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변하는 현대철학 용어사전

들뢰즈와 프루스트

Nomadia 2021. 8. 1. 20:42

들뢰즈와 프루스트(#Deleuze_and_Proust)

 

1964, 칸트에 관한 책을 출판한지 1년 후, 들뢰즈는 다시 한번 문학으로 관심을 돌렸고 프루스트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83] 그는 이런 식으로 철학적 반성을 아카데믹한 전통에 의해 무시된 영역들과 관련된 것으로 가져가는 그의 결정을 긍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 자신 고전적인 철학사로부터 해방시키는 방법이기도 했다.[84]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이 프루스트의 대작을 기억에 관한 것으로 보는 문학 비평 가운데 있는 바로 그런 상식적인 오류를 교정하려는 노력이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통일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적어도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지는 않다. 그거은 기억, 상기, 심지어 비자발적 기억으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85] 들뢰즈에게 프루스트의 작품은 기억을 도구로서가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사실상, 진리 찾기이다.”[86] 그러한 탐구는 오로지 그것을 불러 일으키는 어떤 강제적이거나 폭력적인 상황에 의해 활동할 수 있으며, 프루스트의 경우 질투가 본질적인 시발점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프루스트적의 주인공은 그의 욕망을 표현할 수 있기 위해 사랑에 빠지며, 질투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의 교양소설(Bildungsroman)로서, 소설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를 바라본다.

 

들뢰즈가 프루스트 비평에 가한 두 번째 교정은 프루스트의 작품 분석에서 주요한 간과지점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호들의 보편성으로서, 그는 이것이 프루스트 글쓰기의 바로 그 통일성을 구성한다고 느꼈다. “‘기호라는 단어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들 중 하나다.”[87] 각각의 사회적 지절(social segment)은 구획되고 구성원들은 서로를 그들의 공통 기호들로 인식한다. 베르뒤랭(Verdurins)의 기호는 게르망트(Guermantes)의 기호들과 거의 일치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화자의 사회적이고 감정적인 우주를 형성하는 측정불가능한 세계들의 복수성이다. 우리는 기호들 사이에서 몇몇 분명한 부분집합들을 분별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누군가 어떤 개별적인 복잡한 계급에 속하는 것을 지칭하는 기호들, 사랑에 빠짐에 있어서 독특한 기호들 또는 감정적 성질을 함축하는 기호가 포함된다. 그러나 예술의 세계는 그 전체를 포함한다. 예술은 탈물질화되는’(dematerialized) 기호들의 궁극적인 세계로서 작동하는데, 이는 그들의 의미를 어떤 이념적 본질로 발견한다. 여기서부터 예술에 의해 계시된 세계는 다른 모든 것들에 반작용한다.”[88] 따라서 예술은 그것이 없다면 기호들의 해석이 그 명백한 불투명성 너머로 갈 수 없는 매개인 한에서 어떤 특권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유용한 책은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는 것이다. 그의 프루스트에 관한 연구는 포획’(capture)이라는 개념의 풍요로움을 명료화한다. 들뢰즈는 포획을 어떤 개념적 수준에서 두 요소들 사이, 즉 동물적인 것 말벌 그리고 식물적인 것 서양란 에서 취한다. 서양란을 수정하는 말벌은 두 세계 사이의 분리된 규칙들을 횡단함으로써 서양란을 수정한다. 들뢰즈는 프루스트가 말벌과 서양란의 은유에 대해 30여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1장을 개념적으로 재독해하면서, 그것을 철학이 문학을 수정하는 식으로, 그리고 그 역으로도 본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그의 책을 프루스트의 작업에서 진리를 찾는 것이 철학의 야심에 필적한다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결론 맺는다. 프루스트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사유의 이미지는 합리주의 유형의 고전적인 철학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을 떠맡는다.”[89] 진리는 임의적인 것에도 추상적인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표명함으로써, 프루스트의 작품은 몇몇 철학적인 내용물을 갖게 된다. 이러한 진리들은 정신의 운동 안에서 활동하는 힘들이 작동하는 애매함의 지대(the zones of opacity) 내부에서 찾아져야 한다. 규율화된 소통의 협약들 아래에 놓일 때, 이러한 지하의 힘들은 사유의 신뢰할 만한 방아쇠이다. 사유를 운동하게 하는 연결요소들은 언제나 해석되는, 이른바 설명되고, 발전되고, 해독되”[90]어야 하는 기호들 자체이다.

