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가다 번역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헨리-소머스 홀)_1부_4장_이념들과 차이의 종합

Nomadia 2021. 4. 16. 13:30

4장 이념들과 차이의 종합

 

4.1 서문-칸트와 이념들(168-71/214-17)

차이와 반복4장은 두 가지 상호 얽힌 논증들로 시작한다. 하나는 칸트의 이념론이고 다른 하나는 미적분 이론이다. 지난 장에서, 우리는 들뢰즈가 어떻게 칸트의 철학에 대립하는지를 보았다. 그 이유는 칸트의 철학이 단순히 어떤 보다 높은 수준에서의 공통감의 구조를 반복하는 능력들에 관한 사유를 제공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들뢰즈의 감각에 관한 논증에서 만약 문제들이 단순히 해들을 중복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면(가능성 개념의 부가에도 불구하고), 그때 그 문제들은 경험의 발생에 관한 생각을 제공할 수 없고, 단지 기껏해야 어떻게 그것이 초월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능력들에 의해 조건지어지는지를 보여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그러므로 나는 칸트의 이념 개념을 살펴 봄으로써 들뢰즈가 왜 이 개념이 칸트의 체계에 관한 핵심적인 혁신이라고 생각하는지, 하지만 왜 궁극적으로 이것이 재현의 구조에 대한 발생적 사유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인지 이해하고자 한다. 우리가 보게될 것처럼, 들뢰즈는 칸트적 모델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미적분학을 채택한다. 이전 장에서 들뢰즈는 이미지 없는 사유의 가능성에 대해 언질했다(DR 167/208). 4장은 그것이 세계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이 가능성을 보다 명확하게 다룬다(DR 167/208).

 

지난 앞 절(3.7)에서 우리는 칸트에게 인식은 차이나는 능력들 간의 어떤 연결을 요청한다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관계성은 우리가 세계 대한 판단들을 하도록 하는 반면에, 명백하게도 인식은 단순한 특정 판단들 이상의 어떤 것을 포함한다. 즉 이는 마찬가지로 인식의 일관적인 체계로 조직화되는 이러한 특정 판단들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의 역할로서(3.9), “(대상의) 개념들을 창조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을 질서잡으며, 대상들에 그것들이 오직 가장 광범위한 가능한 적용에 도입될 경우에만, 다시 말해 다양한 계열들에서 총체성을 담는다는 관점에서 도입될 때에만 가질 수 있는 그러한 통일성을 부여한다”(Kant 1929: A643/B671). 인식을 통일하기 위해, 이성은 그것의 탐구를 위한 핵심점으로서 전체적 통일성의 이념을 요청한다. 그런데 이 전체적 통일성은 현행적으로 경험에 주어질 수 있으며, 단적으로 이성이 제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는 상상의 초점”(focus imaginarius, Kant 1929: A644/B672)으로 제공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은 세계를 개념화하기 위한 지성의 모든 규칙들의 종점이 경험적으로 가능한 인식의 장 바깥에 놓인 실재 대상이라는 자연적 가상에 속한다 (Kant 1929: A644/B672). 이것은 칸트에 따르면 이성이 그 인식 대상들을 완연하게 결정할 수 있다는 초월론적 가상을 야기하며, 들뢰즈는 이와 유사한 주장을 제기할 것인데, 즉 그러한 이성은 모든 것이 재현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는 믿음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주목한 바에 따르면, 이러한 이념들은 칸트에게 필수적인 규범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비록 어떤 궁극적이 통일이 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이성이 인식을 통일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한다. 앞선 장에서 들뢰즈가 관심을 가지는 많은 부분은 그 해들에 있어서 진리나 거짓과 관련되어 정의되지 않는 문제의 개념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칸트의 이념 개념이 경험 너머로 가므로 단순하게 주어질 수 없는 어떤 대상을 명시하기 때문에 칸트는 그 이념의 위상을 문제적’(problematic)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이념은 사유될 수 있지만, 알려지지 않는 대상을 지시하며, 따라서 그것은 해가 존재하지 않는 어떤 문제로 남는다”(Kant 1929: A328/B384). 칸트는 더 나아가, 그러한 이념들 각각이 단순한 어떤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릇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 이념들을 규정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이 그것들이 대상과 관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념은 들뢰즈가 실재적인 문제의 개념을 위해 요청하는 것들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이념은 이성의 모든 실천적 직무의 불가결한 조건”(Kant 1929: A328/B385)이지만, 경험 자체(해들의 장)의 경험적 내용에 기반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이러한 생각의 면모들 중 많은 것을 취하고자 하는 반면, 그는 궁극적으로 칸트는 들뢰즈가 3장에서 논했던 사유의 이미지로부터 적절히 벗어나는데 실패했다고 논증할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세 가지 범주, 미규정성, 규정가능성 그리고 규정성을 도입한다.

 

첫째로 이념 자체는 미규정적이다. 다시 말해 이념의 대상은 직관 안에 어떤 규정적 형식으로 현전할 수 없다. 예컨대 칸트가 모든 현상들의 기초로 생각하는 신의 이념의 경우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현상의 기초는 그 자체로 현상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장[범주]의 바깥은 단지 개념들의 표제들이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통해서 그러할 뿐이다”(Kant 1929: A696/B79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경험적 지성과의 유사한 한에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개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오직 그것을 세계와 관련된 우리 이성의 도입이라는 측면에서규정할 뿐이다(Kant 1929: A698/B726). 즉 신의 개념은 경험 세계와 유비함으로써 (우리가 신 안에 고유한 속성들을 구별할 수 있다) 규정가능하지만, 우리는 오직 이 이념을 세계 그 너머의 우리 지성을 통일함으로써(세계를 예컨대 마치 그것이 어떤 지성적 목표를 위해 창조된 것인양 이해함으로써) 사용한다는 조건에서만 그렇게 한다. 더 나아가 이념은, 우리가 경험적 대상들이 완전히 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서, 경험적 대상들 안에 현전하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경험적 대상들을 이해가능한 속성들과 관련하여 완전히 특정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면, 칸트는 우리가 신의 이념을 요청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것을 그것이 가진 속성들과 관련하여 완전히 특정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속성들에 관한 이런저런 사유를 필요로 하는데, 이때 이 속성들은 한 대상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 대상 안에 각 쌍의 속성들(속성과 그것의 반대 속성) 중 어떤 것이 고유한지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념적인 것은 불완전한 복사물들(ectypa)로서의 모든 사물들의 원형(prototypon)이고, 하나이면서 전체인 바, 그로부터 그것의 가능성으로서 물질적인 것이 파생되어 나오고, 그러는 동안 다양한 수준에서 그것에 접근해 간다”(Kant 1929: A578/B606). 이제 들뢰즈가 강조한대로, 이 세 가지 이념의 계기들은 함께 현행화의 발생적 사유를 구성하기 위해 활용될 수 있다. 미규정적 이념은 현행적인 것과 본성적으로 다른 하나의 계기를 제공하며, 따라서 그 범주들의 바깥에 놓인다. 규정가능성으로서의 이념은 그 대상이 속성들을 지지할 수 있게 되는 하나의 계기이며, 따라서 현행적 대상으로 규정되어진다. 규정성으로서 이념은 대상이 가지는 현행적 속성들을 취하는 어떤 계기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이념의 세 계기들은 현상 자체의 세계 안에서 현상들의 기반이 어떻게 스스로를 표현할지에 대한 사유를 제공할 수 있다. 따라서 이념은 그것이 표현되는 바 경험적인 것을 규정함에도 불구하고, 그것과의 관련에서 미규정적으로 남아 있으므로, 문제가 경험적인 대상들 안에서 문제 자체를 이해함이 없이 경험적 해들에서 표현을 발견하는 방식에 관한 생각을 제공할 것이다.

 

이 모델이 문제로부터 그것의 경험적 해로 가는 운동을 드러내도록, 이 모든 세 가지 계기들은 이념의 내적 부분들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칸트에게 세 가지 계기들 중 둘은 외적 규정들로 남아 있다”(DR 170/216). 즉 신과 같은 어떤 이념의 규정가능성과 규정성을 이해하는 방식은 오로지 이미 존재하는 경험적 사태들과 관련해서이다. 우리는 이성이 세계에 관한 우리의 인식을 체계화 하는데 대한 관심을 추구하도록 하기 위해 이것을 순수하게 행하며, 세계 자체의 구성을 위한 조건들을 탐색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념이란 이성의 경험적 사용을 비한정적으로(in infinitum) 더 멀리까지 더 강도있게 하기 위해, 우리가 그 직접 대상과 관련된 어떤 것을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구성적 원리가 아니라, 단순히 규범적인 원리이자 준칙일 뿐이다”(Kant 1929: A680/B708). 이런 의미에서 이념들이 애초에 해들에 독립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사유하는 법을 제공하기 위해 등장하는 반면, 칸트의 사유는 궁극적으로 오직 우리가 그것들의 경험적 대상들과 관련하여, 또한 그것과의 유비에 따라 사유되는 한에서 이념들의 사용을 허용할 뿐이다. 칸트적 이념에 속한 문제는 여전히 그것이 발생시키는 해들과의 연관하에 이해된다. 따라서 요청되는 것은 칸트의 단순히 외적이고 내적인 사유라기 보다, 경험적 세계와 이념들이 본성적인 차이를 유지하도록 하는 동안에도, 그 둘을 내적으로 관련시키는 어떤 사유이다.

 

4.2 이념들과 미분학(17082/21730)

규정가능성과 규정성이 칸트적 모델에서 이념들의 외적 규정들이라 해도, 들뢰즈는 우리가 사유의 모델로서 미분법으로 돌아감으로써 이념의 세 계기들 모두를 내적으로 구체화할 어떤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논한다. “우리는 부정성에 차이 그 자체를 맞세우는 것처럼, 모순에 대해 차이의 기호인 dx를 맞세운다”(DR 170/217). 미분법이 들뢰즈에게 왜 중요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분법이 무엇인지 대략 개괄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첫 번째 접근은 미분법이 곡선들 위의 점들의 속성을 취급하는 수학의 장이라는 것이다(Boyer 1959: 6). 보이어(Boyer)가 논하다시피, 이것은 곡선 위의 점의 속성들이, 마치 시간 안에 주어진 순간에서 그것의 속도처럼 운동중의 물체의 속성과 관련되는 것과 유사하다. 만약 우리가 운동 중에 있는 어떤 물체의 평균속도를 결정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두 양들 간의 어떤 비례, 즉 물체가 시간대를 가로질러 가는 거리(s)와 시간대 자체(t)를 발견함으로써 결정할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평균속도=Δs/Δt, 즉 시간적인 차이에 의해 나누어지는 기간 나누기 이동에 있어서의 차이(여기서 Δ는 차이를 기호화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초당 미터, 또는 시간당 마일의 평균속도를 알려줄 것이다. 이것이 평균 속도에 대해 효과적일 것이지만, 문제는 시간적인 특정 순간에서 물체의 속도를 결정하길 원할 때 등장한다. 우리가 어떤 특정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평균속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순간속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어떤 물체가 항속(constant speed)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때 물체의 평균속도와 순간속도는 일치할 것이지만, 만약 물체가 가속하거나 감속하고 있다면, 반대로 그 순간속도는 지속적으로 변화할 것이며, 이에 따라 우리는 그것의 평균 속도에 기반하여 순간속도를 결정할 수 없다.

 

이 딜레마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해결법은 만약 우리가 시간에 대한 신체의 평균속도를 취한다면, 우리가 순간속도를 결정하려고 하는 그 점에서 시작하여, 거리를 계속 나누는 것과 같이 시간의 절편을 천천히 감소시켜 가면, 평균속도는 순간속도에 접근할 것이다. 즉 우리가 평균속도를 결정하는 시간의 절편들을 더 작게 만들수록, 그것은 한 점에서의 순간 속도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생각을 확장해서, 시간의 무한하게 작은 면적에 대해 평균속도를 결정한다면, 이 시간의 면적은 사실상 0이기 때문에, 평균속도는 실재로 순간속도와 같아질 것이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수행해왔던 것은 두 가지 양, 즉 거리와 시간 사이의 관계이다. 수학의 주요 관심사들 중 하나는 보다 일반적으로 관계들에 있으며, 미분법은 사실상 일반적으로 다양한 양들, 즉 모든 종류의 연속 곡선들 사이의 관계들을 계산하는 방식을 제공한다. 우리는 곡선들을 수학공식으로 표현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미분법은 우리가 수학 방정식들에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절차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곡선을 생성시키는 방정식은 원시함수로서 드러난다. 우리가 곡선의 방정식에 미분법을 적용할 때, 우리는 미분계수라는 것을 얻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각 점에서 곡선의 기울기(운동중인 물체의 예에서 각 점에서의 속도)를 알려준다. 두 점 사이의 평균 속도에 있어서 우리는 Δs/Δt 기호를 사용했다. 여기서 Δs는 임의적 거리를 지시하고, Δt는 물체가 그 거리를 지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의 경과를 표현한다. 하지만 미분법은 유한한 차이들에 의존하는 평균 속도와 관계하지 않으며, 단지 무한소적인 차이, 즉 다른 식으로 미분소라고 알려져 있는 것과만 관련된다. 무한소적 차이를 재현하기 위해, 라이프니츠는 기호 dy/dx를 도입한다. 우리가 1장에서 보았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관계란 부정성과의 관련하에 정의내려진다. 미분법은 dydx라는 요소의 상호규정성에 의존하여 관계론을 전개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들뢰즈는 미분법에 관해 오래된 것들, 이른바 세련되지 못하거나 전과학적인 해석 안에 보물이 묻혀 있다”(DR 170/217)고 주장한다. 이 보물은 두 가지 실수에 의해 은폐되었다. “그것은 기호 dx의 값과 무한소의 존재를 결합한 실수이며, 어떤 존재론적이거나 지식론적인(gnosiological) 가치를 무한소를 거부한다는 명분하에 거부한 실수이다”(DR 170/217). 우리가 이 두 가지 실수들을 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dx의 항이 의미하는 것을 보다 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았듯이, dx는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두 점 사이의 무한소적인 거리를 재현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순간속도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하기를 원할 때, 우리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최초로 미분법을 널리 알린 사람들 중 한 사람인 로피탈(L’Hôpital)의 무한소에 관한 사유로 돌아갈 수 있다.

