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중간에서 만나기>(카렌 바라드)_5장
원문서지: Karen Barad, Meeting the Universe Halfwa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7, 189-222.
번역: 박준영(노마씨, 수유너머 104)
_ ‘< >’ 안의 숫자는 원문의 페이지 숫자임
_ '[ ]'의 숫자는 주석의 숫자임.
_ 주석은 번역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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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실재를 얻다: 기술과학적 실천과 실재의 물질화
"신체는 [...] 직접적으로 정치적 장에 포함된다. 권력관계는 의례를 수행하기 위해, 기호들을 방출하기 위해, 단숨에 그것을 덮치고, 포위공격하며, 표식을 찍고, 훈련시키며, 고문하고, 신체가 임무를 완수하도록 몰아 붙인다. [...] 권력은 단순히 ‘그것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의무나 금지사항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그들을 포위하며, 그들에 의해, 그들을 통해 전달된다. 권력관계는 사람들 자신들이 권력관계에 저항하며 투쟁할 때, 그들 위에서 옥죄는 힘에 저항할 때, 사람들 위에 억압을 행사한다."
-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권력은 신체에 대한 억압의 반복적인 적용을 통해 이전된다. 신체는 힘에 반응하고, 물질적인 배치를 전환함으로써 표명되며 잠재적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신체는 단순히 수용자로 뿐 아니라 전달자 또는 그것을 통해 작동하는 신호 또는 기호의 국지적 원천이다. 신체를 그 효과 그리고 시각적인 기술들의 도구로 만드는 것은 이러한 신체의 민감성이다.[1]
푸코의 언급이 인간 신체를 지칭하는 반면, 나의 주체적 물질은 압전결정체(piezoelectric crystal)다. 압력이 압전결정체에 가해질 때, 그것은 증폭될 수 있고 시각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어떤 전기적 신호를 방출한다(그림 16 위 다이어그램을 보라). 반대로 압전결정체는 전기장에 있을 때 해체를 겪는다. 보다 특수하게는, 만약 어떤 전기 신호가 그 결정체에 적용되면, 그것은 그 신호의 양극성에 따라 확장되거나 응축될 것이다(그림 16 아래 다이어그램 참조). 높은 주파수의 발진 신호(oscillating signals)는 초음파의 확산을 초래하면서 진동하는 결정체를 야기한다. 압전 효과는 피에르 퀴리와 자크 퀴리에 의해 1880년에 최초로 관찰되었다. 오늘날 전달체이자 수용체 둘 모두로서 압전결정체의 이중 기능은 그것을 어떤 특유한 핵심적인 관찰 장치를 위한 주요 요소로 만든다. 이를테면 초음파진단검사를 위한 변환기로 쓰인다.
이 장에서 나는 압전결정체가 어떤 물질적 도구, 관찰 장치의 ‘영혼’이라는 것을, 단순한
<190>
<191>신호체가 아니라 작동하는 담론을 통과하는 장치라는 것을 논증할 것이다.[2] 다수의 장치들에 대해 이런 도구적인 연결을 실험함으로써, 나는 압전 변환기를 물질과 담론 간의 관계를 탐색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한다. 이 관계는 내가 행위적 실재론이라 부르는 철학적 틀의 중심에 있다.
신체들의 물질화
그것의 주체성과 신체의 물질성이라는 주제와 교전하기 위해 권위 있는 텍스트는 주디스 버틀러의 도발적인 책인 『물질이 되는 신체들-‘성’의 담론적 한계에 대하여』(That Matter: On the Discursive Limits of ‘Sex’)인데, 버틀러는 여기서 사회 결정론에 대한 실패한 호소 없이, 담론과 권력의 중요한 구성적 효과를 깨닫는 주체에 관한 사유를 제안한다. 그리고 그녀는 기초적인 또는 자기-명증적인 것으로서 신체의 물질성을 재도입하지 않고 인간 신체의 물질적 본성에 대한 해명을 해 나간다. 버틀러는 젠더 수행성 개념을 발전시키는데, 이는 주체 구성을 신체 물질성의 생산과 연결하는 것이다.
버틀러는 페미니즘 이론 안에서 유통되고 있는 구성 개념에 대한 비판으로 책을 시작하며, 페미니스트들이 “어떤 위치나 표면으로서가 아닌,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물질 개념으로 돌아가자”(9)고 제기한다.
성이 이미 젠더화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 이미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직 성의 ‘물질성’이 강제적으로 생산된다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신체들이 ‘성화된’(sexed) 것으로 물질화되게 하는 제한들은 무엇이며, 우리는 성의 ‘물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즉 신체에 관해 보다 일반적으로 문화적인 이해가능성의 반복적이고 폭력적인 제한으로서 그 신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가?(xi-xii)
물질이 “경계, 고정성 그리고 표면의 효과를 생산하기 위해 거듭 안정화하는 물질화의 과정”(9)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버틀러의 주장은 신체들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이 의미할 수 있는 바에 관한 그것의 재고에 있어서 중요하다. 하지만 버틀러의 물질화에 관한 생각은 여러 가지 중요한 방식에서 한계가 있다. 이 장에서 나는 이러한 한계들 중 몇몇을 음미할 것이고, 태아 초음파검사의 실행이라는 맥락에서 물질, 담론 그리고 수행성에 관한 대안적 이해를 제안할 것이다.[3]
물질의 핵심에 가 닿는 질문은 버틀러의 물질화에 관한 사유가 그녀의 구성적 전환이 부분적으로 숙고하고자 했던 바, 수동-능동, 자연-문화 이원론 너머로 우리를 안내하기에 충분한지 아닌지이다. 부제목인 “‘성’의 담론적 한계에 대하여”가 이미 실마리이므로, <192>버틀러의 물질화에 관한 시간적 해명이 물질을 고정되고 영원히 제약된 개별실체로 뒤바꾸어 놓는 반면, 그것의 시간성은 어떻게 담론이 물질이 되는가라는 측면에서 분석된다.[4] 버틀러의 해명은 물질이 어떻게 물질이 되는지를 설명하는데 실패한다. ‘물질적 한계’, 즉 물질적 강제와 배제, 행위소의 물질적 차원들, 그리고 조절적 실행의 물질적 차원은 무엇인가? 담론적 한계들에만 맞추어지는 물질화에 관한 사유는 어떤 수동적 역할에서 물질성을 암시적으로 복원함으로써 바로 그 이원론을 재기입하지 않는가?
내가 제기하고자 하는 질문은 물질이 버틀러의 물질화에 관한 해명으로 편입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나는 부당하게도 관념론, 언어 일원로 또는 ‘실제적 살(flesh)-과-생생한 신체’를 무시하거나 심지어 지워버린다고 그녀를 비난하는 그런 버틀러에 대한 많은 문제제기와 나의 비판을 신중하게 구별하고 싶다. 그녀가 복잡한 물질에 대한 주제를 단순한 담론의 문제로 붕괴시킨다느니, 신체가 단어로부터 구성된다든지, 또는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방법은 재의미화 뿐이라는 식으로 억측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버틀러의 작업에 대한 엄청난 오해일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버틀러는 실제적 살-과-생상한 신체들의 물질화의 몇몇 담론적 차원에 관한 통찰력 있고 강력한 분석을 정말로 우리에게 제공한다. 나의 논점은 버틀러가 제안하는 물질화의 분석은 비판적 구성요소들을 빠트린다는 것이다.
그 자신의 예외성을 수립하는 버틀러의 분석은 그 자체로는 치명적인 흠결이 아니다. 반대로 예외성의 본성에 관한 버틀러 자신의 논법에 따르면, 그것은 필수적일 뿐 아니라, 생산적이며, 특히 그것의 불안정성과 재절합을 위한 결과적인 유효성에서 그러하다. 그럼에도 명백한 질문은 물질의 수동성을 거스르기 위해 선들을 다시 그리는 것, 새로운 절단의 수립이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의 필수적인 포기를 초래하는지 아닌지, 또는 물질에 관한 확장된 사유가 제공되는지, 그래서 그것이 생산적인 전유와 그녀 이론의 작업을 수립할 수 있는지 어떤지이다. 즉, 물질의 특정 특성의 배제는 물질을 수행적으로 분석하기의 구성적 제한인가? 이것은 이를테면 만약 물질 자체가 ‘힘의 은폐된 결과’라면, 물질적 강제성을 고려하는 방식은 명백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물질의 실체적 특성에 관한 몇몇 고정된 의미는 물질이 과정을 구속한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도록 요청하지 않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만약 우리의 존재론적 환영으로부터 우리를 일깨우는 것이 이 많은 작업을 취한다면, 이러한 성취를 꺽기 위해 위협하는 물질적 구속들에 대한 어떤 지시체인가?
체현의 기술
버틀러가 그녀의 물질화 개념을 설명하는 『물질이 되는 신체』의 절에서, 그녀는 젠더화된 주체 되기의 반복적 과정을 시작하는 갓 태어난 아기 – 또는 초음파 기술을 사용해서 태어나기 전의 태아 - 에 관한 의학적 설명의 예를 제시한다.
(초음파 홀로그램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갓난아기가 ‘그것’에서 ‘그녀’ 또는 ‘그’로 이동하면서, 그 명칭에 따라 젠더적 호명(interpellation)을 통해 언어와 친근감의 영역 안에서 양육됨으로써 여자 아이는 ‘여자아이로 된다’(girled)는 의학적 설명을 고려해 보자. 그러나 여자 아이의 ‘여자아이가 됨’(girling)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호명을 수립하는 과정은 이러한 자연화된 효과를 강화하거나 그것과 겨루면서 다양한 권위에 의해, 그리고 다양한 시간적 간격을 통과하여 반복된다. 이 명칭부여는 일련의 경계를 세우고, 어떤 이름에 대한 깨우침을 반복한다(7-8).
그러나 초음파 기술을 통한 젠더 호명의 괄호쳐진 포함관계가 (궁극적으로) 물질화에 관한 숙고(와 호명에 관한 숙고)에서 정말로 평범하고, 너무나 하찮아서 더 이상의 분석이 요구되지 않는가? 이러한 잠재적인 간과, ‘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에 의해 포착되는 중요한 차이들의 즉각적인 해소는 단순히 합당한 물질적 제한들을 부가함으로써 수정될 수 있는가? 또는 바로 그 담론적 해명이 분석을 불러 일으키는 물질적 제한들의 일단의 개정을 요청하는 것, 또는 여기서 배제되는 것에 관한 재작업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페미니즘적 분석이 확실히 한 것에 따르면, 초음파 기술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특수한 실천이며, 담론적이고 물질적인 요소들을 포함하는데, 이는 상이한 신체들과 생명체에 상이한 영향을 준다. 앨리스 아담스(Alice Adams, 1994)가 언급한 바에 따르면, “의학적 해명 안에서 엄마-태아 관계의 재현물들은 경제적일 뿐 아니라 정보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교환관계에 맞추어 읽혀져야 한다”(128). 예컨대 그와 같은 기술에 대한 차이 나는 접근의 경제적 한계 너머에는 접근하는 사람,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러지 않는 사람에 대한 차이 나는 영향에 관한 문제가 있다. 디온 파쿠하(Dion Farquhar, 1996)는 다음과 같이 쓴다.