 

들뢰즈가 하나의 증후학으로 문학을 다루면서, 즉 그가 자허-마조흐를 다룰 때 했던 노선을 따라 어떤 임상 시험을 시행하는 것에서 혁신적인 반면, 그는 여전히 사유가 해석하기라는 어떤 전반적인 전통을 고수했다. 프랑스 문학의 전문가인 로베르 모지(Robert Mauzi)는 들뢰즈의 프루스트 독해는 작가의 시간성을 무시하거나 덜 중요하게 여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시간성에 집중하는 것이 더 근원적인 특성이라고 지적한다. 들뢰즈는 프루스트가 지향하는 바를 검토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그의 기호들의 세계를 해독할 뿐이다. “프루스트적 주체성을 다루려는 생각은 포기되며,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프루스트로부터 모든 정신분석적 또는 심리학적 주제들을 제거하고 읽는 새로운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91]

 

철학자인 쟝-클로드 뒤몽셀(Jean- Claude Dumoncel)은 들뢰즈의 프루스트 읽기를 그의 사상에 있어서 핵심으로 이해하면서, 이후에 등장하는 어떤 추상적인 자신의 주제 - 차이와 반복- 가 가장 읽기 쉬운 표현을 거기서 발견하며, 프루스트에 관한 이야기 안에 그 분명한 실마리를 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차이는 그것의 대상에 반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반복은 오로지 그 차이의 등급만을 받아들인다. 반복되어야 하는 것은 차이이며 프루스트는 수 백 페이지에 걸쳐 오로지 이것만을 상세히 다룬다.”[92] -클로드 뒤몽셀은 들뢰즈의 프루스트에 대한 철학적 독해 전체가 프루스트가 자신의 영감의 원천이라고 밝힌 가브리엘 타르드와 앙리 베르그송에 더 잘 들어 맞는다는 점을 발견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들뢰즈가 사물들을 진동하게 만드는 자유로운 차이들이라고 부른 것과 천둥과 번개 사이의 관계를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각각이 관련 되는 바, 진동하는 파동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복잡한 반복들사이에 펼쳐진다. 하지만 파동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되풀이(iteration)와 달리, 맥놀이(Undulation)는 반복하기가 아닌 어떤 방식이다.”[93] 진동하는 반복은 그 자체 안에 잠재적인 시간적 차이들을 담고 있다. 프루스트는 연합들의 목록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회상들(reminiscences)이 의식 안으로 출현하는 방식을 검토하는데, 이는 마들렌의 맛이 우리가 콩브레에서 차를 마실 때 먹던 그 마들렌의 맛과 유사하며, 그것은 우리가 첫 번째로 마들렌을 맛보았던 콩브레를 소생시킨다”[94]와 같은 식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두 개의 현재들’, 즉 존재했지만 더 이상은 아닌 다른 현재를 불러오는 현재 그리고 과거에 속한 존재에 전혀 도달하지 못한 채 그것을 개작하는 현재들에 의해서만 환기되는 그런 현재들이 공존하는 베르그송적인 기억 개념에 관한 그의 생각과 연결시킨다. “시간의 본질은 우리를 빠져 나간다.”[95] 비의지적 기억은 현재 순간으로부터 분리불가능하게 되는 오래된 맥락을 내면화한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것은 유사성이 아니라, 반대로 내재화된 내면적 차이’(the internalized difference become immanent)이다.[96] 들뢰즈는 결론을 사유의 이미지라고 명명하며, 우리는 그것이 차이와 반복의 매우 중요한 세 번째 장의 제목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의 저작들을 관통하여 탐구되는 이 주제가 가진 불변성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사유의 이미지1980년대 영화적 세게에 관한 그의 탐구의 경계이다.[97] 1968, 니체 전집이 출간되었을 때, 들뢰즈는 그의 사유에서 모든 글들을 관통하는 이 근본적인 주축(axis)을 긍정했다. “, 베르그송 그리고 프루스트는 나에게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그들의 저작에는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를 위한 심원한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그들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 특이한 어떤 것이 있다. 즉 사유한다는 것은 당신이 사유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 그렇다, 사유하기의 행위,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 사유 자체 안에서 그것의 발생이라는 새로운 이미지, 그것이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다.”[98]

