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from 들뢰즈 사전들)
지난 수 십 년 동안 루이 알튀세르(Louis Arthusser),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 들뢰즈와 여러 사람들은 끊임없이 바류흐 스피노자의 사유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 왔다. 이러한 연구들에서 스피노자의 유물론적 존재론은 어떤 하나의 틀거리처럼 사용되어 왔다. 이때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플라톤적 형이상학적 공리들, 데카르트의 인식론 그리고 칸트와 헤겔의 초월적 합리주의에 의해 포획되지 않기 위해 활용되었다. 또한 이러한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스피노자를 칼 맑스의 보다 중요한 범주들과 원리들 몇몇을 재개념화하기 위한 원천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이런 방식의 스피노자의 부활과 더불어 스피노자에 대한 보다 기술적인(technical) 주석이라는 분야에서도 발전이 있었다. 이 분야에서는 우선 마르시알 게루(Martial Gueroult)와 알렉산더 마트롱(Alexander Matheron)의 방대한 저작들이 있다. 들뢰즈 자신은 스피노자를 두 개의 텍스트에서 다루었는데, 하나는 그의 1968년 박사 학위 부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D 1992)이고 다른 하나는 1970년의 보다 짧은 텍스트인 『스피노자: 실천 철학』(D 1988c)이다. 이 두 개의 텍스트 외에도 들뢰즈의 모든 저작에는 스피노자의 사유가 관류하고 있으며, 이러한 특성은 가타리와의 공저에서도 드러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진리와 덕에 대한 판단을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어떤 것으로 만든 첫 번째 사상가로 조망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게 도덕적 흠결, 책임성, 선과 악의 개념들은 그러한 권위에 대해 복종하느냐 불복종하느냐에 대한 어떤 사회적 배치(disposition)로부터 나오는 한에서만 실재성을 가지는 것이다. 국가는 개인이 복종하는 것으로 비춰진다면, 그를 추방할 수 없다. 그리고 들뢰즈는 스피노자가 국가와 그것의 기능들의 전망 바깥에 사유를 정립한 최초의 철학자라고 확신한다. 『스피노자: 실천철학』에서의 들뢰즈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복종 뿐 아니라 비난을 피하면서 선과 악을 넘어선 삶의 이미지, 즉 장점이나 흠결이 없는 엄격한 순수성을 유포하는 사유의 역능을 추구한다’(D 1988c; 4). 스피노자에게 삶이란 환원불가능한 긍정성이다. 왜냐하면 삶이란 국가나 삶이 출현하는 환경에 의해 제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약 삶이 성직자, 판사 그리고 군인들의 방해를 받는다면, 강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방해자들은 모두 내적인 사도-마조키즘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자들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들뢰즈의 스피노자 용법은 명백히 선별적이다. 다수의 플라톤과 헤겔이 존재하는 것처럼 많은 스피노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들뢰즈의 스핀자는 니체의 눈으로 조망된 스피노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니체의 영원회귀의 독트린이 그러하다.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에게 영원회귀란 우리가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계속 되풀이해서 삶을 경험하기를 원하는 의지를 의미한다. 이와 유사하게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고려하는 곳에서, 슬픈 정념의 희생자가 되길 원하지 않는 사람 즉 지복을 갈망하면서, 그의 행위들이 후회의 계기가 될 수 없기를 원하는 어떤 사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경우에 고려되는 개인은 어떤 다른 삶을 사는 계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둘 모두 행복이 반복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는 두 가지 기본적은 역능이 있는데, 하나는 삶을 파괴하는 힘으로서, 이것은 타자에게로 방향을 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행한 의식(bad consciousness)으로서, 내부로 향하는 것이다. 오로지 실험과 삶을 위한 새로운 취향을 유지할 능력이 있는 어떤 새로운 종류의 삶만이 이러한 부정적이고 반응적인 정념들을 넘어설 수 있다. 스피노자의 최초 저작인 『에티카』는 ‘윤리학’이라는 이름 하에 이러한 새로운 삶을 이끌어 내기 위한 어떤 지성적인 틀을 묘파한다. 이 새로운 존재론에서, 신체는 그것의 속도들과 지연들(slownesses)에 의해 정의되지, 그것이 형상들이나 기능들로 정의되진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오래된 아리스토텔레스 평이상학에 속하는 것으로 계몽주의 이전까지 철학을 지배해 온 것이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차이나는 신체들 간의 연결이다. 각 신체들의 속도와 지연이 진행되면서 각각의 연결 또는 연결의 집합은 연결들의 교차점들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때 정점에 이른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된 지식(인식)은 본질적으로 물질적이며 우발적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개체도 그들의 신체적인 감응들이 어떻게 진행될지, 다른 개체들과 역능들과의 관계에서 그것들이 무엇을 포함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스피노자에 대한 친밀성은 그들의 다음과 같은 공통의 인식으로부터 나온다. 즉 오늘날의 철학이 새로운 지식, 즉 새로운 과학들이 전반적으로 폭발적 양상으로 발생하는 것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이 새로운 지식의 출현과 연관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지식은 ‘비표준적인’ 논리학과 변화와 관계의 위상학들의 창조에 기반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어떤 상황을 취급하기 위해 고안되어진 것인데, 이는 불규칙하거나 부수적인 성격을 가진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유목적 사유’, ‘리좀학’, ‘분열분석’이라고 부른 것이 그런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논리학과 위상학은 변화와 과정이라는 구조적 원칙과만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표면, 직조, 리듬, 연결접속 등등과도 연관된다. 이러한 개념들은 줄(strings), 매듭들(knots), 흐름들, 미로들, 강도와 되기(생성)와 같은 개념들과 관련하여 분석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들뢰즈에 따르면 비록 라이프니츠, 니체와 베르그송이 있다 하더라도 스피노자야말로 이러한 ‘유목적 사유’의 탁월한 선도자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를 전유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는 불가피하게 선별적이다. 스피노자의 합리주의는 들뢰즈의 해석에 따라 완화되며, 비록 스피노자가 국가권력에 관해 비판적이라 할지라도, 들뢰즈와 가타리의 아나코-맑시즘적인 이론적 전제를 쉽게 공유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러 다른 사상가들의 사유에 의해 복잡한 방식으로 매개된 스피노자의 엄격한 내재주의와 유물론이 들뢰즈의 전저작에 매우 많이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명백하다.
