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변하는 현대철학 용어사전

'잠재적, 잠재성/직관'(from 들뢰즈 사전들)

Nomadia 2019. 7. 3. 12:08

Bergson(1859-1941)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잠재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은 상호적으로 배제적이지만, 함께 충족되는 관계, 즉 실재적인 것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현행적/실재적인 것은 사태(, affairs), 신체들, 신체적으로 혼합된 것들과 개체들의 상태다. 잠재적/실재적인 것은 공속면(a plane of consistency)에서의 비신체적인 사건들 그리고 특이성들이며, 순수 과거, 다시 말해 결코 충분히 현재가 될 수 없는 과거에 속해 있다. 현행적인 것과 닮거나 그것이 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재적인 것은 현행화를 야기하는 능력을 가진다. 하지만 잠재적인 것은 결코 그것의 현행화와 동일시되거나 일치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에 기대어,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이 어떤 가능태(potential)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잠재적인 것에 관한 그의 개념에 영향을 준 다른 철학적 전통은 베르그송이며, 가능태에 대한 그의 비판은 스피노자의 실체일원론의 사유이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그 무한한 속성들에 있어서 차이를 형성하고 언제나 그것의 양태들에서 더욱더 차이화하는 존재의 과정 안에 있는 것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니체의 영원회귀개념이 잠재적인 것의 개념에 영향을 미쳤다.

 

생성을 특성화하는 하나의 방법은 다음과 같은 도식이라 할 수 있다. ‘잠재적/실재적인 것현행적/실재적인 것잠재적/실재적인 것’. 그와 같은 다이아그램이 가리키는 바는 생성이란 하나의 현행적인 것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가는 선형적 과정이 아니라, 어떤 사태들의 현행화된 상태로부터의 움직임이고, 그것은 잠재적/실재적 경향을 띤 동력학적 장을 지나, 새로운 사태의 상태에 속한 이러한 장의 현행화로 향해 간다. 이 도식은 잠재적이고 현행적인 관계들의 가역적 본성을 담고 있다.

 

한편 다른 맥락에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에 대한 연구에서 잠재적인 것을 지속(durée)과 생명의 도약(élan vital)으로 파악했다. 차이와 반복에서는 문제들의 영역과 이념들/구조들로서 잠재적인 것이 이해된다. 이에 따라 여기서는 잠재적인 것의 다기한 현행화는 해들(solutions)로 이해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들뢰즈의 많은 텍스트들을 관통면서 그가 잠재적인 것들로 가리키는 바는 어떤 사건이다. 들뢰즈에 의해 잠재적인 것들에 주어진 여러 성격규정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 즉 잠재적인 것들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각각의 성격규정이 차례로 연루되는 정도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잠재적인 것이 베르그송적인 지속과 생명의 도약이라는 것은 시간성의 구조와 관련된 들뢰즈와 베르그송 사이의 기초적인 일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어떤 현행적 현재는 오직 모든 현재들이 현재로서 그리고 과거로서 구성되기 때문에 지나가는 것이다. 모든 과거인 현재들 안에서 전체 과거는 스스로를 보존하며, 이것은 결코 현재가 되지 못했던 과거(잠재적인 것)을 포함한다.

 

결코 현재화되지 못한 과거(태고의 과거)에 관한 생각은 또한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저작들 속에서도 발견된다. 이 생각이 요구하는 추론은 여러 철학자들을 거쳐 다양하게 전개되지만, 거기에는 그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하는 한 가지가 있다. 즉 현재의 탈-현행화(de-actualisation)를 중시하는 어떤 철학은 과거나 미래의 원천에 닿기 위해 과거(플라톤의 상기의 경우)와 미래(몇몇 묵시록적 종말론의 경우)를 물신화하는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신화를 막기 위해, 태고의 과거와 메시아적 미래라는 관념들(들뢰즈는 순수 과거에 대해 그리고 차이나는 것의 영원회귀에 대해 말하기를 더 선호한다.)은 비결정론적 경향들을 전제하는 어떤 과정에 대한 생각을 옹호해야 한다. 과거는 순수하다고 말해지는데, 이는 그것이 문제들의 자리이고 현행화의 원천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해의 영역은 수들(numbers) 안에 한정되어 있으며, 잠재적 과거와는 달리, 그것은 확장되면서 풍요로워지고, 강도 안에서 빈곤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위대한 예술가는 마치 아무도 현전하지 않았던 시간 안에서인 것처럼, 과거의 어떤 것을 그것의 실재적 존재로 던져 놓을 것이다. 들뢰즈와 베르그송이 지속이란 텅 빈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치하는 한에서, 어떤 내재적으로 차이화하는 실재적인 것의 동력학적 과정이 있게 되는데, 이때 실재적인 것의 본성은 항상 새로운 차이화 안에서 스스로를 현행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의 적합한 이름은 생명의 도약이다.

