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난 비체?-비인간중심주의적 객체-지향-존재론
원문 서지: Robert Booth, ‘Abject Withdrawal?: On the Prospect of a Nonanthropocentric Object-Oriented-Ontology’, Angelaki, 26:5, 20-37
물러난 비체?-비인간중심주의적 객체-지향-존재론의 전망에 대하여
로버트 부츠(Robert Booth)
발췌 번역: 박준영(노마씨,nomadia)
[21]나는 OOO를 뒷받침하는 형이상상적 전제들이 비인간 현상들의 이질성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한, 모튼(Morton)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있어서 문제적이라는 것을 논증할 것이다. 왜냐하면 OOO가 필연적으로 이항대립적 사고에 의해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 사유에서 ‘객체들’ - 그것들의 전반적인 존재론을 형성하는 바 – 은 (모튼이 정당하게도 주류 과학적 실재론과 연결한 그런 인간중심적 식민주의를 강화하면서) 전체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현전하거나 알려질 수 있거나, (보부아르가 남성중심적 가부장제라고 규정한 신비주의mysterianism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비인간 타자성에 열광하면서) 전체적으로 ‘물러나’고 알려질 수 없게 된다. 두 가지 입장이 모두 모튼 자신이 근본적으로 환경 위기의 원인이라고 규정하는 이원론적 논리를 재기입하기 때문에, 나는 OOO가 위험하게도 당면과제에 대해 위험하게도 잘못 채택되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논증할 것이다.
[22]모튼은 표준적인 서술이 인간-이상 세계(more-than-human world)와 관련된 어떤 역사적으로 상황화되고 식민화된 양태를 규범화한다고 – 그리고 계속해서 본체화(ontologize)한다고 – 주장한다. 이 세계는 이미 인간중심성 안에 그것을 구체화하는 착취적이고 가부장적인 폭력을 통해 광포한 삼림벌채와 지속불가능한 쓰레기 생산으로 표명되는 인위개변적인 폭력을 승인한다.
[22]모튼은 플라톤이 주장한 바, 그의 형상들에 의존함으로써 구체화한 이성/자연 이원론의 구현으로도(Plumwood, Mastery of Nature 45), 과학적 방법을 통해 (여성화된) 물질적 신체들의 자연화된 종속으로도 경도되지 않는 이런 문제적 경향의 탄생을 주장함으로써 생태페미니스트들과 구별된다.
[22]‘인간’과 ‘비인간’ 영역들 간의 구별들 (...) 모튼에게 그것은 바로 이원론적인 개념 지향으로서, “이제 그것의 고대적이고 명백하게 폭력적인 일신론들(monotheisms)”으로 완결된다(예컨대 계몽주의 기획에서 존재신학적 힘impetus 안에 표명되는 것). 이것은 근대성을 통해 양육되며, 궁극적으로 현대 과학의 접근법들이 “농경 일신론”(Being Ecological 50, 56)의 식민지 논리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확증한다. 따라서 다른 곳에서 모튼은 “우리를 노예제와 인종주의로 데려가는 노선은 마찬가지로 우리를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인간중심주의적 경계지대로 데려가는 노선이기도 하다. 이 경계지대는 인격과 사물 간의 또 다른 완고한 구별을 부분적으로 예상하는 것이다”(Morton, “They are Here” 167)고 주장한다.
[23]하지만 아나코-원시주의에 관한 모튼의 저주 섞인 고발은 “존재하는 것은 항구적인 현재적이어야 한다는 생각, 즉 존재하는 것은 현상들 아래에 놓인 한 덩어리의 연장적 실체여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러한 비체적 실패를 되돌리는 것은 “농업 병참술의지반을 붕괴시키는 것이 ‘현전의 형이상학’을 붕괴시키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으로 보일 것이다. 농업적 일신론의 배제적 논리에 따르면, 현전의 형이상학은 비인간적 “사물들이 ‘저 쪽에’ 놓여 있는 플라스틱과 같은 한 무더기의 대상들을 객체화하한다는 것” 즉 내가 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관점에 놓여 있다. 위에서 탐구되는 환경 주제들에서, 이것은 그것들 자신의 새로운 인과적 힘들 없이, 선형적인 인과관계의 망들을 경유하여 연결되는 규정적이며 결정될 수 있는 물리-화학적 속성들로 환원되는 실체들에 관한 어떤 환원적, 물리주의적 존재론만을 허용하는 [24]주류 과학적 실재론 내부의 ‘규범적 성질을 가진’ 현전의 형이상학이다.
