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도 아니고 서평도 아닌 것이

코스모테크닉스의 발명을 향해

Nomadia 2021. 4. 17. 14:11

코스모테크닉스의 발명을 향해

- 허욱 지음, 조형준, 이철규 옮김,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알고리즘 시대 인문학의 새로운 시작: 코스모테크닉스 시론, 새물결, 2019.

 

 

1. 기술로써 과정을 가속하라.

좌파 가속주의 그룹에 속한 로빈 맥케이(Robin Mackay)와 아르멘 아바네시안(Armen Avanessian)은 그들의 편저 서문에서 좌파 급진주의자들이 자본주의 경제를 한 무더기의 숫자로 파악하면서 새로운 기술들에 대해서는 무식할 뿐이라고 빈정거린다.[1] 다시 말해 그 한 무더기의 숫자만 잘 조작하면 혁명이 일어날 것처럼 허풍을 떨지만, 정작 적들의 무기를 자기의 무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맑스-레닌의 아주 간단한 교훈조차 무시한다는 것이다.

 

허욱(Yuk Hui)은 가속주의자들이 공유하는 들뢰즈-과타리의 니체주의 모토, 경과(Prozeß)를 가속하라”[2]라는 말을 신뢰한다. 이때 가속의 조타수는 의심할 여지 없이 기술(technic)이다. 허욱은 들뢰즈와 시몽동, 토스카노, 그리고 스티글러의 종합을 시도하는 야심찬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흥미로운 부분이므로 좀 길지만 인용해 보자.

 

만약 우리가 들뢰즈, 시몽동의 분석과 토스카노의 독해 그리고 스티글러를 따른다면, 기술은 강도들을 그 목적이 미리 정의될 수 없는 어떤 과정을 향해 증폭하고, 그것을 지도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만약 그와 같은 가속을 향한 기술적 증폭 과정이 정치학의 핵심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기계류와 횡단개체들 사이에 내적 공명을 탐색하는 정치학, 또는 토스카노가 발명의 정치학라고 부르는 그런 정치학이 된다. 그러므로 (...) 새로운 기술들, 즉 집단의 잠재력들의 공명과 증폭을 찾아내는 그런 기술들을 발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기술적 대상들은 개체와 집단를 횡단하는 횡단개체적 관계들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증폭의 프로그램이 가능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기술적 대상들에 의해 매개되는 네트워크 안에서다. 이러한 사유 노선은 오픈 소스 운동, 탈중심화, 익명성과 암호해독과 같은 행동주의 안에는 여전히 결여된 것이다. 이와 같은 활동들은 대안을 건설하기 위해 매진하지만, 상업적 기술들로부터 작동 모델들을 전수 받은 것들이다. (...) 그러므로 이것들은 스스로를 현존하는 모델들의 미미한 증강에 제한한다. (...) 만일 우리가 저항’ - 이 단어가 가속과 비교해서 아무리 진부하다 하더라도 - 의 가능성을 재공식화하고자 한다면, 그때 그것은, 시장과 통제의 정치학에 의해 광범위하게 추동되는 혁신(innovation)의 정치학에 반하는, 발명의 정치학이 될 것이다.[3]

 

논문의 결론에 해당하는 이 단락에서 흥미로운 것은 허욱이 온건한 행동주의와 트랜스-휴먼(trans-human)적인 증강 기획 둘 모두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속을 위해서는 뭔가 끊임없이 소란을 일으키면서 트리비얼리즘(trivialism)에 빠지거나 막무가내로 기술의 도구성을 찬양하면서 인간의 두뇌 데이터가 업-다운로드 되고 이리저리 코딩되는 사태가 요구되지 않는다. 문제는 가속을 증폭하면서 저항의 가능성을 재배치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본주의의 포획장치를 가볍게 넘어서는 어떤 발명의 정치에 의해 가능해진다. 물론 이 발명의 정치는 전문 정치가나, 형이상학자 또는 아카데믹한 두뇌들이 엔지니어들과 횡단개체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할 때 가능해질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기술을 습득할 능력이나 시간이 없다면, 그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집단과 공명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허욱의 논의가 기반하는 전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리오타르 이후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되어온 근대의 해체 또는 재구성이다. 왜냐하면 근대성은 기술에 의해 가능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근대성을 형성하는 핵심으로부터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욱에 따르면 이전의(정확히 말해 그의 스승인 스티글러 이전의) 사상가들은 이 해체와 재구성의 기획에서 기술의 중요성을 흔히 간과하거나 약화시킨다. 게다가 테크놀로지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뚜렷한 유럽중심주의는 동양, 특히 중국 사상을 애초에 역사적 일정에 산입시킬 수 없도록 만든다.

