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스파티움론의 라이프니츠적 계보(플로리안 베르마이렌)
*원문서지: Florian Vermeiren, ‘The Leibnizian Lineage of Deleuze's Theory of the Spatium’, Deleuze and Guattari Studies 15.3 (2021), Edinburgh University Press, 321-342
들뢰즈 스파티움론의 라이프니츠적 계보
저자: 플로리안 베르마이렌(Florian Vermeiren)
발췌번역: 박준영(NOMAdia, 수유너머 104)
초록
이 논문은 들뢰즈의 스파티움(spatium)론에 있어서 라이프니츠의 영향을 탐구한다. 데카르트의 연장성(extension)과 뉴턴 공간에 관한 라이프니츠의 비판은 그를 내적 규정과 내적 차이에 관한 공간 개념으로 이끈다. 따라서 공간은 실체들(substances)에 내재적인 개체적 관계들의 구조로 이해된다. 몇몇 니체적인 교정작업을 거쳐, 들뢰즈는 스파티움을 개체적(individual) 관계들 대신에 개체화하는(individuating) 차이들의 측면에서 이해한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의 공간은 연장(양)과 질 둘 모두를 생산하는 어떤 발생적 공간으로 변형된다.
키워드: 거리, 연장성, 강도적 크기, 질, 양, 공간
I. 서론
[321]이 장[『차이와 반복』 5장 ‘감각적인 것의 비대칭적 종합’]은 개체화론을 담고 있는데, 여기서는 개체적 질들과 양들의 구성이 강도적 차이의 발생적 힘을 통해 이해된다. 후자[양]는 ‘강도적 크기’, ‘거리’ 그리고 ‘스파티움’의 측면에서 개념화된다. 이 모든 개념들은 (...) 라이프니츠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322]공간적 차이들은 데카르트와 뉴턴에게는 외적 차이들이다. 라이프니츠는 내적 차이로서의 공간을 구축하고자 시도하는데, 그것이 이른바 스파티움이다. 이 공간은 세계에 관한 실체들의 표현을 통해 각각이 연관되는 실체들의 질서에 따라 이해된다. 스파티움 안에서 ‘거리’는 표현의 등급 안에서 어떤 차이, [323]즉 연장적 양이 아니라 강도적 크기이다. 들뢰즈는 이 개념을 더 멀리까지 밀어부쳐 외화되는 연장(양)과 질을 생산하고 차이의 형식들을 축소하는 차이의 순수하고 발생적인 형태의 측면에서 스피티움을 이해한다.
II. 기하학을 넘어: 기계론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비판
[323]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문제들이 라이프니츠를 공간에 대한 상이한 개념화로 이끌었는데, 그것은 연속성과 관련된 형이상학적 주제들과 자연에 대한 기계적 접근의 한계였다. 나는 여기서 후자에 집중할 것이다.
