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차이와 반복]>(헨리-소머스 홀)_1부_서문:반복과 차이
*원문서지: Henry Somers-Hall, Deleuze’s Difference and Repetition,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3, pp. 7-20.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저자: 헨리 소머스-홀(Henry Somers-Hall)
번역: 박주영(본명: 박준영, 수유너머104, nomadia@nave.com)
1. 텍스트 따라가기
서문: 반복과 차이
0.1 서론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을 “반복은 일반성이 아니다”(DR 1/1)라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일반성의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그리고 법칙과 관련된 개념은 서문의 핵심 주제이며, 책 자체의 주요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보통 법칙을 서로 간에 닮은 특수한 개별체들 모두에 적절한 방식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예컨대 중력의 법칙은 질량을 가지는 특수한 개별체들에 적용되며, 베르누이의 원리(Bernoulli’s principle)는 천천히 움직이는 비압축성 유체에 적용된다. 이와 흡사하게 칸트에게 보편적인 도덕법칙은 이성적 특성을 공유하는 모든 존재자들의 행위를 통괄한다. 이 모든 사례들에서 반복은 법칙의 공식 안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과학 법칙은 반복되는 실험적 사실에 의해 정식화되며 칸트의 도덕률은 정언명령의 형식으로 행위들이 반복될 수 있는 어떤 검사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들뢰즈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세계와 연관된 세 가지 다른 방식들을 논하는데, 과학 실험, 도덕률 그리고 습관의 심리가 그것이다. 이 여는 장에서 들뢰즈의 일반적 전략은 자연과학 법칙에 관한 우리의 관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법칙에 관한 다른 개념들이 이 경우에 발견되는 방식을 드려내는 것이다. 그의 논증은 과학실험의 경우, 우리가 정말로 반복을 마주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도덕법칙과 습관의 심리학의 경우, 이것들이 반복에 관한 진정한 이해를 제공하는 것으로 정말로 드러나는 반면, 그것들이 과학적 반복과의 유비에 입각해서만 그렇다는 것이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이러한 모델의 한계 너머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0.2. 과학과 반복(1-3/1-4/)
그러므로 첫 번째 질문은 과학에 있어서 반복이 왜 불가능하냐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철학자 중 하나인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그의 『창조적 진화』(Creative Evolution)에서 다음과 같이 기계론(mechanism)의 핵심적 가정을 밝힌다. “어떤 상태를 통과해 간 일련의 요소들은, 만약 저절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것의 장소에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외적 원인에 따라, 언제나 그 상태로 되돌아 가는 그것의 경로에서 발견할 수 있다”(Bergson 1998: 8). 이러한 반복의 관념은 과학적 방법의 어떤 전제조건으로 드러난다. 우리가 법칙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동일한 상황을 재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며, 물체들이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에 따라 법칙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것이다. 반복에 관한 우리의 상식(들뢰즈가 전복하려고 한 그것)은 우리가 적어도 두 가지 객체들(우리는 적어도 첫 번째 반복을 가지기 위해 두 번째 객체를 필요로 한다)을 접해야 한다는 것과 그것들이 절대적으로 서로 간에 동일해야 한다고(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한 객체의 반복을 가지지 않으며, 두 가지 다른 객체를 가지게 된다) 요청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계론이 여러 번에 걸쳐 같은 상황을 구축하도록 한다는 사실은 이러한 두 기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게 한다. 들뢰즈는 어째서 이 모델이 실패했다고 믿은 것일까? 물리적 세계란 수많은 닮음들(resemblances)로 가득차 있을 것이지만, 실험은 단순히 관찰과 같은 것이 아니라, 실험적 조건들의 활동적 구축에 속한다. 우리는 여타 요인들을 배제함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요인들을 선택한 것이다. 보다 중요하게도, 어떤 요인에 관한 전체 관념은 이해의 특정 양태를 전제하는 것이다. 체계의 요소들을 분리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미 분리되어 결정될 수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게다가 그 요인들은 본질적으로 양적인 방식으로 이해된다. 즉, 실험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체계의 적절한 특성들이 수량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셈이다. 일단 이렇게 진행되어 버리면, “현상들은 필연적으로 선택된 요인들 간의 특정한 양적 관계로 나타난다”(DR 3/3). 따라서 들뢰즈는 물리학이 자연현상을 그것에 관한 어떤 수학적 이해로 만들고, 차이나는 조건들이 동등하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고 논한다. 사실 물리학은 이미 양적으로 구성되는 한에서 속성으로서의 사태들(states of affairs)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유사성은 어떤 실험의 특정 조건들 아래에서 현상의 동일성(identification)을 허용하는 동등성(equality)을 발견하기 위해 개봉된다”(DR 3/3, 저자 강조).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이 서로 간에 일반성의 상이한 질서를 연관짓는 것을 허용하는 반복의 원리를 전제하지만, 이러한 원리를 설명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반복이라는 생각이 오직 가설적으로만 등장한다고 논한다. 실험은 “같은 환경들을 부여받은” 형식적 법칙, 즉 어떤 가설적 법칙을 만들어 낸다. 이런 경우에, 반복은 기껏해야 유사한 환경들을 제공하는 실험들로부터의 어떤 외삽으로 주어진다. 때문에 들뢰즈는 “반복은 언제나 극단적 유사성 또는 완벽한 등가성으로 ‘재현될’ 수 있지만, 우리가 하나의 것으로부터 다른 하나로 수준을 따라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가진 본성상의 차이를 차단하지는 않는다”(DR 2/2)고 말한다.