 

공준 I. 그 차이가 무한하게 작은 양인 두 수가 주어지면, 그것은 서로 간에 구별없이 채택될(또는 사용될) 것이다. 또는 (같은 것이지만) 단지 어떤 무한하게 더 작은 양에 의해 증가되거나 감소되는 어떤 수는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고 간주될 것이다(L’Hôpital 1969: 314)

 

이 공준은 dx가 비율 dy/dx를 형성하기 위해 결정값을 가지는 것이 틀림없어 보이기 때문에, 하지만 마찬가지로 곡선의 길이를 가로지르기보다, 어떤 한 점에서 기울기를 포착하기 위해 아무런 크기도 가지지 않아야(=0) 하기 때문에 요청된다. 명백하게도 이것은 어떤 근본적인 난점이다. 왜냐하면 수학의 일관성이 크기를 가짐과 동시에 그것을 결여하는 어떤 변수를 취함으로써 위협받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 미분적인 것을, 비록 그것이 무한하게 작다 할지라도, 어떤 감각적 크기에 부여한 것이 실수라고 주장한 것은 옳아 보인다. 그리고 현대의 미분법에 관한 독해도, 미분적인 것에 대한 형식적인 의미부여 너머의 어떤 것을 줄 필요성을 폐기한 극한 개념과 관련하여 미분 해석을 보여줄 때, 이와 일치하게 된다. 하지만 들뢰즈는 또한 이러한 독해가 오류라는 점을 수용한다. 미분법에 대한 대안적 독해를 마련하면서, 들뢰즈는 18세기와 19세기의 형이상학적 독해로 되돌아 간다. 그가 제시한 세 명의 인물들, 보르다스-드물랭(Bordas-Demoulin), 마이몬(Maimon) 그리고 브롱스키Wronski)는 모두 미분에 대한 수학적 사유에서의 모순이 미분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것을 야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의 적합한 이해는 수학 자체 안에서 통용되지 않는 원리들을 야기하는 형이상학적 해석을 포함한다고 본다. 나는 이제 들뢰즈가 이러한 차이를 칸트적인 이념 개념의 대안을 현시하기 위해 읽어나가는 방법에 대한 간명한 요약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각각의 인물들은 현상적 세계의 상이한 계기로 시작한다. 보르다스-드물랭의 사유는 양과 관련된다. 데카르트의 추종자로서, 그는 물질을 불연속적인 원자들로 구성된다기보다, 연속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미분법이 이러한 연속적인 크기에 대한 사유를 가져다 주는 방식에 흥미를 가졌다. 마이몬은 질적인 것들과 관련되는데, 이를테면 대상의 색깔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이러한 질들이 상호적으로 결정되는 방식에 관심을 가졌고, 우리가 대상의 질적인 변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궁극적으로 브롱스키에 대한 들뢰즈의 논의는 미분법과 관련된 잠재성에 관한 사유 즉, 그 본성 자체가 변화하는 대상의 전개 안에서의 순간적 계기들에 대한 사유를 전개한다.

 

들뢰즈가 소개하는 첫 번째 인물은 미분법의 플라톤”(DR 1701/217)이라 불리우는 보르다스-드물랭이다. 보르다스-드물랭은 우리가 어떻게 수학적 보편자들을 그것들 자체로 재현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는 예컨대 데카르트가 원주 개념 그 자체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단지 이런 저런 특수한 원주를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드물랭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절차는 원의 공식 x2+y2R2=0을 보이기 위함이다. 만약 우리가 이 방정식의 그래프를 그린다면, 그대 특수한 R값에 대해, 방정식의 모든 해들이 함께 (0, 0)의 점을 중심으로 하는, 데카르트 좌표계에 속한 하나의 원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이 데카르트적 정의는 왜 우리에게 진정한 원의 정의를 주지 않는가? 보르다스-드물랭은 아래와 같이 이 점을 지적한다.

 

x2+y2R2=0에서, 나는 x, y, R에 여러 무한한 값들을 할당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그것들에 하나를 부여해야만 한다. 즉 그것은 하나의 한정된 값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특정 원주를 표현하며, 원주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곡선의 방정식들에 타당하며, 궁극적으로 그 어떤 가변 함수에도 마찬가지이다. 재현되는 것은 개별적인 곡선이나 함수이지, 보편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보편적인 것은 어떤 기호로 남겨진다. 그리고 이는 데카르트에 의해 수학적으로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다.(Bordas-Demoulin 1843: 133)

 

특정한 원들과 관련하여, 러셀적인 감각 관념 또는 칸트적인 어떤 조건의 관념과 흡사한 대수 방정식들은 그러한 x, y, R 변항들에서, 단적으로 어떤 특정값들을 대표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원주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방정식 안으로 넣어진 특정 값들을 선택함으로써 잔여적으로 튀어나올’(‘cashed out’)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우리는 원주 그 자체보다 이런 저런 특정한 원주의 구조를 단순히 정의한다. 원주가 그 자체로 무엇인지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우리는 특정 항들에 대한 이러한 참조들을 없앨 필요가 있으며, 이는 그 대상이 함수 안의 보편자로부터 이끌어내어져야 하는미분법을 사용함으로써 성취된다(Bordas-Demoulin 1843: 54). 우리가 하나의 함수를 미분할 때, 우리는 그 함수의 정확한 값을 더 이상 주지 않고, 대신에 함수의 변항들을 주는 다른 함수를 얻는다. 게다가 이러한 함수가 값을 할당받을 수 없는 dydx과 관련하여(이것들은 xy와 관련해서 엄격히 말해 0이다) 구성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변수의 가능한 값들이라는 관점에서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는 어떤 함수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드물랭에 의하면 dx는 다른 특정값들로 주어질 수 있는 변항을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현행적 항들에서 구조에 대한 이해의 근원적인 침입을 드러낸다. “x2+y2R2=0에 적용될 때 [미분법은] ydy + xdx = 0로 나오는데, 이것은 어떤 특정한 원주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주를 표현하는 것이고, dxdy는 모든 한정된 또는 유한한 크기들로부터 독립적이다”(Bordas-Demoulin 1843: 134). 들뢰즈가 이로부터 취하고자 하는 것은 미분적인 것은 단순하게 양적으로 표현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는 원시함수의 측면에서 표현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어떤 함수를 적분함으로써 미분화의 과정을 역전시킨다면, 특수하고, 현행적인 원주의 공식을 얻게 된다. 미분적인 것은 원시함수와 단순히 다르지는 않지만, 원시함수와 어떤 내적 관계를 가진다고 이해할 수 있다. “만약 ydy + xdx = 0에서 우리가 x, y라는 유한한 크기를 만나며, 이는 양적으로 더 이상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며, 보편자가 스스로를 완결적으로 고립시킬 수 있으며, 어떤 분리된 존재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Bordas-Demoulin 1843: 134). 따라서 우리는 지난 장에서 들뢰즈가 설명했던, 플라톤의 해명과 유사한 어떤 상황을 가진다. 어떤 경험적 개념, 이를테면 원주와 같은 그런 것은 그것의 이데아 내부에서 움직이는데, 이는 그 이데아가 결여된 미분적인 것과 비교될 수 있다. 플라톤에게서 이데아가 궁극적으로 경험적 대상들과의 유비에 의해 이해되었던 것에 반해(플라톤의 기억 이론에서 유비의 사용), 미분적인 것은 드물랭이 이데아와 그것의 예화들 사이의 본성적 차이를 드러내도록 한다. 미분적인 것이 그것과 본성적인 차이를 가지는 원시함수에 내재하는 정도를 강조하면서, 드물랭은 미분법의 형이상학의 모델로서 다른 인물을 선택하는데, 이 인물은 들뢰즈의 사유에서 보다 적합하게 채택된다. “(미분법의) 형이상학에 따라, 우리는 비교하자면 스피노자의 신이 우주의 미분성이고 우주는 스피노자적인 신의 적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Bordas-Demoulin 1843: 172).

 

들뢰즈가 도입한 두 번째 인물은 살로몬 마이몬(Salomon Maimon)이다. 들뢰즈는 그를 미분법의 라이프니츠라고 주장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마이몬은 예컨대 단순한 조건화와 어떤 유전적 요청의 폐기에 있어서 [칸트의] 초월론적 환원을 취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미분법을 이용한다(DR 173/220). 들뢰즈의 마이몬 독해는 대부분 게루(Guéroult)살로몬 마이몬의 초월철학(The Transcendental Philosophy of Salomon Maimon)으로부터 나오는데, 그래서 나는 여기서 그렇나 독해에 집중할 것이다. 우리는 마이몬의 기본적인 기획을 흄식의 회의주의 형태의 재도입을 통해 선험적인 것에 대한 칸트적 해명을 문제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칸트적 기획에 공간, 시간 그리고 강도의 생산에 관한 어떤 라이프니츠적인 발생적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전비판적 요소를 가미한다. 보르다스-드물랭이 특정 수학적 계산들에 보편성을 제공하기 위해 미분법을 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마이몬은 현상적 세계의 이 시간, 즉 구성의 원천으로 미분법을 취한다. 우리는 칸트의 기초 문제가 본성적으로 다른 능력들을 관련시키는 방식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칸트의 관심사는 지식을 보증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는 우리가 본성적으로 다른 능력들을 소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잉 벗고, 어떻게 이러한 능력들이 인식을 생산하기 위해 서로 관련될 수 있는지에 대해 순수한 관심을 가진다. 이와 달리 마이몬은 현상의 발생 조건을 탐구하기를 원한다. 그의 철학 사전에서 그는 이성과 직관 상의 객체의 관게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이성은 우리가 어떤 객체안에 주어진 것을 순수하게 대체불가능한 자연의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 사유 능력의 제한의 결과로 간주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이성은 그러므로 사유되는 것, 즉 소여(the given)가 항구적으로 증가되지만, 존재는 무한소로 감소되고 있다는 것을 통해 어떤 무한한 진보를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이다.(Maimon 1791: 169)

 

주어진 것을 단지 직관 능력의 수동적 물질로 바라보기 보다, 마이온은 그것을 지성이 사유할 수 없는 것으로 단순히 본다. 만약 우리가 사유의 제한된 능력을 가지지 않고, 어떤 무한한 지성을 가진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 전체는 사유될 수 있고, 따라서 주어진 것 자체는 사라진다. 마이몬의 사유는 주어진 경험적 대상이 사물들의 진정한 본성에 있어서 지각의 혼잡한 형식이라는 면에서, 오히려 라이프니츠의 그것을 닮았다. 라이프니츠에게 어떤 유한한 존재에 관한 사유와 무한한 존재 사이의 차이는 정도상의 차이인 반면(보다 뛰어난 지성은 공간의 혼잡한 형식 아래에서 개념적 관계들을 지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이몬에게는 두 종류의 사유 간에 본성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가 보았다시피, 무한소적인 것은 모순 없이 감각적 해석에 주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미분함수(dy/dx)에서 두 무한소 간에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감각적 해석을 가지는 공식(곡선 상의 점들의 변화율에 과한 공식)을 이끌어 낸다. 따라서 미분은 칸트적인 본체와 같은 것으로서, 사유될 수 있지만, 직관 안에 현전할 수 없다. 마이몬은 미분법에서 이러한 수학적 해석을 취하여, 그것을 초월론적 해석에 부여함으로서, 미분소 dx가 현상들의 종합을 위한 본체적 근거들의 상징이 되도록 한다.