 

더불어 프루스트와 기호의 여러 판본들은 조금씩 다르다. 1964년 초판본에서 1970년 그리고 1976년 판본에 이르기까지 다소 변형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판본 사이에, 들뢰즈는 과타리를 만났다. 과타리의 영향은 뚜렷했는데, 들뢰즈는 과타리의 횡단성(transversality) 주제를 채택했고, 그의 기여를 인정했다. “정신분석적 탐구의 측면에서, 펠릭스 과타리는 무의식의 소통과 관계를 해명하는 횡단성이라는 매우 생산적인 개념을 창조했다.”[99] 횡단은 서로 간에 닫혀 있는 세계의 전이(transition)를 이해하기 위해 기본적인 것이었다. 이는 각 세계의 특수성을 파괴하지 않고, 총체화나 혼잡화의 어떤 가능성도 없이, 하나의 기호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횡단은 스완과 같은 특별한 통행자에게 하나의 알베르틴으로부터 다른 알베르틴으로 전이하도록 이끈다. 횡단성은 마주침들(encounters)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복수성의 존재를 활성화하지 않고, 일자에 대해 다자를 재생산하지 않고, 다양체를 전체로 전혀 집단화하지 않고”[100], 마주침이 새로운 흐름을 생산할 수 있게 한다. 거기에 모든 종류의 횡단들이 있다. 질투는 사랑을 위한 다양체이고, 여행은 장소들의 다양체를 위한 것이며 그리고 잠은 순간들의 다양체를 위한 것이다.

- François Dosse,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Intersecting Lives

(Trans.) Deborah Glassman,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 125-128

 


[주석]

 

[83]Gilles Deleuze, Proust et les signes (Paris: PUF, 1964). Translated as Proust and Signs, trans. Richard Howard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0).

[84]니체와 철학, 프루스트와 기호들그리고 차이와 반복으로 이어지는 사유의 이미지에 관한 연구 계획의 일관성에 대해서는, Arnaud Bouaniche, Gilles Deleuze, une introduction (Paris: Pocket-La Découverte, 2007), 4552를 보라.

[85]Gilles Deleuze, Proust et les signes (1970 edition), 7.

[86]Ibid., 21.

[87]Ibid., 9.

[88]Ibid., 190.

[89]Ibid., 186.

[90]Ibid., 190.

[91]Robert Mauzi, Critique 225 (February 1996): 161.

[92]Jean-Claude Dumoncel, interview with the author.

[93]Jean-Claude Dumoncel, Le symbole d’Hécate. Philosophie deleuzienne et roman proustien (Orleans: HYX, 1996), 60.

[94]Gilles Deleuze, Proust et les signes, 69.

[95]Ibid., 71.

[96]Ibid., 73.

[97]Dork Zabunyan and Gilles Deleuze, Voir, parler, penser au risque du cinéma (Paris: Presse de la Sorbonne nouvelle, 2006).

[98]Gilles Deleuze, interview with Jean-Noel Vuarnet, Les Lettres Françaises (February 28March 5, 1968). Reprinted in Gilles Deleuze, 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 193.

[99]Gilles Deleuze, Proust et les signes, 184n1.

[100]Ibid., 137.

 

- François Dosse,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 intersecting lives,

trans. Deborah Glassma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 12528.

 


천의 고원(A Thousand Plateaus)의 이 장[‘리토르넬로’]을 들뢰즈와 함께 쓰면서, 과타리는 1979년에 출간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의 리토르넬로(“The Ritornellos of Lost Time”)[30]라는 제목으로 프루스트에 관한 아주 긴 연구논문을 쓰는 중이었다.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탈영토화된 정신적 대상으로부터 나온 어떤 거대한 리좀적 지도로 보았다. ‘뱅퇴이유 소악절은 구체적인 효과들을 가진 표현적 물질의 역할을 했다. 과타리는 그 소설을 통틀어 이 소악절의 상이한 언술적 배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의 리토르넬로처럼 기능하는 그 소나타를, 그것이 더 이상 어린 소녀들과 연합되지 않을 때까지, 심지어 순수하게 음악적임을 멈출때까지 추적했다. “그것은 음악적인 것이 되는 과정 자체를 쓰고 있다. (...) 세계는 거대한 오르간과 같은 어떤 것이 되었으며, 쓰기는 음향적 우주의 모든 국면마다로부터 터져 나오는 음악이 되었다.”[31]

 


[주석]

[30]Félix Guattari, “Les ritournelles du temps perdu,” in L’inconscient machinique (Paris: Recherches, 1979).