0.3 칸트의 도덕법칙(3-5/4-5)
만약 반복이 자연 법칙의 보편성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도덕적 영역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지혜로운 자는 유덕한 자로 전환되어야만 한다. 즉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법칙을 발견하는 꿈은 도덕의 영역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DR 3/4)는 것이다. 들뢰즈가 이 대립가설(alternative hypothesis)을 통한 연구를 위해 끌어 오는 인물은 칸트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연법칙과 이성법칙 간의 날카로운 대립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의 도덕 저작들에서 칸트의 핵심 관심사들 중 하나는 도덕적 행위주체의 자율성을 사고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세계 내부의 어떤 것에 의해 동기화된다면 – 이를테면, 행복 – 그때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계에 의해 결정되어진다고 논증한다. 이 경우에 우리는 자율적으로 존재하기 보다, 경험적 세계의 특정 구조들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그러므로 질문은 어떻게 우리가 도덕적 행동을 위해 적합한 자율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칸트의 본질적인 주장은 만약 우리가 자율적이어야 한다면, 즉 자기-입법적이라면, 그때 우리는 이성적 피조물이라는 것이 주어지며, 자기-입법성은 우리의 행위를 지배하는 이성적 법칙들을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법칙들이 순수하게 이성적이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그 어떠한 경험적 내용도 담고 있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 도덕의 원칙들은 순수하게 형식적인 원리들이어야 한다. 따라서 칸트는 두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하는데, 그것은 두 가지 법칙들에 상응한다. 한편으로 경험법칙이 있는 바, 이것은 내용의 결정사항을 취급하며, 다른 한편으로 도덕법칙이 있는 바, 이는 순수하게 이성적이고 형식적이다. 그렇다면 후자의 영역에서 들뢰즈가 “성공적인 반복과 반복의 정신성”(DR 4/4)이라 생각한 것이 현행화되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인가?
칸트는 만약 어떤 형식적 기준이 존재해야 한다면, 그것은 이성적 지속성의 관념에 기반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가 어떤 주어진 조건에서 해야만 하는 것과 관련하여 결정적 요인을 제공할 유일한 방법은 부정적인 방식이다. 만약 행위가 모순 없이 수행될 수 있다면, 그때 그것은 도덕적 행위다. 그는 핵심 기준, 즉 정언 명법을 아래와 같이 공식화한다.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하라(Kant 1998: 31).
그러므로 칸트 사유를 뒷받침하는 중심적인 생각은 만약 우리가 그것이 모순을 생산하지 않으면서 모두가 받아들이는 어떤 격률에 의해 가설적으로 지배되는 어떤 행위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 행동은 도덕적 행동이 된다는 것이다. 칸트가 제시한 사례들 중 하나를 사용하자면, 내가 그것을 갚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얼마간의 돈을 빌릴지 아닐지를 결정하는 경우가 있다. 즉 나는 내가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앎에도 약속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의 격률에는 그 어떤 고유한 자기-모순도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 우리가 그것이 보편적으로 추종되는 격률이 된다고 상상한다면, 곧 어떤 모순이 발생한다. 만약 모두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다면, 약속 자체에 대한 바로 그 생각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아무도 약속한 것을 믿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와 같은 허무맹랑한 구실과 같은 표현은 완전히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Kant 1998: 32).
우리는 여기 기반하여 보편성 개념이 어떤 반복의 검사지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이해할 수 있다. 만약 한 행위가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다면, 즉 만약 그것이 반복될 수 있다면, 그때 그것은 하나의 도덕적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복이란 단지 도덕적 영역 안에 현존하는 어떤 것만이 아니라, 만약 어떤 것이 도덕적 영역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결정함에 있어서 검사지 또는 기준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는 반복에 관한 사유를 엄격한 보편성으로 제시하고자 애쓰는 것인가?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아래와 같은 이율배반을 제시한다.
하지만 양심은 다음과 같은 모호성에 시달린다. 즉 양심은 자연법칙에 외재적이고, 우월하며, 무관심한 것으로서의 도덕 법칙을 가정함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다. 하지만 오직 양심은 그 자신 안에 자연 법칙의 이미지와 모델을 회복시킴으로써만 도덕 법칙의 적용을 파악할 수 있다(DR 4/5).