 

이러한 객체들의 미분들은 이른바 본체(noumena)이지만, 그것들로부터 발생해 나오는 객체들 자체는 현상(phenomena)이다. 직관=0와 관련하여, 그와 같은 객체의 미분은 dx=0, dy=0 등등이다. 하지만 그것들의 관계는 0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들로부터 발생하는 직관 안에 규정적으로 주어질 수 있다.(Maimon 2010: 32)

 

무한한 지성은 이러한 미분적 관계들을 사유할 수 있으며, 따라서 직관 없는 총체성 안에서 객체를 사유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 주목하듯이, 마이몬은 객체가 나타나는 특정한 규칙 또는 그것의 미분적 유형은 객체를 어떤 특정 객체로 만든다. 그리고 차이나는 객체들의 관계들은 그것들이 발생하거나, 그 미분적인 것들에 속하는 규칙들의 관계로부터 나온다”(Maimon 2010: 33). 왜냐하면 미분적인 것이 우리에게 객체들의 무한한 관계를 지배할 어떤 규칙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한한 지성은 그것을 단번에 사유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을 지배하는 규칙들에 따라 선험적으로 대상을 사유하는 것에 반대하여, 그것은 오로지 주어진 것으로서, 즉 감각적 직관을 통해서 객체를 사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능력들 간의 외적 관계 대신에, 마이몬은 어떻게 직관이 유한지성의 무능력, 즉 단번에 미분적 관계를 사유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부터 출현하는지 보여준다. 객체를 어떤 완결된 종합으로 생각하는 대신에, 그것은 드러나고 있는’, 또는 떠오르는과 같이 어떤 과정적 종합으로 사유되어야 한다. 이제 게루가 분명히 했듯이, 우리가 객체를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떤 초월론적 가상(illusion)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상력은 결코 재현 이외의 어떤 것에 관한 의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불가피하게 모든 의식의 대상들이 재현이라는 가상을 가진다. 그것은 이에 따라 또한 원초적 대상 또는 어떤 재현으로서 완전한 종합을 생각하는 것으로 이끌린다.(Guéroult 1929: 66)

 

우리를 해(solution)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문제를 이해하도록 이끌어 가는 것은 이러한 가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두 차이나는 사유 양태를 마이몬에게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직관과 관련하여 작동하는 것이며, 조건짓는 것의 철학을 제공하고 다른 하나는 미분적 근거들로 돌아가 주어진 것의 발생을 추적하고자 하는 사유의 발생적 모델을 제공한다.

 

우리는 이제 이념에 관한 대안적 이론을 제시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둘이 외재적인 것에 속하는 세 가지 계기들 사이의 어떤 관계로 이해하기 보다, 미분법이 세 가지 계기들을 내적으로 연관시킨다고 본다. 미분소 dx가 직관 안에 주어질 수 없으므로, 그것은 미규정적이다. 그것이 어떤 관계 안으로 놓일 때, dy/dx와 같이, 그것은 규정가능하게 되는데, 이때 그것은 함수가 취할 수 있는 값의 완전한 범위를 특정한다. 끝으로 미분적인 것은 함수가 특정 계기들을 취하는 특정 값(우리의 이전 예에서 시간 안의 특정 지점에 관한 순간속도)과 관련하여 규정된다. 무한한 지성이 곡선을 하나의 전체로서 사유하는데 반해, 우리는 오로지 곡선의 발생 과정을 직관 안의 대상에 관한 현실적 전개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게루가 논하다시피, “그렇다면 미분적인 것은 본체(지성에 의해 단순하게 사유되는 것), (직관 안에 나타나는) 현상들의 원천이다”(Guéroult 1929: 60).

 

들뢰즈가 소개하는 마지막 인물은 브롱스키(Wronski). 수학자인 라그랑쥬(Joseph-Louis Lagrange)는 함수에 관한 생각을 활용하는 어떤 무한한 계열의 개념들로 재현함으로써 미분법에 관한 산술적 해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애썼다. 그의 해석함수론(Theorie des Fonctions Analytiques)의 서문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이 초월론적 또는 무한소적이라고 부르는 해석학은 오로지 원시함수와 도함수의 해석학에 뿌리를 두며, 미적분학은 적절하게 말해서, 이 동일한 함수들에 관한 계산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Lagrange, Grattin-Guinness 1980: 1001에서 재인용). 미적분론이 순수하게 대수학과 관련되어 이해될 수 있다는 라그랑주의 주장은, 그것이 만약 성공적이라면, 들뢰즈가 주장하는 바 일종의 고전적해석의 필요성을 제거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미분소에 관한 어떤 형이상학적 해석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브롱스키를 도입하는 것은 고전적해석의 가능성을 구출해내기 위함이다.이 장에서 논해지고 있는 미분법에 관한 다른 사상가들에서처럼, 브롱스키는 미분적인 양과 일반적인 양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구별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미적분학의 형이상학적 난점이란 이 중요한 초월론적 구별이다. 결과적으로 유한한 양과 무한한 양, 이른바 무한소적 양은 두 가지 완연한 차이, 이질적이기까지 한 지식의 종류에 속한다. 유한한 양은 우리의 인지 대상들에 관련되고, 무한소적 양은 이 동일한 인지의 발생에 관련된다. 따라서 이 각각의 지식의 종류는 적합한 법칙들(proper laws)에 관한 지식을 가져야 하며, 명백하게도 무한소적인 양에 관한 형이상학적 핵심이 발견되는 이러한 법칙들의 구별 안에 있는 것이다.(Höené Wronski 1814: 35)

 

그런데 라그랑주가 대수적인 개념들로서 순수하게 이해될 수 있는 (대수적인) 무제한적인 것에 의존함으로써 무한소적인 것의 필요성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믿었음에 반해, 브롱스키의 주장은 무제한적인 것 자체가 무한소적인 것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무한소를 인식의 영역으로 가져오기 위해, 그것은 직관 안에 현전되어야 하며, 무제한적 양으로 순수하게 진행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라그랑주 방법론의 핵심에 있는 무제한적인 양은 브롱스키에게는 여전히 미분적인 것에 의존한다.

 

라그랑주의 방법이 여전히 미분적인 것에 의존한다는 주장에 대해 브롱스키는 정확히 무제한적 양이 미분적인 것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사실상 라그랑주의 방법은 우리가 선 위에 있는 두 종류의 점, 즉 특이점과 평범점을 구별하도록 하는 일련의 미분소들을 생산한다. 미적분에 관한 우리의 최초의 예에 따르면, 시간과 거리의 관계는 우리에게 어떤 물체의 속도를 알려준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정식을 한 번더 미분하면, 우리는 속도와 시간 간의 관계를 얻을 것이고, 이것은 물체의 가속도가 된다. 마치 평평한 곳에 있는 것 같은, 이 곡선 위의 점들은 물체의 운동에 있어서 특이성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 점은 부단한 운동 가운데 있다. 보다 추상적인 곡선들에서, 곡률이 0/0 또는 무(null)이거나 무한인 곳의 점들은 곡선의 본성이 변화하는 곳에서 점들을 정의한다. 따라서 잠재성은 항들 간의 관계의 본성이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점들을 정의한다.

 

우리는 이러한 세 가지 계기들을 이념에 관한 설명을 전개하기 위해, 미규정성, 규정가능성 그리고 규정성으로 함께 묶을 수 있다. 이것들은 이념에 내재한다. 우리가 드물랭을 살필 때 보았다시피, 미분적인 것 자체, dydx는 재현의 측면, 따라서 해의 측면에서 완전히 미규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 관계가 발생할 때, 그것들은 규정가능한 어떤 방정식을 우리에게 준다. 이 방정식은 시간 안의 각 점들에 대한 함수의 변화율(보다 합당하게는 어떤 x의 값)을 제시한다. 브롱스키가 보여주듯이, 그와 같은 방정식은 그 본성이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곡선 위의 점들을 결정하는 특이점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x의 값을 특정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점에서 변화율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x 값을 특정하는 것은 이념을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특정한 규정적 값(직관), 그것을 포함하는 규정가능한 방정식(개념), 그리고 규정가능성과 규정성 둘 모두를 발생시키는 미분적인 것 자체의 장을 가지게 된다. 문제로서 미분적인 것은 그러므로 문제와 관련하여 단순히 해석되고 있다기보다, 고유하게 해를 품고 있다. 이러한 설명이 지금으로서는 추상적으로 보일지라도, 아래의 4개의 절들에서 보다시피, 우리는 이러한 도식에 따라 작동하는 이념의 구체적 예들을 전개할 수 있다.

 

미분법에 대한 들뢰즈의 나머지 설명은 이념으로서의 미적분학에 관한 이러한 이해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낸다. 들뢰즈가 적고 있다시피, “미적분의 해석은 실재로 무한소가 실재인지 허구인지를 묻는 형식을 취했다”(DR 176/223). 하지만 브롱스키의 설명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질문은 전통적으로 미분적인 것들이 (재현적) 인식의 대상 또는 허구로 존재할 수 있는지에 관해 해석되어져 왔다. 일단 우리가 그 미분적인 것들이 발생적인 차이의 질서에 속한다고 인식하면, “첫 번째 선택의 여지 실재 또는 허구? - 가 붕괴한다”(DR 178/225). 이와 유사하게 들뢰즈는 무한소의 측면에서 작동하는 미적분을 보는 것과 무한소를 생략하고자 하는 근대의 유한주의 해석들 사이의 선택지는 똑같이 무가치하다고 본다. 들뢰즈의 주장은 이 두 가지 해석들 모두 크기를 기술하는 방식이지만, 이러한 크기는 재현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들 모두 미분적인 것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보았다시피, 들뢰즈의 독해에 있어서, 강조점은 원시함수에 놓이지 않으며, 원시함수의 구성인자인 미분소 dx에 놓인다. 이렇게 해서 그것은 해들보다 문제들과 관련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들뢰즈가 미적분학의 형이상학에 대해 말한다기보다는, 미적분학의 어떤 변증론에 대해 말한다고 해야 한다. 여기서 변증론이란 이것이 적합하게 수학적인 해들의 요소와 구별되어질 만한 한에서 문제의 요소라는 뜻이다(DR 178/226). 그러므로 수학자 아벨(Abel)의 연구가 들뢰즈에게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가 하나의 문제가 실재적으로 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것에 의지하지 않고 어떤 해를 가질지 아닐지를 결정하는 방법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이념의 세 계기들이 어떻게 외적으로라기보다 내적으로 미적분학과 연결되는지 보았으며, 들뢰즈는 아래와 같이 그의 논의를 재우쳐 설명하고 요약한다.

 

로트망(Lautman)의 일반 테제를 따르면, 문제는 세 가지 측면을 가진다. 해들과 그것의 본성적 차이, 그 자신의 규정적 조건들에 입각하여 생성하는 해들과 관련된 그것의 초월성, 그리고 문제가 보다 규정된 것을 더 잘 해결할 때, 그것을 뒤덮는 해들 안에 그것의 내재성. 따라서 문제적(변증론적) 이념을 구성하는 이상적 연결들은 수학 이론들에 의해 구성되는 실재 연결들 안에 체현되며, 해들의 형태로 문제들 속으로 이동된다.(DR 1789/226)

 

이 세 가지 계기들 각각은 서로 간에 본성적으로 차이나는 두 구조를 내적으로 연관시키는 어떤 방법으로서 미적분학 안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미적분학은 각각의 계기들이 내적으로 서로 연결된 곳에서 본성적으로 차이나는 어떤 것으로부터의 규정적인 양의 발생에 관한 설명 모델을 제공한다.

 

4.3 이념들과 보다 넓은 미적분학(178-84/226-32)

들뢰즈는 미분법은 명백하게 수학에 속하는 것으로, 전적으로 수학적인 도구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수학보다 더 우월한 어떤 변증법의 플라톤적인 증거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DR 179/226). 우리가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를 살필 때, 플라톤이 수학을 이데아들 자체의 지식 아래에 있는 두 번째로 높은 지식의 형태로 간주한다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수학의 장에 속하는 것 뿐 아니라, 들뢰즈가 세계에 대한 해명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과 분명 동등해 보인다. 사실상 우리가 일단 문제들이 해들에 대한 어떤 상이한 질서에 속한다는 것을 인식하면, 수학이 해들을 재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수학적인 것(또는 물리학적인 것, 생물학적인 것, 심리적 또는 사회적인 것)은 해들이다”(DR 179/227). 이러한 영역들은 문제들 자체에 적용되지 않지만, 해들과 관련해서 (그리고 그 내부에서) 표현된 것으로서 문제에 적용된다. 미적분법은 그 자체로 차이의 기호들을 제공하는 방식이며, 그 결과 그것은 여전히 명제적이며 어떤 특정 영역에 묶여 있다. 이러한 기호들이 지칭하는 것이 재현될 수 없기 때문에, 어쨌든 미분법은 그 자신 너머의 문제 자체를 가리킨다. “그것이 수학 너머의 어떤 변증론이 드러나는 곳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는 그 모든 계기들에서조차 미분법이 전체적으로 수학에 속하는 이유이다”(DR 179/227). 미분법에 관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미규정적인 요소들이 상호관계들로 진입함으로써 규정적으로 될 수 있는 방식에 관한 어떤 해명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관계들이 수학 외부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에, 미분법은 어떤 더 넓은 우주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미분법은 문제 또는 변증론적 이념들, 문제의 과학적 표현, 그리고 해의 장들의 수립을 포함하는 전체적인 복합적 우주를 지칭하는 것이다”(DR 181/229).

