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차이와 반복]>(헨리-소머스 홀)_1부_2장_반복 그 자체
*원문서지: Henry Somers-Hall, Deleuze’s Difference and Repetition,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3, 55-95
2장 반복 그 자체
2.1 서문
2장은 우리가 이미 마주했던 두 개의 주제를 개괄한다. 서문에서 우리는 비합동적 등가물에 대한 논증이 어떤 방식으로 어떠한 개념적 동일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차이의 가능성을 드러내는지를 보았다. 2장은 반복의 현상을 탐색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동일하지만(만약 그것들이 동일하지 않다면, 거기에는 그 어떤 반복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차이나는 요소들을 가진다(만약 그것들이 구별될 수 없다면, 우리는 또한 어떤 반복도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사건만을 가지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주목하는 바, 재현은 반복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다른 요소들과 동일한 반면, “변화는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 즉 정신 안에서 새로운 차이를 생산한다”(DR 70/90)는 것에 주목함으로써 반복 개념을 제시하려고 애쓴다. 반복은 이 경우에 주체가 구성요소들을 취하는 방식으로 가능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반복이란 종합이라는 관념에 매여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기에 반복의 두 가지 형식이 있음을 발견한다. 즉 하나는 헐벗은, 물질적 반복으로서 표면에서 활동하고, 다른 하나는 옷입은, 정신적 반복으로서 헐벗은 반복을 가능하게 한다. 게다가 반복의 표상 아래에, 반복의 두 번째 양태는, 1장의 결론을 되풀이하자면 어떤 강도적 반복이 존재할 것이다.
두 번째 주제는 반복 자체보다 다소 폭넓지만, 그것과 연관된다. 서문에서 우리 자신이 세계와의 관련을 조건짓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우리 지식의 몇몇 측면들이 아프리오리한 것으로 드러난다는 칸트의 주장을 간략하게 논했다. 따라서 예컨대 『순수이성비판』의 1부 초월적 감성론(Transcendental Aesthetic)에서, 칸트는 공간이 우리 자신이 세계에 부과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기하학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정당화한다. 우리가 공간적으로 외적 객체를 조직할 때, 우리는 기하학이 이러한 조직화의 전개에 관한 과학이며, 필연적으로 외부 세계의 구조에 조응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 주위에서 발견한 객체들의 조응하는 세계는 따라서 칸트에게 종합의 결과이다. 나아가 칸트의 주장은 우리가 종합을 발견하는 곳마다, 종합되어야 하는 객체 뿐만 아니라, 그러한 종합을 책임지는 어떤 주체를 전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 장에서 우리가 볼 것처럼, 칸트의 초월철학은, 그것이 구성되는 경험적 대상들을 취급함에도, 들뢰즈가 전통 형이상학에서 발견한 실수를 반복하기 쉽다. 그러므로 2장의 핵심 질문들은 주체의 활동에 기반하지 않는 경험의 조직화에 대한 어떤 사유를 제시하는 것이 가능한지 아닌지다. 이 질문은 들뢰즈에게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는 칸트적인 종합 개념에 대한 대체 수단을 제공할 수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만약 종합에 관한 칸트의 사유가 옳다면, 조직화는 언제나 어떤 중추적 동일성을 함축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차이라는 합당한 개념은 전개 불가능한 상태에 놓인다.
들뢰즈는 2장을 흄에 관한 분석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1953년에 나온 『경험론과 주체성』(Empiricism and Subjectivity)에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 흄의 기획과 칸트의 그것 사이의 차이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어떤 초월론적 비판에 착수하게 되는바, 이때 우리 자신을 방법론적으로 본질적인 확실성 – 본질의 확실성 - 을 제공하는 평면으로 환원하게 된다. 우리는 묻는다 어떻게 거기 무언가가 주어지는지, 주체에 어떤 것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그리고 그 주체는 그 자체에게 어떤 것을 어떤 식으로 줄 수 있는지. 비판은 순수하게 내재적인 관점에 우리를 정립하면서, 경험적이 되며, 이는 그것의 규칙이 결정가능한 가설에서 발견되고 그것의 모델이 물리학에서 발견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한다. 우리는 묻는다. 주체는 주어진 것 안에서 어떻게 구성되는가? 주어진 것의 구성은 주체의 구성을 위한 여지를 부여한다(ES 87).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매우 다른 기획들을 가진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주체와 객체라는 개념에서 시작하여 어떻게 둘이 서로 간에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방법론적으로 환원된 평면”은 판단에 수반하는 재현의 장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우리의 모델에 따라 판단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난 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만나면서 겪었던 동일한 난점으로 우리를 이끌 처지에 놓인다. 대신에 흄의 접근법은 주체에 앞서 주어진 것에서 시하면서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이것은 차례로 그 주체가 주어진 것을 그 자신의 범주들로 체계화하는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장에서 들뢰즈의 목표는 어떻게 세계가 주체에 의존하지 않고서 구성되는지에 대한 ‘흄적인’ 연역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가 능동적 종합이라고 부르는 칸트적인 종합 개념과 주체를 현실적으로 존재토록 하는 종합의 다른 형태, 즉 수동적 종합으로 일컬어지는 것을 구별한다. 주체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설명함으로써, 들뢰즈는 또한 왜 철학자들이 주체의 존재를 설명하기보다 그것을 전제한 채로 세계의 구성에 관한 칸트적 사유와 같은 어떤 것을 믿도록 잘못 인도되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칸트가 객체의 세계를 경험할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 채택한 세 가지 능동적 종함 각각이 어떻게 주체가 구성되면서 선험적인 종합을 전제하는지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장에서 나는 들뢰즈가 취급하고 있는 세 가지 종합을 개괄하기 위해 잠깐 옆길로 들어가 칸트의 비판철학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장 중 하나를 살피고 싶다.
2.2 배경: 칸트에 있어서 시간의 세 가지 종합
우리는 비합동적 등가물(0.6)로부터 나온 논증에서 칸트에 있어서 감각적인 것(칸트의 용어로는 직관)과 지성적인 것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한 논증은 지성이 세계를 조직하는 방식과 객체가 공간 안에 현전하는 방식 사이의 종별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손의 특성(handedness)와 같은 규정들, 즉 순수하게 개념적으로 특성화될 수 없는 그런 규정으로 이끈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질문을 가져오게 된다. 만약 경험적 세계가 우리의 인지 능력들의 생산물이라면, 어떻게 해서 종별적으로 차이나는 두 능력들이 서로 간에 관련될 수 있는가? 칸트 자신은 “현상이란 매우 잘 구성될 것이므로, 지성이 통일성의 조건들에 부합하도록 그것들을 발견하지 않아야 한다”(Kant 1929: A90/B123). 다시 말해 직관에는 지성이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수 있다. 그는 인식이란 몇몇 종류의 종합을 포한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시작한다. 달리 말해 진술을 한다는 것은 상이한 개념들을 통일체로 합치는 것을 포함한다. 칸트는 종합을 “상이한 재현들을 함께 놓는 행위, 그리고 하나의 인식 행위에서 그 재현들 안에 있는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는 행위”(Kant 1929: A77/B109)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이해한 것처럼, 이 종합의 모델은 판단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판단의 행위는 하나의 단일한 행동에서 다양하게 있는 것의 이러한 통접(conjunction)이다(A는 B이다). 칸트의 본질적인 주장은 우리가 수행하는 세계에 대한 판단이 그와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적 세게는 그 자체로 동일한 능력들에 의해 일련의 종합을 따라 구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초월적 방식 안에서, 다시 말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적 경험에 앞서서 이루어진다. 세계에 관한 우리의 판단과 그 구성 사이에 이러한 평행성 때문에, 칸트가 종합을 위해 사용하는 모델은 판단이다.
능력들의 관계에 관한 난점에 있어서 칸트의 해법은 개념적 사유가 경험 안에서 어떤 필연적 역할을 한다는 논증을 포함한다. 지각이 단순히 직관을 요청하는 반면, 경험은 우리가 대상의 세계를 경험한다는 생각을 포함한다. 이제 우리가 세계에 관한 우리 경험을 바라볼 때, 칸트는 객체에 관한 관념이 직접적으로 감각적 직관에 주어지지 않는다고 논한다. 오히려 우리의 세계 경험은 대상을 구성하는 바 – 이를테면 감각-자료 대신에 – 객체 또는 객체-성의 개념을 전제한다. 따라서 연역에 관한 질문은 다음과 같이 재정식화될 수 있다. 단순한 현상들 보다 객체의 세계를 우리가 경험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초월론적 연역이 행하는 바, 대상의 개념을 우리에게 부여하는 - 개념 능력 – 것은 지성이다. 엄밀히 말해 지성은 경험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다른 능력들 간의 간극에 다리를 놓는다. 이러한 결론을 증명하기 위해, 칸트는 경험이 세 가지 종합에 놓여 있다고 논증한다. 그것들은 객체들의 구성과 관련된 규칙들로서의 범주들로 우리를 이끌면서, 차례로 주체와 객체를 정립하도록 요청한다.
첫 번째 종합은 칸트가 ‘포착의 종합’(synthesis of apprehension)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는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경험한다면, 우리의 경험은 무차별한 통일성에 속해 있을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칸트는 우리가 상이한 시간들에서 다른 순간들을 경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순간들의 집합을 가지기만 해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순간들을 통일한 시간적 연속의 부분으로 경험해야 한다. 우리 [경험의] 부분들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통일하는 시간의 종합 없이, 우리 모두가 만나는 것은 서로 간의 관계없이 일련의 순간들이다. 이제 칸트는 우리가 특수한 경험적 체험들을 서로 간에 관련시키는 능력이 어떤 보다 깊고, 초월론적인 종합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시간 안에서 상이한 순간들을 서로 간에 관계시킬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마찬가지로 시간 자체를 어떤 통일된 구조로 종합할 수 있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첫 번째 종합은 통일된 시간적 틀거리로 현전하도록 하기 위해 “통괄하며 통합”(Kant 1929: A99)한다.
포착의 종합은 동일한 시간적 연속에 속하는 상이한 순간들을 인지할 수 있게 한다. 칸트는 우리가 자주 이런 종류의 관계들을 특별히 습관들의 응축에 있어서 상상력의 연합 원리를 사용하면서 활용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어떤 패턴을 보거나, 어떤 멜로디를 매우 자주 듣는다면, 우리는 그 다음 신호나 악보를 기대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의 특수한 습관들 자체가 경험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이 아닌 한에서, 우리 상상의 부분에 대한 경험적 종합이다. 일반적으로 습관을 응축할 가능성은 주체의 부분에 관한 두 번째 초월론적 종합을 함축한다. 하지만,
만약 수은이 가끔 붉고, 가끔은 검고, 가끔은 밝으며, 또 가끔 무겁다면, 만약 인간이 때로는 이것으로 또 때로는 저 동물의 형상으로 변한다면, 만약 하짓날에 때로 국토가 과실로 뒤덥히고, 때로는 얼음 그리고 눈으로 뒤덮힌다면, 나의 경험적 상상력은 중수은을 생각하면서 붉은 색을 떠올릴 기회를 결코 갖지 못할 것이다(Kant 1929: A100–1).
현재의 순간과 밀접한 과거 순간을 경험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경험적 상상력이 발견하는 그러한 밀접성들을 생성시키는 상상력 안에 생산의 초월론적 종합이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선 긋기라는 칸트의 예시로 돌아가면, 우리는 이러한 더 심오한 종합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표상들을 연합할 가능성이 거기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연합가능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상이한 순간들을 함께 관련시키기 위해서, 나는 나의 현재 경험들과 지나간 과거의 순간들과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내가 생각 안에서 선을 그린다면, 그것은 내가 완결된 사유를 위해 현재의 순간과 연접하는 이전 순간들을 재생산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종합은 제 차례에 세 번째 종합을 포함한다. 경험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경험의 상이한 순간들 간에 어떤 밀접함을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 이러한 경험의 상이한 순간들은 의식의 통일성으로서 다른 순간들과 관계될 필요가 있다. “우리사 사유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전에 어떤 순간을 사유했던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의식함이 없이는 일련의 재현들을 재생산하는 것은 공허하다”(Kant 1929: A103). 칸트는 이 점을 아래와 같이 논한다.
“나는 생각한다”는 것이 우리의 모든 재현들에 수반하는 것이 가능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내 안에서 무언가가 표상된다 해도, 전혀 사유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그 표상이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닐 것이라는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Kant 1929: B131–2)
우리가 빌딩 주변을 걸을 때, 우리는 빌딩에 대한 일련의 관점들을 획득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이한 관점들을 동일한 빌딩에 대한 관점들로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의 조건은 내가 빌딩에 관한 나의 지각들인 바 그것들에 함께 관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단순히 일련의 겉모습들의 단편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보다 더 논의를 진행할 수 있는데, 의식의 통일성 없이 단지 상이한 빌딩들의 외양들을 보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단순히 어떤 종류의 통일성 없는 일련의 현상들을 본다. 그것들은 다른 어떤 것과 연결되지 않는다. 이제 이것이 핵심이다. 칸트는 경험(즉, 단적인 감각이나 현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지식을 주는 세계와의 관계)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같은 주체에 속한 것으로서의 현상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그러한 현상들은 어떤 통일성을 전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모든 현상들의 순간들에 통일성을 주는 것이 바로 대상 개념인데, 이것은 모든 현상들의 계기들을 봄으로써 우리가 그것들을 통일할 수 있는 동일한 기초적인 객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대상 개념은 의식의 통일성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즉 칸트를 따라 우리는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주체와 객체 개념을 요구하지만, 정확히 그것들이 경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체와 객체에 관한 직접 경험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개념들이 경험에(그리고 종합에) 필연적으로 앞선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그것들을 전제할 필요가 있는 반면, 그것들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이 점은 우리가 들뢰즈에게서 시간의 세 가지 종합과 관련하여 칸트의 데카르트 비판을 볼 때, 중요해질 것이다(2.6).
우리는 이제야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칸트는 능력들이 서로 관계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일단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주체는 객체적 통일성으로 현상들을 종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범주들이 우리에게 그것이 대상인 어떤 것임을 드러내는 본질적인 규정(어떤 실체나 속성 등등)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지성의 범주들이 종합이 발생하는 규칙들을 제공한다는 것이 이해된다. 따라서 우리는 현상들이 객체의 관념에 그것들을 관계시킴으로써 경험으로 종합되어지고, 현상들을 객체의 관념에 연관시키기 위해, 우리는 대상 일반을 통괄하는 규칙들이 필요하다. 이것들이 우리 개념적 사유(칸트의 용어로 지성)의 범주들이다.