- Kenneth Surin, ‘SPINOZA, BARUCH(1632-77)’,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260-62
들뢰즈는 자주 그의 사건의 윤리에 대한 (스토아적) 기여로 인해 상찬된다. 우리가 사건의 생성을 가치있게 보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발생하는 그 사건의 역현행화(counter-actualisation)의 과정을 통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와 더불어 기쁨의 윤리학도 주장한다. 이것은 그가 스피노자와 많은 부분 조우하면서 얻은 결론 중 한 부분이다. 이러한 연구가 연결되어 드러나는 교차지점은 ‘영원회귀’에 관한 니체적인 긍정이다. 이 지점은 들뢰즈 존재론의 핵심 포인트이며 그의 윤리학이 가지는 관건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욕망을 긍정적인 것, 비지향적 강도, 생산하는 연결로 사유한다. 이러한 연결들은 그 다중성(multiplicity)에서 그것들의 기능과 혁명적 성격으로 실재한다. 들뢰즈의 욕망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를 따라 고안된 것이다. 욕망은 코나투스와 마찬가지로 ‘부족’(want)이나 ‘결핍’(lack)이 아니라, 개체가 그 자신의 실존을 보존하기 위해 취하는 노고(effort)를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언제나 코나투스를 촉발하고 촉발되는 그 능력에 따라 결정된 것으로 사유한다. 그러므로 코나투스를 욕망과 마찬가지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행위로부터 우리의 본질을 분리하지 않는다면, 코나투스는 실체의 본질로서, 또는 그것의 역능의 수준으로 이해될 수 있다. 행위들 자체는 어떤 사람의 삶에 대한 긍정과 그의 존재하고자 하는 의지를 구성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본질의 질서에 대해 말하는데, 그것은 강도의 질서이며, 이는 또한 모든 특유한 본질들이 연합하고 상호간에 각각의 생산활동에 대해 응답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연구에서 이러한 질서는 그가 잠재적인 것/실재적인 것의 절합이라는 개념을 사고하는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는 어떤 조직화(organisation)의 질서도 존재한다. 그것은 그 자신의 법칙을 가지는 것으로서, 그 법칙은 존재하기 위해, 그리고 특유한 실체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조건들을 영원히 결정하는 것이다. 이 평면에서, 배치는 무한한 방식으로(ad infinitum) 구성되지만, 모든 배치들이 다른 배치들과 양립가능한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는 어떤 우연한 조우들(encounters)의 질서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신체들은 다른 신체들과 조우하며 몇몇 경우에 한 신체의 특유한 배치들은 그것들이 조우하는 다른 신체들의 특유한 배치아 ‘잘 맞아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함께 서로 간에 감응(affectivity)의 역능을 증가시키게 된다. 하지만 때때로 몇몇 신체들은 다른 신체의 배치와 양립가능하지 않게 되는데, 그때에 그것들은 오히려 반대로 서로간의 역능을 감소시킨다.
