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세(Capitolocene), 툴루세(Chthulucene)
자본세와 툴루세(#Capitalocene_and_Chthulucene)
우리는 포스트휴먼(posthuman)이 아니다. 우리는 배양토(compost)다. 우리는 인간(homo)이 아니다. 우리는 부식토(humus)다. 우리는 지구인이며, 지구위를 살아가는 자들이다. 우리는 다수이며, 미규정적이다. 카오스적으로 유동하는 낭비 안에서 서로에게 스며든다. 우리는 다형적 진행체를 발생시키기 위해 공제작적 윤생(sympoietic whorls) 안에서 우리 자신의 뱀같은 꼬리를 먹는다. 그리고 우리는 각양각색으로 교직된 지옥세상의 우로보로스들(ouroboroi)과 휘말려 든다. 우리는 지구를 위한 그리고 거기 속한, 그것의 끝나지 않는 시간들을 위한 그리고 거기 속한 대지체(chthonic)다. 우리는 그것의 폐허 안에서 살고 죽는다. 우리는 틈들 안에 발아하기 위해 폐허에다가 터널을 뚫는다. 시간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배양토 만드는 과정은 매우 뜨겁다.[1]
인류세나 자본세와 같은 이름을 부여받을 만한 난폭함은 사람들과 여타 동식물들을 보호하는 장소들과 시간들을 파괴하는 (항상 모든 곳에서 인류는 아니지만) 사회-생태론적으로, 역사적으로 위치지워진 인간들에 대한 것이다. 인류세와 자본세는 현재 진행중인 환경들의 살해라는 이중의 죽음을 가리킨다.[2] 이러한 것들은 체계적 과정에 속한 예측불가능한 파괴적 관계망을 위해 적절하게 추악한 명칭들이다. 그것들의 결과, 그것들의 물질적인 측면들은 이미 바위에, 공기에, 물과 지구의 살에 화학적으로 그리고 원자핵적 표징들 안에, 열-포집 가스 안에, 더운 산성 바다 안에 아로새겨져 있다. 자본세는 누군가의 입에 억지로 갑자기 우겨넣는 필수적이지만 충분치 않은 단어들 중 하나다. 인류세라는 그릇되고 오만한 인간적 보편주의에 대해 언짢은채, 나는 자본세(와 대농장세Plantationocene, 이는 급진적인 단순화를 통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름인데, 이것은 사람들, 식물들, 동물들 그리고 미생물들 안에, 또한 노예제, 식민주의, 이종-규범적hetero-normative 가족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여타 강제 생산과 재생산 체계들, 자본세가 가능한 한 막대한 가속을 일으키는 모든 것들의 전지구적 이동 안에 뿌리박혀 있다)의 역사적 축출과 멸종에 관해 강의를 시작했다.[3] 하지만 누구도 자본세와 같은 말을 새롭게 발명하진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사하게 중요한 단어들을 제안하는지 주목해 보라. 우리는 어떤 공유된, 참을 수 없는 그리고 단조롭고 불필요한 조건을 지칭하기 위한 이름들을 열망한다. 기존의 무질서는 불필요하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직시해야만 하는 얼마나 많은 시간 그리고 얼마나 많은 방법들이 있는가? 발명에 있어서 실뜨기 놀이에 속하는 ‘나의’ 자본세만이 아니라, 제이슨 무어(Jason Moore)가 이미 더불어 생각하기 위해 논증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다. 무어 자신은 2009년 룬드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의 대학원생이 그것을 제안했을 때, ‘자본세’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급박한 역사적 위기 상황에서, 함께-생각난-단어들(words-to-think-with)이 한꺼번에 끓어 올랐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주의를 촉구하며 아우성치는 사태를 끌어 모으기 위해 좀 더 좋은 그물가방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4]
하지만 인류세나 자본세는 아마도 백악기와 고제3기를 가르는 K-Pg 경계와 같이, ‘세’(世, epoch)보다 더욱 경계적인 사건들이다.[5] 인류세와 자본세는 격심한 단절을 표시한다. 이후에 올 것은 더 이상 이전에 왔던 것과 유사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세, 자본세 동안 가해지는 파괴의 크기는 중요하다. 이전 상태(status quo ante)는 존재하지 않는다. 손실은 실재적이며 진행되는 중이다. 애도가 요구되며, 그것은 현재 힘들고, 더 힘들어질 것이다. 인류세/자본세에 있는 경계는, 11억명에 달하는 사람들과 21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 존재할 사람들 뿐만 아니라 무수한 다른 동식물들에게 거대하고, 비가역적이며 불평등하게 생겨나는 파괴가 정말로 차곡차곡 진행된다는 것을 포함하여(만약 최근 인간 아기들의 출생률이 낮게 유지된다면, 엄청난 숫자지만 명백한 11억명 가량의 사람들의 수도 유지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출생률이 증가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반-인종주의자들, 반-제국주의자들은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멈추었다. 우리는 이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많은 것을 의미한다. 절멸에 도달한다는 것은 은유가 아니다. 체계 붕괴는 스릴러가 아니다. 어떤 종들의 쫒겨난 자들에게 물어보라. 우리의 일은 인류세와 자본세를 가능한 한 짧고 얇게 만드는 것이고 은신처들을 풍족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세들(epochs)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에서 서로 간에 능력을 신장시키는 것이다.[6]
지금 현재 지구는 피난민들, 인간 그리고 인간 아닌 것들이 은신처 없이 가득차 있다.
‘툴루세’는 단순한 단어다. 이것은 두 개의 그리스어 어근(khthôn과 kainos)의 복합어로서 둘 다 살아 가고 죽어가면서 상처 입은 지구에 응답-가능한 상태로 불편한 것들과 함께 머무는 것을 배우기 위한 일종의 시공간에 붙여진 이름이다. 카이노스(Kainos)는 이제 시작의 시간, 진행 중인 시간, 갱신의 시간을 의미한다. 카이노스 안의 무(Nothing)는 전통적인 과거들, 현재들 또는 미래들을 의미해야 한다. 두꺼운 시간들은 많은 형태를 지닌다. 화살은 뒤엉키고, 그들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며, 확산하고 길을 잃는다. 시간은 오만불손한 물질이다. 게다가 전에 있었던 것을 청산하거나, 사실상 이후에 오는 것들을 청산한다고 주장하는 시작의 시간 안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카이노스는 상속되는 것들, 상기되는 것들로 가득 찰 수 있으며, 여전히 있는 것을 주목하는 것 뿐 아니라 계속 존재할 것들을 살찌우는 것, 즉 도래할 것들로 가득차 있다. 공제작적(sympoietic) 복잡성에 공명하면서, 모든 종류의 시간성과 물질성을 주입하는 섬유질 균사(stringy hyphae)와 더불어, 카이노스는 두껍고, 진행중인 현존의 실마리들을 잡아 당긴다.