칸트의 사유는 들뢰즈가 이전 장에서 반대하는 것을 보았던 여러 개념들 사이의 상호관계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칸트는 본질적으로 대상성의 관념, 판단 그리고 종합이 모두 상호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경험을 객체에 관계하는 주체에 대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우리는 판단의 개념을 불러오도록 강제된다. 이제 이 모든 개념들이 상호적으로 서로간에 함축된다고 드러나면, 우리는 들뢰즈가 찾고 있는 일종의 하부재현적(subrepresentational) 사유를 전개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들뢰즈의 응답은 이러한 생각을 끌고 가는 종합의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주장은 칸트가 객체의 시간적 세계가 우리에게 출현하는 것에 대해 본질적으로 심리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초월론적 수준에서 상술한다는 것이다. 칸트에게서 의식적 종합은 판단의 형식을 취한다. 내가 어떤 판단의 순간들을 사려하거나 모을 때(“탁자는 빨갛다”), 그것은 이러한 표상들(탁자, 붉음)을 서로 간에 능동적으로 관련시키는 것은 바로 나다. 이 모델을 사용함으로써, 칸트는 주체에 종합을 끌어 매면서, 판단에 의해 궁극적으로 지배되지 않는 종합의 어떤 형식은 제외된다. 그러므로 들뢰즈의 접근법은 의식의 능동석와 주어진 것의 수동성 간의 날카로운 분리에 기대지 않는 시간의 종합에 대한 대안적 사유를 제시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칸트적인 분배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는 재현의 세계를 구출하기 위한 가공한 노력에 해당된다. 여기서 종합은 능동적으로, 그리고 ‘나’ 안에서 동일성의 새로운 형식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에 수동성은 종합 없는 단순한 수용성으로 이해된다(DR 87/109).
이런 식으로 들뢰즈는 우리의 경험이 또한 어떻게 의식에 선행해서 발생하는 종합의 결과인지, 그리고 판단의 구조에 관한 우리의 정립에 선행하는지를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이와 같은 종류의 사유를 제공하는 것은 2장의 핵심적인 사항이 될 것이다.
2.3 들뢰즈에게서 시간의 첫 번째 종합: 흄(70–9/90–100)
들뢰즈는 흄의 유명한 논제, 즉 “반복은 반복된 객체 안에서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않으나, 그것을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 무언가를 변화시킨다”(DR 70/90)라는 말로 시작한다. 들뢰즈의 예를 취해서, 만약 우리가 어떤 연속과정, AB AB AB를 가진다면, 그때 반복하기는 연속 안의 객체들 AB의 기능일 수 없다. 만약 그것들이 반복의 과정에 따라 다소 변경되면, 그것은 더 이상 반복되는 동일한 사물이 아니게 될 것이다(그것이 어떤 ‘반복’이었다는 단순한 사실에 따라 그것은 차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A를 지각할 때 B를 기대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칸트는 상이한 독립적인 순간들이 상상력의 재생산의 종합에 의해 서로간에 어떻게 관련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지만, 흄에게 그와 같은 생각은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가설이 정신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전개될 때, 그러한 작용은 인간과 짐승들에게 공통될 것인 바, 우리는 동일한 가설을 둘 모두에게 적용해야 한다. [...] 그러한 체계들의 공통적인 결함은, 철학자들이 정신의 활동으로 생각하고 들여온 것인데, 그러한 체계들이 사유에 있어서 어떤 미묘함과 정교함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단순한 동물들의 능력을 초과할 뿐 아니라, 어린 아이와 우리 종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적합하지 않다. 여하튼 그들은 가장 탁월한 천재적 능력과 지성을 겸비한 인물들로서 같은 감정과 감응들을 수용한다. 그와 같은 미묘함은 진리의 단순성에 반하는 것으로서, 어떤 체계의 결함에 대한 소중한 증명이다.(Hume 2000: 1.3.16)
흄이 지적하는 바는 습관을 응축하는 능력이 칸트가 묘사한 그러한 미묘함에 필적하는 인지능력을 가진 생명체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러한 능력들과 관련된 어떤 설명도 정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얼마간의 긍정적 사례들로부터이 추론보다, 들뢰즈는 흄이 습관형성을 어떤 과정, 즉 그것에 따라 AB 연쇄과정이 상상력에 의해 일반성을 형성하기 위해 함께 응축되는 과거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과정으로 이해한다고 논증한다. 상상력은 앞선 순간들의 연쇄를 저장하는 것에 의존하는 지성의 양적 관계처럼 작동한다기 보다, AB 관계의 질적 인상을 전개하기 위해 마치 ‘민감한 평판’(sensitive plate)처럼 작동한다.
이쯤해서 우리는 시간의 개념을 가지는데, 이런 경우 습관이 과거에 기반하여 미래를 예상한다. 시간에 맞춤한 AB를 관찰해 온 후, A를 지각할 때, 어떤 미래 B를 예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습관은 우리에게 과거와 미래 사이의 관계를 부여한다. 여기서 시간의 종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흄은 아래와 같이 우리의 시간 지각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관찰하는 동안, 우리의 정신에서는 어떤 연속적인 지각들의 연쇄가 있게 된다. 이에 따라 시간의 관념은 우리에게 항구적인 현재로 존재한다”(Hume 2000: 1.2.5). 습관은 이러한 연쇄를 체계화함으로써 시간이 종합에 이르며, 이에 따라 과거 순간들의 장과 미래 예상의 지평을 생성시키는 것이다. 여기서는 단순하게 연쇄를 가진다기 보다, 특정한 인상들이 (질적으로) 유지되며 그 유지된 우리 인상들에 기초하여 다른 것들이 예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지되는 과거의 면면들과 현재 내부에서부터 예상되는 미래의 면면들에 의해 시간의 모델을 가지는 것이다.
들뢰즈의 방법적 사유는 어떻게 능동적 종합이 수동적 종합에 기반하여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것을 겨냥하며,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더 높은 수준의 종합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해 사유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목해야할 첫 번째 논점은 들뢰즈에 의하면 경험의 흐름의 체계화가 주체의 구성이라는 것이다. 즉 “습관은 주체의 구성적 뿌리이며, 그 뿌리로서 주체는 시간의 종합, 다시 말해 미래의 조명 하에서 현재와 과거의 종합인 것이다”(ES 92–3). 잠시 후 나는 이 논점으로 돌아오고 싶지만, 만약 종합이 주체의 구성이라면, 우리는 이제 능동적 종합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는 일단 주체가 출현하면, “상상력 안의 질적 인상에 기반하여, 기억이 그 자신의 ‘시공간’에서 그것들을 보존하면서 구별되는 것으로서 특유한 경우들을 재구성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과거는 더 이상 보존되는 즉각적인 과거가 아니라, 재현적이고, 반성적이며 특정하게 재생산된 반성적 과거인 것이다”(DR 71/92). 따라서 들뢰즈의 주장은 우리가 이러한 과정을 우리 자신에게 재현할 때, 우리는 칸트가 개괄한 그러한 구조들의 유형을 통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그릇된 인상을 부여한다. 즉 시간을 종합하는 작업이 그런 능력들 자체에 의해 수행된다는 그릇된 인상이 그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과정을 단순하게 재현함으로써 사람들은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므로 들뢰즈에 따르면 시간 다양체의 종합은 과거와 미래가 생성되는 관념들에 따라 선재한 종합에 의존하며, 이때 감각의 무차별적인 계기들이 습관을 통해 서로 간에 연결된다. 따라서 보다 상위의 능력들의 측면에서 칸트의 능동적 종합은 정확하게 이러한 능력들에 의해 재현될 수 없는 선재하는 종합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습관의 응축 과정을 통해 구성되는 주체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우선 주체는 단순히 인상들 자체의 조직화다. 따라서 이것은 종합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지 종합의 행위주체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습관은 여기서 주체의 한 부분에 대한 능동성의 형식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기대의 양태로서, 들뢰즈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응시(contemplation)로 이해된다. 이제 들뢰즈가 주체라고 주장하는 바는, 바로 예상과 보존을 포함하는 시간의 응시인 것이다. 이와 같이 수동적인 것으로 습관을 이해하는 것은 칸트와 유사한 생각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칸트에게서 종합이란 주체의 능동성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이러한 응시의 모델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여러 함축이 있다.
첫째로 시간의 종합은 단순히 순간의 연쇄들로서가 아니라 예상의 리듬들에 따라 조직된다. 습관의 시간은 공간 위에 조성되는 수학적 시간이라기 보다, 베르그송의 지속과 같이, 우리를 기다리도록 강제하는 어떤 질적인 것이다.
둘째, 만약 주체가 단순히 조직화된 구조로의 시간의 종합이라면, 우리가 그와 같은 시간의 종합이나 조직화에 맞닥뜨리는 곳마다, 어떤 자기성(self)과 마주칠 것이라는 말이 된다. 즉 “내밀한 응시가 수립되는 곳마다 자기가 존재한다”(DR 78/100)는 것이다. 이것은 습관이 그 자체로 어떤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세계를 통괄하여 작동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사실상 이 종합은 심리학적인 영역의 구축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것에 앞선 물질적 세계 안에서 작동할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심장이 그것이 만드는 현실적 움직임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특정한 지속(심장 박동)에 속하는 일련의 순간들 속으로 어떤 본질적으로 무차별한 연쇄를 조직하는 한에서 응축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만약 심장이 습관에 따라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세계에 속한 거의 모든 것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이해 가능하다. 들뢰즈는 이 점을 아래와 같이 논한다.
아마도 모든 것, 바위, 숲, 동물 그리고 인간 심지어 악타이온(Actaeon)과 수사슴, 또는 나르시소스와 꽃, 우리의 행위와 욕구가 응시라고 말하는 것은 역설일 것이다. 하지만 역설은 그 나름대로 마찬가지로 응시일 따름인 어떤 응시이다.(DR 75/96)
이러한 논의의 결론은 시간의 조직화가 주체적임에도, 만약 모든 것이 응시라면, 모든 시간은 [주체와 관련 없이] 조직화된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세계는 순수한 연쇄라기 보다 상이한 톤들(tones)로 작용하는 공-현존하는 리듬들의 장으로 구성된다.
셋째로 우리가 어떻게 습관이 기능하는지 살필 때, 심지어 어떤 습관이 조직체[유기체]의 부분에서 하나의 욕구에 의해 추동될 때에도, 습관 자체가 객체들 자체의 측면에서 구성된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만약 내가 갈증을 느낀다면, 나는 분자적 구조인 H2O를 예상하거나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물만을 바란다. 습관은 인상들을 발생시키는 것의 측면에서 작동하지 않으며, 단지 기호와 관련해서만 작동한다. 그러므로 습관은 사물들의 재현과 더불어 작동하지 않고, 오히려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후 감응(affects)이라고 부를 것과 더불어 작동한다.
이것은 우리를 보다 전진적인 논점으로 이끈다. 들뢰즈는 심장이 응시하며, 확실하게도 그 심장이 우리의 일부라고 말했다. 우리와 우리의 심장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며, 우리를 구성하는 다른 모든 기관들과 기관들의 구성요소들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들뢰즈에 따르면 우리 자신들은 종합들의 체계들이다.
따라서 자기성(the self)이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즉 자기성 어떤 단순한 약화된 형식으로 그것을 줄곧 제한하면서, 상대화하거나 복수화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기성들은 애벌체 주체들이다. 수동적 종합의 세계는 이미 규정되어 버린 조건들 아래 자기성의 체계를 구성하지만, 그것은 어떤 형해화된 자기성의 체계이다(DR 78/100).
기호(sign) 개념은 여기서 중요한데, 왜냐하면 자기성의 수준들 사이의 관계들이 마치 자기성이 다른 것들과의 관계로 진입하는 일련의 구별되는 요소들인 양 이해될 수는 없고, 동일한 실체에 속한 수준들 사이의 상호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별체들 사이의 어떤 인과적 상호작용 보다 수준들(signal) 사이의 신호들을 가진다. 우리의 심장박동은 우리 세계 안에서 어떤 ‘기호’로 등장하지만, 이러한 기호는 심장 자체의 움직임과 닮지 않는다. 기호들은 수준들 사이를 이동하는데, 이것은 그것들을 발생시키는 자기성들과 본성적으로 다르다.
2.4 들뢰즈의 두 번째 종합: 베르그송(79-85/100-7)
들뢰즈의 첫 번째 종합은 칸트의 첫 번째 종합에 상응하며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일관된 시간적 틀거리를 따라 구성되는지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첫 번째 종합이 경험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충분치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들뢰즈의 주장은 첫 번째 종합이 과거와 미래를 가지는 시간의 구조를 구성하지만, 이러한 과거와 미래들이 오직 현재의 계기들로서 이해될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습관과 예상이다. 그것의 특유한 예상과 더불어 이 특수한 현재는 그 자체로 과거가 될 수 있고 다른 현재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이 발생할 수 있는 또 다른 시간이 존재해야만 한다”(DR 79/100).
이제 만약 우리가 세 가지 종합에 관한 칸트의 모델로 돌아간다면(2.2), 우리는 마지막 두 종합이 상이한 현재들이 서로간에 관계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어떤 생각을 제공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칸트의 주장은 우리의 상상력이 어떤 과거인 현재를 재생산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지성에 의해 그 자체로 인식된다는 것이었다. 들뢰즈가 주목한 바에 따르면, 그러므로 재생산은 이러한 두 가지 현재들의 공-현존을 포함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에서의 현재, 그리고 기억 자체가 그것이다. 과거의 사건을 상기(recollection)의 사건과 구별하는 것은 “어떤 것을 재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 자신의 표상(representivity)을 재현하는 바, 재현의 본질에 속한다”(DR 80/102). 즉 이것은 과거로서의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주장은 이 모델에 있어서, 과거가 단순히 “현재의 매개”(DR 80/101)로 이해된다는 점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결론이 수반된다. 첫째로 그와 같은 생각은 과거의 본성이 단순히 일련의 지나가버린 현재들이라는 추정에 기반한다. 둘째로 이는 과거에 속한 현재와 ‘지금의’ 현재로서의 현재 사이에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점에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위대한 책’ 『물질과 기억』에서 그와 같은 생각이 가지는 부적합성을 보여주는 그의 연합주의(associationism) 비판으로 돌아간다(DR 81/103).
