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과 사건_리쾨르와 들뢰즈 철학 비교 연구_서론
[1회차 원고]
* 아래에 현재까지 포스팅된 이 원고의 다른 부분들을 볼 수 있도록 링크를 만들어 놓았다.
2회차 원고: 해석과 사건_리쾨르와 들뢰즈 철학 비교 연구_A. 예비적 고찰_part 1
서언:
이제부터 몇 번에 걸쳐 포스팅할 이 긴 원고는 마땅히 애도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어떤 연유로 이 글은 영원히 사장될 처지에 놓였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부인'하면서 지금껏 다소 히스테릭한 상태로 정신의 일부를 방치해 온 것이 분명하다. 이제 '애도'도 '부인'도 그 어떤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마음 편하게 부려 놓기로 한다.
<목차>
서론1. 논문의 가설과 구성 2. 왜 사건의 철학이며 해석의 철학인가? 3. 기초질문들의 존재론적 의의 A. 예비적 고찰 I. ‘해석’과 ‘사건’의 통시적 맥락 1. 카오스, 뮈토스, 로고스 2.고대 자연철학에서 해석과 사건의 원초적 과정 1)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2) 우회-아낙시만드로스 3) 아르케는 아페이론이 아니다 3.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구스티누스 1) ‘해석’의 신화적 연원 2) 이 두 철학자에게서 ‘해석’과 ‘사건’ 3) Herma와 Sēmata – 해석과 사건의 안팎 II. 해석과 사건의 공시적 적용 -《올랭피아》 1. 현상학적 접근 2. ‘홀림’ 3. 기계론, 결정론, 목적론의 문제 B. 주체성의 해체와 사건 III. 주체와 타자의 해석학 1. ‘코기토’ - 주체화 양식 1) 들뢰즈, 주체성의 전복 2) 리쾨르의 코기토 비판 2. 데카르트적 양식의 균열들 1)『방법서설』- 삼중의 질서 2)『정념론』1부 – 의지와 정념의 전쟁터 3. 타자의 왜상(歪像): 프루스트 [보론 1] 들뢰즈에게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란 무엇인가? IV. 흩어진 주체와 응시 1. 동일성의 포기와 대체 2. ‘자기의 해석학’과 ‘수동적 초월’ 1) 자기성과 자체성, 타자 2) 수동적 초월 3. 들뢰즈의 ‘타자’-응시와 설명, 함축 V. 사건과 의미의 발생 1. 사건에서 의미로-리쾨르의 경우 1) 담화의 사건, 텍스트의 세계성 2) 은유로서의 사건-의미 3) 오류들로부터 세 번째 소격화로 4) 설명과 이해, 텍스트와 행동 2. 의미에서 사건으로-들뢰즈의 경우 1) 루이스 캐럴과 스토아 2) 명제들과 사건들 3) 사건의 개념 3. 이 장의 결론-긴장과 울림 [보론 2]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VI. 해석학적 순환과 강도의 장 1. 해석학적 순환의 존재론 1) 해석학적 잔여의 두 가지 의미 2)자기성의 심화, 강한 타자성 2. 지시의 평면, 일관성의 평면, 내재성의 평면: 하나의 삶[생명] … . 1) 내재성과 잠재성 2) 내재성의 평면을 채우는 개념들, 카오스의 단면들 3. 강도의 장과 기호들 1) 이중인과-재현과 강도 2) 강도로서의 사건과 시뮬라크르: 흔적과 징후 3) 강도장에서 감각존재로 C. 시간성 VII. 해석의 시간, 사건의 시간 1. 해석의 시간 1)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 불협화음과 화음 2) 미메시스 3) 리쾨르의 프루스트 2. 사건의 시간 1) 들뢰즈의 프루스트 2) 은유와 상징 3) 폭력의 토포스-첫 번째 공현존 3. 모나드(monad) 1) 세 겹의 토포스 2) 시간선의 중첩과 왜곡-개체화에서 종별화로 3) ‘침묵’의 시간-두 번째 공현존 결론 1. 최초의 세 질문에 대하여 2. 카오스모스-세 번째 공현존 |
초록
