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퓨처리즘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
“흑인 삶의 보존은 혁신이라는 폭력 안에서 표명되고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다”
- S. Harney and F. Moten ( 2013 ),
The Undercommons: Fugitive Planning & Black Study
1994년의 에세이 ‘미래로 간 흑인: 사무엘 델라니, 그렉 테이트 그리고 트리시아 로즈와의 인터뷰’(Black to the Future: Interviews with Samuel R. Delany, Greg Tate and Tricia Rose)에서 마크 데리(Mark Dery)는 흑인의 신체를 문화적으로 편협한 빙퉁그러진 공간에 거주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또는 아주 실재적인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아프리카 이주민의 신체란 자기-규정적 인민이라는 의미보다, 대지로부터 뿌리 뽑힌 비정상성을 연상시키는 그런 장소를 점유하는 신체로 기술한다.
데리에 따르면 흑인 신체의 예속상태는 기술과학적으로 위치해 있으며, 거기서 주체는 기술적 과정의 가장 (탈)기능적 양상들과의 접촉 안에서 전개되는 한에서만 실재적인 것으로 표명된다. 즉 오늘날 경찰의 총알, 바디캠의 주체 또는 인종 프로파일링의 측면에서 흑인들의 이동가능성을 불균등하게 축소하는 가치 봉쇄(redlined pricing)와 여타 기술들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기술이 흑인 신체를 위한 해방의 불충분한 수단으로 존재해 왔고, 오늘날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계몽주의의 기획과 기술 디스토피아가 근대성을 요청했기 때문에, 기술적인 것 또한 집합적인 출발지점으로서의 흑인 신체의 정확한 양식으로 기능해 왔다. 마수미로부터 차용한 관계 기술(techniques of relation)로서의 기술적 사변(Technological specu lation)(Massumi and McKim 2009)은 흑인 신체에게 대지적 소속의 외계성(alienness)이 존재와 생성의 대안적 이야기들 속으로 재-기입되고, 재-기록되며 재-조직되는 방식을 제공한다(Akomfrah 1996을 보라). 데리는 이러한 수렴성을 아프로퓨처리즘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새로운 출발지점을 흑인 이주민적 경험 내부에서 자기-재현하도록 하기 위해 과학소설의 하위합법성(sublegitimacy)을 활용한다(Nelson 2000 ; Eshun 1999).
과학소설과 같은 음향과 영화 문화적인 아프로퓨처리즘은 일반적으로 아프리카-아메리카 문학 내에 위치된다 해도, 전지구적인 사회적 플랫폼, 비디오, 게임, 코스프레, 그래픽 아트 그리고 여타 디지털 생태론과 이상(geek) 생태론으로 퍼지고 있다. 아프로퓨처리즘은 또한 감각의 수준으로 확장된다고 말해질 수 있다. 문화비평가 그렉 테이트에 따르면, “과학소설은 포괄적인 특성 묘사의 측면에서 심리적 차원을 회피하면서, 행위와 지식의 전달을 지배하는 다양한 제도들(institutions)의 영향을 살핀다”(Dery 1994: 211에서 재인용).
데리는 아프로퓨처리즘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개념은 아니고, 오히려 주체적 경험에 대한 자기-제작적(do-it-yourself) 전망을 요청하는 발생적이고 발견적인 흑인 사변적 수행 운동이다(Eshun 1999를 보라). 이것은 선 라(Sun Ra)의 『우주가 그곳이다』(Space Is The Place),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과 그의 밴드들인 <Parliament and Funkadelic>, <Afrika Bambaataa> 그리고 여타 흑인 공연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마크 싱커(Mark Sinker), 리차드 라이트(Richard Wright), 아미리 바라카(Amiri Baraka)와 초기의 옥타비아 버틀러(Octavia Butler)와 사무엘 R 델라니(Samuel R. Delany)의 흑인 소설 작품들 사이에서 가장 흔히 발견된다.
이런 문화적 기여들은 예술에서, 그리고 잉그리드 라플뢰(Ingrid Lafleur)와 가수인 자넬리 모네(Janelle Monáe), 알론드라 넬슨(Alondra Nelson)과 아트 맥기(Art McGee)에 의해 설립된 온라인 아프로퓨처리즘 공동체들, 예술가인 줄리아나 헉스타블(Juliana Huxtable), 라쉬다 필립스(Rasheedah Phillips), 에디 카무안가 일룬가(Eddy Kamuanga Ilunga), 엠 라마르(M. Lamar) 또는 최근의 덥스텝 예술가인 <The Spaceape>에 의한 음악과 문예에서, 최근의 기술문화적 실험들의 빛을 전혀 가리지 않는다.