대지체들은 고대와 최첨단 둘 모두에서 지구의 존재자들이다. 대지체들은 섬모, 촉수, 손발가락, 끈, 도마뱀 꼬리, 거미의 다리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우글거린다. 대지체들은 다-생적(multi-critter) 부식토 안에서 뛰어 놀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인간들은 참을 수 없어 한다. 대지체들은 가장 좋은 의미에서 괴물들이다. 그들은 지구적 과정과 동식물들의 물질적 의의를 증명하고 수행한다. 그것들은 또한 영향력들을 증명하고 수행한다. 대지체들은 안전하지 않다. 그들은 이데올로그들과 거래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 그들은 모든 공기, 물 그리고 지구의 장소 안에 다양한 형태들과 다양한 이름을 가진 채 구불거리며 무성하다. 그들은 만들고 해체한다. 그들은 만들어지고 해체된다. 그들은 존재하는 누군가이며, 존재하는 무엇이다. 그들은 ‘나’를 아주 잘 행위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제작적이지 자기-제작적이지 않다. 종교적이면서 동시에 세속적인 겉모습들을 가진 세계의 위대한 일신론들(monotheisms)이 여러번에 걸쳐 대지체들을 절멸시키려 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인류세와 자본세를 불러온 그러한 시간의 스캔들은 가장 최근의 그리고 가장 위험한 이러한 절멸의 힘, 이중의 죽음으로 인도하는 이러한 특이성들이다. 툴루세에서 강렬하게 서로 간에 함께-살고 함께-죽는 것은 근대적인 것들의 절멸적 시간에 인간과 자본 둘 모두의 독재에 대해 어떤 신랄한 응답을 할 수 있다. 대지체들은 죽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은 전체 지구 내부에서 구불거리며 미끄러져 나아간다. 메두사처럼, 그들은 죽을 운명으로 움직이는 중이다. 기원전 5세기 경에 인정 받은 문어들, 오징어들처럼 대지체들은 수수께끼의 생명체다. 그들은 칠흙 같이 가장 어두운 밤에 숨어 있다. 그들은 변신의 장인들이다. 그들은 가차없이 여러 형태를 띈다. 그들은 관족선형이고, 가시를 가진 수많은 촉수 안에 세계를 얽히게 한다.[7] 대지체들은 바다의 거미들이다. 그들은 포식자들이지, 근절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진행성(ongoingness)이 거기서 관건적인 한에서, 부식토로서의 인간이 하나의 부분인 바, 역동적이고 지속적인 공-대지적 역능과 힘을 위한 이름을 요구한다. 진행성은 미래주의가 아니다. 진행성은 연속적인 것들, 불연속적인 것들 그리고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아마도, 다만 추측컨대 오로지 강렬한 수행과 더불어, 다른 지구생명들과 더불어 협력적으로 일하고 놀이하는 것, 인간 민중을 포함하는 풍부한 다종적 배치들을 번성케 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나는 이런 모든 것을 – 과거, 현재 그리고 도래하는 - 툴루세라고 부르고 있다. 이 실재적이고 가능한 시공간은 작가인 H. P.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가 여성혐오적 인종공포적인 괴물 툴루(Cthulhu)(철자가 다르다는 것에 주목하라)를 따라 이름 붙여지지 않으며, 오히려 다양하게 지구-전역에 펼쳐진 촉수적인 힘들과 역능들을 따르며, 나가(Naga), 가이아(Gaia), 탕가로아(Tangaroa)(아빠 폭포로부터 터져 나오는), 타라(Tarra), 하니야수-히메(Haniyasu-hime), 거미 여인, 파차마마(Pachamama), 오야(Oya), 고르고(Gorgo), 라벤(Raven), 아쿨로주시(A’akuluujjusi) 그리고 더 많고 많은 것의 이름을 회집했다. ‘나의’ 툴루세는 심지어 그것의 문제적인 그리스풍 연결들, 수많은 시간들과 공간들 그리고 – 인간 이상의 것, 즉 비인간과 부식토-인간을 포함하여 - 수많은 간-행적 실체 회집체들을 담고 있다. 심지어 그것은 이후 등장하는 영어권 텍스트에서도 나온다. 나가, 가이아, 탕가로아, 메두사, 거미 여인과 모든 친족적인 것들은 러브크래프트가 상상하거나 떠올리지 못했던 SF의 찬란한 노선에 적합한 수 천의 이름들 중 일부이다. 이를테면 사변적 우화, 사변적 페미니즘, 과학 소설과 과학적 사실 등등의 그물망들이 그것이다.[8]
우리는 요구되는 비판을 수행하기 위해 인류세와 자본세와 같은 추한 단어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구인들로서 현실적인 삶과 죽음을 위해 구불거리는 비-이름/천의-이름을 요구한다. 이야기들이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 개념들이 개념을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학적으로, 가시적으로 그리고 서사적으로, 상들(figures)이 상들을 상상하는 것, 체계들이 체계들을 체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9]
[주석]
[1] 아티스트인 베쓰 스테픈스(Beth Stephens)와 아니 스프링클(Annie Sprinkle)이 컨 토이가 디자인하여 함께 만든 스티커들. www.sexecology.org.
[2] ‘이중의 죽음’은 데보라 버드 로즈(Deborah Bird Rose)의 ‘What if the Angel of History Were’, Cultural Studies Review, 12(1): 67-78, 2006에서 온 것이다.
[3] Will Steffen, Wendy Broadgate, Lisa Deutsch, Owen Gaffney and Cornelia Ludwig, ‘The Trajectory of the Anthropocene: The Great Acceleration’, The Anthropocene Review, 2(1): 81-98, 2015. 인류세라고 불리워지는 추한 것의 날짜를 세는데 있어서 위대한 가속이라는 매우 유용한 개념은 1750년부터 현재까지 자연과 사회 체계들의 성장 곡선들을 그래프로 표현하기 위한 시도에서 2004년에서부터다. 그와 같은 모든 전지구적 통합과 같이, 데이타는 넓게 그리고 다양하게 불평등함들을 표시하며 또한 그러한 불평등함과 존재론적 동일화를 만들 뿐 아니라 그러한 데이터를 만들기 위한 공제작적 자연-기술 과정들을 신비화하기 위한 위협들을 가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인 것은 너무 많은 이질적인 기하급수적 성장 곡선들이 1950년대에 변곡점을 공유했다(인구수, 멸종, 종이 사용, 탄소배출, 금속추출, 산업적 동물 생산, 강제적이고 자유로운 인간 이주 등등). 이러한 것들은 마치 그것들이 자연 법칙들과 시간의 필연적 방향인 것처럼, 기하급수적인 성장곡성에 대한 수학에 관한 매력적인 요청이 아니라 망상화한 과정들에 대한 위치화된 역사적 분석을 절실히 요구했다.
[4] 그가 최초로 그리고 폭넓게 활용한 자본세 논증은 Jason Moore, ‘Anthropocene, Capitalicene, and the Myth of Industrialization,’ http://jasonmoore.wordpress.com/2013/06/16/anthropocene-capitalocene-the-myth-of-industrialization/,16 June 2013, 과 ‘The Capitalocene, Part 1: On the Nature and Origins of Our Ecological Crisis,’ http://jasonmoore.com/uploads/The_Capitalocene_Part_I_June_2014.pdf, 2015[2016sus 3월 15일 접근] 참조.
[5] 스콧 길버트(Scott Gilbert)는 인류세(와 대농장세)가 K-Pg 경계처럼 어떤 경계적 사건이지 하나의 세(epoch)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Donna Haraway, Noboru Ishikawa, Scott F. Gilbert, Kenneth Olwig, Anna L. and Nils Budandt, ‘Anthropologists Art Talking-About the Anthropocnene’, Ethnos, 81(4): 1-30, 2015 참조. 내가 아는 한, 이러한 대화는 대농장세 개념이 등장했던 첫 번째 지점이다(p. 22).
[6] 은신처와 재생은 Anna Tsing,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 (Prinston: Prinston University Press, 2015)에서 논의되었다.
[7] Marcel Detienne and Jean-Pierre Vernant, Les rueses de l’intelligence: la mètis des Grecs(Paris: Flammarion et Cie, 1974). 거인족 여신인 메티스(Metis)는 제우스와 그의 형제자매 보다 더 이른, 더 복잡한 시대에 속한다. 그녀는 제우스와 결혼함으로써 올림피아 계보에 그녀를 기입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나의 툴루세 이야기 안에서, 메티스는 그녀의 지구-전역의 촉수 친족에 더 가깝다.
[8] ‘Os Mil nomes de Gaia/The Thousand Names of Gaia’는 에두아르도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Eduardo Viveiros de Castro), 데보라 다노프스키(Débora Danowski)와 그들의 동료들에 의해 2014년 리우데자네이로에서 조직된 컨퍼런스다. Haraway, ‘Entrevista’, by Skype, 21 August 2014, http://www.youtube.com/watch?v=ix0oxUHO1A8을 보라.[2015년 12월 17일 접근]
[9] 이 용어 항목은 Donna Haraway ,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Books, 2016)에 많은 부분 기대고 있다.
- Donna Haraway, “Capitalocene and Chthulucene” Posthuman Glossary,
eds. Rosi Braidotti, Maria Hlavajova (London: Bloomsbury, 2018), 79-83.