최근 몇 년간 의사들, 윤리학자들 그리고 법학자들이, 병이 들거나 장애를 가진 아기의 출산 후 형사적이거나 민사적인 범죄를 부과하기 위해 태아기 손상에 대해 임산부에게 책임을 지우고, 임산부들의 행위를 제한하며, <194>의학적이거나 외과적 과정들을 강제하려는 광범위한 시도들이 목격된다. [...] 이는 그들에게 강요되는 바로서 표면상으로는 심각한 손상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개입들은 어머니를 소아과적 사례와 유비적으로 비교되는 올바르게-양육되는 태아와 관련된 단순한 물질적 환경으로 취급한다.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자면, 상대적으로 권리가 박탈된 임산부들은 유색인종으로서, 약물과다일 경우 이들은 그 원칙적인 자원들 중 하나 – 인종화된 빈곤을 악화시키는 조건들 - 로부터 사회적 개선의 증상적 이전 안에서 모든 여성 신체의 도덕적 상태 규범에 관한 분명한 증표가 된다(170).
초음파 홀로그램의 물질적이고 담론적인 차원들은 시간 안에서 그리고 공간 안에서 다양하다. 음파 홀로그램은 단순히 신체의 영역을 전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리정치학적, 경제적, 그리고 역사적 사실들 또한 전사한다. 테레사 에버트(Teresa Ebert, 1996)는 젠더 호명이 관련된 생산관계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의를 준다.
만약 우리가 산업화된 서구의 중상 계급의 특권적 경계들 너머로 이동한다면, [...] 그래서 국제적인 노동 분할 안에서 – 특히 인도의 빈곤 계급 사이에서 - ‘여자아이로 됨’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본다면, 이러한 사실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분명하다. 여기서 태아의 [...] ‘의학적 호명’은 특히 음파 홀로그램의 사용을 통해, 담론 안에서 뿐만 아니라 노동의 젠더적 분할 과 사회적 자원에 대한 불평등한 접근 안에서 즉각적으로 ‘여자아이로 되기’에 태아를 위치 지운다. ‘여자아이로 된’ 태아의 약 60%는 낙태되거나 태어나자마자 살해되는데 [...] 왜냐하면 가족들이 그들을 키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개체들이 반복적으로 ‘여자아이로 되’는 인용 행위들, 의례들 그리고 ‘수행적인 것들’은 [...] 담론 행위일 뿐 아니라 경제적 실철이기도 하다.(360)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발전에 관한 페미니즘적 분석은 물질적일 뿐 아니라 물질화 과정에서 중요한 담론적인 요인들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버틀러가 확실히 이를 부인하는 반면, 그녀의 분석은 우리에게 물질적 강제들, 행위소의 물질적 차원들 그리고 ‘여자아이가 됨’이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상황과는 다른 초음파 기술을 통해 태아의 젠더 호명을 구성하는 바, 규범적 실천의 물질적 차원들을 사유하는 방식에 대한 어떤 통찰을 준다.
보어의 인식론적 틀
재현주의와 뉴턴 물리학은 17세기에 뿌리 박고 있다.[5] 언어가 인식하는 정신에 대해 실재의 유사상(homologous picture)을 전달하는 어떤 투명한 매개체라는 가정은 그것과 동등한 것을 <195> 고분고분한 발견의 촉진물, 세계를 응시하는 투명하고 왜곡시키지 않는 렌즈로 관찰에서 취하는 과학 이론에서 발견한다. 단어들이 기술들(descriptions) - 실재의 재현물들 –을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관찰들은 관찰-독립적인 실재의 선재하는 속성들을 드러낸다. 20세기에 언어의 재현적이거나 모방적 위상과 관찰 과정의 비결정성(inconsequentiality) 둘 모두는 의심스러워졌다.
나는 나의 행위적 실재론 개념을 처음 표명했던 그 자리인 의사 닐스 보어의 연구로 돌아 간다. 양자 물리학의 일관된 해석을 위한 보어의 연구는 그를 과학 탐구의 본성에 대한 재현주의적 가설들에 도전하는 보다 일반적인 인식론적 고려들로 이끌었다. 궁극적으로 보어는 과학적 실천의 원-수행적 사유로 이해되는 다소 논쟁적인 것을 제안했다. 그의 20세기 초 인식론적 탐구들은 당대적으로 중요한 주제들에 초점을 맞춘다. 즉 (1) 기술적 개념들과 물질적 장치들 간의 연결, (2) ‘관찰 객체’의 분리불가능성과 ‘관찰의 행위소들’, (3) 특유한 물질적이고 개념적인 인식의 실천들을 통한 관찰 객체와 관찰의 행위소들의 출현과 공-구성(co-constitution), (4) 물질적이고 개념적인 강제들과 배제들의 상호의존성, (5) 객관적 지식을 위한 물질적 조건들, 그리고 (6) 인과성 개념의 재형성. 보어와 버틀러의 통찰들을 그들이 함께 산출하는 서로간의 공명과 불협화음의 패턴을 통해 회절적으로 읽는 것은 당면한 문제를 유용하게 해명한다.[6]
측정 과정에 관한 보어의 신중한 분석은 뉴턴적 틀과 관찰의 투명성에 관한 그것의 생각을 지지할 필요가 있는 두 가지 함축적인 가설들이 흠결이 있다는 결론으로 그를 이끌었다. 즉 (1) 세계가 개별적으로 결정되는 경계들과 그것의 잘 정의된 값들이 실험 행위의 특수성으로부터 독립적인 의미를 가진 추상적인 보편 개념들에 의해 재현될 수 있는 속성들로 구성된다는 것, 그리고 (2) 측정은 획득된 속성들의 값이 관찰의 행위소들로부터 분리된 객체들의 측정 이전 속성으로 적합하게 할당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연속적인 결정가능한 상호작용을 포함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이 가정들은 재현주의(단어들과 사물들의 독립적으로 결정된 실존) 에 대한 믿음, (세계가 개별적으로 결정된 경계들과 속성들을 가진 개별적 실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개체주의 형이상학, 그리고 (측정이 측정하는 행위소들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들의 속성의 선재하는 값을 드러내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의 내적 분리불가능성을 이끌어 낸다.
<196>이러한 뉴턴적 가설들과 대조적으로 보어는 이론적 개념들은 그것들의 측정을 위해 요청되는 환경에 의해 정의된다고 논했다. 즉 개념들은 특수한 물질적 배치라는 것이다.[7]이것은 객체와 관찰의 행위소들을 차이화하는 명백한 방식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거기에는 측정 상호작용 상의 경험적으로 정당화 가능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객체와 관찰의 행위소들 간에 그 어떤 고유한 절단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측정된 값들은 관찰-독립적인 객체들에서 기인할 수 없다. 사실상 보어는 관찰-독립적인 객체들이 잘 정의된 고유한 속성들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결론맺는다.[8]
보어는 그의 포스트-뉴턴적 틀을 ‘양자 전체성’ 또는 분리불가능성, 즉 객체와 관찰의 행위소 간의 고유한 구별의 결여에 기반하여 구성한다. 그는 ‘현상’이라는 말을 ‘전체성’의 특정한 사례를 지시하기 위한 어떤 매우 특수한 의미로 사용한다. “고전 물리학의 범역 안에서, 객체아 장치 간의 상호작용은 무시될 수 있거나, 만약 필요하다면, 보충될 수 있는 반면, 양자 물리학에서 이러한 상호작용은 현상의 분리불가능한 부분을 형성한다. 따라서 적합한 양자 현상에 관한 분명한 해명은 원칙적으로 실험 배치물들의 모든 관련 특질들의 기술을 포함한다”(Bohr 1963c, 4. 강조는 필자).[9]
측정 과정에서 개념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의 상호뒤얽힘과 관련된 보어의 통찰은 그의 인식론적 틀에 중심적이다. 물리적 장치는 개념적인 주체-객체 구분을 표시한다. 즉 물리적이고 개념적인 장치들은 비이원론적인 전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술적 개념들은 특정 물리적 장치들의 참조에 의해 그들의 의미를 획득하며, 다음으로 주체와 관찰의 행위소 간의 구성적 절단의 정립을 표시한다. 예컨대 고정된 부분들로 이루어진 기구들은 우리가 ‘위치’(position) 개념으로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도록 요청된다. 하지만 그 어떤 장치들도, 이와 같은 측정장치가 있는 동안에는 의미화되는 것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운동량’과 같은 다른 개념들을 배제한다. 왜냐하면 이 다른 변항들은 정의를 위해 가동적 부분들로 이루어진 어떤 기구들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물리적이고 개념적인 강제들과 배제는 공-구성적이다.
관찰의 행위소들로부터 객체를 윤곽짓는 그 어떤 본질적인 절단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어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관찰 개념에 귀속시켜야 하는 의미란, 만약 있다면 무엇인가? 보어는 “실험을 따라 우리는 현상들의 재생산에 필요한 조건들을 진술하는 명백한 방식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바, 어떤 사건을 단순히 이해한다”고 주장한다.[10] 이것은 그 실험이 객체아 관찰의 행위소들 간의 구성적 절단을 도입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하다.[11] 다시 말해, <197>뉴턴적 세계관과 대조적으로 보어는 그 어떤 고유한 구별도 측정 과정에 선재하지 않는다고 논하는 것이며, 일련의 특정한 고전적 변항들을 정의하기 위해, 다른 동등하게 본질적인 변항들의 배제를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제공하면서, 모든 측정은 장치의 어떤 특유한 선택을 포함한다는 것이고, 이에 따라 객체를 관찰의 행위소로부터 윤곽짓는 어떤 특유한 구성된 절단을 체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유한 구성된 절단은 어떤 주어진 맥락을 위해서만 모호함을 해결한다. 그것은 전체성의 특유한 사례(즉 현상)를 표시하면서 그 부분이 된다.
특히 그의 후기 저작들에서, 보어는 양자 역학적 측정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객체와 관찰의 행위소의 분리불가능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아마도 ‘객관적’이라는 말로써 측정이 독립적인 객체들의 고유한 속성들을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어는 즉각적으로 객관성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것을 재공식화한다. 보어에게 객관성이란 “실험 조건들을 정의하는 물체들에 남겨진 – 사진 건판 위의 흔적들처럼 - ‘항구적인 흔적들’”의 문제이다(Bohr 1963c, 3). 객관성은 물체들에 대한 지칭 안에서 정의되며 우리가 보았던대로, 지칭은 개념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물체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명백하게도 보어의 객관성이라는 개념은 객체와 관찰 행위소 간의 어떤 고유한 구별에 귀속되지 않으며, 관찰자를 독립적으로 표시하는 뉴턴적인 객관성의 의미와 완연하게 대조되어 정립된다.[12]
질문은 남아 있다. 어떤 특유한 객관적 속성의 지시체는 무엇인가? 객체와 장치 간의 그 어떤 고유한 구별도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그 속성은 추상적 객체든 추상화된 측정 도구든 어디에도 의미있게 귀속될 수 없다. 즉 주어진 실험에서 측정된 양은 관찰-독립적인 객체에 속한 속성의 값이 아니고, 측정 행위에 의해 만들어진 순수하게 인위적인 값도 아니다(이것들은 ‘측정’이라는 단어의 어떤 감각적 의미를 잘못 전달한다). 나의 독해는 현상들이 물리적-개념적(물질-담론적) 그것의 명백한 해명이 ‘실험적 배치의 모든 관련된 특질의 기술’을 요청하는 바, 간-행임을 상기한다면, 측정된 속성들은 현상들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나는 신조어인 ‘간-행’을 현상들 내부에서 객체와 관찰의 행위소의 상호 구성을 의미하기 위해 도입한다(이와 대조적으로 ‘상호행위’는 구별되는 개별실체들의 선행적 실존을 가정한다). 특히 차이나는 행위소들(‘구별되는 개별실체들’)은 얽힌채로 있다.[13]
뉴턴 물리학이 그것의 <198>어떤 하나의 순간에 두 개의 특유한 변항들의 동시적인 명시(specification)에 기반하여, 엄격한 결정론, 즉 모든 시간 동안 어떤 체계의 모든 물리적 상태들을 예측하고 회고적으로 추론하는 경탄할 만한 능력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반면, 보어의 일반 인식론적 틀은 그와 같은 인과성에 관한 이해의 급진적이 개정을 제안한다.[14] 그는 장치로부터 객체의 분리불가능성은 “인가성에 관한 고전적 관념의 궁극적인 폐기의 필요성과 물리적 실재의 문제를 향한 우리의 태도의 급진적인 개정을 [...] 초래한다”고 설명한다(Bohr 1963 b, 59-60). 그의 분석이 그를 인과성에 관한 고전적 관념, 즉 결정론을 폐기하도록 이끈다고 주장하지만, 보어는 이것이 전반적인 무질서, 무법칙성 또는 원인-결과 관계의 철저한 거부를 초래한다고 추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관계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의지의 느낌과 인과성의 요청은 인식 문제의 핵심을 형성하는 주체와 객체 관계에서 똑같이 불가결하다”(Bohr 1963a, 117). 요컨대 그는 인과성에 관한 통상적인 이원론적 사유의 양극단 – 자유와 결정론 –을 거부하며 어떤 세 번째 가능성을 제안한다.