아프로퓨처리즘은 역사, 사변 그리고 공연의 교차지점에서 – 잠재적인 양식 안에서 – 환상, 허구, 수행 그리고 여타 기술문화적 반성들의 사색적 충실성을 고통과 배제의 역사적 양식과 결합하는 어떤 방법론적 즉각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작동한다. 그 목적은 새로운 관계적 틀거리를 상상하기 위함이다. 어떤 면에서 아프로퓨처리스트들은 흑인 신체가 끝나고 재현이 시작되는 지점과 역사적 환경의 부과가 현재와 과거의 집단적 귀속에 대한 어떤 정치학으로 출현하는 방식을 이해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프로퓨처리즘은 가장 첨단의 휴머니즘 아젠다다. 아프로퓨처리즘에서 특별한 관심사인 것은 대안적인 자기-재현을 재개념화하기 위해 – 범-아프리카주의와 아프리카중심주의를 통합하면서 – 후세의 시오니즘적 약속을 끌어오는 것이다. 여기서 중심적인 것은 개인적인 것의 자발적 변형과 흑인 의식성의 연결적 속성 간에 어떤 공생적인 결합이다. 그렉 테이트는 우리에게 역사적, 영성적 그리고 문화적 위치성의 복잡성 안에서 당신 자신을 흑인으로 인식하는 것은 “당신에게 제도적으로 주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에 의해 보증되어져야 하는 어떤 힘겨운 여행이다”(Dery 1994: 210)라고 말한다. 이것은 심지어 흑인 신체가 새로운 시작지점을 획득하기 위해 집단적인 문화적 기억을 요청할 때에도 마찬가지다(Walker 2015).
이로써 흑인 신체가 문화적 생태계와 관련하여 어떻게 개념화되는지, 그리고 그 신체가 자기-결정적인 성과들과 어떻게 연결을 짓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따라서 아프로퓨처리즘은 어떤 신비적인 위대한 과거에 기반한 위조된 새로운 시작을 향해 아프리카중심성을 확장하면서 이러한 긴장을 이용한다. 그래서 기술은 오벨리스크(obelisk)의 다양한 측면들에서 출현한다. 이것은 자기-발견을 통한 그들의 해방 안에서 어떤 인민들과 타자의 복종과의 역사적 연관성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학적으로 보면, 역사 자체를 바꾸려 애쓰지 않지만, 아프리카 후손의 인민들이 그들 자신의 이야기들에서 중심이 되는 어떤 미래를 수립하려고 하는 것이다. 흑인 정체성 자체는 물질적 형식도 초월적 근거도 없는 하나의 추상, 어떤 언어다. 흑인성이란 행위 과정, 흑인으로 존재함 안에서 개념화되고 지속적으로 재구축되는데, 이는 언제나 인종이나 인종주의의 허구들에 관련되지만, 그것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흑인 정체성은 자주 두 가지 상태들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재현된다. (1) 여타 인종화된 배치들 사이의 시공간적 위치짓기에 의해 재현되는 역사적 언명 그리고 (2) 주체적 이해의 새로운 잠재성으로 기여하는 아프로퓨처리즘과 같은 미학적 표지들.