현재로서 이 비판은 매우 불확실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지점으로는 충분하다. 도덕은 자연과 분리된 것으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자연의 영역은 인과성에 따라, 즉 자유로운 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파악되며, 따라서 도덕 법칙은 그것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왜 도덕법칙은 자연 법칙의 모델을 따라 이해되지 않는가? 들뢰즈는 『칸트의 비판철학』(Kant’s Critical Philosophy)에서 이것이 두 영역 사이의 차이의 의미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감각적인 것과 초감각적인 것은 각각 자연을 형성하는 두 가지 매우 상이한 방향들[의미들]이다. 두 자연 사이에는 단순히 어떤 ‘유비’(법칙 아래에서의 존재)만이 존재한다. 그 역설적 성격 덕분에, 초감각적 자연은 결코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아무 것도 유사한 존재자들이 그 존재를 그것에게 발생시키지 않는 어떤 이성적 존재를 보증하지 않으며, 또한 이러한 ‘자연’이란 오직 도덕 법칙을 통해서만 형성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두 자연들 사이에 유비적인 하나의 관계가 있다고 말하기에 충분치 않은 이유이다. 우리는 초감각적인 것이 그 자체로 감각적인 자연과의 유비에 따라서만 어떤 자연으로 사유될 수 있다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KCP 33/28).
우리는 자유로운 도덕적 영역의 존재를 세울 수 있지만, 그것의 의미를 파악할 방법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주위에서 발견하는 세계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드러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 세계와의 유비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도덕 법칙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경험 법칙의 모델을 이성적 영역에 투사해야 한다. 즉,
게다가 우리 자신이 이성적 존재로서 속하는 바, 총체적인 지성적 존재로서의 오성[지성]의 순수 세계라는 생각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감각적 세계의 구성원이기도 하지만) 모든 지식이 그 경계에 멈춘다 할지라도 이성적 믿음의 구원을 위해 언제나 어떤 유용하고 수용될 만한 생각으로 남는다. 유용하고 수용될 만하다는 것은 이것이 우리 안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마치 그것들이 자연 법칙인 양, 자유의 격률에 일치시키면서 신중하게 이끌어갈 때에만 그 구성원으로 속할 수 있는 그 자체 보편적인 목적의 왕국에 관한 고귀한 생각에 따라 도덕 법칙에 대한 생생한 관심을 생산하기 위함이다(Kant 1998: 66).
이런 경우, 들뢰즈는 칸트의 핵심 개념인 의무가 습관(또는 더 나아가 습관들을 수축하는 습관)에 따라 구성된다고 논증한다. 그는 우리의 습관에 대한 이해가 자연 법칙들의 오류를 반복한다고 논한다. 따라서 습관이 유사성의 반복에 기반하는 동안 그것은 우리가 적절한 유사성을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하지 않는다(“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을 닮는다”). 습관이 설명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것을 실행했을 때지만, 사건들 사이의 차이를 무시함(균등화)으로써만 그러하다.
0.4 키에르케고르(5-9/5-10/[34-42])
들뢰즈는 “모든 일반성의 형식에 대해 반복을 맞세우는” 세 명의 사상가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키에르케고르, 니체 그리고 페귀가 그들이다(DR 5/6). 나는 여기서 일반성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대안에 초점을 맞추면서, 니체의 영원회귀에 관한 분석을 다소간 미루고자 한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텍스트는 『두려움과 떨림』(Fear and Trembling)인데, 이것은 이삭의 희생제의(Binding Of Issac)에 관한 분석이다. 이 성경 이야기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를 번제하라는 신의 요구를 통해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내용이다(Genesis 22:1–19). 아브라함은 아들 대신에 양을 바칠 수 있다는 신의 허락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고자 한다. 칸트에 따르면, 신으로부터 온 살인을 하라는 명령이 정언명령을 거스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아브라함은 그것을 충족시키고자 비도덕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키에르케고르가 『두려움과 떨림』에서 주장하는 입장은 오히려 도덕법칙과 아브라함 행동의 통약불가능성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 어떤 윤리적 사려보다 더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신앙의 역설은 따라서 다음과 같다. 단독자(the single individual)는 보편자보다 더 높다. 즉 단독자는 – 오늘날에는 오히려 더 드문 교조적인 구분을 환기하기 위해 – 절대자와 그의 관계에 따라 보편자와 그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지, 보편자와 그의 관계에 따라 절대자와 그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는다(Kierkegaard 1983: 70).
아브라함의 행위를 궁극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보편적 법칙의 관점으로는 이해불가능한 신과의 어떤 직접적 관계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반복(Repetition) 안의 반복과 믿음의 계기와의 관련성을 명확히 하는데, 이번에는 욥에 관한 논의를 통해서 그렇게 한다. 욥 또한 신의 시험에 든 자이다. 그의 신앙은 불행으로부터 신이 그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식으로 악을 증거하는 불운을 겪게 만든다. 이 경우에 욥의 구원은 아브라함에게로 이삭의 되돌아 옴을 되비추는 방식으로 반복에 상응한다.