보어의 인식론적 틀은 어떤 중요한 경향 안에서 과학적 지식의 고전적인 대응론 또는 반사론으로부터 이탈한다. 예컨대 20세기 초부터 겉보기에 모순되는 증거를 보고했던 실험자들에 의해 수행된 관찰에서 유래하는 파동-입자 이중성 역설을 생각해 보자. 즉 어떤 특정한 실험적 환경 아래에서, 빛은 입자와 유사한 속성을 드러내고, 실험적으로 이것과 양립 불가능한 일련의 환경에서 빛은 파동 같은 속성을 드러낸다. 이 상황은 고전적 실재론의 사고방식에게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빛의 진정한 존재론적 본성이 의문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빛은 파동 또는 입자 중 하나이지, 둘 모두일 수는 없는 것이다. 보어는 파동-입자 이중성 역설을 다음과 같이 해결한다. ‘파동’과 ‘입자’는 상호배제적인 상이한 현상들을 지칭하는 고전적인 기술적 개념들이지 독립적인 물리적 객체들이 아니다. 그는 이것이 양자 이론을 비일관성으로부터 구출했다고 강조했는데, 왜냐하면 상호 배제적인 실험적 배치들이 요청되므로 입자와 파동 행위들을 동시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다 현대적인 맥락에서 논점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보어의 일반적인 인식론적 틀에 따라, 지칭성(referentiality)이 재개념화되어야 한다. 즉 지시체는 관찰-독립적인 객체가 아니라 어떤 현상이다. 지칭성에 있어서 이러한 전환은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이다. 다시 말해 객관적 지식을 위한 조건은 지시체가 (관찰-독립적인 객체가 아니라) 현상이라는 것이다.
장치들을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물질화하는 실천으로
"훈육은 개인을 ‘만든다.’ 개인들을 객체이자 그 실행의 도구 둘 모두로 간주하는 것은 권력의 특수한 기술(technique)이다. [...] 훈육의 실행은 관찰이라는 수단에 의해 강제하는 메커니즘을 전제한다.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들 장치는 권력의 효과들을 촉진하며, 역으로 강제의 수단들은 적용되는 개인들을 명확하게 가시적으로 만든다."
-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보어적인 의미에서 장치들은 수동적인 관찰 도구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현상들의 (부분이자) 생산장치다. 하지만 보어는 장치에 관한 완전한 해명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장치’를 구성하는 것이 특수한 관찰 행위들 내부에서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장치와 객체 간의 본질적인 구분의 부재에 초점을 맞추면서, 보어는 장치들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오직 ‘내부’ 경계만을 수립하며 ‘외부’ 경계는 수립하지 않는다. 예컨대 만약 컴퓨터 인터페이스가 어떤 주어진 도구에 연결된다면, 컴퓨터는 장치의 부분인가? 컴퓨터에 연결된 프린터는 장치의 일부인가? 프린터에 공급되는 종이는? 종이를 공급하는 사람은? 종이 위의 표시들을 읽은 사람은 어떠한가? 실험의 중요성을 판단하고 기금을 지원할지 하지 않을지를 지정하는 과학 공동체는 어떠한가? 다른 것을 배제한 특정 개념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장치의 한계를 정확히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보어의 객관성에 관한 논의에서 중심 논점은 ‘명확한 소통’의 가능성인데, 이는 ‘실험 조건들을 정의하는’ 그리고 다른 것들의 배제에 대하여 특유한 개념들을 체현하는 ‘물체들[신체들]’과 관련하여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과학적 실천의 사회적 본성에 관한 보어의 인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의미를 만드는 것은 복잡한 담론적이고 물질적인 실천들의 상호관계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이러한 복잡성을 알게하는 장치에 관한 생각의 설명이다.[15]
인식의 사회적 본성을 이론화하는 것은 미셸 푸코에 의해 채택된 기획이다. 보어와 같이 푸코는 이해가능성의 조건과 ‘장치들’에 체현된 생산적이고 강제적인 차원에 관심을 가졌다. 푸코와 보어의 장치에 관한 분석을 물리적-개념적인 것에서부터 <200>보다 일반적인 물질-담론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상호 독해하는 것은 장치에 관한 보다 풍부한 전반적인 해명을 제공한다. 또한 이것은 푸코의 이론에 관한 더 진전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인데, 이는 자연 과학을 포함하는 영역과 인간 뿐 아니라 비인간의 물질화에 대한 해명으로 확장한다. 또한 이는 그것이 생산하는 것을 돕는 바, 객체와 주체로부터 장치의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분리불가능성을 심각하게 여기며, 물질, 담론, 행위소, 인과성, 공간과 시간에 관한 새로운 인해를 산출한다. 중요하게도 이러한 회절적 독해는 담론적 실천이 물질적 현상들과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생산한다.[16]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그가 ‘관찰 장치’, ‘생산 장치’ 그리고 ‘훈육 장치’라고 부르는 것의 확산이 18세기의 새로운 기술의 발달과 관련된다고 설명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새로운 인간학에 따른 관찰 도구인 판옵티콘과 유순한 신체의 형성과 훈육을 통한 권력의 분산에 있어서 그것의 역할이다.[17] 이러한 심문과 개체화의 기술을 통해, 이 ‘신체에 관한 정치적 기술’, 어떤 새로운 ‘권력의 미시물리학’이 등장한다. 즉 권력은 역사적으로 개인에 가해지는 외적 힘으로서의 활동에서 그 보다 현대적인 형태로 진화하며, 여기서 권력은 개별 신체들을 통해 작동된다. 훈육 권력은 신체를 질서 잡고, 움직임을 고정하고 강제한다. 푸코는 “이러한 기술은 분산되어 있으며, 드물게 지속적, 체계적인 담론 안에서 형성된다. 그리고 이는 자주 파편적으로 구성되며, 일련의 이질적인 도구나 수단들을 제공한다. 그 결과의 일관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어떤 여러 종류의 설치물일 뿐이다”(Foucault 1977, 26). 훈육 권력은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 작동된다. 그것은 “장치들을 확장하고 무엇보다 그것들이 권력의 효과를 가장 미세하고 가장 멀리 떨어진 요소들에까지 미치도록 만들면서, 함께 연결한다”(216).
훈육 실행과 ‘권력의 미시물리학’에 관한 푸코의 통찰은 권력과 지식이 일반적으로 이론화되는 방식을 대체했다. 하지만 담론적 실천과 물질적 현상 간의 관계의 정확한 본성을 포함하여 푸코가 표명하지 않은 지식-권력의 관건적 특성들, 즉 모든 신체들(인간 뿐만 아니라 비인간 그리고 이러한 구별이 만들어지는 실행들이 계보학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신체들의 물질화를 고려하는 물질화의 역동적이고 행위적(agential)인 개념, 그리고 (18세기적 실행에 적합하지 현대에는 맞지 않는) 푸코의 생체권력 개념에 의해 예견되는 것보다 현대 기술과학적 실천이 신체들, 권력, 지식 그리고 그것들의 연결의 더욱 더 심오하고, 편재적이며 근원적인 재배치를 위해 제공하는 방식들이 있다.
<201>나는 이 논점에 대해 몇 가지 언급을 하고 싶다. 비록 푸코가 지식의 객체들(주체들)이 선재하지 않고, 오직 담론적 실천 내부에서만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는 장치들과 객체들(주체들)의 분리불가능성을 명확하게 분석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푸코는 현상 개념과 유사한 어떤 것도 또는 그것의 (인식론적일 뿐 아니라 존재론적으로도) 중요한 결과도 제안하지 않는다. 이러한 통찰은 물질적 실천과 ‘권력의 미시물리학’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어떤 중요한 기여를 하는가? 그리고 20세기와 21세기에 권력의 본성과 그것의 동역학은 어떠한가?[18] 도나 해러웨이가 『겸손한-목격자』에서 강조한 바에 따르면, 기술과학적 실천은 “기술적, 조직적, 정치적, 경제적, 몽상적, 그리고 텍스적인 것”의 내파보다 “건강의 꿈들, 퇴락 그리고 조직적 효율성 또한 생산과 재생산의 병리학”에 오히려 덜 연루된다(Haraway 1997, 12). 해러웨이는 전자의 돌연변이 시공간 체제를, 푸코의 ‘생체권력’을 규정하는 시간성에 관한 발달적 의미와 대조적으로 ‘기술생체권력’이라 이름 붙인다.
이런 취지에서 판옵티콘이 18세기에 관찰 기술의 예시인 반면, 초음파 기술은 특유하게 신랄한 관찰의 현대적 장치을 위해 만들어지며, 내가 관련된 몇몇 주제들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견해로부터이다. 의미있게도 산부인과 초음파 진단에서 압전 변환기는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생명,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자율적인 것과 독립적인 것, 자기와 타자 뿐만 아니라 내파와 여타 시공간 재배치 간의 경계들을 포함하여) 경계들을 형성하고 재형성하기 위한 보철 장치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기서 뿐 아니라 컴퓨터 인터페이스(간-면intra-face[인트라-페이스])에서도 보어와 푸코의 통찰을 상호간 읽는데 도움을 준다.
