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송/지속/기억/다양체'(from 들뢰즈 사전들)
들뢰즈는 프랑스 철학자인 베르그송을 재생시킴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이로써 베르그송은 들뢰즈 세대의 핵심적인 사상가의 표본이 되었으며 베르그송의 저작들은 시간, 운동, 기억 그리고 지각과 관련된 분야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게되었다. 라이프니트, 스피노자, 니체, 흄, 아르토, 가타리와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을 따라,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경험주의를 철학의 전통적 입장에 도전하는 것으로 취급했다. 특히 초월론적 요소들, 현상학적 가정들, 그리고 ‘인식’와 ‘진리’에 대한 탐색에 있어서 그러했다. 베르그송에 대한 들뢰즈의 철학적 관심은 그의 전체 저작의 중심에 놓여 있으면서 다양하게 펼쳐진다. 비록 20세기 후반의 철학의 고전에서 배제되긴 했지만, 20세기 초반에 베르그송의 저작은 유명했으며, 프랑스 입체파에서부터 영어원 작가인 휴움(T.E. Hulme)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과 문학의 무대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베르그송에게서 들뢰즈는 그의 핵심적인 철학적 목적의 협력자를 발견한다. 그것은 주로 시간성에 관한 개념들과 아이디어들, 운동과 지속의 감응적 본성, 다양체(multiplicity)와 차이의 정치적 함축, 유전학적인 형태변이 운동 그리고 습관과 연합되는 계열로서의 사건들의 시간적 인과성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에 대한 그의 관심을 흄에 관한 책, 『경험론과 주체성』에서 암시해 놓았다. 그리고 1963년에 들뢰즈는 그의 책, 『베르그송주의』를 내 놓는다. 여기서 그는 ‘베르그송으로의 귀환’을 주장하는데, 이는 그가 베르그송의 세 가지 핵심 개념이라고 말한 ‘방법으로서의 직관’, ‘과학의 형이상학적 지향에 관한 발명과 실용성’에 대한 요청, 그리고 ‘다양체(다양성)에 관한 논리적 방법과 이론’을 통해 확장적으로 수행된다. 베르그송은 운동에 관한 존재의 운행규칙에 대해 의문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의 본래의 열정적인 관심사였던 생명으로서의 주체와 대상들에 관한 글도 썼다. 들뢰즈는 후자의 방면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그가 생기론(viatalism)에 관한 자신의 진술들을 가다듬도록 만들었다.
베르그송의 개념들은 들뢰즈의 저작인 『차이와 반복』에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 기억과 반복, 시간의 강도적 외연적 형식 그리고 시간의 물리적 운동들에 관한 생각들을 발전시킨다. 이 모든 것들은 베르그송의 책, 『물질과 기억』(1896)에서 논의된 시간의 역설적 양상들에 관한 논의들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지속의 동적 모델을 제안한다. 지속의 개념은 공간적으로 먼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지적인 운동을 통해 그것의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대체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창조적 진화』의 후반부에서 베르그송은 그의 철학적 표현 안으로 영화적인 모델을 도입한다. 이때 베르그송은 일상적인 지적 사유에 관련된 고대 철학의 영화적 특성에 주목하고 있다(B1911: 331-33). 이 모델로부터(그리고 시간에 관한 칸트적 관념과 사유와 운동에 대한 헤겔적 개념으로부터) 들뢰즈는 영화 스크린의 움직이는 이미지와 관련된 지각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해 설명을 전개한다. 이때 들뢰즈는 그러한 운동의 파악을 통해서가 아니라 음향과 시각적 등록과정의 특수한 순간들을 통해 설명을 수행한다. 이 들뢰즈의 논의는 그의 두 권의 책인 『시네마1: 운동-이미지』과 『시네마2: 시간-이미지』에 길게 전개되어 있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기억은 지각 이미지들의 시간적 융합으로 파악된다. 