자본세(#Capitalocene)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하다. 그가 얼마나 많이 총칭적인 남성적 보편성에 사로잡혀 있든지 간에 그리고 그가 얼마나 많이 그것을 숭배하든지 간에, 인류는 이러한 골치아픈 짓을 행하지 않았으며 그는 이것을 이중-죽음-사랑하기의 세기로 이름 붙이지 않아야 한다. 인류는 결국 버닝맨(Burning Man)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자본세(Capitalocene)와 비교하여 많은 중요한 활동가들에게 보다 덜 논쟁적이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개념을 계속 필요로 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도 물론 그 개념을 드물게 사용한다. 인류세가 그것의 비워낸 그물가방 안에 모으는 것과 모으는 사람은 폐허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심지어 고만고만한 지구인의 회복을 위한 역능을 증명할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우리가 오직 이 SF적인 시간들 동안 하나의 단어를 가질 수 있다면, 확실히 그것은 자본세임에 틀림 없다.[50] 종 인간(Species Man)은 제3탄소기 또는 핵기(Nuclear Age)를 위한 조건들을 형성하지 않았다. 인류세의 행위주체로서 종 인간의 이야기는 위대한 남근적 인간화와 근대화의 모험에 관한 거의 우스꽝스러운 재상영이다. 거기서 인간은 사라져버린 신의 이미지를 제작했고, 그의 세속-신성한 상승 안에서 엄청난 힘들을 가지게 되면서, 다시 한번 비극적인 감퇴로 끝맺게 된다. 자기제작적, 자기조성적 인간이 다시 등장했고, 이번에는 비극적인 체계적 실패 안에서다. 이들은 생물다양성 생태체계를 끈적거리는 매트와 독침 해파리가 속한 완전히 정신나간 사막들로 바꾼다. 그렇다고 기술 결정론이 제3탄소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석탄과 증기기관은 이 이야기를 결정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날짜도 틀린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빙하기로 되돌아가야하기 때문이 아니고, 적어도 우리가 최근 시기의 장기 16세기와 17세기에 속하는 위대한 시장과 상품 재세계(상)화(reworldings)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록 우리가 자본세를 형성하는 ‘전지구화된’ 변형에 대해 생각하는 중에 (그릇되게도) 유럽중심적으로 남을 수 있다 해도 그러하다.[51] 우리는 확실히 설탕, 귀금속, 대농장, 원주민 학살과 노예제의 네트워크들에 대해, 그들의 노동 혁신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인간과 비인간 노동자들 둘 모두를 쓸어버리는 생명체와 사물들의 재위치화와 재구성과 더불어 말해야 한다. 영국의 전염성 산업혁명은 거대하게 물질화되었지만, 그것은 행성-변형적인, 역사적으로 지정된, 충분히 새로운, 세계(상)화(worldling)하는 관계들 안에 단지 하나의 활동인자이다. 인민들, 식물들, 그리고 동물들의 재배치, 광범위한 숲의 평탄화 그리고 증기기관을 돌리기 위한 금속들의 폭력적인 채굴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인류 또는 종 인간 또는 인간 사냥꾼의 배신행위에 관해 팔을 비틀어 버릴 수 있는 어떤 확실한 보증은 아니다.
경제들과 생태, 역사들과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에 속한 연결접속된 신진대사들, 절합들 또는 공생산(coproductions)(당신이 원하는 은유를 골라라)은 기회감염적(opportunistic)이고 우발적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것들은 끊임없이 관계적, 공제작적 그리고 필연적이다.[52] 그것들은 지구인이지, 우주적인 또는 우주 속으로 들어가는 황홀경이나 저주가 아니다. 자본세는 지구인이다. 그것은 우리 종도 포함되는 마지막 종다양성의 지리적 세기여야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말하지 않은 많은 훌륭한 이야기들이, 아직 엮지 않은 그물가방이 그리고 인간에 의한 것만이 아닌 많은 것들이 있다.
하나의 도발적인 것으로서, 어떤 도구, 이야기 또는 생각해 볼 세기(epoch)로서의 인류세에 대한 나의 반박들을 요약해 보자. (1) 인류세와 관련된 신화 체계는 하나의 구성, 그리고 좋지 않게 끝나는 이야기들이다. 더 중요한 점은, 그것들이 이중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계속됨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형편없는 행위자로 좋은 이야기를 하기는 힘들다. (2) 종 인간은 역사를 만들지 않는다. (3) 인간 더하기 도구는 역사를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예외주의자들이 말하는 대문자 역사(History)에 관한 이야기다. (4) 그 대문자 역사는 지질학적 이야기, 가이아 이야기, 공대지체(symchthonic) 이야기들에게 길을 내어 주어야 한다. 지구인들은 망상화된(webbed), 뒤엉킨 그리고 촉수적인 삶과 죽음을 공제작적 종다양성적인 실(string)의 형상 안에서 행위한다. 그들은 대문자 역사를 행위하지 않는다. (5) 인류세에 속한 인간의 사회적 장치는 꼭대기가 무겁고 납작한 관료제의 경향을 가진다. 반란(Revolt)은 위안, 영감 그리고 유효성에 있어서 다른 행위형식과 다른 이야기들을 요구한다. (6) 민활한 컴퓨터 모델링 작업과 자기제작적 체계 이론에의 의존에도 불구하고, 인류세는 ‘사유불가능한’ 관계 이론, 즉 (명백히 이산화탄소를 제외하고) 대기 중의 모든 공기를 취하는 관계들과 경합하는 단위들보다 먼저 존재하는 제한적인 공리적 개체론이어야 한다는 것에 너무 많이 기댄다. (7) 인류세의 과학은 제한적인 체계 이론들 내부에, 그리고 현대적 종합이라고 불리우는 진화 이론들 내부에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이것들은 그 상당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공제작, 공생, 공유전, 발전, 망상화된 생태론과 미생물들에 대해 잘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것은 합당한 진화 이론에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8) 인류세는 부유한 계급들과 지역들에서 인텔리들에게 가장 용이하게 의미 있고 유용한 개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를 감싸는 옷 안에 있는 기후, 날씨, 땅, 시골에 대한 배려 또는 다른 많은 것들을 위한 관용적 단어만이 아니며 특별히 원주민들 사이에서도 그러하다.
나는 페미니스트 환경론자인 에일린 크리스트(Eileen Crist)가 경영론적, 기술관료적, 얼빠진 시장-이윤적인 근대화와 수많은 인류세 담론에서 다루는 인간-예외주의적인 일상 비즈니스 행위들에 반대할 때, 그녀와 노선을 같이한다. 이러한 담론은 단순히 삐뚤어진 머리와 삐뚤어진 가슴 자체가 아니고,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돌볼 우리의 역능, 즉 현재 불안정하게 존재하는 것들(황무지라고 불리워지는 것을 포함하여, 인종주의적인 개척 식민주의 안에서 그 개념에 관한 모든 오염된 역사에 대해)과 여전히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되찾을 가능성으로 우리가 다른 생명체들과 동맹을 맺게 될 필요가 있는 것들 모두를 제거하는 것이다. “심각하게 유지되는 기근과 고통, 그것은 모든 생명에 나쁜 전조로서, 모든 경우에 인간 예외주의의 결과물이다.” 그 대신에 보다 지구적인 통합성을 지닌 어떤 인간이 “우리의 물러남과 규모 감소, 우리의 숫자, 경제의 선차성을 도입하고 자유와 삶의 질을 더 높고, 더 많이 포함하기 위해 거주한다.”[53]
만약 인간이 역사 안에 살아 가고 인류세 내부에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한다면, 내 생각에 너무 많은 포스트휴먼(그리고 포스트휴머니스트들, 여타의 유사한 것들)은 인류세로 이행해 버릴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나의 인간과 비인간 민중은 테라폴리스(Terrapolis)의 세포들 내부를 구불거리며 나아가는 무시무시한 대지체일 것이다.