[24]모튼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여기서 문제는 어떤 단일한, 반성적으로 정화된, 초월적 전망 뿐만이 아니라, - 양자 역학이 보여주는 듯한 – 이것이 이념적으로 예견가능하고 기계적인 패러다임이 단순히 오류라는 것이다. 즉 “엄청난 양의 폭력이 이러한 관점을 떠받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정확히 그것이 정교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튼의 첫 번째 주요 주장은, 따라서 인류세의 상징적인 조건들이 농업병참술(agrilogistics)의 징후, 즉 주류 과학의 반응과 양립불가능한 수정작업이라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두드러진 표명의 하나로서 현전의 형이상학에 기대는 한에서 그러하다. 모튼에 따르면 이것은 한결 좋은 의미에서의 환경 이론의 ‘정보 덤핑(dumping)’을 문제화한다.
[24]그것에 의해 ‘데이타’가 ‘사물’이 되는 바, 비체화(abjection)의 폭력은 모튼에 따르면 우리의 존재론을 급진적으로 평탄하게 할 것을 요청하는데, 이때 개별체들은 그것들이 방사하는 지향적 객체들(‘데이타’)로 환원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그것들이 존재론적으로 지속적임과 더불어, 이질적인 인간적 부분들과 비인간 개별체들로 접근하는데 있어서, 다양하고, 부분적이며 소진되지 않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26]모튼에게 농업병참술을 극복한다는 것은 모더니즘의 스퀼라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카리브디스 사이를 항해해 간다는 것이다. 그것들 각각은 효과적으로 비인간 실체들을 그것들이 상황맥락화된 인간적 탐색자와의 폭력적인 연관성 아래에 종속시킨다. 모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관주의는 진실이다. 즉 당신은 사물을 그 자체로 파악할 수 없다. 사실들은 데이터와 다르며 데이터는 사물들과 다르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적인 것이 그러한 사물들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Being Ecological 53).
[26]만약 상관주의의 인간중심주의가 비인간 사물들을 인간이 현전하는 데이터로 사실상 환원하는 데 놓여 있다면, 그때, 하먼과 모튼은 이것이 평평한 존재론의 맥락 내부에서 급진화된 지향성 관념을 확장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에 대한 하먼의 참조는 이런 면에서 교훈적이다. 화이트헤드는 ‘파악’(prehension)이 인간과 비인간 실체들 사이의 보다 근본적인 종류의 감성적이고 감응적인 접촉이며, 따라서 그와 같은 모든 마주침들이 “의식이 경험을 전제하는 것이지 경험이 의식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간략한 의미에서 경험적이라고 논증했다(Process and Reality 53). (...) 모튼에게 두 가지 [이원론적인] 존재론적 질서는 상관주의적인 문제틀 안에서 종결되는데, 이는 상관주의가 비판의 불가피한 결과이기 때문이 아니라, 비판이 빠져들어가는 이원론적 논리가 (인간) 주체와 (비인간) 객체 간의 본성적인 구별을 구체화하기 때문이다.
[27]만약 어떤 객체가 일련의 특권화된 ‘정신-독립적’이거나 상관적 속성들로 환원될 수 없다면, 그때 OOO는 의심스럽게도 인간-이상 세계로의 총체화하는 접근을 승인하는 비인간 객체들에 관한 가소적(plastic) 개념에 저항할 것이다. 이는 실체들이 그들 자신의 – 새롭고, 인과적인 – 힘들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OOO는 주류 과학 자연주의와/또는 그 인간적인 식민주의자에 의한 구축에 저항할 수 없는 비인간 자연에 관한 상관주의적 개념의 그릇된 메커니즘을 승인하는 행위적 또는 원-행위적 새로움을 용납할 수 없게 된다.
[28]요컨대 OOO는 우리가 “애매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생태적이라는 것의 근간에 있음”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할 것이다(179). “OOO는, 만약 객체들이 그것들의 관계들로 환원될 수 있다면, 낯섦이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Morton, “Here Comes Everything” 185). 이러한 OOO의 이른바 특유한 이점은 화이트헤드와 같은 비인간중심주의적인 과정 철학들과 같은 것에 대한 모튼과 그리고 하먼의 반박이라는 어떤 중요한 지점을 형성한다.