[324]근본적인 문제들 중 하나가 있었는데, 노년의 라이프니츠는 이 점을 강조했다. 그것은 그의 초기 이론에 따르면, 물질적 객체들은 서로 간에 쉽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Leibniz 1989: 123-4). 그러나 분명 당신은 구슬 만큼이나 쉽게 바위덩어리를 옮길 수는 없다. 이와 같은 문제는 라이프니츠로 하여금 물질에 관한 상이한 개념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었다. 그는 물질에 기하학적 연장성 이상의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Leibniz 1989: 124-5). (...) 노년의 라이프니츠는 운동 자체가 공간(plenum)에는 없는 차이의 형식을 요청한다고 논증한다. “물질 자체 안의 완전한 균일성(uniformity)의 가정 아래에서는, 우리가 하나의 장소로부터 다른 장소를, 또는 동일한 장소 속 하나의 물질 조각으로부터 다른 물질 조각을 전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Leibniz 1989: 164). 요컨대 운동, 변화 그리고 개체화는 물질 안에 단순한 연장성 이상의 어떤 것을 전제한다. (...) “자연 안에는 기하학적으로 규정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 ... 순수하게 기하학적인 것으로서의 연장성과 그것의 변화량 외에, 우리는 보다 높은 어떤 것, 이른바 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ibid. 308). 따라서 데카르트의 기계론에 반하여, 라이프니츠는 그의 동력학 이론을 발전시키는데, 여기서 힘은 기하학 너머에 존재하는 자연의 특성이다. 라이프니츠는 한편으로는 힘과 다른 한편으로 속도 또는 운동 사이에 본성적인 차이를 강조한다. 후자는 물리적인 자연을 파악하는데 충분치 않다. “물리학이 요구하는 것은 과거와 특히 미래 또는 객체의 ‘경향성’을 파악하는 어떤 것이다.” (...) 그러므로 운동하는 객체를 정지한 객체로부터 구분하는 것은 객체의 현행적 상태를 초과하는 힘 또는 경향이라는 개념을 전제한다. 더 나아가 운동은 어떤 힘이나 경향성의 원리가 없다면, 완전히 상대적이다(Leibniz 1989: 308). 운동은 그 자체로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지를 규정하는 어떤 단순히 외적 규정이다. 여기서는 운동 너머의 어떤 것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객체의 내적 규정이다. 여기서는 운동 너머의 어떤 것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객체의 내적 규정이다. 그와 같은 내적 원리 없이는, 우리는 자동차의 움직임을 지구의 회전과 구별할 수 없게 된다. (...) [325]요컨대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단순한 연장성 너머의 어떤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결론으로 이끌려 가는데, 그것은 이른바 잠세성(potentiality)의 수준이다. 데카르트 철학은 효과들(effects)의 수준에 남는다. 데카르트적 물질은 결코 생기 없는 수동성 이상의 어떤 것이 될 수 없으며, 움직여지되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들뢰즈에 따르면 데카르트적 기계론의 효과는 “자연을 그것의 잠재성 또는 잠세성, 어떤 내재적 역능, 어떤 고유한 존재로부터 격리시킴으로써 가치절하한 것”이었다(Deleuze [1968]1990: 227). 라이프니츠는 다음과 같이 쓴다. “따라서 데카르트주의자들이 물체[신체] 안에서 그 어떤 능동적, 본질적 그리고 변형가능성의 원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물체[신체]로부터 모든 능동성을 제거하도록 강제되었으며, 그것을 유일한 신, 엑스 마키나(ex machina)로 불리는 그것으로 이전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좋은 철학이라고 할 수 없다”(Leibniz 1989:254). (...) 들뢰즈의 말에 따르면, “능동과 수동의 힘을 자연에 보존함으로써,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신자연주의’를 구성한다”(Deleuze 1990: 228). (...) 기계론은 자연의 이러한 외면성 너머로 움직여가지 않는다. 우리가 요청하는 것은 라이프니츠가 ‘내적 원리’라고 말한 것, 즉 어떤 보다 깊은 자연 또는 ‘본질’(essence)이다(Leibniz 1989: 251). 요컨대 우리는 형이상학으로 물리학을 완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힘은 결코 여기 그리고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의 효과에 의해 보여질 수 있고 측정 가능할 뿐이다(ibid. 128). 왜냐하면 힘은 그 자체로 “오로지 정신에 의해서만 지각가능하기” 때문이다(ibid. 125).
III. 충족이유율과 식별불가능성의 원리는 내적 차이들의 공간을 요구한다.
[326][뉴튼과는 달리]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실체의 모든 관계들은 그것에 내재적이다. 따라서 어떤 실체의 공간과 시간 상의 위치는 그것의 개체성 안에 포함된다. (...) 이것은 순수 외재적 명칭에 관한 라이프니츠의 일반적 거부, 즉 “어떤 실체의 명칭이나 규정은 결코 그것의 개체성에 외재적이지 않다”는 주장과 일치한다(e.g. Leibniz 1996: 227; Leibniz 1969: 526-7). 이 모든 것은 라이프니츠 철학의 주춧돌을 형성하는 두 가지 원리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족이유율과 식별불가능한 것들의 동일성의 원리라는 이 두 가지 탁월한 원리들은 형이상학의 상태를 바꿀 것이다”(Leibniz 1969: 687).
