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자기-결정권 그리고 기본 소득
*원문출처: RADICAL PHILOSOPHY 2.09 / Winter 2020-21
https://www.radicalphilosophy.com/article/life-is-mine
삶은 나의 것이다
- 페미니즘, 자기-결정권 그리고 기본 소득
크리스티나 모리니(Cristina Morini)*
영역: 오아나 파르반(Oana Pârvan)
나는 이 주제에 참여하면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 운동인 ‘논 우나 디 메노’(Non Una di Meno)**를 중심으로 페미니즘적 실천들, 기본 소득 그리고 ‘자기-결정 소득’ 개념 간의 관계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이 글은 자기-결정 소득이 돌봄의 사회를 촉진하고 지난 30년 넘게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의해 추동되어 왔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변화들에 대응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글은 코로나바이러스의 발발이 페미니즘 운동에 의해 강조되는 바,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복지 모델을 발전시키게 하는 필연성을 증명하고 있다고 논한다.
무엇이 자기-결정 소득인가? 논 우나 디 메노는 이것을 ‘자기-결정적이고, 보편적이며 무조건적인 기본 소득이자 직업활동과 시민권적 지위 또는 체류 허가와 관련 없는 기본소득’으로 정의한다. 이와 같은 기본소득은 경제적 자립을 보증할 것이며, 따라서 폭력적 상황(가정폭력 또는 일터에서의 폭력)에 노출된 여성을 지원하는 구체적 형식을 구성할 것이다. 보다 광범위하게 보면 젠더 폭력을 방어하고 착취, 노동 그리고 불안정성으로부터의 자율성과 자유를 제공하기 위해 이것은 모든 사람들 – 여성과 남성 모두 – 을 위한 수단이다.[1] 따라서 자기-결정 소득에 관한 아이디어는 그것이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특수한 사회적 범주들을 지목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여성들을 위해 그리고 모든 자율적이고 살 만한 삶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서, 실존적 불안정성을 가중시키려는 위협을 제거한다. 게다가 ‘자기-결정권’은 논 우나 디 메노에 따르면 소득의 결과이거나 목표일 뿐 아니라 그것의 수단이기도 하다. 즉 자기-결정과 해방은 그것을 주장하는 바로 그 행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 페미니즘 운동에서 기본 소득을 위한 주장은 그것의 핵심적인 상이한 욕망들과 삶의 패턴들에 놓인 새로운 변혁의 주춧돌이다. 사실상 자기-결정 소득은 돌봄과 사회적 관계, 근접 네트워크, 도시 공간성 그리고 살만한 환경에 대한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돌봄의 사회
이탈리아는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복지의 내파(implosion)를 어떻게 가속했는지를 보여주며, 기본소득이 왜 젠더 폭력에 저항하는 그리고 착취, 노동, 불안정성 그리고 성폭력의 위협에 저항하는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2] 팬데믹으로 인해 촉발된 경제 위기는 남성들 그리고 대부분의 여성들의 저항을 시험대에 놓았다. 이들은 그들 자신의 생물학적, 사회적 재생산의 요구들 대부분을 점점 더 많이 짊어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주제들과 주장들이 논 우나 디 메노의 핵심사항이 되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3월 8일[여성의 날-역자]은 많은 다른 국가들에서도 전세계 여성 파업의 날인데, 4년 연속으로 그 파업의 핵심에 자기-결정 소득에 대한 요청이 있다. 사실 이탈리아는 여성고용과 관련하여 유럽 국가들 중에서 최저치를 기록했다.