본 논문은 들뢰즈와 리쾨르의 철학을 비교, 분석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논문의 ‘제목’은 그것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이 논문의 최종적인 목적은 리쾨르의 ‘해석의 철학’과 들뢰즈의 ‘사건의 철학’이 서로 길항하면서 열어놓는 새로운 존재론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사실 리쾨르와 들뢰즈의 철학은 동시대의 철학이지만 조우의 가능성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이 둘을 비교하는 연구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하지만 나는 이 두 철학이 해석의 층위에서 존재론의 층위로, 또한 존재론의 층위에서 해석의 층위로 접근하면서, 긴장을 형성하는 관계를 가진다고 본다. 마치 앞으로 전진하고자 하는 화살과 뒤로 한껏 당겨진 활처럼 해석의 철학은 ‘의미(사건)’을 겨냥하며, 사건의 철학은 ‘사건(의미)’를 가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석 없는 사건은 공허하고, 사건 없는 해석은 맹목이다. 이 긴밀하게 뒤얽힌 의미와 사건은 모두 본 논문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을 증언한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 본 논문은 예비적 고찰에서 해석과 사건이 가지는 철학사적 의의를 탐색하고자 한다. 단순히 비교철학에만 머무르지 않으려는 논문의 의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우회’가 ‘예비적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고대철학의 몇몇 사상들을 조명하고, 또한 그것이 현상학적으로 어떤 모습을 띄고 있는지를 살핀다. 본격적인 논의의 주제와 비교지점은 세 가지다. 첫째, ‘주체와 타자’, 둘째, ‘해석과 사건이 발생하는 장(field)’, 셋째, ‘시간성’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주제와 비교지점을 통과하면서 나는 두 철학의 ‘공현존’의 지점을 표시하고자 했다. 첫 번째 공현존의 지점은 ‘폭력의 토포스’라고 이름 붙여진다. 두 번째 공현존의 지점은 ‘침묵의 시간’이라고 이름 붙여진다. 마지막 공현존의 지점은 ‘카오스모스’로 명명된다. 각각의 공현존의 지점은 리쾨르와 들뢰즈 철학을 비교함으로써 가 닿게 되는 새로운 존재론의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 논문의 결론에 해당되는 논의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이 되는 사태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잠재적 장에서부터 시작되는 최초의 우발점을 의미한다. 이것은 영원회귀의 시간이 시작되는 그 모나드의 사태이며, 기관없는 신체, 아직 미분화된 상태의 ‘알’이다. 이 잠재적(virtual) 사건은 하나의 대사건으로서, 카오스와 인접해 있으면서, (비)존재로부터 생성되는 무한한 속도들이고, 시뮬라크르들이다.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은 순수사건인 대사건으로부터 점점 멀어지지만 현행화되는 계열과 교직하면서 현행적(actual) 사건이 된다. 이것은 사건 자체의 반복이다. 하나는 잠재적 장에서의 사건과 강도장에서의 사건들이고 또 하나는 이와는 본성적으로 다른 현행화된 사건들이다. 그런데 이 잠재적 장에서 오는 충격은 좀체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징후로서도 어떤 기미를 드러내보여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잠재적 사건들은 현행화되는 그 순간 은폐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잠재적 사건들은 늘 현행화된 사건들의 질로 뒤덮여 있다.