[326]요컨대 [뉴튼의] 절대 공간에는 세계(또는 어떤 객체)의 위치를 위한 그 어떤 충족이유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즉 “이러한 무분별하고 무규정적인 사물들 안에서는, 결정된 것에 대한 그 어떤 이유도 발견될 수 없다”(Leibniz 1973: 174).
IV. 스파티움과 강도적 크기에 관한 라이프니츠의 논의
[327]연장성은 실체 안에서 발견된다. 또는 더 낫게 말하자면, 그것은 그러한 실체들 간의 관계 안에서 발견된다. 그러한 관계들은 공간의 진정한 실재, 즉 스파티움을 형성한다. (...) 연장성은 실체들의 공간을 가정하는 불완전한 개념이다. 데카르트적 연장성과 뉴튼적인 절대 공간은 둘 모두 이러한 실체적 공간으로부터 나온 추상물이다. (...) 그는 텅 빈 공간의 관념은 그러한 실체들 간의 관계들의 질서로부터 개별적 실체들을 제거함으로써 생산된다고 말한다.
[328]장소(place)는 라이프니츠가 ‘자리’(situation, situs) 또는 ‘위치’(location, lieu)라고 부르는 것의 추상이다. 자리는 여타 실체들과의 관계의 질서 안에서 실체의 위치다. 이 자리는 다른 실체들에 의해 점유될 수 없다. 자리 또는 위치는 실체 자체의 특이성과 관계를 맺는다. 마르시알 게루(Martial Gueroult)는 “자리는 그 모든 특이성에서 바깥 쪽을 향한 닫힌 모나드의 결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쓴다(Gueroult 1970: 263). 그러니까 위치는 내적 질의 외적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발생하는 것은 어떤 공통되고 동일한 공간이 아니라, 그 안에 모든 실체가 특이한 장소를 가지는 공간, 즉 스파티움이다. 텅 빈 절대 공간은 모든 텅 빈 장소들의 총합이지만, 스파티움은 모든 위치 또는 자리들의 질서다. 따라서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단지 ‘사물들의 질서’인 것이다(Leibniz 1969: 688). 공간은 개별적 실체들 간의 관계들의 구조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328]어떤 공통 공간을 이미 전제하지 않는 공간을 구성하는 이 질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라이프니츠는 그 안에서 사물들이 그것들의 표현의 정도를 통해 질서 잡히는 어떤 표현적 질서에 대한 생각으로 연장적 장 안에서의 배치라는 생각을 대체한다.
[328]이러한 질서 안에서 소재(position), 즉 실체의 환경(situation)은 (...) 표현의 정도라는 측면에서 이해된다. 표현 개념은 [329] 실체들이 어떻게 서로 간에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내적 분기(denomination)를 통해 질서 잡힐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핵심이다. 세계의 표현은 어떤 순수하게 내적인 실체의 사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세계의 표현들은 서로 간에 연관된다. 왜냐하면 실체들이 공가능한(compossible) 한에서, 그것들은 동일한 세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세계 표현들 간의 차이들은 마치 “자연 안의 모든 것이 정도상에서 일어나는 것처럼”(Leibniz 1996: 473) 정도(degrees)를 구성한다. 각각의 실체들은 전체 세계를 지각하지만, 상이한 명석성과 혼잡성의 정도에 따라 그렇게 한다(Leibniz 1989: 211). 따라서 실체들은 그것들의 표현의 정도에 따라 배치될 수 있으며, 이것은 내적 분기이다. 요컨대 뉴턴 공간에서 소재는 어떤 외적 분기이지만, 스파티움에서 자리는 내적 분기, 즉 표현의 정도이다.