현재의 경험과 연합되는 과거의 경험을 위해, 칸트는 우리는 선험적 종합을 요청한다고 하는 데, 이에 따라 우리는 인상들을 다른 인상들과 ‘유사성’(affinity)의 관계로 가져간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이러한 [앞선 현재들에 관한] 재생산의 재현이 가지는 한계는 사실상 연합의 형식들이라고 알려져 있는 닮음과 인접의 여러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재현되기 위해서, 앞선 현재는 현재적인 것과 닮아야 한다”(DR 80/102). 닮음의 재생산을 기초 짓는데 있어서 난점은 “우리가 두 가지 생각, 즉 닮음의 몇몇 지점을 가지지 않는다는 생각 또는 이런저런 지점에서 서로 간에 그것들이 접촉하지 않는다는 생각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Bergson 1991: 163).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제기하는 논점은 일단 우리가 칸트가 했던 방식대로 일련의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기억들을 분리해 버리면, 기억들이 다른 것들과 관계지어진다는 그 원리는 임의적인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가설에 따라 자기 충족적인 하나의 이미지가 그 자신을 다른 비슷한 것들이나 그것과 인접하여 주어진 것에 덧붙여 증강시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Bergson 1991: 165).
우리는 이 점을 들뢰즈의 법칙 개념에 대한 비판과 관련시킬 수 있다(0.2). 우리는 어떤 법칙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이산적으로 규정된 개별실체들의 어떤 장을 포괄해야 한다고 이해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러한 개별실체들 자체가 규정되는 방식에 대한 생각을 마련해 줄 수 없게 만든다. 이와 비슷하게 일단 우리가 이산적으로 규정된 현상들의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들이 서로 간에 관련되는 원리들을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선 그것들의 자기-충족성이란 것이 그 실체들이 다른 기억들과 내적으로 관계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어떤 외적인 힘, 이를테면 실체들에 대한 일련의 관계들을 부과하는 의식의 능동적 종합과 같은 힘을 요청하게 된다. 만약 이러한 관계 행위가 요소들에 외적이라면, 그리고 그것들 후에 온다면,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그 안에서 발견한 유사성에 따라 작동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한다. “사실상 우리는 서로 닮은 개체들을 지각하기 전에 유사성을 지각한다. 그리고 인접하는 부분들의 집합 안에서, 우리는 부분 이전에 전체를 지각한다”(Bergson 1991: 165). 베르그송의 논점은 능동적 종합에 주어질 수 있는 개체들로서 그것들의 구성에 앞서는 순간들의 자기-관계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능동적 종합이 앞선 수동적(비-의식적인) 종합에 초월적으로 의존한다는 주장이다.
베르그송은 과거, 또는 기억이 현재 또는 지각과 닮는다는 가정을 거부함으로써 기억이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대안적 사유를 제공한다. 우리는 세 가지 영역들이 칸트의 사유에서 함께 간다는 것에 주목함으로써 이 생각을 개괄할 수 있다. 그 세 가지는 상기-기억( recollection-memory), 습관-기억(habit-memory) 그리고 지각이다. 습관은 아마도 마치 상상력이 우리가 상기하는 과거로부터 오는 특정한 사건들을 재생산하는 것처럼 상상력에 의해 경험되는 현행적 과거의 재-현에 따라 생산된다. 이러한 계기들은 지각들과 동등한 것으로 재현된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알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사물의 세계로 향하게 하는 지향성을 포함하는 습관, 그리고 관심과 현재 경험으로부터의 이탈을 포함하는 특정 사건의 회상 간에는 어떤 명확한 차이가 존재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두 가지 관념들이 어떻게 관계지어져 있는지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베르그송을 따라 의식이 기본적으로 행위로 지향된다는 것을 인지함으로써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시간의 현재 순간이 지각과 행동 사이의 연결(즉 감각-운동sensory-motor)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원칙적인 관심은 과거로의 지향보다 미래의 가능성들로의 우리의 지향성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런 측면에서 기억은 명백히 쓰임새가 있다. 그것이 앞선 경험에 기반하여 행위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습관을 형성하는 것은 지각들의 동종성(affinity)을 요청한다는 칸트의 주장의 기반이었다. 이러한 요청은 유사성과 인접성이 과거와 현재 사이에 형성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기억이 지각과는 본성적으로 다르다고 믿는다. 기억이란 지각 그 자체와 같이 단순히 재현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 기억은 그것이 현재적인 상황을 품기 위해 생겨날 때, “감각을 부른다”(Bergson 1991: 141). 그래서 현재는 본성적으로 다른 두 가지 운동들의 통합이라는 위상을 가진다. 이러한 주장은 다수의 질문들을 이끌어 낸다. 만약 과거가 현재와 같지 않다면, 그것은 어떻게 구조화되는가? 그리고 만약 과거가 현재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어떻게 현재 안으로 통합될 수 있는가?
첫 번째 질문에서 시작해 보면, 우리는 행위에 포함되는 선택의 과정이 있기 위해 나타난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현재와 유사한 것은 현재적인 경험을 보존하기 위해 발생한다. 베르그송이 주목한 바에 따르면, 어린아이들은 자주 성인들 보다 상기의 능력이 훨씬 더 크다. 역으로 이것은 현재적 맥락에 적합한 경험들을 선택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에 비례한다(Bergson 1991: 154). 만약 이런 식으로 우리의 상기 내용의 세부사항이 역으로 행위에 비례한다면, 그때 “그의 삶을 살아가기 보다, 그것을 꿈꾸어야만 하는 인간은 각각의 순간에 그의 과거 역사의 세부사항들의 무한한 다양체를 눈앞에 떠올림에 틀림없다”(Bergson 1991: 155). 그래서 상기에 따라 기능하는 기억은 행위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어떤 지점에 이를 때까지 점점 더 거대한 과거의 부분들을 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순수 기억의 상태에서, 기억은 과거에 대한 완벽한 기록을 함축한다. 이제 베르그송에게 기억이란 미래로의 연속성으로 스스로를 관련시키는 현재와는 본성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리는 이제 기억의 구조에 관한 보다 명쾌한 사유를 제시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칸트의 모델이 기억을 분리되고 연속되는 것(베르그송의 규정에 따르면 ‘자기-충족적인 원자들’)으로 본다고 인식한다면, 그때 이 모델에 대한 거부는 우리가 더 이상 기억이 분리된 부분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의 특정한 기억들을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기억이 주체의 특정한 관심에 속한 순간들만이 아니라, 과거 전체를 보존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제 과거라는 것이 요소들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주어지면, 그것은 과거 전체가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실천적 관계들에 있어서 현전한다는 의미여야 한다. 유사성에 기초한 선택은 그 선택이 이탈 가능한 요소들을 함축하고 우리가 본 바에 따르면, 유사성이 경험주의적 모델에 따라 설명되기 보다 전제되기 때문에, 어떻게 과거의 작은 부분이 현재와 관련되는지를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선택의 과정 대신에, 우리는 우리 기억의 상이한 수준들 사이에 확장과 응축의 과정을 가진다. 행위와 가장 멀리 떨어진 순수 기억의 수준에서, 우리는 그것들이 가장 확장된 바의 기억을 가지는데, 이에 따라 상이한 경험들의 특유성이 나타난다. 어떤 한 지점으로 우리가 기억을 응축할 때, 우리는 특유성으로부터 일반성으로 이동하는데, 이때 우리는 현재 자체의 지점에 도달하지만, 그 현재는 여전히 전체성이다. 이것은 모든 과거 경험의 특유성이 상실되어 버린 습관의 형태 안에서 표명된다. 베르그송은 이것을 시간의 원뿔이라는 다이아그램으로 제시한다.
사실상 이 ‘원뿔’은 기억의 공-현존하는 평면의 전체 계열들로 분할되는데, 이것은 자극에 대한 우리의 반응 안에서 몇몇 자유를 우리에게 허용하는 조건들의 요청에 의존하는 과거의 응축에 관한 상이한 등급들을 드러낸다. 따라서,
나의 청각에 발생하는 외국어로부터 온 낯선 단어는 내게 언어 일반에 대해 또는 어떤 특정 방식으로 한 번 발음되는 하나의 음성에 대해 생각하게 할 것이다. [...] [이 두 가지 연합은] 두 가지 다른 정신적 배치에 대한, 내 기억 안에 있는 두 가지 구별되는 텐션의 등급들에 대한 대답이다. 후자의 경우에 사람들은 순수 이미지에 더 가까워지고, 전자의 경우 즉각적인 응답, 즉 행위를 향해 보다 적절하게 배치된다.(Bergson 1991: 169)
이러한 응축의 과정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베르그송의 사유는 다소 불분명하지만, 그는 아래와 같이 이에 대해 쓴다.
과거 전체를 실은 기억은 두 가지 동시적인 운동에 의해 현재 상태의 요청에 응답한다. 평행운동은 기억이 경험과 부합하기 위해 그 전체성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분할하는 것 없이도 행위로 가는 관점과 함께 하는 다소간의 응축이다. 그리고 이와 다른 회전운동은, 그것에 의해 자체로 순간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에 의해, 가장 유용한 것으로 증명될 면을 그것에 제시한다(Bergson 1991: 168–9).
들뢰즈는 순수 과거에 관한 이 생각을 세 가지 역설의 측면에서 제시한다. 이러한 역설들이 역설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 자신의 재현에 관한 사유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재현의 무능력이다. 우리가 과거를 비-재현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여기 부각된 역설의 문제들은 사라진다. 첫 번째 역설은 과거가 현재에 기반하여 구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만약 새로운 현재가 과거로서 구축되어야 할 과거를 요청하지 않는다면, 그때 보다 앞선 현재는 결코 지나가지 않고, 새로운 현재는 결코 도착하지 않을 것이다”(DR 81/103). 여기서 들뢰즈의 논점은 만약 우리가 시간을 일련의 원자적인 순간으로 보고 과거에 대한 관념을 개념화하려고 한다면, 어떤 간단한 논리적 문제와 만난다는 것이다. 과거의 구축을 위해 응답하는 바로 이(this) 현재를 위해, 과거는 새로운 현재에 의해 대체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새로운 현재는 오직 원래의 현재가 이미 지나간 것으로 구축되어버렸다는 조건 하에 등장할 수 있다(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위해 아무런 시간적 ‘공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순간들의 연쇄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 과거를 재현할 수 없다. 그래서 만약 과거가 현재에 속한 우리의 재현에서부터 연쇄적으로 구축될 수 없다면, 그것은 현재와 공-현존해야만 한다. 만약 과거가 현재로부터 구축될 수 없다면, 과거는 현재와 본성적으로 다를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현재를 규정하는 것이 자기-충족적이므로, 즉 그것을 구성하는 현재들의 원자적 본성으로 인해 과거는 비-원자적이어야 한다. 만약 그러하다면, 과거는 단지 현재와 공-현존하는 과거의 한 부분일 수 없고, 그것 전체이다. 마지막 역설은 선-재(pre-existence)의 역설이다. 과거는 현재의 지나감의 조건이므로, 현재에 앞서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재생산이 상이한 현재들을 서로 간에 관계 맺기 위해 순수 과거에 의존하는 동안 우리가 의식적으로 과거 사건을 상기할 때, 그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지나가 버린 현재로 나타난다. 궁극적으로 능동적 종합이 전제하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유사성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근원적인 수동적 종합이다. 따라서 재생산의 능동적 종합은 그 자체로 재현가능하지 않은 기억의 수동적 종합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수동적 종합은 칸트의 모델에서 지나간 현재의 중재에 의해 모호해진 과거에 관한 사유를 제안한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두 가지 종합이 두 가지 반복의 개념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볼 수 있다. 사실상 이 점에서 『차이와 반복』에는 네 가지 반복들이 나타난다. 즉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수준로서 습관과 기억, 그리고 이 수준들에서 작동하는 두 가지 종합의 양태로서 능동적 종합과 수동적 종합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 두 가지 수준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연합에 관한 질문, 즉 재현적 사유의 문제로 다시 한 번 되돌아 가는 것은 모든 순간들이 모든 다른 순간들과 더불어 어떤 종류의 유사성을 드러낼 때, 그것이 습관을 위한 어떤 기초로서 그 상이한 순간들이 어떻게 선택되었는지 설명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제 흄은 이 문제를 상상력의 응축 능력에 관한 생각을 끌어들임으로써 해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칸트의 생각과는 다른 것으로서, 칸트에게서 상상력은 공유된 속성들을 통해 이전 경우들로부터 현재의 경우들을 추론하는 것과 유사하게 작동된다. 우리는 여전히 상상력이 어떻게 그것이 응축하는 것 또는 그것이 그것의 개입을 위한 기초로서 고정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이것이 과거의 종합이 활동하는 그 지점이다. 우리가 방금 보았듯이, 베르그송은 과거를 원뿔로 표현하며 각각의 수준들이 과거 전체를 담고 있지만 그 응축과 이완의 상이한 수준들에서 그러하다고 본다. 응축과 이완의 각각의 층들은 상이한 유사성들의 장 그리고 사건들 간의 차이들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베르그송의 예시, 즉 외국어 단어를 듣는 것이 그 단어의 의미 또한 환기시킬 수 있다는 것, 또는 내가 그것을 들었던 처음 그때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종합은 다음의 언급과 관련된다. “현재의 기호는 한계를 향해 간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수준 자체의 선택을 강제하기 위해 오는 최대한의 응축이며, 가능한 수준들의 무한성 중 응축되거나 이완된 것 자체이다”(DR 83/105). 그러므로 흄이 말하는 바, 그 상상력은 행위와 관련된 기억의 특정한 평면에서의 현행화 지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상이한 응축들을 가진다. 즉 평면 자체의 응축, 그리고 기억의 평면을 현행적 세계와 연관시키는 응축이 그것이다. 베르그송의 사유는 첫 번째 종합이 그 안에서 발생하는 시간의 모델을 제공함으로써, 하지만 마찬가지로 어떻게 시간적 장의 상이한 응축들이 가능한지 설명함으로써 흄의 그것을 보충한다. “각각의 선택들은 그의 음조 또는 음색, 아마도 그의 노래도 마찬가지로 선택하지만, 곡조는 동일한 것으로 남으며, 모든 노래들 아래로 동일한 트-랄-라(tra-la-la)가 모든 가능한 음색과 음조들 안에 존속한다”(DR 83–4/105–6).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수동적 반복의 형식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습관의 반복으로서, ‘경험적’이며 순간들의 반복이다. 또 하나는 기억의 반복으로서, 동일한 과거가 일련의 차이나는 수준들에서 응축과 이완의 상이한 등급으로 반복된다. 습관의 반복은 시간성 또는 지속의 장 안으로 본질적으로 미분화된 요소들을 종합한다. 그렇게 하는 중에 들뢰즈가 ‘물질적’ 또는 ‘헐벗은 반복’이라고 부르는 것을 창조한다. 심장박동의 경우에서처럼 이것은 반복하지만, 오로지 그것 아래에 놓인 ‘옷입은’ 반복의 기초 하에서 그렇게 할 뿐이다. 이 반복은 기억에 기반하고, 들뢰즈가 ‘운명’이라고 부른 것을 위한 응답이다. 운명은 모든 것이 과거에 의해 결정되지만, 여기서 과거란 동시에 과거가 활동하는 수준의 선별을 통해 자유를 허용한다는 의미다.