따라서 결국에 여기 반복이 있다. 언제 그것이 발생하는가?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말하기 힘들 것이다. 욥에게 그것은 언제 발생했는가? 모든 사유가능한 인간의 확실성과 가능성은 불가능하다. 조금씩 그는 모든 것을 잃으며, 이에 따라 현실적인 한에서 점차적으로 사라지길 희망한다. 이것은 화해와는 거리가 멀고, 그와 대적하여 오히려 점점 더 강력해지는 증언을 수용하는 것이다. 직접적인 측면에서, 모든 것이 상실된다. 그의 친구, 특히 빌닷(Bildad)은 단지 하나의 방식만을 아는데, 그가 흘러넘침의 순간에 감히 반복을 희망하는 형벌을 감당하는 것이다. 욥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궁지와 난문이 서로 결속되며 천둥에 의해서만 합쳐질 수 있게 된다(Kierkegaard 1983: 212–13).
따라서 반복은 이성의 범주들이 바깥으로 전락하는 그 순간(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천둥이 들어오는 순간)이다. 이것은 어떤 물리적 반복이 아니다(성경은 양적 동일성의 영역 바깥으로 반복을 놓으면서, 우리에게 욥이 그가 잃은 것을 두 번 되찾는다고 말해준다). 그는 칸트가 그랬던 것처럼, 보편성에 기반하기 보다, 들뢰즈가 그랬던 것처럼 특이성(singularity)에 기반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니체 그리고 페귀의 철학을 요약하면서, 들뢰즈는 반복의 철학을 위한 네 가지 규준을 제시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서로 평행하게 작용하지만, 통약불가능한 것으로서, 자연법칙, 도덕법칙 그리고 습관이라는 양태들이다.
1. 반복 자체를 새로운 어떤 것으로 만들기. 반복을 검사, 선별, 선별적 검사와 연결하기. 그리고 반복을 의지와 자유의 최상의 대상으로 삼기(DR 6/6).
이 경우에 검사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바치라는 신의 명령이다. 아브라함은 사실상 불가능함에도 이삭을 되찾으리라 믿는 한에서 불합리한 힘에 따르는 반복을 믿는다.
2. 따라서 반복을 자연 법칙에 맞세우기(DR 6/7).
키에르케고르의 경우 이것은 다시 한 번 분명하다. 그에게 반복이란 이해 영역의 바깥에 놓이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가능한 과학적 탐구의 영역 바깥에 놓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적어도 과학적 연구작업에 의해 전제된, 하지만 그것의 바깥에 놓인 일련의 반복을 설명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3. 반복을 반복을 선과 악을 넘어서 사유, 즉 윤리학을 애매하게 만드는 그 지점까지, 도덕법칙에 맞세우기(DR 6/7).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행위가 윤리적 관점으로부터 이해불가능한 한에서, 그의 이삭 희생제의에 대한 의지는 신의 명령에 따르는 윤리적 원리들의 애매함을 재현한다. 따라서 신의 ‘유혹’은 칸트의 검사, 즉 정언명령에 대한 직접적 대안으로 드러난다.
4. 반복을 습관의 일반성 뿐 아니라 기억의 특수성에도 대립시키기(DR 7/8).
일단 반복이 근원적인 단절의 맥락에서 이해된다면, 그것은 습관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개념, 즉 반복에 관한 범례와 같은 개념은 더 이상 중요하게 고려될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사항을 그의 『불안의 개념』(Concept of Anxiety) 초고에서 다소 애매하게 짚어낸다.
진실성은(Earnestness) 독특성을 획득한다. 습관과는 다른 진실성, 이것은 자기-의식의 사라짐이다. 그러므로 본래적인 반복은 이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Kierkegaard 1983: 327).
우리가 알게 될 것처럼, 들뢰즈가 법칙에 의해 취급되는 일련의 표면적인 반복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 보다 심층적인 반복이다. 들뢰즈는 궁극적으로 반복에 관한 키에르케고르의 이런 사유를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주체(아브라함)와 객체(신) 사이에 전제된 관계가 물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세계에 너무 과중하게 기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에르케고르는 반복의 본성에 대한 근원적 사유의 필요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들뢰즈의 사유를 미리 보여준다.
0.5 외연과 내포(11-16/13-18)
외연과 내포는 반복과 일반성 사이의 세 번째 차이를 사유하기 위해 들뢰즈가 끌어온 개념이다. 이 개념들은 (자연) 법칙, 수행(도덕법칙)뿐 아니라, 재현에서도 대립된다. 객체를 재현한다는 것은 두 가지 과정에 핵심인데, 들뢰즈가 비판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즉 재현적 기억과 재인과정(recognition)이 그것이다. 기억의 경우, 재현은 상기되는 대상이 현전하지 않기 때문에 요청된다. 재인의 경우, 몇몇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가 객체 자체와 그 객체의 내적 재현을 비교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재현을 우리는 어떻게 구조화할 것인가? 우리는 보통 객체를 실체와 속성의 조합으로 이해하며, 이러한 객체들을 주체와 속성들이라는 평행하는 개념적 항목들로 사용하는 것으로 기술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속성들을 주체에 귀속시키는가에 따라, 우리는 어떤 객체들이 개념에 귀속되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그것이 어떤 속성을 가지는 객체에만 적용된다고 규정함으로써 개념의 적용범위를 제한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동물의 개념은 동물성의 속성을 가진 그러한 개별체들에만 적용된다. 속성을 확장함으로써, 우리는 그 개념에 귀속되는 개별체들의 모둠을 좁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이성적 동물이라는 개념은 그 속성들이 귀속되는 바 그룹들의 하위 집합을 아우르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더 적은 개별체들의 집합(전통적으로는 인류에 해당되는 집합)을 포괄한다. 이러한 개념의 두 가지 특성들은 포르-로이열 논리(Port Royal Logic)에서 정의되는 것으로서, 아래와 같이 19세기 중반까지 유력한 논리학 교과 내용으로 간주되었다.