[3] 페미니스트인 리디아 카티아 만조(Lidia Katia Manzo)와 알레산드라 미넬로(Alessandra Minello)는 최근 다음과 같이 논했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우리에게 젠더화된 노동 분업에 대해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이동제한 명령에 따라 부과된 돌봄과 노동 시간의 새로운 구성 결과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젠더화된 돌봄의 분할이 코로나바이러스 경험 이전에 불균형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돌봄 노동은 사회내의 모든 집단들을 통틀어 젠더 간에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심지어 고학력 집단들에서조차 그러했다. 이런 경우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눈에 띄게 더 많은 시간을 가사일에 투여한다.[4]
이탈리아에서 돌봄-관계 노동(care-related work, 부불 노동)은 전통적인 선들을 따라 분할된다. 유럽인들 중 루마니아 여성들과 더불어 이탈리아 여성들은 하루 평균 4.5 시간 일상적인 가족 노동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이탈리아 남성들은 가족 노동에 1.6시간을 쓴다. 게다가 이탈리아 여성들은 돌봄-관계 노동에서 가장 능동적인 반면, 남성들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덜 능동적이다. 임금 노동에서 여성들의 낮은 참여율을 고려할 때, 사람들은 가사일에서의 그 차이가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최근의 이탈리아 통계청의 데이터에 따르면, 여성들이 소득과 [일반적인] 노동에서 남성들 만큼 기여할 때조차, 가사일의 대부분에도 마찬가지로 기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가족 모델에서, 다른 구성원들을 돌보는 여성의 윤리적 그리고 사회적 의무들은 여성들이 스스로 돌봄의 필요성을 가지는 사람들로 인식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은 다른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인간들 간의 관계들을 재조명하는 사회의 일부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젠더화된 돌봄의 정의[6]는, 특히 코로나바이러스가 번진 기간과 같은 중차대한 시간에는 여성들이 가족들과 국가들 위해 돌봄을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모성적 돌봄[7]과 돌봄을 뒤섞는데 일조해 왔다.[8] 이는 ‘이중 수행’(double presence)라는 주제와 연결되는데, 즉 이탈리아 복지가 가족을 중심을 돌아가고, 따라서 어머니들와 딸들의 돌봄 노동이 공공 서비스에 의해 제공되지 않는 것으로 수렴된다는 것과 연관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복지민영화의 종속적인 과정의 구성요소가 된다.
자기-결정 개념은 정치적 상상력을 재활성화할 수 있다. 이탈리아적인 맥락에서 – 다른 많은 국가들에서도 – 그것은 재생산 과정과 관련하여 주체적인 선택을 강조한다. 사회적 재생산은 많은 이탈리아 남성들에게 여성 신체의 자연스러운 목표로 드러난다. 하지만 논 우나 디 메노의 여성들은 이와는 의견이 다른데, 이들은 본성과 생물학을 넘어서는 욕망에 따라, 그리고 돌봄 노동을 정치화하려는 기꺼운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 오늘날 사회-경제적 맥락들은 새로운 생산 패러다임이 주체성들과 차이들, 그리고 삶과 욕망을 노동으로 변환하는 것을 강조했다. 여성들의 노동에 있어서 불안정성은 임금 노동을 대체해 왔으며, 신체를 재생산 패러다임의 현행적 질료로 변형시키고 있다.[9]
전지구적인 페미니즘 운동은 삶, 시간 그리고 소득의 영역에 대한 그들의 투쟁과 주장에 집중하면서, 환경과 사회적인 것에 대한 방어에 힘을 쏟았다. 진단과 행동에 대한 페미니즘의 능력은 특별히 부불 노동의 크기와 착취의 가치 소유 안에서 사회적 재생산에 의해 획득되는 역할과 연결된다.