2.5. 세 번째 종합 1: 시간의 순수 형식(85-9/107-11)
첫 번째 두 개의 종합이 우리에게 시간성의 모델을 제공하는 반면,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두 개의 종합 중 하나는 특권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두 번째 종합, 기억은 막 활동하기 시작하는 현재의 기여라는 측면에서 그러한 과거의 요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습관에 봉사한다. 그러므로 마지막 종합에서 들뢰즈는 두 종합들이 그것들을 오히려 무근거로서 근거짓는 세 번째 종합에 의존한다고 주장할 것이다(우리는 4장에서 근거와 무근거 사이의 차이로 돌아올 것이다). 만약 우리가 수동적 종합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세 번째 종합이 직접적으로 주체의 구성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 번째 종합은 구성하거나 구성되는 것 중 하나로서 주체에 선행하는 시간의 종합이다. 엄밀히 말해 세 번째 종합은 사실상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다고 해야 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두 종합과 마찬가지로, 들뢰즈는 어째서 세 번째 종합이, 재현적인 능동적 종합이 우리 세계의 구성 원인이라는 가상(illusion)으로 이끌어 가는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한 그의 전략은 앞선 종합에서보다 다소 더 복잡하다. 들뢰즈는 실체적인 주체는 오류추론, 즉 논리적으로 그릇된 논증의 결과라는 칸트의 주장을 취한다. 그는 칸트의 오류추론에 대한 해법, 즉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성의 정립이라는 논증(초월론적 연역에서의 ‘나’)은 모든 종합이 어떤 주체를 요청한다는 칸트의 잘못된 믿음에 근거한다고 더 멀리까지 논의를 밀어붙인다. 칸트와는 달리 들뢰즈는 그 자신의 초월론적 연역을 위한 무근거가 시간 자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어지는 절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라 들뢰즈의 주장을 검토해갈 것이다. 첫째로 나는 칸트의 시간 철학에서 특별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어째서 그것은 시간의 순수형식의 가능성을 개방하는지도 볼 것이다. 두 번째로 나는 어떻게 이러한 시간의 모델이 칸트의 오류추론을 통해 주체에 대한 비판을 이끄는지 살펴볼 것이다. 또한 들뢰즈가, 칸트가 전-범주적인 자아를 초월론적 연역을 위한 근거로 정립하는데 실패한다고 믿는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세 번째로 나는 들뢰즈가 시간의 순수하고 텅 빈 형식이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햄릿과 차라투스트라에 관한 저술들에서 그것의 연극적 재현에 해당하는 것을 살펴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들뢰즈가 세 번째 종합의 ‘비의적’ 교설이라 부른 것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우리가 『차이와 반복』 1장에서 발견했던 강도적 차이에 대한 생각과 연관시킬 것이다.
나는 세 가지 상이한 개념들과 연결되는 들뢰즈의 세 번째 종합에 관한 진술 중 하나로 시작하고자 한다. 그 개념들은 시간의 텅빈 형식, 세 가지 종합 그리고 경첩을 벗어난[탈구된] 시간이다. 나는 세 번째 종합을 열어젖히는 것은 세 가지 개념들 중 마지막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텅빈 형식 또는 세 번째 종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햄릿은 ‘경첩을 벗어난 시간’이라고 말한다. [...] 경첩, 카르도(cardo)는 그것이 측정하는 주기적인 운동(세계와 영혼 둘 모두의 시간과 일련의 운동)을 지나가는 딱 맞아 떨어지는 추축(cardinal point)에 대한 시간의 종속을 보증하는 것이다. 반대로 경첩을 벗어난 시간이란 탈구된 시간 또는 어떤 신적인 것을 그것에 부여하는 곡선 바깥의 시간, 그것의 과도하게 단순한 순환 형상으로부터 해방되는 시간, 그 내용을 구성하는 사건들로부터 자유로운 시간, 전복적 운동과 관련되는 시간이다. 요컨대 이 시간은 스스로를 텅비고 순수한 형상으로 드러낸다(DR 88/111).
경첩을 벗어난 시간이 의미하는 바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경첩에 놓인 시간이 의미하는 바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1978년 강의에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주축은 경첩에서 나온다. 경첩은 정확히 말해 돌쩌귀, 천체가 도는 공간을 잇는 돌쩌귀, 시간을 흐르게 하고 이른바 사방(cardinal points)을 통과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의 회귀에 주목한다. 아, 거기에 별이 또한 있다. 이제 나의 양들을 몰아갈 시간이다! (L 14/03/78)
들뢰즈는 여기서 시간의 본성에 관해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사고를 가리키고 있는 셈이다. 『티마이오스』는 창조자(데미우르고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 존재는 혼돈의 상태에 있는 물질에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우주를 창조하고자 한다. 데미우르고스는 “가시적인 모든 것 – 멈춰 있지 않고 일치하지 않으며,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것들 – 을 넘겨 받아, 무질서의 상태에서 질서잡힌 상태로 가져가는데, 이는 데미우르고스가 질서야말로 무질서보다 모든 방면에서 더 낫다고 믿기 때문이다”(Plato 1997e: 30a). 창조자 자신은 완벽하기 때문에, 그는 그 자신의 이미지처럼 가능한한 더 멀리까지 우주를 창조하고자 욕망한다. 창조자 자신은 영원하지만 이미 운동중에 있는 것으로 세계의 본성이 주어지므로, 그는 오직 영원성과 유사한 것으로만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제 영원한 것은 살아 있는 것의 본성이지만, 생겨난 어떤 것에도 충분하게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는 영원성의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가 우주에 질서를 부여함과 동시에, 그는 통일성 안에 남아 있는 영원성으로서 어떤 영원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데, 그것은 수에 따른 움직임이다. 이 수는 물론 우리가 지금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Plato 1997e: 37d-e).
그렇다면 시간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선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우주가 시간에 따라 자리 잡기 이전에도 비록 ‘무질서하게’이긴 하지만 여전히 운동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운동은 그 후에 등장하는 시간에 의존하지 않는다. 사실상 티마이오스는 시간이 우주에서 가장 완전한 요소, 즉 천체들(celestial bodies)에 근거한다고 믿는다. 천체들은 어떤 점에서 시간의 근거를 형성하는 것인가? 행성들은 어떤 질서잡힌 방식으로 움직이며, 측정과 관련하여 시간을 받아들인다(들뢰즈의 예에 다르면 별은 양을 몰아가야할 시간을 재현한다.)
이런 방식으로 또한 이런 이유 때문에, 낮과 밤, 하나의 순환 주기, 즉 가장 최적화된 경로가 생겨났다. 한 달은 달이 그것의 순환를 완결하고 태양을 추월할 때 지나간다.(Plato 1997e: 39c)
여기서 시간은 단순히 운동의 측정이다. 이 플라톤적 모델에서 핵심은, 시간이란 다른 무언가(이런 경우 수 또는 운동의 측정)가 자체로 드러나는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시간의 텅 빈 형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은 단순히 세계의 영원한 패턴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어떤 불오나전한 방식이다. 시간이 단지 질서의 다른 형식의 표현이기 때문에, 우선 우리는 이러한 밑에 놓인 질서를 제거할 것이다. 시간은 지성적인 것에 부수적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경첩을 벗어난다는 것은 지성적인 운동에 대한 시간의 이런 류의 플라톤적인 종속에 기반하지 않는 시간에 관한 이해로 이행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시간이 우선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특정한 내용 이전에 시간의 순수 형식의 가능성을 열어 볼 것이다. 이제 우리는 플라톤적 개념이 특별하게 근원적인 운동과 같은 어떤 것이 아니라고 느낀다 해도, 시간이 어떤 영원성, 즉 예지적인 것에 그리고 재현적 모델에 종속된다는 것이 단지 플라톤의 개념일 뿐 아니라 칸트 이전 철학에서도 일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라이프니츠는 시간과 공간이 단순히 “잘 정초된 현상”이며, 그것에 따라 우리는 사물들의 진정한 ‘개념적’ 질서를 적합하게 파악한다고 논증한다. 그에 따르면 시간이란 실재적으로 연속되는 것의 본질적 구조가 우리에게 현상하는 하나의 양태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시간은 질서잡힌 사물들의 이성적, 개념적 그리고 재현적인 방식에 부차적인 것이다. 시간은 선재하는 재현적 구조에 함축된다. 그러므로 ‘맞춰진다’(in joint)는 것은 기수적 질서에 따라 그리고 선재적인 재현적 질서에 묶인 채로, 돌쩌귀에 맞춰져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가 시간이 ‘경첩에서 벗어난다’고 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시간이란 오히려 연속적 양태로 존재한다는 칸트의 직관 이론의 결론을 주목함으로써 도식적인 대답을 할 수 있다. 연속이란 시간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양태다. 사실상 칸트에게 연속이란 단순히 우리가 시간을 배열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들뢰즈는 아래와 같이 이 점을 내세운다.
시간은 연속으로 정의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연속이란 오직 시간의 양태일 뿐이며, 공현존(coexistence)이 그 자채로 시간의 다른 양태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칸트가 단순한 분배를 하기 위해 사물들을 배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공간-공현존과 시간-공현존이 그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시간이 세 가지 양태를 가진다고 말한다. 지속 또는 영속성, 공현존 그리고 연속성. 하지만 시간은 셋 중 어느 것으로도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을 그것의 양태들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L 14/03/78)
따라서 시간을 지성과 본성적으로 다른 하나의 능력으로 만듦으로써 칸트는 그것을 단순히 연속적인 것으로부터 파생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으로 제시한다. 오히려 연속이란 질서잡는 시간의 방식이다. 이것은 연속에 앞서는 시간으로서의 시간의 텅 빈 형식에 관한 생각을 위한 길을 열어 놓는다. 들뢰즈는 이 생각을 습관의 연속적 구조와 기억의 공-현존적 구조가 둘 다 단순히 시간의 순수 형식 아래에 놓은 어떤 것의 양태들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취하게 된다.
2.6. 세 번째 종합 2-두 가지 상이한 오류추론(85–7/107–10)
들뢰즈는 경첩을 벗어난 시간에 관한 이 생각을 “칸트적인 코기토와 데카르트적 코기토 사이의 차이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다”(DR 85/107)고 주장하면서 주체와 연관시킨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는 “나는 있다, 존재한다는 이 명제는, 나에 의해 제기되거나 내 마음 안에서 파악될 때마다, 필연적으로 진리이다”(Descartes 1984a: 17)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데카르트 체계의 요체, 즉 데카르트 철학의 실정적 주장을 근거짓는 확실성의 지점이다. 데카르트의 주장은 의심하는 중에 있는 것으로서, 의심하는 그 ‘나’는 적어도 확실하게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오류추론에서 칸트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데카르트가 시간을 사유의 비본질적인 결정요소라고 추정함으로써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심하는 ‘나’는 사유하는 실체로서 그것의 본성에 따라 직접적으로 반성 가능하다(“데카르트는 오직 시간을 추방함으로써만 그의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DR 86/109]). 사실 우리가 초월론적 연역에서 보았다시피, 모든 사유는 시간 안에 정초되어야 한다. 그것은 사유의 본질적인 제한이다.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본질적인 문제로 들어간다. 객체는 우리의 인식과 일치하며, 이런 의미에서 실체의 범주는 우리가 판단에 잘 따르는 어떤 세계를 구축하곤 하는 무언가이다. 초월론적 연역이 보여주는 바대로, 그것은 가능한 대상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범주들 중 하나이다. 이제 데카르트는 어떤 제한(‘나는 생각한다’)을 제한되지 않는 대상(‘나는 존재한다’)에 적용하고자 애쓴다. 하지만 실체에 관한 우리 관념에 따르면, 실체란 주어진 무언가를 조성하는 방식이다. 칸트에 따르면 데카르트가 범한 실수는 그가 대상이 어떻게 (그것이 주어질 수 있는 형식 아래에서) 한정 가능하게 될 수 있는가를 숙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칸트에 의하면, 대상은 직관 안에 주어져 있으며,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는, 시간의 직관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조건에서만, 결정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사유하는 실체로서 도입한 ‘나는 존재한다’는 우리에게 직관으로 주어지지 않는 대상이다. 칸트가 주목하다시피, 우르가 자기성찰에 임할 때, 우리는 자기를 어떤 주어진 객체로 발견하지 않는다. “어떤 고정되고 영속적인 자아도 이러한 내적 현상들의 흐름들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다”(Kant 1929: A107).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종합하는 직관을 위한 하나의 형식으로서 자아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의 적실한 적용범위의 바깥에 제한을 가하고자 했기 때문에 유죄이며, 이러한 시도가 그를 오류로 이끌었다.