[329]“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Leibniz 1996: 56) (...) 이러한 [실체들 간의] 근접성은 연장적이거나 전통적인 공간적 개념들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 근접성은 표현적이다. 즉 이것은 표현의 정도 상의 미분적(infinitesimal) 차이와 관련된다. 각각의 실체는 무한하게 작은 변화만을 가진 세계를 표현하는 실체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 만약 두 실체들이 공가능하다면, 이는 그것들이 표현적으로 연속적인 일련의 실체들에서 연결된다는 의미이다. (...) 로버트 라타(Robert Latta)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실체의 단일성은 연장적이라기 보다 강도적이어야 하며, 전체의 연속성은 단순히 텅 빈 동질성이 아니라 강도성의 무한한 정도들을 통한 연속성이어야 한다”(Latta 1898: 30-1).
[330]라이프니츠는 연속성에 관한 또 다른 생각, 즉 표현적 연속성이라는 관념을 발전시킨다. 일련의 실체들은 빽빽한데, 그것은 연장적 방식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질적(강도적) 또는 표현적 방식으로 그러하다(see Crockett 1999: 135).
[330]‘거리’와 ‘길이’ 사이의 구별로서 라이프니츠의 공간 이론 (...) 절대 공간은 길이를 가지지만, 관계적 공간은 거리들을 가진다. 1 미터 길이는 100 센티미터로 나누어지는데, 왜냐하면 1 미터와 1 센티미터가 동질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거리들은 이질적인데, 왜냐하면 거리가 실체의 개별적인 세계 표현이기 때문이다. “거리와 거리의 정도는 또한 사물 자체 안에서 어떤 원격적인 것을 표현하는 정도를 포함하기도 한다”(Leibniz 1973: 133). 따라서 강도적 크기는 그것이 측정하는 사물에 개별적이다. 이 특이성과 이질성 덕분에, 강도적 크기는 나누어지거나 더 작은 양들로 환원될 수 없다. 요컨대 그것들은 계량적인 양인 아니다. 그러나 만약 그러하다면, 그것들은 어떻게 어떤 양을 구성하는가? (...) “관계적인 것은 그 양 뿐 아니라 절대적인 것들도 가진다. 예컨대 수학에서 비율 또는 비례는 그것들의 양을 가지며, 로그에 의해 측정되는데, 그것들은 관계들이다. [331]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이 관계들로 구성된다 해도, 그것들은 여전히 그것의 양을 가진다”(Leibniz 1989: 341). 거리 또는 관계적 공간의 양은 따라서 순서와 관계의 양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표현적으로 연속적인 실체들의 질서의 양으로 이해해야 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질서의 양을 서수와 관련하여 이해한다(Deleuze 2004a:291-2). “순수 스파티움은 그 낱낱이 근접성(proximity)의 질서로 구성되는데, 여기서 우선 근접성의 개념은 정확히 어떤 서수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연장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Deleuze 2004b: 174). (...) 기수 10은 10개의 단위들로 세어지며 기수 5의 두 배로 환원될 수 있다. 하지만 서수 10은 오로지 어떤 순서 안에서 10번째로 지칭되며, 그러므로 기수 5의 두 배로 환원될 수 없다. 따라서 서수는 강도적 크기와 마찬가지로 특이하고 불가분하다.
[331]두 실체들 간의 거리는, 어떤 강도적 양으로서, 세계의 다양한 강도적 표현들의 변화 정도를 나타낸다. (...) 데카르트적이고 뉴턴적인 개념이 결여하고 있는 것, 다시 말해 내적 규정은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공간 이해에 있어서 중심적 원리가 된다. 들뢰즈는 이러한 공간에 대한 접근을 강도적 차이에 관한 이론 안에서 더 멀리까지 발전시킬 것이다.
