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프루스트-문학의 생태학(안 소바냐르그)
원문서지: Anne Sauvagnargues, “Proust According to Deleuze. An Ecology of Literature,” trans. Jean-Sébastien Laberge, La Deleuzian-Online Journal of Philosophy, n. 7 (2018): 10-27.
들뢰즈의 프루스트-문학의 생태학
안 소바냐르그(Anne Sauvagnargues)
영역: 장-세바스티안 라베르쥬(Jean-Sébastien Laberge)
국역: 박준영(노마씨, nomadia)
초록
이 논문은 본래 Temps Modernes 2013/5 n ° 676, pp.155-177에 프랑스어로 간행되었다. 여기서는 질 들뢰즈의 형식주의(formalism) 채택에 관심을 가진다. 그런데 『프루스트와 기호들』(Proust and the signs, 1964, 1970과 1976) 세 가지 판본을 따라가다 보면 1969년 펠릭스 과타리와의 만남과 더불어 형식주의에 그가 반대하는 식으로 변모함을 알게 된다. 분명히 니체적이라고 보이는, 해석의 지배는 1964년에 여전히 의미있는 것이었지만, 1970년에 와서 실험의 지배, 횡단성에 자리를 내준다. 이는 그것의 실증적이고 생태적인 차원에들에 따라 경험, 기호 그리고 형식주의의 지위를 완전히 변형한다. 경험과 의미생산의 양태로서 기계가 구조를 대체한다. 그것은 더 이상 단편적인 세계의 해석에 따라 어떤 통일성을 보존하는 문제가 아니고, 총체성에 대한 단편들의 환원불가능한 특이성을 횡단적으로 긍정하는 실험의 문제인 것이다. 리좀의 이런 역동성에 따라 마주침의 이질성은 감응들(affects)의 지도에 관련되는 어떤 행동학(ethology)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는 그 효과에 있어서, 즉 개체화(individuation)의 과정에 있어서 기호들에 접근하는 것에 관한 질문이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기호학은 정치적이면서 임상적인 주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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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주의에 관한 질 들뢰즈의 논쟁은 꾸준하다. 그것은 단호하게 공시적인 지속성의 핵심들 주위로 철학 체계를 제한하는 그의 첫 번째 날카로운 묘사들에 의해 그의 사유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1967년 이래, 그는 언어학, 인류학, 정신분석 뿐만 아니라 정치학과 문학에서 의미에 관한 이해를 야기하는 변형(transformation[형식변화])에 주목했다. 언어학적 기호, 이를테면 단어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주체적이든, 실재에 의한 객체 또는 소여든 간에, 그것은 오직 그것이 취해지는 체계 안에서 관계들의 상호작용에 따라 의미를 만들 뿐이다. 이 모든 이론적 실행들은 우리를 의미의 이론으로부터 의미 생산의 이론으로 이동하게 한다. 화행 만큼 상이한 요소들, 즉 무의식적 생산, 사교적 갈등, 친족 관계 또는 신화는 어떤 경험적 지칭물도, 어떤 논리적 의미나 주어진 본질도 참조하지 않는다. 그것들의 의미는 어디에서부터 유래하는가? 위치 효과, 관계의 게임은 상징적으로[기호론적으로] 특성화되며, 의미 생산의 새로운 영역을 제공한다.
이 인식론적 변전(mutation)은 관례상 ‘구조주의’의 이름하에 회집되어 왔으며, 철학 안에서 반향을 가진다. 그것은 생산으로서의 의미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영원한 본질 안에 얼어 있거나 인간의 내면으로의 지향성 안에 잠재되어 있는 어떤 초월적 보존체로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나눈다. 비록 들뢰즈가 구조적 태도라는 것이 이러한 순수하게 수사적인 통일성 외의 다른 것에 상응한다는 것을 의심한다 해도, 그는 얼마간 구조에 대한 생각을 유지하는데, 이는 그가 현상학과 단절하도록 이끈다. 그는 ‘표면 효과’로서의 의미 개념을 이끌어 내는데, 이것은 다른 차원 안, 깊이로서의 무의식, 또는 영적인 높이로의 초월적 비약이 아니다.
철학적 발명 뿐 아니라 문학적 설명에 있어서, 그는 『의미의 논리』(1969) 안에서 의미 해석에 여전히 관심을 두는 것으로 보이며, 『프루스트와 기호들』(1964와 1970)의 두 판본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과타리와 연결되는 즉시, 해석의 지배는 확실히 실험의 지배에 길을 내어 주는데, 이는 형식주의를 실증적이고 생태적인 차원으로 개방한다. 의미화하는 기호들, 영적, 생물학적 또는 물질적인 것들은 더 이상 정신적 재현이나 의미화에 속하는 격하된 물질적 이중체들의 가치를 가지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지도들, 생태적 기호학, 영토의 행동학을 펼친다. 이것은 경험의 지위 뿐 아니라 형식주의 또한 완전히 뒤바꾼다.
재발견할 또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그 어떤 순수한, 원본적인 경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의 형식적 작동들 아래에 수립될 것도 없고, 그것의 신체적, 형식적 또는 사회적 차원 또는 이러한 사례들의 혼합물에 대해 경험을 부착할 만한 어떤 예외적인 구성을 위한 계획도 존재하지 않는다. 경험은 생산되고, 그것은 실재의 효과들(생태론)과 의미 생산(형식주의)의 교차점에 있다. 의미의 생산은 더 이상 기호들의 체계에 내재하는 완고하게 구조적인 작용을 지칭하지 않으며, 과타리가 1969년에 들뢰즈와 만나면서 기계에 대해 기술한 그의 논문인 「기계와 구조」에서 시작한 바, 생태적으로 새로운 경험 양식을 구성하는 실험을 지칭한다. 이것은 철학 또는 문학 비평을, 분명히 상상적인 것(바슐라르 또는 융적인 원형)과 상징직인 것(구조적 형식주의)의 범주들을 파괴하는 어떤 임상적 차원에 부가한다.
형식주의가 기호들의 생태론으로 향해가는 이 이야기에서 한 인물이 특권적인 행위자 역할을 한다. 그것은 프루스트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같이 또는 따로 이 인물을 분석하는데 열중했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적 분기들을 기호들이 단지 정신적, 담론적 그리고 인간적이기만 하길 그치고, 생물학적, 물질적 그리고 사교적인과 마찬가지가 되는 결말까지 따라갈 수 있다.[1] ‘형식주의’에 관한 가르침들을 쌓아 나가면서, 과타리와 더불어 들뢰즈는 주체적 표현의 과제로부터 만큼 객관적 재현의 그것으로부터 많은 부분 자유로와짐으로써, 기계들이라는 측면에서 문학을 파악한다. 하지만 그 과제들을 방기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우리가 살아 가고 능동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재구축하도록 허용하는 교차지점에서 세계들의 다이어그램화를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형은 과타리가 의미를 부여한 바(Guattari 2000), 그리고 마치 보존되는 자연이 우리 문화 바깥에 있는 것인양 생태학을 환경에만 구속하기를 그치는 그런 의미에서 생태적으로 기술될 수 있다. 프루스트가 우리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인물들을 재촉하고 재발명하면서 기호의 세계들의 이러한 감각적 삼투작용에 관한 어떤 탁월한 예를 제시할 때, 사교적이면서 동시에 정신적인 그러한 환경적인 것이 설립된다.