이것은 우리를 칸트의 철학 안에 있는 균열로 이끈다. 우리는 여기서 초월론적 연역으로 되돌아가는 조건과 연루됨으로써 무엇이 진행되는지를 볼 수 있다. 거기서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는 나의 모든 재현들에 수반할 수 있음에 틀림없다”(Kant 1929: B131)고 주장했다. 이것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통각(apperception)의 초월론적 통일성에 의한 선험적인 종합이었다. 이 앞선 종합은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범주들의 근거이기 때문이다(이것은 실체들과 같은 개념들에 앞선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오류는, 그가 두 가지 상이한 수준들을 뒤섞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주체적인 것으로서의 통각의 통일성이 어떤 대상으로서의 주체의 통일성으로 취해진 것이다(Kant 2005: 240). 이것은 우리가 오로지 시간 안에서만 우리 자신에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반성할 때,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현실적인 것 자체가 아니라(그것은 초월론적인 것이다), 단순히 그것의 경험적인 사후-효과일 뿐이다(‘나는 생각한다’는 단지 아래에 놓여 있는 종합과정의 결과일 뿐이다).
‘나는 생각한다’를 내가 의식하는 것에 있어서 자발성은 어떤 실체적이고 자율적인 존재의 속성으로 이해될 수는 없지만 그 자신의 사유를 경험하는 어떤 수동적 자아의 변용(affection)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이것은 그 자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에 수반하여 그 안에서 실행되고 있다(DR 86/108).
그러므로 우리가 교전하는 것들이 어떤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시간의 형식 아래에서 직관되는 어떤 주체며, 어떠한 시간적 객체가 주관하는 제한과 동일한 패턴들에 종속된다는 점을 성찰할 때, 그것은 수동적 자아이다.
칸트는 우리가 ‘나는 생각한다’에 의해 우리의 재현들 모두에 수반할 수 있기 위해서는 거기에 선험적이며, 능동적인 종합이 있어야 한다고 논증한다. 왜냐하면 다양한 것들의 통일성은 시간의 수동적 형식을 통해 경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의 가능성의 조건들에 대한 이러한 추론은 직접적으로 모든 종합이 어떤 능동적 주체를 포함한다는 생각에 놓여 있다. “상이한 재현들을 함께 놓는 행위와 하나의 인식활동에서 그것들 안에 다양한 것들을 파악하는 것으로서 종합에 관한 그의 정의”(Kant 1929: A77/B109)는 시간의 요소들이 단순히 수동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함축한다. 시간의 형식 아래에 제한가능한 ‘나는 생각한다’의 수동적 본성이 주어지는 한, 이에 따라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론적 자아를 정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우리가 어떻게 통합된 세계에 직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적 설명을 가지는데, 이것은 종합도 또한 수동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았던 바와 같이, 수동적 종합은 주체의 활동의 결과라기보다 그 주체를 구성한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생각한다’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들뢰즈에게 ‘그 자체로 수동적인 종합’(응시-수축)이다(DR 87/109).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단순히 그가 지성에게 모든 구성을 할당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위한 구성적 역할을 배제했기 때문에,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성을 내세우는 것이다. 만약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성이 우리 현상의 세계를 통합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그렇게 하는가? 들뢰즈에게 시간 자체가 수동적 자아와 그 수동적 자아가 조우하는 세계 둘 모두를 구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야기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새로운 계기를 도입하는 바, 그것이 바로 영원회귀다. 영원회귀에는 생각해 볼 만한 두 가지 교설이 있다. 영원회귀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통속적 교설과 우리가 이미 1장에서 만났고, 앞으로도 볼 비의적인 교설이 그것이다.
2.7. 세 번째 종합 3: 햄릿과 세 번째 종합의 상징(88-92/11-16)
일단 개념들이 우리의 직관을 따라 본성적으로 다른 것으로 이해되면, 시간은 영원성의 움직이는 이미지로 보여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운동의 수’든지 진정한 ‘사물들의 질서’든지 간에, 그것은 더 이상 재현적 구조 아래에 놓인 것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은 더 이상 단순히 어떤 혼란스러운 지성적인 한정이 아니다. 하지만 명확히 말해, 우리는 공간을 공-현존을 함축하는 것으로, 그리고 시간은 연속적 상태들을 함축하는 것으로 실재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시간이 개념적 한정들에 대한 비-개념적 관계라는 칸트의 관점은 어떤가? 또는 시간의 순수하고 텅 빈 형식은 무엇인가? 칸트는 우리가 앞선 모델에서 발견했던 한정의 질서를 역전시킨다. 다시 말해 시간을 아래에 놓인 연속의 현상 양태로 보는 것이다. 칸트에게 연속이란 시간에 관한 이전의 직관을 종합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이것은 재현의 파생적 형식으로 시간성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 그리고 근본적으로 비재현적인 어떤 것에 재현을 기초짓는 방법을 열어 놓는다. 연속이란 이제 본성적으로 연속적이지 않은 시간에 관한 직관의 한정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들뢰즈는 두 개의 수동적 종합에 있어서 두 개의 공-현존하는 계기들이 궁극적으로 그 둘 모두에 선재하는 시간의 순수 형식 안에서 통일된다고 논증할 것이다. 이 선재하는 시간에 대한 생각은 역설적으로 미래이며, 이것은 동시에 현재로서 규정되고 그 현재와 공-현존하는 과거로서도 규정된다. 세 번째 종합의 ‘비의적’ 교설로 들어서기 전에, 들뢰즈는 햄릿과 오이디푸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들을 통해 시간 구조의 이미지 또는 상징을 제안한다. 이 절에서, 나는 일단 이 ‘상징들’의 첫 번째와 마지막 것을 개괄하고자 한다.
들뢰즈는 여기서 드라마에 관한 로젠베르그(Rosenberg)의 개념을 위한다. 전통적으로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의 연기와 관련하여 이해된다. 『안티고네』와 같은 연극은 오빠인 폴리네이케스(Polyneices)를 매장하는 안티고네의 연기, 크리톤 왕에 의해 금지된 그 행위에 의해 이끌려 간다. 이와 같은 드라마의 경우, 로젠베르그는 여기서 제안되고 있는 것이 개별적인 것에 관한 법적 개념과 같은 어떤 것라고 적는다. 우리가 법을 살필 때, 로젠베르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도덕과 사회적 법의 개념들은, 예외적으로 인간에게 적용되고 다른 살아 있는 피조물들에 유비될 가능성을 무시하면서, 시간 안에서 지속하는 어떤 개별실체가 아니라, 특정 순간들 안에서 행위해 온 것으로 개별적인 것들을 정의하는 경향을 띈다. 행위들의 주어진 장면들은 어떤 판결을 초래하며, 이러한 판결은 개별성에 관한 인식의 분리불가능한 부분이다(Rosenberg 1994: 136).
이제 우리가 법적 인격 개념을 볼 때, 개인들의 통일성은 그들의 행위 자체와 관련하여 주어질 수 있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 그 보다, 누군가가 어떤 판사 앞에 온다면, 그 판사는 인격에 의해 지배되는 하나의 통일체로 보지 않고, 법에 대해 지속되는 행위의 관련성에 의해 통일되는 일련의 행위들로 간주한다. 그래서 로젠베르그가 주목하다시피, 살인자의 행위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의 행위와 대개 아무런 다른 점도 없다. “자동차에 타기, 속도를 높이기, 교통신호를 지키기”(Rosenberg 1994: 138). 다만 그들이 살인 자체를 앞선다는 사실에 의해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범죄행위를 볼 때, 행위의 분석을 위한 틀거리를 제공하고, 가해자의 행위를 통일하는 인위적인 구조를 부과하는 어떤 틀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법이다. 법의 경우, 로젠베르그는 만약 가해자로 추정된 자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 느닷없이 발견된다면, 법 앞에서 그의 전체 정체성은 허물어진다. ‘속도를 높이기’와 ‘교통법규를 지키기’라는 행위들은 이제 전반적으로 죄없는 관점을 짊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법은 미분화(未分化)된 규정들을 통합하는 능동적 원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어떤 능동적 종합에 따라 작동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전극에 대한 로젠베르그의 개념을 경첩에 맞물린 시간에 대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여기서 고전극에서 인물들의 놀라운 모습들은 단지 근원적인 법이나 근원적인 판결, 즉 인물의 운명의 표명들이다. 그러므로 “심리학은 맥베스나 리어 왕의 행위에 관한 그럴듯한 이론을 내세울 수 있지만, 그의 동기의 역량에 있어서, 우리는 ‘실재적 삶 안에’ 가능한 맥베스나 리어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우주적 법칙에 있어서 그러해야 한다”(Rosenberg 1994: 140).
이것은 『햄릿』과 어떻게 다른가? 들뢰즈는 ‘시간은 경첩을 벗어나 있다’라는 햄릿의 주장이 본질적으로 철학적인 주장으로 읽힐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햄릿』은 들뢰즈의 경우에 순전히 임의적인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우리는 연극 자체의 구조 안에서 시간과 연속/행위/운동의 역할들의 역전에 관한 암시를 볼 수 있다.
『햄릿』의 전반부는 햄릿 자신이 법적 의미에서 어떤 정체성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로젠베르그가 지적했듯이, 햄릿이 영국에서 돌아오기 전에 드라마는 그의 행위의 무능력을 드러낸다.
나는 모르겠다
왜 내가 아직 살아서 ‘이것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지
나에겐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할
이유도 있고, 의지도 그리고 힘과 수단들도 있기 때문에
(Shakespeare 2003: IV.iv.43–6)
이제 이 인용이 분명히 드러내는 바에 따르면, 햄릿은 그가 해야 하는 것을 매우 분명히 깨닫고 있지만, 단순하게도 그는 그것을 할 수 없다. 이런 한에서, 우리는 이상한 극적 구조를 가지게 되는데, 왜냐하면 만약 인물들이 법의 판결에 대한 행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해된다면, 햄릿의 다양한 말들은, 그리고 연극의 전반부에서의 말들의 사용은 단순히 그의 역할의 구조적인 것과는 관련이 없게 된다. 들뢰즈는 “햄릿은 여기서 정말로 행위의 순서에 있어서 시간이 요구되는 첫 번째 영웅인데, 반면 이전의 영웅들은 원초적인 운동의 결과(아이스킬로스)로서 또는 상궤를 벗어난 행위의 결과(소포클레스)로서 시간에 종속된다”(ECC 28)라고 쓴다. 로젠베르그의 해석은 정확히 이것이다. 즉 햄릿은 하나의 인격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어떤 정체성으로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햄릿은 그에게 할당된 역할의 바깥에 존재한다. 아버지의 복수라는 역할을 떠맡는 과제는 그에게 단적으로 너무 크다. 따라서 항해는 『햄릿』의 구조에서 필연적인데, 그것이 휴식이며, 그것을 통해 햄릿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를 감당할 만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무엇인가? 들뢰즈는 햄릿의 전반부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을 ‘아프리오리한 과거’와 연관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햄릿은 사건과 관련하여 과거에 존재한다(그는 여전히 그의 행위와 동등해지지 않는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과거와 무위(無爲)에 관한 두 가지 생각들로써 베르그송의 순수 과거에 관한 이론을 떠올린다. 햄릿은 연극의 전반부에 과거와 관련된 상태로 존재하며, 그 과거는 현재와 유리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를 행위와 연관시키는 것에는 오류가 존재하며, 그것은 그 자신을 법의 현행적 구조와 동일시하는 햄릿의 실수에 의해 되비춰진다. 들뢰즈가 햄릿과 오이디푸스에 관한 그의 논증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행위의 이미지를 경험하는 만큼 오랫동안 과거 안에 존재하며 스스로를 그와 같이 살아간다”(DR 89/112). 두 번째 시간, 즉 현실화하는 것은 현재의 순간이며, 여기에서 자아는 행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습관의 자아와 평행해서 자아의 재현(“행위의 이미지 안에 있는 이념적 자아의 투사”[DR 89/112])이 출현하는 장소다. 그러나 이러한 두 순간들이 관련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미래에 반해서다. 과거와 현재의 자아가 어떤 ‘비밀스러운 일치’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은 오직 미래이다. 이 비밀스러운 일치는 영원회귀에 의해 전개되는 일치다.
우리는 『햄릿』와 『차라투스트라』 간의 평행성을 볼 수 있다. 둘 모두 그들이 동등하지 않은 상태로부터 현실성 자체에 대한 그들의 행위로 움직이는 중심적 특성을 포함한다. 따라서 『차라투스트라』 의 대부분의 내용은 영원회귀를 사유하는 데 있어서 차라투스트라의 무능력으로 점철되어 있다(“오, 차라투스트라, 너의 열매는 익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열매들을 취할 만큼 익지 않았다”[Nietzsche 2006b: 117]). 『차라투스트라』의 이 첫 번째 부분은 과거의 질문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구원에 대하여」는 이 측면에서 중심적이다. 다시 말해 이 아포리즘은 과거에 대한 두 가지 다른 관계를 탐사한다. 차라투스트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오로지 복수 자체다. 즉 의지는 되돌아오는 시간의 과거에 순응하지 않는다”(Nietzsche 2006b: 111). 이제 시간에 관한 이 개념은, ‘그 두려운 우연’과 더불어, 재현에 속한 과거다. 이러한 틀 안에서 시간 자체는 원한의 토대로 드러나며, 인간은 그 자신의 행위 근거가 아니다(그는 되돌아가고자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이런 의미에서 시간의 구조로 그가 존재하는 바로부터 소외된다. 여기서 우리는 아마도 오류추론의 구조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한정가능한 정체성에 기대어 그 자신의 행위의 기초를 발견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무능력을 말이다. 그러므로 복수의 영혼은 시간의 경과에 의해 생성되며, 그것의 의지와의 통약불가능성도 그러하다. 영원회귀는 따라서 시간과의 보다 적합한 관계의 가능성(시간의 구원)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윤리적 원리로 기능한다. 들뢰즈는 이를 칸트와 비슷한 식으로 공식화한다(“네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그것의 영원회귀를 원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원하라”[NP 68/63]).