[28]하지만 여기에는 보다 문제적인 애매함이 있는데, 물러난 객체가 무엇으로 구성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객체들이 유지하는 그 ‘과잉’을 통해 이점들을 산출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내가 논증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그것들이 객체 개념의 현전/부재 이항을 유지하는 한에서, 그래서 뿌리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사물의 애매성을 재사유하지 않는다면, OOO는 그것의 메타이론적 임무를 허술하게 수행하는 것이며, ‘급진적인 비인간중심주의’라는 미명 하에 무심코 인간중심적 비체화를 영속화하게 될 것이다.
[29]하지만 이러한 틀거리 안에서는 오로지 두 가지 방식으로 물러남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 각각은 비인간 타자성을 애착하거나 붕괴시킴으로써 애매성에 관한 고유한 형이상학을 위협하는 것이다. 위의 급진적 개괄을 취한다면, 비인간 타자성은 물러난 객체를 통해 유지되지만, 단지 투과불가능하게 멀리 떨어져 물러나 있다는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비상호적 관계’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29]OOO는 타자성의 절대적 개념과 같은 어떤 것에 긴박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객체 개념을 재구성함에도 불구하고, 그 분석들은 객체-자체가 다른 것에 의해 전반적으로 표명되게 되는지에 관한 질문에 여전히 예/아니오 이항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재의 비인간 객체들과 조우할 수 없기에,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은 우리의 파악하는 접근이 “경험 안에서만 존재하는”(Harman, Quadruple Object 69), 그리고 우리에게 부여지는 그러한 비대칭적인 감각 객체들에 제한된다고 결론 짓는다. (...) 만약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이 물러난 객체라는 절대적 개념에 동의한다면, 그들은 그 존재론 또는 이른바 체현되고 역사적으로 위치지워진 인간적 전망에 상대적으로 구체화된 그 감각 객체들과는 독립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보편적 수단들이라는 실제적인 윤곽들을 정확히 기술하는 실재 사물들과의 접촉에 관한 요구를 누락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다른 ‘객체들’의 실재성에 관한 어떤 특수한 주장들(우리가 무비판적인 도구화, 이를테면 숲 생태계, 원유 등등)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것들을 수행하는 중에, OOO는 사실상 자기/타자 관계의 절대적 해명에 관한 관념론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OOO는 아마도 상관주의에 관한 하먼의 두 번째 리트머스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왜곡하’거나 ‘개괄하는’ 위치지워진 전망과 독립적인 어떤 특정 객체들 또는 상호객체적 마주침들(비인간들 간의 상호작용을 포함하여)을 기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30]첫째로 우리는 그것[물러난 객체]을 칸트적인 현상/본체 균열의 포괄적 승인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물러난 객체’는 단지 “우리는 객체들을 지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이 거부하는 것, 그들 자신의 논리에 따라, 그것의 실재와 비인간중심주의 증명서를 전혀 지지하지 않는 것이다. (...) 모튼은 인간적 증언과 독립적인 면화로부터 불이 어떻게 물러나는지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마주침 안에서 모튼이 파악(이해)하는데 적합해 보이는 유일한 실재 객체는 새로운 객체 ‘불-면화-관계’이다. 따라서 OOO의 내적 논리에 따라 위에서 개괄된 문제로 더 다가가면, ‘불-면화-관계’는 새로운 감각 객체인 ‘불-면화-관계-모튼에-대한’이 되는데, 모튼은 여기서 불과 면화 둘 모두로부터의 세 번째 퇴거(예컨대 더 멀리)에 놓인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불-면화-관계-면화에-대한’이나 ‘불-면화-관계-불에-대한’을 물러난 객체를 통해 기술하려고 겨냥한다. 요컨대 OOO가 상관주의적인 것으로 그러므로 인간중심적인 것으로 기각하는 방식에서, 그는 모든 다른 비인간 객체와 그들의 관계로부터 총체적으로 분리된다.