프루스트와 기호의 세계
우리는 들뢰즈의 최초 저술들로부터 기호에 대한 생태적 접근의 형태들을 볼 수 있다. 그는 아마도 1964년 프루스트의 작품을 “본질적으로 기호들과 관련된” 배움으로 제시함으로써 구조주의의 열광에 그것을 번제한 것으로 보인다(Deleuze 2000: 4)[2]. 이 초기 텍스트에서 우리는 이미 형식적 구문론을 뒤흔들고 자체적으로 유폐된 체계들 안에 기호들의 상징적 폐색을 비트는 위기를 진단할 수 있다. 철학과 문학의 연결은 텍스트의 형식적 순수성으로도 그것의 해석학적인 총체적 논리로도 환원되지 않는 텍스트의 모호함에 관한 우의적인 통제력을 따라 발생하지 않는다. 시작부터 들뢰즈는 텍스트 문구 안에서 기호들의 내적 차원, 구조적 조성으로 기호들을 끌고 가면서, 그것들을 세계들 안으로 전개한다. 그는 기호들을 윅스킬(Uexküll) 풍으로 실험적 환경들 안으로 복수화하는데, 그때 그는 칸트적인 초월성을 다수의 니체적인 생명적 입장들로 다양화하는 것이다. 이로써 개체화하는 파악, 다양화된 감각 이미지들을 제안한다. 이러한 분기(bifurcation)는 즉각적으로 들뢰즈를 구조주의적 활동으로부터 떼어 놓는다.
이 젊은 시절의 텍스트에서 들뢰즈는 상이한 심리적 능력들, 다양화된 시간 선들, 구별되고 일치하지 않는 기호론적 미개간지에 연결하는 네 유형의 세계를 선별한다. 들뢰즈가 규명한 첫 번째 세계는 속물의식의 세계인데, 그는 이것을 살롱들과 거기서 잃어버리는 시간, 맹목적인 지성의 들뜬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수행한다. 다음으로 오는 세계는 심상하게 하는 단서들의 세계로서, 그것은 질투어린 감응들, 잃어 버린 시간, 절망적인 욕망으로 그려진다. 감각적 기호들의 세계는 개체들, 풍경들 또는 성질들 위에 부유하는 비자발적 기억으로 파악하며, 여기서 되찾은 시간은 감각적인 것들의 현행화 안에 압축된다. 마침내 예술의 세계는 그것이 하나의 세계 안에 감싸여진 인상들, 즉 “그 순수한 상태의 작은 시간”을 보존할 때, 그것의 특수성, 숙련된 기호들로 순수사유를 갈구한다. 즉 이 네 가지 세계들은 그것들을 초과하는 경험과 접촉하는 우리의 능력들(지성, 상상력, 욕망, 감수성) 즉, 문제-제작적이고 개념 창조적인 진정한 사유의 조건들을 수립한다.
욕망(질투)에 대해 사교적인 것(속물성과 세속성), 예술의 세계(인공적 기호들, 수립된 기호들)에 대해 감각적인 것(취향, 풍미, 냄새)이 앞선다는 것을 음미하면서, 들뢰즈는 아마도 1964년에 신플라톤주의적인 스타일의 어떤 위계성을 취급하는 것 같다. 이것은 기호들의 세계의 등급을 따라 다른 것으로의 상승과정을 규제하고, ‘본질’에 접근하도록 하는 유일한 것인 예술의 세계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하지만 말끔하게 상승하는 단계로 이루어진 이 피라미드는 즉각 전복된다. 즉 본질은 그 물질적인 신호의 충격과 구분되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기호와 의미의 통일”로 정의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기호들의 계열들, 즉 문자에 앞서는 리토르넬로는 사교적인 것으로부터 무의식, 지각, 마침내 예술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가면서, 어떤 통일된 세계 질서를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복수성은 들뢰즈가 그 통일성을 가동하지 않고, 그것들을 움직임으로써 가로지르는 문학의 가능한 이론화들에 속하는 일단의 양상들을 제안한다. 즉 그것은 발자크의 사회적 유물론, 무의식의 정신분석, 셸링에 의해 강조된 예술 철학이며, 여기서 예술, 즉 철학의 상사체(analogon)는 본질로의 접근, 즉 순수지각의 현상학을 가져다 준다. 이제 이러한 기호의 세계들은 본질적으로 열려지고 우발적인 채 남게 된다. 즉 다른 경로가 또 다른 세계들을 통과해 가도록 한다. 그것들은 그 정신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기호들의 물질성을 기화하면서(vaporizing), 어떤 배타적인 경로를 가진 존재론적 방향과 같은 것에 몰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미는 결국 기호 안에 함축되어 남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구체적인 두께, 즉 그 행동학적 항상성[일관성]에서, 이러한 기호들은 경험의 거품 속으로, 이질적인 환경들 안에서 전개된다. 경험은 세계들, 단서들 그리고 삶의 유형들 안으로 복수화된다.
마주침과 진단
기호들이 사유를 강요하는 것은 모호한 기호들과 무작위적으로 마주치는 물질성 안에서다. 결국 이 초기 텍스트에서 철학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별 소득 없는 과제를 제기하면서, 들뢰즈는 텍스트의 물질적 신체를 결코 그것의 의미화하는 가동적 구조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개입을 원문 사례들 수준에 국한하는데, 여기서 의미의 표면은 텍스트의 자구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것은 소박한 경험론에 따른 지칭(경험적 대상)에 의해서도, 의미(논리적 또는 의미화의 본질), 즉 들뢰즈의 기호 행동학을 무시함으로써 랑시에르가 그를 환원하려고 한 바, 우의적 태도에 의해서도 드러나지 않는다(Rancière 2004a; 2004b). 마찬가지로 주체의 표명이라는 측면에서, 어린 마르셀 안에 인격화된 저자의 정신분석이나 현상학적인 감각적 존재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들뢰즈는 프루스트로부터 주체를 초과하는 어떤 경험에 의해 가혹하게 요청되는 격렬하고 불수의한 사유의 재판정을 가져온다. 즉 우리는 우리가 사유하길 바랄 때도, 우리가 지성적으로 되기를 원할 때도 사유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 의미가 주어짐이 없이 우리를 촉발하는, 그리고 사교적이거나, 감각적이거나, 정념적이거나, 문화적일 수 있는 기호들의 예기치 못한 폭력에 뛰어들 때 사유하게 된다. 사람들의 지성은 사물이나 의미의 상태들이라는 형태로도 현상학적 주체의 내면성이라는 형태로서도 선재하지 않는 어떤 경험과 드잡이하는 사유를 촉발함으로서, 구축되는 것으로 여전히 놓여 있다. 경험은 물질적으로 구축된 문제들 안으로 회절한다(diffracts). 여기서 사유는 그것을 촉발하는 기호들에 의해 요청되지만, 그것의 의미는 구축되어지는 것으로 남는다.
이 마주침의 문제적 양태 안에서, 프루스트의 저작은 기억과는 보다 적게 연관되고, 우발성의 우울증적 영속화가 어떤 순수 상태로 환원된다. 그보다 여기서는 스피노자적이고 니체적인 모험과 관련되는데, 이는 사유를 사교적, 물질적인 만큼 이데올로기적일 뿐 아니라 불일치하는 기호들, 복수적 기호론, 생기와의 투쟁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 경험의 철학은 개념들의 구축에 의해 임상적 진단의 형식 안에 파편화된다. 사유가 그 역능의 한계에까지 밀어부쳐지는 물질적 기호들의 폭력적 침입이라는 조건아래 생산될 때, 사유는 단서들, 신호들 그리고 여러 코드화의 단편적인 사슬들에 반응하면서, 어떤 임상적 행위로 구축된다.