자본세가 근본주의 맑스주의의 관용구 안에서 말해지는 한, 근대성, 진보 그리고 대문자 역사에 관한 그것의 모든 미사여구와 더불어 그 용어는 동일한 또는 흉폭한 비판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인류세와 자본세 둘 모두에 관한 이야기들은 너무 큰(Too Big) 많은 것들이 되기 직전에 계속 비틀거린다. 맑스는 다윈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을 했다. 우리는 결정론, 목적론 그리고 계획 없이 충분히 큰 이야기들을 말하는 그들의 용기와 능력을 물려받을 수 있다.[54]
역사적으로 정립된 관계적 세계(상)화는 자연과 사회의 이항 분리와 대문자 진보(Progress)와 그것의 사악한 쌍둥이인 근대화 둘 모두를 비웃는다. 자본세는 관계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어떤 세속적 신과 같은 인류, 역사법칙, 기계자체 또는 근대성이라고 불리우는 악마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자본세는 물질-기호론적 SF 패턴들과 보다 생기있는 어떤 이야기, 즉 어슐라 르 귄(Ursula K. Le Guin)이 기꺼이 내세울 수 있는 어떤 것을 구성하기 위해, 관계적으로 해체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라고 불리워지는 이러한 사태에 대한 실천에 대해 매일매일 계속 찬성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이 충격받기 때문에, 필립프 피냐르(Philippe Pignarre)와 이사벨 스텐저스(Isabelle Stengers)는 [자본주의에 대한] 고발이 특별히 효과 없게 되거나, 자본주의가 아주 먼 옛날에 지구로부터 사라져 버렸을 것이라고 쓴다. 대문자 진보(와 그것의 반대쪽 극)의 매혹에 대한 어둡고 홀린 서약은, 마치 우리가 종다양성적 행복함 안에서 재세계화하고, 재상상하며, 재생하고 서로 간에 재연결되는 그 어떤 방법도 없다는 듯이, 우리를 끝이 없는 극악한 선택으로 몰아 간다. 이러한 설명은 많은 중요한 것들을 더 좋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면제하지 않는다. 사실은 그 반대다. 피냐르와 스텐저스는 근본적으로 상상, 저항, 반란, 개량 그리고 애도의 새로운 실천, 그리고 잘 살고 잘 죽는 것을 발명할 능력이 있는 집단들을 확신한다. 그들은 기존의 무질서는 불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다른 세계는 단지 절실히 요구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가능하지만, 만약 우리가 절망, 냉소 또는 낙관 그리고 진보에 관한 믿음/불신의 담론에 홀리면 그렇지 않다.[55] 많은 맑스주의 문화 비평 이론가들은 이에 대해 열렬히 동의한다.[56] 따라서 그들은 촉수적 존재들이다.
툴루세(#Chthulucene)
러브록과 마굴리스(Margulis)에 의한 발생적인 복잡계로 되돌아 가면, 가이아가 많은 당대의 서구 사상가들에게 인류세를 상징한다. 하지만 펼쳐 보여진 가이아는 툴루세 안에 보다 좋게 정립된다. 툴루세는 진행중인 시간대로서, 상징화와 날짜 기입을 거부하면서 수 만가지 이름들을 요청한다. 카오스로부터 떠오르면서,[58] 가이아는 강력한 침투력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것은 누군가의 주머니에도, 구원의 희망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클리드적 상징과 인간 이야기에 반하는 어떤 필연성으로서, 지난 몇 세기의 인위적인 생태 변화 과정에 의해 초래된 재앙을 인식하도록 이끄는 20세기 후반의 가장 훌륭한 자기제작적 복잡계를 환기하는 힘이기도 하다.[59] 브라질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두아르도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와 데보라 단노프스키는 탈-유럽중심 컨퍼런스인 “가이아의 수 천개 이름”[60]에서 우리 시대의 긴급한 사안들을 재구성하면서 가이아가 고대 그리스와 이어지는 유럽문화에 제한된다는 좀체 사라지지 않는 관념들을 좇아 내 버린다. 이름들, 얼굴이 아닌, 동일성의 형태가 아닌, 어떤 다른 것, 수 천 개의 다른 것, 이것은 여전히 이 지구 시대에 연결된 진행중인 발생적이고 파괴적인 세계(상)화와 재세계상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모습을 원한다. 즉 수 천의 다른 무언가의 이름들 말이다. 그것은 인류세로부터 분출되어 나와 다른 것, 충분히-큰(big-enough) 이야기로 들어간다. 내가 캘리포니아 삼나무 숲에서 피모아 툴루(Pimoa chthulhu) 거미에게 물린다면, 나는 뱀같은 메두사와 그녀의 조상들, 친척들 그리고 후손들의 수많은 끝나지 않는 세계(상)화를 제시하고 싶을 것이다. 아마도 메두사, 즉 유일하게 죽게 되는 고르곤(Gorgon)은 우리를 테라폴리스의 홀로비오메들(holobiomes-숙주와 그 기생체들이 연합한 생태적 환경[역자])로 데려갈 수 있고, 그들을 죽은 바위에서 나온 화석 물고기의 마지막 목숨까지 빨아 먹도록 하는 대신, 살아 있는 산호초 위의 영웅들이 탄 21세기의 배들을 몰아쳐 갈 우리의 가능성을 더 높일 것이다.
포트니아 테론(Potnia Theron) 즉 동물들의 여왕(the Mistress of the Animals)의 테라코타 형상은 스플릿 스커트를 입고 양 손에 새를 거느린 날개 달리 여신으로 묘사된다.[61] 그녀는 중동과 근동 세계와 그 너머에서 활달하고, 넓으며 대지체의 힘들의 과거와 미래 속으로의 시간적 도달을 생생하게 깨우치는 자다.[62] 포트니아 테론은 미노아 문명 따라서 뮈케네 문화에 뿌리를 두며, 그리스 신화에 고르곤들(특히 유일하게 죽을 운명에 처하는 고르곤인 메두사)과 아르테미스를 들여 온다. 어떤 종류의 멀리 돌아온 원-메두사(Ur-Medusa), 여인 괴물은 크레테와 인도 사이의 어떤 유력한 연결이다. 날개 달린 형태는 또한 벌들의 여왕, 포트니아 멜리사로 불리운다. 벌들은 침이 달린-윙윙거리는-꿀로 된 그들의 모든 선물로 그녀를 치장한다. 청각적, 촉각적 그리고 미각적 감각들이 그 여왕과 그녀의 공제작적, 인간 이상의 육체에 의해 드러난다. 뱀들과 벌들은, 비록 이러한 생명체들도 겹눈 곤충과 다층시각으로 본다 해도, 양쪽 눈보다 날카로운 촉수 더듬이와 같은 것을 더 선호한다.
전세계적으로 많은 화신들 중, 날개 달린 벌 여왕은 매우 늙고 그래서 그들은 현재 많이 필요하다.[63] 포트니아 테론/멜리사의 뱀같은 잠금장치와 고르곤의 얼굴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충분히 돌아 다니는 다양한 대지체의 지구행성적 힘들의 친족들과 그녀를 얽어 놓는다. 그리스 단어인 고르곤은 무시무시함으로 번역되지만, 아마도 그것은 전체적이고, 가부장적인 귀에 훨씬 더 공포스러운 이야기들일 것이다. 그것은 세대의 수립, 파괴 그리고 집요하게 계속되는 지구인적인 유한성에 관한 이야기다. 포트니아 테론/멜리사/메두사는 어떤 근원적인 개변에 얼굴성을 부여하며, 그것은 전향적이고, 하늘 지향적인 인류의 근대 인문주의적 (기술인문주의를 포함해서) 형상들에 일격을 가한다. 그리스어 대지체(chthonios)는 ‘지구와 대양들에 속한, 그 안에 또는 아래에’를 의미한다는 것을 상기하라. 훌륭한 지구인은 SF, 과학적 사실, 과학 소설, 사변적 페미니즘 그리고 사변적 우화를 뒤섞는다. 대지체들은 정확히 하늘의 신들이 아니고, 올리피아의 기반도 아니며, 인류세나 자본세의 친구도 아니고 절대로 완료형태가 아니다. 그들은 지구로 용감하게 향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다.
고르곤들은 적합한 계보가 없는 강력한 날개를 가진 대지체적 실체들이다. 그들의 행동 반경은 옆으로 나온 촉수들이다. 그들은, 비록 여성으로 형상화되고 이야기된다 해도, 일정한 혈통도 확실한 종적 특성(유형, 젠더)도 가지지 않는다. 오래된 판본들에서 고르곤들은 에리니에스(Erinyes)(복수의 여신들), 대지체적 지하세계의 역능들과 쌍둥이인데, 이들은 자연적 질서에 반한 범죄에 복수한다. 날개 달린 것들에 있어서는 새의 몸을 가진 하피들(Harpies)이 이런 생생한 기능들을 수행한다.[64] 이제 포트니아 테론의 새들을 살펴 보고 그것들이 무엇을 하는지 물어 보라. 하피는 그들의 사촌인가? 기원전 700년 경 헤이오도스는 고르곤을 바다 괴물로 상상했고 그들에게 부모로 바다 신들을 부여했다. 나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Theogony)를 매우 오만한 퀴어 가족을 안정시키기 위한 노고로 읽는다. 고르곤들은 출현하기 보다 분출한다. 그들은 스텐저스가 가이아로 이해하는 바와 가까운 의미에서 침투적(intrusive)이다.