이 생각은 들뢰즈가 영화의 철학적 중요성에 대해 논의를 전개할 때 중요하고 핵심적인 전제가 된다. 들뢰즈는 영화에 관한 그의 두 번째 책, 『시네마: 시간-이미지』에서 가능한 기억의 상태들에 관한 상이한 유형들, 즉 꿈, 백일몽, 데자부 그리고 죽음에 관한 베르그송의 관심으로부터 내용을 이끌어 낸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들뢰즈는 기억의 기능들, 즉 환영(fantasy), 환각(hallucinations), 우리가 현재(이제 과거가 되는)를 활용하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기억을 만드는 ‘약속-행위’(니체), 극장, 기억의 묘사 발명과 제거, 그리고 수적인 타자들을 통해 존재하는 ‘인지’ 과정 개념(알랭 로브-그리에)과 같은 개념들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베르그송을 따라, 들뢰즈는 꿈이나 기억 사건들 또는 가상의 각성된 수용자의 지각적이고 인지적인 능력들이 어떻게 요인들의 복잡한 네트워크에 의존하는지 기술한다. 『물질과 기억』에서 베르그송이 논하는 바에 따르면, 지각적 주의력의 체계는 사태에 대한 ‘자동적’ 또는 ‘습관적’ 인지에 달려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기억하기(remembering)의 상이한 양상들은, 대상의 기술(description)뿐 아니라 대상 자체의 특성들에 감응하면서, 사태들에 관한 지각에 주어진 주의력의 수준에 따라 조절된다. 지속과 운동 그리고 시간의 다양체들에 관한 성숙한 개념은 베르그송으로부터 발전되어 나아간 것이다.
- Felicity J. Colman, ‘Bergson, Henri(1859-1941)’,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26-28.
들뢰즈는 철학적 교설의 급진적인 시작점으로 베르그송에 관심을 가진다. 지속(durée)은 들뢰즈가 채택한 베르그송의 여러 핵심 개념들 중 하나다. 들뢰즈는 이 개념으로 차이의 철학을 전개한다. 베르그송에 대한 들뢰즈의 전형적인 접근방식은, 베르그송 개념에 대한 그의 해석과 사용인데, 이는 거의 전반적으로 그 개념들에 조응하지만, 파격적으로 기이한 방식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우리는 지속이라는 개념을 오직 철학적 직관(intuition philosophique)이라는 베르그송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만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철학적 직관이란 신중한 반성적 의식(deliberate reflective awareness) 또는 의지적인 자기-의식(willed self-consciousness)이라고 할 수 있다. 직관은 의식성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정신적 삶이 본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진행중인 정신적 활동은 그것의 운동역학 안에서 그리고 그 상태들의 상호간의 침투 안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어떤 내적 시간을 구성해 준다. 정신적 삶은 따라서 어떤 종류의 흐르는 경험이며 지속은 이러한 흐름의 즉각적인 의식이다.
베르그송은 직관의 발견물들은 이미지들에서 가장 훌륭하게 표현되며, 그리고 지속은 음악에 관한 유비들을 사용함으로써 잘 설명된다고 본다. 정신의 상태들은 마치 멜로디의 부분들 처럼 함께 흘러 간다. 이 정신의 상태들은 지연되는 이전의 조각들, 조각들의 통일성을 예견하는 미래, 각각의 조각들의 침투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그것들의 상호연결에서 극도의 근접성을 드러내면서 상호간에 작동한다. 이 흐름을 조각들의 완전한 집합으로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음악은 언제나 끝나기 바로 직전에 계속되며, 새로운 조각들의 부가에 의해 항상 대체되기 때문이다. ‘정신’(mind)이나 의식을 이해의 체계로 말하는 것은 지속의 유비적 속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흘러가고, ‘아직 아님’과 ‘이미’ 지나감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을 앞질러 간다.