두 번째 이론적 전환점이 있는데, 그것은 들뢰즈가 그의 보충적인 논의에서 성취한 것으로서, 1968년에 기호와 상상력에 관한 정치적 비평으로서 표현 개념 근방에서 스피노자의 전체 저작을 재구성함으로써 이루어진다(Deleuze 1990). 스피노자에 따르면, 기호들이 유비적으로 어떤 우의적인 의미, 즉 어떤 탁월한 의미에 귀속된다고 논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를 예속화해서 다의적인 초월성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기호들은 초월적인 유비적 의미를 함축하지 않으며, 현실적으로 우리 신체의 감응들의 지도, 다시 말해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한다. 이 유비적 기호에 관한 윤리적 비판은 해방의 진료소, 즉 초월성의 노예 근성에 반하는 어떤 요법상의 해방으로 이끈다. 기호들은 더 이상 탁월한 의미의 우의적 양태를 상징하지 않으며, 우리 신체의 상황을 윤리적으로 대사시킨다. 랑시에르가 들뢰즈 문학의 쓰임을 우의적인 사용과 혼동할 때 무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행동학이다. 그리고 우화(『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간계)나 인물(샤를뤼스)이 문학의 운명적인 표징이나 상징이 되면서, 작품이 그 자신의 역능의 우화일 때 유지하는 것도 이런 행동학이다. 랑시에르가 말하길, 젊은 프루스트는 “시간으로부터 낚아 챈 짧은 순간들의 본질로 이루어진 책”, “빛의 방울들”, “남색적인(pathic) 본질”을 원했다. 이것은 “유비적 우화, 생각할 수 있지만 확실히 쓰여질 수는 없는, 이 순수 감각적인 것과 똑같은 감응을 느끼기 위해 구축된 하나의 우화”에 의해 전달될 수 있을 뿐이다(Rancière 2004a: 12 [번역수정]). 따라서 여타 기호 영역들에 침투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되는 담론적 기호는 그것들과 유비적 의미의 관계를 유지하기에 잘못된 것이다. 반면 들뢰즈에게 우화는 그것이 문자 그대로 구축하는 다른 감응들만을 함축하며, 문체에 의해 개체화된다. 초재적이고 숨은 의미를 명백하게 지목하는 대신, 기호들은 우리의 개체적 존재가 변형되는 바, 감응하기와 감응되기의 양상들에 관한 움직이는 지도를 촉발하고 표현하는 그러한 것들을 취하는 현행적인 역능 관계들을 드러낸다. 윤리학이 하나의 실험이 되고 우리가, 행위들, 지향들과 관련되는 도덕적 판단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상태들에 관한 물리화학적 시험에 따라 판단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는 우리가 진입하는, 그리고 우리의 행위 역능이 촉진되거나 감소되는 현행적 관계들에 의존한다. 이것이 그의 문학적 실험에 의해 구축된 프루스트적 세계들의 파편적이고 특유한 지도가 보여주는 것이다. 게르망트의 지도와 베르뒤랭의 지도는 스완이 고통스럽게 이쪽 저쪽으로 옮겨 다닐 때, 즉 오염된 사랑에서 사교적 행진으로, 예술적 실험들(뱅퇴이유 소악절)에서 감각적 인상들(우리가 누군가의 일기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밝은 달빛)로 가로질러 갈 때, 중첩되지도 않으며, 어떤 통일적인 장으로 갈무리되지도 않는다. 각각의 세계들은, 그것을 읽고 독서과정에 따라 상이하게 그 세계들에 구속되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을 촉발할 때, 다른 것으로부터 기호들을 빌어오며 그것들을 쓰기를 통해 재형상화한다.
그것은 단일한 상태로 그리고 과거의 본래 형태대로, 어떤 선-재하는 의미, 형식적 구조, 남색적 실체 또는 진정한 본질 안에 경험을 보존하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험은 마치 우리의 다양한 독서과정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형성하는 그리고 인물들의 변화양상에, 그들이 교차하고 어렵사리 연결되는 환경들의 연속적인 다수의 은신처들에 상응하는 다양한 임상적 행위들에 선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 번째 이론적 단절은 들뢰즈를 현상학 전체와 구별하는데, 이는 『프루스트와 기호들』 첫 번째 판의 결론에서 이미 드러난다. 여기서 철학자는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를 요청하면서 칸트적인 경험 비판을 현저히 비틀어 놓는다. 칸트가 원했던 바에 따르면 비판은 경험을 어떤 영원한 주체의 통일적인 초월적 구조로 환원하지 않지만, 스피노자적이고 니체적인 임상학으로 이끌면서, 사유자의 유형학을 복수화하고, 그것들의 약량학(posology)과 결의론(casuistry)을 포함하는 경험의 많은 양태들 안에서 사유를 극화한다. 즉 질투에 쌓인 연인이나 속물은 동일한 성질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동일한 ‘진리’를 탐색하지 않으며, 동일한 감응들과 성질을 가지지도 않으며, 다양한 실재들과 중첩불가능한 세계들 안에서 운동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호들의 계열을 통해 인물들이 변형되며, 이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인물들을 포착한다. 우리는 독서를 진행하는 동안 그것들을 분별한다.
‘사유의 이미지’(사유가 그 자신의 쓰임을 구성하는 재현물이라는 의미에서 파악되는 것)를 재구성하기 위해, 들뢰즈는 실제로 임상적 경험으로 구성된 하나의 소설, 문학작품, 일정량의 사례들을 수립한다. 여기서는 결코 일반화될 수 없는 어떤 특유한 경험이 문자 그대로 서술되며, 일반적으로 사유의 경험이 반영되어질(흔적으로 남을) 만한 방법적인 글 안에 기술되지는 않는다. 사유가 스스로 수립하는 진리의 수준에 따라 이끌어지는 것은 어떤 방법의 특권적인 도입으로서가 아니다. 1956년 베르그송에 관한 그의 첫 번째 논문의 바로 그 도입부에서, 들뢰즈의 사유 이미지는 이미 이러한 경험 개념을 기호들과 개념들 사이 하나의 특유하고 혁신적인 마주침으로 정식화했다. “위대한 철학자는 새로운 개념들을 창조한다. 즉 이러한 개념들은 동시에 평범한 사유의 이원성을 넘어서고 어떤 새로운 진리, 새로운 분배, 세계를 분할하는 새로운 방법을 부여한다”(Deleuze 2004: 22). 그와 같은 분배는 평범한 것을 재배치하고, 아무런 획일성도 없으며, 단순한 습관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보이는 경험을 배치한다. 경험은 본래적이거나 본질적인 양태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평범한 것과 관습적인 것의 규칙 아래에서만 통합된다. 그것은 우리의 말하는 방식과 우리의 행위의 일상적 방식들에 있는 사회적 습관들을 요약할 때, 양식(common sense)에 관한 우리의 내부적(domestic) 신념들에 의해 통합될 때, 단일한 것으로 드러날 뿐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익숙한 질문들에 타당한 대답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반대로 그것은 어리석음을 내세운다), 어떤 머뭇거리는 구축적 양태 안에서 경험을 초과하고 그것을 그 자체 재배치하는 장에 속한 다이어그램을 구축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이는 들뢰즈가 철학에 관한 그의 정의를 재구성하도록 만드는 바, 프루스트에 의해 텍스트 기호들이 구축되는 것과 같다.
일반적인 경험 가능성의 비역사적 조건, 즉 주체의 선험적 구조로 초월성을 그 자신에게 부여한 칸트와 단절하면서, 들뢰즈는 같은 방식으로 사유에 유한성이나 육체를 부여하는 어떠한 현상학, 즉 어떤 실험을 구성할 가능성을 추정하기 위한 임무와도 거리를 유지한다. 다른 한편 사유의 어떤 재배치의 조건,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적인 마주침, 잠재성으로서의 행위들을 그 자체로 경험한다. 초월성은 기호와 사유, 함축적인 것, 이념적이지만 잠재적인 조건 사이의 마주침의 조건, 이 특유한 경험에 선재하지 않고, 그것에 의해 구성되는 조건이 된다. 사유가 창조적인 것, 즉 만남이 이루어지는 각각의 시간을 기능적으로 그것의 범주들로 재배치하도록 결정하는 것은 이러한 조건 하에서다. 프랑수아 주라비흐빌리(François Zourabichvili)는 이 점을 아주 잘 지적하면서, “경험은 오로지 기호 안에서 수집될 수 있다. 경험은 새로운 것과의 갈등 안에 정신을 놓기 때문에, 창조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Zourabichvili 2011: 242). 이는 예술의 중요성을 가리킨다. 비록 그것이 기호를 구축하고, 습관을 포획하도록 하기 위한 유일한 근거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달리 말해, 예술가는 다시 한 번 경험에 접근할 수 있는 어떤 ‘확실성’의 유일한 담지자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을 것이다.