[30]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는 주제는 윅스킬이 열성적인 칸트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 적어도 일관적으로 사유할 때에 – 유기체들이 전체적으로 그들의 주위세계(Umwelten)를 구성하는 객체들에 제한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들이 (예컨대 인간적인 것 또는 거대거미류) 환경(Umbegung), 즉 ‘본체적인’ 실재-자체에 저항한다고 잘못 말하는 상관주의 경향을 유지한다. 윅스킬에 의하면, 이는 정확히 환원불가능하게 체현된 그리고 위치화된 생명체들이 그들이 실재로 고유한 타자들의 세계들에 접근할 수 없는 근원적으로 이질적인 방식으로 세계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명백하게도 탈인간중심화할 수 없는데, 모튼이 주장한 바, 칸트에게 이것은 단순하게 사물-세계를 거리낌 없이 다양화함으로써 상관관계를 만드는 것이다(Realist Magic 227).
[31]만약 하먼과 모튼의 물러난 객체 개념이 확실히 레비나스적인 타자성으로 확장된다면, 그때 우리가 모든 것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신비화하면서, 농업병참술에 함축된 식민주의적 폭력을 단순히 주체를 삭제하고 객체를 절대화함으로써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다. 만약 이것이 물러남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모튼과 하먼은 플럼우드(Plumwood)가 주체/객체 이원론의 ‘결절적 전복’(truncated reversal)이라고 부른 것에 호소한다(Mastery of Nature 121). 이에 따라 이면의 가장 나쁜 특징들이 유지되고, 연속적으로 논쟁 사항들을 촉진하는 폭력을 거의 방치하게 된다. 인간-이상의 세계를 전반적으로 다르게 만듦으로써, 모튼이 보부아르와 같이 반식민주의적 경향의 뿌리로 취한, 그래서 ‘급진적인 비인간중심주의’라는 미명하에 음흉하게 진행한 애매성에 관한 파괴적인 인식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32]사실상, 물러난 객체에 관한 보수적 해석을 채택함으로써 OOO는 그것이 고유한 비인간적인 타자과 양립불가능하다는 근거에서 스스로 온당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일련의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를 효과적으로 포용할 것이다. 형이상학적 규범들을 인간적인 인식 규범들와 동렬에 놓음으로써, 더욱 보수적인 OOO는 플럼우드가 ‘혼성’(incorporation)이라고 부른 것에 있어서 혐의를 갖게 될 것이다. (...) 혼성은 현재 맥락에서 문제적인데, 왜냐하면 OOO가 어떤 위치지워진 주요 전망을 자연화하거나 익명화하는 한에서, 그것은 모튼이 기각한 동일한 이원론과 존재론적 경향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물러난 객체에 관한 어떤 보수적 해명이 본래적으로 혼성 – 그리고 실재 타자들의 폭력적 비체화 - 의 이원론적 메커니즘에 연결되어 있다면, 오로지 이런 경우에만 타자성에 대해 애착하기보다, 그것을 붕괴시킴으로써 그것 또한 농업병참술의 식민주의적 경향과 비-우연적으로 나란히 간다. [33]스테이시 알라이모(Stacy Alaimo)가 주장하는 바처럼 OOO가 비록 “표면적으로 포스트휴먼 존재론을 전면에” 내세운다 해도, 그에 따라 그것은 “비체현된(disembodied) 주체에 관한 인간주의적이고 남성적인 의미”를 유지한다(15). 따라서 그러한 입장에 의해 다양한 문제들을 계승하게 된다. 보수적 해석은 레비나스적 모델과 다름 없을 정도로 나빠 보인다.