자기-결정 소득은 자기-규제적이고 자기-경영적인 사회적 맥락의 잠재성을 자유롭게 할 수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갈취와 협박(성적인 것을 포함하여)에 의해 부과된 의존성과 관리, 즉 과세부담과 시설화(institutionalisation) 너머에 주체의 자율성을 촉진할 수 있다. 기본 소득에 대한 그와 같은 이해를 수립하면, 평등성과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노동과 같은 개념을 재-상상할 만한 새로운 방식들을 구상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자본주의는 ‘정서의 방식’(a way of feeling)이 아니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착취의 가능한 원천들은 다양하다. 만약 우리가 자유로운 임금 노동의 일반화라는 관점에서 착취의 형태를 바라보면, 오늘날 모든 노동은 비-생산적인 방식으로는 표면적으로 소모되어 버리는 것으로 논할 수 있다. 동시에 모든 행위들이 생산적이며 따라서 축적의 동력이다. 우리는 임금 고용 쇠퇴의 시대에 잉여가치의 일반화의 역설을 목격하고 있는 셈이며, 현대 자본주의의 결정적인 긴장이 산 노동의 탈구를 향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역설을 명확히 하기 위해 나는 노동과 시민권(citizenship)의 렌즈를 사용할 것인데, 이것들은 가부장적인 사회에 의해 표명되어 왔기 때문이다. 위에서 우리는 또한 어떻게 허약성의 차원과 사회적 위기가 오늘날 커져가고 있는지에 대해 해명해 왔다. 정확히 말해 이것은 임금노동의 틀거리와 그것과 밀접하게 묶여 있는 시민권과 연결된다. 이 둘은 모두 생산 패러다임의 급진적인 전환에 의해 그리고 세계화와 연결된 동력학에 의해 야기되는 현상이다. 이 모든 것은 불안정성이라는 패러다임을 통해 발생한다. 이는 불안정한 여성들과 남성들의 노동이 공히, 언제나 여성적 노동으로 정의된 바, 파편화되어 있음을 나타내며, 비록 이것이 이제 인구의 대부분으로 생각된다 해도, 결국에는 다시 한 번 시민권 바깥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여성만 속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가이 스탠딩이 말하는 바, 불안정 노동자들이 시민이 되기 위한 요청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10] 하지만 실업이라는 탈산업화 과정에서의 몰락으로 한탄하는 대신에 우리는 ‘더 적은 일, 더 더 많은 시간’이 가지는 열린 가능성들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제한 없는 기본 소득은 핵심이다. 이로써 우리는 욕망이 억압받지 않는 세계를 환기시킬 것을 겨냥하며, 자본주의를 단순한 경제적 힘으로만 고려하는 세계관을 바란다.
만약 자기-결정적인 삶,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삶 그리고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삶이 아니라면, 무엇인 좋은 삶인가?[11] 이와 같이 질문함으로써, 우리는 자원들의 분배와 불평등들의 증가라는 두 가지 모두의 관점에서 사회체들로 극적으로 되돌아가는 몇몇 문제들을 해명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어떤 동력에 의해 생산되는 폭력적인 모순들 – 여성과 모든 타자/상이한 주체들(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이주민) - 이다.[12] 임금노동과 생존 차원의 침식에 직면하게 된 현대적인 주체에 관한 불안정 존재론 주위로 어떤 성찰이 형성되고 있다. 정확히 말해 그러한 힘은 자본의 전유 능력과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의해 가능해지는 역동성을 통해 생성된다. 그러므로 최근의 생산적 변형에 의해 촉발된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법과 복지를 지키는 문제는 페미니즘 운동에 가장 긴급한 질문을 제기한다.[13] 가까이서 살핀다면, 우리는 비대칭적인 역사적 노선을 따를 수 있으며 시민권과 시민 자체에 대한 권리라는 개념이 어떤 논쟁적이고 풀리지 않는 문제요소들을 구성하는 가치 체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상 시민권이란 어떤 신체적인 인물이라는 조건 – 시민이라고 불리는 - 으로 경도되는데, 이들은 국가에 의해 인지되는 자로서 시민권과 정치에 대한 완연한 권리를 가진다. 오랫동안 ‘시민권을 가진 자들의 소득’이라는 표현은 이탈리아에서 정확히 소득에 대한 권리 주변에 구성된 공동체에의 소속이라는 측면과 연결되어 쓰여져 왔다.