 

2. 세 가지 사유 구도

허욱은 아마도 꽤 오랫동안 이 문제의식을 붙들고 있었다고 보여지는데[4] 사실 이 책이 의도하는 기획은 좀 전에 인용한 그 논문의 정치철학적 관점과도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허욱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유의 구도를 견지하면서 책 전체의 논지를 전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1. 테크놀로지 개념은 상대적인 것으로서, 인간이 환경과 교전(encounter)하는 가운데 야기되는 우주론적 또는 존재론적 조건에 따라 달리 표현된다. 이것을 코스모테크닉스(cosmotechnics)적인 기술 이해라고 부른다.
2. 테크놀로지는 근대성의 무의식으로서, 이것이 표면화되면서 근대성은 파열되며, 이를 기반으로 비로소 포스트-모던이 가능해진다(또는 가속된다).
3. 정치(철학)와 사회학, 형이상학과 기술이 횡단되면서 인류세[5]의 위기를 돌파할 새로운 테크놀로지적 개체 또는 주체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를 위해 기술이 조타수가 되고 발명의 정치가 방향타가 되어야 한다)

 

우선 ‘1’에 관해 말해보자. 허욱은 서양의 프로메테우스주의, 테크놀로지의 글로벌한 헤게모니”(104)를 긍정하는 논의를 당연히 거부한다. 이러한 프로메테우스주의의 귀결은 서구중심의 자연철학이나 인간론의 발판일 뿐이고, 사실상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는 이런 식의 관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양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이와는 다른 방식의 배치’(허욱은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가 이루어져 있으며, 이에 따라 환경과의 상호작용도 달라지므로 관점의 역전이나 변환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코스모테크닉스 개념은 테크놀로지에 있어서 복수의 역사를 다시 열 수 있게 한다. 또한 여기에 동양적인 테크놀로지 역사성이 전경화함으로써 자본주의적인 증강프로그램과 같은 동질적인 것-되기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복수적인 저 역사성에 해당되는 전통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에피스테메로 변형시켜야 할 것이다(389 참조). 이를테면 하이데거식의 존재-물음은 이때 기술-물음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세계--존재로서의 현존재가 도구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분석은 여기서 단지 형이상학적인 횡설수설처럼 되어 버릴 지도 모른다. 허욱이 하이데거를 존중하는 것은 그가 기술-물음을 던질 수 있도록 존재-물음을 길어올렸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허욱에게 하이데거는(물론 다른 모든 사상가들까지) 보다 앞서 가지 못한 실패한 선배 정도이지 않을까?

 

이때 하이데거를 대신해서 스티글러가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스티글러는 위에서 논한 ‘2’의 내용을 뒷받침한다. 앞서 말한 기술-물음은 스티글러의 경우에 기술 망각이라는 주제에서 비롯된다. 서양철학의 심원에는 존재-망각 너머 기술-망각이라는 더 깊은 레테의 강이 흐른다. 하이데거에게 존재 망각이 존재한다면 스티글러에게는 마찬가지로 기술 망각이 존재한다”(304)는 것이다.

 

노예 소년의 상기anamnesis와 관련된 공간적 대리보충물[모래 위에 그리기-인용자]을 플라톤이 억누른 사례 이후 기입inscription으로서의, 따라서 시간을 지탱하는 것으로서의 기술은 근대적 무의식이 되었다. 즉 기술은 근대() 내부에서 결코 주제화되어본 것이 없지만 근대()에 대한 이해 방식과 그것에 대한 지각 자체를 구성할 정도로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 테크놀로지의 무의식이 가장 비가시적인, 하지만 가장 가시적인 존재이다. 하이데거 말대로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코기토에게 세계를 착취할 수 있는 의지와 자기 확신을 부여한 것이 이 테크놀로지적 무의식이었다(297).

 

이러한 테크놀로지적 무의식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개념이 바로 3차 다시당김[retention, 파지]’. 후설에게서 보이는 1차 다시당김(예컨대 음악의 선율)2차 다시당김(선율을 통해 그 음악을 기억해 내는 것)3차 다시당김(기술, 즉 음향기기들)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여기서 허욱이 말하는 바, 메논에서 소크라테스의 노예 소년이 상기’(2차 다시당김)를 통해 삼각형(1차 다시당김)을 그려낼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흔적이 새겨지는 땅바닥, 그리고 도구로서의 막대(3차 다시당김). 이런 것들은 아주 매번 철학자들의 시야에서 슬몃 사라져 버린다.