[결론]
[33]위에서 우리는 OOO가 인간-이상을 그 자신의 용어들로 사유하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류세의 인간중심주의적 폭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형이상학적 장치들을 제공하고자 한 것은 농업병참술의 인간중심적 이원론을 극복하는 이른바 특유한 능력을 통해서라는 것을 이해했다. 여기서 OOO의 기대되는 이익은 삼중적이다. [첫째] 객체에 관한 급진적으로 평평한 그리고 비환원적인 존재론에 동의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적인 위계과념에 대항하게 된다는 것, [둘째] 사물들-자체의 소진불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OOO는 근원적으로 비인간적인 타자성을 인간중심적인 환원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보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셋째] 마지막으로 OOO는 상관주의의 내향적 초점으로부터 형이상학을 해방하는 증간된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보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독해에 따르면, 앞서 언급된 이익들의 각각은 물러난 객체라는 생각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하지만 ‘물러난 객체’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있어서 어떤 문제적인 애마함이 존재한다. 위에서 나는 두 가지 해석을 시도했다. 첫 번째는 레비나스적 의미의 물러남을 위하는 것인데, 이에 따라 객체들은 그것들의 교호자들로부터 절대적으로 물러난다. 다른 하나는 무언가를 원칙적으로 다른 위치지워진 객체들에게 접근 불가능하게 만들 필요가 없는 보다 보수적 현상으로 물러난 객체를 취하는 것이다. 비록 OOO가 대개 전자를 향해 묘사된다 해도, 두 가지 해석들은 궁극적으로 비인간 타자성에 대한 어떤 유사하게 인간중심적인 위협을 초래하는데, 왜냐하면 비인간 실체들이 본질적으로 접근불가능하기(따라서 그것들에 관한 우리의 인간중심적 특성화를 ‘교정’할 수 없다) 때문이거나 또는 그것들과의 교전(engagement)이 단지 특권화된 인간 모델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접근법 모두 비인간 타자의 문제적 비체화(abjection)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둘 모두 분명 OOO의 추정된 특성인 반식민주의적 애매성을 가동시킬 수 없다. 따라서 양 쪽 해석 다 분명히 위에서 개괄된 이익들 지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존재론이 평평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오로지 비-순수한, 위치지워진 인간적 전망에 따라서만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비인간 사물들은 소진되지 않는 속성들을 유지하지만, 이것들은 전반적으로 접근불가능하거나 단지 위치지워진 인간적 경험 안에서(경쟁적 개념으로) 그러한 유용함의 단순한 반향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지막으로 그것이 우리의 실재론을 위한 테스트들을 통과하는 한에서, OOO는 효과적으로 그 옹호자들이 온당하게도 스스로 거리를 유지하는 바, 자연주의의 어떤 특정한 인간중심주의적 형태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어떤 유보조항으로서,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이 – 원칙적으로 – 인위개변적인 폭력을 차단하기 위해 필수적인 애매성을 구출하는 입장들 사이에서 중간 경로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만약 내가 위에서 논했던 것이 올바른 노선이라면, OOO는 절대적인 타자성과 보존적인 타자성 사이의 딜레마에 긴박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의 근본적 편견이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현전적이거나 전체적으로 그것들의 위치지워진 탐구자로부터 부재한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결국 하먼과 모튼이, 효과적으로 동종적이거나 문제적으로 친숙하게 되거나(보수적 타자성) 모든 실재의 비인간 객체들과 접근불가능한 타자의 영역과의 상호작용들(절대적 타자성)을 추방해 버리게 되는 바, 감각 객체들을 환기하도록 이끌어 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딜레마였다. 현상들의 부분적인 또는 그늘진 형상화에 대한 접근을 이해하는 어떤 세 번째 길은 실제적으로 인간-이상 세계 자체에 의해 동기화되는데 – 예컨대 생태페미니즘이나 생태현상학에서 이는 일반적이다 – 이는 하먼의 리트머스 테스트를 실패에 빠트리고 내키지 않게도 상관주의자로 간주되게 한다. 요컨대 인류세의 폭력 뒤에서 인간중심적 이원론에 함축된 현전/부재 이항성을 극복하는 것은 그러한 이항성을 사물 자체의 어떤 기초 존재론적 특성으로 취하는 어떤 접근방식과도 양립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이 황제의 새로운 ‘급진적으로 비인간중심주의적인’ 의상들에도 불구하고, OOO가 특히나 긴급한 과제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는 이유이다.
남은 질문은 다음과 같다. 만약 그것의 증가하는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OOO의 형이상학적 임무가 이원론적인 인간중심주의를 차단한다는 그것의 약속에 있어서 본래적으로 썩 적합하지 않은 바, 그렇다면 환경 정치학, 환경 인문학 또는 주류 환경 행동주의가 다음으로 향해야 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내게 가장 풍성한 탐구의 노선은 위에서 언급된 바(예컨대 생태페미니즘과 생태현상학)와 같이 입장지워지는 ‘세 번째 방법’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원론의 폭력을 차단하는 모튼의 목적을 공유하지만, OOO의 실패 원인이었던 현전/부재 이항성에 저항할 것이다. 물론 그들의 약속은 부분적으로 유해한 상관주의 혐의를 극복하는 그들의 능력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