들뢰즈는 사유를 물질적 힘들에 관련시키는데, 이것은 경험적 실현의 조건들로 전제되는 바, 예외적으로 잠재적이지 않으며, 지각하는 신체에 집중하지도 않고, 여전히 현상학적 유형의 주체적 계류지에 상당할 것이다. 개념에 대한 관심은 그것을 새로운 긴장에 종속시킴으로써 사유의 역동성을 재생시키는 능력에 따라 측정된다. 따라서 엄밀함과 재인의 이념은 이 새로운 사유 이미지, 즉 진단(diagnosis)에 평가를 연합하는 것에 길을 내주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 탐구의 조건에 선재하지 않는, 예기치 않은 그러나 필연적인 문제의 압력 하에서 형성되는 한 어떤 창조적인 관점이다. 문제는 들뢰즈가 이념이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서, 기호와 의미의 통일성인 본질이라는 용어를 대체한다. 경험과 사유는 서로간에 공-구성되고 선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기능적으로 결정된다. 만약 철학이 문학과 관련된다면, 그것이 어떤 감각적 신체를 스스로에게 주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시(poetry)가 사변적 사유의 목표가 될 것이라는 것도 아니다. 문학적 경험은 사유를 어떤 특이한 경험과 함께 놓는다. 이는 정말로 새로운 것으로서 이미 문학사에 의해 가치 있는 것으로 취급되고 개괄된 경험 너머로 간다. 우리가 이 감각적 재합성을 생산하도록 규정하는 모든 작업들, 지독히도 쾌활한 기계는 그 독자를 새로운 세계로 밀어 넣는다. 인문학자는 실수투성이다. 그는 우리가 새로운 책에 대해 그에게 말할 때, “벌써부터 지루해 한다.” “반면 훌륭한 책은 특별한 어떤 것, 계산불가능한 어떤 것이며, 이전의 모든 정전의 총합으로 구성되지 않고, 그것들 중 그 학자가 발견할 수 없는 모든 것이 가장 총괄적으로 뭉쳐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들의 총합이 아니라 그것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Proust 1924).
문학 파편 기계
과타리의 엄청난 영향은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두 증보판에 걸쳐 있다. 들뢰즈는 이것을 1970년과 1976년에 연속해서 출판하는데, 여기에는 그들이 프루스트에 몰두한 새로운 분석이 담겨 있다. 이 두 시간은 『안티오이디푸스』과 『천의 고원』 안에 있다. 첫째, 들뢰즈는 과타리의 횡단성(transversality) 개념을 호의를 가지고 도입하면서, 해석(interpretation)이라는 어휘 – 확실히 어떤 니체적인 의미에서 해석, 즉 힘들의 포획이자 기원으로 되돌아 가지 않는 것 –에서 실험(experimentation)이라는 어휘로 나아간다. “사유한다는 것은 언제나 해석하는 것, 즉 펼치는 것, 전개하는 것, 해독하는 것, 기호를 번역하는 것이다”(Deleuze 2000: 97)라고 1964년에 썼다. 그리고 들뢰즈는 횡단성 개념을 도입하는 중에 과타리를 인용하면서, “해석한다는 것은 횡단적인 것의 통일성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Deleuze 2000: 128, 168; Sauvagnargues 2009: ch.XIV)라고 1970년에 화답한다. 들뢰즈는 이 개념으로 새로운 실용주의를 향해 차이의 철학을 추진하면서 “작품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을 방지하고 “현행적으로 오로지 실험에 개방되도록” 겨냥한다(Deleuze; Guattari 1986: 3). 우리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질투는 “연속되는 사랑의 무한성, 차이나는 질투들의 무한성, 무상한 각각의 것들의 무한성”(Proust 1922)으로 구성된다. 또는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소통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횡단선을 수립하는 것에 놓인다. 이는 우리가 알베르틴의 얼굴 중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 뛰도록 한다. (...) 결코 일자에 대해 다자를 재생산하지 않으면서”(Deleuze 2000: 126), 반대로 ‘긍정하기’에 따라 “이 모든 환원불가능한 파편들을 통일하지 않고서” 그렇게 한다고 들뢰즈는 선언한다. 그들이 첫 번째 책에서 논의를 정련한 것과 마찬가지로, 프루스트의 쌍둥이 상인 카프카를 다루면서도 함께 문학에 집중한다. 이때 우리의 기호와의 관계는 이전에 주어진 내용에 관한 중립적 해석 또는 복원으로가 아니라, 특이한 변형에 관한 어떤 실용주의적인 실험으로 구성된다. 여기에는 오로지 생산되는 의미가 있을 뿐, 주어진 것은 없다.
기호들의 생산은 사유의 질서 안에서 예외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즉 그것은 분석의 임상적이며 정치적인 전회로서, 기호의 정치적 행동학에 관한 초월적 경험론을 개방한다. 이제 어떤 기호란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에 관한 분석으로부터 출현하며, 그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그 결과 의미는 더 이상 어떤 예외적으로 담론적인 영역에 수립되지 않으며, 그것의 경험적 연결로부터 떨어져 나오지만, 형식주의의 측면에서 홀로 이해불가능하게 남은 어떤 과정이 되는데, 왜냐하면 형식주의가 스스로에게 닫힌 코드들을 지칭하지 않고, 그것이 배치하는 경험의 양태들, 즉 그것이 추정하는 배치, 그것이 작동하게 하는 물질적인 것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미의 생산을 설명하는 기계 개념의 이익을 위해 구조를 포기하도록 결정한다. 형식주의의 위상은 변화했다. 의미는 형식적 통사구조를 지칭하지 않으나, 마르크스적 생산에 따른 언표행위의 구체적 배치를 가리키는데, 이는 예외적인 논리나 의미화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 해도 이러한 배치들이 초월적 언표행위의 조건으로 작용할 때, 인과적 경험론에 의해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조건들은 가능성들을 결정하지 않고, 대신에 어떤 특이한 실험 방법이 그 쓰기의 노선을 생산하는 방어 조건들을 형성한다. 기호와 의미에 관한 이 횡단적 개념은 실험적 경우들로부터 구축되는 하나의 실험을 가리킨다.
횡단성 개념은 이미 그와 같은 실험 사례를 형성한다. 과타리는 처음에 그것을 실용적으로 라 보르드(La Borde) 병원에서 제도 요법 기능을 증진시키기 위한 임상적 시도로 만드는데, 여기서 그는 수직적인 종속구도들(의사와 간호사 또는 요양사와 환자)을 거부하는 연결양태와 그것들의 수평적 위계들을 제안한다. 그는 이것을 이러한 축성된 위계들을 헤집어 놓는 횡단적 가동양식을 제안하면서, 동일한 평면에 그 위계들을 흩뿌리며, 그리고 어떤 개별적 실체를 다른 것들과 연합시킴으로써 수행한다. 이 중심화되지 않은 조직화의 개념은 임상적인 타당성 뿐 아니라 정치 조직들에도 타당하다. 여기서 과타리는 ‘주체 그룹들’을 따로 놓는데, 이들은 어떤 중심 지도에 심하게 종속되어 있는 정당이나 의장체로서, 그는 이를 좌파나 우파의 조직만큼이나 비판한다. 그리고 횡단적, 자기-관리적이고 집합적인 ‘주체-그룹들’이 있는데, 여기서 그룹 주체성은 그 수장에 의해 탈취되지 않는다. 따라서 횡단성은 선행하는 위계적 수목 구조에 의해 예외적으로 지배되지 않는 조직화의 어떤 양태와 관련되며 총체성의 체제를 변화시킨다. 이 비-위계적 조직화 개념은 직접적으로 무시간적 보편, 즉 수직적으로 그 개체적인 사례들을 지배하는 것에 기반하는 이론들과의 인식론적 단절을 함축한다. 보편 타당성의 주권은 단번에 그 실험적 조건들에 맞추어진 어떤 특이한 형식화에 길을 터주며 이는 더 이상 스스로를 구조적인 관념적 평면 위에서 표현하지 않는다. 이 새로운 횡단성 개념은 작업과정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갱신한다.