들뢰즈는 『차라투스트라』의 2부가 차라투스트라의 변형과 연관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가 마침내 영원회귀의 사유에 적합하게 되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마침내 그의 ‘우월한 인간에 대한 연민’(Nietzsche 2006b: 266)을 던져버리며, 영원회귀를 남김없이 포함하는 시간성의 형식을 진정으로 껴안는다. 들뢰즈는 니체가 최종적인 단계를 쓰지 않고, 차라투스트라의 죽음을 다루었지 않았을까라고 주장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처음 두 종합과 관련하여 순수하게 이러한 공식에서 영원회귀를 읽을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안으로 순수 과거를 구체화함으로써 행동하지만(우리는 반복한다), 이것은 진정 새로운 어떤 것, 즉 새로운 미래를 생성시킨다. 달리 말해, 미래가 현재의 과잉으로 존재함으로써 구성되는 것은 (기억을 통한) 과거의 회귀에 기초해서다. 따라서 우리가 과거를 현재와 관련시키도록 허용하는 것은 바로 미래다.
2.8 세 번째 종합 4: 영원회귀의 비의적 교설(90/113, 93-6/117-19)
미래와 관련되기 위해 현재 안으로 과거를 체현하는 활동의 측면에서 우리는 영원회귀에 삼항구조를 부여할 수 있지만, “그와 같은 설명은 여전히 순수하게 기초적인 것이다”(DR 90/113) 세 번째 종합의 이미지가 미래를 경유하여 과거를 현재와 연관짓는 반면, 실재로 세 번째 종합은 “계열들에서 오직 세 번째 시간과 관련된다 – 그리고 관련될 수 있다 - ”(DR 90/113). 세 가지 종합들에 관한 우리의 사유의 끝에 이르러, 우리는 이제 들뢰즈가 이러한 미래에 관한 사유, 또는 세 번째 종합으로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볼 만한 위치에 놓여 있다. 들뢰즈가 한 중요한 언급은 “미래는 다른 두 가지를 자신에게 종속시키고 그것들의 자율성을 빼앗는 바, 고귀한 반복이다”(DR 94/117)라는 것이다. 처음 두 가지 종합이 주어지면, 우리는 그 자체로 매우 다른 두 가지 시간 형식의 상호작용을 설명할 필요성을 가진다. 기억이 어떻게 습관과 관련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은 두 가지 상이한 능력들이 어떻게 서로 간에 관계될 수 있는지에 대한 칸트의 질문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 질문에 대한 들뢰즈의 대답은 궁극적으로 스피노자적이다. 연속과 공-현존은 단적으로 시간의 상이한 ‘속성들’이다. 습관과 기억은 서로 간에 연관될 수 있는데, 그것들이 단적으로 상이한 양태들이거나 시간 형식 자체의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소 비유적으로) 기억과 습관을 단순히 시간의 동일한 하부 형식을 드러내는 상이한 방식들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법을 취함으로써 공-현존에 대한 연속의 선차성 문제, 또는 그 반대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된다. 둘 모두는 동일한 존재론적으로 앞선 시간 형식의 표현이며, 이것은 그 자체로 연속도 공-현존도 아니다. 엄밀히 말해 그 둘이 상이한 양태들이지만, 동일하게 텅 빈 형식의 차이나는 양태들로 존재함으로써 관계를 맺는다. 시간의 순수하고 텅 빈 형식은 따라서 기억의 과거와 습관의 현재 안으로 스스로 분화되어 들어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시간을 그것이 구성하는 주체의 연관성으로부터 떨어져서 이해한다면, 우리는 연속도 아니고 공-현존도 아닌 시간의 순수 형식을 가지게 된다. 세 번째 종합은 첫 번째 종합의 공간, 즉 들뢰즈가 그 안에서 주체가 구성되는 ‘개체화의 장’ (DR 246–7/307–9, 2.10, 5.5)이라고 부른 것을 구성하는 것을 책임진다. 들뢰즈는 이 기능을 ‘차이의 차이소’(differenciator of difference, DR 117/143) 또는 ‘차이와 차이를 관계짓는 차이’(DR 119/145) 또는 ‘어두운 전조’라고 규정한다. 우리가 보았다시피(2.4) 들뢰즈는 하부-재현적 과정에 따라 결정되는 유사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베르그송을 따른다. 여기서 마찬가지로 들뢰즈의 주장은 어두운 전조가 개체화의 두 장들 간의 유사성에 따라 그것들이 관계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어두운 전조는 둘 모두에서 동시에 표현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것들과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억이 그것이 관계하는 현재들과도 닮지 않는다는 식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이 어떻게 칸트의 논의와 연관되는지 알 수 있다. 시간을 지성과 본성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듦으로써, 칸트는 그 자체 단순히 선재하는 지성적 질서의 표현이 아닌 시간의 순수 형식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이제 칸트가 모든 종합을 능동적 주체와 연합하기 때문에, 시간은 단순히 지성에 의해 취해질 수 있는 어떤 물질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그가 이러한 움직임의 함축을 충분히 전개할 수 없고, 대신에 시간의 종합을 책임지는 것으로서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을 정립하도록 이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우리가 능동적이지 않은 종합의 가능성을 인식하면, 우리는 시간을 자기-종합적(auto-synthetic)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은 스스로를 습관과 기억의 양태들을 따라 질서지운다. 우리는 “영원회귀란 질적인 것도 연장적인 것도 아니라, 다만 강도적, 순수하게 강도적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차이이다”(DR 243/303)라는 말에 주목함으로써 시간의 순수형식이 무엇인지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되돌아 오는 것은 사태들의 능동적 상태들일 수 없다. 이를 엄밀하게 읽는 다는 것은 들뢰즈가 비코의 책임으로 고발하는 하나의 실수(DR 92–3/116), 즉 경첩에 맞추어진 시간을 읽는 다는 것이다. 즉 시간의 순수형식으로서의 미래는 우리가 이전 장에서 마주했던 강도적 차이의 장과 동일하다. 우리는 이제 반복이 동일한 형식이 반복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강도적 차이의 동일한 장이 이러한 상이한 형식들로 발생하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이한 능동적 표현 안에, 돌아오는 것은 강도적 차이의 형식 안에 있는 시간의 순수형식이다.
따라서 영원회귀의 궁극적 형식은 『차이와 반복』의 처음 두 장들을 통일한다. 1장이 차이의 형이상학적 개념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출발하여 강도적 차이에 이르는 반면, 2장은 습관에 대한 우리의 경험으로 시작해서 습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억이고, 그 다음으로 습관과 기억의 관계가 미래로서의 강도적 차이의 장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래서 1장의 형이상학적 고찰은 2장의 초월론적 고찰에 의해 강화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차이와 반복』에서 두 가지 영원회귀를 가지게 되는데, 하나는 2장에서의 계보학적 교설이고 다음으로 1장에서의 존재론적 교설이다.
2.9 프로이트(16–19/18–22, 96/119–20)
영원회귀에 관한 사유의 결론은 2장에 어떤 자연스러운 결절점을 형성한다. 들뢰즈는 “생물심리학적 삶/생명”(biopsychic life, DR 96/119)을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주제, 오히려 이전 주제의 어떤 새로운 반복을 드러내는데, 이번에는 칸트보다 프로이트와 대면한다. 이 절에서 들뢰즈는 다시 한 번 영혼의 뿌리에 강도적 차이의 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어떤 유사 양가적 관계를 꾸며낸다. 즉 프로이트가 반복이 재현 바깥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인식한 반면(마치 칸트에게서 비합동적 등가물이 지성의 의해 개념화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는 궁극적으로 반복하는 우리의 충동의 원천이 차이의 강도적 반복이라기 보다 물질의 맹목적인 반복이라고 이해한다.
억압에 관한 프로이트의 고찰은 반복, 억압 그리고 재현 간의 관계를 세운다. “환자는 그가 망각했고 억압했지만 그것을 행위한다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상기하지 않는다. 그는 기억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행위로서 그것을 재생산한다. 그는 그것을 반복하는데, 물론 그가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 없이 그렇게 한다”(Freud 2003b: 36).
분석가가 환자를 다루는 것에는 애초에 재현불가능한 트라우마의 재현을 형성하도록 환자를 돕는 것이 포함된다. 그래서 환자는 이 반복을 재현할 수 없음에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의 기획 안에서 이러한 작동 중인 재현불가능한 반복에 대한 생각은 들뢰즈가 관심을 가지는 바, 그러한 구조적 유비들을 담고 있다. 프로이트가 이러한 주장을 한 이유를 탐색하기 위해 우리는 쾌락 개념으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의 쾌락을 위해 우리가 행동한다는 것은 어떤 판에 박힌 진실처럼 보인다. 그러면 프로이트에게 쾌락이란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우리는 정신을 내부와 외부 둘 모두로부터 오는 자극들에 복종하는 하나의 체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자극들이 정신의 안정성을 해치는 한에서(정신이 적합하게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트라우마와 충격), 이러한 자극들은 의식에 의해 ‘불쾌’로 해석된다. 반대로 정신의 이완은 정신의 체계로 체화되지 않았던 에너지 안에서 어떤 감소를 포함하는데, 이것은 쾌락을 포함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정신은 그것을 탈안정화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하나의 체계인 것이다. 정신이 쾌락을 최대화하려고 한다는 원리는 따라서 항상성의 원리에 긴박되어 있다. 이 원리는 지속성 가설로서, “심리적 장치들에 속한 하나의 원망(aspiration)은 가능한 가장 낮은 수준에서 자극의 양을 유지하거나, 적어도 그것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Freud 2003a: 47).
우리가 삶에서 단순히 쾌락을 경험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대개 우리의 불쾌한 경험은 전체적으로 그 체계를 바라봄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우리는 즉각적인 쾌락을 보다 큰 쾌락을 이후 경험하기 위해 연기하거나, 다른 심리적 체계의 부분들이 쾌락을 경험할 수 있도록 특정한 욕구들을 억압한다. 반복은 이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예컨대 과거의 트라우마를 다시 사는 것 또는 우리의 성격이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 행위의 반복이 쾌락 원칙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다. 또는 더 나쁘게는 그러한 원칙에 대립하는 경우도 있다. 즉 “우리는 사람들이 그 영향에 대해 무능력해지는 어떤 것의 수동적인 희생자로 나타나는 경우에 훨씬 더 강하게 감응된다. 그리고 동일한 운명의 끝없는 반복에서 반복적으로 겪는 어떤 것에도 그러하다”(Freud 2003a: 60). 들뢰즈는 프로이트가 그 자신의 세 가지 시간의 종합과 아주 흡사하게 이러한 사실들을 초월적 관점으로 제공한다고 이해한다.
2.10 프로이트의 첫 번째 종합(96–8/119–22, 111–14/136–40)
프로이트의 기획에 대한 들뢰즈의 규정에서 첫 번째로 주목해야할 것은 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의 내용이 “이 원칙의 배제라기보다, 쾌락이 효과적으로 하나의 원칙이 되기 위한 조건들을 규정하는 것”(DR 96/120)이라고 한 점이다. 즉 자아의 조직화 원칙에 앞서, 들뢰즈는 우리가 ‘생물심리적 삶’을 “강도적인 차이들이 자극의 형태로 여기 저기에[Ça et là] 분배되는 개체화의 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논한다(DR 96/119). 이와 같은 생물심리적 삶 안에서, 물론 우리는 다양한 지점들과 다양한 순간들에 체계의 자극이라는 수준에서 다양한 것들을 가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과정으로서 쾌락은 체계(자극의 수준이 때로는 급강하하는) 안에서 가동적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들뢰즈는 (영국과 독일에서는 문제적인 바) 보다 민첩하게 생물심리적 삶의 ‘여기 저기에’를 프로이트의 이드(id[Ça])와 동등하게 만든다. 이제 논증의 문제적 본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합리적인 공식처럼 보이며, 그것은 이 절에서 핵심적인 질문, 즉 어떻게 쾌락은 무의식의 삶을 조직화하는 하나의 원리가 되기 위해 하나의 과정을 그만두는지라는 질문을 제기하도록 한다. ‘쾌락은 만족하는 것이다’와 같은 대답은 동어반복이며,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프로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쾌락을 이미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어떤 주체의 실존을 전제한다고 설명하고자 한다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가치가 최초 단계에서 이러한 특정 생물학적 과정에 덧붙여지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어떻게 하나의 (가치 중립적인) 과정이 조직화와 행위의 원칙이 되는가라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로부터 일련의 자극을 받아들일 때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분명, 이러한 자극은 어던 식으로 인지될 필요가 있으며(우리는 무언가가 발생했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그것을 저장해야만 한다(우리는 그것을 기억 속으로 체현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견해는 “주어진 체계 안에서 어떤 것이 의식으로 진입하면서 동시에 기억의 흔적으로 남는 것은 불가능하다”(Freud 2003a: 64)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만약 자극의 흔적들이 의식안에 잔존한다면, 그때 그것들은 체계가 새로운 자극들을 등록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억과 의식의 과정을 두 가지 평행한 체계들 안에서 가동하는 것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마치 습관과 기억이 세 가지 종합에 대한 첫 번째 고찰에서 본성적으로 차이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우리는 가장 원초적인 생명이 형태, 즉 “자극에 민감한 물질의 미분화된 발생 세포(vesicle)”(Freud 2003a: 65)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 유기체의 어떤 부분이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외적 자극에 의해 감응된다. 이러한 다양한 충격들에 촉발되기 때문에, 부분의 본성은 변화하고, 이에 따라 유기체의 요소들은 변화하지 않고 그 충격들을 전달할 수 있다. 프로이트에게 이것은 의식의 기원이다. 체계가 진화하면서, 그것은 밖으로부터이 과도한 자극에 대항하여 부분적으로 비유기적인 것으로 되돌아감으로써(두개골), 그리고 고도의 생명체 안에서는, 지각적 측면을 더욱 더 분리시킴으로써(특정 감각들의 발달) 방어기제를 발전시킨다. 유기체는 그 내부에서 과정들의 방해를 겪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과정들이 유기체 내부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그것들에 의해 생산된 트라우마는 어떤 장애물의 현전에 의해 감소될 수 없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내부로부터 유기체를 촉발하는 트라우마는 바깥으로부터 그것을 촉발하는 경우보다, 유기체의 경제 안에서 더더욱 커다란 역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유기체가 내적 트라우마를 그 작용을 야기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허용하기 위해 바깥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로써 투사(projection)에 관한 사고로 이끈다는 것에 보다 더 주목할 수 있다.