고르곤들은 그들의 살아 있는, 독을 분비하는, 뱀으로 뒤덮힌 얼굴들을 바라보는 인간을 바위로 바꿨다. 나는 만약 그 사람들이 그 무서운 대지체들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는 법을 알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궁금하다. 나는 그와 같은 태도가 여전히 교육될 수 있는지, 지금 배울 시간이 있는지, 아니면 바위들의 층위학(stratigraphy)이 그 마지막들과 무감동한 인류의 종말을 기록할 것인지 궁금하다.[65]
올림피아의 신들이 그녀를 하늘 신들의 계보와 권위에 대해 특별히 위험한 적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죽을 운명의 메두사는 진행중인 세기의 불편한 것들과 함께 머물기 위해 그물가방에 충분히-큰 이야기들 중 하나로서 나의 툴루세를 드러내 보이기 위한 노력에 특히 흥미로운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재의미화하고 비틀지만, 그리스인들 자신이 지속적으로 했던 그러한 방식으로 그렇게 할 뿐이다.[66] 영웅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죽이기 위해 출정했고,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총애하는 딸인 아테나의 도움으로, 고르곤의 머리를 베어 그것을 그의 종료, 이 지혜와 전쟁의 처녀신에게 가져다 주었다. 메두사의 끔찍한 머리는 그녀의 방패, 아이기스에 얼굴을 앞으로 해서 들어갔고, 아테나는 늘 그렇듯이 대지결착성(the Earthbound)에 대한 배반자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청부살인 행위는 아주 좋은 결과를 초래했는데, 메두사의 죽은 신체가 날개 달린 말인 페가수스가 되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말들과 특별한 친근감을 가진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여전히 실질적으로 감동을 준다고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메두사의 고통스러운 머리로부터 떨어지는 피에서 서해(western seas)의 바위투성이 산호초가 나왔음을, 우리는 오늘날 촉수 동물인 자포동물과 황록공생조류(zooanthellae)로 불리우는 것과 흡사한 광합성 해조류의 공생을 형성하는 고르곤 산호, 부채꼴 산호 그리고 채찍 산호라는 분류학적 명칭에서 이를 상기한다.[68]
산호초와 더불어, 아무리 뱀과 같은 형태라 해도 우리는 분명히 무분별한 얼굴 표상으로부터 멀리 떠나온다. 심지어 포트니아 테론, 포트니아 멜리사 그리고 메두사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촉수성을 홀로 늘일 수 없다. 사유하기, 형상화하기, 그리고 이야기만들기 과제에서, 마의 첫 번째 페이지들의 거미, 피모아 툴루는 결정적으로 바다의 비척추동물 생명체와 결정적으로 동맹을 맺는다. 산호초는 문어, 오징어 그리고 갑오징어와 대등하다. 문어들은 그들의 촉수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포식성으로 인해 바다의 거미로 불리운다. 촉수 대지체는 먹어야 한다. 그들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같이 하는 지구인의 반려종이다. 그들은 툴루세에서 유혹하고, 유인하며, 멋지고, 제한적이며, 위험한 불안전성을 위해 좋은 모습을 지녔다. 이 툴루세는 신성하지도 않고 세속적이지도 않다. 이 지구적인 세계(상)화는 총체적으로 지구인, 뒤섞인 것, 유한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위태롭다.
기동적이고 많은 팔을 가진 포식자는 산호초를 통과하고 넘어 고동치는데, 문어들은 바다의 거미로 불리운다. 따라서 피모아 툴루와 옥토푸스 시아네(Octopus cyanea[데이 문어])는 툴루세의 망상화된(webbed) 이야기들 안에서 만난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진행을 위해 결정적인 것을 모으기 위한 필수적인 세 번째 이야기, 세 번째 그물가방으로 툴루세를 제안하는데 있어서 매혹적인 것이다.[70] 대지체는 사라져버린 과거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윙윙거리고, 쏘고, 빨아 먹는 군집체이며 인간은 어떤 분리된 배양토 더미에 있지 않다. 우리는 부식토지, 인간도, 인류도 아니다. 우리는 배양토지 포스트휴먼이 아니다. 하나의 접미사로서, 카이노스(kainos), ‘-cene’은 새롭고, 최근에 만들어진, 두터운 현재의 신선한 세기에 신호를 보낸다. 지구대지의 종다양성적 힘들을 갱신하는 것은 공제작적 작업이며 툴루세의 활동이다. 분명히 인류세나 자본세와는 달리, 툴루세는 진행중인 종다양성 이야기들과 생성의 실천들로 구성된다. 거기에서 세계는 끝나지 않으며 하늘은 붕괴되지 않는다. 아직은 말이다. 우리는 각자 서로 간에 중차대하다. 인류세와 자본세적 담론이라는 지배적 드라마들과 달리, 인간은, 다른 모든 존재들이 단지 반응하기만 하는 식으로, 툴루세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배우들이 아니다. 질서는 다시 짜여진다. 인간은 지구와 더불어 그리고 거기 속해있으며, 이 지구의 생명과 비생명은 이야기의 중심이다.
하지만 위치지워져 있고, 현실적인 인간의 행동들이 문제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보다 우리의 몫을 드리우는 살아감과 죽어감의 방식에 관한 문제다. 그것은 인간에게만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절멸시키고, 멸종 당하며, 학살하는 개체군들과 미래에 속하는 것들의 전망을 통틀어 다른 많은 생명체들에게도 그러하다. 그와 같든 아니든 간에, 우리는 불안정적인 세계(상)화들을 돌보고 그와 함께 실뜨기 놀이를 한다. 이 세계(상)화들은 인간이 인류세와 자본세의 기원들 안에서 가능한한 더 빨리 새로운 화석을 만드는 화석-불태우기에 의해 더욱 더 끔찍하게 불안정한 상태를 만들었다. 다양한 인간과 비인간 활동가들은 긴급하게 요청되는 툴루세 이야기의 모든 세포질 안에서 필수적이다. 활동가 수장들은 자본주의와 인류에 관한 너무-큰 이야기들 안에서 너무-큰 활동가들에 제한되지 않는다. 이 둘은 사유, 사랑, 분노 그리고 돌봄에 있어서 세심한 실천들보다 요상한 종말론적 공포와 심지어 더 요상한 해방적인 탄핵을 들여온다.
인류세와 자본세는 둘 모두는 너무나 손쉽게 냉소주의, 패배주의 그리고 자기-확실성과 자기-만족적 예견에 스스로를 떠넘기면서, 오늘날 내 주위에서 온통 들리는 ‘게임은 끝났어, 너무 늦었어’와 같은 담론을 유포한다. 전문적이면서 대중적인 담론들은 기술신정주의적( technotheocratic) 지리공학과정을 확고히 하면서 절망 속에서 뒹구는데, 이는 가능한 공통 상상력을 동시감염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각양각색의 생명체들의 진행중인 삶과 죽음에 대한 그들의 요청들과 더불어, 순수하게 우리-아님, 즉 산호초에 속한 인간 이상의 세계(상)화와 만나는 것은 오늘날 적어도 2억 5천만의 인간이 그들 자신의 삶과 죽음을 잘 진행하기 위해 이 홀로비오메들의 진행중인 통합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다양한 산호들과 다양한 사람들과 민중들은 서로에게 그리고 서로 간에 관건적이다. 풍요로움은 하늘 신들과 그들의 노예들의 오만함 없이 어떤 종다양성으로서 응답-가능성을 촉진할 것이다. 또는 이런저런 종다양성적 지구대지는 어떤 과도하게 강조된 복잡한 적응체계와 같이 연이어지는 모욕을 흡수하는 그것의 능력들의 종국에 이르러 매우 끈적거리는 어떤 것 속으로 쏟아져 들어갈 것이다.