이념의 극화는 사유하는 자의 수준에서 임상적 비판을 형성했다. 과타리와 더불어 초점은 임상적인 것으로 이동하며, 그것은 어떤 개입으로 파악되고 이론에 관한 실용주의적 개념으로 이동하면서, 어떤 위기로 파악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 조건들을 관점적 양태로 변형하는 전망이지 영원한 것, 무시간적이거나 불변하는 구조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이론과 실천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통합적인 영역으로 파악되지 않으며, 인과적 결정론에 의해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보편성이라는 단일한 장에 환원되지 않는 바, 스스로를 실행하는 여러 이론적 분절들을 연결할 때, 그 자체로 횡단적이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첫 번째 판본을 이끌었던 로고스와 유기적 총체성이라는 영역에서부터, 들뢰즈는 1970년에 안티-로고스에 접속한다. 들뢰즈는 저작 전체와 문학의 위상에서 뿐 아니라, 첫 번째 판본의 본질 개념을 완전히 변형하는 파편의 철학에 따라, 분할된 부분들의 식물적인 정념들로서 오로지 횡단적으로만 소통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본질은 더 이상 기호와 의미의 조화로운 일치로 나타나지 않으며, 파편적인 관점, 그 자체로 어떤 개별적인 것이 전혀 아닌, 예화된 인격성(예술가의 상)에 부착되지 않는, 마찬가지로 어떤 도상(emblem)적 가치를 가진 탁월한 인물도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들뢰즈가 비통일적인 총체성이라는 이 횡단적 개념을 구성하도록 하는 기차 여행의 예를 취해 보자.
기차는 돌아 나아가고 (...) 나는 내 시야가 새롭게 될 때 나의 완연한 분홍빛 하늘을 잃어 버림을 애도하고 있었지만, 그 기차칸의 두 번째 창문에 그것은 남겨져, 지금 현재 반대편 창문 하늘은 붉게 변해 있다. 그래서 나는 한 창문에서 다른 창문으로 재조합되면서 달려가는 나의 시간을 보내며, 하나의 캔버스 위에 나의 환하고, 주홍빛이며, 영원히 변하는 아침의 간헐적이면서 대치하는 파편들을 모은다(Proust 1924).
프루스트는 의심할 여지 없이 화자의 선을 재획정하는 ‘어떤 연속적인 그림’을 요구하지만, 들뢰즈가 보기에 거기에는 파편들이 보여지는 것들 안에 또는 화자의 편에서 일렬로 늘어서 있지 않고, 한 창문에서 다른 창문으로 달려 나아간다. 그는 놀라워하면서 기차의 속도가 끊고 자르는 불연속적이며 부서지고 불규칙한 파편들, 만화경 같은 시각 기계를 낚아챈다.
『차이와 반복』 그리고 『의미의 논리』에는 시몽동과 스피노자의 연구로부터 유용한 점을 취한 것이 드러나는데, 이러한 관점은 예술가의 내면성에도 환경의 통일성 안에도 기입되어 있지 않으며, 반대로 그것의 환경 만큼이나 많은 개체화를 변형하는 개체화의 양태를 정의한다. 그래서 각각의 순간에 그 기차는 언제나 운동하는 풍경의 조합들, 재조합되는 노르망디를 다양화한다. 감정(emotions)에 관한 행동학은 페르시아적인 매력과 발벡(Balbec)이라는 이름을 혼합한다. 발벡은 작은 휴양지에서 잠자는 여행객들에게 카페오레를 주던 ‘아름다운 소녀’를 만난 곳이다. 주체와 비인격적 특이성이 없는 개체화에 의해 진행하면서, 이 감응들의 카드는 어린 마르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가리키지 않으며, 쓰는 것 자체의 개체화 과정, 문체, 문자적 기호들의 구성적인 신진대사를 가리킨다.
연역적 해석의 통일성은 탈구된 파편들에 의해 작동하는 반논리적인 텍스트 기계의 기능에 길을 터준다. 즉 과타리적인 횡단성은 블랑쇼가 “가장 엄격한 용어로, 문학 기계의 수준에서”(Deleuze; Guattari 1977: 42) 드러낼 수 있었던 파편에 관한 이론과 접붙여진다. 전체에 대한 부분의 관계에 관한 양식은 변했다. 이 새로운 총체성 개념은 모든 일원적 개념들, 개체적 동일성 또는 인격적 응집과 같이, 문학 작품의 일원성을 통과해 간다. 그것은 다양체 개념의 새로운 양식을 표시한다.
『베르그송주의』와 『차이와 반복』에서 잘 규정된 들뢰즈의 다양체는 여기서 정치적이고 실용적인 효과라는 새로운 힘을 떠맡게 되며, 중심화된 조직, 위계적 주권들, 지배적인 기관들, 제도화된 정상성 뿐 아니라 일반성에 따라 경험에 그것의 통일성을 부여하는 어떤 무시간적인 동일성으로 기능하는 보편자 또는 구조의 역할도 횡단적으로 가로지른다. 통일성과 동일성의 현저함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면, 파편들은 하나나 보편적 또는 전체적인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이는 원초적인 통일성을 되찾거나 국지적으로 부재를 가리킴으로써 총체성을 함축하지 않으며, 그 파편화, 이접(disjunction)의 힘 안에서 횡단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일자의 권위 아래에서 파편적인 것을 파악하는 것은 플라톤적 상징 개념으로 이끌었고, 사랑의 이론 안에서 부재하는 원초적인 통일성, 사랑, 욕망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회복을 향한 파편적인 요청은 잃어버린 요소들의 재생산을 지향하게 되었다.
파편에 관한 이 새로운 개념은 생기적, 사회적 또는 정신적 재생산으로서의 예술 안에 있는 모방만큼 많이 관련되는 생성의 이론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어떤 공생적인 마주침으로서의 이 새로운 개념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프루스트 텍스트의 파편성, 샤를뤼스와 쥬피앙 사이의 동성애적 사랑의 퍼레이드의 파편들로서 이것은 말벌과 서양란 사이에 있는 포획과 관련된다. 이 새로운 공생의 모델은 프루스트가 그의 인물들의 감응들, 그들의 빠름과 느림들, 그들의 진동와 성적 상호관계를 곤충학자의 정확성을 가지고 해명하기 위해 이용하던 스피노자적인 행동학에 적용된다. 여기에는 더 이상 유와 종으로도 사회적 정상성으로도 만들어지지 않지만, 인물들을 변형하는 감응 지도들을 현행적으로 표현하는 전반적으로 새로운 개체화 이론이 있다. 샤를리스나 쥬피앙 뿐 아니라 생루나 질베르트는 점차적으로, 계속 증가하는 변형의 급박한 진행에 그들을 밀어넣는 동성애적 생성에 포획된다. 남작은 뒝벌에서 늙은 공작(duchess)으로 변신하며, 알베르틴은 한 무리의 소녀들로부터 죄수로, 어떤 정복된 연인으로부터 젊고 비밀스러운 유혹자로 사라져 간다. 따라서 개념적 인물들과 같은 문학적 인물들은 어떤 특정 인물을 모방하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규정된 개인들도 아니고, 화자나 저자를 지칭지도 않으며, 구성 과정 안에서의 개체화, 즉 모양을 갖춰가는 주체화의 양태들을 탐색한다. 레비나스는 다소 넌더리를 치면서 프루스트에게서 영혼은 ‘도착상태’(outlaw) 안으로 ‘그 자체 뒤집어져’ 있으며, 그래서 프루스트의 시대에 동성애를 규정한 일상적 용어인 뒤집힘[도착상태]을 내세우면서 가장 현기증 나는 관계가 인물들 사이에 수립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거기서 도덕, 또는 심지어 소수적 섹슈얼리티(뒤집어진 도덕)를 옹호하는 것은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 [오히려] 돌연변이 욕망을 기존의 범주들로 탐구하는 것을 멈추고,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을 탐구하기 위해 진정한 기계로 문학을 되돌리는 것이 문제다.