초음파 파동은 원래 1차 세계 대전 당시 잠수함을 탐지하기 위한 수중음파탐지기(SONAR)에 사용되었다. 2차 세계 대전 동안 음향 기술의 더 진전된 발전들은 의학 분야에 활용하여 도움을 줄 중요한 진보를 이끌었다. 초음파 기술의 산부인과적 적용은 1950년대 후반에 생겨났다. 1960년대 중반까지 산부인과 초음파 기술은 의학 공동체 내에 너른 지지를 얻었다. 10년 뒤 초음파는 산부인과적 수행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제는 가족 사진 앨범에 태어나기 전의 태아 초음파 사진을 발견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초음파 이미지들의 생산과 해석이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이 둘은 모두 고도의 전문화된 지식 형태다. 사실상 초음파 기술을 사용하는 오진의 빈도수는 의사가 사용할 때조차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며, <202>의학 공동체는 최근 그 기술을 사용하기 위한 필수 자격의 활용가능성에 대해 논쟁 중이다. 초음파 진단에 대한 교재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훈련을 허가 받은 개인은 [...] 다음과 같은 분야에서 고등교육을 받아야 한다. 의료 윤리학, 의료 용어론, 임상 해부학과 생리학, 의학 지도와 행정, 간호절차, 일반 인체 해부학과 기초 물리학 [...] 꼭 필요할 때 표준 과정을 즉각 시행할 수 있는 능력 [...] 필요할 때 규범적 기술들을 벗어나 해당 영역을 갱신하여 유지할 새롭고 더 좋은 기술을 발전시킬 능력은 초음파검사자와 의사의 책임이기도 하다. (Hagen-Ansert 1983, 618)
일설에 압전 변환기는 신체에 대한 기계적 인터페이스이다. 변환기는 초음파 파동의 원자료와 수신자 둘 모두이다. 음파가 변환기에 부딪히는 상이한 신체 부위로부터 반사될 때, 그것들은 시각적으로 전개되는 전기 신호들로 변환된다. 다양한 요인들이 스크린에 나오는 이미지에 영향을 준다. 상이한 종류의 세포는 상이한 음향 저항도를 가지며, 전파의 반사는 접촉면 기하학에 따라 그리고 접촉면을 구성하는 물질들 간의 저항에서의 차이들에 따라 다양화된다. 더 나아가 전파 해상도는 주파수의 기능이며, 상이한 적용들은 상이한 변환기를 요청한다. 각 압전 변환기는 샘플의 두께와 회집체 안의 변환기 요소의 장치 등등의 여타 요인들에 의존한다. ‘좋은’ 초음파 이미지 생산은 사진을 찍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또한 그것을 읽어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19]
보어의 인식론을 가져오는 것은 압전 변환기의 개념 규정을 어떤 이념화된 관찰 도구의 구성요소로서 확증하는 것이다. 즉 변환기는 순수하게 태아의 경우에만 허용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제한을 부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것이 이미지화하는 신체를 생산하는 것을 도우며, 그 신체의 부분이다. 즉 컴퓨터 스크린 위의 흔적들(초음파 이미지들, 즉 음파적 회절 패턴들은 전기적 이미지로 번역된다)은 ‘객체’(보통 태아로 지칭되는 바)와 ‘관찰 행위소들’ 간의 간-행 안에서 구성되는 현상을 지시한다. 중요하게도 관찰되는 속성들에 대한 객관적 지시체는 현상이며, 어떤 추정적으로 선재하는 결정론적으로 제한되고 속성이 부여된 객체가 아니다(이미지화된 객체적 존재를 지칭하는 ‘태아’라는 용어의 통상적 용법을 겨루고 캐묻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고 증명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객관적 지시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정 속성을 부여받는 지시체는 <203> 정치적이고 과학적인 이유들로, 인식론 뿐 아니라 존재론을 위해 물질화한다. 관찰의 객체를 객관적 지시체로 오해하는 것은 특정 정치적 이익에 활용될수 있으며, 이는 특히 과학적 실천이 얼마나 반복되는지에 따른다. ‘태아’라는 어휘가 문제가 되는 현상을 지시하기 위해 새로이 의미화되는 건 어떨까?)
하지만 문제가 되는 현상의 복잡한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치들과 그것들이 생산되는 과정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예컨대 장치가 변환기와 똑같이 취급하는 것, 그리고 변환기를 선반 위에 놓인 몇몇 미리 만들어진 객체 그리고 필요할 때면 언제나 누구에게나 유용한 객체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다. 장치들은 선재하거나 고정된 개별실체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재배치, 재절합 그리고 여타 재형성에 항구적으로 열린 특정 실천들을 구성한다. 이것은 창조성의 일부이며 특정한 목적을 위한 특유한 방법이다(이것은 상이한 통찰들이 얻어질 때 실험 동안 바뀌는 존재의 가능성에 언제나 열려 있다).[20] 다 나아가 어떤 특유한 정치도 언제나 다른 장치들과의 간-행 과정 안에 그리고 (오직 다르게 물질화하는 자기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공간, 시간 그리고 하부문화를 가로질러 교환되는) 현상들의 펼쳐짐 안에 있다. 이 현상들은 특유한 실행들의 연속적인 반복 안으로 문제가 되는 특수한 장치들 안에서, 따라서 새로운 현상들 등등의 생산에서 초래되는 간-행의 본성 안에서 중요한 전환을 구성한다.[21] 어떠한 전환도 현실적으로 인식론적 이유는 물론이고 존재론적 이유들에 따라 물질을 야기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책임[응답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이 우리 선택의 임의적인 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형성과정에 어떤 역살을 한 특정 실행에서부터 침전되기 때문이다(다음 장의 ‘행위소와 인과성’이라는 제목의 절을 보라).[22] 장치의 물질화는 열린(하지만 임의적이지는 않은) 시간적 과정이다. 즉 장치는 시간 안에서 단순히 변화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시간을 (통해) 물질화한다. 장치들은 그 자체로 물질-담론적 현상이며, 간-행 안에서 다른 물질-담론적 장치들과 더불어 물질화한다.[23]
예컨대 압전 변환기는 의학적 필요성, 즉 설계 조건들(법적, 경제적, 생의학적, 물리학적 그리고 공학적 조건들을 포함하여), 시장 요인들, 정치적 주제들, 유사한 물질들을 사용하는 여타 R&D 기획들, 압전 결정체와 공학 작업장 <204> 또는 실험실 조건을 견고하게 디자인 하는 기술자들과 과학자들의 학업 배경, 기술이 사용되는 특정 병원이나 진료소 환경, 의학 공동체와 환자 공동체의 그 기술에 대한 수용성, 이것의 활용에 대한 법률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그리고 공간적 제약들, 실험 기간 동안 환자들의 위상, 그리고 그 기술을 사용하는 기술자들과 의사들의 훈련의 본질에 관계되는 것들을 포함하여 간-행 안에서 다수의 실천들을 물질화한다.[24] 그러므로 기술의 생산과 재-생산은 푸코가 그러한 연루하는 법률적, 교육적, 병원에 관련된, 의학적, 건축적, 군사적, 산업적 그리고 국가적 장치들 그리고 더 많은 그런 것처럼 특별하게 언급한 바, 특유한 훈육적 실천들과 연루된다. 특정한 종류의 주체들로의 형성 안에서 기술자들, 의사들, 기술자들, 그리고 과학자들의 감시는 태아의 감시에 접혀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산부인과 초음파 진단에서 압전 변환기는 태아의 객체화와 기술자, 의사, 공학자 그리고 과학자의 주체화 사이에 있는 인터페이스[접촉면]이다.[25]
산부인과 초음파 진단은 어떤 단일한 실천이 아니고 ‘담론들’이 단순히 ‘기호들의 집합’이 아니라, “그것들이 발화하는 객체로부터 체계적으로 형성되는 실천들”인 곳에서, 특정 담론을 지지하는 무수한 물질적 재배치와 담론 구성을 포함하는 상이한 국지적 실천들의 영역이다(Foucault 1972, 49). 우리가 보았다시피, 물질성과 이해가능성의 구별불가능성에 대한 보어의 주장은 그의 인식론적 분석의 중심이며 그것은 푸코의 해설(또는 그것의 결여) 너머로 가는 그것들의 짝지음 사이에 어떤 친밀함을 제안한다.[26] 더 나아가 푸코의 이론적으로 복잡한 담론 개념을 더 진전시켜 언어 개념에 대한 보어의 좁은 초점에 절합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특별히 적절해 보인다.
다른 한편 푸코의 물질 개념은 이 노고를 통해 수행되어 발전되기에는 불충분하다.[27] 푸코가 인간 신체의 물질화를 분석하는 동안, 그는 비인간 신체들을 자연스럽게 주어진 객체들로 파악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푸코는 그것을 통해 비인간 신체들이 물질화하는 바, 물질화의 과정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마찬가지로 그는 경계-그리기의 실천들을 통해 스스로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분할을 구성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푸코에 의해 제안된 물질화의 메커니즘은 ‘영혼’을 통과하며 작동하는데, 그는 이것을 “신체에 가해지는 어떤 권력의 기술”로 읽어 낸다(1977, 29).[28] 다음 절에서, 나는 보어의 분석에서 물리적-개념적인 것에서 물질-담론적인 것으로의 중요한 이동을 향해 움직이면서, 물질성과 물질화에 관한 보다 일반적인 해명을 제공할 것이다.
물질이 물질이 되는 방식
21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실재’에 대한 말이 그것이 항상 부드러워질 필요가 있는, 필수적으로 인용부호에 의해 나긋해질 필요가 있는 그와 같은 불편함의 원천일 수 있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여유가 없다고 믿는다. 실증주의의 임종 선언서는 많은 서명자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의 반-형이상학적 유산은 심지어 그것의 중상모략자들의 심장에도 살아 있다. 그 어떤 강력한 누군가의 형이상학에 대한 혐오라 해도, 형이상학은 추방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러한 혐오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무시된다. 실재는 어떻게 물질로 이해되는가? 존재론을 내세우는 것에는 위험이 따른다. 즉 형이상학적 가설들은 분명 어떤 주어진 실재 개념이 기반하는 배제를 드러낸다. 그러나 해체적 분석의 정치적 잠재성은 단순히 배제의 불가피성을 알아채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수립되는 특정한 배제들을 위한 의무[사유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에, 그리고 항구적으로 경계들을 겨루고 재작업하는 대한 책임[응답가능성]을 취하는 데 놓인다. 이 절에서는 나는 실재가 의존하는 배제와 그것의 미래의 교정작업에 대한 개방성에 관해 고려하는 실재의 이해를 제안한다.
보어의 언어와 실재에 간의 관계를 향한 태도는 아래와 같이 예시된다.
전통 철학은 우리가 언어를 무언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실재를 일차적인 어떤 것으로 여기게끔 했다. 보어는 이러한 언어와 실재의 관계를 향한 태도가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그것은 근본적인 언어일 수 없지만, 소위 언어 아래에 실재가 놓여 있으며, 그러한 언어는 하나의 그림이라고 말한다념, 그는 “우리는 무엇이 위에 그리고 아래에 있는지 말할 수 없는 그러한 방식으로 언어 안에 매달려 있다. ‘실재’라는 단어는 또한 하나의 단어, 우리가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하나의 단어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Petersen 1985, 302).[29]
불행하게도 보어는 우리가 ‘실재’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분명하지 않다. 나는 어떤 일관된 보어적 존재론이 현상들을 ‘실재’의 지시체로 삼는다고 논한다.[30] 실재는 사물-그-자체 또는 사물-뒤-현상들을 구성하지 않고, 현상-안-사물을 구성한다. 왜냐하면 현상들은 비이원론적인 전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여하튼 현상들의 뒤나 원인으로서 존재하는 독립적인 사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의미가 없다.
내가 제안하는 존재론은 (고전적 실재론이 추정하는 것처럼) 의미에 앞서는 존재에 관한 몇몇 고정된 관념을 정립하지 않으며, 존재가 언어로는 완전히 접근불가능하다거나(칸트적인 초월론에서처럼) 언어의 완전성(언어학적 일원론)도 주장하지 않는다. 나의 행위적 실재론의 <206>사유에서 현상들은 실재의 구성요소이다. 관건적으로 나의 탐구와 보어의 철학-물리학의 확장에서 물리적-개념적 장치들로서의 관찰 도구로부터 물질-담론적 실천으로서의 장치라는 보다 일반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나는 또한 의미있게도 현상에 대한 사유를 개정한다.[31] 행위적 실재론의 츨에 따르면, 현상들은 간-행적 행위소들의 존재론적 분리불가능성이다. 중요하게 나는 현상들이 인간 주체에 의해 설계된 실험실 실행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고, 다양한 물질-담론적 실행들 또는 신체적 생산의 장치들의 복잡한 간-행들을 통해 생산된 물질되기의 차이나는[미분적] 패턴들(‘회절 패턴들’)이라고 논한다. 여기서 장치들은 단순한 관찰 도구가 아니라 물질이 되는 경계-그리기 실천 – 세계의 특수한 물질적 (재)배치들 – 이다.