나는 어떤 관념의 내포를 그것이 그 자체로 포함하는 바, 그리고 그것을 파괴함이 없이는 그것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바, 그것의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어떤 관념적인 삼각형의 내포는 연장, 형태, 세 개의 선들, 세 개의 각도들 그리고 두 개의 강각(rigid Angles)에 대한 세 개의 각도들의 동등성 등등이다.
나는 어떤 관념의 외연을 그 관념이 적용하는 그것들의 주체들, 또한 유적 개념의 하위부류로 불리워지는 주체들이라고 부른다. 유적 개념이란 그것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보다 상위의 것으로 일컬어진다. 이를테면 일반적인 삼각형이라는 관념은 모든 다른 종류의 삼각형들에 확대적용될 수 있다(Arnauld 1850: 49).
따라서 하나의 개념이 포괄하는 객체들의 부류는 그것의 내포와 외연에 의해 지배된다. 객체는, 만약 그 개념이 객체를 내포한다면, 다시 말해 만약 그것이 개념의 모든 속성들을 가진다면, 어떤 개념 아래에 속하게 될 뿐이다. 외연이란 얼마나 많은 객체들이 그 개념에 속하는지를 결정한다. 이제 개념의 외연과 내포라는 것이 반비례한다는 것이 명백해 질 것임에 틀림없다. 즉, 어떤 개념은 보다 많이 특수화할수록, 그것에 따라 더 적은 객체들이 포괄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개별적인 사건을 상기하거나 어떤 개별적인 객체를 재인해야 한다면, 그 개념의 외연은 1임에 틀림 없다. 즉 그것은 고려중인 개별적 경험이나 객체를 지칭해야 한다. 하지만 외연과 내포가 반비례하기 때문에, 이것은 개념의 내포는 무한해져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들뢰즈는 모든 객체들이 “통속적인 라이프니츠주의”(DR 11/13)에서처럼 개념에 따라 특유하게 규정될 수 있다는 생각을 피력한다. 이에 따라, 그는 이것이 식별불가능한 것들의 동일성의 원리와 같은 어떤 것을 함축한다고 말하는 것이다(만약 두 사물이 동일한 속성을 공유한다면, 그것들은 실재로 동일하다). 만약 두가지 상이한 객체들이 같은 속성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반복 자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질문은 각각의 객체가 다른 것들과 개념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불가능한가라는 것이 된다.
들뢰즈의 주장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 경우에 개념들은 객체들을 완전히 특수화하는 것으로부터 “봉쇄”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이것을 통해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간파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자주 공들여서 개념적 한정을 “봉쇄”한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우리가 예컨대 어떤 종을 정의할 때, 어떤 사물에 대한 일련의 속성들을 적용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말을 정의하면서, 그것이 포유류이고, 발굽이 있으며, 초식동물 등등이라는 속성들을 적용한다. 이 경우에, 우리는 어떤 [특유한] 개체를 정의하는 개념을 전개하길 원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동시에 한 집단의 개체들(말들)에 대해 논할 수 있도록 하는 개념을 원하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한 말을 분류해 내기까지, 계속해 나가기 보다, 이러한 한정 절차를 멈추고, 우리는 들뢰즈가 “인위적 봉쇄”(DR 12/14)라고 부르는 바를 도입한다. 인위적 봉쇄를 도입함에 따라, 우리는 거의 일반적인 개념들을 획득할 것이다. 따라서 포유류 개념에 보다 많은 한정들을 부가함으로써(그리고 이에 따라 그것의 내포를 증가시킴으로써), 그것은 포유류에 있어서 점점 더 많은 종적 부류에 적용될 것이다(그것의 외연은 줄어든다). 여기서 우리는 차이에 반복을 연관지을 수 있다. 이러한 ‘말’이나 ‘포유류’ 개념과 순수하게 관련됨으로써 우리는 반복을 차이에 관련시킬 수 있다. 즉 반복은 의문시되고 있는 개념의 바깥에 놓인 어떤 차이에 근거하게 된다(DR 13/15). 다시 말해 우리가 오로지 개념적인 ‘말’에 대해 논하는 한에서, 모든 특정한 말이 정확하게 같은 방식으로 말이므로, 반복이 가능하다. 그것들 사이의 차이는 개념 ‘말’ 안에 있지 않으며, 다른 개념 안에 있다(아마도 그것은 다른 색깔 또는 크기이거나, 상이한 역할들에서 사용된다). 그러므로 반복은 개념 없는 차이이거나 그 개념의 바깥에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 개념을 더 멀리까지 규정내릴 수 있게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개념 내부에서 차이를 야기하게 된다. 따라서 그것은 일종의 인위적 봉쇄인 것이다. 하지만 질문은 자연적 봉쇄가 있는냐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두 가지 대상 사이의 차이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가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자연적 봉쇄 또는 어떤 가능한 개념화를 벗어나는 차이가 존재하는 세 가지 예들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물리적인 또는 언어적인 원자론이다. 두 번째는 억압기제다. 우리는 이로써 정확히 트라우마를 반복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것을 현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예는 칸트에 의해 전개된 비합동적 등가물(incongruent counterparts)의 사례다. 두 번째 사례는 이 책의 2장에서 길게 다루어지기 때문에(2.9–2.12), 나는 여기서 첫 번째과 세 번째 사례만을 (간명하게) 취급하고자 한다
첫 번째 사례에 관한 들뢰즈의 사유는 보다 불명확하지만, 그가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그 내포가 유한한 특정 순간에 취해진 하나의 개념이 시공간 안에 강제적으로 장소를 할당받는다고 가정하자. 즉 보통 외연=1에 상응하는 하나의 실존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때 그 어떤 내포의 증가 없이, 류나 종이 지금 여기(hic et nunc) 존재하게 된다고 말할 것이다(DR 12/14).
