수렴적이고, 완연히 물질적인(fully-material) 부분인 바, 주어진 특정 역사적 출현, 그 출현의 실재 조건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명쾌한 것을 원한다. 역사 관념이 그것이다. 여기서 역사란 인간이 포함될 때, 그 인간이, 물질적 독해와 (재)기술의 특정 수행들로서 독해하면서 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수행적 신유물론은 엄격하게 역사적인 바, 현재에 의해 제한되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 – 미래의 가능 존재에 대해 어떠한 존재론적 주장도 하지 않는 – 존재론적 실천(ontological practice) 자체에 관한 영역적 존재론(regional ontology)이다. 수행적 유물론은 형이상학이 아니다. 맑스의 역사에 대한 역진적 독해(retrograde reading)를 따라, 우리는 신유물론이 운동하면서 뒤얽혀지는 물질에 관한 새로운 역사적 존재론을 가능케 하는 인류세(Anthropocene)에, 점증되는 물질적 뒤얽힘을 정확하게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11]
<주석>
[1][역주]아래 ‘방행’에 대한 글은 Christopher N. Gamble, Joshua S. Hanan, Thomas Nail, "What is New Materialism?," Angelaki, vol. 24(6), 2019의 4부 번역이다. 전체 번역문은 웹저널 <호랑이의 도약>에 실려 있다(번역: 박준영). http://tigersprung.org/?p=2494 참조. 이 번역 이후 다소 수정된 내용이 있는데, 본 글에는 그 수정본을 싣는다.
[2]살란스키스가 논한 바에 따르면, “‘거기 있는 것이 물질이다’라는 주장은 더 이상 ‘거기 있는 것이 있다’를 의미하지 않는다”(“Some Figures of Matter” 5).
[3]Ibid.
[4]우리가 여기서 해석하는 논증은 서구 형이상학을 지배해 온, 그리고 변함없이 물질을 고유하게 수동적이고 비-생성적인 것으로 형상화한, 우연성(randomness), 결정론 그리고 개연성이 모두 본질적으로 단일한 수학적이고 통계적인 틀거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진행중인 논문에서 갬블은 수행적 유물론이 그와 같은 틀거리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을 함축하는 방식과 그 비판이 야기하는 것 둘 모두를 보다 충분하게 구체화한다.
[5]이것은 여기서 충분히 답변되지 못하는 주요한 질문이다. 어떻게 물질의 비결정적 흐름들이 준안정적 과정이 되는지에 관한 보다 상세한 이론을 위해서는 Nail, Being and Motion 55–123을 보라. 비결정성[불확정성]이 어떻게 (관계적으로) 해결되는지에 대한 바라드의 일관된 논의는, Meeting the Universe chapters 3, 4, 7, 특히 342–50를 보라.
[6]비결정적이고 반복적 운동에 대한 완전한 이론은 여기서 충분히 전개될 수 없다. Nail, Being and Motion 55–123을 보라. 반복에 대한 바라드의 논의는 “posthumanist performativity,” 그리고 Meeting the Universe chapter 4; 310–17를 보라.
[7]우리는 바라드가 ‘양자 불/연속’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법을 충분히 받아들이는데, 여기서 슬래쉬 기호가 가르는 후자의 단어는 수행적으로 물질이 “충분히 연속성과 함께 불연속적이지도, 마찬가지로 충분히 불연속성과 더불어 연속적이지도 않다는 것,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확실히 그 자체로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Quantum Entanglements and Hauntological Relations of Inheritance,” Derrida Today 3.2 (2010): 240–6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을 채택하지는 않는데, 적어도 우리중 한 사람이 그 슬래쉬가 화이트헤드적인 ‘연속적’ 과정에 의해 옹호된 것과 같은 둘모두/그리고의 논리를 야기함으로써 오독된다는 견해에서 기인한다. 화이트헤드의 이 개념은 완연하게 불연속적인 현실화이며, 수행적 비결정성에 관한 둘다아닌/그러나의 논리라기 보다 각각의 것이 ‘모든 비결정의 증발’로 표시되는 것이다 (Whitehead, Epperson, Quantum Mechanics 135에서 재인용).
[8]지취(Geach)는 이 구절을 러셀과 맥타가르트(McTaggart)의 형식적 변화에 관한 이론들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다. P.T. Geach, God and the Soul (New York: Schocken, 1969) 71–72. 또한 화이트헤드의 변화에 관한 이론은, Alfred North Whitehead, Concept of Nature (Cambridge: Cambridge UP, 1978) 73, 59를 보라.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변화는 오직 “몇몇 결정된 사건들에 일치하는 현실적 계기들 사이의 차이”이며, 따라서 “어떤 현실적 개별체에 변화를 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변화와 운동은 그러므로 현실적 개별체들의 연속과 관련되고, 오직 그들 간의 차이에 의해서만 구성된다. 모든 개별체는 단순히 “그것이 존재하는 바 그것”이며 그 전체 관계들의 집합과 더불어 그 안에 고유한 다른 개별체들로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변화하거나 움직일 수 없다.
[9]이 논점은 보다 많은 공간 그리고 다양한 예화들을 요구한다. Thomas Nail, The Figure of the Migrant (Stanford: Stanford UP, 2015)를 보라.
[10]Choat, “Science, Agency and Ontology.”
[11]이 논문의 저자들은 이 세 가지 기준을 따라 여러 방면에서 신유물론 연구를 해 오고 있다. Nail, Being and Motion; Christopher N. Gamble (MS in progress); Joshua S. Hanan, Rhetorical Economies of Power (MS in progress)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