물질-담론적 장치들은 그 자체로 특수한 간-행들을 구성하는 현상들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인간과 비인간이 속하는데, 여기서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나는 구성은 특정 현상들을 지칭하며, 이것은 계속적인 장치들의 재배치와 경계들의 재구성 안에서 접히고 개정되며, 객체(또는 주체)로 정의되어지는 것과 장치로 정의되어지는 것은 특수한 실천들을 통해 간-행적으로 구성된다.[32]
그러므로 실재는 어떤 고정된 본질이 아니다. 실재는 계속적인 간-행성의 원동력(dynamic)이다.
실재가 현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저런 관념론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현상들은 세계의 특수한 물질적 배치들이다.[33] 현상은 단순한 인간 또는 사회적 구성물들이 아니다(그리고 그것들은 확실히 단순한 구축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미지 안에서 세계를 간단하게 만들지 않는다. 인간의 실천은 단지 물질이 되는 실천이 아니고, (적어도 그것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세계 또한 인간 실천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 질문은 인간적 실천이 무슨 역할을 하는가이다. 나의 행위적 실재론의 사유에서, 인간은 단순히 특정 지식 프로젝트를 만족시키기 위해 상이한 장치들을 회집하지 않는다. 인간은 배치의 일부이거나 세계의 진행중인 재배치의 일부이다. 즉 그것들/우리는 마찬가지로 현상들이다. 다시 말해 (다른 자연의 부분을과 같이) 인간도 세계에 속하지, 세계안에 있지 않으며, 그것이 살피는 것의 바깥에 있지 않다. 인간은 세계 생성의 부분으로서 간-행적으로 (재)배치된다. 이는 세계의 생성 안에서 인간이 단순한 효과라는 것도 아니고, 그것들/우리가 유일한 원인이라는 것도 아니다. 어떤 장치들이 취하는 특유한 배치는 우리의 선택에 있어서 부차적인 구성요소가 아니고, 인과적으로 결정되는 힘의 구조의 결과인 것도 아니다. 실험실 조작, 관찰적 개입, 개념들과 여타 인간적 실천들이 역할을 하는 수준에서, 그것은 <207> 그 간-행적 생성 안에서 세계의 물질적 배치의 부분으로 존재한다. 현상들은 그것을 통해 세계의 부분이 스스로를 다른 부분들에게 이해가능하게 만드는 세계의 진행중인 절합 과정으로부터 나와 침전된다.[34] 그러므로 우리는 찾고 있는 지식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책임져야[응답해야] 한다.
존재론적으로 실재적인 것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문화적 영향과 역사적 변화의 영역 바깥에 서 있는” 것으로부터 행위적 실재론의 존재론으로 옮기는 것은 본질의 형이상학이나 인식의 재현주의적 본성에 기반하지 않는 어떤 새로운 실재론(과 진리)의 공식을 열어 놓는다. 만약 우리가 현상들을 기술하고 하는 담론적 실천이 추상적 객체나 관찰-독립적 존재의 속성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세계를 그 생성 안에서 재배치하는 것을 가리킨다면, 그때 우리의 인식적 실천들에 의해 기술되는 존재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자연의 부분으로서 우리의 간-행성이다. 즉 실재론은 어떤 이미지화되고 관념화된 인간-독립적 실재라기 보다는 우리가 간-행하는 어떤 부분인 바, 그러한 실재의 정확한 기술을 제공하는 목표라는 측면에서 재형성된다. 현상들의 생산에 있어서 즉 물질화의 반복적 과정에서 모든 실천들이 똑같이 효과적인 파트너는 아니다(단순히 말해 어떤 것은 그런 식으로 그것의 물질화를 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담론과 같이 물질적인 것을 제한적으로 고려하지 않는(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는) 다양한 현상들과 사건들의 설명은 경험적으로 적합한 해명을 제공하는데 실패할 것이다.[35] 나는 행위적 실재론이라는 이름을 실재론의 새로운 형식이자 내가 제안하는 더 넓은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틀로 사용한다.
만약 기술과학적 실천들이 그것들이 기술에 착수하는 바로 그 현상들을 생산하는 중에 역할을 한다면, 이러한 과정은 수행적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인가? 행위적 실재론의 틀은 우리가 현상들의 간-행적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물체들의 물질화를 이해할 방법을 제공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물질적 강제들과 배제들 그리고 규율적 실천의 물질적 차원이 물질화 과정에서 중요하다는 것, 수행성이 담론이 어떻게 물질이 되는가라는 주제만이 아니라 물질이 어떻게 물질이 되는가라는 주제 또한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가?
여러 도전들이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과 관련하여 기술과학적 실천을 이해할 가능성을 탐색하는 중에 발생한다. 아마도 가장 즉각적인 질문은 버틀러의 물질화 개념이 그녀의 이론을 인간 신체의 영역 너머의 사유로 확장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력한지 아닌지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미 버틀러의 <208> 물질화에 대한 생각이 그 자신의 목적들에 있어서 충분히 강력한지 아닌지 질문했다. 즉 그 이론은 인간 신체가 성화된 것으로 물질화하는 그 과정을 적합하게 고려하는가? 페미니즘 이론의 더 진전된 표명에 생산적으로 합당해질 수 있는 과학과 과학학으로부터 얻을 만한 통찰은 무엇인가?물질과 과학적 실천에 관한 물리학자들의 이해는 물질에 관한 페미니즘적 재개념화에 유용하게 개입할 수 있는지, 그래서 그것이 신체의 윤곽이 심리적 과정을 통해 어떻게 구성되는지 뿐 아니라 물질이 되는 생물학적 신체를 원자들 자체가 어떻게 구성하는지,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물질이 스스로를 어떻게 느끼게 되는지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수행성에 관한 그와 같은 개정된 해명이 우리를 물체의 물질화에 관한 실재론적 이해로, 물질에 대해 충분히 해명하면서, 아직 그것을 어떤 자리, 또는 표면 또는 어떤 자연적인 명백한 근거, 또는 페미니즘 이론을 위한 기반에 재장착하지는 않는 어떤 것에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가?
행위적 실재론과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을 서로간에 독해하는 것은 주체와 객체, 또는 사회적인 실천과 과학적 실천 간의 몇몇 선어적인 대칭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성, 행위소 그리고 기술과학적이고 여타 사회적인 과정들의 풍부한 이해를 생산하는데 유용할 수 있는 상호 유익한 통찰들의 생산에 대한 것이다.[36] 나는 이어지는 곳에서 행위적 실재론의 행위소, 인과성 그리고 물질성에 관한 재개념화가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을 반복적 인용성(iterative citationality)에서 반복적 간-행성으로의 개정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행위적 실재론의 몇몇 핵심 주장들에 관한 간략한 개괄로 시작한다.
이전 절에서 나는 장치들이 다른 장치들과 더불어 반복적으로 생산되거나 재배치된다고 논증했다. 이 장치들은 그 자체로 물질-담론적인 현상들이다. 물질-담론적 장치들이 간-행적으로 물질-담론적 현상들을 생산하기 때문에, 장치들의 시간성은 변화무쌍한 행위적 실재의 부분 안에서(함께) 그리고 그 부분으로 접혀 있다. 현상들은 다른 현상들의 배제를 이해할 수 있는(결정할 수 있는) 몇몇 동일성이나 속성들을 만드는 경계-그리기 실천의 결과이다. 명확하게 존재하는 동일성이나 속성은 주체나 객체의 고유한 속성을 재현하지 않는다. 주체와 객체는 그 자체로 선재하지 않으며, 특정 실천을 통해, 그 안에서 그리고 그 부분으로 구성된다. 동일성과 속성을 위한 객관적 지시체는 여러 장치들의 간-행을 통해 구성된 현상들이다. 현상은 신체적 생산에 속하는 그 장치들로부터 분리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행위적 실재론에 따르면, 물질화는 간-행의 동력학의 측면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209>신체의 물질성에 관한 버틀러의 재공식화에서 중요한 진술은 “권력의 역동성의 결과로서 신체적 물질의 재사유, 즉 신체적 물질이 그것의 물질화와 그러한 물질화의 결과와 불가분할 것이라는 사유”이다(1993, 2). 이것은 행위적 실재론의 측면에서 신체란 간-행과 더불어 물질화하는 물질-담론적 현상들이라는 그 효과에 관한 진술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과 행위적 실재론의 틀은 그 의미있는 방식에서 차이나게, 물질성을 물질화의 과정으로 재이론화한다.
버틀러의 물질에 관한 해명은 일련의 긴급한 질문들을 제기한다. 우선은 심리적 동일성의 메커니즘을 따라 사회적 규율의 작동에 지속적으로 취약한 채 남아 있는 그와 같은 인간 신체의 본성의 해명을 받아들인다손 쳐도, 인간 신체의 바로 그 본질을 물질화하기 위한 그 규율들의 능력을 해명할 방법이 있는가? 즉 그것의 신체에 대한 생산적인 물질적 결과를 가동시킬 담론을 가능하게 하는 규율적 실천과 인간 신체의 물질적 본성은 대체 무엇인가? 만약 규율적 실천들이 물질적 차원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그 물질성은 어떻게 이론화되는가? 규율적 장치들이 재의미화된 것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물질적 재배치들을 통해 존재하는 것들에 영향을 받기 쉬운 그와 같은 물질성과 담론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아마도 버틀러의 물질성 이론의 가장 관건적인 한계는 그것이 사회적 힘들(이것은 단지 신체들의 생산과 연관된 힘만이 아니다) 인간 신체(또는 보다 정확하게는 인간 신체의 표면적 구성인데, 이는 가장 확실하게 인간 신체들에 있는 모든 것은 아니다)의 물질화에 관한 해명에 제한된다는 것이다. 버틀러의 공헌의 중요성은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된다. 규율적 실천의 심리적 차원을 이해하는 것은 신체가 어떻게 물질이 되는지 그리고 그 물질화의 과정이 배제와 생산의 개념들을 개정하는 바로 그 과정 속으로 결정적인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지 그 방식에 있다.
인간 신체와 사회적 힘들에 대한 버틀러의 보다 단일한 논점과는 대조적으로, 행위적 실재론의 틀은 인간적 영역으로 신체의 물질에 관한 재평가를 제한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것은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사회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미분적 경계들이 그어지는 그 실천들에 대한, 즉 이 <210>실천 자체가 언제나 이미 특정 물질화에 접혀 있다는 것에 대한 중요한 평가를 요청한다.[37] 나의 행위적 실재론의 사유에서, 실천의 본성에 관한 보다 완전하고 복잡한 이해를 제공하면서, 물질화의 과정으로서 물질은 인간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영역 너머에서 이론화된다. 물질은 그것의 간-행적 생성안에서, 즉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함(doing), 즉 행위소의 응고 안에서 실체이다. 현상들은 전진적인 간-행의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물질이 된다. 즉 물질은 현상의 물질성과 물질화를 지칭하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들로 추정되는 바, 고유하고 고정된 추상적 속성을 지칭하지 않는다.