만남과 맥락의 교차점에서 펠릭스 과타리가 의미를 할당함으로써 인종화된 그룹들을 조망하는 것은 바로 이곳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수동적으로 재현적인 이미지의 현전 안에 존재하지 않고 주체화의 벡터로 존재할” 때 “주체성의 생산의 씨앗들을 구성하는” 어떤 힘이다(Guattari 1995 : 29–30). 흑인, 황인 그리고 다른 종속적인 개인이, 자주 어떤 소속감으로 표현되는 미학적 표식들, 역동적인 진동 그리고 문화적 운동성(kineticism)에 따라 상술될 때, 어떤 (그릇된) 재현의 응집을 생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흑인성의 의미를 통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로퓨처리즘의 취약성은 흑인 정체성 정치학에 뿌리 박고 있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기인한다. 여기에서 인종에 관한 생각과 인종-기반 중심성이 생존의 기술에 본질적인 것으로 사유된다(Bogues 2003 ; Morrison 1992 ; West 1989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진적 정체성은 어떤 신체 정치로서, 안전보장의 원천이 된다. 이것은 보다 폭넓은 생태적 관계들의 영원히 변하는 기술적 표명으로서 인종적 거부 안에 있는 흑인 정체성의 안정성을 함축한다. 비평가들은 또한 아프리카 중심적 논리가 재현적이고 상징적인 것들 너머로 확장되는 문화적 규범성에 취약하다고 논한다. 말론 리그스(Marlon Riggs), 미셸 왈라스(Michelle Wallace), 앙겔라 데이비스(Angela Davis) 그리고 벨 훅스(bell hooks)는 이미 퀴어, 젠더 개방성, 트랜스적 삶 그리고 여타 비선형적 노선들이 자기-지시성(self-referen tiality)의 완고함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배제되는 바, 흑인성 구성의 위험들을 기술했다. 따라서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발생시킨다. 만약 선 라가 우리를 목성이나 그 자신의 주장대로 토성의 집으로 우리를 데려가는데 성공했다면, 또는 만약 조지 클린턴과 P-펑크가 우주선에 탑승할 초대장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들 중 누가 뒤에 남겨질 것인가?
이 질문의 핵심은 미래를 선점하면서 역사적 역할을 하는 것, 잠재적인 미래들이 수행되고 평가되는 시각에 대한 반성이다. 아프로퓨처리즘은 구차함과 문화의 탈구, 또는 에세데베(Esedebe, 1994)가 논하듯이, 흑인 중심성을 기념하기 위해 관계의 기술에 어떤 파괴를 도입한다. 신화적 이야기는 민중의 이야기를 미래의 가능성 안에 놓기 충분하다. 에세데베는 비록 길로이(Gilroy, 1987)가 흑인정체성을 다시 상상하기 위해 ‘인종 절대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기댄다 할지라도, 타당하다. 아프로퓨처리즘이 기존 세계에 관한 반성을 축소하는 위험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성은 정확히 아프로퓨처리즘이 스스로를 암흑의 바다 안 그리고 태양의 밝음 안 둘 모두에서 스스로를 표명하기 위해 비현실적인 것을 허용하는 타자-세계성의 우연성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마도 아프로퓨처리즘의 충분한 기술을 충족시키기 보다, 교묘하게 흑인성의 이념들에 포획되지 않는 집단적 소속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가진 이분법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비록 흑인 문화와 흑인적 삶의 쾌활함이 ‘불가능성을 상상하는 것, 즉 더 나은 세상,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것’에 대한 것이라 해도 그러하다.[1] 결국 각각의 아프로퓨처리즘적 표현은 그것이 재현될 수 없는 만큼 집합적이다.
과학소설 작가인 사무엘 델라니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과학 소설의 가장 강하고 유별난 측면 중 하나는 그것이 주변적이라는 점이다. 과학소설은 주변부로부터 작동할 때 – 그리고 작동한다고 주장할 때 - 언제나 가장 정당하고 가장 유효하다. (...) 나는 그것이 사람들의 중심, 즉 흑인 민족주의, 페미니즘, 게이 권리, 기술지향주의 운동, 생태주의 운동 또는 이런 저런 중심에서 작동하는 것을 보고싶지 않다.
Dery 1994: 189
이타샤 워막(Ytasha Womack, 2013)에 따르면, 아프로퓨처리즘은 비-선형적이고 유동적인 상상력이 출현하는 어떤 장치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재현의 새롭고, 똑같이 휘발성 강한 형식들을 재포획함이 없이 주변부에 남을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아프로퓨처리즘은 흑인성의 불가능성, 흑인으로 존재하는 것의 불가능성, 자기와 타자와의 불가능한 참여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선 라가 설명하듯이 “너무나 불가능하기에 (...) 그것이 어쩌면 진실일 수 없는 (...) 어떤 것”이다(Corbett 1994 : 311에서 재인용). 그것은 푸코적 의미에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또는 이미 존재하고 여전히 존재할 것인 삶의 방식으로서의 흑인적인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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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Interview with Alondra Nelson, Afrofuturism, Soho Repertory Theater, 30 November 2010, http://youtu.be/IFhEjaal5js [2017sus 2월 13일 접근]
관련 키워드: Alienation; Necropolitics; Posthumanist Performativity; Decolonial Critique; Real Cool Ethics.
- Ramon Amaro, “Afrofuturism”, in Posthuman Glossary,
eds. Rosi Braidotti, Maria Hlavajova (London: Bloomsbury, 2018), 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