 

차이와 반복안에서는 칸트주의의 대담한 변형이 있는데, 여기서 들뢰즈는 잠재적인 것을 이념들과 동일시하기 시작한다. 이념은 칸트에게서 경험적인 세계 안에 어떤 예화(instantiations)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사유되어야만 하는 것[요청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요청을 그가 잠재적인 것에 대해 생각할 때 유지한다.(이를테면 사유불가능하지만 사유되어야 하는 것[cogitandum]) 하지만 들뢰즈는 이념들을 모든 능력들의 동명사형태들(기억불가능하지만 기억되어야 하는 것[memorandum], 침묵이지만 말해져야 하는 것[loquendum] 등등)로 만듦으로써 다양화할 때 순수한 칸트주의를 넘어서게 된다. 이념들이 많은 부분에서 구조적이라는 주장은 차이와 반복을 통틀어 들뢰즈가 사용하는 지배적인 구조주의의 어휘로부터 유추되는 것이다. 후기 저작에서 들뢰즈는 이념들이, 그가 잠재적인 것의 본성을 공속면과 관련하여 기술할 때 구조화된다는 이 주장을 자세히 검토한다. 들뢰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잠재적인 것이 현행적인 것의 이중화나 유사성으로 이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초월적인 의미로도 이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문제들은 그것들의 해를 재현하거나 그것과 유사하지 않다는 것이다.

 

잠재적인 특이성들과 현행적인 개체성들을 유비나 유사와 관련하여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들뢰즈가 단순히 동일성의 반복이라고 한 반복의 개념으로 그것들을 환원하게 될 것이다. 잠재적인 것이 어떻게 하나의 사건으로 특성화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들뢰즈의 의미에 관한 논의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동사의 부정법 안에 주어지는 것으로서, 명사나 형용사와 달리 동사가 생성의 존재론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동사들의 부정형에서, 그것들은 잠재적인 것의 때 이른본성을 가장 잘 도입하며, 주체들이나 대상들의 부재로 이해된다. 하지만 그것들은 마찬가지로 이상한 조합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다양체들이 절합되는 과정에서 상호간 무관심하면서도 역동적인 측면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Constantin V. Boundas, ‘virtual/virtuality’,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297-98.


 

들뢰즈는 직관이라는 개념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몇몇 그의 후기 저작들(예컨대 가타리와 함께 쓴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경우)에서, 그것은 내재성의 평면의 요소들 중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다. 개념들이 어떤 평면의 강도의 점들을 정의하는 반면, 직관은 그것의 운동을 가리킨다. 그와 같이 직관은 일반적 의미로 어떤 이념들 또는 심지어 사유의 선들로 간주될 수 있으며, 어떤 특정한 문제와 그것의 사유의 환경들에 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보다 자주 직관을 베르그송으로부터 차용한 어떤 종류의 철학적 방법으로 논하기도 한다. 이것은 들뢰즈가 직관을 어떤 특정한 철학적 테크닉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떤 항구적인 방법의 채택에 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단일한 접근법이란 문제에 대한 전망을 제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적 사유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진정한 방법을 가리킬 때, 그는 자주 베르그송의 철학적 직관(intuition philosophique)의 변형된 판본을 가지고 온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진화는 인간 정신안에서 초래되는 것으로서, 이때 정신은 합리적 탐구를 수행할 수 있게 되고 과학과 실천의 세계를 이끌어내는 관건적인 결정들을 한다. 정신은 우리 삶의 동력학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들을 수행하는데 그렇게 적합하지 않다. 사실상 베르그송에게 우리의 분석적 지성을 철학적 문제들로 전환하는 노고는 우리가 간파하고 추상적으로 이론화하는 몇몇 정적, 물질적 이미지와 관련하여 우리가 고려하는 생생한 실재성을 명백하게 초래한다.