중요하게도 이러한 설명은 권력/지식 실천들(푸코)에 적용된다. 하지만 권력은 사회적인 것의 영역에 제한되지 않고, 그것의 물질화하는 잠재력의 측면에서 재사유된다. 즉 권력은 사회적인 것 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것의 수립을 통해 작동하며, 규율적 실천의 생산적 본성은 인과적 간-행의 측면에서 더 일반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는 이 장의 후반부에서 인과성을 논의하겠지만, 여기서 주제가 되는 것의 의미는 규율 실행의 물질성의 본성을 고려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다. 거칠게 논하지 않을지라도 직설적으로 논하자면, 규율 장치들의 물질적 차원은 그것들의 담론적 차원으로부터 분리불가능하며, 현상의 물질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장치는 생성 과정 안에서 현상으로서의 물리적 현존 또는 존재론적 거기임(thereness)을 가진다. 그 어떤 고정된 형이상학적 바깥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틀은 마찬가지로 물리적 현존을 가진 특정한 신체를 생산하는 간-행 안에서 규율적 실천들의 시간성과 그 유효성(그리고 유효성의 결여) 둘 모두를 이해하는 방식을 제공한다. 본질적으로 행위적 실재론은 현상들의 물질성의 측면에서 규율 장치들의 물질적 차원으 ㄹ이론화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그것은 물질-담론적 신체의 간-행적 생산에서 규율적(그리고 여타의) 실천들과 그 인과적 (그러나 비결정론적인) 물질화하는 효과들의 해명을 제공한다.[38] 그러므로 물질화는 담론이 어떻게 물질이 되는 가에 관한 것일 뿐 아니라 어떻게 물질이 물질이 되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또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질화는 다양한 물질-담론적 장치들을 통과하여 그것에 의해 현상들(신체들)이 침전되고 현실적으로 재(배)치되는 물질되기의 상호행위적인 간-행이다. 물질은 어떤 안정되고 탈안정되는 상호행위적 간-행의 과정이다.
신체적 제스처 안에 또는 공기중으로 전파되는 음파 안에, 또는 측정하는 장치들 안에 언어의 물질적 예화 간 어떤 차이이다. 즉 물질은 물질이 되고, 따라서 특수한 체현의 본성도 물질화한다. 또한 이러한 체현된 <211>행위들 중 어떤 것은 유효할 것이라는 보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간-행들은 인과적으로 결정적이지 않다. 말하자면 무언가가 그렇게 행위하지만 무언가가 그런 식으로 그것을 만들지는 않는다. 이와 유사하게 실험실 안의 특정 기구들을 만들고 사용하는 것은 결과들에 대해 바라마지 않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버틀러는 상이한 담론적 실천들에 대해 상이한 종류의 물질들을 할당한다. 즉 신체에 속하는 “다수의 ‘물질들’을 용인하고 긍정하는 것이 가능해야 하며, 이것은 생물학, 해부학, 생리학, 호르몬과 화학적 구성, 질명, 연령, 체중, 신진대사, 생명와 죽음의 영역에 의해 의미화된다”(1993, 66). 그러나 상이한 종류의 추정에 속하는 주장들이 담론적 영역들을 분리한다. 나의 행위적 실재론의 사유에서는 이런 상이한 담론적 실천들이 전혀 분리되지 않으며, 특수한 방식으로 얽혀 있다고 의심할 중요한 이유가 있다. 즉 이 신체적 생산의 장치들은 서로 간에 고립되어 행위하지 않고, 오히려 상호적 간-행 안에서 ‘함께’ 서로 연루된다. 바깥으로부터 오는 구체화된 구별들로 시작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특수한 물질적 배치가 무엇으로 보이는지 이해하는 필수적인 계보학적 분석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행위적 실재론은 여러 가지 물질성의 문제를 에워싼다. 즉 여러 물질성(고유하게 차이나는 종류인 물질성들)을 가정할 필요는 없으며, 따라서 언어의 물질성이 어떻게 신체의 물질성에 아마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 아무런 신비도 존재하지 않는다. 행위적 실재론에 따르면 분리된 유형의 물질성을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서 담론적 실천과 신체에 대한 그것들의 물질화하는 효과들 사이의 연결은 전혀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담론적 실천은 그것들이 존재하는 한 물질적 효과를 가지는데, 왜냐하면 그것들 사이에 인과적 연결이 있으며, 이는 간-행의 인과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이 장 다음의 논의를 보라).
물질화로서 배치하는 물질성의 권력은, 만약 우리가 그것의 기능을 단순히 담론들의 권력 재반복의 결과나 언어를 위한 단순 지지대에 한정한다면, 약화된다. 여기서 제시된 행위적 실재론의 존재론은 시간, 역사 또는 문화의 바깥에 존재하는 고정된 근거인 물질을 전제하지 않고 행위소의 물질적 차원과 강제의 물질적 차원을 고려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물질적 강제와 배제, 그리고 권력의 물질적 차원에 대한 언급은 행위적 실재론의 틀 내에서 가능한데, 왜냐하면 ‘물질성’은 현상들을 가리키며, 그것은 문화-바깥-자연의 요소들이 분명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으로서의 물질성 – 무정한 긍정성 또는 사물의 본질적인 소여성 - 을 복권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상당히 기묘한 것을 노정할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이 물질성을 실재 바깥의 장소에 할당할 것이기 때문이다(즉 그것은 객관적 지시체의 경로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39]
중요하게도 물질-담론적 강제와 배제의 본성에 관한 충분한 고려는 <212>신체의 물질화 뿐만 아니라 비체(abjection)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다. 물질적인 것과 담론적인 것은 신체적 생산의 장치, 서로 간에 작동하는 물질적이고 담론적인 강제들(같은 것인 배제에도 진실이다) 안에서 간-류되며([間-流], intra-twined), 따라서 물질화의 강제에 대한 충분한 고려는 그것들의 상호관 관계성의 두 차원들, 즉 담론-물질적 강제들(배제들)에 관한 분석을 포함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행위적 실재론에 따르면, 음파 기술에서 초음파진단 검사의 기원이 1차 세계 대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관념적인 감시 기술, 즉 관찰 장치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태아의 모습을 제공하는 단순한 물리적인 도구는 아니다. 오히려 초음파 기술은 항구적으로 변화하는 현상으로서 그 반복적으로 간-행하는 기술과학적, 의학적, 경제적, 정치적, 생물학적 그리고 문화적 발전에 조응하여, 그리고 여타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특수한 장치들과의 간-행에서의 신체적 생산의 물질-담론적 장치들로서의 관계적이고 특유한 활용들에 의해 보여지는 것과 생산되는 것을 강제하고 가능케하면서, 특수한 물질-담론적 실천들을 지시한다. 그래서 예컨대 태아 이미지화의 기술적 발전, 특히 개선된 해상도, 배율 그리고 실시간 이미지들과 같은 특유한 물질적 관련사항들은 태아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일반 의사들을 고무하는데, 그러한 동영상들은 전체 스크린을 채운다. 그와 같은 물질적 재배치들은 도움을 주기도 하고 동시에 태아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내세우는 정치적 담론에 의해 부분적으로 조건화된다.[40] 이것은 임신 여성의 객체화와 그녀의 주체성의 배제와 함께 이루어진다. 물질-담론적 강제와 배제는 분리불가능하다. 우리는 이것을 무시할 수 없다.
행위소와 인과성
"연구되는 ‘객체들’의 행위소를 받아들이는 것은 과학[사회과학와 인문과학]에서 많은 종류의 엄청난 실수와 그릇된 지식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동일한 점이 과학으로 불리워지는 다른 지식 기획들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 세계는 스스로 말하지 않으며, 마스터 디코더(master decoder[컴퓨터 장치-역자])를 위해 사라지지도 않는다. 세계의 코드는 읽히기만을 기다리며 정지해 있지 않는다. [...] 인식에서 세계의 행위소를 깨닫는 것은 세계의 독립적인 유머감각이라는 의미를 포함하면서 몇몇 소란스러움의 가능성들을 위한 여지를 만든다. 그와 같은 유머감각은 휴머니스트들과 어떤 자원으로 세계에 맡겨진 다른 것들에게 편안한 것은 아니다."
- 도나 해러웨이,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성』
"비인간 행위소는 그것이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사이보그든 또는 무엇이든/누구이든 간에 다른 개별실체들에 대한 인간적 의무(accountability[응답가능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모니카 캐스퍼(Monica Casper),
「비인간 행위소의 재규정과 근거짓기」
(Reframing and Grounding Nonhuman Agency)
푸코의 권력 이론은 결정론적이지 않다. 주체는 권력관계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오히려 주체형성은 갈등, 투쟁 그리고 국지적 저항 행위로 점철된다. 그와 같은 저항이 어떻게 가능한가? 버틀러는 이 질문을 인과성이 푸코의 권력의 미시정치학에서 어떻게 그려지는지 음미함으로써 취하며, 그러면서 그녀는 그녀의 수행성 이론에 기반하여 자신의 행위소에 관한 설명을 제시한다. 나는 이 절을 인과성과 행위소에 관한 버틀러의 사유에 관한 간략한 평가로 시작한다. 그리고서 나는 행위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인과성의 문제를 제기하며 행위소에 관한 확장된 설명을 위한 의미함축을 검토할 것이다.
만약 푸코에 따라 권력이 강제하는 것일 뿐 아니라, 생산적이라면, 만약 그것이 주체에 가해지는 외적 힘처럼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때 이 인과성의 주제를 제기하기 시작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렇다 해도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한 것에 속하는데, 왜냐하면 인과성 개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행위소에 관한 질문과 구성의 의미 둘 모두이기 때문이다.[41]
버틀러는 물질화를 “푸코적인 의미에서 규율 권력의 생산적이고 [...] 물질화하는 효과들과 관련하여”(1993, 9-10) 이해한다. 사실상, 그녀는 신체의 물질화를 권력 관계에 의한 신체의 포위구도와 공현존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버틀러는 이러한 신체의 물질화에 관한 이해를 권력의 생산적 작동을 통해 인과성을 재사유하는 기회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물질성’은 권력의 어떤 효과를 지시한다”(1993, 34)라고 쓸 때, 그녀는 “이것은 ‘물질성’을 그 원인인 ‘담론’의 효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효과’라는 개념의 개정을 통해 인과 관계를 대체하는 것이다. [...] 물질적 효과의 생산은 권력의 형성적인 또는 구성적인 작동, 즉 원인에서 결과로 가는 일방향적인 운동으로 해석될 수 없다”(1993, 251).
수행적 맥락에서, 주체는 행위소의 자리라고 추정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주체는 “그것이 협상하는 문화적 장에 앞서는 어떤 안정된 실존”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Butler 1990, 142). 오히려 그것은 행위소의 가능성에 열린 수행성의 반복적 특성이다. “이 반복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물질화가 결코 충분히 완결되지 않는다는 신호이며, 신체들이 그것들의 물질화가 강제되는 바, 그 규범에 결코 완전히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993, 2). 버틀러는 주체에 가해지는 모순되는 <214> 담론적 요청들의 결합이 주체가 맹종적으로 그것을 따르는 것을 방지한다고 설명한다. “주제화가 진행되는 – 그리고 그 진행에 실패하는 - 바로 그 의미에서 개정작업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모호함의 공간이다”(1993, 124). 그러므로 규범들이 강제적이라 해도, 전체적으로 효과적인 것은 아니며, 규범이 결코 궁극적으로 체현되지 않지만, 언제나 반복적 연쇄의 부분이라는 사실은 규범의 전복적인 재의미화를 위한 기회를 드러낸다.