주요한 혁신이란 복지국가가 단순히 19세기에 비공식적이고 연대-중심적인 접근과 더불어 탄생한 사회의 국가법적인 비준으로서의 복지국가에 의해 부여된 사회적 권리들의 도입에 의해 야기되었다는 점을 논할 수 있다는 것이다.[14] 사실상 이것은 어떤 중대한 전환인데, ‘국가주체의 시장 가치를 통해 측정되지 않는 실재 소득에 대한 보편적 권리’에서 사회적 편익의 변형을 함축한다.[15] 사회계약에 관한 생각은 산업화와 더불어 전진적으로 탄생했으며 – 이것이 포드주의 사회협약으로 불리워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그것의 참조점으로 ‘생산적 계급들’, 즉 임금노동자들만을 취한다. 여성들(그들의 ‘노동’은 보이지도 계산되지도 않는다)은 오로지 남성 노동자의 매개를 통해서만 복지권리에 접근할 수 있다. 캐롤 페이트먼(Carole Pateman)은 이 주제에 대해 많은 글을 썼는데, 그녀는 정확히 복지가 어떤 식으로 생산/재생산 이분법에 기반하여 수립되는지를 지적한다. 사실상 복지는 이러한 기준에 따르는 수익자로서의 노동자들의 임금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노동자의 아내는 이러한 권리를 오직 결과로서만 향유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성적, 심리적 그리고 정서적 봉사들을 수반하는 그녀의 가사일과 돌봄 노동이 보상받지 못하고, 사실상 그녀가 ‘임금 받는 농노신분’을 감당하고 있으며, 노동자 생산성의 실제적인 비밀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16] 70년대 맑스주의 자율주의 페미니즘은 이미 노동자의 임금은 시장에서 이와 유사한 돌봄 노동을 충분히 아우르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러한 일들을 수행하는 여성의 자리는 전체 시스템의 균형을 위해 관건적이다.[17] 정서 노동의 형태를 취하는 이 일련의 행위들은 앨리 혹실드(Arlie Hochschild)[18]가 ‘심층 행위’(deep acting)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웬디 챕키스(Wendy Chapkis)[19]와 엘리자베스 번스타인(Elizabeth Bernstein)[20]은 이를 다시 내가 내면성의 경제(economy of interiority)[21]라고 부르는 것과 공명시킨다.
오늘날 이러한 틀거리에서 시작한다면, 관계적인 생명-인지 자본주의(bio-cognitive capitalism)에서 부적합한 것이 생산적인 임금 노동 자체의 개념이라는 것이 점점 더 명확해진다. 이에 따라 나는 우리에게 익숙한 또는 지배의 위계를 되비추는 언어에서 공유된 의미를통해 우리가 안다고 믿는 노동 개념이 임금 관계로부터 나온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이윤과는 달리 감소중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익숙한 노동 개념은 또한 자율적 형식과 인민의 해방이라는 형식에 대립하는 내면화된 모델들과 동조한다.
현재의 경제적 폭력
비록 오늘날 우리가 포스트-노동 사회의 지평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지만, 과거 몇 년간 좌파는 불행히도 상상력과 전략 둘 모두가 결핍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근직 고용자들의 세계를 지속해서 증진시켰고, 전통적인 성적 조직화들을 구조화해 왔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잠재적으로 비-소외적일 수 있는 노동의 형태들(재생산 노동과 자율적으로 선택되는 다른 행위들을 포함하는)을 간과한다. 이는 또한 이전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그리고 노동당의 분석과 주장에서 중심을 차지했던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개념도 무시한다.[22]
유럽 연합이 이미 1992년에 최소소득의 도입을 이미 제안했지만(94/441 CEE), 이탈리아는 그리스와 더불어 소득 보조금의 기준이 없는 유일한 유럽 국가다. 2018년 이래 권력을 잡고 있는 중도-좌파는 기본적으로 빈곤 관리의 척도에 따라 단지 포괄적 소득만을 도입했을 뿐이다. 사실상 정부는 복지와 사회적 포용의 대안적 형식을 향해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았으며, 국가의 노동형태 변화에 따른 긴급한 법령을 시행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유럽의 중심에서도 의심할 여지 없이 빈곤의 다양한 형태들이 증가하는 최근의 맥락에 대한 주의를 환기함으로써[23], 우리는 국가주체들 간의 상호의존성에 관한 감각을 보존할 수 있다. 이러한 상호의존성은 정확히 신자유주의가 전통적인 임금노동의 경계를 넘어 뻗어나가는 불안정성의 일반화를 통해 부과한 불확실성이 지배함에 따라 사라져 갔다.