 

우리가 보았다시피 이념들은 그 요소들의 미분적 관계들로부터 형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이념들은 다양체다라고 주장한다(DR 182/230). 이념들은 그 자체로 미규정적인 요소들의 상호 관계들이다. 그러면 우리가 공간적 다양체를 다루고 있을 때, 우리는 많은 요소들을 소유하는 어떤 구조와 관련하여 다양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것을 다양체에 관한 형용사적 개념(adjectival notion)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경우 다양’(many)은 주어진 것과 차이 나지 않는 의미에서 분류(classification), 다양함이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의 집합을 형성하기 전에 규정적이다. 반대로 미분적으로, 그것들은 정확히 상호적으로 규정됨으로써 규정적이 된다. 들뢰즈는 차라리 실체들의 집합을 기술하는 형용사적으로 존재하는 다양체보다, “다양한 것으로서의 하나를 대체하는 바, ‘하나의 다양체(Multiplicity)’가 진정한 실사적, 실체적인 것 자체라고 주장한다(DR 182/230). 우리가 막 보았던 바대로, 이런 방식으로 다양체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자기-존립적인 요소들의 측면에서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적어도 칸트에 관한 첫 번째 독해에서, 경험이란 그에게 객체의 경험이었고, 그것은 자기-존립적인 요소들이었다. 따라서 들뢰즈의 경우 다양체 개념이란 칸트적인 경험 안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상 들뢰즈는 이념의 출현에 있어서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 “다양체의 요소들은 감각적 형식도 개념적 의미도 또는 이에 따른 어떤 할당가능한 기능도 가지지 않는다” (DR 183/231). 다시 말해, 그것들은 다른 것들과의 관계들을 통해 규정되어야만 하며, 관계에 앞서지 않는다. 둘째, “요소들은 결국 규정되어지지만, 상호적으로, 즉 존속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상호적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DR 183/231). 들뢰즈가 주목한 바에 따르면, “-공간적 관계들이 다양체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은 명백하지만, 내면성을 상실한다.” 다시 말해, 요소들은 내적으로 다른 것들과 관련되지 않고, 단순히 어떤 공간을 함께 점유함으로써 관계된다. 다른 한편으로 지성의 개념은 내적인 특성을 보유하지만, 다양체를 잃어 버린다”(DR 183/231). 우리가 하나의 개념을 규정할 때(이를테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우리는 그 개념을 다른 것에 포함시킴으로서 그렇게 한다. 결과적으로 그것들이 내적으로 연결되는 동안, 다양체가 아니라 통일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미분적 관계는 다양한 시-공간적 관계성으로 현행화됨에 틀림없고, 동시에 그 요소들도 현행적으로 항들과 형식들의 다양성에 체현된다”(DR 183/231). 즉 만약 이념이 세계의 구조에 관한 몇몇 종류의 설명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상황 이상에 적용가능해야 한다. 그것은 한 영역보다 더 많은 것에 속하는 관계들을 포획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특성들은 미분법 안에서 발견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떻게 이러한 설명이 보다 일반적으로 가능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들뢰즈는비-수학적 장 안에 속하는 이념의 세 가지 예들을 제시한다. 물리적 이념으로서의 원자론, 생물학적 이념으로서의 유기체, 그리고 사회적 이념들.

 

4.4 첫 번째 예시: 물리적 이념으로서의 원자론(184/232-3)

더 넓은 미분법을 발전시키기 위한 시도에 속한다고 들뢰즈가 간주하는 첫 번째 예시는 원자론에 의해 제시된 것으로서, 특히 에피쿠로스의 헤로토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와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드러난 것이다. 들뢰즈가 이 절에서 쓴 것은 본질적으로 의미의 논리부록 중 하나로 출간된 그의 시뮬라크르와 고대철학(‘The Simulacrum and Ancient Philosophy’)이라는 논문에서 보다 길게 다루었던 것의 개괄이다(LS 25379/291320). 에피큐로스는 우주가 두 가지 종류의 실체들, 즉 원자와 허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구장한다. 원자들이 크기에 있어서 다양한 반면, 그것들은 지각의 경계 아래에 존재한다. 저항이 물체들의 속도를 떨어트리기 때문에, 그리고 허공 안에는 아무런 저항도 없기 때문에, 원자의 허공을 통과하는 경로는, 그것이 충돌할 만한 어떤 물체들을 만나지 않고 공간을 점유할 때, 지각불가능할 정도로 짧은 시간에 모든 도달가능한 거리를 주파한다.” 원자들은 사유만큼 빠르게이동한다(Epicurus 1926: 37). 이 원자들은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가시적 세계의 구조는 복합적인 구조들에 대한 그것들의 조합에 의해 설명된다. 이러한 복합 구조들 안에서 원자들은 어떤 지각가능한 수준에서 운동하는 것으로 드러나지만, 이것은 단순히 원자들이 어떤 지각가능한 평균적 운동을 따라, 방향을 달리하고, ‘진동하기때문에 그런 것이다. 만약 원자가 다른 원자들과 감각적인 복합물에서 현행화되는 구조의 핵심에서 다른 원자들과 관계된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가 무엇을 야기하도록 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루크레티우스는 원자들이 어떻게 서로 간 관계를 맺게 되는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이러한 연결에서 나는 당신이 보다 심오한 점을 파악해야 한다고 열망한다. 원자들이 그 무게의 속성에 따라 허공을 통과해서 아래로 끌어내려질 때, 그것들은 절대적으로 예측불가능한 시간과 공간에서 운동의 변화라고 기술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직선 경로를 미세하게 벗어난다. 만약 그것들이 클리나멘(swerve)의 경향이 없다면, 모든 것은 낙하하는 빗방울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허공 아래로 떨어져 버릴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요소들 사이에는 그 어떤 충돌도 일어나지 않으며, 그 어떤 바람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연은 결코 그 어떤 것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다(Lucretius 2001: 401).

 

원자가 서로 간에 접촉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클리나멘(clinamen)를 통해서이다. 이 상황에 대한 들뢰즈의 분석은 허공이 그 어떤 저항도 부여하지 않으므로, 이것이 원자가 단순히 어떤 미규정적 장소를 가지는 경우가 아니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보다 사유의 속도로 움직일 때, 원자들은 엄격히 말해 -장소적’(non-localisable)이다. 이런 의미에서 원자는 미분소, dx와 아주 흡사하게, 다시 말해 미규정적인 채로, ‘감각 형식의 핵심적 특성 중 하나를 결여한 채 작동한다. 둘째로 원자들은 마치 미분적인 것들이 규정되는 것이 오직 미분 관계 dt/dx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그것들 간에 형성된 상호 관계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다. 원자론의 경우 이러한 상호적 관계는 클리나멘에 의해 부여되며, 이것은 원자들의 어떤 집합이 감각적 의미를 취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원자들이 그것들 사이에 다양한 관계들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다양한 시-공간적 관계 안에서 현행화될 수 있다(DR 183/231). 그러므로 원자론은 이념에 관한 들뢰즈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실상 들뢰즈는 원자론이 이념을 충분하게 예화하는데 실패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원자는 여전히 감각적 규정들에 너무 긴밀하게 묶여 있기 때문이다. 원자의 본성에 관한 에피쿠로스의 설명은 감각적 물체들과의 유비에 기반하는 것이다. 우리는 원자들이 지각가능한 사물들에 속한 질들 중, 형태, 무게 그리고 크기, 필연적으로 형태에 수반되는 모든 것들을 제외한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고 가정해야 한다”(Epicurus 1926: 31).

 

4.5 두 번째 예시: 생물학적 이념으로서의 유기체(1845/2334)

이념에 관한 들뢰즈의 두 번째 예는 유기체의 본성에 관한 19세기의 논쟁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비교해부학이 유비 또는 상동성과 관련하여 알려진 바의 측면에서 유기체의 구조를 이해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전통적인 (그리고 전-진화론적인) 비교 해부학에 따르면, 동물의 부분들의 이름은 얼마간, 전형적으로 인간과 같은 다른 동물들로부터 유비적으로 비롯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기까지의 모델에서, 우리는 어떤 기관이 그 자체로 스스로를 영속시키는 유기체를 허용하면서 활동하는지를 기능적 역할을 살핌으로써 정의한다. 따라서 부분은 전체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이러한 관계의 중요성은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비교해부학자 중 한 사람인 조르쥬 퀴비에(Georges Cuvier)에 의해 명확해졌다. 그는 그 기관들의 관계를 결정하고 형이상학적이거나 수학적인 법칙들에 속한 것과 같은 필연성을 가진 법칙들을 수립하는 것은 바로 그것들이 상호적으로 서로 간에 주고받는 기능들과 조력에 관한 이러한 의존성 안에서이다라고 주장한다(Cuvier, quoted in Coleman 1964: 67). 그러나 부분들의 기능이나 형식이 다를 때, 어떤 상이한 항목들은 문제가 되는 부분에 할당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어떤 물고기의 지느러미과 인간의 팔 간에 유사성이 있다 하더라도,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기능적이고 구조적인 차이들이란 상이한 항목들이 서로서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목적론적인 관점은 진화론의 측면에서 스스로 문제적인 것으로 증명된다. 왜냐하면 진화는 자주 상이한 생명체들 사이의 동일한 구조의 기능 변화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화론을 가능하게 한 핵심적인 개념적 발전 중 하나는 조프루아 생틸레르(Geoffroy St. Hilaire)의 유기체들의 상이한 부분들 간의 상동성에 관한 입론이었다. 부분들의 형태나 기능에 따라 정의된 것으로 유기체를 이해하기보다, 퀴비에와 동시대인이었던 조프루아는 그것을 부분들 간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것으로 보았다. 기능보다 관계에 집중함으로써, 조프루아는 진화론의 핵심적인 결론 중 하나를 설명하는 하나의 설명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동일한 구조는 상이한 유기체들 안에서 그것의 기능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예컨대 지느러미는 팔이 된다). 조프루아는 그의 상동성들에 관한 사유를 가동시키기 위해 유기체들을 서로 간에 직접적으로 관련시키지 않고, 오히려 다른 유기체들이 예화되는 어떤 이념적 유기체의 초월론적 구조를 수립했다(그는 이러한 접근법을 초월론적 해부학이라고 불렀다).

 

조프루아의 연구에 관한 들뢰즈의 해석은 그가 조프루아의 꿈이라고 부른 것에 놓여 있는데, 이것은 무한하게 작은 뉴턴의 것, 세부적인 세계또는 매우 짧은 거리를 발견하는 것이며, 감각적이고 개념적인 차이와 유사성들의 대략적인 활동 아래에 이념적 연결들을 발견하는 것이다(DR 185/233). 그는 조프루아가 연결들에 대한 그의 강조로서 겨냥하고 있는 것이 관계들의 특정 유형들(조프루아의 사유에 중심적인 연결들)을 구성하는 미분적 요소들의 장(뼈들의 이념적 상호관계)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기반하여 들뢰즈는 조프루아의 초월론적 해부학이 그 세 가지 특성과 더불어 이념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념의 요소들은 감각적 형식도 아니고 개념적 의미도 아닌 것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초월론적 해부학은 중요한 것이 상이한 생명체들 안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뼈들의 감각적 속성들이 아니라, 그것들의 관계라는 사실에 기대어 이러한 요청을 충족시킨다. 둘째로 이 요소들은 상호적으로 결정되어짐에 틀림없다.” 이것은 핵심적인 것은 뼈들 자체가 아니라, 다른 뼈들과 유지하는 연결들, 즉 조프루아가 합성적 통일성’(unity of composition)이라고 부른 것이다. 셋째, “다양한 이념적 연결, 즉 미분적 관계는 다양한 시-공간적 관계성들(relationships) 안에 분명 현행화되며, 동시에 그것의 요소들은 현행적으로 항들과 형식들의 다양성 안에 구체화된다.” 들뢰즈는 상동성이 현행적인 항들 간에 직접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이성에 부합하고,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속도에 있어서, 가속과 중지들에 부합하는 어떤 본질의 현행화로 이해된다고 강조한다(DR 184/233). 즉 우리는 비교 해부학에 있어서처럼 현행적 항들의 유비적 상호관계에 따르기보다, 두 유기체의 현행적 부분들이 동일한 초월론적 본질의 현행화, 즉 합성적 통일성임을 인식함으로써 두 생명체 간의 어떤 상동성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쓴 것처럼, 이러한 접근법은 유전이론에서 그것의 상응점을 발견하는데, 여기서 유전자는 그 의미를 서로 간의 관계들로부터 취한다. 사실상 유전학은 조프루아의 생각, 들뢰즈에 따르면, “여전히 어떤 현행성을 즐기는, 또는 너무 현행적인, 실존”(DR 185/2334)인 바, 뼈들의 초월론적 상호관계에 관한 생각을 넘어선 어떤 진보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이념은 우리가 다양한 현상들(상이한 유기체들)이 서로 간에 관련되어 있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도록 한다.