V. 강도, 질 그리고 양에 관한 들뢰즈의 논의
[332]우선 들뢰즈는 전-개체적 특이성들(또는 사건들)을 개체들에 선행시킨다. 우리는 이 특이성들이 ‘느슨한’ 또는 비-개체화된 술어들[속성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들뢰즈는 이러한 것[강도적 크기]를 개체화하는 전-개체적 차이로 이해한다. 이를 통해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의 체계를 개체화 이론으로 활용하는 것이다(see Vermeiren 2022). (...) 모나드론의 전-개체적 판본 (...) 라이프니츠의 이론 자체에서 이미, 술어들 또는 들뢰즈가 특이성의 ‘사건들’이라고 부른 것은 개별적 실체에 앞선다. (...) [333]하지만 들뢰즈는 필연적 조건으로서 공가능성을 제거한다. 몇몇 니체적인 요소를 라이프니츠에 주입함으로써 그는 조화 대신 발산(divergence)을 실재성의 조건으로 도입한다. (...) 그는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종합적 개체화 이론으로 뒤바꾼다. 술어들은 신과 개별적 실체 둘 모두로부터 자유로워지며, 따라서 개체들이 생산되어 나오는 진정한 비인격적인 전-개체적 사건들이 된다. 그러므로 필연적 조건으로서 조화와 공가능성의 이러한 제거는 들뢰즈가 라이프니츠에게 행한 독자적인 중요한 수정인데, 왜냐하면 개별적 실체로부터 전-개체적 특이성들로의 이러한 전환이 이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현행화하는 이러한 전환은 잠재적으로 이미 라이프니츠의 이론 안에 현존한다. (...) 들뢰즈가 어떤 조건으로서 공가능성을 제거할 때, 모나드가 아니라 특이성들과 사건들이 표현적으로 된다.
[334]더 이상 인과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다시 한 번 그리고 이번에는 배타적으로 표현 관계 (...) 표현되어지는 그 어떤 공통세계도 존재하지 않아도, 전-개체적 특이성들은 표현적이고 표현의 측면에서 각각 관계를 맺는다.
[334]따라서 들뢰즈는 연장성이란, 사물들이 ‘발산 없는 차이’(Leibniz 1989: 175)라는 동일성의 단순한 반복으로의 차이의 축소라는 라이프니츠의 생각(Leibniz 1989: 130)을 더 멀리까지 밀어 붙인다.
[334]질과 양이 그토록 이질적이기 때문에 전자로부터 후자로의 생성은 불가해한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는 어떤 보다 풍부한 해석을 제공한다. 그는 만약 우리가 질을 양과 같은 수준, 즉 그것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의 결과로서 놓는다면, 연장성의 발생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논증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강도는 발생적 기원이다. (...) [335]들뢰즈는 강도, 양 그리고 질 간의 이 관계를 차이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335]지속으로 정의되는 시간 (...) 그[베르그송]는 질과 양의 혼합물인 강도적 크기를 거부한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엄격한 이원론이 오직 방법론적일 뿐이라고 논증한다(Deleuze 2004b: 32). (...) ‘정도의 차이’와 ‘본성적 차이’는 들뢰즈에 의해 상이한 ‘차이의 정도들’로 이해된다(Deleuze 2004b: 49一50). 이 차이의 정도들은 그 다음으로 강도의 정도, 다시 말해 강도적 크기로 이해된다. 『차이와 반복』에서 차이의 일차적 형식은 질적이지도 않으며 양적이지도 않고, 오로지 강도적이다. (...) 강도는 차이의 순수 형식이다. 