단지 손쉬운 그룹화 방식인 종이라기 보다, 그것은 이제 규정적 실존을 가지는 어떤 것이 된다. 이때 각각의 객체들은 절대적으로 동일하게 존재하는 개념 아래에 놓인다. 들뢰즈는 그 예로서 여기에 원자와 같은 어떤 것을 생각한다. 원자는 그것들이 개체들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에 동일(개념적으로 구별불가능)하다. 어떤 종들의 경우, 만약 우리가 종의 특정 구성원을 구분하고자 한다면, 더 많은 한정들을 부가할 수 있는 반면, 단순하게 상이한 원자들 간에 더 많이 만들어질 수 있는 개념적 구분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 각각의 원자는 정확히 이전 원자의 반복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동일한 개념 아래에 여전히 놓여 있지만,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자가 실재로 서로 간에 동일한지 아닌지 질문을 던지지만, 들뢰즈는 그 경우가 단어들의 경우에 훨씬 더 결정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즉 우리는 동일한 단어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단어에 있어서 각각의 특정한 사례가 서로 간에 개념적으로 구별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우리는 각각의 사례를 개념적으로 특정할 수 없으며 그래서 완전한 개념적 한정이 있다는 “통속적 라이프니츠주의”의 주장은 무너진다. 두 번째 사례인 반복에 관한 프로이트의 사유은 잠시 제쳐두고, 나는 마지막 사례인 개념과 직관의 구별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 구별은 『차이와 반복』의 이후 내용들을 통틀어 들뢰즈 논증의 중심에 놓일 것이다.
0.6 비합동적 등가물(13–14/15, 23–7/26–31)
비합동적 등가물에 관한 칸트의 논증은 공간의 본성에 대한 뉴턴(그리고 클라크)과 라이프니츠 간의 논쟁에 처음 도입된다. 뉴턴과 라이프니츠 논쟁의 핵심적인 내용 중 하나는 공간이 절대적인지 또는 그것 안에 함유된 객체들에 상대적인지였다. 뉴턴에 따르면 우리는 절대적 공간과 상대적 공간을 구별할 수 있다.
절대적 공간이란 그 자신의 본성에 있어서 외적인 어떤 것과는 관계 없이, 언제나 유사하게 그리고 운동불가능하게 남아 있다. 상대적 공간은 몇몇 운동가능한 차원 또는 절대적 공간들의 규준이다. 절대적 공간은 그 물체들의 위치에 따라 우리 감각들이 규정하는 것이고, 보통 어떤 운동불가능한 공간으로 취급된다. 이와 같은 것은 지구를 기준으로 한 위치에 따라 결정되는 바, 지하의, 공기중의, 또는 천상의 공간 차원이다(Newton 1934: Defs., Scholium II).
그래서 뉴턴에 따라, 우리는 실천상에서 객체들이 다른 객체들과 가지는 관계에 따라 그것의 위치들을 결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에게 준거틀은 관성, 즉 어떤 준거틀 안의 모든 객체들이 불변하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는 상대적인 준거틀과 절대적인 준거틀 사이를 차이화하는 것조차 매우 어렵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뉴턴은 이러한 존재 가능한 객체들 사이의 관계들의 질서들 안에, 논리적으로 객체 자체의 존재에 앞서는 어떤 절대적 준거틀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뉴턴의 물리학에서 절대 공간은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 장소이다. 그것은 객체들 간의 관계의 가능성을 기초짓는다.