현대 자본주의는 차이화와 전진적인 분산정책을 확장함으로써 삶의 공간을 지배한다. 주디스 버틀러가 올바르게 논했던 것처럼[24] 이것은 인구의 증가부분에 대해, 누군가의 건강을 돌보고, 공부하고, 동성애를 허용하며, ‘좋은 삶’을 살기 위한 공간이다. [하지만] 그러한 지배는 전지구적 환경운동과 페미니즘 운동들이 삶에 대해 주장해 오는 바, 사회적 재생산과 생존의 조건들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 운동들은 하나의 ‘떠오르는 대륙’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여기서 페미니즘 투쟁은 이성애적인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들의 착취와 역사적이고 ‘자연스러워진’ 차별의 필연성에 반대하는 주장들을 표명함에 있어서 최상의 역할을 한다.[25]
우리가 논하고 있는 것은 최근에 인민의 소유권(그들의 젠더 그리고/또는 성적 지향과는 상관없이)을 전반적으로 취하려는 시도로서,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발전적 모델의 폭력성에 반하는 투쟁들에 대한 것이다. 오늘날 이윤이 추출되는 기계-신체는 하나의 특이성인데, 이는 사회적 인간, 즉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통해 상호연관된 환경 안에 깊숙이 들어 있다.
이러한 생명-경제적 모델은 개체들의 노동 능력 뿐 아니라, 그들의 생명적, 지성적, 성적, 정서적, 감응적이고 상상적인 에너지들조차 점증적으로 침범하는 방식 안에서 구체화된다. 정서적 생산(희망, 계획, 개인적 선택들)은 개체적으로 직접 생산되는 어떤 경제적 요소로 향하는 정서적 잉여로 번역된다. 주체들은 근심, 공포, 불안정성 그리고 곧 닥칠 전쟁들에 의해 점점 더 영향을 받는 매일매일의 삶 안에서 어떤 항구적으로 극적인 본성을 마주하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양극화된, 따라서 예측가능한 방식으로 행위하고자 한다. 행동에 있어서 예측가능성이 많아질수록, 사회적 행위의 예측에 있어서 재정적으로 능한 사람들에 의해 경제적으로 착취당할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 이를테면 플랫폼 자본주의는 그러한 것을 아주 잘 해낸다.
수잔나 주보프(Shoshana Zuboff)의 설득력 있는 묘사에 따르면, 감시 기업인들(surveillance entrepreneurs)(특히 구글과 페이스북)은 우리의 노동만이 아니라 삶에 대해 소유권을 가진다.[26] 달리 말해 직접적으로 이익이 될 수 있는 것은 삶/생명인데, 그것은 정확히 임금노동이 비가역적으로 보이는 어떤 위기를 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들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바, 가장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노동의 사회화를 수용하는데, 이는 특별히 공식적인 임금과 관련해서 어떤 협상도 필요 없는 이윤 때문이다. 20세기의 틀은 노동자의 수행과 고용주가 그것에 보답해아 하는 의무 간의 연결에 기반하고 있었는데, 이는 지금 사라져버렸다. 따라서 사회적인 이해관계자들에 관한 인식을 포함하는 단체교섭 체계, 그것과 연결되는 공적 공간과 그것의 대표성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사용하는 상이한 장치들에 의해 생산되는 변화 안에, 그리고 관계 자체의 상품으로의 양태 변화와 더불어 언어-관계적 생산들도 상품화된다는 것 안에 놓여 있다. 여기에 재생산이 생산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지금까지 드러난 생산 패러다임의 역사적 변화가 놓여 있으며, 노동가치론은 새로운 영역들과 관련된다.[27] 이것은 위에서 언급된 사회적 네트워크, 금융화 과정과 복지체제의 민영화가 가지는 기능으로 인해, 관점들의 이상한 역전을 수반한다.
