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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_Poietikes_Demos

#Slavoj_Zizek(1949 ~ )

by Nomadia 2020. 2. 29.

 

<#코로나_바이러스는_킬_빌식으로_자본주의를_강타하고_공산주의의_재발명으로_이끌_수_있다.>[1]

 

 

슬라보예 지젝(#Slavoj_Zizek)

 

 

현재 광범위하게 진행중인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 사태는 우리 사회에 얌전히 잠자고 있던 이데올로기 바이러스의 대유행병에도 방아쇠를 당겼다. 가짜 뉴스, 편집증적인 음모론, 인종주의의 폭발.

 

전염 격리에 대한 잘 정당화된 의학적 요구는 국경 청소를 확고히 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드러난 적들을 격리조치하는 이데올로기적 압력에 반향을 불러 있으킨다.

 

하지만 아마도 또 다른 - 그리고 훨씬 더 많이 유익한 - 이데올로기 바이러스가 유포될 것이고, 원컨대 우리를 감염시킬 것이다. 대안적 사회, 국가체제 너머의 사회, 전지구적 연대와 협력의 형식 안에서 스스로를 실현하는 어떤 사회에 대해 생각하는 바이러스가 그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을 이끌 것이라는 공허한 소리가 최근 자주 들려 온다. 체르노빌 참사가 (고르바초프 자신이 인정했던 바와 같이) 소련 공산주의의 종말을 촉발시켰던 사건이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여기 역설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또한 우리를 인민 안에서 그리고 과학 안에서의 결속에 기반된 공산주의를 재-발명하도록 강제할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 2》의 마지막 장면에서, 베아트릭스는 악한 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서 그를 ‘오지심장파열권(Five Point Palm Exploding Palm Technique)’으로 때려 눕힌다. 이것은 모든 무술 기량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권법기술이다. 이 동작은 목표물의 신체에 있는 다섯 군데의 상이한 타격 포인트를 손가락끝으로 때리는 기술조합이다. 목표물은 다섯 걸음을 걸어 나간 후에, 심장이 터져서 쓰러진다.

 

이 공격기술은 권법 전설 중 일부이며 실재 맞붙는 전투에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영화로 돌아가면, 베아트릭스가 그 동작을 취한 후, 빌은 조용히 그녀와 화해하며, 다섯 걸음을 걷고 죽는다 ...

 

이 공격기술을 그토록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타격과 죽는 순간 사이의 시간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내가 평온하게 앉아 있는 한, 훌륭한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내가 걷기 시작하는 순간, 내 심장이 터져버릴 것이고 내가 죽어 나뒹굴것이라고 내내 깨닫는다.

 

이것이 어떻게 코로나 바이러스 역병이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 몰락을 앞당길 수 있는지에 대해 성찰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 국가의 공산주의정권에 가해지는 어떤 종류의 사회적 ‘오지심장파열권’과 비슷하게, 정부당국은 앉아서, 관찰하고 그리고 격리 동작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사회질서의 어떤 실재 변화(이를테면 인민들을 신뢰하는 것)는 그들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내 변변찮은 의견은 훨씬 더 급진적이다. 즉 코로나 바이러스 역병 확산이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계에 대한 일종의 ‘오지심장파열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껏 우리가 해왔던 방식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신호이며, 어떤 급진적 변화가 요구된다는 의미다.

 

#슬픈_사실, #우리는_파국을_필요로_한다


몇 년 전, 프레드릭 제임슨은 우주론적 파국(지구 생명체를 위협하는 소행성 또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바이러스)에 관한 영화에 있는 유토피아적 잠재력에 주목했다. 그와 같은 전지구적 위협이 전지구적 연대를 탄생시킴으로써, 우리의 사소한 차이는 무의미해지며, 우리 모두가 해법을 도출하기 위해 뭉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여기 우리는, 실재 삶에서 그러하다. 핵심은 우리의 대의명분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 폭넓게 퍼진 고통을 새디스트처럼 즐기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핵심은 어떤 슬픈 사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바로 그러한 기본적 상들(features)을 재사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파국을 우리가 필요로 한다는 것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전지구적 조직화의 첫 번째 막연한 모델은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인데,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진부한 관료적 횡설수설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와 당혹감 없이 선언되는 정확한 경고들을 얻는다. 그러한 기구들에게 보다 수행적인 힘을 주어야 한다.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는 미국에서 그의 공적의료서비스에 대한 찬성 때문에 회의주의자들에 의해 조롱받는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교훈이란 더도 덜도 아니고, 우리가 어떤 식의 전지구적(GLOBAL) 의료보험서비스 네트워크를 함께 구축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지 않은가?

 

이란의 보건부차관 이라즈 하리르치(Iraj Harirchi)가 기자회견장에 나타나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단치 않은 것이라 여기면서 대규모 격리는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는 짧은 연설을 한 몇 일 후,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렸고 그 자신이 격리되었다(그는 이미 첫 번째 TV 출연 동안, 열과 쇠약증상을 보였다).

 

하리르치는 다음과 같이 추가 언급을 했다. “바이러스는 민주적이에요. 그래서 바이러스는 가난한 자와 부자 또는 정치인과 일반 시민을 구분하지 않지요.”