2. 영원회귀는 순수사건이다. 어떤 방식으로 우리는 이 영원회귀라는 사건을 알게 되는가? 그것은 도처에 존재하는 영원회귀의 흔적들, 반복과 차이의 징후들, 표지들을 통해서다. 폭력의 토포스는 그래서 사건들이 의미를 획득하고 기호들이 해독되는 그 장소가 된다. 이 장소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유가 길항하는 곳이기도 할 것이다. 길항은 이 구성요소들의 ‘거리’가 없다면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긴장의 ‘거리’가 개념들의 탄생을 돕는다. 해석의 철학은 먼저 개념들을 담론구성체로 취급하고, 텍스트로서 다루지만, 그 근원적인 지향성이 텍스트 너머의 세계성을 향해 간다는 것을 견지한다. 이 과정은 의미획득의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상징과 은유, 그리고 이야기는 해석의 철학이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을 표현하는 구성요소들로부터 유도해 낸 의미들이다. 의미는 하나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해석주체에게 폭력을 가한다. 그것이 기호의 폭력이다. 하지만 이 폭력은 곧 해석의 폭력에 의해 정리될 것이다. 최초의 그 ‘의미의 충격’ 이후 해석을 행하는 지성과 지각은 항상 ‘감수성’에 기대고 있다. 왜냐하면 해석대상의 상징성이나 이야기성을 수용하고 알아채는 것은 늘 감수성이기 때문이다.
3. 해석의 철학은 의미획득 과정에서 ‘사건’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막대한 변화과정, 또는 해석의 철학이 해석의 폭력을 통해 전이시키는 ‘이행’이 있게 된다. 이 폭력은 매우 심대한 의미의 충격을 조성해내는 역능을 행사하면서, 현행화된 사건들, 발산하는 사건들을 해석의 틀 내부로 가져와 새로운 내재면을 구성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게 된다. 심층과 표층이 이에 이르러 전복되는데, 이것은 폭력 이전에 존재하던 전통적인 심층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즉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나는 것의 반복으로서 이 ‘전복’은 곧 ‘발명’이고, 전혀 다른 ‘세계성’을 도출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주제어: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 해석, 기호, 잠재태, 강도, 크로노스, 카이로스, 아이온, 차이, 반복, 영원회귀.
서론*
1. 논문의 가설과 구성
본 논문은 기본적으로 들뢰즈와 리쾨르의 철학을 비교,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논문의 제목은 그러한 한계를 벗어난다. 단적으로 ‘해석과 사건’이라는 주제는 들뢰즈와 리쾨르의 철학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가정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조심스러운 기획이 숨어 있다. 이것은 바로 들뢰즈와 리쾨르의 철학을 통해 ‘해석과 사건’을 ‘철학함’(philosophiren)의 기초로 삼고자 함이다.[1] 이를 위해서는 어떤 과도한 자기선입견에 사로잡힌 견해보다 몇 가지 전체적인 가설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나는 존재론의 분과에서 들뢰즈의 철학을 ‘사건의 철학’으로, 리쾨르의 철학을 ‘해석의 철학’으로 간주할 것이다. 둘째로, 본 논문은 이 두 대가의 철학이 그 기반에서 철학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전개된다고 본다. 이들에게 철학은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역사가 그들에게 미친 영향사의 새로운 전개이며, 그것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의 철학은 단지 자신들만의 고립된 사상의 전개가 아니라, 존재론 전반에 걸친 일신의 결과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이 본 논문의 세 번째 가설이다.
