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관주의(Correlationism)
※원문서지: Revi R. Bryant, “CORRELATIONISM”, (Eds.) Peter Gratton and Paul J. Ennis, The Meillassoux Dictionary,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5, 46-48
상관주의(Correlationism)
레비 브라이언트(Levi R. Bryant)
메이야수의 상관주의 개념은 철학에 대한 그의 가장 중요하고 논쟁적인 기여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유한성 이후』에서 그는 상관관계(correlation)를 “우리가 오로지 사유와 존재 사이의 상관관계에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며, 다른 것과 떨어져 둘 중 하나에는 결코 접근할 수 없다는 생각”(AF, 5)이라고 정의한다. 비록 메이야수가 스스로 이를 명시하지는 않지만, 상관주의는 아마도 여러 상이한 형태로 드러나며, 따라서 정신과 존재 사이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론에 제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초월적 자아 또는 살아 있는 신체, 그리고 현상학적 세계 사이의 관계는 상관주의의 한 변형태일 것이고,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그리고 라캉에게서 언어와 존재 사이, 또는 푸코에게서 권력과 지식 사이의 관계는 또 다른 변형태일 것이다. 각각의 경우에 우리는 존재가 주체, 언어 또는 권력과 별개로 사유될 수 없다는 주장과 마주친다.
메이야수는 상관주의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이래 철학의 중심적인 관념이었다고 논증한다. 칸트의 핵심적인 인식론적 가설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칸트는 정신이 객체에 따르는 것이라기보다, 객체가 정신을 따른다고 논증한다. 칸트는 인식론의 전통적 형식에서 정신이 우리와 독립된 즉자적인 존재를 반영하는 하나의 거울처럼 파악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신이 단순히 실재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현실적으로 구조화한다고 논증한다. 결론적으로 다른 한편으로, 그는 우리가 결코 실재를 우리와 떨어져서 그것이 존재하는 바 그 자체로서 알 수 없으며, 오로지 우리에게 그것이 현상하는 바를 안다고 논한다. 만약 정신이 (우리를 위해) 실재를 구조화하는데 있어서 어떤 능동적인 역할을 취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바를 알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현상들 안에서 우리 자신의 정신의 생산물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물들이 그것들 자체로 존재하는 바의 특성이 무엇인지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사물들과 그것들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들을 비교하도록 할 만한 어떤 제3의 관점을 우리가 채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인식은 현상들에 제한되며 우리는 존재가 그 자체로 있을 법한 것에 대해 알 수 없는 상태로 남겨져야 한다.
칸트적인 상관주의에 의해 영감을 받은 근대철학이 주장하는 바는 근대 철학자들이 칸트 철학의 특수한 세부사항들을 포괄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예컨대 비트겐슈타인은 그가 언어게임을 말할 때, 분명히 초월적 범주, 즉 선험적 직관 또는 초월적 자아에 관한 칸트의 사유를 채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관주의적 태도는 우리가 존재와 사유 사이의 관계를 사유할 수 있을 뿐이라는, 그렇기에 우리의 지식은 오로지 현상에 제한된다는 주장 안에 놓여 있다.
상관주의는 단순히 우리가 어떤 것을 알기 위해 그것에 관계되어야 한다는 테제가 아니다. 분명 우리는 공룡들의 과거 존재에 대해 어떤 것을 알기 위해 공룡화석을 발견해야 했다. 메이야수에게 이것은 어떤 입장을 상관주의적으로 만드는 관계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매우 특수한 것, 즉 극복불가능한 관계에 대한 주장이다. 메이야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상관주의는 강력한 만큼이나 단순한 논증에 기대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공식화된다. X의 주어짐이 없는 X는 없으며, X에 관한 어떤 입장이 없는 X에 대한 이론도 없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에 대해 말한다면,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무언가에 대해, 그리고 당신에 의해 수립된 무언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문장 ‘X는 있다’는 것의 의미는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X는 사유와의 관련물이다’라는 것이다. 즉 X는 어떤 감응(affection), 또는 어떤 지각, 또는 어떤 개념, 또는 어떠한 주체적 행위와의 관련물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관련물, 즉 상관관계의 한 항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 이것이 절대적 X, 다시 말해 본질적으로 주체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X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이다. 우리는 객체 자체의 실재성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객체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속성들과 객체들에 접근하는 주체적인 것에 속한 속성들 사이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SR, 409, 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상관주의는 우리가 그것을 알기 위해 무언가와 관계해야 한다는 테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아는 것은 정말로 오로지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상관주의는 회의주의의 한 형식인데, 물-자체든 아니든, 이런 식으로는 우리가 무언가를 결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로지 그것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들을 알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상관주의자에게는 우리와 떨어져 있는 탄소 원자들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들이 이런저런 수준에서 붕괴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메이야수가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지지이다. 상관주의자에 따르면, 우리는 결코 탄소 자체가 이러한 속성들을 가지는지 아닌지 또는 그것이 이러한 속성들을 부여하는 사유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사유와 존재 사이의 상관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때로 과학적 기능주의의 관점이기도 하다. 메이야수는 이 극복불가능한 관계를 상관주의 순환(correlationist circle)이라 부른다.
메이야수의 핵심적 기획 중 하나는 이 상관주의 순환을 깨트리는 방법을 발견하는데 놓여 있다. 그는 정신과 떨어져 그 자체로 존재하는 절대적인 것 또는 존재를 사유하는 것이 가능한지 아닌지, 그리고 절대적인 것이 가지는 특성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려고 애쓴다. 메이야수의 선조성(ancestrality)이나 인간 존재에 앞서는 시간에 대한 진술에 관한 논의는 상관주의 자체에 반한 논증이 아니라, 어떤 상관주의 얼개 내부에서 허용되어질 수 없어야 하는 생명체와 인간의 실존에 선행하는 우주적 시간에 관해 쉬이 친근하고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주장을 드러내기 위해 설계된다. 만약 상관주의가 참이라면, 생명이나 정신의 출현 이전 수십 억 년 간의 우주의 본성에 대해 우리가 주장하는 바를 무엇이라 칭할 것인가? 메이야수는 『유한성 이후』에서 본사실성(factiality)의 원리에 관한 그의 논증에서 우리가 어떻게 상관주의 순환을 깨고 나갈 것인지 사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