인과성과 행위소에 관한 논점은 행위적 실재론의 맥락에서 어떻게 형성되는가? 보어는 그의 분석이 인과성이 엄격한 결정론의 문제도 아니고, 반강제적인 자유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원인들은 바깥으로부터 현상에 가해지는 힘이 아니다. 원인은 원인에서 결과로 가는 어떤 일방향적인 운동으로 해석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원인들’과 ‘결과들’은 간-행으로부터 출현한다. 특히 ‘표시들’(결과)이 ‘관찰의 행위소’ 위에 남겨 지는데, 이것은 ‘객체’(원인)의 특수한 특성들의 측정을 구성한다고 알려진다. 더 나아가 간-행은 언제나 특정한 배제를 야기하고, 이 배제는 열린 미래의 조건을 제공하면서, 결정론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 간-행 개념은 인과성에 관한 전통적 생각을 재형성하며 행위소를 위한 공간을 열어 놓는다. 그러므로 행위적 실재론에 따르면, 행위소의 가능성은 장치들의 ‘충돌’을 요청하지 않는다(즉 일련의 모순적인 문화적 요청들). 심지어 장치들이 근본적으로 증강될 때에도, 행위소는 사전에 차단되지 않는다.
행위소는 간-행의 문제이다. 그것은 수립행위(enactment)이지,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가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그 자체 선재하지 않는) 행위소는 주체와 객체의 속성으로 지목될 수 없다. 행위소는 (펼침과 다른 위상적 재배치들을 포함하는) 간-행의 동학을 통해 특정 실천들에 대해 반복적 변화들을 만드는 어떤 물질이다. 행위소는 그러한 실천들에 의해 표시되는 경계 절합과 배제들을 포함하여 신체적 생산의 물질-담론적 장치들을 재배치에 수반되는 가능성과 의무[사유가능성]에 대한 것이다.[42]
행위소의 비인간 형식들의 가능성은 어떠한가?[43] 인간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비인간 행위소에 관한 질문은 다소 기괴해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소는 일반적으로 주체성과 의도성의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행위소가 무언가, 누군가가 가지는 것이 아닌 어떤 수립행위로 이해된다면, 그때 인간은 물론이고 비인간에게 분배된 행위소를 고려하는 것이 적합하면서도 중요해 보인다. 이는 아마도 과학과 같은 장을 숙고하는데, 즉 주요 물질이 자주 ‘비인간’인 경우에 가장 확실할 것이다. 사회적 요인들이 지식 구성에서 역할을 한다는 것만큼 확실히(그것들은 유일한 결정요소가 아니다. <215>사물들은 우리가 원하는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세계가 휴식을 취한다’ 것에는 의미가 있다.
《미국 행동과학》 저널 특별호에 실린 모니카 캐스퍼의 「인간과 타자들-‘행위소’ 개념과 그 속성」(Humans and Others: The Concept of 'Agency' and Its Attribution, 1994)은 과학학 내부에서 비인간 행위소에 대한 논쟁의 정치적으로 빈틈없는 비판을 제공한다. 예컨대 그녀는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가가 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행위소의 원리적으로 타당한 속성에 있어서 바로 그 비인간 개념이 어떻게 “[비인간이] 인간에 대립된다는 이원론적인 존재론적 입장짓기”(840)에 전제를 두고 있는지 사고하는데 있어서 실패했다. 그녀는 비인간 행위소에 대한 그들의 접근이 분석으로부터 어떤 중요한 요소들을 배제한다고 지적하는데, 왜냐하면 “인간과 비인간을 이질적인 개별실체로 돌리는 것”은 언제나 이미 특정한 정치적 실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캐스퍼는 특정한 기술과학적 실행들을 통해 ‘인간’의 구성을 탐구하기 위해 실험적인 태아 수술에 대한 연구를 활용하여 인간과 비인간 간의 선재하는 구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유 안에 숨겨질 수 있는 일련의 정치적 가설들을 증명한다.
실험적 태아 수술 내부의 실행 범위를 통해, 태아는 인간적 성질을 가진 어떤 잠재적 인격으로 구성된다. 예컨대 주간 태아-진찰 회의에서 태아들은 일상적으로 ‘아이’, ‘아기’ 그리고 ‘그’로 지칭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적(그리고 젠더화된) 속성들이다. 이 과정은 “여전히 그들의 엄마의 자궁 안에 있는 태아들의 아기 사진들”을 제공하는 진단용 초음파의 사용에서 도움을 받는다(Petchesky 1987; Stabile 1992). 이러한 이미지들은 태아-진찰 회의에서 사례 발표 동안 사용되며 인간주의적 용어들에 의해 지칭된다(Casper 1994, 843).
그녀는 “능동적인 태아 행위소의 해석은 임신 여성을 인간 행위자(actor)로서 비가시적으로 만들 것이고 그들을 태아 환자를 위한 기술적인 모성 환경(technomaternal environments)으로 환원한다”고 경고한다(844). 궁극적으로 캐스퍼는 어떤 겉보기에 특정한 경향을 가지는 선을 그렸다. 즉 “나는 역사적으로 ‘비인간’ 인민과 동물들이 행위소를 가지기를 원하지만(그리고 나는 내가 이런 측면에서 기계에 대해서는 덜 우려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필연적으로 태아들이 행위소를 가지길 원하지는 않는다”(852). 그녀는 이러한 움직임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한다. “임신 여성과 나의 고양이들 안에서 내가 즉각적으로 그것을 인지하는데 반해, 태아에 행위소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나의 거부는 다소 편파적이다. 나의 정치학은 [...] 내가 사유가능한 세계 안에서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발견할 것인가다”(853).
<216>나는 인간과 비인간 간의 아프리오리한 구별을 전제하는 것과 오류이며 인간과 비인간 간에 경계를 그려 놓는 것은 비판적 분석을 사전 차단하는 것이라는 캐스퍼의 논점에 강력하게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누가 또는 무엇이 작인(agent)이 될 것인지에 대한 그녀의 표명에서 그녀가 그려 놓은 경계에 속한 암시적인 보편성에 대해서는 그닥 찬성하지 않는다. 게다가 캐스퍼는 우리가 작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만 의무가 있다[사유가능하다]고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행위소와 의무의 특유한 회집에 비추어 태아 행위소에 관한 숙고를 영원히 배제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경험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태아 행위소를 일깨우는 특정 환경에서 성차별주의의 물질적 효과와 여타 다른 종류의 억압을 사고를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가? 예컨대 ‘여자아이로 되는’ 태아들이 “그들을 양육할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 낙태되거나 태어나면서 살해되는” 인도의 경우에 이러한 배제의 함축은 무엇인가?(Ebert 1996, 360) 전세계적인 신식민주의의 강화와 그것에 수반하는 불균등한 배제와 강제(노동, 자본, 기술 그리고 정보의 비대칭적 흐름에 의해 통치되는)는 의무의 문제에 관해 적어도 훨씬 더 많은 경계를 요청한다. 행위소의 진전된 배제는 그토록 생생하게 중요한 의무의 분석을 배제하거나 또는 심지어 완전히 폐색시킬 것이다. 태아에 대한 행위소 귀속은 어떤 보편적 범죄인가? 일련의 특유한 페미니즘적 개입들, 이를테면 (초과)의료화된 출산 관행에 대한 대안으로서 조산술(midwifery)과 같은 것이 태아가 ‘편안해 질’ 것이라는 사실 대한 지각 없이 어디 있을 것인가? 나는 긴급한 주제가 태아에 부여된 행위소의 속성 안에는 그 자체로 그리고 저절로 놓이지 않지만, 그 속성의 지시체의 틀형성 안에 있다고 제안한다. 시작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고려한다. 즉 행위소가 귀속되고 있는 이 ‘태아’는 누구 또는 무엇인가?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빈틈 없는 감시 아래에 놓인 자족적이고, 막연한 객체로서 태아에 관한 해석은 과학자가 “객체 세계를 위한 권위 있는 복화술사”(Haraway 1997, 24)로 개념화되는 객관주의의 법칙과 신화 아래에 주체로서 그것을 구성하는 것과 엮여 있다. 이러한 상에서 부재하는 것은 임신 여성과 특정 의학적, 생물학적 과학적 그리고 법률적 실천을 위한 의무[사유가능성]이다(여기에는 ‘조사연구의 객체’에 관한 해석, 그것의 주체로서의 태아에 관한 법률적 해석과의 연결, 그러한 해석에 의해 수립되는 배제들, 그리고 인식론적 <217> 존재론적 그리고 윤리적 귀결들이 포함된다). 즉 캐스퍼가 태아 환자들을 위해 임신 여성들을 기술적인 모성 환경으로 환원하는 것이 태아를 어떤 능동적 작인으로 해석하는 것의 결과라고 논증하는 반면, 나는 이러한 환원이 객체의 특수한 구성, 신체 생산의 특수한 구조의 간-행 그리고 태아 자체는 아닌 것에 얽매여 있다고 논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나는 행위소와 주체성의 미리 전제된 연결을 의문에 붙이고 있으며, 그것은 주체의 속성이지 행위소의 속성이 아니라는 것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1980년대 미국에서의 낙태 논쟁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나의 행위적 실재론의 해명에서, 관건적인 논점은 태아가 그 객관적 지시체와의 관계에서 이해된다는 점이다.
행위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태아는 고유한 속성을 가진 탐구의 선재하는 객체가 아니다. 오히려 태아는 신체적 생산의 물질-담론적 장치들에 속하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특수한 반복적 간-행으로부터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현상이다. 현상으로서의 태아는 그것이 구성된는 바, 장치들 또는 현상들을 ‘포함한다’. 특히 그것은 임신 여성(그녀의 자궁, 태반, 양수, 호르몬, 혈액공급, 영양분, 정서 등등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주위 환경들’ 그리고 그녀의 그것들과의/그것 안에서의 간-행) 그리고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44] 탐구의 객체는 특정한 절단들과 타자 아닌 것을 통해 구성된다. 어느 절단이 수립되는가는 자유로운 인간주의적 감각 안에서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절단의 특수성이 인간은 상이하게 구성된다는 바로 그 생각을 따라 나오는 특수한 물질적 실천들의 문제이다. 특히 객체가 기술적 모성 환경 내부에 위치한 자족적이고, 막연한 신체라는 것은 어떤 소여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규정은 물질-담론적이 장치들의 특정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특수한 간-행들의 결과이다. 이를 테면 ‘불임의 유행’(epidemic of infertility)에 관한 인종화되고 계급화된 해석 즉, “불임은 압도적으로 백인, 부유층, 고학력 여성들을 괴롭힌다는 그것의 대중적인 표현과는 반대인데, 실제적으로 비백인이면서 저학력자들 사이에서 더 높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은 백인 아기들의 출산을 위한 새로운 재생산 기술의 범위의 확장된 발전을 정당화하는데 기여해 왔다. 동시에 이것은 환경적 인종주의에 관한 의무[사유가능성]을 회피했으며, 이는 실제적 통계학 안에서 인종적인 비대칭성에 책임[응답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Hartouni 1997, 45). 새로운 재생산 기술들은 태아와 ‘모성 환경’으로 기여하는 특유한 것들 보다 많은 특정한 여성적인 신체를 표시하는 인종관계들을 재생산하기 위해 작동한다.
<218>행위소와 의무가 어떻게 함께 엮이는지 상기하자. 행위적 실재론에 따르면, 행위소는 주체나 객체의 속성으로 지정될 수 없으며, 그 자체로 특수한 실천들을 통해 구성된다. 더 나아가 장치들은 관찰 대상들로부터 분리가능한 단순한 물리적 도구들이 아니다. 오히려 장치들은 인간과 비인간의 간-행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현상들로 이해되어야 하며, ‘인간’(과 그것의 ‘타자들’)의 미분적 구성이 어떤 돌발적인 그리고 계속 변화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곳에 있다. 행위소는 자유주의 인간론의 의미에서의 선택에 대한 것이 아니다. 행위소는 신체적 생산의 물질-담론적 장치들을 재배치하는 중에 따라 나오는 가능성과 의무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는 그러한 실천들에 의해 표시되는 경계 표명과 배제가 포함된다.