 

3차 다시당김으로서의 기술은 따라서 모든 조건의 조건이며 기술망각은 존재망각보다 더 근본적인 것임에 틀림없다(304 참조). 이렇게 기술 망각이 드러남으로써 근대성은 종언을 고한다. 다시 말해 여기서 테크놀로지는 인간적인 보충물이나 세계 안에 도구적인 관계에만 속하는 어떤 장치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기술-물음이란 단순히 기술학의 분과 속에만 존재하는 기능요소가 아니라 존재-물음보다 더 심오한 조건이 된다. 따라서 철학은 마땅히 기술-물음을 통해 새로운 형이상학, 그리고 새로운 코스모테크닉스를 창조해야 한다. 이때 새로운 코스모테크닉스가 의미하는 바는 확실히 다양성을 포함할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우주론(프톨레마이오스에서부터 노자와 장자에 이르기까지)도 포함한다. 이른바 코스모테크닉스의 복수성과 리듬의 다양성에 자기를 열어야”(359) 한다는 주장은 이와 같이 공시적인 복수성 뿐 아니라 통시적인 리듬의 다양성까지 포괄한다.

 

하지만 복수성과 다양성을 긍정한다는 것이 무턱대고 받아들여서 용광로 속에 녹여낸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순진한 상대주의적인 수용이 아니라 널리 기술과 테크놀로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범주들을 무효화하고 다시 만드는 것이다”(359) 여기에 중국적인 코스모테크닉스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역할은 동서양이라는 이분법에 기반하여, 소위 동양의 기-(-)와 서양의 질료-형상을 뒤섞거나 유사성을 강조하는 방식은 아니다.[6] 그것은 범주를 무효화하기는커녕 애초부터 유비불가능한 개념들의 외관을 짜깁기하여 단어들의 잡탕을 만드는 것, 사변적 관념론”(111)이기 때문이다. 용어들은 코스모테크닉스의 로도스가 아니다. 우리가 뛰어야 할 곳은 에르곤(활동, 기능, 산물)으로서의 기술의 물질성”(111)이다. 다시 말해 관념론이 아니라 유물론, “물질의 가능성을 한계까지 밀고 나가는 유물론이다. 유물론적인 개념의 창조, 유물론적인 발명의 정치.

 

위의 ‘3’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기술와 여타 영역들의 횡단은 바로 횡단개체적(transindividual) 정치와 주체의 탄생을 미리당김(protension, 예견: 후설의 용어)의 형식으로 고지한다. 이때 미리당김은 위에서 설명한 다시당김[파지]과 마찬가지로 세 번째 유형, 즉 제3차 미리당김을 산출한다. 이것은 기술에 의해 가능해진 알고리듬 형식의 재귀성을 통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때 기술은 일단 발명되면 스스로의 재귀성에 의해 생산과 재생산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허욱이 그의 다른 저서인 재귀성과 우발성(Recursivity and Contingency)에서 언급한 바를 참조해 보자.

 

디지털 시대의 자본은 알고리듬들과 디지털 네트워크에 의해 가동될 수 있는 어떤 재귀적 형식을 취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회생/재생산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회생은 어떤 선형적 축적이 아니다. 이것은 무한, 즉 축적과 발전의 궁극적 목표로 향해 가는 그 도상에서 우발성을 재귀적으로 극복(통합에 의해서든, 또는 제거에 의해서든)한다. 이것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기술은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자본의 비판이란 근본적으로 기술의 비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에 관한 많은 구체적인 예들을 발견할 수 있다. 구글은 거대한 재귀적 기계로서, 유저들의 모든 데이터를 끌어 모음으로써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 우리 환경이 센서들과 인터렉티브 기계들에 의해 재귀적 알고리듬에 의해 둘러싸여 있을 때, 실제적 포섭은 사용자가 어떤 재귀적 알고리듬으로 취급되는 새로운 매커니즘을 채택하고, 또 다른 재귀적 알고리듬의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시몽동의 어휘를 가져와서 이 과정을 주조(molding) 대신 변조(modulation)라고 부른다.[7]

 

유물론적 의미에서 기술적 대상의 가능성이란 이와 같이 재귀성을 통해 우발성을 극복해가는 과정에 놓여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비판은 기술비판이고, 기술 비판은 이 재귀성의 가장 약한 고리에 대한 비판일 수밖에 없다. 이 와중에 인류세의 위기는 돌파될 것이다. 이것은 무모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사실상 우리의 일상이 비로 기술적 대상들의 실존과 그 작용을 증명한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나와 있다시피, 그 작용의 범위는 대상들 자체의 재귀적 알고리듬 뿐 아니라, 거기 인간이 실제적으로 포섭되고 알고리듬의 한 지절로 작동하는데 까지 이른다. 스마트폰은 바로 이 실제적 포섭의 알고리듬이 극대화된 좋은 예이다. 이로써 기술적 대상의 재귀성이 환경 안에 인간을 포섭하여 변조하는 과정의 한 순환이 완성된다. 정확히 말해 이것이 이른바 포스트-모던적 상황이다.