 

4.6 세 번째 예시: 맑스주의적 의미에서 사회적 이념은 존재하는가?(186/2345)

들뢰즈가 고려하는 세 번째 영역은 사회적 영역인데, 여기서 그는 맑스에 관한 구조주의적 독해를 시도한다. 맑스는 전통적으로 역사주의 철학자이자 헤겔의 제자로 이해된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이 주체와 객체의 새로운 관계가 선행하는 것들의 모순으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을 보인 것처럼, 맑스는 이러한 독해에 기반하여, 어떻게 상이한 사회 구조들이 그 선행구조들의 내적 모순으로부터 발생하는지를 보여준다. 일련의 새로운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관계들이 발생한다는 것은 일련의 앞선 관계들(예컨대 자본주의 경제관계로의 이행을 내적으로 규정하는 봉건체제의 고유한 모순)이기 때문에, 맑스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역사철학이다. 들뢰즈는 여기서 알튀세르의 주장을 받아들이는데, 알튀세르는 적어도 후기 맑스에 있어서 헤겔과의 급진적인 단절이 존재한다고 논한다. ,

 

헤겔 변증법의 기초 구조들, 이를테면 부정, 부정의 부정, 대립자의 동일성, ‘지양’(supersession), 양의 질로의 전화, 모순 등등은 맑스에게서(그가 이러한 구조들을 물려 받고, 또한 그가 결코 그 모든 것을 물려 받지는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것들은 헤겔에게서 가지고 있던 구조와는 다른 하나의 구조를 가진다.(Althusser 2005: 934)

 

 

사실상 알튀세르에게 역사를 여러 시기들로 분할하는 것은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의 측면에서 맑스의 생산성 분석에서는 부차적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맑스의 분석에서 핵심적인 것은 생산양식으로서, 생산수단들(예컨대 토지) 간의 어떤 조합으로 파악되는 것이며, 생산의 작인들이다(그 자체로 직접적인 작인들로 분할된다. 이를테면 노동자들. 그리고 간접적 작인들로서는 경영자들). 알튀세르의 주장은 맑스의 분석에서 근본적인 것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또는 개별적인 인간조차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산수단을 배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항목들 자체 간의 관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주체’(과정 상의 구성적 주체라는 의미에서)는 이러한 점유자 또는 기능자들이 아니고, 모든 외양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인간론에서 주어진 것에 속한 확실성’, ‘구체적 개인’, ‘실재 인간이 아니며, 이러한 장소들 그리고 기능들의 정의이면서 분배이다. 진정한 주체는 이러한 정의자(definer)이자 분배자이다. 즉 생산 관계들(그리고 정치적이고 이데롤로기적인 사회 관계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관계들이기 때문에, 범주적인 주체 안에서 사유될 수는 없다.(Althusser and Balibar 2009: 180)

 

이러한 관계들이란 무엇인가? 알튀세르는 그와 같은 구조들이 이러한 관계들로부터 나올지라도, 그러한 관계들을 예컨대 지배와 예속에 속한 어떤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류라고 논증한다. 마치 착취처럼 가시적인 관계들을 다루기보다, 그는 이러한 표면적인 현상들 아래에 놓인 구조적 관계들에 대해 생각한다.

 

생산관계는 구조들이다. 그리고 평범한 경제학자는 경제적 사실들’, 즉 가격, 교환, 임금, 이윤, 지대 등등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이것들은 모두 그들이 기꺼워할 만한 측정가능한사실들이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전-뉴턴 물리학자가 낙하 물체들에서 인력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는, 또는 전-라부아지에적인 화학이 탈플로지스톤(dephlogisticated) 공기에서 산소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수준에서는 어떤 구조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물체들이 뉴턴 이전에 떨어지는 것이 보인것처럼, 맑스 이전에도 소수에 이한 다수 인간의 착취보인것이다.(Althusser and Balibar 2009: 181)

 

그러므로 알튀세르의 생각은 법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DR 186/234) 구조들처럼 표면적인 현상들이 노동자들의 역할과 생산 수단 간 관계의 아래에 놓인 구조들을 지지하기 위해 출현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맑스 독해는 들뢰즈의 이념 개념이 어떤 의미에서 연관되는가? 첫째로, 우리는 그의 분석 요소들이 그 관계들 바깥에서 어떠한 개념적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알튀세르가 논하는 것은 역할들이 생산수단들에 관련되는 방식이다. 만약 우리가 이것들을 서로 간에 분리한다면, 그것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기를 멈출 것이다. “생산의 사회적 형식이 무엇이든지간에, 노동자들과 생산수단들은 언제나 그것의 요인들로 남아 있다. 하지만 서로 간에 분리된 상태에서는 이러한 요인들 중 하나는 오직 잠재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맑스, Althusser and Balibar 2009: 175 재인용). 둘째로 이러한 잠재적 요소들은 서로간에 연결됨으로써 의미있어진다. 토지는 노동자들과 관련됨으로써 생산 수단이 될 뿐이다. 이때 노동자들은 정확히 이러한 관계를 통해 노동자로서 결정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구조는 다양한 공간-시간적 관계들에서 현행화될 수 있다. 요소들이 연관되는 방식에 따라, 상이한 현행적 구조들과 관계들, 따라서 사회의 상이한 형태들이 기초적인 생산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상이한 생산양식을 획득하기 위해, 이러한 상이한 요소들은 실재로 결합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결합(이 결과 실재 생산이 나온다)의 결과에 속하는 특유한 본성에서 의미있을 뿐인 특수한 조합 양식들 또는 결합’(Verbindungen)을 활용함으로써이다. 그것을 재산, 소유, 처분, 행유, 공통성 등등이다.(Althusser and Balibar 2009: 176)

 

따라서 맑스주의적 의미에서, 이념은 우리가 표면적 구조들에 관한 인간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인 연구로부터 멀어지도록 허용하며, 이에 따라 사회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4.7 이념들의 관계(186-7/235-6)

그렇다면 이념들은 서로간에 어떻게 연관되는가? 들뢰즈는 이념들은 그들 자신 안에 하부-다양체를 포함하는 다양체다”(DR 187/235)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이전의 두 가지 관찰로부터 나온다. 첫째 우리가 이미 보았던대로, 어떤 미분함수는 스스로 미분화될 수 있다. 이념들의 핵심 특성들 중 하나는 그것들이 미분화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 또한 이념들의 이념들을 부여하기 위해 더 멀리까지 미분화될 수 있다. 둘째로, 우리가 보았다시피, 이념들은 그것들이 해결되는 영역에 연관된다. 이것은 같은 이념은 우리가 찾는 해가 무슨 종류인지에 따라 상이한 현행적 상황들에서 표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실상 여기에는 세 가지 다양체의 차원이 존재하는데, 첫 번째는 수직적 차원”(DR 187/235)이다. 이것은 우리가 관련되는 요소들과 관계들이 무엇인지에 의존한다. 우리가 원자들, 뼈들, 또는 생산관계들로서 요소들을 파악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우리가 도달하는 해는 물리학, 생물학 또는 사회이론으로 각각 표현될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상이한 질서들을 가지는 반면, 이러한 질서들은 여전히 상호연관되는데, 여기서 물리학의 이념들은 생물학의 이념들과 같은 보다 높은 질서의 문제들로 해소될수 있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 이론도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체들의 구조 안에서 반성되는스스로를 발견할 것이다. 둘째로 수평적차원은 주어진 질서 내부의 어떤 미분적 관계들의 등급들을 취급한다(DR 187/235). 우리가 4.2에서 보았다시피, 반복적으로 어떤 방정식을 미분함으로써, 우리는 곡선의 본성이 변화하는 어떤 곡선을 따라 특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동일한 이념이 상이한 특이점들을 가진 이념들을 발생시킬 수 있다. 들뢰즈는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원뿔 절단면들의 예를 가져온다. 기하학에서 우리는 원뿔을 어떤 면에서 잘라냄으로써 곡선을 생성시킬 수 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원기둥을 절반 자르면, 그 절단의 표면(절단면)에서 하나의 원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이제 만약 우리가 원뿔의 절단면을 취한다면, 우리가 취하는 절단면에서의 원뿔의 각도에 따라, 우리는 여러 유형의 곡선들을 얻게 된다.

 

그림 2. 원뿔 절단면들 ([역자](왼쪽부터) 원, 타원, 포물선, 쌍곡선)

이 곡선들 각각은 모든 곡선들이 동일한 기초 형태로부터 만들짐에도, 상이한 특이점들(기울기가 0, 무 또는 무한인)을 가진다. -수학적 장에서, 우리는 조프루아의 비교 해부학이 동일한 구조가 모든 동물들의 뼈들 사이의 관계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이점들은 종들 내부에서 다양할 것이고, 따라서 물고기의 두개골에서 턱에 붙여진 동일한 뼈들이 포유류의 귀 안에서도 발견된다. 들뢰즈는 다양체의 마지막 차원, 즉 깊이의 차원을 수학에서의 군이론으로부터 나온 예를 통해 설명한다. 그는 이 맥락에서 실수의 덧셈과 변위 합성”(the addition of real numbers and the composition of displacements, DR 187/236)의 예를 가져온다. 구조주의 수학 집단인 부르바키(Bourbaki)가 주목했다시피, 실수의 덧셈과 변위 합성은 전통적으로 수학의 매우 다른 두 장에 속한다. 왜냐하면 하나는 불연속 단위들을 포함하고, 다른 하나는 연속적인 크기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응용 수학과는 매우 달리, 기하학의 기원과 대수의 기원 사이에는 (분명이 그것들의 기초적인 측면들에서) 언제나 이원론이 존재해 왔다. 왜냐하면 후자는 처음부터 불연속적 크기에 관한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전자는 언제나 연속적인 연장성에 관한 학문이었다. 이 두 가지 측면들은 무리수가 발견될 때까지 각각 대립적인 두 가지 관점을 야기시켰다.(Bourbaki 1950: 2212)

 

하지만 부르바키는 이러한 상이한 수학 분야들의 특정한 공리들의 표면적 구조 아래에서 우리가 양 분양를 발생시키는 구조들을 분별할 수 있고, 어떤 충분하게 정의되지 않는 방식으로 이해되는 각각의 분야의 요소들을 제공할 수 있다고 논한다. 따라서 어떤 관계들은 그 본성을 좀 더 종별화함에 따라 모호해지는 요소들 간의 관게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기하학과 대수의 구조 아래에는 그것들 모두가 공유하는 보다 심오한 구조들이 존재한다.

 

4.8 본질, 가능성 그리고 잠재성(186-8/235-7)

이념들이 현행적인 개별실체들 안에서 그것들의 표현을 발견한다는 주장이 주어지면, 우리는 어떤 이념을 사물에 속하는 일종의 본질로 생각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념들은 결코 본질이 아니다”(DR 187/236)라고, 또는 보다 정확히 우리는 이념을 본질이 정확히 우연, 사건, 의미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에서만본질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이념들이 막주름져있다”(perplicate)거나 서로 간에 상호침투한다는 그의 주장과 분리불가능하다(DR 187/236). 그의 분석의 여러 지점에서, 들뢰즈는 색깔의 이념을 백색광선에 견주고, 음향의 이념을 백색소음에 견준다(DR 206/258). 이것은 베르그송의 논문, 라베송의 삶과 저작에서 본질에 관한 그의 논의에 대한 어떤 참조점이 된다. 이 텍스트에서 베르그송은 여러 다른 색깔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것을 결정하는 문제를 생각하는데, 이에 따라 어떻게 우리가 철학적으로 색깔의 개념을 사유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려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색깔에 대해 ‘X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며, 이 질문은 들뢰즈가 본질에 관한 질문”(DR 188/236)으로 취급한 것이다. 이제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 질문에 대해 두 가지 답변이 있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제공된 본질의 질문에 대한 전통적 답변이다. 무언가의 본질을 규정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비본질적인(또는 우연적인) 속성들을 추상하여, 그 종(class)에 속한 모든 개체들이 가진 순수한 속성들에 도달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붉음으로 만드는 것을 붉은 색으로부터, 그것을 푸름으로 만드는 것을 푸른 색으로부터, 녹색으로 만드는 것을 녹샌으로부터 제거함으로써만 색깔의 이러한 일반 이념을 획득한다”(Bergson 1992: 225). 만약 우리가 이에 따라 색깔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마침내 추상적이고 텅 빈 어떤 개념에 도달할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색깔들 사이의 차이들을 야기했던 빛의 점진적인 소멸을 따라진행했기 때문이다(Bergson 1992: 225).

 

대안은 들뢰즈가 그의 막주름(perplication) 개념을 가져오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추상에 따른 진행보다 아래와 같은 진행을 따르기를 제안한다.

 

푸름, 보라, 녹색, 노랑 그리고 붉음에 속하는 천 하나의 차이나는 음영들을 택하고, 그것들을 수렴하는 렌즈를 통해 지나가게 하고, 하나의 점으로 모으는 것. 그때 그 모든 복사광채 안에서 위의 모든 색들을 에워싸는 순수한 백색광선이 나타난다. 여기서 백색광선은 그 아래 그것이 흩어지는 음영들 안에서, 그것의 분리되지 않는 통일성 안에서 다채로운 광선들의 무한한 다양성으로 지각된다.(Bergson 1992: 225)

 

이와 같은 생각은 단지 하나의 유비일 수 있다. 빛은 이 경우에 여전히 현행적 현상들의 선들을 너무 많이 따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념에 관한 해석적 개념을 분명하게 한다. 미분적 관계의 두 항의 결합이 어떤 곡선 위에 있는 모든 점들을 특성화하도록 하는 것처럼, 이념의 미분소들도 더불어 어떤 주어진 체계가 전개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사태를 특성화할 수 있게 한다. -본질적인 것을 배제함으로써 이것을 획득하기 보다, 이러한 상태들 각각에 대한 발생적 조건들을 긍정적으로 특성화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에게 이념은 사태의 본질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가능한 사건들의 총체에 대한 근거들로서, 어떤 체계가 전개될 수 있게 한다. 요소들이 어떻게 서로 간에 관련되는지에 따라, 상이한 사태들이 발생될 것이다.