이러한 가설에 기반하여 본 논문은 가설 자체의 증명을 해 나가는 동시에, 이들의 사상이 길항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존재론이 가능한지를 타진해 볼 것이다. 따라서 애초에 비교, 분석이라는 관점에서 시작되는 논문의 진행은 결론에 이르러 해석의 철학과 사건의 철학 자체가 가지는 존재론적인 기반에까지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서론에서부터 본론과 결론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사유의 비교라는 관점뿐만 아니라 철학사에 대한 일정부분의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논문은 들뢰즈와 리쾨르의 개념들을 사용하되 그것이 가진 한계를 상호간에 극복하도록 배치할 것이고, 항상 보다 광범위한 주제를 위해 그 개념들이 전용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전체 기획을 위해 다음과 같은 순서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논문의 첫 번째 부분은 예비적 고찰(A. I~II)이다. 이 고찰은 ‘예비적’이라는 레테르를 달고 있지만, 논문 전체의 ‘정당화’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이 중 전반부인 ‘I. 1~2’에서는 논문의 주제에 해당되는 ‘사건’과 ‘해석’이 철학사 내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전개되었는지 살필 것이다. 철학사를 두 가지 개념적 틀을 사용하여 바라보고자 하는 야심 때문에, 순전히 압축적일 수밖에 없는 이 장에서는 되도록 철학사의 전통적 내용에 충실하면서, 그것이 사건과 해석이라는 주제에 입각했을 때,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서술될 수 있는지 보일 것이다. 이를 위해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아낙시만드로스의 단편들을 먼저 살핀다. 이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하이데거의 도움이 매우 결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2] 이어서 ‘I. 3’에서는 해석학에서 ‘해석’의 의미를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설명하고 그것이 사건의 ‘안과 밖’에서 어떤 작동을 하는지 탐색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3, 특히 ‘3. 3)’은 ‘A. II.’ 전체의 소결론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그리고 ‘A. II’에서는 현상학적인 적용을 시도한다. 여기서는 본격적으로 주제가 전개되기 전에 주제가 현상적으로 어떻게 우리에게 체감되는지를 살필 것이다. 어떤 이론적 틀도 없는 상태에서도 해석과 사건은 우리의 감각적이고 지적인 중추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일종의 ‘사유실험’을 통해 논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대상은 마네(E. Manet)의 작품인 《올랭피아》다. 이 장은 앞선 장에서 다루어진 철학사적 성찰이 ‘지금-여기’에서 어떤 방식으로 집중되고 적용되며 펼쳐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할 것이다. 이 장의 3은 이 실험이 또한 철학사 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말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직접적으로 현상에 대한 목적론적 파악과 기계론적 파악의 종합 내지는 공존과 맞닿아 있다.
두 번째 부분(B)에서 ‘III~VI’은 이 논문의 본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는 우선 들뢰즈의 사건의 철학과 리쾨르의 해석의 철학이 각각의 중요한 텍스트들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번갈아 가며 따져 볼 것이다. 이 탐구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텍스트의 본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두 대가의 철학이 세부적인 지점에서 어떻게 만나고 분기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따라서 사상의 비교 작업이 빠지기 쉬운 간편한 유사성의 길을 경계할 것이지만, 결정적인 유사점들을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작업은 이후에 해석과 사건의 철학이 만남으로써 철학적 사유가 확대되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사유의 확대과정을 위한 기반은 앞선 장들에서 행한 예비적 고찰들이 어떤 선험적(a priori), 내재적(immanent)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확인작업이기도 하며 이것들의 존재론적 기초를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B. III.’과 ‘IV’ 전체는 주체성과 타자성에 할애된다. 이러한 주제선정은 해석과 사건이 주체의 철학과 타자의 철학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V~VI’은 해석과 사건의 ‘발생’을 다룬다. 이 발생은 ‘의미’를 지도리로 해서 상호연관된다. 이 부분은 논문의 다음 부분에서 제기할 주제를 사유하기 위한 사전작업에 해당되는데, 여기서부터 벌써 어떤 평행성, 즉 해석과 사건의 ‘길항’이 발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부분(C)에서는 해석의 철학과 사건의 철학을 시간성을 통해 구명하는 작업을 한다. 나는 여기서 세 가지 시간성, 즉 크로노스(Chronos), 카이로스(Kairos), 아이온(Aion)를 사유하고 그것을 두 철학에 적용하고자 했다. 존재론에서 시간론은 매우 중요하고도 첨예한 주제다. 이런 면에서 이 부분의 도입부인 VII은 매우 중요하다. 이때 들뢰즈와 리쾨르는 프루스트를 매개로 만나게 된다. 이 세 번째 부분의 2장 3절은 이들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어떤 ‘폭력’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 지점을 나는 ‘폭력의 토포스’라고 명명한다. 이 토포스는 두 철학이 본격적으로 만나는 ‘첫 번째 공현존’의 장소로 규정될 것이다. 그런 뒤 3장에서는 시간들의 중첩과 왜곡이라는 주제하에 아리스토텔레스와 라이프니츠로부터 연원하는 ‘모나드’ 개념을 다소 새롭게 해석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나는 ‘침묵의 시간’이라는 두 번째 공현존의 장소를 제기하고자 한다. 따라서 ‘폭력의 토포스’와 ‘침묵의 시간’은 해석의 철학과 사건의 철학이 길항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존재론적 시공간이 형성된다는 것을 암시할 것이다.