다시 말해 라이프니츠는 이 점에서 들뢰즈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첫째, 들뢰즈는 차이 또는 강도를 그 자체로 비동등적인 것, 즉 이질성(disparateness, [본성적 차이])으로 이해한다(Deleuze 2004a: 281). (...) 라이프니츠도 상당히 이질적인 요소들을 드러낸다. (...) 들뢰즈는 이질성이라는 개념을 비슷한 방식으로 부분들이 완전히 이질적인 나눔의 형식을 의미하도록 사용한다. (...) [336]강도적 크기는 또한 가분적(divisible)이지만, 각각의 나눔을 통해 본성적 차이가 발생한다(Deieuze and Guattari [1980] 1987: 483). 전체적인 것은 이에 따라 그것의 부분들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므로 강도적인 것은 이질적인 부분들로 나누어진다. 들뢰즈가 ‘그 자체 비동등성, 즉 이질성’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이러한 무한한 강도적 분할, 즉 무한한 차이의 차이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 생각은 물질의 무한한 분할이 상이한 실체들의 무한성 위에 기초해야 한다는 라이프니츠의 생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 이질적인 부분들에서의 무한한 분할은 달리 말해, 차이들의 무한한 분할이다. 둘째, 우리는 함축(implication[안주름 운동])의 측면에서 차이와 강도를 이해해야 한다. (...) 강도는 우선적으로 스스로 함축된다. 즉 ‘함축하고 함축된다’(Deleuze 2004a: 297). 이 함축적 차원은 들뢰즈가 ‘깊이’(profondeur)라고 부른 것이다. 이 ‘깊이’와 함축에 대한 생각은 자주 베르그송적인 기억의 측면에서 이해되는데, 모든 강도는 과거의 응축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파티움으로 이해하는 공간 또한 깊이를 가진다. 사실상 스파티움의 함축적 깊이는 두 번째 종합에서 시간의 깊이와 일치한다. “연장성의 펼침(explication[밖주름 운동])은 첫 번째 종합, 즉 습관 또는 현재의 종합에 놓여 있다. 그러나 깊이의 함축은 두 번째 종합, 다시 말해 기억과 과거의 함축에 놓인다”(Deleuze 2004a: 289). 따라서 들뢰즈는 공간과 시간을 연결한다. 베르그송과 대조적으로, 그것은 더 이상 가산적인 공간과 시간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즉 한편으로 스파티움과 기억으로서의 강도적 공간과 시간, 다른 한편으로 연장성과 현행성으로서의 연장적 공간과 시간 사이의 대립이다.
[337]그러므로 스파티움은 이러한 표현의 정도들의 질서로 구성된다. (이와 비슷하게, 베르그송적 기억은 그 자체로 과거의 응축의 정도들의 질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들뢰즈는 차이를 함축으로 이해하는 바, 이러한 표현이나 응축의 정도들은 차이의 정도들일 뿐이다. 강도=차이=차이의 정도들. 우리는 이렇게 해서 특별히 들뢰즈적인 스파티움 개념(그리고 베르그송적인 과거 개념)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차이의 정도들의 질서 또는 계열들이다. 그러므로 스파티움에서 거리들은 질적이지도(본성적 차이), 양적이지도(정도상의 차이) 않으며, 강도적, 즉 차이의 정도상의 차이(difference in degree of difference)이다. 따라서 스파티움은 함축적 차이로 구성되는데, 이는 차이가 언제나 이미 차이의 정도들 간의 차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 무한에 이르기까지 공명하는 무한하게 중첩된 차이는 스파티움의 깊이, 무한하게 이어지는 차이의 정도들이며, 이것은 끊임없이 서로를 함축한다”(Deleuze 2004a: 281).