그렇다면 트라우마는 무엇인가? 트라우마는 유기체의 심리적 체계 안으로 병합되거나 체현된 정신적인 것을 통해 흘러 넘치는 에너지(해방된 에너지)를 보유하는 상황이다. 트라우마나 고통의 경우, 프로이트는 심리적 에너지의 가능한 가장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자 하기 보다, 유기체가 쾌락원칙을 유예함으로써 심리 체계를 안정화시킬 것이라고, 그리고 심리 체계 안으로 자유롭게 흐르는 에너지를 병합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병합하는 과정은 그것이 마치 쾌락원칙이 위반되는 것처럼 드러나는 몇몇 상황들을 설명할 수 있다. 심한 트라우마의 경우, 체계는 그것의 전반적인 통합을 유지하기 위해 불쾌를 경험한다. 예를 들어 전쟁 트라우마는 의문스러운 현상을 지배하기 위한 역진적(retrospective) 시도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그러한 현상들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전쟁 트라우마의 경우, 체계 내부로 에너지를 지배하고 구속하기 위해, 주체의 부분에 불쾌를 부과하는 과거 경험들의 반복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므로 프로이트는 그와 같은 반복하고자 하는 충동이 단순히 쾌락 원칙에 따라 이해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쾌락원칙의 적용에 앞서 자극의 묶기나 병합 과정들이 요청되며, 그래서 자극들은 유기체의 삶을 제멋대로 횡단하기보다, ‘체계적 해법’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통합이나 조직화가 하나의 원칙과 쾌락을 연관시킬 수 있기 위해 우리에게 필수적이다. 프로이트 자신은 이 점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욕구-충동들(drive-impulses)이 모두 우리의 무의식 체계에 작용하기 때문에, 가까스로 그것들이 최초의 과정을 따른다고 주장할 새로운 출발점이 되며, 마찬가지로 브로이어(Breuer)의 ‘자유-흐름’ 카텍시스와 최초의 심리적 과정이 동일시될 만한 중요한 과정이 되지는 않는다. 또한 그의 ‘병합된’ 또는 ‘강세적인’(tonic) 카텍시스와의 부수적인 과정도 아니다. 이때 이것은 욕동으로부터 기원하고 최초의 과정을 거쳐 그것에 도달하는 자극들을 병합하기 위해 심리적 장치들의 보다 높은 배치라는 과제라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병합과정의 실패는 트라우마적 신경증과 유사한 기능장애를 일으킬 것이다. 오로지 병합이 발생되었을 때에만 쾌락원칙(또는 일단 이 말이 정당하게 변형된 바, 현실 원칙)이 그것의 무제약적인 통치권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자극들을 통제하거나 병합하는 심리 장치들의 다른 과제가 매우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쾌락원칙에 반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며, 다소간 그것에 부주의해진다는 것이다(Freud 2003a: 74–5).
따라서 쾌락원칙은 본래 묶여 있지 않은 자극들의 통합에 기반한다. 여기서 시간의 첫 번째 종합과의 평행성이 존재한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마치 주체 구성을 이끌어지는 인상들의 응축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는 자유롭게 흐르는 에너지의 결속이 쾌락 원칙을 지지할 수 있는 체계의 구축을 이끈다. 그러므로 들뢰즈에게 에너지의 묶음은 기러한 과정의 꼭대기에 있는 능동적 종합인 쾌락원칙과 주체의 현실적인 구축 과정인 것이다. “하나의 동물은 그 신체의 특권화된 표면 위에 재생산되는 흩뿌려진 빛의 자극들에 의해 스스로 눈을 형성한다. 눈은 맹목의 빛, 스스로 묶여진 빛이다”(DR 96/120). 들뢰즈의 핵심은 자기성(the self)이 자극들의 통합이나 응축에 의해 구축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히 이러한 자극들이다. 이는 들뢰즈가 이러한 응축하는 자아들을 ‘나르시시즘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말해 준다. 어떤 의미에서 자아들이 관련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맹목인 바, 그 자극들의 형식에서 그들 자신, 또는 그 자신들의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묶기의 운동은 그 자신의 이미지와의 나르시시즘적 관계에서 만족을 발견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아들이 과정들을 묶음으로써 구축된다는 사실은 시간의 첫 번째 종합에서 습관들을 응축했던 자기성들이 대상들이 아니라, 기호들과 연관되는 방식과 나르시시즘적인 평행성을 가진다. 그래서 심장박동이 심장 그 자체의 운동과는 닮지 않은 우리 세계 안에서 하나의 기호로서 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극들을 묶는 것은 객체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이미지와 연관되는 자아들을 구축한다.
따라서 우리가 뭔가 즐거울만한 것을 반복한다는 의미에서 쾌락이 습관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으로 이어지는 습관들이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 습관에 관한 논의에서 들뢰즈는 습관이란 그것이 상상력에 의해 수학적인 ‘시공간’(temporal space) 안으로 체현되었을 때 재상산으로 파악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과 비슷하게, 우리가 습관에 앞서 작동하는 것으로서 쾌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쾌락원칙을 수립함으로써 과거와 미래에 대한 쾌락의 관계에 따른 것이다. 즉 ‘일반적 쾌락’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는 ‘쾌락의 이념’을 들여온다. 일단 쾌락이 더 이상 수동적 종합과 관련되지 않고 원리와의 관계에서 조직화되는 것으로 드러나면, 우리는 어떤 자아와 관련되는 능동적 종합을 가진다. 이러한 결과는 쾌락 원칙이 최우선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할 것인데, 왜냐하면 어떤 종류의 외부적인 조직화의 원칙이 없이는, 어떻게 무차별적인 과정이 어떤 일관된 체계를 형성할 수 있는지, 그리고 개별적인 자극들이 서로 간에 관련될 수 있는지(어떻게 습관들이 형성되는지)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묶기와 쾌락원칙이 상이한 대상들과 관련된다는 점이다. 묶기는 쾌락원칙이 자유로운 자극들을 하나의 체계로 함께 엮을 수 있기 위해 그러한 자극들을 가동시킨다.
그러므로 정신 내부에 두 가지 가동적인 원칙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심리적 장치 내부에서 에너지의 양을 감소시킴으로써 쾌락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극들을 지배함으로써 구속되지 않은 에너지를 구속된 에너지로 전환하길 시도하는 원칙이다. 이것은 반복 충동으로서, 죽음충동이 될 것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은 쾌락 원칙이 가동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극들이 심리적으로 통합될어질 경우 뿐이라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유기체의 원초적 구조에 반복 충동을 기초로 수립함으로써 프로이트가 이 충동을 생명 자체의 기초 기능으로 분석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반복 충동이 리비도와 부합하여 작동할 수 있는 반면, 그것은 또한 보다 이른 단계로 되돌아가려는 생명의 경향으로서 작동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 회귀 경향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욕동들 – 그리고 아마도 모든 유기체들 – 에 속하는 어떤 보편적 속성을 동일화하도록 애썼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속성은 지금까지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았거나 어쨌든 명쾌하게 강조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욕동은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 안에 앞선 단계를 보존하려는 본래적으로 강력한 경향으로 드러난다. 유기체가 철회하도록 강제되는 앞선 단계는 외적 힘들의 파국적인 영향에 기인한다.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적 탄성(elasticity), 또는 만약 우리가 더 선호하는 바로 이야기한다면, 유기적 생명체 안의 관성(inertia)의 표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Freud 2003a: 76)
프로이트를 이러한 결론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내 생각에 이 개념에서 핵심은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해 왔던 것에 있는 두 가지 주요한 가설이다. 첫 번째는 유기체가 본질적으로 세계로부터 유리된 것으로 정의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유기적 생명의 세계에 참여는 본질적으로 트라우마적이며 파국적이다. 두 번째로 여기에는 유기체가 그것들의 특정한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종으로서 그 발전과정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두 가설을 결합하면, 그때 우리는 변화(그리고 따라서 발전)는 트라우마적이고, 그러므로 유기체에게는 이전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발생시킨다는 주장을 할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운동이 물고기가 산란할 때, 그들의 태생지로 되돌아갈 뿐 아니라,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그들이 서로 간에 교류했던 종의 이전 구역으로”(Freud 2003a: 77) 돌아간다는 사실에서 드러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두 번째 주장이 나오는데, 배아 전개에서 진화반복 이론(recapitulation theory)이 그것이다. 이것은 각각의 동물이 가장 단순한 생명형태로부터 그것의 발전의 역사를 그 생명형태와 더불어 수행한다는 것이다. 실재로 이러한 운동은 단순히 생명의 초기 형태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비유기적인 것에서 유기적인 것으로 움직이는 생명 그 자체의 기원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반복의 욕동은 생명의 초기 형태로 되돌아가려는 충동이 아니라, 사실 죽음 충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복/회귀 충동과 죽음 충동은 동일한 것이다. 즉 “모든 생명의 목표는 죽음이다. 역으로 표현하자면, 생명 없는 것이 생명 있는 것 이전에 존재한다”(Freud 2003a: 78). 따라서 반복의 기원에 관한 프로이트의 생각은 궁극적으로 의식 자체의 구성으로 되돌아가는 경로를 취한다. 생명은 두 가지 상이한 욕망들 간의 관계를 수행해 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첫째로 리비도가 있는데, 이것은 유기체를 탈안정화하려고 위협하는 외적 트라우마로부터 유기체를 방어함으로써 생명을 보존하려고 한다. 궁극적으로 생명의 보존이란 단순히 콤플렉스가 많을수록 기초 욕망, 즉 유기체의 최초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죽음 욕망도 많아진다고 이해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핵심적인 내용은 유기체의 죽음이 외적 요인들에 기인하는 어떤 것이 (필연적으로) 아니고, 유기체 자체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유기체는 무생물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 주장에 대해 요청되는 명백한 의문은 만약 생명이 그 자신의 해소를 추구한다면, 대체 어째서 생명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인가? 우선 죽음은 “생물들에게는 여전히 쉽다. 지나 가야할 생명의 과정이란 아마도 짧으며, 그 방향은 새롭게 창조된 유기체의 화학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Freud 2003a: 78–9). 하지만 시간에 관해서 생명의 복잡성은 점점 더 우회로들이 삶과 죽음 사이에 체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욕망들은 죽음을 향한 운동을 지연시키며, 따라서 삶을 보존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욕망들은 삶 자체를 지속시키기 위해 유기체를 허용한다는 것에서 ‘삶의 보호자들’이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욕망들은 성욕들과 같이 궁극적으로 죽음 욕망에 종속된다. 그것들은 유기체가 외적 영향들에 종속되기 보다, 그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길 원한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본질적으로 이러한 죽음 충동은 들뢰즈의 생각에 영원회귀가 작동하는 것과 동일한 역할을 한다. 프로이트 사유의 근거는 여기서 반복의 양상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우리는 강도적 차이의 장으로 반복이 파악되기 보다, 여기서는 칸트의 철학에서 수동적 연장과 같이, 연장적이고, 물리적인 구조로 이해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볼 바와 같이, 들뢰즈는 죽음충동의 구조를 제한할 것이지만, 대신에 죽음을 강도적 차이의 장과 관련하여 이해한다. 죽음층동으로서 세 번째 종합에 관한 들뢰즈의 사유로 되돌아가기 전에, 우리는 두 번째 종합을 분명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2.11 프로이트의 두 번째 종합(98-111/122-35)
정신의 모델은 이대로가 적합한가? 현재로서 수동적 종합은 생물심리적 체계 안에서 발생하는 자극들의 묶음을 포함한다. 이제 분명히 쾌락은 실재로 이 체계 안에서 작동하지만, 이는 또한 ‘생물심리적 체계’가 외부와 어떤 종류의 관계를 가지는 경우이기도 하다. 들뢰즈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걷기 시작하는 아이는, 비록 자극들이 그 자신의 운동들에서 태어나는 내생적인 것이라 해도, 수동적 종합 안에 그것들을 단지 묶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태생적으로 걷지는 않는다”(DR 99/123). 즉 우리의 행위는 하나의 객체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대하는 바, 시간의 세 가지 종합에 대한 생각이 주어지면, 이 두 번째 단계, 즉 객체적인 세계에 대한 생물심리적 체계의 관계는 두 가지 상이한 종합, 다시 말해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종합을 포함할 것이다. 능동적 종합이 가장 명쾌하므로, 나는 그것으로 시작하겠다.
우리는 칸트의 능동적 종합 모델에 관한 핵심 공리 중 하나를 상기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는데, 그것은 주체가 객체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그 역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칸트가 주체와 객체의 상호의존성에 대해 옳다면(그리고 들뢰즈가 적어도 재현의 층위에서 그를 타당하게 취한다면), 어떤 객체에 대한 관계는 그것에 관련되는 하나의 주체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아래와 같이 쓴다.
능동적 종합은 ‘객체’ 관계 안에서 현실성 검사에 의해 정의되며, 그것은 정확히 ‘자아’가 ‘능동화되는’, 즉 능동적으로 통합되는 현실원칙에 따른다. 현실원칙은 그것의 작은 구성적이고 응시하는 수동적 자아들을 통합하며, 위상적으로 이드(Id)와 구별된다.(DR 98/122)
만약 우리가 쾌락이 개체적인 결속들에 관련되거나 무의식 안에 있는 욕동들과 관련된다면, 그때 그것은 유기체가 쾌락원칙만을 따라 단순히 기능할 수 없다는 외양을 띈다. 때로 어떤 욕망은 유기체의 통합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만족을 찾는다. 그러므로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현실원칙으로 보충하며, 이는 전체적으로 유기체의 쾌락(과 생존)을 위해 욕망의 특수한 만족에 대한 관심을 무시한다. 이것은 차례로 재현적 주체의 구성으로 이끈다.
우리는 쾌락원칙이 심리적 장치의 주요한 가동적 수준에 속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자기-보존에 관한 한 그것은 무용할 뿐이며, 외부 세계에 노출된 문제상황이 주어진다면, 사실상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도 안다. 자아의 자기-보존 욕망의 영향 때문에, 그것은 현실 원칙에 따라 배치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쾌락을 성취하려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은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구충족의 연기, 그와 같은 욕구충족을 위한 잡다한 기회들의 거부 그리고 쾌락을 향한 멀고 에두르는 길에서의 불쾌에 관한 잠시간의 인내를 요청하고 그것을 성취한다.(Freud 2003a: 48)
능동적 종합의 확장 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수동적 종합의 확장도 가진다. 이것은 어떤 잠재적 대상에 관한 다소 불분명한 관념 주위를 돈다.