절대 공간에 대한 뉴턴의 분석에 반대하여, 라이프니츠는 (적어도 처음에는) 공간이 부차적이며, 파생적인 개념으로서, 객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로부터 출현한다고 본다. 그는 절대 공간의 문제적 본성을 드러내는 여러 논증을 제시한다. 첫째, 그것은 실체라고도 속성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역실체(contra substances)로서, 인과적으로 내부적이며 역속성(contra properties)으로서, 객체에 기반하기보다 선행한다. 두 번째, 절대 공간 개념은, 우리가 모든 사건이 이유 또는 원인을 가져야 한다는 라이프니츠의 관점을 생각할 때, 문제적이다. 만약 공간이 그 안에 있는 사물들로부터 독립적이라면, 그것은 우주가 어째서 거기 있으며, 예컨대 그것이 최근 위치의 3피트 왼쪽에 있는 것은 우주가 아닌지를 해명할 수 없게 된다. 셋째, 만약 하나의 공간 지점과 다른 지점을 구별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때 우리는 각각의 공간적 지점이 모든 다른 것들과 동일하며, 따라서 동일하기 때문에, 공간은 단지 하나의 점이다.
라이프니츠는 아래와 같이 대안적 관점을 제시한다.
나는 여러 번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공간이 시간과 마찬가지로 순수하게 상대적인 어떤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공간은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현존(co-existences)의 질서이며, 연속성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공간이란 가능성의 측면에서 그것들이 함께 존재하는 한에서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의 질서를 함축하며, 그것들의 특정 존재 방식과 연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여러 사물들을 함께 볼 때, 우리는 사물들 그 자체 사이의 이 질서를 파악한다(Leibniz and Clarke 2000: 15).
우리는 다음 장에서 라이프니츠로 돌아올 것이지만, 지금으로서 우리는 단지 그가 공간이란 객체들의 진정한 개념적 함축이라는 것에 관한 왜곡된 관점이라고 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공간은 ‘사물들의 질서’에 부수적이며, 이러한 개별체들 사이에 함축된 관계들을 보게 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공간은 출현한다(emerges). 왜냐하면 우주의 지성적 본성은 오직 유한한 주체에 의해 혼란스럽게 파악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결코 세계의 실재적 형상이 아닌 것으로서의 개념적 한정들이 공간에 앞서게 되며, 이는 뉴턴의 절대공간론을 거짓으로 만든다. 이와 병행하여, 라이프니츠에게 실재성이 기초 요소인 모나드는 어떤 공간적 속성들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공간적 속성이 전체적으로 부수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속성들은 라이프니츠가 “잘-정초된 현상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그것들은 실재안의 개념적 항으로 존재하는 것과 유비적이다. 들뢰즈에게서 라이프니츠로부터 취한 주요 지점은 우리가 공간 안에서 마주치는 모든 속성들이 개념적 특성들 안에서 순수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때 각각의 객체가 개념적으로 모든 다른 것들과 구분될 것이기 때문에, 반복은 불가능하다.
칸트는 비합동적 등가물 논증을 그의 전-비판기 저작인 『공간적 영역들의 미분을 위한 궁극적 기초에 관하여』(Concerning the Ultimate Foundation for the Differentiation of Regions in Space, 1768)에 처음 도입한다. 여기서 그의 목적은 공간에 관한 뉴턴적 관점이 타당하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첫 번째로 창조된 것이 인간의 손이라고 상상해 보면 그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오른손이거나 왼손임에 틀림없다. 하나를 생산하기 위해 어떤 상이한 창조 활동이, 그것의 등가물이 생산될 수 있는 방식으로, 필연적으로 그것으로부터 나온다.
만약 우리가 근대적 개념을 수용한다면, 특히 독일 철학자들의 경우, 공간은 서로 나란히 존재하는 물질의 부분들의 외적 관계로 구성될 뿐이며, 따라서 모든 공간은 이미 사용된 예를 들자면, 이러한 손이 차지하는 그 공간일 것이다. 하지만 부분들 간의 관계에서 각각은 서로 간에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른 손이든 왼손이든 간에, 손은 그와 같은 성질과 관련하여 완전히 비결정적일 것이다. 즉 그것은 인간 신체의 어떤 쪽이든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Kant 1968: 42–3).
칸트가 말하는 바는 이런 경우 손에 관한 개념적 규정이란 부분들 간의 일련의 관계들인 바, 어느 손이 왼손이고 오른 손인지 결정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둘 모두에서 관계는 동일하며, 따라서 개념적으로 두 손은 동일하다. 두 손이 왼쪽 또는 오른쪽 손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러므로 어떤 개념적 한정이 아닌 ‘내적 차이’가 존재함에 틀림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손의 본질적 속성이 객체가 점하고 있는 그 공간의 본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함으로써 이 점을 보다 명확하게 할 수 있다. 손 대신에, 만약 우리가 이차원 평면에 놓인 삼각형의 예를 취한다면, 그것은 거울상을 포함하기 위해 뒤집어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삼차원 공간에서 같은 삼각형에 대해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삼각형을 뒤집을’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그 거울상에 조응하게 된다. 그러므로 공간의 차원성은 등가물이 조응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결정한다. 이는 손의 본질(handeness)이 공간의 속성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순수 개념적 관계들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로 칸트는 뉴턴적 개념에 기댄 공간에 관한 그의 초기 라이프니츠식 해석을 기각했다.