[31]Ibid., 308.

 

- Ibid., 42930

 


 

과거 전체는 즉자적으로 자기 자신 안에 보존된다. 하지만 어떻게 그 과거를 우리에 대해 되살려낼 것인가? 과거의 즉자 존재를 과거가 한때 구가했던 현재나 과거가 과거이기 위해 거리를 둔 현행적 현재로 환원하지 않고 어떻게 그 존재 안으로 침투해 들어갈 것인가? 어떻게 그 존재를 우리에 대해 되살려낼 것인가? 바로 이 부근에서 프루스트는 베르그손의 뒤를 이어 다시 묻고 있다. 그런데 대답은 아주 오래 전부터 주어져 있는 것 같다. [플라톤의] 상기[réminiscence]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상기는 자발적 기억의 모든 능동적 종합과는 본성상 다른 어떤 수동적 종합이나 비-자발적 기억을 지칭한다. 콩브레는 과거에 현전했던 모습 그대로, 혹은 앞으로 현전할 모습 그대로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결코 체험된 적이 없었던 어떤 광채 안에서, 결국 이중의 환원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어떤 순수과거로 다시 나타날 뿐이다. 이 순수 과거는 자신이 구가했던 현재로도, 언제가 구가할 수도 있을 현행적 현재로도 환원되지 않으며, 이런 이중의 환원불가능성을 그 두 현재의 상호충돌에 힘입고 있다. 망각이 경험적으로 극복되는 한에서 사라진 현재들은 망각 저편의 능동적 종합 안에서 재현된다. 하지만 콩브레가 결코 현전했던 적이 없는 어떤 과거의 형태로 출현하는 것, 곧 콩브레의 즉자 존재가 출현하는 것은 바로 본연의 망각 안에서이다.

 

- 질 들뢰즈 지음, 김상환 옮김,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200-201.

 

지금 있는 과거는 그 자체로 현재와 공존하고 있을 뿐, 과거에 있었던 현재를 뒤따라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을 현재로 체험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는 그것을 과거로 파악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까닭은 의식적 지각과 자발적 기억이 결합된 요구들이 현실적 연속을 수립하기 때문이다. 그 현실적 연속(succession réelle)에는 더 근본적인 잠재적 공존(coexistence virtuelle)이 존재한다. 베르그송과 프루스트의 개념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면 바로 이 층위에서이다. 즉 지속(durée)의 층위가 아니라 기억의 층위 말이다. 우리는 지금의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며, 현재들을 가지고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도 아니고 단번에 과거 자체 안에 위치해 버린다.

 

- 질 들뢰즈 지음, 서동욱, 이충민 옮김,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1997;2004, 95-96.

 

들뢰즈가 흔히 잠재적인 것에 대해 논의할 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잘 알려진 말을 기억과 관련하여 인용한다. ‘현행적이지 않은 실재적인 것, 추상적이지 않는 이념적인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잠재적 다양체는 세계 안에 필연적으로 구현되지는 않은 실재적인 것이다. 이때 잠재적 다양체는 추상적이고 대체가능한 가능성들을 표현하기 보다, 모든 특수한 상황에 고유한 변화에 실재적으로 개방적인 어떤 것을 형성한다.

 

- Jonathan Roffe, ‘Multiplicity’,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177.

 

[다양체로서의] 총체성은 부분들의 전체이기는 하나 이 부분들을 총체화하기는 않으며, 따로 조성된 새 부분으로서 지금까지 있어 온 부분들에 덧붙는다. (...) 따라서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전체는 생산된다. 그것 자체는 부분들 곁에서 하나의 부분으로서 생산된다. 그것은 통합하지도 않고 총체화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부분들에 적용되면서 통하지 않는 관들 사이에 엉뚱한 소통들만을 설립하고, 자기의 고유한 차원 속에서 다른 것들과의 차이를 보존하는 요소들 사이의 횡단적 통일들만을 설립한다." [기차안에서 보는 창밖 풍경의 예시-프루스트]

 

-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안티오이디푸스, 민음사, 2014, 8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