결론부에서는 우선 서론에서 던졌던 기초질문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나는 세 질문을 되묻고, 그것에 차례로 답하는 과정에서 어떤 존재론적인 ‘그림’을 그려보려고 시도했다. 다시 말해 결론부에 이르러 나는 앞서 시간성에 대한 탐구에 힘입어 해석의 철학과 사건의 철학이 어떤 새로운 존재론으로 ‘작동’하는지를 살피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해석의 철학과 사건의 철학이 상반되지만 끊임없이 서로의 힘에 기대어 끌어당기는 역설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것을 나는 ‘카오스모스’라는 개념으로 지칭하고, 그 카오스모스를 ‘세 번째 공현존’의 장소로 파악한다.
본 논문은 결론에 이르기까지 이 두 대가의 철학적 사유에 대한 어떤 성마른 갈무리를 피하면서, 사유의 지평을 열어두고자 한다.
2. 왜 사건의 철학이며 해석의 철학인가?
그런데 최초의 지점에서 이 논문은 정당화를 결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째서 이러한 주제, 즉 ‘사건과 해석’이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기획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이 의문은 더 가중된다. 왜냐하면 들뢰즈와 리쾨르의 철학이 각각 ‘사건’과 ‘해석’이라는 주제 안에서 조망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철학사 전반에 이르기까지 확대하는 것은 사전에 이 주제의 역사적, 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 장의 철학사적 고찰 내에서 일정부분 그 정당성이 확보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철학사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방식, 즉 어떤 원리들이나 원인들(4원인) 안에서 사유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 고유의 이론을 전개하기 위한 시금석으로 삼는다는 독단적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철학사적 탐구 이전에 이 두 개념에 대한 일정한 철학적 가공, 즉 가장 상식적인 측면에서부터 시작하여 근원적인 것에까지 이르는 그러한 사유의 작업이 불가피하다.
먼저 ‘사건’ 또는 ‘사건의 철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사건’(événement)은 우선 그것의 일상적 사태 안에서 이해될 때, 수다한 어떤 발생들, 또는 그 발생들을 가능하게 하는 다른 우연적 근거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발생의 최초 지점을 지정할 때마다 그것의 필연적인 근거가 사상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러한 ‘지정’(지칭, désignation) 자체는 찰나의 사건에 의해 지정의 기능을 금세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사유하는 주체는 그 수다한 발생들과 우연에 불과한 근거들을 맥락없이 수용하는 것으로 전락하며, 결국에는 사건의 발생과 사유의 이런 무감각함이 하나의 불분명한 덩어리로 뒤섞이게 된다. 사실 이러한 ‘뒤섞임’은 어떤 심오한 카오스적 사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우리가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일들’(affaires)에 우리 자신이 아무런 ‘태도’(attitude) 없이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일상적 사태 안에서 이해되는 수다한 발생으로서의 ‘사건’은 단순하게 ‘일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사유하고자 하는 ‘사건’에 대해 질문을 구성하자면 다음과 같이 된다. 즉 사건이 ‘일들인 한에서의 사건’(événement inquantum affaires)이 아니라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événement inquantum événement)이 되는 사태는 어떤 것인가? 그런데 이 질문은 그 자체 안에 이미 사건의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은 어떤 ‘사태’(état de chose) 안에서 자신의 특이한(singulaire) 조건을 향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은 사태 안에서의 특이성(sigularité)이라고 하는 성격이 우리에게 드러난다. 여기서 특이성은 일들 가운데 발생하는 사건들의 평범성과는 달리 사태 자체를 매듭짓거나, 아니면 사태에 어떤 해결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것이 어떤 전대미문의 ‘역사적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역사’(탐구, historie)[3]란 그것이 사태 안에서 단독적으로 행해지거나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상적으로만 해석되고, 망각 이전의 과정을 통해 기념비적으로 회상(réminiscence)됨으로써 다시 일상적 사태로 전락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은 그 현상적 사태 안에서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근거를 통해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이라는 모습으로 일신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근거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지금 사유하고자 하는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은 일상적 사태나 역사적 사건 둘 모두를 회피한다. 