 

분명하게도 만약 어떤 이념이 거기 침투하는 요소들의 다양체를 형성함으로써 이해되어야 한다면, 그때 그것은 사태로서 동일한 본성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사태 안에서 요소들은 막주름의 침윤적인 구조에 대해 어떤 대립적인 방식으로, 다시 말해 그 한계들(그것이 아닌 바)을 결정함으로써 규정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문제들이 그것의 해들에 내재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태들(이념들)을 위한 발생적 조건들은 사태들 자체와 동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에게 원자들이 그것들이 구성하는 감각적 객체들과 공-현존하며, 알튀세르에게 생산양식은 그것이 규정하는 현행적 관계들과 공-현존한다. 따라서 우리는 본성적으로 다른 두 계열을 가지는데, 세계 내부에서 발생하는 현행적 사건들과 그것들을 발생시키는 절단, 박리, 첨가의 이념적 사건들이 그것이다(DR 188/237).

 

나는 이념과 가능성에 관련된 논의를 소개하기 위해 이제 다소 앞으로 건너 뛰고자 한다. 우리는 이미 이념이 상이한 현행적 상황들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예컨대 조프루아의 조성의 통일성은 상이한 동물들의 해부학적 구조를 발생시키기 위해 규칙들을 제공하며, 맑스의 생산양식은 상이한 실재 사회조직들의 저변에 구조를 부여한다. 들뢰즈는 이념의 구조를 잠재적(virtual) 존재로 정의한다. 이제 들뢰즈는 탐구될 필요가 있는 잠재적인 것의 본성에 대해 세 가지 주장을 내놓는다. 그것은 현행적이지 않은 실재, 분화되지 않은 미분화(differentiated) 그리고 전체화되지 않는 완결이다(DR 214/266). 나는 처음에는 어떤 밀접하게 붙어 있는 개념으로 보이는 이런 상이한 주장들을 통해 그것들을 가능성의 구조와 대조하면서 나아가고자 한다. 사실 들뢰즈는 이 모든 것에서 유일한 위험성은 잠재적인 것이 가능적인 것과 혼동될 수 있다는 점이다”(DR 211/263)라고 주장한다.

 

잠재적인 것이 현행화되지 않은 실재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만약 우리가 가능성 개념으로 되돌아 간다면, 우리는 단지 가능적일 뿐인 무언가가 실현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우리는 칸트를 따라 가능한 대상과 실재 대상 간에는 구조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실재하는 100달러는 가능한 100달러 이상을 포함하지 않는다”(Kant 1929: A599/B629). 오히려 차이는 두 객체들의 실존적인 위치에서 순수하게 존재한다. 실재적인 100달러를 가능한 100달러와 구별하기 위해, 우리는 전자가 존재하는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가능성은 실존의 측면에서 현행성과 구별된다. 이제 잠재적인 것은 현행적이지 않은 실재, 추상적이지 않은 이념이 된다(DR 208/260). 이 장을 통틀어, 우리는 마치 미분계수가 현행적인 수와 다른 것과 같이 이념들이 현행적 사태와 본성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실재성의 측면에서 가능성을 현행성과 구별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더 나아가 잠재성은 그것이 우리가 현행적 개별체들 안에서 발견하는 질적인 것들의 발생을 책임지는 구조를 부여하는 한에서 실재적이다.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은 구조다”(DR 209/260). 잠재적인 것은 그것으로부터 야기되는 사태들의 구조에 관한 어떤 완결된 설명을 제공하며, 현행적 객체 자체만큼 객체의 실재적인 부분이다. 이런 방면에서 들뢰즈는 그것은 전체적이지 않은 완결적인 것라고 논한다(DR 214/266). 들뢰즈의 논점은 잠재성이 사실상 언제나 그것이 발생시키는 객체와 관련되어져 발견된다 하더라도, 현행성의 대응체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가 이전 장에서 논했던 가능성의 한계로부터 벗어난다. 거기서, 우리는 가능성 개념이 객체의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았는데, 그 이유는 분석의 보다 높은 초월적 층위에서 그것이 단지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가능한 객체는 완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에 비-존재 개념을 부가하는 실재 객체에 관한 생각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잠재적인 것의 완결성은, 비록 그것이 전체가 아니라 하더라도 모든 객체는 이중체”(DR 209/261)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떤 명제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간주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잠재성은 분화됨이 없이 미분화된다. 다시 말해 이것은 가능성에 속한 것에 대한 전반적으로 상이한 규정 과정에 따라 이루어진다. 들뢰즈가 논한 바에 따르면, “그것[가능성]은 개념 안에서 동일성의 형식을 지칭하는 반면, 잠재성은 이전의 조건과의 동일시를 근원적으로 배제하는 이념 안에서의 순수 다양체를 함축한다”(DR 21112/263). 우리는 차이와 반복1장이 무언가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통해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동일성 개념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을 충분히 다룬다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주체에 술어를 귀속시킴으로써 어떤 객체를 기술하기 때문이다(우리가 그것을 분화시킨다). 또 다른 규정 절차는 그 자체 미규정된 각각의 요소들 간의 관계를 야기시킴으로써 구조적 특성들을 발생시킨다(그것들은 우리가 4.2에서 보았다시피 미분적인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미분화된다). 들뢰즈는 명석함과 혼잡함, 그리고 판명함과 애매함 사이의 라이프니츠적인 구별과 관련하여 이러한 조직화의 두 양상들을 특성화한다. 우리는 1장에서 신이 모든 가능한 세계 중 가장 좋은 세계를 선택할 때, 라이프니츠의 세계 이해가 궁극적으로 가능성의 관념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공간적인 대상들의 지각이 개념적 관계들에 대한 어떤 혼잡된 지각이라는 그의 주장에서, 우리는 잠재성과 현행성 사이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통찰을 획득하게 된다. 신인간오성론(New Essays on Human Understanding)에서 라이프니츠는 객체에 대한 지각이 감각의 경계 아래에 있는 미시지각에 기반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이 이론에 따라 그는 아래와 같은 유비를 이어간다.

 

우리가 혼잡한 것으로부터 명확하게 끄집어낼 수 없는 바, 미세 지각의 보다 명징한 예를 부여하기 위해, 나는 파도의 그르렁거리는 잡음의 예를 사용하길 좋아한다. 파도 소리는 우리가 해변에 서 있을 때 우리에게 직접적인 인상을 준다. 우리가 마주하는 이 소리를 들으려면, 우리는 이것의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의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그것은 각 파도의 잡음들이다. 비록 이 미세한 잡음들 각각이 오직 혼잡하게 다른 것들과 결합할 때에만 그 자체로 알려진다 하더라도, 또한 만약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파도가 그렇게 존재하는지를 관찰할 수 없더라도 그러하다.(Leibniz 1997: 54)

 

들뢰즈는 이 문단을 철학의 언어 안에서 코드화되고 능력들의 다기한 실행으로 정향된 두 가지 언어들”(DR 214/266)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파도의 노도 소리에 속한 언어를 가진다. 이것은 명석-혼잡한 언어이다. 내가 파도소리를 전체로서 인지하는 한,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취한다는 것을 분명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함께 규정하는 요소들(파도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한에서 그렇게 할 뿐이기 때문에 그것은 혼잡한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파도들 자체의 언어를 가지는데, 그것은 잠재성의 언어, 판명-애매한 것이다. 반대로 만약 우리가 파도들 자체의 잡음에 초점을 맞춘다면, 파도들은 판명하게 지각된다. 이때 우리는 잡음을 전체로서 구성하는 미분적 관계를 파악하지만, 그것을 애매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 특정 관계들에 대한 우리의 초점은 전체로서 바다의 백색 소음에 관한 우리의 파악을 사전에 차단하기 때문이다. 명석 판명한 관념들에 관한 데카르트의 생각과 대조적으로, 들뢰즈의 주장은 명석함은 그것이 명석한 한에서 그 자체로 혼잡된 것이다”(DR 254/316)라는 점이다. 우리가 현행적 구조의 진부한 반복으로 빠지지 않으면서, 어떤 명제, 또는 경험의 조건들의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두 철학적 언어들 사이의 근원적인 발산 때문이다.

 

4.9 배움과 능력들의 불일치(188-97/237-47)

이제 우리가 이념에 관한 이해를 하고 있으므로,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3장에서 소개한 두 가지 주제로 되돌아갈 수 있다. 즉 배움(3.10)과 능력들이 관계(3.6). 우리가 배우기 위해 이념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한번 더 플라톤과 그의 가설 개념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우리가 선분이 비유를 보게 되면, 거기서 플라톤이 제안하는 두 가지 종류의 지식을 알게 된다. 즉 수학과 형상에 관한 지식이 그것이다. 그는 이 두 가지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것의 한 부분에서는 앞서 모방이 대상들로 되었던 것들을 영혼이 이번에는 영상들로 이용하여, 가정들에서 첫 번째 원리로 나아가는 식이 아니라, 결론으로 나아가는 식으로 탐구할 수밖에 없게 되지. 반면 다른 한 부분에서는 무전제의 원리로 나아가는 것으로서, 가정에서 나아가서 앞부분의 모상들도 없이 형상들 자체를 이용하여 이들을 통해서 탐구를 진행하네(Plato 1997b: 510b)

 

사유의 첫 번째 형식은 모상을 사용하는 것으로서 기하학(유클리드의 원리가 원형적인 모델인)적 장에서 발견되는 수학적 사유이다. 이런 경우 사유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연역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연역적 논증의 힘과 한계는 그 결론이 그 전에 안에서 함축적으로 가정되지 않는 어떤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할 수 있는 대부분은 단순히 우리가 처음에 가정했던 것을 함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것은 우리의 논증의 전제가 참이라는 것은 알기 위해 본질적이다. 왜냐하면 논증이 그 내용과 타당성을 획득하는 것이 그것들로부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은 전통적으로 절대적으로 명석한 전제들로부터 이념들을 일깨우거나, 데카르트의 경우에서처럼 명석 판명한, 따라서 의심의 여기자 없는 어떤 개념들을 정립함으로써, 우리가 가설을 단정적인 진술들로 변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제 우리가 본 바에 따르면, 플라톤은 이데아들[이념들]을 경험적인 상기(recollection)의 대상과 유비함으로써 이해하고, 데카르트의 명석 판명한 관념들[이념들]은 의식에 대해 완전히 분명한 것이다. 따라서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의식과 명제의 영역 안에 남게 된다.

 

들뢰즈는 두 명제들 사이를 직접적으로 움직여 가는 것 대신 이런 종류의 -모순’[부차-모순] 과정에 반대하여, 명제로부터 이념으로 그리고 어떤 해로 나아간다. 그는 부-무순의 과정에 속한 두 단계를 설명한다. “문제들과 ... 해의 경우에 있는 상관관계적 발생의 조건에 관한 규정” (DR 190/239). 들뢰즈가 이 맥락에서 배움에 관해 가져오는 두 가지 예는 수영 배우기와 외국어 배우기이다(DR 192/214). 이 두 예들은 베르그송의 유명한 예이기도 하다. 베르그송의 경우 수영의 예시는 아래와 같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이 수영하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수영을 배우기 위해 물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면서 시작해야 하고, 결국 이미 수영하는 법을 알고 있어야 하는 한에서, 수영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상 추론한다는 것은 언제나 견고한 근거로 우리를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매우 단순히 말하자면, 내가 나 자신을 두려움 없이 물 속으로 던져 넣는다면, 처음부터 나는 충분히 많이 단순한 발길질 연습에 시간을 들일 것이고, 점점 더 스스로를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킬 것이다. 이에 따라 나는 수영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지성에 따르지 않고 다른 방식을 알려고 애쓰는 것에는 어떤 어리석음이 있을 것이지만, 만약 위험을 고스란히 수용한다면, 행위란 아마도 추론이 묶어 놓고 해방하지 않았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것이다.(Bergson 1998: 192)

 

여기서 우리는 배움의 두 가지 방식들 사이의 대조를 발견한다. 어떤 명제적 차원에서, 수영을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생각한다는 것은 사유의 공리 안에 이미 함축된 것을 찾아 냄으로써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이미 수영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나는 결코 그것을 알 수 없다. 수영 배우기나 언어 배우기의 과정에 있는 들뢰즈의 보다 추상적인 분석은 우리를 서로 다르게 놓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문제의 세계로 밀어 넣는 다른 형태나 요소를 가진 우리 자신의 신체 또는 우리 자신의 언어의 특이점을 구성함으로써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DR 192/241). 그러므로 명제의 연역적인 불모성을 탈출하기 위해, 그는 사유가 스스로 이념의 수준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순은 우리가 이념적 미래나 과거의 사건의 단편들로 마주하게 되는 문제를 함께 분리정립하는 상관적 경우들을 발견하는 그런 것이다(DR 190/239). “부수적인 것들을 발견한다는 것은 들뢰즈에게 이 발견의 과정이 문제들로부터 출현하는 경우들과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념이 어떤 해석적인 다양체이므로, 이러한 요소들은 마치 빛의 그림자가 베르그송의 예에서 수렴렌즈를 통과하는 것처럼, 문제에 상응하는 이념을 발생시키기 위해 결합됨에 틀림없다. 일단 우리가 문제의 이념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현재적 사테와 다른 해들을 발생시키는 이념적인 특이점을 발견할 시도를 할 수 있다. 들뢰즈는 레닌의 사유를 예로 든다. 이러한 예에서는 경제적 이념(추상적인 생산양식)의 현재 상태로부터 추출된 것을 포함하며, 그래서 (마치 원뿔의 상이한 면들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다른 곡선을 제시하는 것처럼) 특이성들의 상이한 결합을 포함하는 해의 발생을 포함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사회로부터 그것이 발생하게 되는 문제적인 발생적 원리들로 이동하면서, 어떤 대안적 해, 또는 사회 구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비슷한 방식으로 우리는 동물들의 부분들 간에 직접적으로 관계들을 보지 않는데, 이는 그것들이 상이한 기능적 역할들을 가지지만, 그것들의 생산을 위한 초월적 규칙들을 통해 다른 것들과도 각각 관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유한다는 것은 명제로부터 명제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사유하기는 명제로부터 그것들이 발생하는 비-명제적인 문제적 장으로 되밟아 감으로써 창조적이 된다.