산호들은 최초에 인류세 안으로 대지결착성(Earthbound)을 데려가도록 했다. 처음부터 인류세라는 말의 쓰임은 인간이 유발한 지구온난화와 화석 연료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의 산성작용을 강조한다. 온난화와 산성화는 산호초를 병들게 하고 탈색시키는 압력으로 드러나며, 광합성하는 황록공생조류와 더불어 결국 무척추동물 공생체들을 죽이면서 그 세계(상)화가 순수한 산호체계에 의존하는 무수한 분류군에 속하는 모든 다른 종류의 생명체들도 죽게 한다. 대양들의 산호층들과 땅의 지의류들(lichens)도 또한 우리를 자본세에 대해 깨닫게 한다. 대양에서 이루어지는 심해 채굴과 천공작업 그리고 북반구 지역을 섬세하게 뒤덮은 지의류를 가로지르는 시추작업과 파이프라인 건축은 가속적인 국가주의적, 초국가주의적 그리고 기업적인 비세계(상)화(unworlding)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산호와 지의류 공생체들은 또한 우리를 두껍게 존재하는 툴루세의 이야기적인 세포들 속으로 풍부하게 데려가는데, 여기서 혼잡한 상태 안에서 그 모든 것들과 오만하지 않는 협동으로 – 가까스로 - 훨씬 나은 SF 놀이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 모두는 지의류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수의 여신들에 의해 바위들에서 끍혀내어질 수 있다. 이들은 여전히 복수하기 위해 지구대지에 반해 범죄를 분출시킨다. 이를 대신해, 우리는 잘 살아가고 잘 죽기 위해 신진대사의 변형들 안에서 바위들과 생명체들을 결합할 수 있다. “‘당신은’ 식물언어학자가 말할 미적인 비판, 즉 ‘[예전에] 사람들은 가지나무를 읽을 수조차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은 배낭을 둘러메고 파이크 상봉(Pike’s Peak)의 암벽에 있는 지의류의 노래를 새롭게 해독하기 위해 등산을 하면서, 우리의 무지에 대해 미소지을 것이다.”[71]
이런 진행중인 문제들에 주목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이 장을 열었던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고전적인 정치경제학의 인간 예외주의와 공리주의적인 개인주의가 학제들과 학제 간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과학 안에서 고려될 필요조차 없어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심각하게 고려될 필요 없는 것, 즉 생각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 말이다. 지성과 지식이 공발생적론과 공제작론에 대해 그리고 그 안에서 실행되는 그 시간에, 어째서 인류세라는 세기의 이름이 스스로를 마침 광범위하고 신기하게도, 비식민지적 예술, 과학 그리고 정치학을 포함하여 모든 인문학에서 가치있어 지는가? 인류세와 자본세의 비세계(상)화의 서글픈 행동들이 하늘의 신들의 마지막 헐떡거림이고, 끝나버린 미래, 끝난 게임의 보증자가 아니라면 어떤가? 사유들이 사유를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미완의 툴루세는 인류세의 쓰레기, 자본세의 절멸주의을 거둬들여야 한다. 그리고 여전히 가능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들을 위해 미친 정원사 같이 깨고, 자르고, 까는 것이 어떤 훨씬 더 뜨거운 배양토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
- Donna Jeanne Haraway,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Duke University Press ,47-57
[주석]
[50] 자본세는 공제작과 같은 그런 단어들 중 하나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발명했다고 여긴다면, 그냥 주위를 둘러보라. 그러면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이 동시에 그 단어를 발명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나에게도 일어났다. 이후 나는 내가 누구에게서 자본세라는 개념을 가지게 되었는지 질문을 받았을 때, 다소 개인주의적인 불쾌감을 넘어섰다. – 내가 그 단어를 만들었다고요?(“만들다니”!) 그리고 왜 여타 학자들은 거의 언제나 여성들에게 어떤 남성 작가에게 그들의 아이디어를 빚졌는지 묻는건가? - 나는 내가 언제나처럼 허구의 실뜨기 놀이에 참여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제이슨 무어가 늘 함께 사고하는 강력한 논쟁에 대한 글쓰기를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대화상대자는 무어의 작업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것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무어 자신은 자본세라는 말을 2009년 스웨덴 룬드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처음 들었는데, 그때 대학원생이던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이 그것을 제안했다. 어떤 긴급한 역사적 맥락에서는, 함께-생각한-단어들이 끓어오르는 가마솥에서 단숨에 튀어 나온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며 울부짖는 사물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보다 나은 그물가방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인류세라는 단어는 받아들여졌고, 지금도 받아들여지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많은 사실, 관심 그리고 돌봄의 문제를 끌어 모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자본세가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라고 희망한다. 특히 뉴욕 빙햄턴(Binghamton) 대학의 창조적인 맑시스트 사회학자인 제이슨 무어의 저서를 보라. 무어는 ‘세계-생태 연구 네트워크’의 조력자이다. 그의 첫 번째 자본세 논증은, Moore, “Anthropocene, Capitalocene, and the Myth of Industrialization.”을 보라. Moore, Capitalism and the Web of Life도 보라
[51]지난 몇 세기 동안 지구화의 경로와 중심들의 역사에 관한 사고를 하는 동안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Flynn and Giráldez, China and the Birth of Globalisation in the 16th Century를 보라. 식민주의, 제국주의, 지구화하는 무역 구성 그리고 자본주의의 차이와 반목들에 집중하는 분석에 대해서는 Ho, “Empire through Diasporic Eyes” 와 The Graves of Tarem을 보라.
[52]「인류세 또는 자본세, 3부」에서 제이슨 무어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자본과 권력이 – 그리고 무수한 다른 전략적 관계들이 – 자연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그물망을 통해 발전한다는 의미이다. ‘자연’은 여기서 전체적인 관계로 제공된다. 인간은 분명히 어떤 천부적인 (그러나 특별한 것은 아닌) 환경-제작적 종으로 자연 안에서 살아간다. 둘째, 1800년대 자본주의는 충분히 자란 채, 갑자기 석탄기(carboniferous) 제우스의 머리로부터 튀어나온 아테나가 아니었다. 문명은 빅뱅 사건으로부터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의 그물망 안에서 인간 활동의 변형과 분기가 연속적으로 발생함으로써 출현한다. (...) 예컨대 비슬라 유역(Vistula Basin)과 브라질의 대서양 열대우림의 17세기 동안의 장기적인 삼림벌채는 중세 유럽의 경우보다 5배에서 10배 사이의 규모와 속도로 이루어졌다.”
[53]Crist, “On the Poverty of Our Nomenclature,” 144. 크리스트는 인류세 담론이 붙잡힌 덫에 대한 뛰어난 비판을 행하고, 그뿐 아니라 우리에게 보다 상상력이 풍부한 세계(상)화를 위한 논의들과 불편한 것들과 머물 방법들을 준다. 인류세라는 명칭을 둘러싼 거부와 수용에 대한 복잡하게 얽힌, 다른 의견을 가진 논문들에 대해서는 <인류세 페미니즘> 학술회의의 비디오들을 보라. 풍부한 간학제적 연구로는 안나 칭(Anna Tsing)과 닐스 올레 부단트(Nils Ole Bubandt)가 조직한 <aura: Aarhus University Research on the Anthropocene>을 보라. 여기에 인류학자들, 생물학자들 그리고 예술가들이 인류세라는 주제 하에 모였다.
[54]나는 ‘충분히-큰 이야기들’에 대한 주장을 Clifford, Returns에서 가져왔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충분히 큰’ 역사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많을 것을 고려하지만, 모든 것을 고려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치적인 덕목을 보장하지도 않는다”(201). 어떤 큰 종합적 해명 또는 이론을 거부할 때, 클리포드는 실재론적인 기량을 발휘하는데, 이것은 “열린-결말인 (왜냐하면 그것들의 선형적인 역사적 시간은 존재론적으로 미완이기 때문이다) ‘충분히-큰 이야기들’, 즉 접촉, 투쟁 그리고 대화의 장소들을 다루기 때문이다”(85-86).
[55]Pignarre and Stengers, La sorcellerie capitaliste. 라투르와 스텐저스는 그들의 고발 담론(discourses of denunciation)에 대한 맹렬한 거부에 있어서 깊이 연합한다. 그들은 둘 모두 이 문제에서 내가 이해하고 재학습하도록 오랫동안 가르쳐 주었다. 나는 훌륭한 고발을 사랑한다! 그것은 다시 배우기 힘든 습관이다.