비록 그것이 어떤 순간에 일상적 사태와 역사적 사태 둘 모두로 변형된다 하더라도 그 급진적(radical, 뿌리까지 닿는)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사건의 철학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 사건은 그 본래적인 의미에서 세계나 삶과 유리되지는 않지만, 그것의 소박함과는 거리(distance)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거리’는 어떤 파열(rupture)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건의 본래면목이 일상이나 역사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그것과 단절되어 있다는 부정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절합(articulation)되어 있다는 실증성(적극성, positivité)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거리는 공간적인 거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은 사태나 역사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사유상의 거리가 곧 공간적인 거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거리가 사유 안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 거리는 사유와 공간, 그리고 시간을 모두 변수로 놓고 계산(logos)하는 것을 통해 드러나며, 결국에는 그 계산 자체가 자신의 존재 근거를 상실하는 지점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 해석(interprétation)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해석’은 그래서 인간-주체의 사유방식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실존의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여기서 사유와 공간, 시간의 변수는 그것 각각이 서로에게 벡터적인 힘점으로 기능함으로써 삼항을 결정하는 사건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거리는 바로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며, 사유와 시간, 공간은 그것의 구성요건이라 할 수 있다.[4] 그렇다면, 이러한 일차적인 특성을 가지는 ‘사건’이란 도대체 ‘철학’에 의해 탐구되지 않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그것이 합당하게 ‘사건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에 어떤 이의가 제기될 것인가?
이제 이로부터 ‘해석의 철학’에 대한 질문은 미리 단서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앞서 ‘해석’이 드러난 맥락은 사건을 철학 안에 정위하면서부터다. 그렇다면 해석은 우선 그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앞에 드러난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의 측면은 처음부터 소극적으로 머문다. 왜냐하면 해석의 기능이라는 것이 단지 사건의 철학을 그 과정 안에서 구성하는 도구이기만 하다면, 그것이 하등 실존의 근거로 등장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해석 없이도 충분히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철학을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인간의 삶과 역사는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며, 그 조건 하에서 사태와 더불어 존재한다. 그리고 사건은 그 본래적 의미가 ‘거리’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고, 양식화된(습관화된) 일상은 이 거리에 의해 규정되며, 이 규정성은 적극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사유와 시간, 공간의 벡터가 구성하는 힘들의 소멸에 직면하여, 어떤 긍정적인 삶의 양식(습관)도 문화와 문명도 창조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사실과 배치된다. 그러므로 해석은 그것의 도구적 측면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측면에서 인간과 세계를 뿌리에서부터 떠받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건의 철학은 해석에 의해 그 본래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며, 그 의미획득의 매순간마다 해석은 사건의 철학에서의 그 ‘철학’과 마찬가지로 철학, 즉 해석의 철학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 해석과정 자체가 의미를 통해 ‘해석의 철학’을 하나의 사건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해석은 사건의 철학에서의 그 ‘철학’과는 다른 부박하고, 도구적이며, 기술적인 작업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한 해석은 뿌리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첫 번째 질문에 이어 또 다른 질문이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즉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을 표현하는 구성요소들은 해석의 철학에서 어떻게 의미를 획득하는가? 이것은 또한 다음의 질문을 도출한다. 해석의 철학은 의미획득의 과정에서 어떻게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이 되는가?