어린아이는 스스로 다른 대상을 구축하는데, 이것은 상당히 상이한 종류의 대상으로서 어떤 잠재적(virtual) 대상 또는 중심이며, 그것의 현실적 능동성의 진전과 실패를 통제하고 보충한다. 다시 말해 아이는 입에 손가락들을 집어 넣고, 이 잠재적인 엄마의 관점으로부터 전체 상황을 살핀다(DR 99/123).
왜 우리는 수동적 종합들을 다루는 어떤 대상에 관한 분리된 개념을 요청하는 것일까? 우선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만약 어린 아이가 자극들을 계속 묶어낼 수 있다면, 그때 분명히 아이는 그러한 자극들을 위한 원천에 접근하는 몇몇 방법에 관련될 필요가 있다. 이는 외부와의 어떤 종류의 관계성을 함축한다(자극을 산출하는 몇몇 종류의 대상들에 관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보았던 바, 묶기는 대상에 관련되지 않으며, 기호들에 관련된다. 이제 묶기는 어떤 재현과의 관계라기보다 자극들의 통합이다. 이것은 자극들의 산출을 허용하는 특정한 외적 대상이 재현의 현실적 대상들과 본성적으로 다를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심장박동이 심장의 운동과 유사하지 않은 것과 같이). 이를 명심한 채, 우리는 들뢰즈의 주장, 즉 “빨기는 오직 수동적 종합을 확장하는 맥락에서 응시하는 잠재적 대상을 제공하기 위해서만 발생한다”(DR 99/123). 여기서 우리는 어떤 유사한 상황을 발견하는데, 왜냐하면 손가락을 빨 때, 아이는 연관된 현실적 대상(손가락)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어떤 수동적 종합을 위한 잠재적 기호들을 제공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손가락은 유기체를 위한 자극들을 제공하는 바, 어머니의 젖가슴의 자리를 차지한다. 수동적 종합이 재현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이는 손가락을 젖가슴으로 취하지 않으며, 원래 묶기의 과정을 만족시키는 젖가슴의 그러한 관점을 취한다. 이 관점은 하나의 행위 또는 어떤 행위의 이미지이다. 따라서 손가락은 하위-재현적인 수동적 종합에 의해 묶일 수 있는 일련의 자극들을 제공한다.
일단 우리가 잠재적 대상의 본성에 간한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이면, 그것에 관한 들뢰즈의 분석들을 종합하기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두 종류의 대상들, 즉 하나는 현행적(actual, 현실적)인 대상, 다른 하나는 잠재적인 대상을 가진다는 사실은 들뢰즈가 시간의 종합에 관한 그의 논의들에 도입했던 순수 과거의 개념을 되새기게 하는데, 사실상 그는 잠재적 대상을 “순수 과거의 조각들”로 규정한다(DR 101/126). 그러면 그 조각들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들뢰즈는 잠재적 대상의 구성에 대해 다음가 같이 묘사한다.
우리는 잠재적인 것들이 일련의 실재들로부터 연역되는 것과 그것들이 일련의 실재들 안에 구체화된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러한 유래는 첫째로 어떤 고립이나 중지를 함축하는데, 이는 어떤 자세, 관점 또는 부분을 끌어내기 위해 실재를 동결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고립은 질적이다. 즉 이는 단순히 실재 대상의 부분을 빼면서 구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뺄셈된 대상은 잠재적 대상으로 기능하면서 어떤 새로운 본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DR 100/125)
우리가 지향하는 재현 대상을 취급하고 있을 때, 우리는 대상을 하나의 총체성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대상들 주위를 배회한다면, 그것에 대해 상이한 관점들을 지속적으로 취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제 묶기의 과정은 대상의 총체성과 관련을 맺지 않게 되지만, 자극들을 생성할 수 있는 대상의 그러한 측면들에 있어서만 관련맺게 된다. 이는 오직 어떤 특정 자세, 운동 또는 측면에 관심을 가질 뿐, 예컨대 실재적으로 자세를 창출하기 위해 움직이는 대상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재현이 그것이 현전하는 특유한 관점으로부터 분리된 일관된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빼기의 과정은 현행적으로 그 본성을 바꾼다(예컨대 자세를 취하는 자가 없는 자세는 재현적 대상과 일관되지 않는다). 이때 잠재적 대상은 일련의 실재들 안에 구체화된다. 잠재적 대상들은 어떤 의미에서 행위를 동기화한다. 그것들은 세계 어딘가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따라서 아이가 그의 손가락을 빨 때, 그 행위는 어떤 잠재적 대상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지만, 오직 이것이 하나의 현행적 대상 안으로 구체화되거나 그 위에 부속하는 것을 기반으로 할 뿐이다.
잠재적 대상은 두 번째 기능을 수행하는데, 이는 다시 한 번 우리가 연합의 관념을 설명하게 허용하는 현행적 세계와 함께 가는 비-현행적 계열들을 수립할 것이다. 들뢰즈는 다음 같은 질문을 던진다.
반복을 개념화하는 것의 난점은 자주 강조되어 왔다. 두 가지 현재들이, 그것들의 실재성 안에서 두 가지 장면들 또는 두 가지 사건들(유아와 성인)로 시간에 의해 분리된다고 생각해 보라. 앞선 현재적 행위가 거리를 두고 다른 현재적 행위에 작용할 수 있는가? 그 모든 유효성이 역진적으로 뒤의 현재로부터 되받아질 때, 어떻게 하나가 다른 하나에 모델을 제공할 수 있는가?(DR 129)
우리가 시간의 종합을 바라볼 때, 연합을 현행적 기억과 관련하여 순수하게 작동하는 것으로서 이해함에 있어서 문제는 모든 것이 몇몇 방식에서 다른 모든 것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왜 어떤 특정 경험이 이 기억을 불러 내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에게서, 두 계열의 사건들이 묶여진다는 것은 동일한 잠재적 대상이 양 계열 모두에서 작동중이라는(구체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왜 과거 사건이, 현행적 사건들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에 구체화되는 잠재적 대상 떄문에 여전히 현재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설명한다. 이는 또한 왜 우리가 예컨대 누군가의 성격, 상이한 상황에서의 동일한 관계들의 반복 또는 동일한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주체는 그들의 과거 반응들에 기초하여 유비됨으로써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사태들 속으로 구체화되는 동일한 사건에 반응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반복되는 것이 결코 현행적으로는 현재화되지 않는 어떤 것이며, 오히려 ‘동일한’ 잠재적 대상이 반복을 만드는 여러 사태들 안에서 가면을 쓴 채 현전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반복이 자아와 그 대상보다는 욕망에 반응하여 발생하는 계열 자체의 첫 번째 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2.12 프로이트의 세 번째 종합: 죽음 충동(110-14/135-40)
세 번째 종합을 여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꿈이나 증상들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위장 – 응축, 전치, 극화 – 은 헐벗고, 야만적인 반복(동일성의 반복)을 약화시키는 동안 재발견되는가?”(DR 16/18–19). 즉 우리가 반복을 위한 기초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기초는 경험적 반복과 본성적으로 다른 어떤 반복이 될 것인가? 다른 헐벗은 반복에 기반한 반복의 기초란 부적합할 것인데, 왜냐하면 반복을 설명하기보다, 그것은 반복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주장은 프로이트에게서 근원적인 반복이란 정신적 반복이 아니라 어떤 물질적 반복이라는 것이다.
쾌락 원칙을 넘어서조차, 헐벗은 반복의 형식은 지속된다. 왜냐하면 프로이트가 죽음 충동을 생명 없는 물질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경향으로, 즉 전체적으로 물리적이거나 물질적인 반복의 모델을 지지하는 경향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DR 17/19)
이제 이러한 주장에 대해 흥미로운 것은 들뢰즈가 여기서 죽음충동을 거부하지 않고, 오류가 그것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과 더불어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잠재적이고 현행적인 대상들이 “순수과거가 이에 따라 앞선 현재의 상태를 가정하면서, 가상적임에도 불구하고 명백하게 뒤섞이게 되고, 환상을 재구축하면서 원초적인 환상과 파생적인 환상, 즉 기원적인 동일성과 파생된 유사성이 재생될 때 그것은 기각되어버릴 것이다”(DR 109/135).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상은, 잠재적으로 비의적인 사건임에도, 반복충동의 기원이 현행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환상에 둘러싸이게 되면,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에 다가서게 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죽음충동의 보존은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재해석을 전제로 할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죽음은 물질적 반복과 관련하여 이해된다. 들뢰즈는 이와 달리 죽음을 반복의 또 다른 범주, 즉 정신적 반복으로 이해한다.
사실상, 들뢰즈는 여기서 2장에서 능동적 종합과 수동적 종합 사이를 관통했던 동일한 구별을 도입한다. 이제 두 종합의 평행성은 여기서는 완벽하지 않지만, 프로이트적 모델에서 죽음은 미분화된 요소들의 종합과 관련하여 작동하는 하나의 원리이다. 그것은 이러한 요소들이 그것들과 분리된 어떤 것으로 조직화되고 그 자신의 권리 안에서 능동적인 이 지점에서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그것은 원리인 바, 그것을 넘어서서 또한 그것에 대해 하나의 원리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적 개념에서 죽음충동은 능동적 종합에 따라 작동한다. 이 장을 통틀어 들뢰즈의 논의를 따라, 우리는 능동적 종합 뿐 아니라, 수동적 종합이 그러한 작동의 근저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블랑쇼는 정당하게도 죽음이 두가지 면모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나’ 또는 자아와 연관된 인격적인 것이며, 이는 내가 한계에 처해 분투하거나 만나면서 맞닥뜨릴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또는 이 죽음은 어떤 경우에 모든 것이 지나가버리는 현재 안에서 조우한다. 다른 것은 이상하게도 비인격적인 것으로서, 이것은 ‘나’(me)와 어떤 관련도 없고, 현재 또는 과거와도 연관이 없으며, 오로지 언제나 도래할 뿐이다. 이 죽음은 끈질기게 존속하는 질문 안에서 끊임없이 다양한 사건의 원천이다.(DR 112/138)
프로이트의 모델은, 비록 그것이 프로이트 자신의 경우 보다 다소 확장된 것이라 해도, 분명 이러한 죽음의 형식들 중 첫 번째 것에 더 가깝다. 죽음의 첫 번째 모델은 단순히 “살아 있는 것이 되돌아 가는 미분화된 생명 없는 물질의 모델”(DR 112/137)인 것은 아니며, 여기에는 들뢰즈가 보다 심층적으로 짚어 놓은 것, 즉 “이 죽음이 언제나, 그것이 가장 인격적인 가능성을 구성하는 그 순간에조차 무로부터 오”는지, “그것이 가장 현재적일 때조차 과거로부터 오”는지에 관한 질문에 열려 있다(DR 113/138).
그렇다면 죽음의 진정한 본성은 무엇인가? 어쨌든 우리는 『차라투스트라』의 경우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이 차라투스트라의 죽음에 의해 재현되었다는 것을 보았다. 프로이트에 관한 들뢰즈의 논증도 마찬가지로 “어떤 순수 형식 – 시간의 텅 빈 형식”으로 죽음을 이해한다(DR 112/137). 그러므로 죽음은 1장에서의 강도장으로 우리를 이끌며, 그것은 “자유로운 차이의 상태로서, 그것들이 더 이상 ‘나’ 또는 ‘자아’에 의해 그것들에 부과된 형식에 종속되지 않는”(DR 113/138)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의 진정한 개념은 사실상 일련의 순수 생성을 맞닥뜨린 어떤 주어진 구조의 붕괴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동일성을 탈안정화하는 지속적인 욕망이며, 변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죽음의 경험은 무의식적 사건들에 속한 가장 공통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정확히 말해 그것은 삶 속에서 그리고 삶의 위해 모든 경과 또는 생성 안에서, 즉 경과로서의 모든 강도 또는 생성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AO 330/363). 따라서 삶/생명은 그것이 유기체의 구조, 그리고 자아의 동일성을 탈안정화하는 경험을 통과해 가는 한에서, 죽음에 의해 침윤되어 있다. 그러므로 들뢰즈에 의하면, 죽음 충동에 상당하는 어떤 것이 있으나, 이것은 우리가 프로이트의 모델에서 발견한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구조들은 아무런 에너지도 체계 안에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욕망을 통해 탈안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현의 장 안으로의 강도들의 출현을 통해 탈안정화된다. 죽음충동은 어떤 원리나 법칙에 따라 작동하지 않고, 단순히 무의식의 영역 안으로 강도적 차이를 드러낸다(“이 에너지는 타나토스에 봉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구성한다”[DR 113/139]). 이는 우리의 죽음에 관한 이해를 역전시킨다. 강도적 죽음은 삶의 한 부분(동일성의 탈안정화)이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죽음’은 삶과 공연장적(coextensive)이다. “그것은 마침내 죽기를 그만 두는 바, 그것이 이런 식으로 ‘나’로서 그것을 고정하는 마지막 순간의 실재적인 것 안에서 죽어가는 것, 그 동안 늘 강도적인 것을 수행하지 않는 것, 그것을 감싸고 있는 영점(zero)으로 되돌리는 것을 그만두기 때문이다”(AO 330–1/363).
그러므로 들뢰즈의 죽음 충동에 대한 해석은 우리가 지난 장에서 살펴 보았던 일의적 존재론에서 열어 놓은 그 해석으로 프로이트의 해석에서 발견한 기초적인 엔트로피 모델을 대체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질문은 우리는 왜 우리가 재현할 수 없는 것을 반복하는가이다. 일찍이 들뢰즈는 “현재는 반복하는 것이며, 과거는 반복 자체고 미래는 반복되어지는 것이다”(DR 94/117)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현재 안에서 그 자체로 표현되는 것은 강도적 차이의 장이다. 이것은 재현과의 본성적 차이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제 그 자체로 재현의 장 안에 발생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구성하는 강도들이란 우리의 삶을 통틀어 여러 맥락에서 ‘가면을 쓴 채’ 스스로를 표현한다. 따라서 우리가 강도적 차이를 다룰 때, “밟아갈 경로는 비가시적이며 오직 전복적인 경우에만, 즉 그것이 체계 안으로 들여 오는 현상에 의해 제어되는 한 가시적이 된다”(DR 119–20/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