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상관주의, 강한 상관주의
※원문서지: Michael Austin, “CORRELATIONISM: WEAK AND STRONG”, (Eds.) Peter Gratton and Paul J. Ennis, The Meillassoux Dictionary,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5, 48-50
약한 상관주의와 강한 상관주의
마이클 오스틴
상관주의는 존재가 오로지 주체에 대해서만 존재한다는, 즉 주체적 정신과 객체적인 세계 간에 어떤 직접적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또는 아마도 보다 정확하게 말해, 사유하는 존재는 인식의 방식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세계에 접근할 수 없으며, 따라서 사물-자체를 사유하거나 논한다는 주장은 상상적인 기묘함이나 순수한 부조리 중 하나에 속한다는 암묵적인 관점이다. 차(tea)가 그런 것처럼 상관주의는 약하거나 강한 것이 취해질 수 있다. 널리 이해되는 대로 상관주의는 우리가 사유와 존재의 상관관계에 대한 접근만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약한 상관주의와 강한 상관주의 사이의 구별을 궁극적으로 허용하는 것은 바로 상관성의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것의 가능성이다. 메이야수는 이러한 입장들 사이의 구별을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여러 가지 역사적 인물들을 제시한다. 약한 상관주의는 임마누엘 칸트와 에드문트 후설에 의해 대표되며, 강한 상관주의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마르틴 하이데거에 의해 대표된다.
약한 상관주의는 우리가 형이상학에 관한 어떤 이야기에 앞서 무엇을 알고 어떻게 아는지를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칸트비판철학의 운동을 수용한다. 여러 가지 약한 상관주의가 갈라지는 지점은 이 ‘해명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있어서다. 예컨대 후설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그것을 순수하게 가능한 경험을 통해, 현상학적 기술을 가지고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형상적 환원을 통해 우리는 사물들의 형상(eidos)을 그러쥠으로써, 그것의 유형들을 가로질러 공유된 속성이나 질, 즉 그 가장 추상적인 상태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런 경험 너머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후설적인 현상학은 칸트처럼 물-자체의 가능성을 해소할 능력이 있다고 가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체적인 것과 연관된 칸트의 불가지론 입장은 세계 안의 사물들이 그것들이 존재하는 바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있다고(예컨대 이런 저런 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필요는 없다) 단순히 언급하는 것 이상이지만, 사물들이 그것들이 활동하는 바대로 현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합리적인 인식을 통하는 것 외에는 사물을 알 수 없지만, 즉 합리적인 범주들을 통하는 것 외에 어떤 객체를 알기는 불가능하지만, 사물들이 다른 식으로 존재하는 자체적인 것일 수 있다고, 즉 사물들이 그것들의 단순한 현상들로 전부 환원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상상할 가능성은 남는다. 우리가 약한 상관주의를 말하면서, 우리가 접근해 가는 것은 단순히 사유와 존재의 상관성인 반면, 이러한 수렴의 바깥에 놓인 것은 사유가능하지만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즉 사물-자체는 영원히 합리성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본체적인 것(The noumenal)은, 우리가 인간 경험에 주어진 것 바깥의 사물들에 대해 어떤 것을 긍정할 수도 해소할 수도 없기 때문에 약한 상관주의를 위해 어떤 열린 질문으로 여전히 남겨진다.
강한 상관주의 논증은 이른바 ‘왜 적어도 사물들-자체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과 더불어 사촌 격인 약한 상관주의로부터 취해진다. 단순히 말해 사물들-자체라는 생각이 사유가능하므로 모순율은 불충분하다. 이는 내가 유니콘에서부터 자기-변형하는 기계 요정들에 이르기까지 가장 있음직 하지 않은 모든 종류의 비-모순적 사물들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요정 환영을 만들어내는 테렌스 멕케나(Terrence McKenna)의 트립타민은 신비한 사물들-자체와 꼭 마찬가지로 이해될 것인데, 이는 강한 상관주의를 논증하는 바, 자기-모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에 기대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상관주의자는 그러므로 우리가 정합적이지 않은 사변으로서 사물들-자체에 관한 바로 그 생각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유 바깥에 있는 그 어떤 실재도, 존재도 알지 못하며, 심지어 거기에 그와 같은 사물이 처음부터 사유의 바깥에서 획득된 전반적으로 무근거하고 가정적인 지식이 있다고 제안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강한 상관주의자를 위해서는 그 어떤 불가지론도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사유와 존재 사이에 어떤 절대적 합류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 없이 존재하는 것도, 다른 것 없이 존재할 가능성도 없이 존재하는 것도 불합리하다. 우리의 사유의 한계는 존재의 한계와 동일하므로, 존재한다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사유를-위한-존재)이다. 객관적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식이 사물들의 주어짐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를-위해 있는 한에서만 사물들을 안다. 강한 상관주의에 따르면, 사유 바깥에는 그 어떤 존재도 있을 수 없다. 그와 같은 사물이 존재할 바로 그 가능성이 정합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약한 상관주의자가 존재와 사유의 상관관계 바깥에 어떤 세계의 가능성을 수용하는 반면, 강한 상관주의자는 우리의 인식이 세계의 헐벗은 주어짐에 대해서만 뻗어나가기 때문에, 상관관계 그 자체를 절대화한다. 이것은 어쨌든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바, 우리의 이성적 담론은 그와 같은 세계의 주어짐, 즉 그것과 우리의 관계인 그 정도로만 뻗어나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