3. 기초질문들의 존재론적 의의
돌이켜 보자. 지금까지 나온 질문들은 어떤 결론의 형태로 제시되었지만 그것이 각각 차지하고 있는 지층은 다르다.
⑴ 사건이 ‘일들로서의 사건’이 아니라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이 되는 사태는 어떤 것인가?
⑵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을 표현하는 구성요소들은 해석의 철학에서 어떻게 ‘의미’를 획득하는가?
⑶ 해석의 철학은 의미획득의 과정에서 어떻게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이 되는가?
나는 지금 당장 이 질문들에 대한 확고한 증명들을 내놓을 수 없다. 1에 대해서는 예비적으로 그 증명이 어떤 사유의 처지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서만 밝혔을 뿐이고 2와 3은 이제 막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구는 논문의 장이 거듭되면서 명확해질 것이고, 결론에 이르러서야 어떤 제대로된 형태로 제시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이 질문들의 계열은 어떤 중차대한 존재론적 상황을 예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지적될 수 있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지금까지 존재론은 단지 ‘존재인 한에서의 존재’(ens inquantum ens)에만 심혈을 기울여 왔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만약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이 이러한 주류 경향에 반기를 들었고, 현대철학에서는 니체의 재발견(하이데거, 들뢰즈)과 더불어 회고적이지만 강력한 사유 이미지들을 통해 생성의 철학 또는 사건의 철학이 발굴되어 왔지만, 그것을 명징하게 표명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면 과도한 해석인가? 이러한 명징한 표명이 아주 사소하게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한 시대 전체의 사유의 광맥을 탐사하고 그것에 어떤 명명작업을 하는 것이 그리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될 수는 없어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철학사는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두 번째로 해석의 철학이 이제야 지향의 초점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것은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다. 사건들 간을 오가는 이 헤르메스신의 모습은 이런저런 잡다한 사태들을 엮어내는 자가 아니다. 그는 오직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에 발을 디디고 다른 사건의 고원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는 자다. 그럼으로써, 헤르메스 자신이 바로 그 고원 안에서 중차대한 ‘사건’, 바로 ‘사건 중의 사건’이 되는 것이며, 그 고원들의 숲 안으로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왜 사건의 철학이며 해석의 철학인지는 분명해 보인다. 즉 철학이 태생적으로 삶의 덧없음(aei metaballontōn)에 어떤 적극적인 형상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라면,[5] 사건은 이러한 삶의 가장 거대한 적수이자 가장 훌륭한 친구일 것이며, 그러한 사건을 해석하는 것은 철학이 직면한 자신의 임무 중의 임무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사건의 철학과 해석의 철학이 철학 안에서 나란히 왕관을 쓰는 것이 불합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이두왕정이란 언제든지 서로를 살육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는 이 이상을 ‘서론’에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너무 빠른 길을 가는 것은 해석이 해야 할 일은 아니다. 해석학적 전통은 지름길 보다 에움길, 직행보다는 우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선 다음 장에서 본 논문은 서론의 논의를 기반으로 철학사를 우회할 것이다. 이러한 우회는 서론의 1에서 밝혔다시피 해석의 철학과 사건의 철학이 철학사적으로 어떻게 정당화되는지 살피는 기회가 된다.
<주석>
* 이 논문에 사용된 들뢰즈와 리쾨르의 주요 저서에 대한 약어는 다음과 같다. 양자를 구분하기 위해 들뢰즈의 저서는 약호 맨 앞에 항상 D를 사용하고, 리쾨르의 경우에는 R을 사용한다. 더 자세한 서지 사항은 참고문헌에 기재하였다. 인용된 구절들은 원문과 영역판, 국역판을 모두 참고하였으며, 필요할 경우 수정 또는 보완하였다.
들뢰즈: Emprisme et subjectivité: DES. Nietzsche et la philosophie: DNP. La philosophie critique de Kant: DPK. Proust et les signes: DPS. Le bergsonisme: DLB. Différénce et Répétition: DDR. Spinoza et le probléme de l'expression: DSP. Logique du sens: DLS. Spinoza, philosophie pratique: DSPP. L'Anti-Œdipe: DAE. Kafka: pour une littérature mineur: DKA. Dialogues: DDI. Mille plateaux: DMP. Francis Bacon: Logique du la sensation: DFB. Le pli. Leibniz et le baroque: DLP. Qu'est-ce que la philosophie?: DQP.