현대의 생명자본주의에 의해 산출되어 온 이 언어적/기호적/관계적 상품들 안에 고정된 가치는 시간 또는 다른 말로 해서 삶[생명]이다. 멜린다 쿠퍼(Melinda Cooper)의 분석에서 공식화된 것에 따르면, 삶은 잉여가치다.[28] 달리 말해 사회적 재생산의 사슬 – 관계성, 교환, 돌봄, 사람들의 상호 의존성, 환경과의 관계들에 의해 형성되는 – 은 새로운 생산 체제 내부에서 어떤 주도적인 역할을 요청하는 것이다.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생물학적 재생산의 내용과 형식은 감응들과 욕구들로 이루어진 삶과 그것의 생성에 불가분하게 상호연관되고, 부가되며, 겹쳐지면서, 생명-자본주의에 의해 가공되는 원재료(raw material)임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이런 식으로 삶[생명]은 바로 원재료와 동의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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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역주]크리스티나 모리니는 독립 사회연구자이자 저널리스트로서 Bin(Basic Income Network, 기본소득네트워크)의 이탈리아 지부 창립 멤버이다. 그녀는 여성의 노동 조건, 즉 노동과 젠더 연구에 있어서 변형 과정에 관련된 주제에 집중하면서 이탈리아 사회 운동분야에서 활동한다. 그녀의 여러 출판물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다음과 같다. “The feminization of labour in cognitive capitalism”, in Feminist Review, Volume 87, Number 1, 2007, pp. 40-59; “Per amore o per forza. Femminilizzazione del lavoro e biopolitiche del corpo”, Ombre Corte, Verona, 2010; “Life put to work: towards a theory of life-value”, Ephemera: web-magazine, n. 8, may 2011; “Social reproduction as the paradigm of the common. Reproduction, antagonism, production crisis” in O. Garcia Agustin, C. Ydesen (eds.), Post-crisis perspective, Peter Lang, 2013; “Precarious passion or passionate precariousness?” (with EmilianaArmano e Kristin Carls) in Quand Passion et precarite se rencontrentdans les metiers du savoir, RS&A Recherchessociologiques et antropologiques, Volume XLV, numero 2, 2014; “Autonomy, free labor and passions as devices of creative capitalism. Narratives from a co-research in journalism and the editing industry” (with E. Armano e K. Carls), in G. Cocco and B. Szaniecki (edited by) Creative capitalism, multitudinous creativity: radicalities and alterities, Lexington, New York, 2015, La rivoltadellacooperazione. Sperimentazioni sociali e autonomia possibile, Mimesis, Milano, 2018 (wth. G. Giovannelli, A, Fumagalli). “Lo sciopero delle donne. Lavoro, trasformazioni del capitale, lotte”, a cura di Alisa del Re, Cristina Morini, Bruna Mura, Lorenza Perini (Manifestolibri, Roma 2019)
**[역주]논 우나 디 메노(Non Una di Meno)는 번역하기 좀 애매한 단어인데, 영어로는 ‘Not One More’다. 이를 운동의 대의에 맞춰 번역하면 ‘한 사람도 잃을 수 없다’ 정도가 된다. 페미니즘에 기반한 이 조직은 2015년, 22살의 사라 디 피에트란토니오(Sara Di Pietrantonio)가 그녀의 전남자친구에 의해 불타 죽은 사건이 있은 후에 시작되었다. 이 그룹은 ‘니 우나 메노스’(Ni Una Menos)의 선례를 따랐는데, 이것은 일찍이 아르헨티나에서 시작된 페미니즘 운동이다. 논 우나 디 메노스는 이탈리아에 있었던 다양한 기존의 페미니스트 집단들 출신의 행동주의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의 관심사는 매우 넓다. 이들은 남녀동일임금, 동등한 사회보장 그리고 낙태권을 옹호하면서 일터에서의 성폭력과 젠더 폭력에 반대한다. 이 운동의 상징은 러시아 인형(마크료시카)이다. 이 인형은 큰 여성 인형 안에 다른 작은 여성인형이 계속 들어 있는 형태다. 이것은 이탈리아에서 라틴아메리카로 그리고 전세계로 퍼져가는 운동의 동력을 상징한다. Duker Trinity Collage of Arts & Sciences 홈페이지 참조. https://socialmovements.trinity.duke.edu/groups/non-una-di-meno
[1] https://www.bin-italia.org/nonunadimeno-un-piano-redditoautodeterminazione/
[2] Non Una di Meno, Abbiamo un piano. Piano femminista contro la violenza maschile sulle donne e la violenza di genere (2017), 29, accessed 11 January 2021, nonunadimeno.wordpress.com
[3] 단지 42.1%의 여성들만이 고용되며 56.2%는 여성들의 노동관련 활동을 나타낸다. Fondazione Censis, Respect. Stop Violence Against Women, Summary Report, Rome (November 2019), 6, accessed 14 January 2021, https://www.censis.it/sites/default/files/downloads/Sintesi_def_0.pdf
[4] . Lidia Katia C. Manzo and Alessandra Minello, ‘Mothers, Childcare Duties, and Remote Working Under Covid-19 Lockdown in Italy: Cultivating Communities of Care’, Dialogues in Human Geography 10:2 (June 2020), 120.