이 생산 이론(그리고 재생산 이론은 아닌)은 동물 계열들(말벌)을 식물 계열(서양란)에 의해 ‘포획된 것’으로 변형하며, 이를 위해 외적인 재생산 기관의 기능을 추정한다. 따라서 행동학의 사례는, 생물학적 수준에서 서로 간에 상호작용하는 완전히 다른 종들, 벌레들 그리고 식물들의 임의적인 마주침에 의해 ‘종의 재생산’이라고 서투르게 불리워지는 바를 확증함으로써, 공생의 논리로 나아간다. 이 재생산 모델은 자연의 모방을 가장하는 문학과 예술 이론에 도입되지만, 문학의 생태적 기능은 이제 이 가장 다기화된 생명의 특성들을 포획하는 것이다. 문학은 우리의 실제적인 개체화의 양태들을 탐색하고 탐구하는 바, [이에 따라] 프루스트는 젠더 연구를 개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규범화된 성 정체성을 보증하는 대신에, 그는 n개의 성의 유인의 양태들, 즉 여성에 속한 남성의 부분과 공명하는 남성에 속한 여성 부분 그리고 매우 복잡한 여타 변형들을 그 n개의 성들이라는 것으로 기술하기 때문이다. 실재로 어떤 몰적(molar) 섹슈얼리티(사회적, 통계적 그리고 개체적인)로부터 젠더와 규범에 무관심한, 진정으로 횡단적인 분자적(molecular) 섹슈얼리티로 이동하는 것은 바로 섹슈얼리티와 무의식적 욕망에 관한 전체 개념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구성된 사회적 정체성 또는 ‘자연적’이라고 간주되는 생물학적 성들이 아니라 감응들의 포획이라는 평면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섹슈얼리티가 이질적인 파편들의 포획을 포함하면서 공생적 생태론으로 개방된다는 것은 폐쇄적 통일성과 동일성으로 파악되는 개체들의 분할과 무관하다. 파편 이론은 말벌과 서양란이 어떤 예화적인 사례로 취하는데, 이것은 이질적 계열들 사이의 포획에 대한 이런 관심을 함축한다. 이는 식물적 공생을 향한 유기적 단위의 환치, 프루스트가 기호들을 해독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어떤 진정한 윤리학 또는 동성애의 물리학으로 만든 그러한 복잡다기한 동성애를 향한 지배적인 섹슈얼리티의 환치를 허용한다. 그런 까닭에 이러한 공동체가 FHAR[Front homosexuel d'action révolutionnaire, 동성애 혁명운동 전선][3]와 더불어 1970년대에 프랑스에서 정치적으로 구성된다. 그 문학적 실험 이전에 미정의된 주체화의 양태에 대한 어떤 정치적 실험으로서, 문학이 스스로를 성적이고 심리적인 변방에 관한 탐색으로 내세우는 것은 성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다.
이것은 결국 그것이 언어적이든 정신분석적이든 문학이 지배적인 의미화 구조 도식으로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는 마치 그 자신의 본질을 형성하기 위한 자기목적적인 임무를 문학에 할당하는 무의미를 침묵시키는 것과 같다. 문학 기계는 새로운 사회적 실험의 양태들을 생산한다.
이것이 어째서 『앙티오이디푸스』에서 뿐 아니라, 『천의 고원』에서도 프루스트(그 혼자 만이 아니다)가 인간 개체화와 무의식 또는 새로운 주체화의 의식적인 사회적 양태들을 위한 가동자(operator)로서 기여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프루스트와 카프카를 오이디푸스적 거세공포, 상징적이고 상상적인 격자에 우겨 넣음으로써 방기하는 대신에, 들뢰즈와 과타리는 그들의 글쓰기 기계, 즉 그들이 생산하는 실존 양태에 흥미를 가진다. 그들은 말벌과 서양란 사이의 포획과 더불어, 욕망하는 기계, 기존의 관계에 무관심한 그것은 욕망, 위반 그리고 법 사이의 관계를 조롱하면서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분열자적 입장을 표현한다. 이 분열적 순수, 겉보기의 우울증적 죄의식보다 더 급진적인 이것은 들뢰즈에 의해 식물적인 것(vegetal)으로 명명되며, 아마도 그것의 일관적 조직화와 가정된 동일성을 중심으로 조직화의 어떤 모델과의 거리를 번역한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식물적인, 동물적인(또는 인간의) 섹슈얼리티는 더 이상 중심에 위치하지 않지만, 어떤 동맹으로서 공생적으로 그리고 생태적으로 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관 없는 신체’의 이론이란 더 이상 닫힌 획일적 기관들의 위계적 조직화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신체적 경험의 양태에 관한 횡단적 개념이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욕망하는 기계나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로서 무의식에 관한 ‘분열분석’ 개념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성으로서 무의식을 부여하는 정신분석에 반대한다. 이때 오이디푸스는 유럽 부르주아 가족의 형상, 즉 무의식의 정치적 변조에 있어서 어떤 역사적으로 결정된 사례 위에 형성된다. 무의식은 비역사적으로 추정된 개인적인 아버지 형상의 재현에 따라서(프로이트) 또는 기호적인 것의 불변하는 수학에 따라(라캉) 구조화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에 따라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과 연결된다. 공생적 마주침의 양상 개념에로 개방되는 것은 바로 개체성 개념이다. 인간은 그들이 박테리아와 다른 생명체들로 변형되는 대신 그들도 변형됨으로써, 그러한 생명체들과 [자신들을] 교환할 뿐만 아니라, 모든 섹슈얼리티도 재생산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침, 지의류 유형, 동종체들에 속한다. 따라서 모든 인간문화들은 마주침으로써 혼종화되는데, 이는 식물-되기와 광물-되기로 완결되어야 하는 동물-되기 안에서 이론화된다(예컨대 실리콘의 동종체는 우리 당대의 디지털 세계 문화를 규정한다).
이 식물적 순수성은 들뢰즈가 중심화된 유기적 죄책감보다 위험하고 민감하다고 생각한 것으로서, 『프루스트와 기호들』 첫 번째 판본의 결론이 요청했던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에 대해 우리에게 실마리를 준다. 즉 안티-로고스의 역능은 닫힌 체계를 탈구하고 중심화된 동물적 총체성으로부터 식물화 가능한 리좀으로 진행하는 바, 연결들과 이질성, 비기의적(asignificant) 균열로 이루어진다. 이접적 종합(disjunctive synthesis)이라는 이 새로운 개념은, 탈구된 계열들 사이에 소통과 공명으로, 1976년 리좀이라는 식물학적 명칭을 얻게 된다. 이것은 1980년에 『천의 고원』의 서문이 될 것이다. 동일성(상징적 또는 변증법적 차이 개념) 안에 차이를 녹여 넣는 것과 달리, 이것은 연결을 사유하는 문제인데, 이산적인 것들을 통일하는 연결이 아니라, 새로운 차이의 실재적 생산으로서의 연결이다.