 

베르그송에게 우리의 생생한 실재성은 의식상태의 흐름으로 구성된다. 의식은 본질적으로 시간적이다. 정신적 활동의 진행 중에 누군가의 자기성에 내재한 시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의 연속성과 존속은 우리의 인격성을 구성하며, 그 특이성은 우리의 개체성을 정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단 우리가 우리의 분석적 정신을 생생하고 의식적인 경험으로 바꾸긴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연속하는 순간들과 공간 안에 수립된 이미지들과 관련하여 사고하는데 익숙하다. 이와 같이 철학적인 정확성이란 실재성이 더 이상 그 철학의 개념들로 이론화되지 않기 때문에 상실된다.

 

직관은 베르그송이 분석적 정신의 추상적 경향성을 회피하기 위해 옹호되는 철학적 방법이다. 그는 우리가 경험 안으로 직접진입해야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경험에 동감하고 일치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를 성취하는 방법을 기술한다는 것은 그토록 많은 학문적 주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해하기 그지없다. 가끔 베르그송은 직관을 예술적 감성과 각성 또는 실재성으로부터 떼어낸 어떤 것과 더불어 논하기도 한다. 다른 때에 그는 직관을 순수한 본능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들뢰즈의 해석에 따르면, 직관은 다소 신비하지만 문제틀(problematic)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직관을 해방된 반성적 각성(deleberate reflective awareness) 또는 의지적인 자기의식(willed selfconsciousness), 의식의 작용에 대한 집중되고 직접적인 관심(이것은 사유를 그 자체로 투명하게 간주하기 위해 의식에 의해 의식을 관찰하는 것과는 대조된다.)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직관에 대한 기술은 정신이 그 자체로 부여하는 주의집중으로서의 의식의 직관이라는 베르그송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정신은 그것의 일상적 기능들을 진행하면서, 그것의 작용의 본성과 동시적으로 다소 분별적으로 된다. 만약 우리의 자연적 경향이 공간과 양과 관련하여 사물/사태들을 파악하는 것이라면, 그와 같은 직관의 노고는 성취하기가 극도로 어려울 것임에 틀림 없다. (들뢰즈와 베르그송은 둘 다 여러번 직관은 한계가 없으며, 동물들 그리고 심지어 영혼없는 사물들도 가지고 있는 공감일체감이라는 인간적 조건 너머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한 수단에 대해서는 신비로운 것은 남긴다.)

 

들뢰즈는 유별나게 직관을 선호하는데, 왜냐하면 차이를 재발견하기 위해 경험으로부터 그 경험의 우발적 조건들로 움직이고자 하는 그의 철학적 욕망이 형이상학적 환각 없는 의식의 특이성을 성취하기 위한 어떤 수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실재성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또는 그것을 경험하게 하는) 개념들과 연관하여 생각한다면, 그때 그는 한 종류의 추상으로 다른 종류의 추상을 대체하는 것이 될 것이다. 들뢰즈는 그 대신에 자연적 결합에 따라, ‘라고 불리워지는 전체성의 국면들을 해소하고,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인 개념들에 기대지 않는 의식과 삶의 물질적 국면들을 파악하자고 요구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직관은 경험의 자연적 결합에 따른 개념들을 창조함으로써 이를 성취하도록 한다. 의식의 흐름으로서의 생생한 실재성으로부터 들뢰즈의 직관은 그와 같은 결합을 기억, 능력들, , 희망, 농담들, 지각들 그리고 계산들로 드러낸다. 이처럼 들뢰즈는 구분의 방법으로서의 직관과 초월론적 분석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직관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직관의 정확성과 일반적 적용능력에 대해 베르그송은 가끔 들뢰즈보다 더 많은 의구심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베르그송은 독자들에게 의식의 어떤 직관적 연구의 결과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개념화하고 상징화하는 것이고, 따라서 추상적인 것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하지만 그는 직관일나 무릇 형식적 개념과 상징적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직관에 대해 대화하기 위해 표현불가능한 어떤 다른 것을 가리키는 은유와 암시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비록 그의 언어가 베르그송의 주장을 따르는 듯 암시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의구심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다.

- Cliff Stagoll, ‘intuition’,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13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