베르그송은 지속의 양화(quantification)를 사유하면서, 그것이 그 순간들, 즉 살아 있는 실재들로 이루어진 불연속성이라고 본다. 그것은 ‘시계의 시간’, 다시말해 물리적이고 실증적인 삶의 시간과 대조를 이룬다. 이 실증적인 시간은 요소적인 순간들의 끝과 끝을 어떤 상호참조적인 격자 위에 정립함으로써 시간을 공간화하거나, 무신경하고 부정확한 물리적 이미지로 시간-조각의 숫자를 사용한다. 이러한 모델들에 일치시켜 정돈될 때, 시간은 분리가능한 순간들의 계열이 되며, 의식은 시간 안에서 시간적으로 이질적인 정신적 상태들의 계열로 ‘정립’된다. 그리고 이때 운동은 정적 위치들 사이의 관계로 파악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시계의 시간은 지속의 관념으로부터 그것의 연속성을 일그러트린 채 추상된 것이다.
하지만 지속의 순간들의 구성적 통합은 과도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베르그송의 직관은 마찬가지로 의식이 그 자체로 ‘하나의 긴 사유’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것이 아니라 의식이란 중요한 방식들로 서로 간에 상이한 정신적 상태들이 함께 가는 어떤 흐름이다. 베르그송은 정신적 상태들 간의 차이란, 어떤 단일한 흐름, 즉 하나의 의식으로 사고의 합류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동안, 우리가 한 종류의 사고 또는 다른 것과 구분되는 하나의 특정한 사고를 지정하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테면, 지속은 특유한 것들 간의 차이와 관계들을 동시에 구성하는 변화의 흐름에 관한 즉각적인 관심(의식, 깨달음, awareness)이다.
지속의 이런저런 특징들은 들뢰즈에게 관건적이다. 흄에 관한 그의 초기 연구에서, 들뢰즈는 지속을 설명적인 도구로 사용하면서, 흄의 습관, 연합 그리고 시간에 관한 생각을 일신한다. 결과적으로 들뢰즈는 지속을 차이를 탐색하는 도구로 채택하면서 생명의 핵심 요소로 만든다. 만약 지속이 무언가 생생한 경험의 모든 질적 차이(‘종의 차이’)를 그 자체로 ‘포함한다’면, 들뢰즈는 그때 이러한 차이들의 생산적이고, 해방적인 잠재성을 마찬가지로 강조하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의식의 연속성 안에도, 창조성과 참신성을 허용하는 사건들 사이에 불연속이 존재하게 된다. 예컨대 우리는 기억을 재해석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들을 상기하거나, 풍경들을 예술 작품에 드러내어 조명함으로써 새롭게 지각한다.
들뢰즈는 지속을 시간과 차이에 관한 몇몇 중요한 철학적 지점들을 구성하기 위해 이용한다. 칸트의 경우 시간은 세계에 대한 수용적 경험의 형식이자 모든 인간 경험의 필연적 조건이다. 예컨대 칸트에게 시간은 경험적 개념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경험 아래에 놓인 선험적 필연성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시간을 연속되는 순간들의 유사한 계열들로 구성된다고 고려하며, 그것이 종합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본다.
이와 반대로 지속은 언제나 우리의 경험에 주어진 것 안에 있는 현재이다. 그것은 경험을 초월하지 않으며, 철학적으로 추론되어져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더 나아가 지속은 물질과는 달리, 그것이 나누어지거나 재구성될 때, 그것들의 통일된 형태로서, 통합적으로 동일하게 남게 되는 요소들로 분해되지 않는다. 지속은 생생한 경험으로서, 통일성과 차이 둘 모두를 상호연결들의 흐름 안으로 합친다. 들뢰즈에게 이러한 대조는 다양성들을 포섭하고 질서잡는 ‘우월한’ 개념들을 창조하는 독단적인 철학과 변화와 다양성을 위한 기회를 창조하는 철학 간의 차이를 드러낸다.