그와 같은 것이 리좀의 원리인데 이는 체계이론에 대해서 만큼이나, 글쓰기, 문학 또는 철학적 생산, 기호들의 공생적 배치에 관한 이론에 적용되는 다양체들의 실천이론이다. 파편적이고, 이접적인 모든 체계는 ‘무의미의 균열’에 따라 ‘다양체들’을 생산하므로, 연결과 이질성에 의해 가치를 띤다. 즉 만약 그것인 사실상 의미화하는 균열에 따라 진행된다면, 연결된 이질성들은 선재하는 단위들로 구성될 것이다. 이때 이질적인 것들은 형식적 과정들 또는 주어진 객체 단위들을 따라 나뉘어진다. 리좀의 동력학에 따르면, 문학 비평은 작품 안에 유폐된 객체성의 전사(傳寫)로서가 아니라 지도제작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비판적 견해는 그것이 무관하거나 부수적이라는 의미에서 사소하지 않고, 무작위한데, 다시 말해, 그것은 이러한 읽기의 발생으로 현저해진다. 횡단성은 단순히 저작의 위계적 구조에 의문을 던지는 것 보다 훨씬 더 멀리 간다. 읽기에 관한 그 모든 실용론은 아름다운 총체성에서부터 이접적인 파편에 이르는 이 경로 안에 포함되며, 들뢰즈와 과타리는 『카프카』의 첫 번째 페이지에서부터 어떤 실제적인 증명을 제공한다. 저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파편적이다. 즉 그것은 저작 안의 어떤 지점을 선별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그 입구 지점은 저작 안에서 하나의 길을 강제한다. 부수적인 것, 즉 선결정되지 않은 것은 비판적인 입구에 있다. “우리는 따라서 어떤 지점으로든지 진입할 것이다”, “그 어떤 입구도 더 많은 특권을 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목적들을 위계화하는 총체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입구는 “우리가 항구적으로 나타나기를 희망하는 사물들과 연결된다.” 특권적인 입구는 운동하는 입구에 의해 대체되었다. 즉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입구가 연결되는 다른 지점들이 무엇인지, 누군가가 두 지점들을 연결하기 위해 통과해 가는 교차로와 회랑들이 무엇인지, 리좀 지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지도가, 만약 우리가 다른 지점으로 입장한다면, 어떻게 변형되는지 발견하려고 애쓰게 될 것이다”(Deleuze & Guattari 1986: 3-4). 어떤 입구를 요청하는 저작은 효과를 생산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작동한다.’ 하나의 기계로서, 그것은 구조라는 메타담론적인 평면에 수립되는 대신에 그 기능작용이 사물 안에서(in re) 작동하는 것이며, 그 의미화가 “그것의 기능작용에만 의존하는” 것이다(Deleuze 2000: 146). 입구는 필연적으로 파편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읽기의 작동을 그 해로운 산책의 선들에 속하는 무작위적인 광선으로서 뿐 아니라, 그 순환 공간과 그 풍부한 네트워크과 함께 살아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하나의 효과적인 개입으로 감지되기 때문이다(Deleuze 2000: 168).
열린 체계에 관한 이 개념은 바렐라(Varela)으로부터 만큼이나 맑스로부터, 다니엘 스턴으로부터 만큼이나 프리고진과 스텐저스로부터도 빌어온 것인데, 기호론적으로 뿐 아니라 방법론적으로도 타당하며, 구성된 기호론적 생산물들(예술의 기호, 사교적 리토르넬로)에 대한 정보를 가져다 준다. 이는 또한 비-인간 기호 생산물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경험적 장은 이 파편적 양태 안에서 재배치되며, 기호론적 미개간지들, 복수적 행동학에 의해 구성되고, 실험의 영토들 안에서, 이미 주어진 어떤 장으로서가 아니라, 탈영토화의 행위로 복수화된다.
기호들의 영역과 생태적 리토르넬로
이제 이 리좀적인 개념은, 그것이 무생물적인 광물을 생명 유기체나 인간 문화로부터 나누는 왕국들에 관한 위계적 존재론을 거부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른바 인공적 구축물들의 자연적 표지라는 기호의 영역으로 분할되는 것을 막는다. 무엇보다 리좀은 기호들과 신호들에 관한 하나의 설명으로서, 논리적, 상상적 또는 상징적인 의미, 어떤 식으로든지 순수한 인간으로 기호들을 환원하는 해석으로부터 언어학적 우선성을 기각한다. 무의식을 배타적으로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종속의 양태들과 함께 코드화하는 물리적 신호들, 생물학적, 무의식적 그리고 사회적인 것들을 자르고 연결함으로써, 모든 기호들은 이질적인 기호론적 미개간지들을 조직하는 실용적인 횡단 양태 안에서 리좀적으로 구성된다. 기호론은 따라서 특정한 자본주의적 리토르넬로 안에서 정치철학와 사회적 배치의 임상학에 개방된다.
이 관점으로부터 1964년에 들뢰즈에 의해 선별된 네 가지 세계들은 다른 모습을 취한다. 어떠한 총체화도 거기에 없으므로, 그것들은 마주침의 우연으로 주어지고, 화자의 감응 지도(affect map)와 관련되며, 그 어떤 일반성도 가지지 않는다. 어떤 통합된 기호 대수학으로 환원되고, 동질적 체계 – 언어학적 문제론, 무의식의 의미화 구조, 계급 사회론 – 의 폐쇄 아래에서 의미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 대신에, 이러한 기호들은 체계성을 포함하여 구별되는 생태적 거품들 안으로 분배되며, 따라서 상대적인 통일성은 다양성을 방해하지 않는다. 기호들은 그들의 체계적 배치들을 차이의 형식 안에서 전개한다. 들뢰즈가 과타리와 함께 쓴 바에 따르면, 문제는 정치적일 뿐 아니라 식이요법적이기도 한데, 이는 ‘기호들의 영역들’, 불일치의 행동학적 체계들로서 신체적 신호들의 파형화된(variegated) 원근법, 빨강, 피부 조직, 사회적 흔적들, 감각들 그리고 심리적 전망을 포함한다. 이것들은 담론적 언어 또는 비-담론적인 기표, 물질적, 사회적, 생리적 코드화와 연결되며, 그 연합된 환경들에 기호들의 영역을 개방한다.
기호들은 여기서 어떤 리좀적 양태로 행위하며, 의미화의 정신적 평면에도 그 의미화의 형식주의적인 추상적 구조에도 제한되지 않지만, 그것들의 환경, 징후들 즉 감각 흔적들을 영토화하는 것의 파형적 선들 안에서 사유되는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방출, 개체화들로서 등장한다. 이 세계는 개별체들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리토르넬로, 실마리들의 행동학적 차트, 이제 존재 양태들, 개체화의 역능들을 예화하는 물리화학적이고 정치적인 영역들을 반영하는 기호들과 포스터들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세계들은 경험의 부분들로 주어지지 않고, 환경적인 고원들로부터 사교적인, 사랑의 또는 예술적인 리토르넬로를 분리하는 탈영토화에 의해 구축된다. 이들은 징후들 속으로 그것들을 변형함으로써 기능적인 질들을 선별하고, 이에 따라 기호들의 전유가 영토적 표식들로서 – 동성애로부터 속물근성으로, 욕망으로부터 예술로 – 그와 같은 변형, 즉 새로운 표현적 영토들의 구성 행위에서 야기된다. 따라서 과타리는 『천의 고원』 일 년 전에 출판된 『기계적 무의식』에서 프루스트적인 리토르넬로를 분석했다.