태아가 ‘휴식을 취한다’는 사실, 즉 태아 수립행위가 있다는 사실은 태아 주체성의 용인을 초래하지 않는다. 태아가 다른 장치들과의 간-행에서 특히 임신 여성을 포함하는 복잡한 물질-담론적 현상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그리고 태아 수립행위는 임신 여성과 ‘태아’라고 불리워지게 된 객체 간의 반복적인 간-행성을 포함한다. 이러한 공식화는 임신 여성에게 부과되는 의무에 관한 진짜 질문의 대체로서 최근의 초물질적인 책임성에 관한 강화된 담론을 드러내는데, 이때 이 여성은 그녀의 통제 너머에 있을 법한 생물학적이고 사회적 요인들을 포함하여 태아의 안정을 위해 완연한 책임을 가진 그리고 의무의 짐을 완연히 짊어진 ‘엄마’로서 능동적으로 구성된다.[45] 의무에 관한 진짜 질문은 특정 물질-담론적 실천들, 특정 임신 여성들에게 끼치는 그들의 상이한 효과들 안에서 부와 빈곤의 불평등한 분배를 포함하여 적합하지 않는 건강 관리와 영양 장치들의 결과들에 대한 의무[사유가능성]로부터 등장하는 태아 주체성에 관한 해석의 사유가능성과 그 결과, 그리고 많은 다른 요인들을 포함한다.
여기에는 전복, 저항, 대립 그리고 혁명의 행동들을 포함하여 (그러나 그것에 제한되지는 않는) 신체적 생산의 물질-담론적 장치들을 재가동할 여러 가능성들이 있다. 수립되는 변화들은 행위적 간-행들의 특수한 본성에 의존할 것이다(모든 가능성들이 각각의 순간에 열려 있지는 않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 비인간 그리고 사이보그적 형태들에 대한 행위소의 분배, 더 나아가 진행중인 행위적 수립행위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반복적 (재)구성을 포함한다. 세계의 부분으로서 그리고 그 안에서 책임 있게 간-행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우리가 유일한 능동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른 <219>개별 실체들에 대한 그러한 책임성의 편향을 결코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비인간 행위소’에 관한 앎은 인간적 의무[사유가능성]를 풀어 놓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의무가 존재하는 비대칭성에 대한 더 많은 주의집중을 요청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전복의 행위는 특정한 전복적인 재의미화의 펼침을 통해 특수한 장치들의 물질적 재배치 안에서의 변화를 포함하지만, 그것에 제한되지 않는다. 다른 가능성들이 인민의 삶의 경제적 조건들 안에서의 변화를 포함한다. 각 경우는 우리가 물질적이고 담론적인 강제들과 조건들의 간-류(intra-twining)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청한다. 「처녀생식-재생산 기술의 레즈비언적 전유」(Gynogenesis: A Lesbian Appropriation of Reproductive Technologies)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엘리자베스 수벗(Elizabeth Sourbut, 1996)은 새로운 재생산 기술의 전복적 잠재력을 탐구한다. 하나의 알에서 나오는 발생적 물질은 두 여성 부모로부터 배아를 생산하기 위해 두 번째 알에 부가된다는 처녀생식의 전복적 잠재력은 “시험관 아기 개념의 ‘기괴함’과 이러한 기술이 영속적임을 의미하는 [가부장적, 이성애적] 제도들의 가정된 ‘자연스러움’ 사이의 모순”을 개척한다(S. Franklin 1990, 226). 지금까지 그 어떤 (쥐의) 처녀생식체도 말 그대로 발전되지 않았다.[46] 이것은 어떤 ‘유전자 인쇄’ 메커니즘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아직 이해되지 않은 상태다. 즉 모든 필요한 유전자가 거기 있지만, 그것들은 단지 적절한 시간에 ‘켜지고 꺼져’야만 한다. 유전자 인쇄는 유전학자들이 비인간 행위소의 이러한 형식에 부여했던 이름이다. 이것은 이 이름과 임무가 단순히 기술적이라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은 수행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처녀생식의 성공적인 발전을 이끌 미래의 기술과학적 간-행은 비인간 행위소의 이 형식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신체적 생산의 물질-담론적 장치들 안에서 행위적 전환과 더불어 간-행에서 그것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세계와 더불어/안에서 그리고 그 부분으로서 책임 있는 간-행은 다른 중요한 장치들와 간-행하는 특유한 물질-담론적 장치들을 통해 작동하는 경계들, 강제들 그리고 배제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유할 것을 요청할 것이다.
처녀생식이 아직 실현되지 않은 반면에, 새로운 재생산 기술들은 이미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목적에 맞게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에는 한 파트너가 그녀의 연인의 난자와 기부된 정자에 의해 만들어진 배아를 착상한 레즈비언 커플이 있다. 그 파트너는 기술적으로는 대리인인데, 그녀의 연인의 아기를 탄생시키게 된다”(Martin 1993, 358).[47]
말할 필요도 없이 전복적 행동은 헤게모니적 장치들의 불안정성 위에서 작동하지만, 그것들은 – 모순을 내포하면서 장치에 안정성을 주려는 헤게모니적 시도들과 같이 - <220>요소들의 재강화와 탈안정화를 포함한다. 이 사례에서 새로운 재생산 기술의 적용(남용)의 탈안정화하는 효과들은 가부장적이고 이성애적 구조에 대한 도전을 포함하며, 계급적 비대칭성들과 유전적인 자식들의 양육에 대한 문화적 과대평가의 재강화와 함께 간다. 의무[사유가능성]와 책임[응답가능성]은 물질이 되는 것과 물질되기로부터 배제되는 것과 관련하여 사유되어야만 한다.
3-D 초음파 진단-표면을 넘어 움직이기
오늘날의 압전 변환기는 어떤 새롭고 강력한 기술과학적 실천 속으로 접혀들어가고 있다. 3-D 초음파 진단기라는 이름으로 가장 일반적으로 불리워지는 이 기계는 ‘체적 음파검사기’, ‘체적 초음파 진단기’ 그리고 ‘초음파 홀로그람기’로도 알려져 있다. 이 새로운 기술 뒤에 있는 생각은 반 세기동안 이어졌지만, 그것이 물질화되기 시작한 것은 단지 지난 십 여년 전이고, 이제야 컴퓨터 기술이 만족스럽게 그것을 발전시켰으며, 미국과 해외에서 의료 행위에 이것을 통합하기 시작했던 것은 최근의 일이다.[48]
만약 표준적인 2차원 초음파진단 기술이 우리의 인식론적 경제학에 시각적인 것에 상당하는 높은 수준의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면, 새로운 3차원 기술은 규모면에서 더 발전된 것이다. 이것은 신체의 윤곽을 가상적인 실재성의 잠재력으로 인식적 획득 위로 끌어 오면서 일종의 과도한 흥분을 야기했는데, 실시간 이차원 초음파 진단기술을 명백하게 기초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에게 섬뜩한 ‘x-레이’ 특성을 경험하게 하는 2차원 이미지들과 달리, 이 새로운 3차원 이미지들은 ‘자연스럽고’ 매우 친밀한 특성을 가져다 준다. 그 이미지들은 상당히 ‘살아 있는 것과 같아’서 보는 사람을 대상의 재현물이 대상 자체와 동질적이라고 생각하게끔 유혹한다. 이미지들은 우리가 육안으로 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이지만, (오로지 우리의 시각적 기능으로 확대된 형상을 본다면, 대상 주변으로 신체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이미지들을 회전시키는 능력과 우리의 시야를 방해하는 대상의 그 어떤 불투명한 단면을 ‘가상적인 메스’로 얇게 잘라내는 능력은) 더 낫다.[49]
이러한 새로운 기술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초음파 이미지들이 객체의 단일한 2-차원적 단면을 가로질러 이미지화됨으로써 만들어진다는 것을 상기하자. 그러므로 태아의 단면이 이미지화될 때, 음파장치는 ‘x-레이’ 광선이 그것을 바라보는 것, 즉 신체가 ‘투과되어’지는 바를 가진다. 왜냐하면 횡단면이란 그 자신의 ‘표면’ 개념에만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의하는 표면이란 <221>신체를 통과한 어떤 단일한 2-차원적 박편(slice)이다. 새로운 3-차원 기술은 객체의 연속적인 조밀한 면들을 스캐닝함으로써, 전체 객체가 스캔될 때까지 컴퓨터 안에 정보를 저장하면서 작동한다. 컴퓨터는 객체의 전체 부피에 관한 3차원 전사를 생산하기 위해, 2-차원 이미지들을 통합한다. 검토의 핵심이 되는 표면은 이러한 정보의 전산적 통합 과정을 통해 구축된다. 이런 방식으로 신체의 상이한 표면이 신체의 익숙한 표면들을 포함하여 부피에 대한 정보로부터 주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컴퓨터 상에 보여지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시각적으로 익숙해진 불투명함의 느낌을 보존할 수 있다. 컴퓨터는 물질화하는 방식으로 신체 이미지를 이해가능하도록 해주면서, 즉 이러한 물질-담론적 실천을 어떤 특유하게 핵심적인 도구들과 힘의 벡터로 구성하면서, 표면의 신체 이미지를 부피 정보로부터 유도하여 물질화한다.
물론 신체적 생산에 속하는 이 장치는 다른 실행들, 이를테면 미국의 낙태 논쟁에 기여하는 것들과 간-행하면서 물질화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이 이미 이 논쟁에 결합되고 있으며, 몇몇 반낙태론자들에 의해 진실에 대한 직접적인 보기로 제공되면서 마지막 결정적 요소로 묘사었다.
3-D 초음파 진단기는 비산부인과적 용도를 포함하여 다른 많은 쓰임새가 있다. 예컨대 그것은 인간 생물학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대폭 증진시키는, 그리고 외과 수술을 주목할 만하게 변화시킬 잠재력을 가진다.
이 강력한 기술에 의해 생산된 현상들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최근 가지게 된 것보다 신체에 관한 보다 복잡한 이해를 요청할 것이다. 신체에 관한 생물학적 이론은 독립되어 작용하지 않는다. 신체의 어떤 단일한 표면 구성에 관한 이론은 충분치 않다. 3-차원 초음파진단기는 표면과 부피 사이의 관계를 읽어내는 방법을 아는 필연성을 지목하는 어떤 상징이기도 하고 실천이기도 하다. 이 강력한 기술은 이러한 관계의 본성이나 다른 전사체들(mappings)을 사용한 결과와 관련하여 중요한 통찰을 생산하는가? ‘가상 메스’는 경계-그리기 실천의 본성에 대한 몇몇 통찰을 제공하는가? 페미니즘 이론은 특정한 가상적이고 비가상적인 절단들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기술이 환자의 주체성을 지우고 시작하는 것 둘 모두에 대해 잠재력을 가지는 방법들에 관해 개업의들을 반성하게 할 때, 즉 그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결과들을 이해할 때, 3-차원 초음파 진단의 실행에 대한 관건적인 통찰들을 제공할 것인가?[50] 여기에는 <222>과학, 기술 그리고 의학, 기술과학적 실천의 이론화, 그리고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 그리고 정치적인 것의 이론화에 연루되는 페미니스트들의 요청이 있다. 여기에는 아버지 법 뿐만 아니라 자연 법칙을 이해하려는 요청이 있다.[51] 그러나 상이한 규울 장치들을 고립적으로 이해하고 개정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간-행이 물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