 

배움이란 단순히 하나의 경험적인 상태로부터 이념을 거쳐 다른 것으로 움직이는 것을 포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이념들 자체를 탐구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념들에 관련되는가? 아마도, 우선 우리는 해가 인식(또는 배움)의 측면에서 이해되는 상황들에 문제들과 해들의 용어를 적용해 왔다 할지라도, 들리즈의 문제와 해의 개념은 이보다 훨씬 더 넓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우리는 후에 이 지점으로 되돌아올 것이지만, 지금으로선 심지어 어떤 유기체는, 만약 그것이 문제에 대한 해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마치 눈이 빛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그것이 각각의 미분화된 기관들이라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DR 211/263).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미 보았다시피, 이념들이란 이성의 순수한 관심사가 아니라, 그것이 초월적 실행의 능력인 한에서 사실상 각각의 능력이 그것들과 연관된다. 우리는 능력들 각각이 어떤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현행적 항들 안에 그리고 다양한 언어들의 관계들에 체현된 음소들사이의 상호적 관계들의 잠재적 체계로 간주되는 언어학적 다양체를 취해 보자. 그러면 그와 같은 다양체는 그러한 언술(speech)의 초월적 대상일 뿐 아니라 하나의 능력으로서 언술을 가능케 하는데, 그러한 메타언어는 주어진 언어의 경험적 활용에서 말해질 수는 없지만, 잠재성과 공현존하는 언술의 시적 활용에서만 말해질 수 있고 말해져야만 한다(DR 193/2423).

 

이러한 경우에 언술의 능력은 현행적인 언술의 생산을 위한 규칙들을 가져다 주는 잠재적 다양체에 의해 가능성을 부여받는다. 만약 우리가 이념을 언술 구조에 관련시킨다면, 우리는 그것이 그 각각의 계기들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소들은 미규정적이지만 규정가능한 관계들로 진입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들은 언어의 표현성을 기술한다. 다음으로 어떤 개별적인 언술 행위는 이런 표현적 장의 적분에 상응한다(“각각의 변증론적 문제는 그것이 표현되는 기호적 장에 의해 이중화된다”[DR 179/227]). 그래서 언술 능력의 구성()은 차례로 그것과 연관된 잠재적 다양체(문제)를 결정한다. “능력의 초월론적 형식은 그것의 탈구되고 우월한 또는 초월적 실행으로부터 구별된다”(DR 143/180). 이런 의미에서 능력들 각각은 하나의 이념일 뿐 아니라 이념과의 관계이다.

 

우리는 이미 각각의 능력이 그것들이 본성적으로 다른 대상들과 관련하여 소통하는 한에서 다른 것들에 대해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감각의 대상은 기억의 대상과 본성적으로 달랐지만, 그것과 어떤 관계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능력들이 소통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우리가 일단 능력들 각각이 그 대상들이 그것들이 발생하는 해들의 영역에서 기술적으로(technically) 표현되기”(DR 179/227) 때문에 그 자신의 초월적 대상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들이 서로 간에 여전히 구별될지라도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은 간단하다. 경험적 수준에서, 각각의 능력들이 그 자신의 일련의 대상들(초월적이면서 경험적인)을 가지기 때문에 그것들은 구별된다. 능력들 각각이 경험적인 실행과 초월론적 실행 간의 차이를 담고 있는 반면, 이것은 오직 차이의 첫 번째 수준일 뿐이다. 차이의 두 번째 수준은 이러한 능력들 각각이 차례로 순수 차이의 문제에 대한 해인 지점이다.

 

이 조화로운 불일치는 스스로 절합되거나 서로를 끌어당기는 그러한 차이(Difference)에 상응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고, 상상하며 느끼는 등등이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지만, 사물이 오직 그것들의 초월적 실행에서 능력들의 분기(divergence)일 뿐이라는 것을 긍정한다.(DR 1934/243)

 

그러므로 각 능력은 이념의 표현이고, 차이 자체는 이념의 이념이다. 이런 방식으로, 능력들 각각은 다른 것들과 동일한 것이자 상이한 것이다(들뢰즈가 상식common sense과 대립시켜 역-para-sense이라고 부른 것이 이것인데, 이는 재현의 구조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능력들이 이념들과 관련되는 반면, 그것은 여전히 사유가 어떤 의미에서 다른 능력들보다 우월한 경우이다. 만약 우리가 언술(speech)을 채택한다면, 그때 우리는 음소들의 측면에서 구성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사유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이념들 자체이다. 따라서 사유는 이념의 이념이며 다른 능력들과 관계한다. 그러므로 사유와 모든 형식의 상식 간의 대립이 그 어떤 것보다 더 강력하게 남게 되는 반면, 이념들은 사유의 미분소또는 순수 사유의 무의식이라고 불리워져야 한다”(DR 194/244).

 

4.10 이념들의 기원(195-202/244-52)

우리는 이제 이념들 자체의 기원이 무엇인지 물을 위치에 있다. 들뢰즈는 우리가 지금까지 마주쳤던 것이 문제의 본성에 관한 재정향이라는 점에 주목함으로써 시작한다. 문제를 어떤 순수하게 주체적인 문제로 바라보기 보다, 우리는 문제를 탐색하는 것이 완전히 존재론적인 또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라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가 보았다시피, 유기체는 어떤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로 비춰질 수 있다. 사실상 물음-문제 복합체는 타당하게 말해, 존재가 그것에 의해 상실하거나 극복되는 물음 없이 대답하는 유일한 예이다(DR 195/244).

 

그렇다면 어떤 문제와 물음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들뢰즈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대답을 제시한다. “문제들 또는 이념들은 모험의 명법 또는 물음들의 형식 안에 출현하는 사건들로부터 방출된다”(DR 197/247). 이와 같은 명법은 우리가 이전 장에서 논의했던 조우(encounter)와 같은 어떤 것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생성의 세계 안에서 발견했던 순수하게 상대적인 규정들에 속한 사유 범주들(큰거, 작은 것)의 통약불가능성에 관한 발견과 상통한다. 하지만 반대 속성들과 관련해서 작동하기 보다, 들뢰즈의 조우는 강도의 순간에 있어서 재현적 장으로의 돌발적 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균열된 자아에 관한 2장에서의 논의(2.6)에서 우리는 재현이 가 실체적 본성을 가졌다는 어떤 자연적인 환영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다. 들뢰즈의 주장은 그 대신에 가 강도적 차이의 전-개체적 장으로 되짚어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블랑쇼와 관련하여 보았듯이(2.12), 재현이 걸리기 쉬운 이러한 환영은 항구적으로 강도의 이러한 파괴적인 경향에 의해 위협받는다. 이런 이유로 들뢰즈는 이념들은 균열 안에서 우글거리며, 그 틈새로부터 계속해서 출현하고, 수 천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구성되면서, 끊임없이 출현하고 물러선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DR 169/216). 이러한 강도와의 조우는 어떤 초월론적 작동에 관한 능력들을 불러 일으키며, 이에 따라 그러한 능력들이 이념들과 관계를 맺도록 한다. 물음들은 강도와의 조우와 그것에 응답하는 문제적인 무근거(unground) 간의 이러한 관계를 개괄한다. 이를테면, “문제들은 문제들과 그것들이 진행되는 명법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DR 197/247). 그러므로 지금까지 들뢰즈에 의해 제안된 해명은 플라톤적인 사유와 아주 밀접하게 이어진다. 들뢰즈는 플라톤의 경우 이러한 과정이 어떤 필증적인 원리 안의 근거로 이끌고 간다고 주장하는 반면, 들뢰즈에게서는 대신에 그것이 문제 안의 어떤 무근거로 이어진다. 근거와 무근거 간의 이러한 차이는 궁극적으로 단순히 필증적인 원리들이 그것들의 기반하고 있는 명제들의 체게로서의 구조와 동일하다는 사실과 관련된다(그것들은 판단의 구조를 따른다). 반대로 문제는 그것이 생성하는 해들과 본성적으로 다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참으로 알고 있는 것은 어떤 원리를 제공함으로써 해들을 근거지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참이란 판단의 기능이고, 문제는 일련의 판단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어떤 근거라기 보다, 하나의 무근거이며, 그 전체성 안에서 판단에 따르는 세계에 관한 전망을 탈안정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들뢰즈는 선결정된 규범들의 도덕적 명법”(DR 198/248)을 불러일으키기 보다, 오히려 주사위 던지기와 그 결정에 관한 생각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오히려 주사위 던지기에 관한, 열린 공간와 단 하나의 규칙으로서의 던지기에 관한 물음이다. 특이점들은 주사위 위에 있다. 그리고 물음들은 주사위 자체며, 명법은 던지기이다. 이념들은 던지기로부터 나오는 문제의 결합들이다.(DR 198/248)

 

명법은 사태 내부에서 문제의 예시(주사위 던지기)이며, 물음을 통해 스스로를 넘어서는 그 점들(주사위 자체)이며, 사태와 문제의 예시 자체를 발생시키는 문제를 향한다(주사위 위에서의 조합). 이념들은 그 조건들을 발견하기 위해 사태 너머로 우리가 나아간 결과로서 그러한 과정으로부터 나온다. 설명을 위해 남아 있는 비유는 주사위 자체 위 점들의 의미이다. 우리는 이것을 결정의 순간을 도입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배움의 첫 번째 사례에서 보았던 것처럼, 우리는 부가적 장들을 결합함으로써 하부-재현적 수준으로 움직여 가거나, 또는 이와 비슷하게 문제로 접근해 간다(베르그송의 예에서 우리는 걷는 것을 수영하는 것과 관련시킨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문제를 형성하기 위해 어떤 경우들을 결합할 것인가에 따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상이한 조우들을 함께 연결하고, 우리가 어떤 조우들에 관계되는지가 문제(상이한 일련의 특이성들), 이에 따라 우리의 이념들에도 상이한 강조를 가져다 줄 것이다. 각기 다른 부수적인 장들에 대한 관계는 우리에게 차이나는 이념들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어떤 주어진 던짐이 (객관적 이념을 부여하는 바) “우연 전체를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떠한가?(DR 198/248) 우리가 원뿔의 단면의 사례를 보았을 때(4.7), 우리는 우리가 원뿔 위의 단면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다른 곡선과 더불어 각기 다른 일련의 특이성들을 도출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각각의 곡선들은 원뿔의 객관적 특성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각각의 탐구는 어떤 객관적 문제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지만, 이러한 것들은 서로 배제적이지 않은데, 왜냐하면 각각의 탐구들이 원뿔의 각기 다른 절단면을 취할 것이고, 따라서 상이한 특이성들을 도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각각의 던짐이 문제의 객관적 구성임에도, “그렇지만 주사위에는 다양한 던짐들이 존재한다는 것, 즉 주사위의 던짐이 반복된다는 것의 이유이다(DR 200/251). 이런 의미에서 그 어떤 궁극적인 규정도 가능하지 않다. 거기에 인식이 함께 할 것이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특이성들의 장을 생성시키는 모든 물음의 계열이 아니다. 따라서 각각의 철학적 탐구는 그 자신의 특이성들의 장을 구성하는 바, 어떤 명법에 기반하여 스스로의 물음을 전경화한다. 그러므로 조우(encounter)에 충실하다는 것은 하나의 필증적인 원리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객관적 조직화로 이끈다. 마치 각각의 원뿔 단면들이 상이한 곡선을 우리에게 부여하듯이, 각각의 물음은 우리에게 특이성들의 어떤 차이나는 분배를 가져다 준다. 하지만 각 원뿔 단면들이 또한 각각의 물음도, 해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그 이념들의 측면에서도 차이나는 반복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단면들의 구조를 반복하기 때문에 하나의 반복이다. “반복은 특이성들의 이러한 방출이며, 언제나 다른 것들의 이중체를 만들거나, 다른 것의 재분배의 각 배치를 만드는 공명 또는 반향과 함께 한다”(DR 201/251). 이 점에서 들뢰즈는, 하나의 단일한 물음[하이데거의 존재물음-역자]을 강조하는 것이 주사위 던지기의 실재적인 구조를 지배할 위험을 무릅쓴다고 경고하기도 하지만, 물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강조와의 친연성에 주목한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저자들(하이데거, 블랑쇼)은 물음과 반복 간의 이러한 가장 근원적인 관계를 개척해 왔다. 하지만 비록 그것이 존재란 무엇인가?’(Qu’en est-il de l’etre?)라는 물음이라 해도, 결국에는 원래의 것으로 남을 단일한 물음을 반복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DR 200/251)