리토르넬로에 의해 공고화되는 이 개체화의 역능은 또한 『천의 고원』에서 정확히 프루스트의 예를 들며, 들뢰즈가 과타리의 기호론과 더불어 스피노자와 시몽동을 연결하려고 애쓰면서 과타리와 함께 채택한 개체화에 관한 아름다운 이론을 수용하게 한다. 그렇다면 등장인물들은 무엇인가? “적어도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단 한 번 그들의 집합적이고 특이한 개체화가 주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특개성(haecceity), 순수 특개성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Deleuze; Guattari 1987: 271) 스피노자가 주장했던 것처럼, 운동이 더 이상 정지의 대립물이 아닌 곳에서 개체적인 것은 상대적인 운동과 정지, 즉 빠름과 느림, 어떤 공생적 힘이나 경도(longitude)로 구성된다. 이는 힘의 변화에 따라 위도 안에서 진동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특개성은, 예술이 결코 인간이 아닌 평면에 예외적으로 구성하는 것이지만,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것에 환경을 연결한다. 이것은 생태론에 관한 과타리의 정의에 부합한다. 왜냐하면 세계들, 즉 알베르틴 또는 샤를뤼스, 뱅퇴이유 또는 게르망트에 따라 상이하게 분배되는 소설의 몰적 인물들이 이러한 행동학적인 거품들을 통해 순환하고 여러 가지 환경들을 통해 그들의 특개성(haecceity)을 재조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행하는 세계 안에서 그의 정체성을 수행하는 인물이 아니라 리토르넬로에 의해 차이나는 개체화로 전진하는 세계의 포획이다. 따라서 그 개체화는 어떤 리듬적 인물 그리고 리토르넬로로서의 가치, 과잉과 변형의 혼합 결과로서 형성된다. 그것이 1973년 『앙띠오이디푸스』의 출판 일 년 전, 그가 프루스트로 돌아가, 1976년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세 번째 판본이 될 것을 재편집할 때, 들뢰즈가 화자나 소설의 주인공의 인격적 특성과 완전히 결별하는 이유이다. “화자라기보다는 ‘찾기’(the Serach) 기계가 있으며, 주인공이라기보다 그 기계가 이런 저런 구성 아래에서 기능하는 배치가 있다. (...) 화자는 기관 없는 거대한 신체다.”(Deleuze 2000: 181) 다시 말해 이것은 그와 같은 어떤 감각적 틀의 구성 없이 지각불가능한 채로 남겨진 감응들의 이질적, 행동학적 포획장치다.
예술은 그것이 사교적 속물, 사랑와 욕망, 감각 또는 심지어 예술의 기호를 구축하는데 있어서도 원래의 인물들을 모방하지 않으며, 이 다양한 세계들은 더 이상 어떤 위계적 진행에 기반하지도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이러한 특개성들에 의해 그 감각적 존재들, 즉 덧없고 물질적인 일관성을 돌연하게 취하는 감각적 기호들 – 우유거품, 울리는 벨, 껍질이 벗겨진 아스파라거스 - 을 구성하는, 그리고 이 진동하는, “아름다운 스타일의 고리들”에 감싸여진 특개성들을 드러내는 율동적인 음조들이다. 물론 그것들은 인물들이 감응되는 기호론적인 리토르넬로를 감각가능하게 만들고 간파하는 예술의 기호들의 개입 없이는 지각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문학은 개념들의 진단과 구성을 통해 철학적으로 정치학과 직접 연결된다. 이는 일반적인 경험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구성함으로써 변형되는 내재적이고 특이한 경험, 다시 말해 우리의 현행성의 문제, 우리가 오늘날 해결해야만 하며, 우리 앞에 존재하지 않으며, 전통적 체계의 재생에 유용한 것과 같은 것으로 구성되는 경험을 형성한다.
이런 생태적 형식주의는 평범한 언어, 즉 고유한 의미에서 어떤 예속의 평면을 포함하여, 문학을 유용한 사교계의 발명과 변형을 위한 그 능력으로 연결하면서 그것을 분만한다. 이것은 실재와 허구의 관계를 전환하는데,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새로운 개체화의 환경들을 생산하는 바, 환경적, 사회적 그리고 정신적 기호들을 연결함으로써 개체화를 생태적으로 배치한다면, 문학이 더 이상 상상의 취미생활에 속하는 감상적인 내면성에 제한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의 역사는 이러한 이산적인 환경들에 관한 행동학적 연구에 관심을 가지는 그러한 시각에 따라 구성되어 유지된다. 예컨대 발자크적인 개인들은 상대적인 것들의 계보학적 네트워크와 연극적인 부르주아 논리에 따라 그 재산권 행사의 총체성에 의해 성격을 구성하는 관계들을 긍정하면서, 그 모든 구성적인 부가물들 – 지팡이 광택제에서부터 단추 수에 이르기까지 – 외투의 옷감, 제조사, 구매가격 그리고 그것의 사회적 가치를 조심스럽게 세부적으로 묘사한다. 반대로 베케트의 부유하는, 애벌레적인 그리고 감산적(subtractive) 개인들은 생태적으로 상이한 유형의 인물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것은 독특한 리토르넬로들과 더불어, 그러나 레이더 장치나 다른 불균질하고 특수한 스크린 위의 불분명한 신호들처럼 출현하면서, 완결됨과 동시에 규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들과 흉내내기의 혼합, 즉 잡아 채는 부리들과 다채로운 기호들은 어떤 스타일을 가진 저자의 상상이나 중요한 코드들을 응축하기 위해 이 이산적인 요소들의 기호[상징] 능력(symbolic capacity)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유비적 의미, 기호론적 또는 상상적인 것으로의 어떤 고유한 것의 전이는 존재하지 않지만, 탈영토화의 순환회로와 복수적(plural) 세계들의 구성, 매우 실제적이게도 새로운 사회적 생태론들이 존재한다. 어떤 파격 대신에, 그 신진대사의 변형을 따라 수행되는 단어들을 가진 은유와 문학적 형상들이 영토적인 공동작인(coefficients)의 변신을 드러낸다. 이러한 조건들에서, 언어의 저급하고도 고급한 용도로서 언어학과 문체론을 우선시하는 것, 또는 흔히 남성, 즉 세련된 사적 방언을 사용하는 특허권자인 위대한 작가의 화려한 예외성을 위한 걸작을 고수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이는 우리의 애정과 편애를 긍정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지만, 이러한 일치가 우리를 변형하게 하는 어떤 감응의 목록으로서 그런 것이지, 불변한다고 가정되는 위계에 따라 쓸모 있는 작동을 배치하는 규모의 등록과 문화적 온기로서가 아니다. 이때 우리가 걸작이라고 주장하는 하나의 책을 생산한다는 홀림(bewilderment)은 그 탁월함에 의해 사전에 정의되지 않으며, 그것의 불확정성의 역능에 따라 정의된다. 이것은 어떤 내적 공리에 따라 결정화 불가능한 채 남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그 문법적, 사회적 그리고 정신적 조건들을 앞서 가는 언표행위의 조건들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루스트로 하여금 “아름다운 책들은 일종의 외국어로 쓰여진다”라고 확증하도록 만들었다.
<주석>
[1] 독자들은 프루스트, 과타리 그리고 구조적 형식주의에서 기계적 형식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보다 완결된 이론전개를 나의 저작인 『들뢰즈와 예술』(Deleuze and Art) 그리고 『들뢰즈, 초월론적 경험론』(Deleuze. L’empirisme transcendantal)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과타리는 그가 선호하는 작가로 프루스트를 예로 들면서(Guattari 2015: 210) 『기계적 무의식』(The Machinic Unconscious)과 『카오스모스』(Chaosmosis)에서 그를 길게 분석하는데 열중한다.
[2] 들뢰즈는 1970년, 그리고 1976년에, 1964년에 초판본에 논증적으로 연속되는 두 가지 판본을 출판한다. 결국 세 가지 버전은 1973에 이탈리아어로 출판된 한 논문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1972년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개최된 ‘프루스트와 새로운 비평’이라는 콜로키움에서 들뢰즈가 강연한 것을 재구성한 것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바르트, 쥬네, 두브로브스키, 리하르트 와 리카르두와 나란히 앉아 토론했다(cf. Deleuze 2006: 29-60).
[3] FHAR, 동성애 혁명운동 전선은 프랑수아 되본느에 의해 1971년에 설립되었다. 저널 《탐색》(Recherches)의 12호를 보라. 이 저널은 과타리에 의해 수립된 사회과학에 관한 일군의 연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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