 

따라서 리오타르적 기획, 즉 근대성의 종언이라는 기획, 또는 하이데거적인 기획, 즉 형이상학의 종언이라는 기획은 지금 이 시대의 두 문제축이며, 이를 해결하는 것은 기술-망각을 재인식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개념은 단지 환상일 뿐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다. (...) 근대()의 종언은 이 환상의 재-인식이다. 역사 속에서분만 아니라 역사성 속에서도 인간[세계]화를 조건 지은 것이 바로 기술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따라서 근대()의 종언은 이 종언을 명확하게 선언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를 재정식화하는 데 있다”(311-312). 수레의 발명에서부터 증기기관까지, 그리고 AI에 이르기까지 기술은 플라톤의 노예소년이든 플라톤 자신이든, 스스로 발딛고 선 (플라톤이 그토록 경멸한) 손노동과 생태적 자연의 노동을 망각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항상 인공적이고 자연적인 대상들에 둘러싸인 잡종적 환경 안에서 살아 왔다.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은 두 개의 분리된 영역이 아니며, 더군다나 인공적인 대상이 단순히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도구인 것만도 아니다. 이와 달리 인공적 대상들은 인간적 경험과 실존을 조건짓는 역동적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말해 인공적인 것이 끊임없이 더 큰 구체성을 향해 전개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그것의 특유한 역사적 조건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이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milieu)도 역시 변화해 왔다. 비디오테이프는 유투브 비디오에 의해 대체되었으며, 저녁 초대는 더 이상 편지를 통해 전달되지 않는다. 전화 사용은 거의 사라지고, 이메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페이스북 행사초대 기능은 더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대상들은 기본적으로 데이터이고, 공유가능하며, 통제가능하다. 그것들은 가시적이건 비가시적이건 간에 시스템의 환경설정(configuration)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8]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체계의 알고리듬적 재귀성은 소위 문명이라고 불리워지는 인공적 환경이 어떤 필연성 또는 스토아적 의미에서의 운명(fatum, 이법理法)이 될 때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이 힘은 역설적으로 앞서 말한 횡단개체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사회체를 발명할 가능성을 개방하는 힘이기도 하다. 이 힘의 작용은 어떤 경제주의적 결정론과 단순한 비판적 담론에 의해 불러일으켜지는 주술적인 마나(Mana)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위로는 형이상학적인 코스모테크닉스가 재구성되어야 하고, 아래로는 과정을 가속하는 기술-정치적인 회집체가 발명되어야 한다.

 

3. 새로운 코스모테크닉스를 향해

그래서 이 책이 겨냥하는 바는 정치의 발명에 더하여 존재론적인 코스모테크닉스의 재구성에 있을 것이다. 이때 경계해야 하는 것은 단일한 코스모테크닉스의 동질화에 대한 유혹과 강요다. 전일화된 자본주의가 도구적이며 실용적인 이성을 휘두르면서 다질적인 코스모테크닉스의 전망을 가로막는다는 것이 문제다. 허욱은 이러한 동질적 동기화를 중단시키고 그것과는 다른 존재양식을 생산하기 위해 그러한 추세에 도전해야 한다고 본다(380).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이 중국철학의 -사유구도와 모종삼(牟宗三)을 비롯한 근현대 중국철학자들의 사유다. 허욱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 “기술적 활동을 통한 우주질서와 도덕질서의 일치”(87)라는 새로운 코스모테크닉스의 이념을 내세운다. 이때 도덕이란 세계--존재로서 현존재의 윤리적 사유의 조건이다(195 참조).