- Cliff Stagoll, ‘Duration(durée)’,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78-80.
들뢰즈는 오래된 기억들을 소환하기 위한 도구로서 파악되는 기억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기억의 모델은 창조적인 잠재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어떤 대상이 과거에 경혐되었던 것과 동일한 것으로 재-현되고(re-presented), 재-인될(re-cognised)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한다. 하지만 그와같은 관점은 오늘날의 상기(recollection)가 시간적으로 맥락적으로 원래의 경험이나 이전의 상기들과는 어떤 매우 다른 경험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이와 같은 차이를 이론적으로 간과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과거에 묶어 둠으로써 기억의 작동 안에 고유한 것으로 들뢰즈가 고려하는 생산적 잠재력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의 주제로서 기억에 대한 그의 천착이 부족하다고 선언한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여러 번 연구했다. 흄에 관한 초기 연구에서 들뢰즈는 기억의 재생적이고 재현적인 효과들이 어떻게 인격적인 동일성이 환영에 관건적인지에 대해 다루었다. 왜냐하면 기억이 유사성과 인과성의 관계들을 수립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에 대한 그의 저작에서 들뢰즈는 그 자신의 차이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그와 같은 ‘습관적 기억’ 너머로 이동해 갔다. 이는 어떻게 ‘역사의 블록들’이 현재와의 생산적 연합으로 이동하는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어떻게 과거가 새롭게 그리고 차이를 형성하며 살아나는지를 이론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들뢰즈의 의식에 관한 베르그송론은 두 가지 방식의 작용으로 대략 기술될 수 있다. 하나는 ‘물질성의 방향’(line of materiality)으로서, 이는 그가 정신과 신체를 포함한 물질적 세계 간의 관계를 이론화하는 것이다. 정신과 신체 간의 활동은 언제나 현재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과거와 현재 간의 순수하게 이론적인 경계로 이해된다. 이 방향에서 물질과 우리의 관계는 전체적으로 물질적이며 비매개적이다. 의식의 세계는 이런저런 종류의 운동에 의해 물질의 세계와 일치된다. 그와 같은 활동은 순수 인식보다는 항상 행동하는 실천적 삶을 지향한다. 이를테면 작동 중인 기억의 형식은 ‘습관적 기억’인데, 이는 과거에 유용하다고 증명했던 것들에 의해 조건화된 신체적인 응답들에 적합한 결정들을 반성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어떤 ‘순수 상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이 의식과 구분되면, 물질성의 방향은 생생한 경험의 시간성을 고려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순수 기억에 관한 이론을 ‘주체성의 방향’에서 일깨운다. 베르그송은 순수기억이 특정하고도 상세하게 모든 의식의 사건들을 저장한다고 믿는다. 현행적인 실존의 지각들은 이미지들로서의 잠재적 실존 안에서, 생성하는 의식의 잠재성과 중첩된다. 따라서 모든 생생한 순간들은 한편으로는 지각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과 더불어, 현행적이면서도 잠재적이다. 이것은 점차 성장하는 상기의 덩어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르그송으로부터 실마리를 이끌어내면서, 들뢰즈는 잠재적인 것이 의식이 되기 위한 그것의 잠재적 힘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을 사유한다. ‘잠재적인 실재성’의 매개 안에서, 실재적인 것(the real)을 단순히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은 현행적으로 만들어지며, 그래서 새로운 효과라는 몇몇 결과를 가지게 된다. 잠재적인 것이 실재화되는 방식은 그것의 현행화의 정교한 환경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순수하게 잠재적인 이미지들의 집합으로서, 기억은 어떤 심리적인 실존을 가지지 않으며, 대신에 시간안에서도 공간 안에서도 유지되지 않는 순수 존재론적 ‘과거 일반’이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기억상실이란 순수 기억으로부터 어떤 ‘내용’의 상실로 인식되어서는 안 되고, 단지 상기 메커니즘의 붕괴라고 해야 한다. 잠재적 이미지들은 여러 패턴들로 정돈되는데, 이는 ‘평면들’(planes) 또는 ‘장’으로 파악되며, 모든 평면에서 몇몇 특유한 잠재적 이미지와 관련하여 분배되는 경험된 과거의 총체성을 담지하게 된다. 