 

4.11 부정의 기원(2024/2535, 2068/25760)

우리는 차이와 반복의 초반부에서부터 들뢰즈가 부정성의 존재가 하나의 환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이제 이념에 관한 이론을 가지고 있으며, 부정의 기원에 관해 좀 더 만족스러운 해명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시 한번 초월론적 문제들을 이해하는 것과 경험적 해들 간의 혼동에 놓여 있을 것이다. 들뢰즈가 쓴 바에 따르면, “결코 부정의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문제적인 것의 존재인 어떤 비-존재가 존재한다. ()-존재 또는 ?-존재의 기호는 0/0이다”(DR 202/253). 문제적인 것[문제틀]은 그러므로 그것이 실존적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비-존재이며, 같은 식으로 미분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기초에 기반하지 않고서는 현행적이지 않다(브롱스키의 용어에 따르면, 그것은 어떤 강도적 양이다). 우리가 보았던 바에 따르면, 들뢰즈는 문제들을 객체의 모든 가능한 현행적 상태를 결정하는 바, 상호침투하는 다양체로 취급한다. 이런 의미에서 문제는 그 어떤 부정성도 담고 있지 않다. 배움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현행적인 사태로부터 이념들로의 움직임과 어떤 차이나는 가능한 해로 돌아가는 움직임을 포함한다. 따라서 배움과 해결은 대안적인 해에 도달하기 위한 분화에 잇따르는 바 이념을 규정하는 미분화(differentiation)를 포함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제 부정성은 미분화의 과정에도 분화의 과정에도 나타나지 않는다”(DR 207/258). 우리는 미분화가 어떤 긍정성을 형성하기 위해 현행적 사태를 수축시키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부정성을 수립하도록 이끌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분화는 그에 따라 우리가 이념으로부터 사태들을 끄집어 내는 과정이며, 그 자체로 이념의 긍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부정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여기도 마찬가지로 들뢰즈의 대답은 어떤 명제와 같이 구조화되는 것이 문제를 취한 결과라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베르그송의 또 다른 에시로 돌아갈 수 있다.

 

만약 내가 내 서재에서 무작위로 책 한 권을 선택한다면, 나는 그것을 한 번 힐끗 보고서는 이건 시집이 아니군이라고 말하며 서가에 다시 돌려 놓을 수 있다. 내가 정말로 책장을 넘기면서 보았던 것인가? 확실히 아니다. 나는 시집의 부재를 보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산문을 보았다. 하지만 내가 원한 것이 시집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찾고 있던 것을 내가 발견한 것과 관련하여 표현하고, 나는 이건 산문집이군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이건 시집이 아니야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기대와 주의에 속하는 언어에서 내 지각의 자료를 표현함에 있어서, 산문의 관념에 고정되며 그 외의 것은 듣지 못할 것이다(Bergson 1998: 221).

 

이 경우에 우리는 문제에 관한 우리의 규정이 문제 자체의 본성에 일치하는데 실패하는 한에서 어떤 지각의 단순한 실패를 가진다. “‘그것은 그런 경우가 아니야라는 것은 반대의 경우 다른 명제가 이에 상응하는 어떤 가설이 당시 충실한 문제의 조건들을 재현하지 않는 한 부정적인 것으로 넘어가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DR 206/257). 문제의 본성을 규정하는 것은 배움의 한 부분이며, 따라서 하나의 문제는 그것이 해결되는 동안 언제나 그릇된 문제 안에 반영되고, 그렇게 해서 해는 일반적으로 분리불가능한 오류에 의해 왜곡된다”(DR 2078/259). 하지만 일단 우리가 문제 자체를 명제들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실제로 문제의 불완전한 파악을 붙잡기만 하는 부정성은 세계에 관한 어떤 존재론적 특성이 된다. 만약 우리가 하나의 문제를 가능한 해들인 바, 그러한 경우들의 집합으로서만 이해한다면, 그대 이러한 가설들 각각은 이중 부정으로 둘러 싸이게 [된다.] 즉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없는 그러한 것 ... 하나는 훌륭하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DR 202/253). 왜냐하면 문제란 이제 해로서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우리는 해 안에 존속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부정성에 대해 어떤 고유한 실존성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제 만약 주르당(Jourdain)씨가 내 말을 듣는다면, 분명히 그는 두 가지 외침들로부터 산문과 시가 책에 나오는 두 가지 언어 형식이라는 것과 이 알려진 형식들이 있었고, 산문과 시 둘 모두가 아닌 어떤 언어[자연언어-역자] 위에 그것이 덧씌워졌다고 추론할 것이다. 시도 산문도 아닌 이것에 대해 말한다고 그는 가정할 것이고, 더 나아가 그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고 볼 것이다. 즉 그것은 어떻든지 간에 단지 어떤 거짓-관념일 뿐이다(Bergson 1998: 221).

 

들뢰즈가 주목하다시피, 핵심은 대립과 한계는 상호변화가능하다(DR 203/253)거나 달리 말해 부정(이것은 저것이 아니다)은 무언가가 규정되는 방식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부정이 현행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문제적인 것의 규정에 속한다는 것이라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이러한 규정이 실재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취해지는가 아닌가와는 상관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논의의 핵심은 한계와 부정을 통해 (윤리적 실재 또는 개념적인) 대상들을 규정하기 보다, 미분소들의 상호적 규정을 통해 작동하는 규정에 관한 상이한 이론이다. 따라서 부정은 우리가 모든 규정을 대립을 통한 규정으로 이해할 때 등장할 뿐이다. “부정성의 형식들은 사실상 현행적 항들과 실재적 관계들 안에서 등장하지만, 그것들이 현행화되는 잠재성으로부터, 그리고 그것들의 현행화의 운동으로부터 차단되는 한에서 그러하다”(DR 207/258)

 

4.12 현행화(214-21/266-74)

만약 우리가 현행적 객체들의 근거들을 일련의 가능성으로 이해한다면, 그때 분명히 우리는 어째서 현행적 대상이 그것이 가진 속성들을 가지는지를 설명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속성들은 이미 가능성의 구조 안에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행적 사실 안에서 이것은 이와 같은 해명의 어떤 약점으로 드러나는데, 왜냐하면 만약 가능성과 현행성 간의 유일한 차이가 실존 여부라면, 현행성으로 가는 가능성의 전개를 설명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맹목적인 분출, 즉 언제나 우리의 등 뒤에서 발생하는 순수한 행위 또는 도약으로서 존재에 대한 지각을 강요받으면서 모두 아니면 무라는 법칙에 종속된다”(DR 211/263). 들뢰즈에 의하면, 그런 전개가 일어난다는 것을 설명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는 잠재성의 판명-애매 구조가 명석-혼잡한 현행적 관계들의 구조 안에서 현현행화되는 방식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극화(dramatisation)라고 불리워지는 과정에 의해 획득되는데, 여기에는 공간들의 주름운동과 미분비로 움직이는 과정들이 포함된다. 4장에서 들뢰즈는 이념의 관점에서부터 이러한 과정을 개괄한다. 하지만 다음 장에서 볼 것처럼, 이념 단독의 측면에서의 해명은 부적합하며, 충분한 해명은 강도가 수행하는 역할에 관한 이해를 요청할 것이다.

 

우리가 보았던 바와 같이 들뢰즈는 현행적 대상과 관계들의 생산 조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현행적인 것의 과정을 논하면서, 그는 발생학에 집중하는데 이것도 또한 형식들과 관계들의 발생을 다룬다. 우리가 하나의 알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완전하게 분화되지 않은 형태로부터 그것의 종을 규정하는 다양한 질들로 에워 쌓인 어떤 것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프루아의 초월론적 해부학에서 알았던 것처럼, 그의 주장은 두 동물들을 다 포괄하는 구성적 통일성을 바라봄으로써, 그리고 이것이 현행화되는 방식을 봄으로써만 우리는 어떻게 해서 상이한 부분들이 상이한 유기체들로 현행화되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우리가 공평하게 알 자체에 대한 이러한 점들을 공평하게 만들 수 있다고 논한다. “유사한 특성들을 가진 24개의 세포요소로의 분해, 이것은 그에 따라 2×12, (2×2)+(2×10) 또는 (2×4)+(2×8) ... 을 포함하는 동적인 과정임을 우리에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 것인가?”(DR 216/268). 사실상 들뢰즈는 발생학을 보다 일반적인 현행와 모델을 제시하는데 활용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과정에 속한 여러 단계들을 묘사한다. 세계는 하나의 알이지만 그 알 자체는 하나의 극장이다. 즉 단계화된 극장 말이다. 여기서는 역할이 배우들을 지배하고, 공간이 역할들을 지배하며, 이념들이 공간들을 지배한다”(DR 216/269). ‘공간들은 여기서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현행적 공간들을 지칭하지 않으며, 오히려 들뢰즈가 -공간 역동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킨다(DR 214/266).

 

우리가 하나의 세포가 유기체로 발전하는 것을 살필 때, 우리는 세포 자체가 그것이 발전해 가는 유기체와 연합할 속성들 중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그 전개과정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원자들과 분자들의 더미로 이해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배아가 겪어 나가는 과정들의 본성을 흐리기 때문이다. 그보다 들뢰즈는 발생학적 노선을 따라 우리가 배아를 동시적으로 유기체의 부분들을 구성하는 그 표면에서의 일련의 변형들을 통한 발전으로 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따라서 우리는 유기체의 발전과정을 바라볼 수 있는데, 이것은 자유로운 표면들의 증가, 세포막들의 펼침, 주름운동에 따른 함입, 군들의 지역적 대체를 포함하기 때문이다(DR 214/266). 이 과정은 이념에 따라 특성화된 운동학에 의해 지배된다. 들뢰즈가 주목했다시피, 이 운동학은 발전한 유기체의 가능한 운동들과 다르다. 왜냐하면 배아는 단순히 발전된 유기체를 위해 가능한 것이 아닌 변형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여기서 제안하는 것은 우리가 원자들의 집합에 대해 작용하는 원인과 결과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없는 어떤 과정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적합한 모델은 어떤 드라마와 같은 것 또는 뤼에(Ruyer)의 용어로 하자면, 발전의 사회학과 같은 것으로서, 여기서 우리는 요소들이 작동하는 역학들이라는 측면에서 그것들 간의 상호작용들, 또는 그것들이 배아 내부에서 다른 요소들과 유지하는 관계를 이해한다.

 

우리가 볼 바와 같이, 거기에는 우리가 그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체라는 단어를 부여할 수 있는 한에서 그리고 사회체로써 어떤 개인들의 단순한 배치를 이해하지 않는 한에서, 명백히 유기적 형식들과 그것들의 전개과정에 관한 어떤 가능한 사회학이 있다. 하나의 사회란 일반적으로 언제나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이 일련의 조합적 주제들을 따라 구성된다는 것을 함축하며, 그들이 다양한 자극-상황에서 역할들을 수행하는 방식을 안다는 것을 함축한다. 여기서 역할들이란 원인에 관한 결과처럼 사회전체에서 개별체의 단독적인 공간적 상황을 자동적으로 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분화의 신비로운 측면을 동등 분할에 의해 생산되는 상황에서의 차이들의 효과로 만듦으로써 추방할 수 없다(Ruyer 1958: 91).

 

하지만 역동론은 순수하게 공간적이지 않으며 들뢰즈는 유기체들 사이의 차이는 배아 내부에서 작용하는 상이한 과정들의 상대적 속도들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는 조프루아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보다 엄밀히 말해서 배아는 그 자신의 시간을 구성하는 바, 그러한 과정들의 미분적 관게들에 의해 정의된다. 사실상, 들뢰즈는 역동론의 시-공간적 수준에서 우리가 거리들과 시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우리가 공간과 시간 자체의 차원들을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불임과 다산에 대해(암컷 성게와 수컷 환형동물의 예에서) 다음 예들을 고려해 보자. 문제 특정한 부계 염색체들은 새로운 세포핵으로 체화되거나, 또는 원형질 속으로 퍼져 나가게 될 것인가? 물음 - 그 염색체들이 곧 도달하게 될 것인가?(DR 217/270)

 

따라서 과정은 어떤 수준에서 시간과 공간의 외연적인 장의 구성에 앞서 작동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과정은 두 가지 수준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우리는 유기체의 발생을 어떤 종들의 사례로, 그리고 부분들의 수준에서 가진다(들뢰즈가 질화가능성의 요소라고 부르는 것 [DR 221/274]). 그러므로 분화는 유기체의 외연적 규정들(그것의 크기)과 그것이 소유하는 질들의 규정 둘 모두를 발생시키는 과정이다. 세포 전개의 과정은 따라서 수학적 공간에서 미분적 활동들의 적분으로 세계 안에서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두 경우 모두에서, 그것들은 우리가 어떻게 두 가지 상태, 즉 그것들이 본성적으로 다른 상태들 사이에서 운동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차이와 반복의 마지막 장에서 들뢰즈는 강도의 관점으로부터 이념들이 극화되거나 강도적 장에서 실행되는지에 관한 설명을 하기 위해, 이러한 사유를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