칸트의 이후 비판철학에서, 공간이란 경험적으로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초월적 이념으로 드러난다. 즉 공간에 관해 우리가 언급한 바는 진리일 것이지만, 그 진실은, 공간 자체가 절대적이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을 조건짓는다는 사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칸트의 체계, 그리고 세계에 관한 아프리오리한 지식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그 체계의 주장은 세계에 관한 지식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두 가지 능력들을 구분하는 것에 의존한다. 즉 지성은 능동적인 표상작용을 하며, 직관은 수동적인 현전작용을 한다. 비합동적 등가물 논증은 공간이 개념항들 안에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구별을 위한 정초작업을 하는 것이다. 공간은 직관이거나 감각의 양상이며, 이로써 우리는 세계를 파악한다. 『순수이성비판』의 초월적 감성론에서, 칸트는 직관에 관해 두 가지 주장을 한다. 즉 그것은 아프리오리하며, 비-개념적이라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공간과 시간의 이러한 본성적 차이, 그리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적 이해에 속하는 그것은 아마도 칸트 전체 철학의 가장 혁신적인 측면으로 제시된다. 『차이와 반복』의 2장을 살필 때 볼 것처럼, 칸트의 이론 철학의 중심 문제, 즉 본성적인 차이로 주어진 직관적인 것들을 어떻게 개념과 관련시킬 수 있는가라는 그 문제가 들뢰즈 자신의 연구작업과 유사하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것이다.
0.7 결론: 차이의 세 가지 형식들
(적어도) 세 가지 다른 차이 개념이 서문에 있으며, 이를 간명하게 재서술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첫째, 개념적 차이가 있다. 이것은 재현될 수 있는 차이다. 여기서 류는 인위적 봉쇄에 의해 생산되는 종들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개념들에 단순히 점점 더 정확한 규정들을 더해감으로써 발견할 수 있는 일련의 개념적 차이들이다. “두 알갱이의 먼지는 절대적으로 동일하지 않으며, 두 손도 같은 구별점들을 가지지 않고, 두 개의 권총은 같은 방식으로 장전하지 않는다”(DR 26/29).
차이의 두 번째 종류는 비합동적 등가물들 자체의 차이이다. 이것은 개념적 영역 바깥에 그 원리를 가지는 차이이다. 즉 우리는 왼손과 오른 손의 차이를 어떤 직접적인 경험에 따라 말한다.
칸트는 세 번째 차이에 대해 실마리를 주지만,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이 차이는 비합동적 등가물에 발생하는 차이다. 칸트는 이 차이를 『공간적 영역들의 미분을 위한 궁극적 기초에 관하여』에서 제시한다.
신체의 형상이 다른 쪽과 완전히 유사할 수 있다는 두 손의 예시는 매일매일의 일상으로부터 이미 분명해 보인다. 이는 둘 모두에서 외연의 크기가 정확히 동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어떤 내적 차이가 남아 있다. 즉 하나를 포함하는 표면은 다른 것을 포함할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므로 이 차이는 내적 원리 위의 잔여물처럼 존재해야 한다(Kant 1968: 42).
칸트의 사유에서, 출현하는 내재적 차이를 허용하는 내적 원리란 공간 자체의 본성이며,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그의 비판서들에서 발견했다시피, 공간이 절대적이든, 칸트 초기 저작에서처럼 초월적이든 간에 동일한 것으로 남는다. 들뢰즈의 경우에는 공간적 차이 자체의 수준에 남아 있다기 보다, 왼쪽과 오른쪽 손의 본질과 같은 경우가 애초에 등장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그 차이의 원리의 작용에 관한 초월적 사유를 제공하길 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비합동적 등가물 자체의 표면적 반복 뿐 아니라, 여기에는 더 심오한 반복, 즉 이러한 반복을 야기하는 “특이한 주체, 내재성 그리고 타자성의 핵심, 타자성의 깊이”(DR 24/27)가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들뢰즈는 칸트가 시작점으로 취한 어떤 공간성의 발생을 사유하고자 한다.
라이프니츠와 칸트 사이의 관계는 『차이와 반복』의 기획을 명쾌하게 드러낸다. 보통 우리가 차이를 바라볼 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지를 가진다. 우리가 그것을 라이프니츠의 경우에서처럼 개념적 차이로 바라보면서, 정말로 무엇이 차이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칸트의 경로를 택해서 비-개념적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따라서 우리의 탐구의 목적으로 이끄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에 대해 판정할 만한 (개념적) 도구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살펴 본 두 경우에서, 원자든 공간이든 간에 반복의 원인은 설명되기 보다, 단순히 주어진 것이다(그리고 이것은 프로이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궁극적으로 그는 우리가 법칙에서 발견하는 그런 종류의 물리적 반복을 전제할 것이다). 그러므로 들뢰즈의 기획은 우리 탐구의 목적으로서 개념적인 것도 비-개념적인 것도 아닌 것으로 이해되는 차이의 원리에 대한 탐구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차이의 사유를 발전시킬 것이다. 이것은 칸트와 원자론자들에 의해 전제되지만 설명되지는 않은 그런 종류의 차이를 우리에게 설명해 줄 것이다. 이 새로운 차이의 개념을 전개하는 것이 『차이와 반복』 1장의 주요 목표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