[337]하지만 불완전한 이해를 통해 실체는 반복가능한 것으로 현상한다. 몇몇 이웃하는 실체들을 취해 보자. [338]A, B 그리고 C, 이 각각은 세계의 어떤 특이한 표현이다. 이들이 스파티움 안에서 서로 간에 가까이 자리할 때, 이 차이나는 세계의 표현들 간에 연속성에 가까운 형식이 존재하게 된다. 각각의 실체들에 속한 술어들의 무한성 안에서 많은 술어들이 A, B 그리고 C에 의해 공유된다. 우리가 이러한 실체들에 대해 불완전한 이해를 가지면서 이 무한한 것들로부터 술어들을 추상할 때, 하나의 이미지가 그와 같은 공통 특성의 단순한 반복으로서 이러한 실체들에서 출현한다. 요컨대 연장성은 강도적 차이, 즉 세계의 표현적 차이, 라이프니츠 모델에서 각각의 실체에 특유한 차이 또는 들뢰즈의 이론에서 전-개체적인 특이성의 추상화의 결과다. 이 연장성의 발생을 통해, 우리는 강도적 차이로부터 양적 차이로, 다시 말해 높은 차이 정도로부터 낮은 차이 정도로 움직인다. 라이프니츠가 쓴 바와 같이, 연장 안의 객체들은 ‘다양성 없는 차이’이다(Leibniz 1989: 175).
[338]양은 결코 실체에 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그 실체가 무엇인지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들뢰즈는 연장의 발생을 강도적 차이의 ‘펼침’으로 이해한다. 스파티움의 강도적 크기는 “그것이 외부에서 스스로를 삭제할 때조차, 그 자신 안에 존속하는 하나의 차이(a Difference)”이다(Deleuze 2004a: 293). (...) 또한 강도적 차이는 함축적이다. 그것은 전체 세계를 함축한다. 대조적으로 연장적 차이는 펼침이다. 그것은 연장적 매개, 즉 사물들이 비교될 수 있는 공통 공간 안에서 사물들을 측정한다.
[338]라이프니츠와 베르그송 둘 모두, 연장적인 동질적 양에 대한 그들의 응답에서 존재론적 토대, 즉 양과 연장 아래에 놓인 어떤 차이의 일차적 형식으로서 질에 의존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질을 차이의 발생적인 또는 우선적인 형식으로 취하지 않는다. “그 자신의 본성에 있어서, 차이는 더 이상 연장적이지 않은 만큼 질적이지도 않다”(Deleuze 2004a: 298). 반대로 질도 마찬가지로 일반성의 형식을 따른다. “(...) 질들은 본성적으로 다르지만 언제나 어떤유사성의 가정된 질서 안에서 그러하다”(Deleuze 2004a: 298) “유사성이 언제나 질의 법칙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결국 연장성과 질은 일반성의 두 형식이다” (Deleuze 2004a: 295).
[338]연장성을 ‘채우는’ 질은 그러므로 그 자체로 특이한 것이 아니라, 반복가능한 일반성이다. 질은 연장성의 ‘동등성’을 채우는 ‘유사성’이다. 둘의 생성은 상호 얽혀 있다. (...) 질적 차이는 연장의 생성 안에서 물러나는 차이를 회복하며, 그것을 연장성을 채우는 질들 사이 안에 본성적 차이로서 놓는다. 질적 차이는 양적 차이가 멈추는 곳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연장성 안에서 강도적 거리들의 동질화는 본성적 차이, 즉 그러한 동질적인 연장적 반복들 사이의 질적 간극을 생산한다.
[339]실체들의 질서로서 스파티움은 또한 힘들의 질서이다. 이는[라이프니츠의 힘 이론은] 마찬가지로 들뢰즈의 이론 안에서 돌아온다. “일반적 또는 강도적 양에서 에너지는 스파티움이다”(Deleuze 2004a: 301). 강도적 크기와 강도적 차이는 따라서 힘과 에너지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기도 한다. 공간의 재개념화에서, 라이프니츠와 들뢰즈는 둘 다 단순한 현행성의 차원에서 잠세성과 잠재성의 차원으로 넘어 간다. 우리는 따라서 결코 강도를 현행적 또는 경험적 측면들에서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 강도는 결코 현행적이지 않으며 현행성을 개체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