[56]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진보와 근대화에 대한 어떤 공동 비판으로 읽는 것이 가능한데, 비록 그들의 단호한 세속주의가 그들 나름의 생각이라 해도 그러하다. 세속주의자가 오징어, 박테리아 그리고 화가 난 늙은 여인 테라/가이아의 소리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은 정말 힘들다. 맑스를 논외로 하고, 자본세의 한가운데에서 툴루세를 풍요롭게 하는 가장 비근한 서구 맑스주의 동맹들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옥중수고』(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와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이다. 홀의 엄청나게 생산적인 에세이들은 1960년대로부터 1990년대를 관통한다. 예컨대 Morley and Chen, Stuart Hall을 보라.
[57]미국에서 대자본(Big Capital)의 약탈을 형상화한 두족류들의 흥미로운 역사에 대해서는 Gilson, “Octopi Wall Street!”를 보라(예컨대 20세기 초 존 록펠러/스탠다드 오일 문어는 노동자들, 농부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을 그 수 많은 촉수로 졸라 죽인다). 대지체적 동맹으로서 문어와 오징어들에 대한 재의미화는 굉장한 소식이다. 그들이 칠흑같은 밤을 기술광신적(technoid) 하늘 신들의 보기 좋은 장치들 속으로 뿜어 내기를.
[58]헤시오도스의 『신통기』는 저리도록 아름다운 언어로 저 깊은 심연에 있는 타르타로스 위에 그리고 그 속에 속한 올리피아의 불사적 존재들의 자리가 되기 위해 카오스로부터 나오는 가이아/대지에 대해 전한다. 그녀/그것은 매우 오래되고, 다양한 단계를 거치며, 그리스식 말들을 초과하지만, 논쟁적이며 사변적인 것으로 남을 뿐이다. 적어도 가이아는 올림피아 신들을 유지하는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요하고 비정통적인 학문에 능통한 고고학자 마리아 김부타스(Marija Gimbutas)는 대지모로서 가이아가 전-인도-유럽적인 후기 형태이며 신석기 시대의 위대한 어머니라고 주장한다. 2004년에 영화감독인 도나 리드(Donna Reed)와 신이교도 작가이자 활동가인 스타호크(Starhawk)는 김부타스의 삶과 그녀의 저작인 『시간으로부터의 신호』(Signs out of Time)에 관한 공동제작 다큐멘타리 영화를 내놓았다. Belili Productions, “About Signs out of Time”; Gimbutas, The Living Goddesses를 보라.
[59]‘비-유클리드적’ 스토리텔링에서 중요한 것을 이해하려면, 르 귄(Le Guin)의 『언제나 집으로 가는』(Always Coming Home)과 “A Non-Euclidean View of California as a Cold Place to Be”를 보라.
[60]“The Thousand Names of Gaia: From the Anthropocene to the Age of the Earth,” International Colloquium, Rio de Janeiro, September 15–19, 2014.
[61]벌은 포트니아 테론 엠블럼들 중 하나이며 그녀는 또한 포트니아 멜리사, 벌들의 여왕으로도 불리운다. 근대 마법주의자들은 제의와 시가에 이 대지체 존재들을 재-소환(re-member)한다. 만약 불이 인류세를 상징하고, 얼음이 자본세를 표시한다면, 툴루세를 위해 붉은 진흙 도자기를 사용하는 것이 나에게는 즐거운 일이다. 이러한 것은 불과 물과 대지의 시간으로서 민중을 포함하여 그것의 생명체들에게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강의 여신인 라투 키둘과 발리에서 공연중인 춤에 관한 박사논문으로, 라이사 드스밋(Raissa DeSmet)(Trumbull, 트럼불)은 나에게 인도의 뱀인 나가(Nagas)로부터 나오는 아주 멀리 있는,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물을 통과해 움직이는 대지체적 촉수 존재의 연결망을 소개해 주었다. DeSmet, A Liquid World.
[62]포트니아 테론과 고르곤/메두사의 연결은 기원전 600년 이후, 예컨대 기원전 5세기에서 3세기 경까지 이탈리아 반도에서와 같이 사원 건축과 건물장식에서 실천, 상상 그리고 의례를 위한 대지체적 힘들의 끈끈한 결속을 확인하면서 지속되었다. 외부의 위험들에 대항하고 생명체의 연결망을 풍부하게 하면서 아주 무시무시한 고르곤 형상은 얼굴을 바깥으로 향하였고, 안으로 향하는 포트니아 테론은 더 이상 끔찍하지 않았다. Busby, The Temple Terracottas of Etruscan Orvieto를 보라. 성모 마리아는 근동과 중동 지역 세계들로 뻗어 나갔는데, 그녀는 그녀의 세계 여행에서 이러 저러한 대지체적 힘들의 속성들을 부여받았다. 불행하게도 마리아의 도상은 별들로 성채를 두르고 뱀의 머리를 짓누르는 것으로 나타난다.(예컨대 19세기 초 마리아의 형상에서 유래하는 기적의 메달Miraculous Medal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그녀가 대지의 힘과 연합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별들로 둘러싸인 여인’은 마지막 날을 위한 기독교 성경의 종말론적 형상이다. 그것은 어떤 좋지 않은 생각이다. 어린 시절 내내, 나는 금장줄로 만든 기적의 메달을 착용했다. 마침내 그리고 운 좋게도 그것은 나를 지배했던 그녀의 마지막 대지체적 전염이었으며, 나를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둘 모두로부터 돌아서서, 배양토와 부식토로 향하게 했다.
[63]히브리어 Deborah는 ‘벌’을 의미하며, 그녀는 성경에서 언급되는 유일한 여성 심판자다. 그녀는 군주제 이전 이스라엘에서 전사이며 상담자였다. 『데보라의 노래』(Song of Deborah)는 기원적 12세기 경에 지어졌을 것이다. 데보라는 군인 영웅이면서 야엘의 동맹자였다. 그녀는 조안나 러스(Joanna Russ)의 구성주의 페미니즘 과학 소설 『여성인간』(The Female Man)에서 4Js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14년 4월, ‘빌리 탈렌 목사와 쇼핑 중단 교회’(the Reverend Billy Talen and the Church of Stop Shopping)는 하바드 대학에 있는 마이크로 로봇 연구실의 로보비(robobee)를 쫓아 냈다. 로보비는 최첨단 드론 벌로서 생물학적인 수분 벌들이 과로와 중독으로 점점 병들고 위험에 빠질 때 그들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다. 허니비알루야(Honeybeealujah), 오래토록 이야기될지어다! Talen, “Beware of the Robobee,” 와 Finnegan, “Protestors Sing Honeybeelujahs against Robobees.”를 보라. 또는 브라드 베르너(Brad Werner)가 ‘미국 지구물리학 연합 회의’(American Geophysical Union Meetings)에서 말한 바, 반란! 우리가 아직 붕붕거리는 벌 소리를 듣고 있을까? 이제 침을 찌르는 시간이다. 대지체 벌레를 위한 시간이다. 벌들을 돌보아야 할 시간이다.
[64] “Erinyes 1.”
[65]마르타 케니(Martha Kenney)는 내게 오랫동안 영국 과학소설 티비에서 방영된 시리즈물 <후 박사>(Doctor Who)에 나오는 우드(Ood) 이야기가 오징어 얼굴을 한 존재가 막 사지가 잘린 후, 그들의 공대지체적 군집정신(hive mind)으로부터 잘려 나가서, 노예적으로 될 때. 인간성에 얼마나 위협적인지 보여준다고 말해 주었다. 인조인간 공감체인 우드는 그들의 다양체적인 외계 얼굴에 속한 보다 낮은 자리로 구불거리는 촉수들을 드리운다. 그리고 그들의 적절한 신체들에 있어서, 그들은 손으로 그들의 후뇌들(hindbrains)을 이동시키며, 이러한 약하고, 살아 있으며, 외재적인 기관들(기관체들)을 통해 서로 간에 텔레파시로 소통한다. 인간들(분명 대지결속체는 아닌) 후뇌를 잘라내어 그것들을 기술적인 소통-번역 영역으로 대체하고, 그럼으로써 고립된 우드는 그들을 적대하게 강제하는 그들의 유혹자들을 통해 소통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우드 기술-소통자가 아이폰(iPhone)의 향후 출시품이라는 생각에 저항하지만, 내가 거리에서, 또는 심지어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오로지 자신의 기기와 접속하는 21세기 인간들을 살펴 볼 때 그것은 일리가 있기도 하다. 나는 ‘우드의 행성’ 에피소드에서 촉수체들이 우드 시그마에 의해 해방되고 특별하지 않은 자아들로 회복된다는 SF적 사실을 따르는 이러한 인색한 환상에서 벗어난다. 『후 박사』는 진행되는 이야기 사이클에서 『스타트랙』(Star Trek)보다 훨씬 낫다.