욕망을 기쁨으로 사유하는 가운데 들뢰즈는 스피노자에게서 강도의 도식을 가져온다. 욕망이 환각적이지 않는 한에서, 욕망은 그것이 가지는 역능이며, 우리가 이 역능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행위할 수 있게 허용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존재를 병합하는 역능인 것이다. 여기서 전진적 병합과 퇴행적 병합의 구별이 생기는데, 이 구별이 바로 윤리학자에게는 긴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들뢰즈의 스피노자에 대한 충실성은 다음과 같은 것을 논증하도록 추동했는데, 그것은 개체가 자신의 실존을 유지하고 소유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이 능동적 촉발(active affects)의 최대치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과 이어진다는 것이다. 우연한 조우의 질서라는 것은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적합 관념들(inadequate ideas)의 구성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적합 관념이란 그것의 원인이 우리 자신의 역능 안에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어떤 부적합 관념은 하나의 효과를 유발하는데, 이 효과의 적합한 원인은 우리의 것이 아닌 그런 하나의 정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적합 관념은 사유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것의 형상적 원인을 우리 안의 역능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 내부에서 그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때 효과는 그것의 적합한 원인이 우리 자신의 사유하는 역능이고,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행위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기쁨의 정념을 다양하게 누리는데 있어서, 더 이상 우연한 조우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는 인간의 되기-능동(becoming-active, 생성-능동성)에 관한 전반적인 유전학적 현상학이 발견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들뢰즈의 기쁨의 윤리학에 영감을 제공한 바이기도 하다. 우리는 수동적 욕망/기쁨에서 시작한다. 비록 그것이 부적합 관념의 침투에 속수무책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의 행위 역능을 증가시킨다. 그러나 그때 이러한 욕망들과 정념들 덕분에, 우리는 공통개념들(common notions) 또는 적합 관념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능동적 욕망/기쁨은 우리의 행위 역능을 증가시키는 공통개념들을 수반한다. 마침내 능동적 기쁨이 정념들을 대체하며, 새로운 감응의 능력들이 우리를 채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합이야말로 개체의 능동적 삶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슬픔과 빙퉁그러진 모순성까지 지성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정념들의 더 나은 이해를 발전시킬수록 우리의 능동적 기쁨도 증가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들뢰즈의 기쁨의 윤리학이 프리드리히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적합 관념들의 형성을 위한 훈육과정은 우리에게 발생하는 어떤 것의 역-현행화의 과정이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실천이성의 대상(cogitandum)을 대표하는 공통개념의 일반성이 아니다. 그것은 역-현행화 과정을 통해 파악되어야 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우리를 수동적으로 촉발시키는 일(affairs)의 상태에 놓인 슬픔은 사건(event)에 관한 어떤 즐거운 긍정으로 변형되어진다. 수동적 촉발들(정념들)은 능동적인 것으로 뒤바뀌는데, 이 능동적인 것이 바로 단순한 일(affairs)의 상태를 가치전환하고 변형시키는 능력인 것이다.
- Constatin V. Boundas, ‘SPINOZA+ETNICS JOY’,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263-64.
클레르 파르네와 인터뷰에서 문화를 논하는 와중에 들뢰즈는 그 자신 어떤 미출간된 글들이나 지식의 저장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진부한 의미로 ‘교양있는’ 또는 지성적인 기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들이다. 그가 알거나 배운 모든 것들(그것이 ‘높은’ 수준의 문화, 철학 또는 영화든 낮은 수준이든지 간에)은 그저 그가 임의적인 방식으로 행한 것일 뿐이고, 이후에는 모두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그것이 스피노자라고 한다. 비록 이것인 지나가면서 하는 말일지라도, 그리고 들뢰즈가 그가 당시에 매진하던 기획을 완결한 후에 그 스스로 내면화한 다른 철학자들과 작가들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해도, 이러한 언급은 지성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스피노자가 그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스피노자는 들뢰즈가 스스로에 대해 밝혀가는 대화 도중에 나타난다. 즉 ‘교양’있든 말든, 지성적이든 아니든 간에 오로지 이것을 증폭시키는 것에 대해 말하는 와중에).
들뢰즈가 스피노자로부터 막대한 영감을 끌어낸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들뢰즈는 사실상 그의 역작인 『차이와 반복』의 마지막 부분을 스피노자적 의미의 ‘일의성’과 니체적 의미에서의 ‘영원회귀’를 연결하면서 마무리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그 모든 수천 개의 다양한 목소리를 위한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목소리, 모든 물방울들을 위한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바다, 모든 존재자들을 위한 하나의 유일한 목소리가 있다. 이를 위해 각각의 존재자와 각각의 물방울은 과잉의 상태에 도달했어야 했다’(DR 378, 304). 이러한 말들이 아마도 그의 저작에 대한 비판들이 집중적으로 논하는 부분일 것이다. 들뢰즈에 대한 비판적 독자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존재의 함성’이라는 제목을 가진 알랭 바디우의 책을 떠올 것이다. 그는 들뢰즈가 일원론 철학을 주장한다고 본다. 들뢰즈의 존재론에 대한 다른 비판들도 이러한 노선을 따르는데, 토드 메이(Todd May)와 피터 홀워드(Peter Hallward)와 같은 사람들이 여기 속한다.-E.B.Y.
- Eugene B. Young, Gary Genosko, Janell Watson, The Deleuze & Guattari Dictionary, Bloomsbury, 2013, 29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