 

이 경우에, 그는 옳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최대의 역설을 비껴갈 수 없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가 밀려 들어 가는 이 전지구적 연대가 일상생활의 수준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밀접접촉을 피하고, 심지어 자기-격리조차 요구하는 엄격한 명령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이러스의 위협에만 직면해 있지 않다. 어떤 다른 파국이 발생하거나 이미 진행되고 있다. 가뭄, 폭염, 엄청난 폭풍우 등등. 이 모든 경우들에서, 대답은 공포/불안이 아니라 일련의 유효한 전지구적 협력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힘들고 긴급한 노고라는 것이다.

 

#우리는_과연_가상현실_안에서_안전할_것인가?


떨쳐내야 할 첫 번째 망상은 미국 대통령 도날드 트럼프가 최근 인도 방문 기간 동안 공식화한 것이다. 거기서 그는 역병이 빠르게 사라질 것이고, 그냥 임계점을 기다리다보면, 삶이 정상으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엄청나게 안이한 희망에 맞서, 우리는 첫 번째로 이 위협이 여기에 여전히 머물러 있으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비록 이것인 사라진다 해도, 그것은 아마 심지어 보다 위험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바이러스 역병이 우리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과 대상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신체를 포함하여, 가장 기초적인 상호작용들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보이지 않게) 오염될 만한 물건들을 건드리지 않고, 손잡이를 만지지 않으며, 화장실 시트나 공공장소의 벤치에 앉지 않으며, 사람을 포옹하거나 악수하는 것을 피하는 것. 우리는 순식간에 일어나는 몸동작에 대해서 조차 보다 조심스러워질 것이다. 이를테면 코를 만지지 말 것, 또는 눈을 비비지 말 것.

 

따라서 우리를 통제하려 하는 것은 국가와 다른 행위주체들만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을 통제하고 훈육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마도 오직 가상현실만이 안전하다고 생각될 것이며, 개방된 공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은 최상위 부자들이 소유한 섬들 따위에만 국한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 가상현실의 수준에서 우리는 지난 수 십년간 ‘바이러스’(virus)와 ‘바이러스 감염’(viral)이 우리의 인터넷 공간을 감염시키는 디지털 바이러스를 대개 지칭하곤 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적어도 그 파괴적 힘(말하자면, 우리 데이터나 하드 드라이브를 파괴하는 힘)이 야기될 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그 말의 본래 문자적 의미로의 커다란 회귀이다. 즉 바이러스 감염이 실재와 가상 둘 모두의 차원에서 나란히 작용하는 것이다.

 

#자본주의_물활론의_귀환


우리가 주시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묘한 현상은 자본주의 물활론, 즉 시장이나 금융자본을 마치 살아 있는 실체들처럼 다루는 관점의 의기양양한 귀환이다. 만약 우리가 대중매체를 접한다면, 거기서 얻는 인상은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하는 것이 이미 죽은 수 천명의 사람들(그리고 죽어갈 더 많은 수 천명의 사람들)이 아니라 “시장이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점점 더 세계 시장의 원활한 진행을 방해하며, 우리가 듣고 있다시피, 성장은 2~3% 하락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시장 메커니즘에 휘둘리지 않을 전지구적 경제의 재조직화의 긴급한 요청이라는 명백한 신호가 아닐까? 우리는 여기서 물론 구공산주의에 대해서가 아니라, 단지 경제를 규제하고 통제할 수 있으며, 필요할 때면 국가의 주권에 제한을 가할 수도 있는 어떤 종류의 전지구적 조직화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들은 이전처럼 전쟁에 되떨어지는 것에 저항하면서 그것을 할 수 있으며, 그제야 우리 모두는 의료적 전쟁 상태에 효과적으로 접근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전염병의 몇몇 잠재적으로 유익한 측면에 주목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전염병의 상징들 중 하나는 커다란 여객선들에 붙잡힌(격리된) 승객들이다. 나는 그와 같은 배들이 가진 선정적 측면에 대한 좋은 퇴치법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단지 고립된 섬이나 다른 외진 휴양지를 여행하는 것이, 마치 수 십년 전에 비행기로 가야 했던 것처럼, 다시 극소수의 부자들이 가진 특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동차 생산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받는데, 이는 그리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우리는 개인 운송수단의 남용을 대체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도록 강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목록은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최근 헝가리 수상인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an)은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유민주주의와 같은 그런 것은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자란 졸업장을 받은 공산주의자일 따름이지요."

 

진실이 이와 반대라면 어쩌겠는가? 만약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자들’이라는 말로서 우리의 자유를 돌보는 사람들을 의미한다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말은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위기에 봉착할 때, 오로지 급진적인 변화들만으로 이러한 자유를 구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어쩔 것인가?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그들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여전히 자각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졸업한 자유민주주의자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의 자유가 위협당하는 이유를 심각하게 공부했고 오로지 급진적인 변화만이 그 자유를 구출할 수 있다고 깨달은 그런 자유민주주의자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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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글은 지젝의 기사 전문 번역이다. 원문링크: https://www.rt.com/…/481831-coronavirus-kill-bill-capitali…/