과학과 여타 지식 실천에서 우화들을 재기술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Kenney, “Fables of Attention.”을 보라. 케니는 그녀가 불안정한 ‘야생적 사실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식적인 호소들의 힘을 제안하고 검사하는 것과 연관시키는 여러 다른 장르의 우화들을 탐색한다. 그녀는 불확실한 지구인을 조종하기 위한 전략들을 탐구하는데, 여기서는 현실적 실천에서 사실과 허구의 생산적 긴장이 필수적이다.
[66]“Medousa and Gorgones.”
[67]수지 맥키 차너스의 ‘시간 보관기’(Holdfast Chronicles) 시리즈는 1974년 『세상의 끝을 향해 걷다』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페미니스트들과 그들의 말들에 관해 사유하기 위한 위대한 SF다. 성(sex)은 아주 알맞지 않다해도 흥미로우며, 정치학은 긴장미가 넘친다.
[68]에바 헤이워드(Eva Hayward)는 처음으로 메두사의 몸에서 나오는 페가수스와 그녀의 핏방울에서 나온 산호초에 관한 이야기로 인해 내가 관심을 가졌다. Hayward, “The Crochet Coral Reef Project” 그녀는 “만약 산호초가 우리에게 생명의 상호적 본성에 대해 가르친다면, 과연 우리는 현재 우리를 병들게 하는 환경들 – 이것들 중 많은 것을 우리는 쓸모 없이 만들었다 – 에 대해 어떻게 책임 질 것인가? (...) 아마도 지구는 금성처럼, 광폭한 온실효과로 인해 거주불가능한 곳이 될 것이다. 또는 아마도 우리는 해변을 다시 만들거나 해양 난민들을 위한 부수적인 집을 건축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미래 조건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대양들과 더불어 의무적인 협력을 유지할 것이다.” Wertheim and Wertheim, Crochet Coral Reef를 보라.
[69]나는 2014년에서 2015년 몬터레이 만 아쿠아리움 전시 <촉수체들: 문어, 오징어, 갑오징어의 놀라운 삶>(Tentacles)에서 영감을 얻었다. Detienne and Vernant, Cunning Intelligence in Greek Culture and Society를 보라. 나는 갑오징어, 문어 그리고 오징어들이 어떤 커다란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이 참고문헌을 크리스 코네리(Chris Connery) 덕분에 알았다. 다변형성(Polymorphy), 즉 그물이나 결속망을 만드는 능력, 그리고 교활한 지능은 그리스 작가들이 중시했던 특성들이다. “갑오징어와 문어는 순수한 아포라이(áporai)이며, 칠흙같이 어두운 밤의 비밀이다. 그것은 그들의 가장 완벽한 메티스(metis[잡종동물])적 이미지이다”(38) 이 책의 5장 ‘오르페우스적 메티스와 테티스의 갑오징어’는 툴루세 자체의 진행중이 순환상 주제들, 즉 함께-되기와 다변형성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우리에게 어떤 한 덩어리의 촉수(polúplokoi)처럼 보이는 연체동물의 유연함은 그들의 몸을 어떤 교차되는 네트워크, 즉 운동 활동성 결속체들의 살아 있는 매듭으로 만든다.”(159) 데티엔느와 베르낭의 그리스 연구에 따르면, 다변형체와 유연한 갑오징어는 바다의 원시적인 다성적(multisexual) 신들에 가깝다. 즉 그것들은 애매하고, 움직이며 계속 변하는 구불구불한 기복이 있으며, 닥쳐올 움직임을 지배하면서, 강렬한 색을 가진 파도를 따라 진동하며 몸을 숨기고, 어둠 속에 숨은 구름이 되며,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숙련되어 있으며 일반적인 인간이 턱수염을 가지고 있는 지점에 촉수들을 달고 있다.
[70]Haraway and Kenney, “Anthropocene, Capitalocene, Chthulucene.” 참조.
[71] Le Guin, “‘The Author of Acacia Seeds’ and Other Extracts from the Journal of the Association of Therolinguistics,” 175.
- Donna Haraway,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Duhram: Duke University Press, 2016), 47-57.
인류세는 쉬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이야기가 쉬운 이유는 인류세라는 개념이 근대성의 전략적인 권력관계와 생산관계에 새겨진 자연화된 불평등과 소외, 폭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말하기 쉬운 이야기인 이유는 우리가 이들 관계에 관해 생각하도록 전혀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제이슨 W. 무어 지음, 김효진 옮김,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갈무리, 2020, 274.
[인류세 개념이] 자본주의 초기 근대 기원을 삭제하는 것과 더불어 증기기관이 등장하기 오래전에 자본주의가 지구적 가연을 개조한 특별한 작용을 무효화시키는 것은 우리 정치 – 기후변화의 정치를 훨씬 뛰어넘어설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환경’정치도 너어서는 정치 – 에 상당히 중요하다. 우리가 어떤 위기의 기원을 개념화하는 방법은 그 위기에 대응하기로 선택하는 방법과 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 우리는 이상하게도 유럽중심적인 인류의 풍경으로 되돌아가면서 자원결정론과 기술결정론이라는 유서 깊은 관념들에 의존하는 인류세에 정말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자본의 끝없는 축적을 특별히 우선시하는 관계들로 형성된 역사적인 시대인 자본세에 살고 있는가?
이런 역사적 물음들에 대해 답변하는 방식이 현재의 위기에 대한 분석 – 그리고 반응 –을 결정한다.
- Ibid., 279-80
나는 이들 세기에 새로운 가치 법칙이 생성되고 있음을 볼 수밖에 없는데, 요컨대 이 사태는 두 가지 획기적인 운동으로 표현되었다. 한 운동은 자연을 영원한 것으로, 공간을 평평하고 기하학적인 것으로, 시간을 선형적인 것으로 구성한 지식체제와 상징체제의 번성이었다. 나머지 다른 한 운동은 (상품화 영역 안의) 착취와 (상품화 영역 바깥에 있지만 그 영역에 예속된) 전유의 새로운 재치였다. 이 후자의 운동(가치의 생산과 축적)에는 스스로 형성되지만 자신의 구성적 외부가 없다면 형성될 수 없는 것으로서 가치의 역설이 있다.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과 더불어 우리는 이 역설이 역사적으로 해소된 방식에 대한 실마리를 얻게 된다. 한편으로 자본주의는 상품화의 영역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동력의 착취를 중심으로 진전되는 문명이다. 다른 한편으로, 상품화 전략과 전유 전략은 미상품화된 자연이 아무튼, 공짜로 또는 매우 적은 비용으로, 일하게 되는 한에 있어서만 작동할 수 있다. 요약하면, 자본주의는 생명/일을 상품화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 오히려 미상품화된 생명/일의 ‘무임승차’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프론티어가 중요하다. (...) 20세기를 통과하면서 거대 제국과 국가들이 가장 먼저 행하는 일 중 하나는 세계의 지도를 제작하고, 세계를 범주화하며, 세계를 조사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확립하는 것이다. (...) 상품화를 가능하게 하는 프런티어 주도의 저렴한 자연 전유 (...) 훨씬 더 작은 일단의 (인간) 자연이 착취당할 수 있도록 (인간을 비롯하여) 저렴한 자연을 전유하는, 강압적으로 시행되었음이 틀림없는, 세계실천이 상품 체계(추상적인 사회적 노동의 장) 안에서 노동생산성을 향상하기 위한 결정적 조건을 지금까지 제공했다. 나는 이와 같은 추상적 사회적 노동과 추상적인 사회적 자연의 두 가지 운동이 (...) 자연을 조직하는 방법으로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펼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토대를 제공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 Ibid., 307-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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