[5] Istat, I tempi della vita quotidiana. Lavoro, conciliazione, parità di genere, benessere soggettivo (Roma: Istituto nazionale di statistica, 2019), https://www.istat.it/it/archivio/230102
[6] Nel Noddings, Caring: A Feminine Approach to Ethics and Moral Education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
[7] Silvia Federici, Wages Against Housework (Bristol: Power of Women Collective and Falling Wall Press, 1975), accessed January 2021, https://caringlabor.files.wordpress.com/2010/11/federici-wages-against-housework.pdf
[8] Cristina Morini, ‘Take Care: Society of Care and Selfdetermination Income’, Cogut Institute for Humanities, Brown University, accessed January 2021, https://blogs.brown.edu/humanities/archives/344
[9] See Sandro Mezzadra, ‘How Many Histories of Labour? Towards a Theory of Postcolonial Capitalism’, tranversal texts (January 2012), https://transversal.at/transversal/0112/mezzadra/en
[10] Guy Standing, A Precariat Charter: From Denizens to Citizens (London: Bloomsbury, 2014).
[11] Judith Butler, A chi spetta una buona vita? (Who gets a good life?) (Milan: Nottetempo, 2013).
[12] Monique Wittig, Il pensiero eterosessuale (Verona: Ombre Corte, 2019), 49–50; The Straight Mind and Other Essays(Boston: Beacon Press, 1991).
[13] Nancy Fraser, Fortunes of Feminism. From State-Managed Capitalism to Neoliberal Crisis (London: Verso, 2013).
[14]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 (New York: Rinehart & Company, 1944).
[15] T.H. Marshall, Citizenship and Social Class and Other Essay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0).
[16] Carole Pateman, The Sexual Contract(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8); Carole Pateman, The Disorder of Women: Democracy, Feminism, and Political Theory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9).
[17] Maria Rosa Dalla Costa and Selma James, The Power of Women & the Subversion of the Community (Bristol: Falling Wall Press, 1972); cf. Silvia Federici, Revolution at Point Zero: Housework, Reproduction, and Feminist Struggle (Oakland, CA: PM Press, 2012); see also Antonella Picchio and Giuliana Pincelli, Una Lotta Femminista Globale: l’esperienza dei gruppi per il Salario al Lavoro Domestico di Ferrara e Modena [A Feminist Global Struggle: the experience of the groups for Wages for Housework in Ferrara and Modena] (Milan: FrancoAngeli Press, 2019).
[18] Arlie Russell Hochschild, The Managed Heart: Commercialization of Human Feeling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3).
[19] Wendy Chapkis, Live Sex Acts: Women Performing Erotic Labour (New York: Routledge, 1997).
[20] Elizabeth Bernstein, ‘Sex Work for the Middle Classes’, Sexualities 10:4 (October 2007), 473–88.
[21] Andrea Fumagalli and Christina Morini, ‘Anthropomorphic Capital and Commonwealth Value’, Frontiers in Sociology (April 2020).
[22] Standing, A Precariat Charter.
[23] 이 연구에서 공적으로 접근 가능한 데이터베이스가 분석된다. 이 데이터는 H2020-ICT-2015, ICT10—Collective Awareness Platforms for Sustainability and Social Innovation (CAPSSI), Grant Agreement No. 687922: Title: PieNewsCommonfare과 같은 곳에서 발견될 수 있다.
[24] Judith Butler, Notes Toward a Performative Theory of Assembl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25] Cristina Morini, Le pillole azzurre del capitale [The Blue Pills of Capitalism] (May 2016), Effimera.org, http://effimera.org/lepillole-azzurre-del-capitale-cristina-morini/
[26] Shoshana Zuboff, The Age of Surveillance Capitalism: The Fight for a Human Future at the New Frontier of Power (New York: Public Affairs, 2019).
[27] Cristina Morini and Andrea Fumagalli, ‘Life Put to Work: Towards a Life Theory of Value’, trans. Emanuele Leonardi, Ephemera: Theory & Politics in Organisation 10:3-4 (2010), 234–52.
[28] Melinda Cooper, Life as Surplus: Biotechnology and Capitalism in the Neoliberal Era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