리쾨르: Philosophie de la Volontaire1-Le volontaire et linvolontaire: RVI. De l’interprétation: Essai sur Frued: RDI. La symbolique du mal: RSM. La métaphore vive RMV. Du texte à l'action: RTA. Hermeneutics and the Human Science: Essays on Language, Action and Interpretation: RHH. Temps et récit. Tome I: L'intrigue et le récit historique: RTR I. Temps et récit. Tome II: La configuration dans le récit de fiction: RTR II. Temps et récit. Tome III: Le temps raconté: RTR III. Soi-même comme un autre: RSA.
1) 수학의 경우 그 대상이 명확한데 반해 철학은 그렇지 않다. 이에 대해 칸트는 철학이란 단지 ‘철학함’을 배우는 학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이성적 학들 중 오직 수학만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은 결코 – 역사라면 가능하지만 –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성과 관련하여 단지 철학함만을 배울 수 있다”(Kritik der Reinen Vernunft, A837; B865). 2) 이렇게 고대 철학 안에서 전체 주제의 전거를 찾고자 함은, 고대적 사유의 자양 안에 근대와 현대의 철학적 ‘징후’가 발양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완연한 형태로 갖추어져 있지는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다만 고대적 사유의 존재론적 흔적을 통해 사유의 여명을 드러내고자 한 하이데거의 모범을 따르고자 한다. 그렇다고 근대와 현대철학의 사유를 탐색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당장에 상기(上記)된 부분 다음에 데카르트 철학이 비판적으로 성찰되기 때문이다(B. III). 그리고 나는 필요할 때마다 근현대 철학의 전범을 끊임없이 소환할 것이다.3) 고대적 사유 안에서 ‘탐구’ 즉 historia는 바로 ‘현상들의 구제’라는 주제와 맞닿아 있다. 이것은 현상에 대한 이론적, 학문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며, ‘근거를 밝히거나 설명을 해 줌’(logon didonai), ‘현상들의 구제’(sōzein ta phainomena), 곧 진리, alētheia 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진리란 ‘간과된 채로 망각된 상태에 있는 것을 비망각의 상태로, 비간과의 상태로 바꿔 놓음’이다. 여기서 간과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문제(problēma)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박종현, 『희랍사상의 이해』, 종로서적, 1985, pp. 29-30). 하이데거에게서 이 문제는 다시 ‘존재의 구제’라는 문제로 변형된다. 내 생각에 ‘현상의 구제’에서 ‘존재의 구제’로라는 이 변형의 사건은 곧 해석의 사건(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간의 거리 어딘가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이것은 다시 ‘생성의 구제’로 이어질 것이고 이는 ‘사건의 구제’를 가능하게 하는 사유이미지로 구축될 것이다.※이 논문에서 인용문 출처는 본문 인용문 뒤에 ‘약호, 페이지수’, 이를테면, ‘박종현 1985, 29-30’과 같이 표시할 것이다.
4) 사건의 철학 안에서 이 ‘거리’의 문제, 그리고 ‘구성요건’의 문제는 이 논문의 결론부에 그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5) ‘삶의 덧없음’이라는 주제는 헬라인들의 기본 정조(sentiment)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 정조는 비극시기 이전 서정시의 시대에 많이 드러나며, 그 반대급부로 ‘영원한 삶에 대한 종교적 희구’를 낳게 된다. 디오니소스 숭배나 오르페우스 비교(秘敎), 그리고 크세노파네스나 피타고라스의 철학적 종교라고 할 만한 것들이 이에 해당된다. 다른 한편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은 퓌시스(physis)에 대한 탐구로 흘러갔다(박종현 1985, 1부 1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