이로부터 평면 상의 모든 다른 것들이 의미와 역사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순수기억은 관련된 잠재적 이미지들이 현행화될 때 의식으로 드러나게 될 것인데, 문제는 이것이 베르그송의 텍스트에서는 거의 조금밖에 언급되지 않지만, 들뢰즈에게서는 중심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그와 같은 현행화는 상기의 과정으로서, 잠재적인 것들이 스스로를 뭔가 새로운 것이 되는 것을 통해 차이화하는 것이며 따라서 심리적인 의미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때 상기된 기억 이미지는 몇몇 행위나 환경과 연관된다. 이러한 과정에 관한 들뢰즈의 수수께끼 같은 기술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다. 첫째로 기억은, 가장 밀접하게 관련있는 평면이 배치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과거로의 도약’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기억은 현재와 주어진 새로운 ‘삶’ 또는 현재 유동하는 환경들에 관련된 맥락 안으로 기입된다. 이러한 계기 안에서 심리학은 생생한 현재의 구성, 즉 들뢰즈가 생생한 시간의 흐름에 대해 본질적인 것으로 고려한 어떤 특별한 종류의 종합 안에서 존재론과 상호작용한다.
들뢰즈의 베르그송적인 기억론의 두 가지 측면은 그의 반-토대주의에 매우 중요한 요건이다. 첫째로 그것은 상기가 발생하기 위해 초월적 주체가 ‘소유한’ 기억에 관해 파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상 들뢰즈는 그 반대를 논증한다. 기억은 항구적이고 통일적인 자기(self)의 인상을 일으키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기억은 과거를 단지 되살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심과 환경과 관련하여 어떤 새로운 현재로서의 과거를 구성한다는 것도 보여준다. 따라서 기억은 동일성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라기보다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창조적인 힘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 Cliff Stagoll, ‘Memory’,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159-161.
‘다양체’(1)는 단언컨대 들뢰즈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그의 저작 전체에 걸쳐 발견되어지며, 다른 중요한 개념들, 예컨대 리좀, 아상블라주, 그리고 ‘개념’ 자체와 같은 것에 기초가 된다. 그것은 또한 들뢰즈에게서 파악하기 가장 어려운 개념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그가 이 개념을 연구에 활용하는 여러 상이한 방법과 맥락들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주목해야할 몇몇 본질적인 속성들이 있다.
(1)[번역자주]‘다양체’라는 용어는 『베르그송주의』(Le bergsonisme, 1966)에서 처음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곳은 가타리와의 마지막 공저인 『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hpie?, 1991)이다.
다양체는 가장 기초적인 의미에서, 어떤 복잡한 구조로서 그보다 앞선 통일성을 지칭하지 않는다. 다양체는 단편화되어 있는 보다 큰 전체의 부분들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단일한 개념 또는 초월적 통일성의 다양한 표현으로 고려될 수도 없다. 이러한 근거에서, 들뢰즈는 그것의 형식들의 모든 면에서, 다양체에 대해 이분적 일자/다자 대당에 반대한다. 더 나아가 그는 중요한 것은 다양체를 그것의 주어적 형식, 즉 하나의 다양체로 고려하는 것이지, 어떤 형용사적 형식[속성]으로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들뢰즈에게 모든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다양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 다양체 개념의 발전과 연관지어 자주 말하는 사람은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수학자인 리만(George Riemann)이며 다른 한 사람은 프랑스 철학자인 베르그송(Henri Bergson)이다. 리만으로부터 들뢰즈는 전체성이나 전부가 되지 않는 어떤 종류의 패치워크나 앙상블을 형성하는 상이한 다양체들로 구성되는 어떤 상태가 있다는 생각을 취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집은 콘크리트 구조물들과 관성의 패치워크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우리는 이러한 사물들의 리스트를 작성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거기에 그 개별적인 집의 본질이 존재한다고 결정할 만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설명하거나, 총괄하기 위해 집 그 자체의 바깥에 어떠한 것도 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패치워크일 뿐이다. 이것은 오직 다양체 그 자체에 대한 하나의 훌륭한 기술(description)로 취급될 수 있다.
