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계의 공통성 회복을 위해
디지털 세계의 공통성 회복을 위해
- 허욱, 『디지털적 대상의 존재에 대하여』
어쩌면 우리는 모종의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 중독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거리거리에서 스마트폰을 들고 또는 노트북 앞에서 일하고 sns에 글을 올리며, 실시간 문자를 주고 받는다. 왜 중독인가? 단적으로 상상해보자. 어느날 이 거대한 네트워크가 일순간 정지하면서, 노트북 화면의 커서가 멈추며, sns의 알고리즘이 제멋대로 작동하면서 페이스북의 글과 인스타그램의 사진이 사라진다면? 급기야 기지국이 반테크놀로지 갱들에 의해 파괴되고, 인공위성이 검은 우주의 배경으로 사라진다면? 우리 가운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 것인가? 눈 앞에 펼쳐진 종말을 누군가에게 알릴 ‘공중전화’조차 이제 없지 않은가?
이런 묵시록적 상상은 정보사회가 곧 위험사회라는 경종을 울리면서 헤묵은 윤리 논쟁을 촉발한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후 시작된 과학기술의 윤리적 방향설정이라는 화두는 오펜하이머가 스티브 잡스나 주커버그로 대체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도덕군자가 천 명이 있다고 해서 다른 수 만명이 거기 감화되어 기술 문명의 폐해를 뒤로 하고 밀림으로 들어가거나 초원에 모여 인디안 군무를 추지는 않을 것 같다.
저자인 허욱은 이런 난감한 지경에 이른 것에 대해 “테크놀로지의 무의식”(64)이라는 개념으로 대응한다. 산업혁명 이후 철학이 기술의 진화를 사유 대상으로 취급하길 거부하면서(또는 미필적으로 망각하면서), 무의식의 갱도 안에 기술적 사유를 파묻어 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중의 곤란함이 발생한다. 하나는 그것을 끄집어낼 탄광지도가 유실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자체가 그 거대한 기술적 네트워킹의 한 지절이 되어 세계를 총체적으로 사유할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허욱에게 전자는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지만, 후자는 애써 회복해야할 과제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문제는 윤리가 아니라 상상력을 포함한 지성이다.
디지털 두뇌라고 부를 법한 이 지성은 그 안에 어떤 컨텐츠를 담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관계’다. 실제로 우리는 이 책의 3장에서(부터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알 수 있다. 컴퓨터화 또는 인터넷의 발달 역사 자체가 바로 컨텐츠에서 관계로의 이행을 확증해 준다. 이를테면 WWW(World Wide Web)의 초기 단계에서 중요했던 것은 컨텐츠 측면이었고, 관계는 단지 하이퍼링크 정도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후 관계가 “데이터를 통해 실현되고 웹에서 생산을 지배”(270)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웹에 접속해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되면, 즉각적으로 어떤 무한한(!) 연결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이 더 중요한데, 그 연결의 망상조직은 급기야 우리 자신을 말 그대로 ‘먹어 버린다.’ 허욱은 시몽동의 용어를 가져와 이를 ‘연합환경’이라고 부른다. 이 연합환경 안에서 주체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디지털적 대상이다. 이것은 “연합환경 내부의 다른 대상, 시스템, 유저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재수립하고 재협상하는 과정”(137)을 주재한다. 이로써 허욱은 디지털적 대상을 능동적인 에너지나 역능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한다.
이런 경우에 계몽적인 합리주의를 고수한다는 것은 메타버스 안에서 굳이 가상/현실의 이분법을 우기는 것과 같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여기에 그 어떤 인간/기계 이분법도 없으며, 자연/인공 이분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연합환경은 말 그대로 이러한 이분법적 기제들의 항구적인 애매화, 소멸, 교전과 상호작용을 표현한다.
연합환경 내에서 세계는 인간에게 보철화된 기계, 기계에 이식된 인간이 예사롭게 돌아 다닌다. 사실 이런 세계라는 것이 영화 <트렌센던스>(2014)에 나오는 초지능 AI ‘핀-윌’이 지배하는 미래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지금/여기’라는 것은 자명하다. 당장 독자들의 신체와 밀착된 디지털 대상들을 돌아 보면 그것을 알게 된다. 허욱이 ‘네트워크의 공간’이라고 말하는 세계는 우리가 ‘살’을 맞대고 있는, 또는 우리 ‘두뇌’의 주름을 공유하는 저 차가운 기계들과 영혼을 나누는 이 시공간 그 자체다. 따라서 여기에 인간중심적인 계몽도 없고, 기계의 간악한 지배라는 디스토피아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끊임없이 지속되는 디지털 대상들의 흐름, 그 안의 인간과 비인간이 있을 뿐이다. 이 메커니즘의 가동자(operator)는 관계들의 연합환경을 최대한 ‘종합’하는 쪽에 있다. 그것이 초지능 AI가 되는지, 아니면 메타버스 안의 나폴레옹이나 시이저가 되는지, 평범한 톰과 제리가 되는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이 책에서 합목적성은 ‘변환’이라는 개념에 자리를 내 주는데, 이는 “존재와 ‘환경’의 구조를 재구성하는”(352) 과정이다. 다시 말해 변환은 “상이한 영역을 가로질러 변형으로 이어지는” 횡단-기계에 다름 아니다. 이 횡단을 통해 어떤 것이 개체화하고 개별화하게 된다. 디지털 대상에 횡단이 적용될 경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컴퓨터 언어들이 스마트 기기에 이식되고, 서로 네트워킹함으로써 횡단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때 그러한 횡단 안에서 스크린 위에 대상이 출현하기도 하고, 또는 네트워킹의 과정 가운데 업무가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물질적 환경이 조성된다.
허욱은 일상적인 컴퓨터화된 환경을 철학적 담론으로 풀어내는데 특출한 재능을 가진 철학자다. 그는 분석철학자들에서부터 후설과 하이데거, 들뢰즈와 시몽동을 논의의 축으로 삼는다. 또한 컴퓨터 공학의 용어들도 많이 사용된다. 하지만 이 난해한 코스를 건너 뛰더라도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허욱의 시선이 늘 현재의 디지털 환경 안에 있고, 철학적 담론으로 비약할 때조차, 그것을 잊지 않고 독자들에게 짚어주기 때문이다.
그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디지털 대상으로 체계화된 환경 안에서 “인간-비인간에 대한 새로운 비판 또는 개념화”(451)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조언이다. 이것은 연합환경을 발명적인 공간, 즉 고립된 공간이 아니라 개체들이 연합하여 새로운 집단을 만들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활성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디지털 대상은 이미 우리 삶의 유력한 토대이며, 그것은 우리의 지성을 더 빨리, 더 강도 높게 물질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고 있다. 달리 말해 디지털 세계는 허욱이 말하는 바와 같이 기술시대의 소외를 끝내고 인간-비인간의 공통대지를 창출하는 기회이기도 할 것이다.
*이 글은 <한겨레신문>에도 실렸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1618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