 

그러나 허욱이 중국철학을 들여온다고 해서 앞서 말한 어떤 유비의 형식, 이를테면 이것과 저것은 어떤 점에서 비슷하고 어떤 점에서는 다르다라는 하나마나한 논법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유럽중심주의에서 중화주의로의 허접스러운 이동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중국의 전통적 형이상학으로는 불충분하며, 단지 그것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나의 목표는 아닌것이다(104). 단언컨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중국철학이 안고 있는 근원적인 무능력을 대면하는 것이다. 꽤나 유명한 이 무능력은 소위 니덤(Joseph Needham)의 질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왜 중국에서는 근대과학과 기술이 출현하지 않았는가?”[9]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허욱은 마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단숨에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또는 적어도 서구의 몇몇 철학자가 규정하는 바에서의 기술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76)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니덤은 서구중심적 전제를 가지고 그런 의미에서의 과학-기술을 중국에서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허욱에게 궁극적 과제는 도-기 관계를 역사적으로 위치시킴으로써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 사유노선이 중국에서 새로운 기술철학을 건설하는 데서뿐만 아니라 기술의 글로벌화의 현재 상태에 대응하는 데서도 유용할지를 물음으로써 도-기 관계를 재발명하는 것이다(104). 이때 중요해지는 것은 서양철학의 관념론 노선, 즉 기술-망각의 노선이 아니라 스티글러, 들뢰즈의 노선 다시 말해 기술-망각을 일깨우면서, 적극적으로 그것을 사유하려는 존재론의 계보다. 중국에서 서구적인 테크놀로지 대신 -의 사유가 발전했다면, 이제 그것을 현대 유럽의 테크놀로지적 사유와 공명(resonance)시켜야 한다. 이 공명의 결과가 바로 새로운 코스모테크닉스일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찾고 있는 내적 공명은 기와 도라는 형이상학적 범주의 합일로, 그것에는 우리 시대에 고유한 새로운 의미와 힘이 부여되어야 한다. 이 둘을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분명히 과학과 기술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1백년이 넘은 근대화이후 이제 새로운 형태의 실천을 추구해야 할 때가 되었다. 중국 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에서도 말이다. 바로 여기서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고 온갖 노력을 구체적으로 경주해야 할 것이다(391-92).

 

허욱이 기와 도의 형이상학적 공명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동서양 사상의 합일과 같은 통속적인 비교사상론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시몽동-들뢰즈적인 의미에서 변조’(modulation) 또는 되기’(becoming)일 것이다. 여기서 개념적 도구인 ’, ‘’, ‘테크놀로지’, ‘코스모테크닉스는 이 변조의 과정, 되기의 과정에서 수행적(performative)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허욱이 이 책에서 펼쳐 놓은 철학사적, 존재론적 변조과정은 정치적인 실천, 즉 코스모폴리테크닉스(Cosmopolitechnics)라는 이질적인 것의 종합과 회집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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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Robin Mackay, Armen Avanessian (ed.), #Accelerate#-the Accelerationist Reader, Urbanomic Media LTD, 2014, 6.

[2] 질 들뢰즈, 펠릭스 과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안티오이디푸스, 민음사, 2014, 406. 여기서 들뢰즈-과타리는 어떤 혁명의 길이 있을까?”라고 물으면서 욕망의 흐름이 현재의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 충분히 탈영토화되지도, 탈코드화되지도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경과에서 퇴각하지 않고, 더 멀리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책, 같은 쪽 참조.

[3] Yuk Hui, Louis Morelle, ‘A Politics of Intensity: Some Aspects of Acceleration in Simondon and Deleuze’, Deleuze Studies 11.4,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7, 513-514.

[4] 서문에서 허욱은 이 문제에 대해 10대부터 써온 노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5] 책에는 인신세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나는 일반화된 용어인 인류세를 사용하겠다.

[6] “내가 피하려고 하는 세 가지 것 (...) 먼저 개념들의 대칭성. 즉 사람들은 서양철학과 중국철학에서 상응하는 개념들로부터 시작한다. - 예를 들어 중국 문화에서 테크네와 퓌시스에 상응하는 것을 식별해내려고 한다. (...) 그것들을 대칭적 관계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대칭성에 대한 추구는 결국 동일한 개념을 사용하도록 또는 보다 정확하게는 두 가지 형태의 지식과 실천을 미리 정한 개념들 아래 포함시키도록 강요할 것이기 때문이다”(122).

[7] Yuk Hui, Recursivity and Contingency, London: Rowman & Littlefield, 2019, 218.

[8] Yuk Hui, 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6, 1.

[9] 이 질문 자체를 기각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신식민주의적 비판인데, 허욱은 이 방향도 유용하지 않다고 말한다. “탈식민주의 이론의 약점 중 하나[] (...) 기술-물음을 무시하[는 것이다.] - 나는 이 물음은 [다른 많은] 서사 중의 하나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그렇게 하는 것은 물질적 조건의 물질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러한 조건을 인정하는 것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