들뢰즈가 이 방면에서 베르그송에 빚진 부분은 보다 근본적이다. 『베르그송주의』(1966)에서 들뢰즈는 처음으로 다양체에 대해 논하는데, 여기서 그는 베르그송 철학을 확장하려고 애쓴다. 들뢰즈는 우선 베르그송에게 두 가지 종류의 다양체가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하나는 외연적, 수적 다양체들이고 다른 하나는 연속적 강도적 다양체들이다. 이것들 중 첫번째는 베르그송에거 공간으로 특성화되며, 두 번째 것은 시간으로 특성화된다. 외연적인 것과 강도적인 것 사이의 차이는 아마도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부분들로 나누어질 수 있는(이것이 수적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다) 공간과 대조적으로 강도적 다양체는 본성의 변화가 없이는 나누어질 수 없다. 다른 말로 해서, 강도적 다양체에게서 어떤 변형은 그것의 본성에 있어서 총체적인 변화, 즉 강도적 상태에서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들뢰즈에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서로 간에 촉발되지 않고 남을 수 있는 개별적 다양체들의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또한 베르그송에 대한 자신의 독해의 맥락에서 다양체의 개념과 잠재적인 것의 개념 사이에 중대한 연결지점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들뢰즈가 베르그송주의자로 남아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들뢰즈가 흔히 잠재적인 것에 대해 논의할 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잘 알려진 말을 기억과 관련하여 인용한다. ‘현행적이지 않은 실재적인 것, 추상적이지 않는 이념적인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잠재적 다양체는 세계 안에 필연적으로 구현되지는 않은 실재적인 것이다. 이때 잠재적 다양체는 추상적이고 대체가능한 가능성들을 표현하기 보다, 모든 특수한 상황에 고유한 변화에 실재적으로 개방적인 어떤 것을 형성한다.
이것은 아마도 들뢰즈의 잠재적 다양체에 관한 이론에서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지점일 것이다. 잠재적 다양체들이 특수한 사태(affairs)들의 상태에 구현되는 동안, 그것들은 조금이라도 초월적이거나 본질적으로 불변하는 것으로 고려되어져서는 안 된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의 라이프니츠에 관한 장에서 논하다시피, 잠재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은 상호관계되어 있으며, 서로 간에 변화를 준다. 그래서 잠재적인 것이 현행적인 상황으로 구현되는 동안 현행적 상황들에 있는 변화들은 마찬가지로 잠재적 다양체들 안에 변화를 초래한다. 따라서 실존이란 현행적인 다양체들(사태[일, affairs]의 상태)과 잠재적 다양체들(변화의 개별적인 강도적 운동들)의 어떤 조합이 된다.
유난히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이 개념들은 들뢰즈에게 세계에 대한 매우 실천적인 상을 발전시킬 근거들을 제공한다. 다양체 개념은 구조나 실존의 법칙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의 그 어떤 초월적 영역과도 관계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행적인 다양체들 그리고 우리 자신인 바 그 다양체들 사이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 안에서 언제나 요소들(elements)이며 행위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과 인간의 실존은 탁월하게 실천적인 것이다. 우리의 현행적 다양체들의 잠재적 대당은 또한 연속되는 운동과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심지어 현행성의 세계가 가장 완고하고 억압적으로 보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도 그러하다.
- Jonathan Roffe, ‘Multiplicity’,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17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